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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김광진 경력 배경-실화소설]
제목: 119 아저씨 躍進 앞으로...
글 김 우영
백년 인생의 오십이 넘으니
반생을 이미 시서(時序)로 그르쳤네
세상에 난리가 날 줄 누가 알았으리
집에 쌀 한 섬도 없구나
강을 건너고 맨손으로 범 잡음을 내 어이 부러워하랴만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 구하니 이 아니 서글픈가
고을 이름이 늙은 나를 편안케 하기 알맞으니
한 굽이 맑은 강물이 집을 둘러쌌구나
-- 月堂 김대경 詩人의 ‘謫安老縣’의 詩 全文
위 시는 고려와 조선조의 대 문호로 이름을 널리 떨친 나주 김 공 羅州金公 15세손인 월당 月堂 김 대경 시인의 시 로써 당대 최고의 문장만 모아 놓은 ‘동문선 東文選’에 실려 있는 시 중에 한 편이다. 당시 세상이 하, 수상했던 시절의 벼슬을 마다하고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조용한 산 고을로 돌아와 비로소 안식을 취하며 지나온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탄식조로 읊조렸던 시 이다.
이 시대 최고의 휴매 니스트이며 유장한 문장 文章만을 고집하는 김 규태 圭泰 작가는 11월 9일, 즉 119 소방의 날에 특별한 초청장을 받고 서울로 가는 중이다. 같은 문중이며 가까운 일가 一家인 119 日一救 (남 55,5세) 아저씨가 행정자치부 산하 서울특별시 소방본부 구조구급과장으로 발령을 받고 취임식을 갖는다고 초청장을 보내 왔기 때문이다. 마침 차창 밖에는 축하의 서설 瑞雪이 흩날리며 초겨울 눈이 사락사락 내리고 있었다. 김 작가는 속으로 되 뇌였다.
‘아하, 의미 있는 눈이로구나. 눈아, 어서 내리 거라 온 대지를 하얗게 덮히도록 말이야.’
김 작가는 119 아저씨를 생각할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시 작품이 바로 월당 月堂 김대경 시인 詩人의 적안로현 ‘謫安老縣’ 이란 시 詩이다.
월당 선조의 성품과 119 아저씨의 일치된 성품 때문이다. 119 아저씨 이 분은 매사에 당당하고 담대하며 호연지기 浩然之氣를 풍긴다는 것이다. 가끔 만날 때 마다 술자리에서 내뱉는 그의 당찬 말씀은 이렇다.
“이 노옴에 세상이 어쩌려구 그러는지. 밝고 정의롭지 못하고 자꾸만 저 나락 奈落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말이야. ”
“왜 그러세요. 또 속상한 일이 생겼어요?”
“음 조카님, 잘못은 저희들끼리 해놓고 말이야. 난 찬밥 신세이니 에이잇 더러운 세상이야. 쳇. . . . . . ”
“그려 려니 하세요. 이 세상 자체가 고통이 아니던 가요!”
“그으런가 참 내 . . . . . . ”
“119 아저씨. 뛰어난 고대의 성불 成佛, 또는 성불도가 成佛道家로 추앙을 받던 석가모니 釋迦牟尼가 전 세계를 운수행각 雲水行脚 만행 萬行을 하다가 잠시 집에 쉬러 들어 왔는데 마침 아내가 해산을 하더래요. 마굿간에서 어렵게 힘을 쓰던 그의 아내가 아이를 쑥 낳고는 부릅 튼 입술로 ‘羅睺羅’라고 하더래요. 라훌라는 말은 석가의 아들 이름으로써 심신수행에 방해가 되는 피붙이 ‘장애 障碍 ’란 뜻이지요. 그 라훌라는 후에 최초의 사미승이 되었다지요. 성철 스님도 속세에서 얻은 딸이 하나 있는데 수행에 불필요한 존재가 태어났다 하여 그 이름을 ‘불필 不必’이라고 지었지요. 나훌라 라는 말은 장애의 뜻이기도 하고, 또는 고통이라는 말로 해석되는 말인데, 태초에 인간의 출생부터가 이미 장애와 고통의 수반이라는 뜻이겠지요. ”
“오오 맞아. 그래서 그런지 인생사는 것 자체가 늘 장애이고, 고통이며, 번민의 연속이야. ”
김 작가는 119 아저씨의 정의감에 불타는 눈빛을 보면서 종종 김 대경 선조의 성품과 기개를 비교해 보곤 하였다. 김 대경 선조는 고려 공민왕 때 종2품 벼슬인 봉익대부 奉翊大夫증직 贈職인 보문각 寶文閣 대제학 大提學에 까지 올랐으며 문충 文忠아이라 시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에서 소문난 올 곧은 정의파요, 바른 선비 상의 사표 師表로 추앙 받던 일가 선조의 자랑스러운 인물 중에 한 분이다. 옳지 않은 길에는 가지 않고, 바른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던 선조이며 뛰어난 문장가요, 시백 詩伯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당파 다툼과 왕권 싸움으로 지엽적이고 치졸한 행위들이 난무하던 터 이어서 정의가 사라지고 뜻있는 선비들이 낙향하여 시름에 젖던 그야말로 세상이 하, 수상하던 시절이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벽창호요, 음해와 누명으로 산수벽촌으로 유배지를 보내거나 사약 死藥으로 인생을 마감지어야 했다. 반면 당파싸움과 왕권경쟁에 적당히 줄만 잘 서면 호의호식은 물론 후손까지 잘되는 시절이었다.
또 요즘의 정치사화구조는 어떠한가. 시대만 틀릴 뿐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게 근래의 정치적, 사회적인 세태라고 김 작가는 생각했다. 이러한 시대에 사는 열혈남아 대장부 119 아저씨의 손에는 늘 불끈 힘이 쥐어지는 많아졌다. 아닌 것은 아니고 틀린 것은 틀려야 하는데 적당히 타협하고 중간의 지점에서 이익이 되는 곳에 빌붙어 기생하는 오늘의 세태에 한탄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니 119 아저씨는 그런 조직 속에서 왕 따를 당하고 오해를 받는 것이다.
“섬에서 온 주제에 뭘 안다고 까불어.”
“그러게 말이야. 지가 뭍사람들의 심정을 알기나 해. 그저 돌과 바람을 맞으며 바다만 바라보고 사는 섬 놈 주제에 쯧쯧쯧 . . . . . .”
“제주 섬 촌놈이 육지에 와 자리 잡았으면 잘 따르기나 해야지.”
소방서 消防署. 119 아저씨의 직장은 거친 ‘필요의 민원’ 과 ‘생명의 베품’ 이란 양면성을 지닌 곳이다. 요컨데 우리의 삶의 근원인 출생에서부터 요람에 이르기까지 두루 어루만져주고 살길을 살펴주는 곳이다. 따라서 특별한 사명의식으로 부터 창생된 각별한 소명의식을 통하여 업무에 종사해야 되는 곳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며 보람된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좋은 직장이다. 반면 자신의 직분에 처한 입장에서 언제든지 불의와 타협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호의호식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는 야누스적인 두 얼굴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어느 사회나 직장이나 동전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의 근본이 일 수 있다. 자신의 인품과 덕목으로 자신이 처한 직분에서 최선을 다 하느냐 또는 적당이 자리 매김을 하고 직분을 이용한 이익을 추구하느냐에 그 사람의 보람된 삶이냐, 짓눌린 삶이냐가 다란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삶에 명암 明暗을 조명하는 것이리라고 김 작가는 생각했다.
우리들의 주인공 119 아저씨의 삶은 이렇다. 출근과 동시에 봉사의 구두끈을 졸라매고, 헌신의 손수건을 어깨에 매어 부지런히 물 호수를 잡고 동분서주하며 뛰는 그런 분이다. 이런 그 분한테 30여년의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보람도 많았지만 시련도 여러 번 있었다.
그 까다롭기로 소문난 소방시설과 관련하여 업체로부터의 유혹, 또는 가까운 주변으로부터의 음해와 오해 등이 이 분으로 하여금 몇 번의 고통과 울분을 토해내게 했으리라. 119 아저씨는 언제인가는 김 작가한테 말했다. 얼토당토 없는 비리혐의로 사법기관의 조사를 받고 나와서는 관련 업체한테 전화를 했단다.
“당신들 죄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이렇게 고생시킬 수 있느냐? 사실이 아니라고 나한테 사과 안하면 당신네 회사에 TNT를 설치하여 오늘밤중으로 폭파해 버리겠다.”
‘하, 얼마나 분하면 이렇게 화를 냈을까 . . . . . !’
그러자 남한테 누명을 씌우고 전전긍긍하던 정보제공 혐의자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고, 그 업체 회장과 사장이 즉시 119 아저씨한테 달려와 무릎을 꿇고 백배 사과를 하였다.
“잘못되었습니다. 어찌어찌하여 저희 생각이 잠시 잘못되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비리혐의자들과 야합 野合한 담당검사는 즉시 상부로부터 질타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정직하고 바른 자세로 근면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 분한테 죄를 뒤 짚어 씌웠으니 땅을 치고 분개할 일일 것이다. 119 아저씨. 그 분은 누구인가? 좌우명이 올 곧음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가 살아온 일생을 보면 그 분이 얼마나 공부하는 노력 형인가를 익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우수한은 우연히 그의 삶에 지나온 길을 볼 수 가 있었다.
119 아저씨는 지난 1948년 4월 25일 저 아래 아련한 섬나라 제주시 영평동에서 태어난다. 지금은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 지금껏 민초들 민란으로 알려진 제주 4.3사건으로 피난을 겪으며 제주시 2도 2동에서 42년간을 성장했다. 그리고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제주도의 북초등학교와 제주 제일중학교를 거쳐 제일고등학교를 1967년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일찍이 예견된 사회의 수재였다.
또 그의 학문적인 노력과 땀은 여기서 끝나질 않고 있다. 이어 제주정보대학 경영과를 졸업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5년을 마치기도 한 형설지공 螢雪之功의 반딧불 만학형 晩學形 이었다.
그의 용맹성과 과단성, 정의파 기질은 저 남중국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그 유명한 월남전 정글에서 배워왔다고 했다. 당시 세계의 자유수호와 나라의 국운상승기지에 크게 한 몫을 한 월남전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1970년 4월19일 월남전에 파병된다. 그 이름도 유명 찬란한 용맹무쌍의 부대인 맹호 연대의 사진반에 1년간 근무를 한다. 이때 하노이에서 사이공에 이르기까지 국도 1호선 옆으로 길게 누워 이어진 추옹송 산맥(호치민 루트)을 따라 각종 월남전쟁의 참상을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 생생한 사진을 뽑아내어 국내. 외에 알리는 등 살아있는 월남전쟁을 사진으로 기록한 르뽀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그는 1971년 5월20일 월남에서 사이공을 뒤로 하고 귀국선을 올랐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 부산항으로 전 국민의 열열한 환영 속에서 귀국하게 된다.
“아, 나는 월남에서는 세계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싸웠으니 이제부터 이 나라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봉사를 해야겠다.”
하는 남 다른 국가관과 민족애로 월남에서 귀국한 다음해 1972년 10월22일 제주소방서 유급상비대원 임명 발령(소방서장)되었다. 그러니까 월남전쟁 중에 정글 속을 박박기던 새까만 얼굴이 채 변하기도 전에 손과 발을 걷어 부치고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몸으로 뛰는 119 소방업무 일선에 뛰어든 것이다.
이어 그에게 또 국가에서 부름이 있었다. 1976년 6월 2일 국가 직 소방공무원 특채 합격 발령(소방사) 이 그의 하나이다. 제주도 섬에서 태어난 소년 119 아저씨는 청년시절과 소방공무원으로 나아가면서 그저 소방업무 일선에 머무는 그런 주저앉기 형의 나태한 사람이 아니었다.
1977년 6월 12일 제 1기 소방간부후보생 합격 교육입교(경찰대학) 하여 같은 해 12월 27일 소방위 임관(내무부 장관)을 하여 제주소방서 중앙파출소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에겐 관운 官運이란 말은 좀 사치스런 말이 될 것이다. 왜냐면 월남전쟁과 일선 소방서방서의 정규직으로 까지 이어지기 까지 우연히 마련된 자리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나름데로의 노력과 피 나는 공부와 연구가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찌기 섬 소년으로 자라면서 두 주먹 불끈 쥐고 저 끝 간데 없이 펼쳐진 마라도의 파아란 수평선을 보며 다짐한 게 있다.
“까아짓 한번 해보자. 남아 대장부로 태어난 만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 한 몸 불사르자. 아암 그렇게 해야지. 내가 어느 가문 家門의 자손인가. 그 유명한 신라 김 알지 선시조의 경순왕 김 운발 시조 왕손의 뼈대 있는 후예가 아니더냐! ”
이런 섬 소년을 바라보며 부모님은 늘 말씀 하셨다.
“우리 가문은 1천의 고고한 역사를 자지고 이어온 신라왕손의 후예란다. 신라 김알지 선시조로 하는 계림 鷄林김씨를 시작으로 하여 그 뿌리가 시작된단다. 우리 일가의 선조인 경순왕은 927년 후백제 견훤 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죽은 뒤에 마지막 왕위에 오른 신라의 마지막 왕 이란다. 경순왕의 아홉 아들 중에 둘째 황 遑의 장자인 김운발 雲發이 바로 우리의 시조이시지.”
“아, 예 그렇군요. . . . . .”
“또 그 뿐이 아니란다. 신라 935년 신라를 고려 高麗의 태조에게 넘긴 후 시조인 운발은 벼슬이 문하시중 門下侍中에 이르고 나주군 羅州君에 봉해지자 우리의 후손들이 본관을 나주로 하였단다. 이때부터 우리 나주 김 공의 제1대가 시작하지. 그리고 운발시조의 아들 둘은 고려에서 시중(종1품, 지금의 국무총리)과 원윤(6품상에 해당하는 향직)에 올랐으며 증손인 원상 源相은 예의판서를 지내기도 했단다. 이후 우리의 선조들은 고려와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란다.”
“예, 알겠습니다. 훗날 꼭 나라에 쓰일 재목으로 성장하겠습니다.”
“그으럼 그래야지. 우리가 누구인데 . . . . . . 1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왕손의 후예들이지.”
거친 파도와 바람 푸석한 현무암으로 둘러쌓여 절망으로 치닫기 쉬운 제주도의 섬 생활. 이런 곳에서 부모님의 바른 가정교육과 남 다른 인내와 고집, 담대한 그의 기개는 1978년 11월 20일 제주소방서 소방과장으로 기어이 앉히고 만다. 고향에서 두루 봉사를 할 것으로 내다보고 그는 소방경으로 승진하여 서귀포소방서 방호과장으로 근무를 한다.
이런 그에게 섬 소년 119 아저씨를 섬에만 갇혀둘 것인가. 드디어 1989년 1월 18일 대한민국 중원 땅 대전광역시 소방본부 감찰계장으로 영전한 119 아저씨의 승승장구 행렬은 시작된다. 대전서부소방서 방호과장, 동부소방서 소방과장, 대전소방본부 행정과장을 거쳤다. 그 후 소방관의 ‘소방의 꽃’ 으로 일컫는 대전 동부소방서장과 중부소방서장 등으로 넘나들더니 소방업무의 산실인 행정지치부 소방학교 연구실장으로 부임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119 아저씨는 드디어 ‘소방의 별’ 이라 칭송 받는 소방감 [경무관]으로써 서울특별시 소방본부 구조구급과장으로 부임하는 쾌거로써 대 국민 봉사와 보람된 날은 연속된다.
한반도 남단의 탐라도 파수꾼
한라의 기상은 민족의 얼 일세.
탐라도 중심부 우뚝선 한라산
해발 일천구백 오십 고도에 이름도 장하구나.
고도따라 분포된 자연 식물원
수종도 다양한 이천 팔백종 일세.
해안선 칠백리 경관도 장하니
천혜의 자원은 관광의 보고일세.
조상의 버림받던 이곳이 명산이며
조상들의 유배 생활 정서가 넘치는산.
세계에 소문 난 평화의 섬 탐라도
삼무(三無) 정신 배우려는 인종 전시장.
-- 119 아저씨의 대표적인 詩 ‘漢拏山 ’ 全文
섬 소년 119 아저씨는 어려서부터 책이 좋고 사색하기를 좋아했다. 자주 한라산에 오르고 바닷가를 돌며 산책을 즐겨 했다. 그 탓인지 몰라도 청년시절 119 아저씨는 월남전쟁에 사진작가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런 인연이지는 몰라도 시와 수필을 쓰기 좋아했다. 그에게 또 운명의 여신은 문학적 역사를 큰 길을 터주며 인도하고 있다. 지난 1997년 11월 월간 한맥 문학지에 감동적인 수필인 ‘묘지문화 유감’이란 세태풍자의 유려한 작품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한국문단에 등단하였다. 이어 시에도 재능이 발휘되었다. 재주는 재주가 낳는다고 했던가. 이어 1998년 8월 월간 동방문학지에 시 가 당선되는 겹경사 쾌거가 119 아저씨 손에 암팡지게 쥐어졌다. 뒤이어 대한공무원문학회의 부회장 직위까지 오름의 언덕으로 훌쩍 반열의 경지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김 작가가 한 마디 했다. 그러자 그의 코믹한 답변이 너스레를 떤다.
“참말로 제주가 재주는 엄청 좋네요?”
“고오럼 내구 누구인데. . . . . 재주 才主 의 재주 在主인 濟州가 아닌가. 하하하---허허허---”
“허허허-- 숫 말馬 한 녀석이 경기도 과천 경마장에서 할 말 馬이 없어 애를 태워드렸지요. 암 말 馬을 찾아 멀리 제주 한라산 오름 중턱에 가니 할 말 馬이 너무 많아 웃었다더니 . . . . . . 정말 할 말이 무척 많네요. 119 아저씨.”
“하하하 김규태 작가의 말에 할 말이 없구먼. 허허허---”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은을 태운 열차는 드디어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 구내에는 이미 약속한 라이따이한 2세인 베트남의 탁드엉(남.23세)과 오 세진 작가가 함께 나와 주었다.
“짜오 안, 김나은 선생님.(안녕하세요)”
“음 그으래, 오랬만이다.”
나은 작가가 손을 내밀며 탁드엉의 검고 거친 손을 반갑게 꼬옥 잡았다. 그러자 그 옆의 오세진 작가도 손을 내민다.
“여, 이 친구야 .나도 악수 좀 하자. 탁드엉만 반가워하지 말고 말이야.”
“아하 반가워. 오---세진 작가. 하하하---‘
“헛헛헛---”
119 아저씨의 승진 축하를 탁드엉과 함께 간 것은 그 이유가 있다. 119 아저씨와 탁드엉의 인연은 참으로 기이하였다. 지난 어린시절 탁드엉은 베트남 중부도시 다낭에서 어머니 뜨완과 함께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다낭에 주둔한 청룡부대의 김 상사였다. 그 김 상사는 119 아저씨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절친한 사이였다. 119 아저씨는 당시 근무지인 퀴논의 맹호연대 사진반에서 근무를 했는데 다낭의 호이안 전선 일대를 촬영차 갔다가 김 상사를 만나고 그의 애인인 만삭의 트완을 만났었다. 그 당시 둘이는 참으로 다정한 잉꼬 한 쌍 이었다. 그런 김 상사가 1년 만에 갑자기 귀국해 버리자 만삭이던 트완은 사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탁드엉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탁드엉은 졸지에 라이따이한이 되고 국제적인 사생아가 되어 버렸다.
20여년이 흐른 후. 베트남의 탁드엉이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왔다. 처음엔 그저 망연히 아버지의 나라로만 동경하고 왔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엔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올랐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국의 나은 작가와 오 세진 작가의 도움으로 지금의 119 아저씨를 만나 제주 서귀포에서 밀감농장을 하고 있는 탁드엉의 아버지 김 상사를 만났다.
“베트남 다낭에서 사시는 ‘트완’ 이란 분을 아시는지요?”
“나는 월남의 다낭에 근무를 하긴 했지만 그런 일이 없는데요?”
“ . . . . . . . . . ?”
하며 도리질 치는 아버지 김 상사를 상대로 탁드엉은 친생자 소송 절차를 밟았다. 한국에 온지 여러 해 되면서 주변에서 여러 사람이 도와주었다. 그의 한 사람이 오세진 작가이고 한국의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법정소송은 경비도 부담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저도 이젠 어엿한 한국인입니다.”
“그으럼 탁드엉은 이제 베트남 사람이 아니야. 이제 한국인이야.”
하며 주변에서는 용기를 주었다. 탁드엉은 조만간 친아버지를 법원으로부터 확보하면 어렵게 다낭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어머니 트완을 한국에 모셔 올 예정이다. 그래서 난생처음 아버지와 어머니와 셋이서 오순도순 사람 사는 것처럼 사는 걸 최고에 꿈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 탁드엉은 야간 잔업도 열심히 하며 공장생활이 신이 났다.
이러한 때에 나은 작가를 통하여 오 세진 작가와 함께 119 아저씨 승진 축하의 자리를 가기로 하고 서울 역에서 만난 것이다. 탁드엉 한테는 그야말로 119 아저씨가 구원의 천사이다. 다낭에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 트완과는 월남전 당시의 구면 일 뿐 더러, 현재 제주에서 감귤농장을 하고 있는 친아버지 김 상사와의 법원소송시 증인이 되어 주기로 하였고, 친자임을 부인하는 김 상사를 현재 설득하는 사람이 바로 119 아저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19 아저씨는 한국에 연수생으로 와서 살고 있는 탁드엉을 위하여 서울에 있는 베베트남식 전통식당에 데리고 다니며 고국 베트남에 대한 향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물론 베트남통 전문작가인 나은과 오 세진 작가, 김 규태 교수, 신 덕식 작가, 여주의 최 흥기 평론가등도 종종 동행하여 흐ant한 자리를 만들어 주곤 했다.
그러면서 119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의 첫 번째 행복 조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것이지요! 먹고 마시는 데 드는 비용이 월 지출액의 70% 달할 만큼 베트남 사람들은 먹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요. 탁드엉 고향 생각하며 많이 먹어라.”
“예, 119 아저씨 감사합니다.”
119 아저씨는 일행에게 베트남식 음식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도 빼놓치 않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렇다. 쌀은 그 맛있는 행복의 중심에 있는 재료이다. 우리네 쌀과는 달리 불면 날아갈 듯 찰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쌀로 만든 요리 중 가장 대중적이고, 자주 먹는 건 역시 밥이다. 베트남어로 “껌(Com)”이라고 불리는데, 밥과 더불어 고기나 생선조림, 국 등을 함께 차려내는 게 베트남의 기본 밥상이란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베트남 음식은 ‘포(Pho)’라고 불리는 쌀국수이다. 쇠고기나 닭고기를 우려낸 국물을 붓고 숙주, 고추 등을 얹어먹는 포는 시원한 국물맛과 쫄기한 면발의 어울림이 일품, ‘반짱(Banh trang)‘도 베트남의 음식의 기본 재료이다. 이것은 보름달 모양의 얇은 라이스 페이퍼를 가리키는 말인데, 야채나 고기, 해물 등을 싸먹기도 하고, 고기와 당면 등을 싸서 베트남식 튀김만두를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자 국내의 베트남통 작가로 알려진 나은이 말을 받는다.
“베트남의 음식문화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길거리 입니다. ‘베트남 음식의 진수는 길거리에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베트남 사람들은 길에서의 소박한 외식을 즐기지요. 포, 덮밥 등이 길거리 식당의 주요 메뉴이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구식 샌드위치도 인기, 더불어 입맛을 돋우는 향신료와 소스, 진한 맛의 커피, 식사 내내 마시는 차 등을 알아두면 베트남의 식탁을 쉽게 접근을 할 것 입니다. 저도 실제 베트남 여행이 길거리에서 사 먹는 퍼 국수나 술을 좋아해요.”
“그리고 한국의 입맛을 배려한 맛 집인 ‘The Pho’ 라는 음식점에 가보세요. 강한 향신료 냄새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여 양념과 소스를 새로 개발했지요. 때문인지 젊은층뿐 아니라 중년 고객도 제법 많아요. 이 집에서 자신 있게 내놓는 요리는 역시 쌀 국수 이지요. 다른 곳보다 국물 맛이 한결 진하고, 고기가 쫄깃해요. 상큼한 레몬 소스에 찍어 먹는 월남 쌈은 베트남 요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맛있게 베트남을 느낄 수 있는 요리, 베트남 식으로 볶아낸 고기와 영양부추, 팽이버섯 등 신선한 야채를 라이스 페이퍼에 싸먹는 맛이 일품이지요.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새우와 쌀 국수를 레드 커리에 볶아낸 볶음국수도 권할 만 합니다. 역시 국수보다는 밥이라고 생각하는 손님을 위해 쇠고기와 닭고기 바비큐를 얹은 덮밥도 준비돼 있어서 먹을 만 해요. 또 에그롤 등 전채요리와 열대과일 타르트 등도 맛깔스럽지만, 베트남 커피는 진한 커피와 연유가 어우러진 달콤함과 부드러움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라고요.”
옆에서 나은의 얘기를 듣던 119 아저씨의 베트남 음식찬미 마무리가 이어진다.
“탁드엉아, 그래도 베트남은 그대로의 베트남 ‘Cyclo’가 압권이지. 서울 서대문에 있는 ‘시클로’는 베트남의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베트남 요리 전문점이란다. 다른 건 몰라도 쌀 국수의 기본인 육수만은 이집이 좋지. 탁드엉 너도 언제인가 나랑 같아 가서 먹고서 고향 다낭의 쌀국수 맛과 똑 같다고 했지.”
“맞아요. 참 맛있고 우리 베트남 음식과 변함이 없어요. ”
“음 그렇지. 소스도 베트남 본토의 맛과 가장 가까운 것을 선택하고, 베트남 요리를 처음 먹어본 사람보다는 그 맛에 익숙한 손님에게 ‘맛있다’는 칭찬을 듣는 편이지. 쌀국수. 신선한 야채와 새우를 라이스 페이퍼에 돌돌 말아 싼 스프링롤은 만드는 이의 정성을 느낄 수 있는 요리, 주문을 받아 그때그때 말아 내기 때문에, 재료의 촉촉함과 신선함이 살아 있지. 또 에그롤, 웨딩쇼마이, 양지쌀국수, 돼지고기, 석쇠구이 등을 모두 맛볼 수 있지.”
오 세진 작가, 김 규태 교수, 신덕식 작가, 최 흥기 평론가는 119 아저씨와 나은 작가의 베트남 음식의 탁견에 대하여 감탄을 보냈다.
“오호라, 베트남 음식의 찬미여!”
“오, 베트남의 쭈어음 옷(새콤 달콤)이여”
“아, 베트남 요리천국 응온(맛있는)이여!”
119 아저씨가 승진했다는 소식에 탁드엉은 반가워했다.
“탁드엉. 119 아저씨가 승진을 했단다. 함께 가서 축하해주지 않으렴. . . . . . ?”
“아, 그래요. 119 아저씨가 승진을 하였어요 ? 가야지요, 그럼요 축하 하러 가야지요. 그 아저씨는 저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예요.”
나은과 오 세진 작가도 반가운 마음으로 말했다.
“그으래 그럼 서울 역에 나오거라. 같이 가자. 김 작가님과 119 아저씨도 좋아 할 것이다.”
오 세진 작가의 전화를 받은 탁드엉은 전화를 받은 즉시 서울 역에 나왔다.
서울역 광장에서 나은 작가와 오 세진 작가, 탁드엉 셋을 태운 택시는 서울특별시 소방본부로 향하였다. 취임식장에 도착하자마자 행사는 막 시작되고 정장을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119 아저씨가 단상에 올라 취임 연설을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11월 9일 119. 즉 소방의 날입니다. 마침 이 소방의 날에 제가 이 중요한 자리에 취임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소방공무원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자부심 속에서 국민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시체를 사회에 기증하여 실험용으로 바치고 이 세상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마침 베트남에서 온 라이따이한 탁드엉이란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탁드엉의 나라인 이억만리 월남전쟁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 때 사진촬영을 하기 위하여 사이공 외곽에 있는 구찌터널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이 월남전쟁에 허리를 굽힌 곳이 바로 이곳 구찌터널 이었습니다. 오로지 호미와 삼태기로만 굴을 파서 구축해했다는 이곳은 총 연장 250km의 길이에 유격대원 1천5백 명을 일시에 수용 할 수 능력과 평상시 상주병력 3-5천여 명이 대기 할 수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작전회의실과 야전병원, 극장, 식당 등 3층 깊이의 정글 속 토굴은 그야말로 현대문명이 극복 못 할 월남이란 나라의 민족에 어떤 무서운 저력이 있는걸 느꼈습니다. 깊고 꾸불꾸불하게 파놓은 천혜의 요새 요새를 지하 땅속에 구축한 구찌터널. 이들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계의 강국 미국이 굴복시킨 키 작고 당찬 베트남인들. 베트남 전쟁에서 다른 것은 보지 말고 이곳 구찌터널을 보면 미국이 이 전쟁에서 져야 옳을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나라 소방역사에 ‘봉사의 구두끈’ 과 ‘ 땀내 나는 이 손수건’을 영원히 남길 것 입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사고가 있는 현장에는 애오라지 ‘봉사의 구두끈’ 과 ‘ 땀내 나는 이 손수건’이 있어 세계속의 한국으로 거듭 낳았다는 평범한 신화를 날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월남전쟁을 이긴 나라가 베트남이라면 소방안전으로 세계를 이긴 나라는 바로 한국이란 어록을 창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소방관으로써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온 것이 제일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저는 유년시절에는 4.3사건이라는 이데올로기 전쟁에 휘말려서 피난처에서 움막 생활을 하다가 내가 40여 년간 성장한 제주에서 소방간부후보생 제1기에 합격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소방위에 임용되어 지금까지 제주에서 광주를 거쳐 대전에 정착하기 까지 많은 사연들이 있습니다. 맨 주먹과 용기로 하나로 그 인고의 세월 모진 고생을 뒤로 하고 오늘도 이 자리에 보무도 당당히 섰습니다. 그러나 30여 년 전과 지금과는 어느 것 하나 다른 게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는 사고가 있는 현장이라면 언제든지 ‘봉사의 구두끈’ 과 ‘ 땀내 나는 이 손수건’을 어깨에 둘러매고 출동할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껏 지켜봐주신 여러분! 저는 죽어도 소방관, 다시 태어나도 이 직업으로 환생 할 것입니다. 영원한 여러분의 변함없는 소방관 119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역시, 119야. 일일구 日一救---”
취임사에 이어 같은 소방관이자 후배인 천안의 한 정찬 시인에 축시 낭송이 있었다.
숭고한 사랑
詩人 한정찬
여기 샛별이 고이 빛날 때처럼
님들의 희생정신 빛나고 있나니
그대들의 숭고한 사랑,
소방의 표상으로 남아
우리들 가슴마다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오로지 나라사랑 겨레사랑 한 마음으로
소중한 인명재산 지키다 산화해 가신
님들의 거룩한 뜻 우러러 따르리이다
註: 이 시는 천안시 유량동 행정자치부 중앙소방학교에 세워진 ‘소방충혼탑’ 의 시 전문임
취임식 행사가 끝나고 서울 중앙종친회의 성태 회장을 위시하여 청. 장년회의 광우회장과 우창 부회장, 기진 부회장, 성창 총무 등이 앞서 축하연회장으로 향하였다. 또 뒤를 이어 119 아저씨의 마을인 대전권에서 올라온 석기 회장과 광희 부시장, 광희 장학관, 성일 서장, 우도 전 회장, 우성 종친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향하였다.
우리의 명쾌한 오락부장이자 친목부장인 기진 종친의 건배 일창으로 축배는 시작되었다.
“나주 김 공의 발전과 119 아저씨의 영전을 축하하며 샴페인 부라보!”
“감사합니다. 여러분.”
“짝짝짝--- 짝짝짝--- ”
그러자 어디에선가 갑자기 싸이랜 소리가 들린다.
“메에로옹-- 메에로옹--”
“메에로옹-- 메에로옹--”
“불이야, 불이야”
“아니 119 소방의 날에 웬 싸이랜이야?”
그러자 소방본부의 직원 한 사람이 출동태세 복장을 갖추고 나타나 스피커에 입을 대고 큰 소리로 외친다.
“본부 뒤쪽 길가의 나 주옥 羅州屋 식당에 샴페인 가스사고 발생. 전원 각자의 의치로 대기. 출동--출동--”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종친들이 축하차 연회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건배를 하고 있던 우리들에 119 아저씨 대갈일성과 함께 출동.
“출동-- 사고 현장으로 출동-- , 종친 일동 약진 앞으로---”
“뭐, 종친 일동 약진 앞으로---???”
“허허허 --- 자기나 119 소방관이지. 우리도 소방관인줄 아나보지???”
샴페인을 내팽개친 119 아저씨가 긴급히 옷을 갈아입고 출동을 하며 순간적으로 내뱉는 말에 축하차 연회장에 종친들은 일제히 너털웃음을 웃는다.
“허허허---하하하---”
“하하하 누가 119 가 아니라 할까봐. 또 일일구 日一救 입니까???”
우왕좌왕하던 좌석을 정리하며 청. 장년회의 광우 회장 큰 소리로 외친다.
“조오타-- 나주 김 공 羅州金公 발전을 위하여. 전국의 10만여 명의 나주 김 공 羅州金公 가족 총 출동!!!--- 출동!!!”
* 註- 이 소설은 소방공무원인 김 광진의 약력을 가지고, 작가 김 우영이 쓴 실화소설이나 우화적인 면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