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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의 장미(I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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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좌 스크랩 58강 열왕기하 17장-23장 율법책을 듣고 회개한 요시야, 그의 신앙 개혁
최재구 추천 0 조회 57 11.08.09 08: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자, 거기 우리, 열왕기하서 17장을 봅시다. 열왕기하서 17장을 보면, ‘유다왕 아하스 12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 9년을 치리합니다.’ 역시 이제 여호와 보시기에 또 악을 행하는 데요,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같이 악독하게 하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호세아를 볼 때, 이 호세아는 북왕국의 마지막 왕 호세아에요. 마지막 왕도 호세아이고, 마지막 예언자도 호세아입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살만에셀이란 사람이 올라왔는데요, 이 사람은 세계사에 보면 살만에셀 4세라고 되어 있어요.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항복하고 조공을 또 바치다가 배반을 합니다. 저가 애굽왕 소라고 하는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않으니까,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하는 걸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올라와서 온 땅에 두루 다니면서 약탈하고, 그리고 사마리아 하나만 딱 남았을 때, 그 사마리아성을 3년을 에워싸요. 옛날 사람들 인내심 대단하죠? 한 성을 에워싸고는 그 성에 어떤 양식이나 보급이 차단되게 해 놓고는 안풀어 줘. 3년 동안. 안에서 다 굶어죽을 판되면 항복하겠지 하고, 말이 3년이지, 4박 5일도 힘든데, 3년을 에워싸고 있는 거야. 안풀어 주고. 결국은 안에 양식이 다 끊어지면 항복하는 거죠.

 

그래서 호세아 9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서 앗수르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여러 고을에 쩔쩔쩔 흩어 버렸어요. 다 흩어버리고 또 수많은 사람이 죽고, 그리고 더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 앗수르 사람들을 잡아다가 사마리아 고을에다가 바꿔치기 해서 심어버렸어요. 식민정책을 완벽하게 하는 거죠.

 

그런데 원인을 뭐라고 보냐면, 17장 15절23절을 보겠는데요.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 열조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하사 본받지 말라 하신 사면 이방 사람을 본받아 살아가지고 망하는 것이고,’ 23절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를 보내어 하신 말씀을 그걸 듣지 않다가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제하여버리고,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미쳤더라.’

 

결국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언약은 레위기이죠. 시내산 언약을 지키지 않아서 결국은 이 모양이 되었다 하는 얘기를 해요. 그런데 17장 24절을 보면,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서 그 여러 성에 와서 사는데요, 저희가 처음으로 거기 거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 고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여기서 사자(使者)가 아니고 사자(獅子)입니다. 라이언. ‘사자들을 그 가운데 보내시매 몇 사람을 물어 죽였어.’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보고서를 내기를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이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해서 이 땅 신 여호와을 섬기지 않았더니, 그 신이 우리에게 맹수를 보내어 우리를 물어죽입니다. 그러니까 앗수르 왕이 뭐라고 답장했느냐? ‘아 이 바보들아, 그 땅에 가서 살면, 그 땅 신을 섬기지 그래. 그 섬길 줄을 모르거든, 우리가 지금 거기서 잡아온 사람 중에 여호와 섬길 줄 아는 사람을 불러모셔서 배워가지고 여호와를 섬겨.’ 여러분, 세상에 맹수도 협조적이고, 앗수르 왕도 선교하도록 도와주는데, 문제는 교사가 없어. 교사가. 그래서 그 중에서 너 포로 잡혀온 사람 중에서 너희 중에 혹시 여호와 섬길 줄 아는 사람이 있냐니까, 있다는 거야. 그래 와서 이 사람이 와서 가르쳤는데, 알아야 가르치지. 여호와를 어떻게 섬기는지 알아야 가르칠 거 아니야.

 

28절.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 것을 가르쳤더라.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서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서, 바벨론 사람들은 숫곡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 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앞을 보세요.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안되는 거에요? 그럼 누구 탓이야? 교사가 엉터리를 가르친 거야. 아니 그래,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앗수르 왕도 그 땅에 갔거든 그 땅 신을 섬겨라. 맹수도 상당히 협조적으로 선교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데, 문제는 선교사가 글쎄,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준비된 게 없어.

 

오늘날도요, 교회에서 교회학교가 있어서, 성경 가르치라고 교회 학교 있는 거 아니에요? 그 율동 가르치라고 교회학교 있는 거 아닙니다. 성경 가르치라고 교회학교가 있는데, 교사가 있어야 말이지. 전혀 지금도 성경을 제대로 가르칠 교사가 교회에 전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그래요. 여름 때보면, 계절학교라고 해서 여름 성경학교같은 거 하는데, 이거 보세요. 여름성경학교만큼 성경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온갖 율동이나 무슨 행사나 프로그램이나 숨도 못쉴만큼 만들고, 하나님 끼어들 틈을 만들지 말자, 성경 끼어들 틈을 만들지 말고, 온갖 프로그램에 숨도 못쉬게 만들어가지고, 그렇게 교회는 요란하게 권사님들 진땀 빼고 밥이나 만들게 하고, 교회 예산 낭비하고, 뭐 티셔츠부터 가방까지 온통 진탕 예산을 낭비하는데, 남는 것은 아무 것도 마치고 나면 원점으로 돌아가죠. 구름같이 모여든 학생들은 바람같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죠. 솔직히 이야기하면 여름 율동 학교죠 그게, 여름 성경학교가 아니고. 다 버려 망치는 거에요, 전부다. 그런데 아무도 잘못하고 있다고 인식을 못해요. 다 그리 하니까. 너도 나도 보수 진보 도시 농촌 똑같이, 큰 교회, 작은 교회 똑같이 하니까, 전부 그렇게 해요.

 

우리 교회는 그거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지 말고, 성경 교육은 평소에, 주일날 오후에 평소에 하고, 여름날 그 더운데 교사들도 좀 쉬었으면 좋겠고, 학생들도 좀 쉬게 해야지. 저는 그런 경우에는 우리 학생들 데리고 저 계곡에 가서, 올라오면 밀어넣고, 올라오면 밀어넣고 못올라오게 해요. 하루 종일 물에서 실컷 놀아라. 그러니까, 애들이 저를 다 좋아하죠. 우리 교회, 제가 가는 데마다 교사들이 다 저를 좋아할 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저를 좋아해요. 저는 우리 교회 초등학생 팬이 많아요. 팬레터가 매주 올라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우리는 예배를 아이 예배 따로 하지 않습니다. 어른 아이 같이 해요. 유치부, 아동부, 장년부, 할머니 할아버지 함께 다 11시 예배에 참여해요. 영 어린아이는 알아듣기 힘들지 몰라도, 초등학생 쯤 되면 저 설교를 다 알아들어요. 늘 같은 소리하니까. 어떤 어린 아이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가 조금 나오면, 편지가 와요. ‘근데 목사님 있잖아요. 목사님 설교가 좀 어려워요.’ 그리고 그 밑에다가, ‘그래도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가 열심히 듣고 있느니까요.’ 격려사도 한마디 쓰고.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리고 아이들이 음식물 먹는 거 가릴 거 같으면요, 저 마음이 옥토 같아서 잘 받아들입니다. 얼마나 먹고 싶겠어요. 그런데 그거 절제하고 딱 안먹을 거 안먹고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 총각들이나 처녀들이나 배우자를 구하려면 샤론교회로 와야 돼. 거기에 오리지날이 있습니다. 그 몸이 환경호르몬에 오염되지 않고, 몇년간 몸을 정하게 깨끗하게, 그러니까 딴 데 가서 찾지말고, 딴데 가서 찾으면 오염 되서 쓰지도 못해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가르치니까. 먹고 마시는 것도 가르치고. 우리 교회는 음식 담는 그릇에 플라스틱 한개도 없습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성도집도 마찬가지. 김치 냉장고의 김치통도 전부 스테인레스통으로 다 바꿨어요. 단체로 구입해서 다 바꾸고. 주문해서. 안배워서 망정이지, 배웠으면 그대로 실천합니다. 하나씩 둘씩 다. 그러니까 교사가 문제죠. 저는 제일 관심있는 게, 교사, 목사, 전도사, 교역자들입니다. 교역자들이 먼저 하나님 말씀을 정통하게 분별하고, 가르칠 기회가 있으면 그건 제대로 가르쳐야 되요.

 

우리 교회에 집사님으로 있다가 지금은 신학을 하는데, 이 분이 한번은 부산에 초대되어서 설교를 부탁을 받았는데, 집사님이 설교를 부탁을 받았어요. 지금은 신학생인데, 그때는 신학교 안갔을 때. 가서 설교 30분 이리 하는 게 아니고, 3시간 40분을 했다는 거에요. 3시간 40분. 근데 그 앞에 신학대학 교수하고 부흥 강사가 와서 했는데, 1시간 반씩이나 하니까, 성도들이 절반은 일어나서 도망가 버린데요. 집으로. 우리 집사님을 모셔놓고 그래요. ‘당신은 신학교 교수도 아니고, 부흥강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니까, 잘못해도 괜찮다는 거에요.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단 길게만 하지 마라. 지난주에 너무 길게 하니까, 1시간 반씩이나 하니까, 일어서 중간에 절반이나 갔으니까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알았습니다. 내 수준에 맞게 짧게 해보겠습니다’ 하고는 올라가서 3시간 40분을 한 거에요. 아무도 도망간 사람이 없고, 딱 두명이 도망갔는데, 한사람은 임산한 여인에게 해산 고통이 갑자기 임하므로, 미용~미용~해서 산부인과로 바로 갔고, 한분은 처음 나온 사람이라 아따 너무 길다 하면서 갔다는 거에요. 그리고 저녁 먹으러 가서 그 장로님이 하는 말이 ‘우리 교회 100년 역사에 최고의 강사가 오셨다.’ 그러니까 저녁 먹고 3시간만 더 하자고 하더랍니다.

 

설교의 길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용만 있으면요, 3시간이 무슨 아무 문제 없어요. 우리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앉아 있잖아. 여러분, 여기 중학생들 앉아있는 거 보세요. 여러분들하고 똑같이 한 시간도 지각도 결석도 안하고 앉아있는 거 보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동부 설교는 10분 이상 하면 안된다. 그런 다 정신 나간 소리하지 말고, 내용만 있으면요, 10시간 해도 아무 문제 없어요. 내용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애들이 안듣는 것 같아도요, 다 들어요. 장난쳐 가면서도 다 듣고 있어요. 왜 장난치느냐. 듣고 여유가 있으니까 장난치는 거죠. 어른들은 이래 하면서도 엉뚱한 생각해. 그러니까 저는 청년들, 학생들 와서 잘 듣고 있는데, 이 사람들 정말 위대한 교사가 될 거야. 그 중학생들 중에 어떤 학생들이 계속 오는데, 어른들 목사님들 중에 계속 오는 분이 자꾸 만나거든요. ‘야, 너 지난번에 왔는데 또 왔구나’ 하니까, ‘있잖아요. 노우호목사님 늙기 전에 많이 와야돼요.’ 그러면서 중학생들이 알아서 그렇게 열심히 오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이 희망이죠. 우리 민족, 우리 교회의 희망이에요. 젊은 사람들이, 어린 학생들이 엄마에게 밀려서, 억지로 끌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오는 것 보세요. 1년에 한번씩 꼬박꼬박 시간내서. 이 공부도 그래요. 공부도 우러나서 자기가 자발적으로 해요.

 

그래서 결국은 그리 안됩니다. 교사가 없으니까.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하냐면, 의인이 없어서 망했다는 건데, 의인이 뭐냐, 의인이 교사에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어떤 희망의 싹이 없어요. 그러면 망하는 거에요. 지금도 왜 망하느냐. 누가 가르칠 사람만 있다면 희망이 있을텐데, 아무 가르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제일 지금도 하나님께서 제일 아쉬워하는 것은 그냥 목회하는 목사, 그런건 넘쳐나요. 그냥 일반적으로 목회할 사람, 뭐 설교나 하고, 심방이나 하고, 밥이나 먹는 그런 목사는 숫자가 넘치는데, 뭐가 모자라느냐.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아래 희귀한 일이야. 잘 없어요. 온 지구상에 하나님 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깨끗이 가르쳐 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없어요, 없어.

 

제일 지금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은 목회자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사에요.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사. 저는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그런 교사가 있다면요, 목사님보다 더 중요하다. 지금 현재 신학교에서 배출하는 목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교사를 계속 양육할텐데,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강의할 수 있는 그런 교사는요, 목사님, 지금 신학교 나온 사람하고 안바꿔줍니다. 절대로, 진짜로. 진짜 실력자들이니까. 그래서 지금 여기 오신 젊은 분들이 욕심을 가져봐요. 이런 욕심은 가질만한 거야. ‘내가 딱 계획을 세워서 2, 3년내에 수년 내에 완전히 그저 성경을 통달을 하겠다. 나도 정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66권을 다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되어 보겠다.’ 그런 꿈은 꾸어볼만 하잖아요. 전에는 그런 길이 없었는데, 지금은 제가 다 닦아 놓았으니까, 열심만 있으면 되요. 열심만.

 

그리고 지금 장비가 얼마나 좋습니까? MP3같은 그런 장비가 있으니까, 차에도 장착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오며 가며 듣고 또 듣고 자꾸 들으면요, 자꾸 들으면 나중에 나옵니다. 입에서. 인풋되면 아웃풋되는 거야. 입력시켜놓으면 나오는 거에요. 제대로 입력시켜 놓으면 나오는 거에요. 그리고 그걸 배우면서 반듯이 가르쳐야 돼. 가르치는 사람은 세번 배웁니다. 가르쳐야 돼. 안가르치고 자기 혼자만 배우고 가만히 있으면 그건 흐지브지 다 까먹어 버려요. 우리 교회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하는 것을 들어 보니까, 준비하면서 자기가 더 감동받고 은혜받고 그렇게 눈물로 준비해요. 그리고 그 날이, 그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진다는 거에요. 사람들 만나는 게. 진리가 다 내가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 사람들하고 만나는 게 기다려진다는 거에요. 충만한 데서 받아야죠. 그래서.

 

그 다음에 18장에 히스기야가 잘 하던 이야기도 나오지만, 잘못한 얘기도 나오죠. 아까 그 18장 13절‘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 유다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하니까,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은 300달란트,’ 한 달란트가 32kg 쯤 됩니다. 그러면 300달란트니까, 10톤이죠. 3 3은 9. 그리고 금 30달란트가 1톤이에요. 은 10톤, 금 1톤을 가져오라 이런 얘기인데,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로 내게 한지라.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서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주었는데, 그 앗수르 왕이 가도 안하고 속을 썩여 와서, 랍사게를 보내와서 온갖 망발을 퍼부으면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훼방하고 이런 얘기죠.

 

그리고 이제 1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절박해서 기도해서 결국은 19장 35절‘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5000명을 쳐서 다 송장이 되었다’는 얘기죠.

 

20장‘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저에게 나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고 갔는데, 히스기야가 낯을 벽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며 울고 통곡하고 보채고 하니까, 15년 수명을 연장해 준 이야기가 20장에 주욱 이어지고 있습니다. 20장 12절에도 ‘바벨론의 사자가 와서, 그때에 발라단의 아들 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저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 자기 국력이 이렇게 막강 하답시고 자랑 좀 한답시고 보여주었을 겁니다. 이 순진한 사람이.

 

14절.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가로되, ‘저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얼씨구. 이사야가 가로되, ‘저희가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니, 나의 내탕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잘한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까,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가로되, ‘만일 나의 살아날 동안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고 말았다는 거에요.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그 못은 실로암 못이죠. ‘수도. 그 기혼 샘에서 실로암 못까지 수도를 만들어서 물을 성벽으로 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히스기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고, 그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는데, 므낫세가 위에 나갈 때에 나이 12세라.’ 그러니까 12세니까, 15년 연장된 그 안에 태어난 거죠. 안태어날 게 태어난 거에요. ‘12세라.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55년을 치리하니라.’ 괄호 열고 못된 것은 죽도 안한다 하고 써놓아요. ‘그 모친이 헵시바야.’ 이 아이가, 히스기야는 그렇게 악한 사람은 아닌데, 이 아이가 못된 데에는 그 이유가 엄마한테 있다는 거에요. 12살 짜리가 뭐한데 그리 악하겠어요. 그 악한 엄마 헵시바가 조종하니까, 그렇게 못된 아이가 된 것이거든요. 그게.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온갖 악은 다 행해요.’ 하여튼 뭐, 악이란 악은 골라가서, 무슨 악의 사전이 있는지 뭔지 모르지만, 골라가면서 다 해요. 그래서 21장 13절.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리겠다.’ 예루살렘을 완전히 씻어 엎음같이 하나님이 다 씻어 버리겠다.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를 버려 그 대적의 손에 붙인즉, 저희가 모든 대적에게 노략과 겁탈이 되리니,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 열조 대부터 오늘까지 나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니라. 하셨더라.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 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므낫세의 남은 사적과 무릇 그 행한 바와 범한 죄는 유다 왕 역대 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므낫세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궁궐 동산 웃사의 동산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자 여기는 간단하게 므낫세가 행한 일을 간략하게 쓰고 있는데요, 나중에 예레미야서를 공부해 보면, 얼마나 악한 짓을 많이 했는데, 결국은 여간해서는 그 왕들의 하는 잘못에 대해서 별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던 이사야도 보다 못해서, 므낫세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섰더니, 바로 그 므낫세가 이사야 예언자를 판자하고 판자에 사이에 끼워서 톱으로 썰어서 죽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톱에 켜서 므낫세한테 죽은 거에요. 워낙에 어차피 운명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이사야 예언자는 어떤 왕에게도 그렇게 질책한 일이 없거든요 별로. 어차피 되도 안하는 것들 하면서,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해도 해도 너무 하니까, 보다 못해서 이사야가 한마디 했는데, 바로 그냥 톱으로 썰어서 죽였어. 성경에 보면 톱으로 켜는 것과 하는 그런 말이 나오는데 이사야를 보고 하는 말이에요. 히브리서에 나오는 얘기죠.

 

자, 그 다음에 19절. ‘아몬.’ 므낫세 아들 아몬이죠. ‘아몬이 위에 나아갈 때, 나이 22세라. 예루살렘에서 2년을 치리합니다.’ 24살에 죽었다는 얘기죠. ‘그 모친의 이름은 므술레멧이란 여자인데,’ 이 여자도 못된 여자 같아요. ‘욧바 하루스의 딸인데,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부친의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치 아니하더니, 그 신복들이 일어나서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때려 죽였어요.’

 

그 당시의 신하들이 므낫세 밑에서 숨도 크게 못쉬고 그리 있다가, 그래도 뭐 므낫세 죽고 나니까, 어이~ 어이~ 울면서도 슬퍼하는 게 아니고, ‘진작 죽지, 인제 죽었나.’ 하면서 신하들이 그 아들이 좀 뭐 22살밖에 안되니까, 자기 아버지 하는 악독한 것을 봤으니까, 자기는 정신 차리고 잘하겠지, 이런 기대를 했던 모양인데, 전혀 아니야. 완전 부전자전이고, 똑같이 못된 짓 하는 거야. 신하들이 한 2년간 지켜보다가, ‘야~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하고 신하들이 일어나서 그 왕궁 안에서 아몬 왕을 때려 죽여 버렸어요.

 

그래 이제 좀 여론화하고 공론화하면 어려워질 것 같으니까, 그냥 몇몇 사람들이 일어나서 조용히 해치웠던 모양인데, 그 아몬이 얼마나 못됐는지, 성 밖의 사람들은 몰라요. 모르고 신하들이 자기 왕을 때려 죽였다고 하니까, 국민들이 와서 자기 왕을 때려죽이는 너희는 뭐하는 놈들이냐 하면서 또 신하들 다 때려죽였어요.

 

그리고 그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있는데, 8살이야. 8살짜리를 왕위에 앉힌 겁니다. 자기 아버지가 24살인데, 아들이 8살이면 몇 살때 낳은 거요? 16살때 낳은 거죠. 그럼 결혼 몇살 때한 거에요. 그러니까 15살 때 결혼한 거지. 그럼 부인은 몇 살쯤 됐겠소? 아몬의 부인은 한 14살이나, 13살이나 그렇겠죠.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졸업하면 빨리 결혼하라고. 우리 어머니도 16살에 결혼했거든요. 7남매를 낳았어요. 7남매.

 

그래서 22장에 이제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8세라. 예루살렘에서 31년을 치리하는데, 그 모친의 이름은 여디다라.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이 요시야의 어머니는 여디다라는 사람인데, 참 착한 사람 같아요. 왜냐하면 아버지는 못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착한 걸 보니까, 그 어머니 때문에 착한 거죠. 그러니까 아이들의 기초 인격의 결정적 영향은 항상 엄마에게 있습니다. 거의 99.9%가 엄마야. 아빠는 괜히 바깥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고, 진짜 아이의 뱃속에서부터 아이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은 엄마에게 달려있어요. 정서가. 유대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어요. 제가 볼 때도 다분히 그렇습니다. 그 집 아들과 딸을 선택할 때, 그 집 엄마를 보면 알아요. 엄마를 보면 딸들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대강 알 수 있어요.

 

22장 2절.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참 오랜만에 듣는 얘기죠. 다윗이후에 처음 나온 소리야. 오랜만에. ‘요시야 왕 18년에,’ 그럼 몇살 되었겠습니까? 8살에 왕이 되었으니까 18년이면 26살쯤 되었을 때,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전에 보내며 가로되,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수하여,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여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공장(工場)이 아닙니다. 공장(工匠)은 기술자에게, 목공과 미장. 목공과 미장을 공장(工匠) 이리 합니다. ‘주어서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 좀 하라 하되,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전을 수리하게 하라 하니라. 그러나 저희 손에 붙인 은을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행하는 것이 진실함이었더라.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의 신복들이 전에 있던 돈을 쏟아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앞을 보세요. 요시야 때에 그러니까 자기 아버지 아몬이 2년, 그리고 자기가 지금 18년. 그러면 20년이죠. 맞아요? 20년하고, 자기 할아버지가 몇 년 했어요. 55년. 그러면 75년. 히스기야 왕이 죽은지 75년 만에 성전 수리 한번 하는 거에요.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의 신앙이 이 정도 입니다. 어떤 건물을 75년 동안 방치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엉망이 되죠. 박쥐가 똥을 싸고, 거미가 줄을 치고, 석가래가 나팔 불고, 하늘에 별이 보이고, 엉망이 된 거야.

 

그걸 요시야가 보고 수리 좀 하라고 했더니, 수리를 하다가 제사장 힐기야가 그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발견한 건데, 이런 두루마리를 발견해서, 요시야 왕 앞에 가져가니까, 요시야 왕이 그럼 한번 읽어봐라 그랬어요. 여러분, 서기관 사반도 이걸 처음 읽어보는 것이고, 듣는 요시야도 지금 처음 듣는 것입니다. 처음 읽어보는 서기관이 처음 들어보는 요시야 왕에게 읽어만 주었는데, 읽어주는 것만 듣고 요시야 왕이 대성통곡하고 옷을 찢으면서 회개를 하는 거 아닙니까? 불과 26살 밖에 안돼. 요시야가 무슨 신학교를 간 것도 아니고, 서기관 사반이 무슨 성경 강좌에 와서 배운 것도 아닌데, 그냥 읽어만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거에요.

 

여기 오신 목사님들이 교회 가서 여러분이 설교하면, 여러분의 설교 듣고 옷을 찢고 회개하는 일이 일어납니까? 옷이 좀 질겨도 질기지만. 그런 김 빠지고 맥 빠진 설교 듣고는 아무도 회개하거나 옷을 찢고 통회 자복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거든요. 차리라 읽어줘요. 저는 그래서 내가 어설픈 재주를 가지고 설교 만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배시간 때, 성경 2장이나, 3장이나 읽어주는 거에요. 읽어주면서 조금 어렵겠다 싶은 것, 내가 또 설명할 수 있겠다 싶은 것, 조금 설명해주는 그런 정도입니다. 지금 하는 것처럼 이렇게 해요. 저보고 그래요. 목사님, 주일 낮의 설교는 어찌 합니까? 주일 낮에나 밤에나 똑같아요. 지금 하는 것처럼 해요. 단 서서 하는 것 뿐이지.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그 스토리를 다 알아들을 만하게 이렇게 읽어서 해석하고 나가면, 그 해석과 의미와 교훈은 성도들이 스스로 꼭꼭 씹으면서 스스로 새깁니다. 그래서 설교를 혼자하지 않고 같이 해요. 온 성도들이 함께 해석하면서 함께 이해하면서 해석하면서 나가는 거에요. 자기 스스로 이해를 해야, 그걸 실천하기 즐겁지, 우리 목사님들이 내가 다 읽어가지고, 해석해가지고, 적용까지 해서 예화까지 만들어서 너희는 듣기만 하고 수동적으로 움직이기만 해라. 그러면 피동적이 되어 버려요. 능동적으로 그 말씀에 동참할 마음이 없고, 전부 성도들이 피동태에 빠져 버리는 거에요. 그런 설교는 내가 볼 때, 미련한 설교에요. 그것은 또 성도들을 무시하는 것이고. 너희가 깨닫기는 무엇을 깨닫느냐? 내가 다 깨닫고 내가 다 해석했으니까, 시킨 대로만 해라. 이렇게 하면 성도들이 피곤한 거야. 수동적으로 끌려간다니까.

 

저는 그렇게 하기 싫어서 나도 피동적으로 끌려가기 싫은데, 남을 피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같이 깨닫고 같이 실천하자. 같이 공부해 가면서, 같이 이해가면서. 설교는 그러니까, 목사가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설교를 성도와 함께 해요. 같이 함께 이해하는 거에요. 한번 해봐요. 처음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건 설교학하고 안맞다. 물론 설교학하고 안맞죠. 제가 지금 하는 얘기는 설교학적으로 안나오는 말입니다. 지금 설교학이란 게 100년, 200년전에 나온 거에요. 케케묵은. 지금 그런 시대가 훨씬 지났다는 거에요. 성도들의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어요. 그렇게 설교를 하게 되니까, 성도들이 굉장히 기대하고, 우리 교회에 글쎄요? 설교시간에 예배시간에 졸거나 하는 사람 잘 없을 건데요. 그리고 또 저는 조는 거 별로 안말립니다. 코만 안골면, 조는 것 OK. 얼마나 편안하면 잠을 자겠는가? 교회 와서. 같이 성경을 같이 이해해 나가고, 같이 깨닫고, 같이 공감하고, 진리 같으면 같이 아멘하고, 이렇게 하는 설교는 좀 달라요. 한번 해봐요. 해보면 목사님도 참 기쁨이 넘치고, 성도들도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성경을 읽어서 같이 해석하면서 함께 같이 흘러가니까, 그리고 뭘 설교할 것인가, 걱정하지 않습니다. 뭘하긴 뭘해요. 수요일 한 그 다음을 하는 거죠. 주욱 물 흐르듯이 흘러가니까.

 

그리고 오경을 떼면 떡을 해먹는 수가 있어요. 옛날에 서당에 책걸이 하듯이. 구약을 떼면 큰 떡을 해먹고. 신구약 다 뗄 때는 잔치를 할 만하죠. 그리고 창세기 돌아오는 거에요. 그렇게 하는 걸, 4년 정도해서 하면, 한 텀이 끝나지 않겠는가. 저는 지난번에 했을 때, 밀양서는 자주 집회 때문에 강단을 비우고 하니까, 4년 7개월만에 계시록이 끝이 났는데, 요번에는 모르겠어요. 빨리 간다고 하는데, 4년 정도 되었는데, 다니엘서 하고 있거든요. 한 2년 남짓 되었는데, 다니엘서. 그래서 한번 우리 목사님들도 평생의 소원이 나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안빼먹고 설교해 보고 죽겠다 하는 뜻을 품을 만한 거죠. 여기 했다, 저기 했다, 이 말했다, 저 말했다, 횡설수설하지 말고, 완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 스트레이트로 깨끗이 끝내보는 것. 저는 그걸 녹음을 합니다. 녹음을 할 뿐 아니라, 제가 계시록까지 설교를 하고 나면, 다시 내가 돌아와서 와서 지금 하는 다니엘서라던지, 아니면 창세기를 설교할 기회가 있겠나 없겠나 확신이 안서기 때문에, 그야말로 내가 종말론적인 설교, 내 일생 일대에 다시는 이 본문 가지고 설교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그런 마음 가지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어떤 분은 그 얘기를 듣고는 너무나 충격을 받고, 야, 노 목사님의 설교, 마지막 설교 들으러 가자. 모든 설교가 마지막 설교다. 그래서 대전서 마산까지 장로님 부부가 몇주간 내려오고 있더라고. 그래서 하도 민망스러워서 그 먼 길을 계속 오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 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오지 말란다고 이 양반이 안와요. 그래서 오지말래서 안오는 게 아니라, 이 분이 올려고 하는데, 몇주간을 하는데 성도들이 그렇게 참, 진리를 사랑하는 장로님이 빠져버리니까, 살 맛이 안난다는 거야. 도대체가 신앙 생활할 맛이 안난다. 우리가 누구 바라보고 신앙생활하겠느냐. 울고 불고 난리가 나서 새로 주저 앉았어요. 주저앉고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 계속 녹음하고 있으니까, 그거 받아 정리하고, 지금 이 분이 중국으로 다니면서 틈만 나면 중국에 가서 장로님인데 성경을 가르치는 거에요. 중국 가서 교민들에게.

 

사람들이 그럽디다. 어떤 다른 데 가서, 어떤 은혜를 받으면 감동을 받는 수가 있는데, 노우호 목사의 강의를 듣고 나면, 괜히 입이 근질근질해 진다는 거에요. 노목사의 강의를 듣고 나면 입이 근질근질해져가지고, 괜히 가르치고 싶어진다는 거에요. 그래야 정상이죠. 여러분, 반듯이 몇사람을 제자삼아서 가르치는 장을 만들어봐요. 한주일에 한번을 만나도, 꼭 딴 것 때문에 만나는 게 아니고, 맨 밥이나 먹고 하지 말고, 성경을 가르치는 공부 그룹을 만들어서, 그런 쪽으로 차근 차근 준비하고, 아예 우리 교사들, 목사님들, 전도사님들, 신학생들은 노트북을 그런대로 괜찮은 거 딱 하나 사가지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주제를 다 망라하는 거에요. 맨 처음에 창조, 타락, 홍수 심판, 민족들의 분산, 언어의 혼잡,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 이야기, 야곱 이야기, 요셉 이야기,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 준비, 하나님의 자기 계시, 유월절 애굽 탈출, 시내산 언약, 성막 건축, 주제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꼭 다룰 주제를 모든 주제를 뽑아. 폴더를 만들어 다. 그리고 자료를 차근 차근 채워서 정리해 나가는 거에요. 딱 한 2년, 3년. 길어야 4년해서 그걸 완전히 자료를 채우고 나면, 그 정도 준비되면 하나님이 쓰신다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준비가 안되서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것이지, 저는 지금 오라는 곳을 다 가면, 몸이 아마 불이 나 버릴 것이에요. 제가 어지간 하면, 한달에 한주간 외에는 출장 강의를, 한달에 한주간 이곳 에스라 하우스에 매월 있으니까 매번 나갈 수가 없어요. 안나가는 것으로 했는데, 하도 부탁을 해서, 1월과 2월은 한주간도 못쉬고 계속 나가야 되요. 여기 저기서 사람을 부르는 바람에, 사람이 정신을 못차리게 해요. 그렇게 우리가 준비만 되면, 진짜 일군은 하나님의 포도밭에 항상 모자라. 가짜 일군은 늘 넘치고. 그래서 다른 것 한 눈 팔지 말고, 66권을 다 덮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준비해 봐요.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는 반드시 찾아올 줄 믿습니다. 준비만 되면 말이에요.

 

그렇게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읽어보고, 읽어보니까, 그것이 아마 신명기였던 것 같은데, 어떤 학자가 신명기 같다고 그래요. 그걸 딱 읽어보니까, 아이고 세상에, 자기 아버지, 자기 할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역대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하라고 하는 것은 기를 쓰고, 하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그저 목숨을 걸고 악을 행하고 했거든요 보니까. 그래서 요시야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요. 남은 생을 전심 전력해서 전국을 순회하면서, 특히 자기 아버지, 자기 할아버지 므낫세때 만들었던 모든 잘못된 것을 다 때려 빻아서 가루로 흩어버리고, 그야말로 국토 대숙청을 해요. 심지어 북왕국 이스라엘 땅까지 넘어가서, 온 전국을 순회하면서 몸소 진두지휘하면서 잘못된 우상의 너절한 것, 성경 말씀 율법의 위배될 만한 모든 것을 싸악~ 대청소를 합니다. 그렇게까지 요시야가 대청소를 하는대도 하나님의 진노가 안풀리는 거에요. 왜냐? 므낫세가 행한 악때문에. 아까 예기했죠. 그 요시야가 지금 왕이 된지 18년이고, 자기 아버지 아몬이 2년이고, 20년. 므낫세 죽은지가 20년이 되었어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풀리지가 않습니다.

 

앞을 봐요.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하나님도 꽤 감정적입니다. 화를 자주 내시지 않으시지만, 한번 화나시면 잘 안풀어져요. 여간해서 화를 잘 안내시지만, 한번 화나시면 20년이 문제가 아니죠. 어떤 때는 40년. 어떤 때는 70년. 더 심하면 400년간 화가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를 내도, 화를 낼 것도 아닌데, 자기가 내가지고, 조금 감정 가라앉고 나면 자기가 더 잘못했서 말이에요. 우리 경상도 속담에 똥낀 놈이 성낸다는 그런 말있죠. 제가 화를 낼 것도 아닌데 화를 내 가지고 그러니까, 나중에 머쓱해가지고 풀어져 버리고 하는데, 하나님은 화 안낼 건 낸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잘 안풀어지는 거에요 한번 화가 나면.

 

그래서 그런 부분들을 목회자나 설교자나 교사들이나 한번도 그런 하나님의 감정적인 측면은 고려해 본 적이 없어. 맨날 인간들이 자기 문제만 씨름했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20년간 화가 안풀어지고, 40년간 화가 안풀리고, 70년간 때로는 400년씩이나 진노하심이 풀리지 않는 그런 하나님의 감정은 한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말하면 어린아이야. 맨 신앙이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 자기 중심적으로, 어른이야 죽든 말든, 하나님이야 아프든 슬퍼하든 진노하든 말든, 내만 복 받고 말고, 내 소원만 이루어지면 말고, 그냥 맨날 첫날 주여 삼창하고 내 소원, 내 소원 하고, 다고 다고 하고 거머리 딸처럼, 달라붙어서 자기 것만, 자기 소원만 이루겠다, 그런 식으로 가니까, 이게 우상 숭배하는 것하고 별 차이 없어요 지금.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해서 매달리는 우상숭배하고 똑같다는 거에요. 탐심은 우상숭배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 성경강좌를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보게 되면요, 그 역사가 훤히 다 보이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특히 므낫세. 그리고 여러분, 여기 성경에 나오는 여러 케이스의 기도가 있는데, 그 생떼 써가지고 응답된 기도는 뒤끝이 안좋습니다 항상. 그 생떼를 써서 기도가 응답된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그 기브롯핫다와에서 고기를 먹겠다고 또 보채가지고, 고기를 주시긴 주셨죠. 고기가 잇사이에서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니라. 고기를 입에 물려놓고 아구통을 돌려버리고 막. 워낙 화가 나니까. 광야에서 고기를 내놓으라고 모세한테 뎀벼들고 하니까 말이에요. 그런 일도 벌어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 왕때, 왕을 세우겠다고 생떼를 써가지고 왕을 주셨지만 하나님이 기분 나쁜 거에요.

 

여기도 지금 그 히스기야가 생떼를 써가지고 수명이 15년 연장되었지만, 그 때에 연장된 그 기간에 므낫세가 나가지고, 그 안태어날 게 나가지고 정말. 그러니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순 어거지를 써가지고, 생떼를 써가지고 응답된 기도는 그 뒤끝이 안좋아요. 하나님이 택도 아닌 것이라도, 울고 보채면 마지못해 주시는데, 주시더라도 기분 나쁜 게 있어요.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는 그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안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무조건 생떼를 쓰라. 주여 삼창하고 그냥 막, ‘주여 믿습니다’ 하고, ‘안 내놓으면 재미 없습니다.’ 외국인들이 와서 보니까, 한국 사람들 기도는 노사 분규 하듯이 한다는 거에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품위가 없이.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에요. 예쁘게 해도 줄까 말까한데, 뭘 해놨다고 생떼를 쓰면서 순 어거지로, 이런 식으로 하는 걸 하나님이 별로 기뻐하지 않아요. 그러면 품위가 없고요.

 

특히 잘 들어보세요. 목사님들이나 집회를 인도하는 분들은 거기 새신자, 교회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 이런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으면요, 통성기도라도 하면 시험 듭니다. 우리는 늘상 하니까 모르는데 예사인데, 교회 진짜 처음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그 통성 기도 하는 것 보면, ‘야, 이거 집단으로 발광하는구나. 이렇게 미쳤나 이거. 이렇게 무질서한데 있나.’ 나는 사실 결혼해서 첫애기 처음 낳고 교회에 처음 나갔는데, ‘아 참 이거, 전혀 이질적이고, 내가 별세계에 왔나.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나. 기독교가 뭐 이리 무질서한 종교냐.’ 당장 그리 보이던데요, 내가 보니까.

 

맨 처음에 교회에 발을 댄 것은 군대에 있을 때인데, 군대에서는 무슨 신앙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요, 늘 그저 주일만 되면 교회에 가는 몇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도 나보고 교회 가자는 말을 안했어. 안했는데, 누가 간데. 너도 가자, 나도 가자, 간다는 거라. 들으니까, 교회에 예쁜 아가씨도 많고, 교회가 또 과수원 안에 있다는 거라. 과일을 얻어먹을랑가, 예쁜 아가씨를 볼랑가, 아니면 바깥 바람이 시원하다니까 바람이나 쏠랑가 해서 갔단 말이에요. 갔는데 아가씨도 과일도 한번도 본 적도 없고, 예배 시간인데 들어갔는데요, 우리가 조금 늦게 갔던지, 기억은 거기가 어디냐면, 경기도 양주군 그 회천면 칠봉산 밑에 있는 마을이야. 칠봉산 밑에 동네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한 35년쯤 되었으니까, 근데 그 예배당 갔는데 그렇게 밝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도 예배당 조명만큼은 좀 밝게 해되야겠다. 아, 눈이 부실만큼, 죄인이 눈을 못뜰만큼, 얼마나 밝은지 정말 빛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그렇게 밝아요 조명이. 그렇게 밝은 데, 감리교로 제가 기억하고 있어요. 예배를 시작하는데 그 밝은 빛 가운데 감히 눈을 들어서 그 설교하는 목사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요. 목사님 얼굴 윤곽도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 단 기억나는 게 뭐냐.

 

그 예배시간에 어떤 처녀인지, 젊은 아주머니인지 젊은 음성인데 기도를 하는데, 아이구, 저리 기도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하겠다 싶더라고. 얼마나 애절하고 간절하고 진실하게, 그렇게 낭랑하게 그 내용은 내가 잊어버렸는데, 그 내용 언어에 풍기는 그 경건과 그 진실함과 그 애절함이 사람의 간담을 녹일 만큼 그렇게 하더라고. 그게 내 인상인데, 나는 처음으로 기도는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배웠는데, 나중에 처음에 교회 가서 통성기도 하는 것 덜컹 보니까, 겁이 나는 거야. 야, 이게 집단으로 미치는 것같다. 그러니까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항상 우리보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 중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봐야 되요. 그리고 우리 중심이 아니고 또 하나님 중심으로, 내 중심이 아니고, 그 우리보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의 기도나 찬양이나 설교나 목회나 교육이나 전체가 달라지게 됩니다. 달라져. 사실 이런 것은 뭐 신학교 목회학 시간에 이야기 해야 할 것인데, 여기 와서 이야기해봐야 성도들 보고 참 한심한 얘기죠. 그러나 생각을 해봐야 해요. 집회 인도할 때.

 

저는 집회를, 일반 집회를 잘 안갑니다. 일년에 한번, 일년에 한번내지 두번 정도. 그렇게 저도 바깥에 공기도 알고, 견문도 넓힐 겸 나갔는데, 그 때는 일단 찬송을 되게 가립니다. 되게 가리고 또 가려서 그 교회에서 찬송할 때는 물론 설교 내용과 잘 부합되는 찬송을 반듯이 사부로 준비해야 되요. 화음이 잘 맞도록. 절대 여러곡 부르면 안되고, 성경 본문 읽고, 잘 부르는 찬송 하나 그렇게 하고, 그리고 그 앞에 찬송을 가지고 사람을 지치게 하거나 진을 빼버리면, 설교할 때 피곤해서 자버려요 다. 그건 미련한 것입니다. 그리 할 필요 없습니다. 아주 조용히 묵상하고 있다가, 찬송을 처음 나온 사람이라도, 야~ 기독교인인데, 음악 실력이 저 정도구나 할 정도로 감동을 받게, 단 한곡을 해도 그렇게 해야 되요. 단 한곡을 하더라도. 정말 화음을 잘 맞춰서 청아한 음성이 들려서 그 음악 소리에 그냥 완전히 사람들이 감동 받아버리게. 설교 한마디도 못알아 들어도, 그 음악에 충분히 감동되게,

 

이런 식으로 교회 음악을 지도해 가야지, 무슨 CCM을 가져와가지고, 막 비트를 있는 대로 틀어놓고, 드럼까지 두들겨패가지고, 이게 딴다라 시장도 아니고, 돗대기 시장도 아니고, 막 이렇게 품위 없이 해가지고는 전도가 안된다는 거에요. 그런 집회 문화부터 전부 바꿔야 돼. 그리고 설교 뒤에 하는 찬송도 반듯이 4부로 할 수 있도록 다 준비를 해가지고, 미리 사전에 준비를 해야 되요, 그걸.

 

그리고 저는 또 집회하는 기간에는 헌금을 못하게 해요 일절. 제가 집회하는 기간에는 못하게 합니다. 왜 그러느냐? 혹시라도 거기 단 한사람이라도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이 헌금 그게 부담되어가지고 마음에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고, 아예 헌금 순서를 없애버립니다. 혹시 이웃교회가 모르는 사람이 와서 그런 것도 모르고 와서 헌금을 올렸다 할지라도 만져보지도 않고, 고대로 고스란히 두었다가 다음 본교회 목사님하고 예배할 때 봉헌하도록 하시오. 만져 보지도 않고 끝냅니다. 딱 기도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강의 딱 하고 딱 축도하고 마치게. 절대로 감정을 붕붕 띄워서 그런 거 하지 않습니다 일절. 차분하게 진리만 전하고 와요.

 

그러면 두고 두고 기억에 남고, 어떤 자매들 중에 남편이 교회에 안나오고, 자기 혼자 외롭게 교회 다니다가, 평생 소원이 남편하고 나란히 함께 교회 가서 나란히 앉아서 예배 드리는 것, 이것이 평생 소원인 그런 자매들이 많이 있단 말이에요 이 땅에. 온 교회에 그 남자 수, 여자 수 하면 남자가 절반이 채 안되잖아요 지금. 그럼 그 부인들이 자기 남편 전도하려고, 자존심 있는 대로 상하죠. 남들은 남편하고 가족하고 함께 와서 예배드리는데, 자기만 남편 전도 못해 가지고, 그렇게 좋은 강사 온답시고, 애교부리고 아양을 부리고 서비스를 해가지고, 온갖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가지고 그런 불신 남편 겨우 모셔다 놓고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또 강사가 와가지고 봉투를 이만큼 뭉쳐 잡고 요리저리 흔들어 재껴봐. 처음 나온 사람들이, ‘아이고, 오나가나 똑같다. 이놈들아. 돈놓고 돈먹기다. 잘먹고 잘살아라.’ 그럼 다시 안나올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한 영혼이 실족하게 되면 누가 책임집니까? 그 돈 몇 푼된다고 그것가지고 한 영혼을 시험들게 하면 그거 누가 책임지겠냐고.

 

사람이 생각을 해봐요. 이게 지금 요즘 우리가 하는 얘기가 아니고, 우리 지리산 지역에는 집회때는 헌금안하는 문화가 벌써 20 몇년전부터 정착이 되어 있어요. 여러 교회가 그렇게 해요. 여러분, 서울 목회가 앞서가는 목회인 줄 아세요? 그건 천만에 삼천만의 말씀이에요. 여기 지리산 목회가, 지리산 이쪽 목회가 서울보다 20년, 30년 앞서 있습니다 범사에. 한마디로 우리 기독교 문화가 수준 이하라는 거에요. 제가 볼 때는. 이제는 그렇게 하는 때는 지나갔어요. 그래서 일절 너절한 품위 없는 이야기하면 안되고, 정말 진리를 차근 차근. 절대로 어떤 스님이 앉아 있어도 부인하지 못하게. 만고불변의 진리를 그렇게 심는 그런 시간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언제 뭐 찬양 여러 곡 할 수 없어요. 아무 순서에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딱 그저 기도도 길게 하지 못하게. 기도는 당연히 원고를 써야 됩니다. 그런 대집회에 기도하는 사람들은요, 기도문을 완전히 써서 토씨하나 틀리면 안돼. 그리 경건하게 품위 있게 이렇게 해야지, 대개 하는 것 보면, 막 도떼기 시장처럼 왁자지껄 떠들썩하고 품위 없이 떠들고, 대표 기도하는 사람들도 아무 준비도 원고 없이 올라가서 횡설수설하고 중언부언하고 말이 막히면 아버지 하나님, 또 막히면 하나님 아버지 막 계속 반복하고, 이래 가지고 교회가 된다는 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좀 다르게 합시다. 다르게.

 

여기 요시야를 볼 때, 그래요. 이 요시야가 한 경건한 사람이고, 진실한 사람이고, 그리고 성경을 딱 보고, 알아듣고, 그리고 그대로 실천합니다. 바로. 뭐 그냥 주저하지 않고 이것이 진리다 하면 그대로 실천하는 거에요. 여기 한번 보세요. 23장 21절. ‘왕이 뭇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든지, 유다의 열왕의 시대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세상에, 사사시대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유월절 안지켰다는 거야. 이리 봐요. 그러면 다윗도 제대로 안했단 말이죠. 솔로몬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아무리 다윗이 성품이야 정직하지만, 성경 안보면 또 실수하는 것이고, 솔로몬은 성경을 세 권씩이나 기록할 만큼 지혜가 있는 사림이지만, 그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지만 율법을 안보니까 실수하는 거에요 별 수 없이. 그래서 사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요시야처럼 제대로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에요.

 

22절.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든지, 유다의 열왕의 시대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 18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서 비로소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요시야가 또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율법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 여러분, 정확하지 않습니까?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하여.’ 지금 20년이 지나갔는데도, 이 므낫세가 죽은지가 20년 지나갔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지 않고 있었단 얘기죠.

 

그런데 참 아쉽게도 이렇게 아까운 사람은 오래 살지도 못하고 먼저 가.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를 치기 위해서 올라가는데, 이 요시야가 괜히 가로막아서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서 거기서 맞아 죽었어요 그냥. 그래서 그 요시야가 8살에 왕이 되어가지고, 31년을 치리하고, 39살에 불혹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고 맙니다. 참 아쉽죠. 이 요시야가 죽었을 때, 전 유대인들이요, 그렇게 슬퍼했다는 거에요.

 

앞을 보세요. 국민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누가 진짜 임금인지, 누가 가짜인지 다 아는 거에요. 말을 안할 뿐이지. 그 되먹지 않은 자가 죽었을 때는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아무도 왕이 죽었는데 우는 사람도 없고, 아끼는 자가 없이 죽었다고 했는데, 요시야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국에 퍼졌을 때는 온 국민이 슬퍼했다는 거라. 그때 그 애통, 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 국민들이 애통했던 그 애통은 히브리 전 역사를 통틀어서 애통의 대명사가 됩니다. 누가 많이 슬퍼하면, ‘마치 요시야 왕이 죽었을 만큼 우는 군 그래.’ 하닷의 림몬에 애통같은 큰 애통이 있었더라 하고 애통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요사야 왕의 죽음을 온 백성들이 애도하고 슬퍼했어요.

 

요시야가 죽고 나자, 요시야의 아들 중에 여호아하스라는 사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는데, 3개월 쯤 되었을 때, 애굽 왕 바로 느고가 다시 올라와서, 그 여호아하스를 잡아가지고 이 사람은 애굽으로 끌려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 애굽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신 여호야김, 요시야의 다른 아들이죠. 원래 엘리야김인데, 이 엘리야김을 이름을 고쳐서 여호야김이라고 이름을 짓고, 나이 25세인데, 예루살렘에서 11년을 치리했습니다.

 

아까 요시야가 죽을 때 몇 살이죠? 39살. 근데 39살 되었는데, 그 아들 여호야김이 25살이야. 그럼 몇 살차이에요. 14살 차이죠. 그러니까 14살 되면 빨리 장가가 빨리. 거의 15살, 16살. 18 잘 넘기지 않습니다. 20살 넘기면 너무 늙었어 그거는. 유대인들이 굉장히 일찍 결혼시켜요. 지금도. 여자를 20살 넘긴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거에요. 여자는 제일 아름다운 때가 16살 때. 16살에서 22살까지가 최고 아름다운 때이고, 그 뒤로는 할매가 되가는 거에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시기 바랍니다.

 

자, 열왕기하서 23장 끝에 하박국, 스바댜, 예레미야 시대라고 쓰면 되겠죠. 이런 분들이 이 시대의 사역자들입니다. 여기서 하박국서로 일단 갑니다. 하박국서를 일단 읽고, 그리고 이제 설명 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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