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최후의 전투 재현

워털루 전투 195주년을 맞아 벨기에 남부 워털루에서 20일(현지시간) 당시 전투를 재현하는 행사가 열렸다. 관중들은 인근 워털루 전투 기념 ‘사자상 언덕’에서 행사를 지켜봤다. 워털루 전투는 1815년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군 7만2000명과 웰링턴·블뤼허 장군이 이끄는 영국·프로이센 연합군 12만명이 벌인 전투다. 이 전투에서 진 나폴레옹은 대서양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돼 생을 마감했다. [워털루 AFP] 2010.06.22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 전쟁의 일부)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프랑스어: Bataille de Waterloo)는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웰링턴, 블뤼허가 이끄는 영국, 네덜란드 및 프로이센 등이 포함된 연합군이 싸워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이며 여기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2번째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배경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다음해 4월에 폐위되어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빈 회의에서 전후처리 문제로 연합군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본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엘바섬을 탈출해 남프랑스의 주앙에 상륙한 뒤 병사를 모으면서 파리로 향했다. 도중에 나폴레옹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네 원수와 술트 원수를 만났지만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동조하게 되어 7,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3월 20일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동맹국에게 공존을 주장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복귀 소식은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그 이상으로 프랑스 제국의 해체로 인해 생기는 영토와 이득을 욕심낸 연합국은 일제히 단결하여 각 방향에서 프랑스를 향해 진격했다.
나폴레옹은 신규로 징병한 병력을 더해 각 방향에 대한 방어를 준비하면서 주력군 12만 4,000명을 북쪽 방향에 집중시켰다. 웰링턴군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출발한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의 9만 5,000명의 연합군이었다. 동시에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발한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은 11만 3,000명의 병력이었다. 병력을 비교한다면 총 합계에서는 프랑스군은 연합군에게 크게 뒤지지만 각각 나눠 비교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따라서 신속하게 기동하여 각개격파를 성공시킨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중핵은 역전의 대륙군이 차지하고 있었고, 불패를 자랑하는 근위대도 건재해 있었다. 질적인 우위는 나폴레옹에게 있었다.
먼저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기 위해 네 원수에게 병력 2만 4,000명을 맡겨 웰링턴군과 카트르 브라에서 전투를 벌이게 하고는 자신은 8만 병력을 이끌고 리니에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였다.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에게 16,000명의 사상자란 피해를 주었지만 완벽하게 격파한 것은 아니었다. 퇴각한 프로이센군은 블뤼허 원수가 중상을 입어 참모장(參謀長)이었던 그나이제나우 장군이 대신 지휘를 맡게 되었다.
웰링턴은 블뤼허와 합류한 뒤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으나 블뤼허가 후퇴했기 때문에 자신의 군도 후퇴시켰다. 그 선봉과 전투를 벌였던 네 원수도 나폴레옹과 합류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동쪽으로 완전히 퇴각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다음날 아침 에마뉘엘 드 그루시 원수에게 3만 명의 별동대를 주어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웰링턴과의 합류를 목표로 서쪽으로 진군 중이었다.
호우 속에 후퇴한 웰링턴군은 몽-생-장에 구축한 방어 진지에 도착했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서쪽으로 우회할 것을 두려워해 1만 5,000명을 우익에 배치해 수비를 굳건히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웰링턴군 정면에 포진했다. 보병 사단을 전면에 배치하고, 기병 여단을 그 후방 양익에 배치했다. 거기에 좌우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중앙 후방에는 근위군을 결전용 예비 병력으로 배치했다. 웰링턴은 보병대를 전면에 전개하고 중앙 후방에 기병 사단을 집중 배치했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를 우선시 하겠다는 포진이었다.
전날밤의 비로 인해 땅이 진흙탕처럼 변해버려 대포의 이동이 늦어지는 것 때문에 나폴레옹은 공격 개시 시간을 아침에서 오전 11시로 늦추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프랑스군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진행과정
'워털루 전투' 상세도여기저기 병력을 분산한 결과 프랑스군 7만 2,000명에 대해 웰링턴군 6만 8,000명이 워털루에서 맞붙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연속으로 포격을 가해 웰링턴군 전선을 압박해 보병 사단의 진출로를 여는 한편, 아군 좌익에 위치한 우구몽 성 저택에 공격을 집중해 그곳을 교두보로서 노리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실제 그곳은 커다란 전략적 가치는 없었고, 나폴레옹은 이 공격을 통해 웰링턴의 중앙 병력을 유인해내기를 기도했지만, 웰링턴은 이에 넘어가지 않고 다만 우익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약간의 병력을 보냈을 뿐 예비 병력을 풀지 않았다.
웰링턴이 의지하고 있던 진지는 가로로 긴 산등성이로 횡대로 포진하기엔 아주 좋은 방어 진지였다. 웰링턴군은 방어에 매진하면서,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부대를 산등성이 너머로 후퇴시켜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하길 계속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보냈던 그루시 원수를 불러들이기 위해 전령을 보낼 것을 지시했으나, 명령을 받은 장군은 겨우 1명의 전령만을 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나폴레옹은 전령을 보낼 때 상당히 많은 숫자의 전령을 보냈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몽-생-장의 산등성이에 맹포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산등성이 너머로 후퇴한 웰링턴군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을 때, 정오를 지나면서 프로이센군의 전위가 전장에서 멀리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각개격파 전략을 달성하려면 양군이 합류하면 안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그곳에 4개 사단을 급파했다. 병력의 여유는 이제 없었다.
오후 1시를 넘기며, 포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에르몽이 지휘하는 중앙 4개 사단이 전진했다. 대대 단위로 3열 횡대. 정면병력 200명, 27열의 밀집횡대에 대해 웰링턴은 우익의 라-에-상트에 있던 농가를 방어 거점으로 삼아 방어했으나, 이 공격으로 격전 끝에 함락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