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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국토는 31만 2685km2로 한반도의 1.4배에 해당한다. 동유럽에서는 최대 면적이며 독일에 버금가는 크기이다. 국토의 동서 길이는 약 690km, 남북은 649km에 이르며 전체의 91.3%가 평야 지대로 남부를 제외한 전 국토가 평탄한 지형을 보이고 있다. 남북을 가르는 비스와(WisLa) 강은 1047km에 달하며 오데르 강(Oder:845km)과 함께 3000여 개에 달하는 호수를 가지고 있다. 최고봉은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타트라 산지의 리시(Rysy) 산으로 해발 2499m이다. 2. 기후 폴란드는 온화한 대륙성 기후 지역에 포함되지만 발틱 해의 영향으로 다양한 기상 변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보통의 서유럽 지역보다 더 춥고 비도 많은 편이다. 봄철은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추워 일교차가 크다. 여름(6~8월)은 더우며 가을(9~11월)에는 비가 많고, 12~3월까지 이어지는 겨울에는 춥고 눈도 많이 내린다. 특히 10월 말~2월까지는 오후 5시께면 어두워진다. 보통 7월에 가장 덥고 2월에 가장 낮은 기온을 보인다. 3. 지역별 특징 1994년 총인구는 3850만 4707명으로 동구 국가 가운데서 최대이며, 인구의 8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도시로는 수도인 바르샤바(Warszawa)에 170만 명, 워치(L z牲에 85만 명, 크라쿠프(Krak ) 75만 명, 브로츠와프(WrocLaw) 65만 명, 포즈난(Poznan) 60만 명, 그단스크(Gdan k) 50만 명, 슈체친(Szczecin)에 42만 5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워치와 카토비체(Katowice)를 중심으로 한 남서부 지역에 인구가 밀집해 심각한 주택 부족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 폴란드는 98%의 높은 문자 해독률을 보이고 있고, 남자의 평균 수명은 67.4세, 여자는 76세이다. 동유럽 국가 가운데서 가장 많은 인구와 면적을 가진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의 틈에서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120년 동안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수난의 역사를 겪기도 했다. 그들 역사의 흔적은 왕도인 크라쿠프, 한자 동맹의 도시이자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지인 그단스크, 인간 유린의 현장 아우슈비츠, 그리고 폴란드 재건의 상징인 수도 바르샤바의 곳곳에 배어있다. 폴란드는 크게 여섯 지역으로 나뉜다. 그 지역들은 수도 바르샤바를 포함하고 있는 마조비아(Mazovia) 지방, 남동부의 마워폴스카(MaLopolska), 남서부의 실레지아(Silesia), 서부의 비엘코폴스카(Wielkopolska), 북서부의 포메라니아(Pomerania) 그리고 북동부의 마주리아(Mazuria) 지방 등이다. 각각의 지역이 한때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에 분할되면서 다른 운명을 걸었지만, 같은 종교와 언어 그리고 인종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어 쉽게 통합될 수 있었다. II. 역사 1. 피아스트 왕조 6세기께 지금의 폴란드 북서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서슬라브인은 10세기께 폴라니족에 의해 통일된다. 그리고 이들은 966년, 폴라니족 피아스트(Piast) 왕조의 미에슈코 1세(Mieszko I)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025년 볼레스와프가 왕위에 올라 피아스트 왕조의 기반을 다지며 지금의 폴란드와 유사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주변 세력의 팽창으로 안정적으로 국가가 발전하지는 못했다. 게르만족은 포메라니아 지방에 진출, 정착하였으며 보헤미아 왕국은 실레지아 지방을, 프로이센(프러시아)은 북부 지역을 각각 점령하며 국가의 기반을 위협하였다. 이에 1226년 마조비아 공은 독일의 튜톤 기사단을 불러들여 북동부의 프로이센을 진압하였다. 1241년과 1259년에 연이어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아 폴란드 남부 지방이 황폐화되는 등 피아스트 왕국은 1320년 통일될 때까지 외세의 침입에 따른 국권의 수호에 힘을 쏟아야 했다. 14~17세기는 폴란드의 전성기로 기록된다. 특히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르 3세는 문화의 부흥과 개혁에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크라쿠프, 루블린, 포즈난 등의 도시가 이 때 세워졌다. 2. 야기에워 왕조 왕위를 상속할 자식이 없이 카지미르 3세가 죽자 왕위는 헝가리의 야드비가 공주에게 계승되었다. 야드비가 공주는 1386년에 리투아니아의 왕자와 결혼하여 양국은 야기에워(JagieLLo) 왕조로 통합되었다. 이 결혼은 다분히 정략적이었는데, 당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에서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독일 기사단의 팽창에 함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0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 연합군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독일의 튜톤 기사단을 물리쳤고 1454년에 시작된 13년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그들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1525년에 폴란드의 속지가 되었고, 1490년에 카지미르 4세는 헝가리의 왕위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 폴란드는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문화와 종교·사회 전반에 걸쳐 역사적 부흥기를 맞았다.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저작을 내놓았으며, 종교면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교조적인 중세의 종교 행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하여 1569년에 공식적으로 합병하였는데,이로써 폴란드는 남쪽의 흑해에서 북쪽의 발틱 해에 이르는 대국가를 건설하며 최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 귀족 계급의 권력화가 이루어져 귀족들의 투표에 의해 왕이 선출되는 등, 왕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몇 왕들은 귀족 계급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국력을 신장시키기에 힘을 쏟았다. 스테판 바토리 왕은 군사력을 강화시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얀 소비에츠키 왕도 투르크 군의 빈 봉쇄를 종식시키고 퇴각시키는 공훈을 세웠다. 한편, 이 시기에 폴란드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족이 농노제와 예수이트 교단의 카톨릭화 정책 등, 폴란드의 지배 정책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크라이나 동부 지방은 폴란드의 통제에서 벗어나 러시아에 예속되었고, 1655년 프로이센은 스웨덴과의 전쟁 패배로 폴란드에 대한 세력 확장을 꾀해 왔다. 이러한 국가적 혼란은 왕권의 약화를 가져와 귀족의 동의 없이 왕은 어떠한 권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1652년에는 귀족 회의에 거부권까지 부여되어 폴란드는 정치 공황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불안과 함께 러시아, 스웨덴, 터키와의 전쟁 등으로 폴란드는 강대국들의 내정 간섭까지 받으며 급격히 쇠퇴해 갔다. 한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왕은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 간의 분쟁으로 야기된 러시아와의 갈등과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개혁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를 이용하여 주변 강대국들은 폴란드의 내정에 적극 개입하였고 마침내 1772년에 폴란드 분할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분할되었다. 3. 분할 시대(1573~1795) 분할이 되자 폴란드 정치인들은 고질적인 귀족 회의의 거부권을 폐지하고 교육 제도를 정비하는 등 일련의 정치·경제 개혁을 시작하였고, 1791년 5월 3일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시작한 초기에는 터키와 스웨덴의 폴란드 침공을 우려한 러시아가 폴란드의 개혁을 지원하여 성과가 있었으나 개혁이 완성될 즈음에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귀족 연합 세력이 러시아에 개입 요청을 하였고, 이를 빌미로 러시아는 폴란드를 침략하였다. 그 결과 폴란드는 1793년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의해 2차 분할이 단행되었다. 2차 폴란드 분할이 일어난 후, 폴란드 내에서는 거국적인 봉기가 발생하였다. 특히 타데우시 코쉬치우스코(Tadeusz K ciuszko)는 농도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조직하여 러시아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사력 앞에는 역부족이었고,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다시 바르샤바를 침공하여 1795년에 3차 폴란드 분할을 주도하여 폴란드의 나머지 영토마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으로 분할되었다. 이 때부터 폴란드는 1919년에 독립할 때까지 120년 동안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4. 망국기(1796~1917) 폴란드가 완전히 분할된 때는 독립 투쟁의 시기였다. 1797년 폴란드 군단이 이탈리아에서 창단되었고,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원정에 10만 명의 폴란드인이 가세하였으며 세 차례의 무장 봉기――러시아에 대항한 1830~1831년 혁명, 프로이센에 대항한 1848년 혁명, 그리고 1863~ 1864년에 러시아에 대항하여 일어난 1월 봉기 등――가 일어났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의 병참 기지로 프로이센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 내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움으로써 폴란드인은 한 줄기 독립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공국은 나폴레옹 군이 러시아에 패배하여 철수함으로써 붕괴되고 그 결과 1815년, 빈 조약에 의해 폴란드는 러시아 황제에 귀속되어 반자치 국가인 폴란드 왕국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세 차례의 민중 봉기를 지나고 나서 반자치 국가였던 폴란드 왕국은 붕괴되고 완전히 러시아에 흡수당하고 말았다. 1864년 봉기를 끝으로 민중 봉기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만 농민 계층을 중심으로 민족 의식은 꾸준히 이어져 갔으며 경제·사회 제도도 부분적으로나마 발전되어 나갔다. 특히 프로이센 점령 지역은 독일의 산업화로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점령 지역은 발전은 늦었지만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자치권이 인정되어 활발한 민족 운동과 정치 활동이 전개되었다. 해외에 망명해 있던 폴란드인들도 독립을 위한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며 점차 정파나 정당의 형태를 띠게 되었는데, 1882년에 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적 정당인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가 비밀리에 조직되었고, 1883년에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oura)가 이끄는 좌파 그룹들이 `폴란드 왕국 사회 민주주의'를 조직하여 폴란드의 독립에 반대하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들과 협력하는 국제 공산주의의 산파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우스드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사회당의 일부 세력이 1908년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정당에 가세하여 폴란드 최초의 공산당인 `폴란드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5. 독립 이렇게 끊임없이 독립에의 의지를 키우던 폴란드는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멸망,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몰락, 그리고 독일 제국의 패망과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힘입어 1918년 자력이 아닌 외부의 힘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건설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선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지역의 행정 및 경제 제도의 차이, 그리고 민족간의 이해가 상충되어 혼란 상태에 빠졌으며, 피우스드스키가 주도하는 독립 운동파와 드모프스키가 주도하는 민족주의파 간의 갈등이 심화됐고 급기야는 비폴란드계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됐던 나루토비치(Gabriel Narutowicz)가 민족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신생 폴란드 공화국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으로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피우스드스키가 군부의 지지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폴란드는 강한 정치적 통제를 가해 독재 국가의 면모를 띠게 되었다. 6. 세계 대전중의 폴란드 1930년대에 들어 폴란드는 소련과 독일 제국 등의 세력 확장으로 또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 특히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력 확장을 꾀하던 독일은 폴란드와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에 서유럽의 방관 아래 침략을 시도하였다. 1938년 독일은 마침내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침략하여 일부 영토를 점령하고 1939년 8월에 소련과의 비밀 조약으로 폴란드를 침략하였다. 나치 독일은 유태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러 폴란드 전체 인구의 20%인 600여만 명이 희생되었다. 7. 공산 정권하의 폴란드 폴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폴란드 노동당을 주축으로 지하 운동을 전개하였고, 런던 망명 정부와도 협력해 나갔다. 1944년 7월에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얄타 회담의 결과로 폴란드는 독일의 일부 영토를 할양받아 국경이 서쪽으로 240km 이동되었다. 한편 폴란드 노동당은 사회주의당을 흡수하여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을 결성하고 친소 정부를 수립하였다. 당시 서기장이었던 고무우카(WLadysLaw GomuLka)는 농업 집단화 정책에 반대하여 실각하였으나 1953년 스탈린 사후, 당 제1서기로 재집권하여 사회주의 체제에 다양성을 둔 독자적인 정책을 펴나가지만 다시 계획 경제 체제로 복귀되어 폴란드 내 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전후 복구 작업으로 공산당 정부는 6개년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토지 개혁 등 사회주의 원칙에 기반을 둔 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했으며, 1952년에는 신헌법이 채택되어 최고 권력 기관인 의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에 돌입한 폴란드는 1970년 12월에 실질 임금 하락에 항의하는 대규모 노동자 시위가 발생하여 고무우카가 실각하고 뒤이어 기에레크(Edward Gierek)가 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경제 재건을 위한 산업화의 추진과 교회와의 관계 개선 등을 꾀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들어 무리한 중공업 정책은 서방의 기술과 자본에 의존하게 되어 외채가 증가하고 상대적으로 소비재 산업이 낙후하게 되어 심한 소비재 부족 현상을 가중시켰다. 급기야는 1980년 7월, 육류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기에레크가 물러나게 되고, 공산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파업권 등의 권한을 가진 자유 노조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 )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야루젤스키(General Jaruzelski)는 1981년 11월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 노조를 불법화시켰으며 바웬사(Lech WaLe瑚a) 등의 자유 노조 지도자와 반체제 인사들을 구금하였다. 계엄령은 1983년 6월 교황의 폴란드 방문으로 해제되었으나 대신 긴급 조치권이 발효되어 폴란드에서는 강압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내 사정은 개선되지 않고 계속되는 물가 상승과 임금 하락, 소비재 부족 등으로 사회 불만이 커져 갔고 다시 자유 노조 중심의 노동자들의 쟁의가 잇따르자 1989년 4월, 정부와 자유 노조는 원탁 회담을 갖고 정치·경제 개혁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원탁 회의 결과 자유 노조의 합법화와 대통령제의 신설, 양원제 실시 등이 합의되었고 1989년 6월 4일에 실시된 전후 최초의 자유 총선에서는 자유 노조가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로써 폴란드는 동구 최초로 비공산 연립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고, 이는 동구 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 자유 노조 정부는 국호를 `폴란드 공화국'으로 바꾸고 헌법의 사회주의 국가 조항을 삭제하여 본격적인 시장 경제 체제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게 되었다. III. 정치 1. 정치 형태 폴란드는 1989년에 동구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헌법을 개정하여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였다. 엄격한 3권 분립보다는 권력의 동질성에 비중을 두어 의원 내각제를 가미한 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의회는 4년 임기의 1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상원(Senat)과 46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하원(Sejm)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하원에서 채택된 법률안을 심사하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상원 의원 100명 전원이 각 주에서 2명씩(바르샤바와 카토비체에서는 3명) 직접 선거로 선출된다. 하원 의원은 조금 복잡한 비례 대표제로 선출되는데, 전체 의석 460석 가운데 391석은 각 주의 49개 선거구에서 7~16석씩 직접 선출되고, 나머지 69석은 비례 대표로 각 정당에 배분된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득표 1, 2위 자를 대상으로 2차 결선 투표를 실시하여 과반수 이상의 득표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임기는 5년이며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현 대통령은 좌파 출신의 알렉산드르 크바슈니에프스키로 1995년 11월 선거에서 바웬사 대통령을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바웬사는 폴란드 민주화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과 급진적인 개혁 정책의 실패로 낙선하게 되었다. 현재 그는 자유 노조의 자문역을 맡고 있다. 최고 권력 기관인 각료 회의는 의장인 총리를 비롯하여 3명의 부총리 및 각 부처 장관으로 구성된다. 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하원에서 동의하여 선출되며, 각부 장관은 총리의 제청에 따라 의회 인준 후 대통령이 임명한다. 현재 폴란드 내각은 공산 계열의 SLD(민주 좌파 연합)와 DSL(폴란드 농민당)의 연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구공산당 출신인 유제프 올렉시(Jozef Oleksy) 총리는 바웬사 전(前)대통령의 폭로로 구소련의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데 본격 수사가 시작되면서 1996년 1월 24일 사임을 표명한 바 있다. 차기 총리로는 SLD 출신의 시모셰비치가 유력시되고 있다. 폴란드는 49개의 주(Voivodships)와 2394개의 자치 시(Gmina)로 나누어져 있고 바르샤바, 워치, 크라쿠프는 특별시로 되어 있다. 폴란드는 현재 개혁의 일환으로 1990년 지방 자치법을 제정하여 완전한 지방 자치의 시대를 맞고 있다. 사법부는 대법원, 최고 행정 법원, 일반 법원, 특별 법원 등을 두고 있고, 일반 법원은 주 법원(Voivodship court)과 지방 법원(District Court)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정당 현황 1990년 헌법에서는 정당 설립에 관한 의무 규정을 두고 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총선 전인 1992년 5월 당시 무려 135개의 정당이 등록되어 있었다. 1993년 9월 총선 결과 하원에 진출한 정당은 6개 정당에 불과하다. 공산 계열인 SLD가 총의석 460석 가운데서 171석을 차지하였고, 이어 역시 공산 계열의 PSL(농민당)이 132석, 민주 연합이 74석, 노동당이 39석 순이고, 자유 노조는 불과 16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한편 상원 100석은 역시 SLD가 37석을 얻어 수위를 지켰고, PSL 36석, 자유 노조 10석, 민주 연합 4석의 순이다. 현재 대통령, 내각, 의회를 장악하고 폴란드 정치를 이끌고 있는 SLD는 공산 시절인 1948년 12월 출범한 통일 노동자당의 전신인 SDRP(사회 민주주의당)를 주축으로 8개의 좌파 정당들이 1991년 10월 총선을 앞두고 연합한 정당이다. SDRP는 통일 노동자당이 1990년 1월 해체됨으로써 탄생한 정당으로 폴란드 사회주의 전통을 존중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인권과 자유의 존중, 사회 민주주의, 다당제, 시장 경제 도입 등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다. 3. 우리 나라와의 관계 1989년 수교 이후 우리 나라와는 폴란드 내 투자 환경의 미숙으로 그리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대우 그룹이 1995년 11월 14일 폴란드 국영 자동차 업체인 FSO사를 인수함으로써 1995년 6월의 FSL사의 인수와 함께 폴란드 최대의 자동차 그룹으로 부상하였다. 또 1996년 들어 LG 그룹도 동구권 및 독립 국가 연합 진출을 위한 교두보 마련으로 4000만 달러를 투자, 폴란드 은행인 페트로방크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양국 교역량도 1991년 4억 달러를 정점으로 약 3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무역 수지도 계속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폴란드 수출 품목으로는 전기, 전자 제품, 직물, 자동차 등이 주를 이루며, 수입 품목으로는 화학 제품과 철강, 금속 제품 및 원사 등 원자재 수입이 주가 되고 있다. 폴란드와는 1993년 12월 24일 부로 사증 면제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이 밖에 문화 분야에서의 협력도 활발하여 각종 단체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고, 1983년에 바르샤바 대학의 동양 학부에 한국학과가 설치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1987년에 한국 외국어 대학교에 폴란드어과가 개설되었다. 폴란드에는 유학생, 상사 주재원 등 약 110명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IV. 경제 1989년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체제 전환에 나선 폴란드는 경제 개혁을 위한 야심찬 시장 경제 계획을 수립하였다. 시장 경제화를 위한 충격 요법(Shock therapy), 이른바 빅뱅식 처방을 실시하여 급속한 경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사회적 반발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 그리고 개혁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긴축 정책의 실시로 개혁 초기 폴란드 경제는 심한 침체 현상이 나타났다. 1992년 들어서면서 폴란드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하여 동구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1.5%의 플러스 성장을 하였고, 1990년 초부터 연 600%에 달하던 인플레이션도 40%대로 억제되었다. 곧이어 국영 기업의 광범위한 사유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만성적인 예산 부족도 1993년 중반, 22%의 부가 가치세 도입 등으로 조세 수입이 늘어 균형을 찾게 되었다. 특히 성장의 걸림돌이었던 외채 문제도 양대 채권 그룹인 파리 클럽과 런던 클럽과의 협상이 타결되어 공적 외채 50%, 민간 외채 42.5%가 삭감되었다. 이로 인하여 폴란드는 추가적인 차관 수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폴란드의 성장세는 계속 이어져 1994년에는 5%, 1995년에는 6% (EBRD 발표)의 본격 성장 국면을 맞고 있다. 그러나 시장 경제로의 성공적인 이행 뒤에는 치러야 할 대가도 적지 않다. 우선 1994년 말 기준, 16%에 달하는 실업률과 여전히 30% 이상을 웃도는 인플레율, 그리고 기업들의 경영 기술 부족, 즉 시장 경제가 자리잡혀 갈수록 현금 부족, 금리 상승, 외국 업체와의 경쟁 등과 같은 경영 압박과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경험의 부족은 무역 적자와 함께 폴란드 경제가 풀어 나가야 할 과제이다. 폴란드 정부는 1996년 1월 1일부터 화폐 개혁을 단행, 즈워티(zLoty, zL)화의 가치를 1만분의 1로 절하한다고 발표했다. 지나치게 고액권이었던 탓에 국제 및 국내 결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995년 5월의 환율은 1달러당 2.36zL.(구화폐로는 2만 3600zL.)이다. 보조 화폐로는 그로시(groszy. 100 groszy=1zL.)가 있다. 폴란드의 GDP(국내 총생산) 총액은 약 870억 달러로 동구 국가 가운데 최고를 기록하지만 1인당 GNP(국민 총생산)는 2270달러로 슬로베니아, 체코, 헝가리에 못 미친다. 월평균 임금은 200달러가 채 못 되고 있다. 교역 부분에서는 1994년 기준, 수출 170억 달러로 만성적인 무역 적자를 나타내고 있다. 기계류, 경공업 제품, 철강과 화학 제품 등을 수출하고 기계, 장비류, 화학 제품, 식료품과 농산품을 주로 수입하고 있다. 폴란드의 최대 수출국은 독일로서 전체 수출량의 35.7%를 차지한다. 이어 네덜란드 6%, 러시아 5.4% 순이다. 주요 수입국으로 역시 독일이 28%를 차지하고 이어 이탈리아 8.5%, 러시아 6.8% 순이다. V. 문화와 생활상 1. 민족과 언어 민족 구성은 총인구의 98%가 폴란드인으로 단일 민족 국가라 할 수 있고, 이 밖에 독일계가 28만 명, 유태 1만 5000명, 백러시아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폴란드인은 1300만 명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미국에 약 1000만 명으로 가장 많은 수가 살고, 러시아에 100만 이상, 브라질에 80만 명, 프랑스에 60만 명 등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시카고는 폴란드를 포함하여 세계의 도시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폴란드인 거주하고 있는 도시이다. 해외 거주 폴란드인은 폴로니언(Polonian)이라 불리고 그들의 공동체를 폴로니아(Polonia)라고 부른다. 언어는 서슬라브어 계통인 폴란드어가 유일한 공용어이다. 폴란드어는 체코어, 슬로바키아어와 유사한 계열이다. 32자의 라틴 문자를 사용하며, q, v, x는 사용하지 않는다. 문법 구조는 유럽 언어 가운데서 가장 복잡하며, 발음은 까다로운 편이다. 2. 종교 폴란드 국민의 95%가 로마 카톨릭 신자이다. 폴란드에서는 공산 정권기에도 유례 없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러시아와 발칸 국가들이 동방 정교를 받아들인 반면 폴란드는 966년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가장 동쪽에 위치한 카톨릭 국가가 되었다. 폴란드 교회는 1978년 폴란드인인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바티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폴란드에는 크라쿠프, 포즈난, 바르샤바 그리고 브로츠와프, 4곳에 대교구가 설치되어 있고, 루블린에는 1918년에 설립된 카톨릭 대학이 있다. 또한 블랙 마돈나 상이 있는 쳉스토호바(Cz扈stochowa)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폴란드의 카톨릭 교회는 정부에 항상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1990년부터는 공립 학교에서의 자발적인 종교 교육이 부활되었고 1993년부터는 모든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서 종교의 가치에 대한 지지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 예술과 인물 폴란드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피아노의 시인 쇼팽, 라듐 및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은 퀴리 부인 등을 배출해 낸 나라이며 국민들의 문화적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화가인 얀 마테이코(Jan Matejko:1838~1893)는 폴란드 역사의 결정적인 장면들을 극적인 시각 이미지로 그려냈다. 그의 역사화는 폴란드의 어느 화랑에서나 볼 수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낭만주의 민족 시인인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1798~1855)가 유명하다. 그는 쇼팽과 함께 폴란드 혁명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글을 통해 잃어버린 조국을 찾으려 했으며 러시아의 압제 속에 폴란드의 윤리와 도덕 문제를 다루면서 조국의 독립과 예수 부활에의 희망을 함께 다루었다. 그 밖에 『쿠오 바디스 Quo Vadis?』로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헨릭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1846~1916)의 역사 소설들과 195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기의 현대 작가인 카지미에시 브란디스(Kazimierz Brandys:1916∼ ), 그리고 스탈린 시기의 폴란드를 묘사한 타데우시 콘비츠키 Tadeusz Konwicki:1926∼ ) 등이 훌륭한 폴란드 문학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영화 부분에서도 폴란드는 안드제이 바이다(Andrzej Wajda), 크쥐시토프 자누시(Krzysztof Zanussi), 발데마르 크쥐스텍(Waldemar Krzystek),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Krzysztof Kieslowski) 등의 거장을 배출해 냈고 상업성에서 벗어난 순수 예술 영화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4. 생활상 이민족에 의한 지배와 탄압을 수없이 당하고, 심지어 국가의 소멸이라는 역사의 상처까지 남아 있는 폴란드인은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억압에 대한 반동으로, 강한 자유에 대한 의지와 권력에 대한 불신감도 함께 보인다.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마다 종교적 신념으로 이를 극복해 내며 폴란드인을 하나로 묶어 왔다. 폴란드인들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악수로써 서로를 반긴다. 여자가 먼저 악수를 청하기도 한다. 또한 서로 길을 가다 부딪히거나 발을 밟더라도 사과하지 않는다. 무례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습관이 그럴 뿐이다. 폴란드 가정에 초대받았을 경우, 그들은 최고의 환대를 베푸는데 그 때 그들의 제안에 따르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 호의에 대한 환답이 된다. 만약,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다면 꽃이나 초콜릿을 사가지고 가도록 하고, 식사 때는 여주인을 위해 건배하자고 제안하면 최고의 매너를 갖춘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또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고, 계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오는 것이 예의이다. 식사 후에는 항상 고맙다는 의미로 “지엥쿠예(dzi扈kuje!)”라고 말하며 일어서도록 한다. 5. 명절과 풍습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폴란드의 최대의 명절이다. 가장 흥미로운 부활절 행사로는 고도인 크라쿠프 남서부에 있는 칼바리아 제브지도브스카(Kalwaria Zebrzydowska)에서 열리는 7일 동안의 예수 수난극을 들 수 있다. 이 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증인으로 지켜 보는 가운데 예수가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고, 이어 부활하는 모습을 재연한다. 11월 1일 만령제에는 공동 묘지를 방문해 초와 꽃으로 묘를 장식한다. 19세기 중반께에 폴란드는 서유럽으로부터 크리스마스 트리 풍습을 받아들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식사 전, 식탁보 밑에 마른 풀을 놓아 두고 모두 자리에 앉으면 각자 한 줄기씩 뽑아 든다. 이 때 긴 것이 나오면 장수를 의미하고, 짧은 것은 순탄치 않은 미래를 의미한다. 식사 때는 전통적으로 식탁에 자리 하나를 더 만들어 두는데 이는 갑작스런 손님의 방문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식사는 12개의 코스로 마련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12사도를 의미한다.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에는 모든 성당에서 특별 미사가 드려지고 신정 전야에는 의례적인 무도회가 열린다. 6. 물가 수준 폴란드 여행시 하루 비용은 낮은 등급의 호텔에서 숙박하고 레스토랑에서 하루 한 끼를 먹고 입장료와 2등칸을 이용한 기차 등을 이용할 경우 하루 25달러 정도면 된다. 대부분의 입장료는 보통 1달러 이하로 저렴하다. 한 곳에 머물러 민박을 하면서 언어와 풍습을 익히고자 한다면 하루 20달러면 충분한데, 이는 여행 안내소에서 알선해 준다. 폴란드에서 팁은 일반화되어 있다. 보통 요금의 10% 정도면 족하고 레스토랑에서는 10%의 팁이 포함되어 계산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주지 않아도 된다. 극장이나 레스토랑 등지의 휴대품 보관소나 화장실을 이용할 때는 10센트 정도의 사용료를 작은 그릇에 넣으면 된다. 7. 일과 시간 및 공휴일 폴란드의 상점들은 보통 오전 11시~오후 7시까지 영업을 한다. 그러나 근래 들어 시장 경제가 자리잡히면서 영업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은행은 오전 8시~오후 1시까지, 주요 지점인 경우는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에 휴관하고 9시나 10시~3시나 6시까지 문을 연다. 공휴일로는 신정(1월 1일), 부활절(3월이나 4월중), 노동절(5월 1일), 제헌절(5월 3일), 승전 기념일(5월 9일), 그리스도 성체절(Corpus Christi:5월이나 6월중 목요일), 성모 승천일(8월 15일), 만성절(11월 1일), 독립 기념일(11월 11일), 크리스마스(12월 25일~26일) 등이 있다. 독립 기념일은 1918년 11월 11일, 폴란드가 120여 년의 망국기를 끝내고 유럽 지도에 재등장한 것을 경축하기 위한 날이다. 신정 전야에는 고급 호텔을 제외하고는 파티를 위해 대여되거나 문을 닫는 곳이 많다. 8. 축제 폴란드에서는 다양한 문화, 예술 축제가 열린다. 대표적 축제로는 고전 음악제가 완추트(5월), 토룬(9월), 브로츠와프(12월)에서 열리고, 현대 음악제는 브로츠와프(2월), 포즈난(3월), 자코파네(7월), 바르샤바(9월), 크라쿠프(11월)에서 개최되며, 재즈 페스티벌은 브로츠와프(5월), 바르샤바(10월), 크라쿠프(9, 10월)에서 각각 열리고 있다. 대표적인 폴란드 민속 축제는 5월에 토룬에서, 그리고 8월에 지비에치와 자코파네에서 볼 수 있고, 영화제는 5월에 크라쿠프에서, 그리고 9월에 그단스크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다. 9. 주의 및 금기 사항 폴란드인들은 대단한 애연가이므로, 식당이나 기차, 바 등에서 자리를 잡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거리에서는 아이와 함께 앉아서 구걸하는 여자들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 대부분 거칠게 나와 당황하기 쉽다. 폴란드의 치안 상태는 여타 유럽의 대도시에 비해 안전한 편이지만 외진 곳이나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소매치기를 주의하여야 한다. 특히 남루하게 입고 역 부근이나 시장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주의하고, 환전소 앞에 서서 무어라 말을 걸어 오는 사람이 있으면 못 들은 체하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만약, 도난이나 사고를 당해 경찰서에 신고를 하러 간다면 폴란드 경찰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각오해야 한다. 또 그들은 영어에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통역할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현명하다. 폴란드 경찰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외국인들에게 다소 냉소적이다. 10. 언론 매체 폴란드는 1990년의 헌법 개정에서 검열 제도를 폐지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여, 1993년 현재 71종의 신문이 발행되고 발행 부수도 638만 1000부에 이르고 있다. 정기 간행물은 3139종에 530만 부가 발행되는 등 개혁과 함께 바야흐로 출판의 전성 시대를 맞고 있다. 폴란드 내 주요 일간지로는 자유 노조계 인사들이 지하에서 발행하다가 1989년부터 공개 발행하고 있는 『가제타 비보르차Gazeta Wyborca』가 있는데 이 신문은 전국판과 18개의 지역판이 발행되고 있다. 현재 주말판 기준, 77만 부 발행되는 폴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문이다. 주말판에는 세계 정세를 다룬 세계판이 포함된다. 또 전(前)정부 기관지로 중도 성향의 『제치포스폴리타Rzeczpospolita』가 25만 부, 1944년에 창간된 다소 대중적인 『지치에 바르샤비Zycie Warszawy』가 25만 부 발행되고 있고, 도시마다 지역 신문이 발행되고 있다. 주간지로는 1956년 창간되어 정치·경제·문화 등을 다루고 있는 개혁 성향의 『폴리티카Polytyka』와 Forum지, 그리고 영자 주간지로 Warsaw voice 등이 있다. 특히 여성지의 인기가 대단한데, ‘여자 친구’라는 뜻의 『프시야치우카PrzyjaciL a』는 무려 130만 부나 발행되고 있고, ‘여성과 삶’이라는 뜻의 『코비에타 이 지치에Kobieta i Zycie』도 40만 부나 발행되고 있다. 최근 들어 1990년에 창간되어 풍자적인 기사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노(No)’라는 뜻의 Nie도 73만 부나 발행되며 인기를 얻고 있다. 방송 부문에서는 1993년 말 현재 약 1100만 대의 텔레비전과 1000만 대의 라디오가 보급되어 있다. 1992년 12월 방송의 국가 독점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어 1994년 1월에는 폴란드 최초의 민간 상업 방송이자 위성 방송사인 폴샛(Polsat)이 설립되었다. 현재 두 개의 공영 채널이 있어 각각 22시간, 16시간씩 방송을 하고 있고, 하나의 민영 방송이 18시간 방송하고 있다. 그리고 위성 방송 채널인 TV폴로니아(polonia)가 하루 16시간 방송을 하고 있다. 이 밖에 각 지역 방송국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 라디오 방송으로는 폴스키에(Polskie Radio)를 비롯 4개의 전국 채널을 가진 홈 서비스(Home service), 그리고 9개 국어 방송을 내보내고 있는 포린 서비스(Foreign Service) 등이 있다. 11. 음식 우리 나라의 맥주집 정도의 대중적인 음식점으로 폴란드에는 밀크바(bar mleczny)가 있다. 폴란드에서 바의 개념은 가벼운 스낵이나 음료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칵테일도 대개 과일 칵테일을 의미한다. 밀크바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레스토랑에도 없는 그 지역의 별미를 맛볼 수 있는데, 콤포트(Kompot)라 불리는 과일 주스도 먹을 만하다. 그러나 밀크바에서 고기 요리는 주문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격이 다른 곳의 서너 배가 넘기 때문이다. 밀크바에서는 셀프 서비스가 원칙이다. 비교적 자유롭고 밝은 분위기의 이 곳에서 자연스럽게 현지인과 어울리면서 의외의 별미를 맛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 폴란드는 수프의 나라이다. 다양한 원료와 맛과 향을 맛볼 수 있다. 특히, 근대를 이용한 보트빈카(botwinka), 양배추를 넣은 카푸시니악(Kapu niak), 감자가 주원료인 크루프닉(krupnik), 경단이 든 고기 수프인 로수우(ros ), 면이 들어간 자치에르카(zacierka) 등과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바르시치(barszcz)는 적근대를 삶아 끊인 것으로 가장 대중적인 것 가운데 하나이고, 양배추와 버섯이 주원료인 쿨레비악(kulebiak) 등이 먹을 만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폴란드 요리로는 비고스(bigos)와 피에로기(pierogi)가 있는데, 비고스는 소금에 절인 양배추와 고기를 넣고 끓인 것으로 신맛과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피에로기는 고기 완자의 일종으로 감자와 치즈, 양배추나 버섯 등과 곁들여 먹는다. 이 밖에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요리로 사과와 곁들인 구운 오리 고기인 카츠카(kaczka)와 크림 소스를 얹어 다진 스테이크인 즈라스(zraz), 그리고 돼지 족발에 완두콩과 절인 양배추를 곁들인 골론카(golonka) 등이 있다. 폴란드에서는 감자와 버섯을 이용한 요리를 많이 맛볼 수 있고 우리의 김치처럼 그들은 오이 피클을 담가 먹는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스낵으로는 바게트에 양파와 치즈, 그리고 버섯을 얹은 자피에칸카(zapiekanka)가 있고, 생과일이 듬뿍 든 아이스크림도 맛이 훌륭하다. 폴란드인은 애주가들이다. 1991년 총선에는 맥주 애호가당이 출현하여 무려 16석의 의석을 얻은 적도 있다. 알코올 중독은 폴란드의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18세 이하의 청소년에게는 술을 팔지 못한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술은 그들의 국민주로 대접받는 보드카인데 추운 지방의 술답게 알코올 농도 40%를 웃도는 독한 술이다. 맥주는 독일이나 체코산 맥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비에츠(Z饍wiec), 레자이스크(Lezajsk), 오코침(Okocim), 피아스트(Piast) 등이 그런 대로 먹을 만하다. 와인 종류는 전량 수입되고 값 또한 매우 비싸다. 폴란드인들은 건배할 때 “나 즈드로비에 Ⅰ(Na zdrowie Ⅰ:건강을 위하여)”나 100세까지의 장수를 기원하는 “스토 라트!(Sto lat!)”라고 외친다. 12. 쇼핑 정보 민속 공예품 생산자 협동 조합인 체펠리아(CEPELIA)에서 각종 토산품과 민예품 등을 살 수 있고, DESA에서는 현존하는 미술가들의 작품을 구할 수 있다. 폴란드에서는 특히 호박 목걸이가 기념품으로는 제격인데, 25달러 이하의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쇼핑할 때 유의할 사항은 1945년 5월 9일 이전에 제작된 예술품과 책을 포함한 어떤 품목도 해외 반출이 금지되어 있고, 반면에 100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물건을 반출할 때는 면세가 된다는 점이다. 또 다량의 수정이나 호박 등의 귀금속을 소지하고 있으면 조사를 받게 되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영수증은 고가품일수록 보관해 두는 것이 좋다. 한편, 개혁 이후 많은 노점상들을 거리에서 볼 수 있고 특히 벼룩 시장에서는 의외의 골동품을 헐값에 구할 수도 있다. 13. 관광지 폴란드는 많은 역사 유적지와 다양한 자연 환경이 매력적인 나라이다. 발틱 해에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과 3000여 개의 호수에서 즐길 수 있는 수상 스포츠, 그리고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타트라 산의 자코파네(Zako-pane) 등은 수려한 경관과 함께 레저를 겸할 수 있는 명소로 꼽힌다.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은 폴란드 최대의 박물관으로 크라쿠프의 차르토리스키(Czartoryski) 박물관과 함께 폴란드의 문화와 예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포즈난에 위치한 악기 박물관과 바르샤바 서쪽 50km 지점에 위치한 젤라조바 볼라(Zelazowa Wola)의 쇼팽 생가는 음악 애호가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또한 폴란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나치 만행의 상징인 오시비엥침(殘wi扈cim)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박물관이다. 정문의 “노동이 자유를 준다(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인상적인 이 곳에는 유태인을 처형했던 가스실과 처형당한 사람들의 사진과 머리카락, 개인 소지품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비극적인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준다. 13세기 독일의 튜톤 기사단이 자리잡았던 말보르크(Malbork) 성은 유럽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중세의 성이다. 14세기에 세워진 리즈바르크 바르민스키(Lidzbark Warmi ski) 성도 덜 알려지긴 했어도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왕도인 크라쿠프의 바벨(Wawel) 성은 수백 년 동안 폴란드 왕국의 상징이 되어 왔고, 대부분의 역대 왕들이 부속된 성당 안에 잠들어 있다. 한편 바르샤바에는 17세기에 건축된 빌라누프(Wilan ) 궁전과 18세기의 와지엔키(Lazienki) 궁이 있는데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극치를 이루는 성이다. 또한 폴란드의 어느 도시를 가보아도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많은 성 등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역사 도시로는 1596년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를 꼽을 수 있는데, 이 곳은 UNESCO(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에 의해 문화 유산 보존 지역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특히, 전쟁의 피해를 비교적 덜 입은 탓에 값진 문화 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중세 도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 준다. 중세에는 교역의 중심지로서 중앙 광장(rynek)을 중심으로 마리아 교회와 1364년에 세워진 유럽의 명문 야기엘로니언 대학(Uniwersytet Jagiellon ki)이 있다. 한편, 폴란드에서는 여행자와 국토 애호가 협회가 전국에 420개의 지점을 두어 250여 개의 호텔, 유스호스텔, 캠핑지 등을 운영하고 있고, 국영 여행사인 오르비스(Orbis)가 1923년에 설립되어 전국에 162개의 지점과 54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