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국가기록원의 계간지 기록인(In)이란 잡지에 가을 호 12호의 칼럼에 쓴 원고로 앞으로 간행될 예정입니다.
국가기록원의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청원한다.
정구복(鄭求福)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우리는 1948년 대한민국을 수립하여 60여년의 위대한 역사를 이룩했다. 과거 수 천년 간 약소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나 세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또한 남북한이 준 전시상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우리는 민주사회의 전통을 확립했다. 이는 세계사에 반드시 써야할 두 가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과정에 대한 정부 당국이나 최고 집권자가가 조처한 과정에 대해 당시의 생생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건국 후 17대 대통령이 있었지만 거의 모든 대통령의 문서가 수습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낱낱이 기록하는 관행을 가지지 못했다. 겨우 노무현 대통령의 자료만이 보존되고 있는 한심한 상황이다. 이는 문명국가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서부터 조선왕조의 좋은 관행을 모두 버렸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직후 역사의 기록을 남기기 위한 기관으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직 운영되었지만 이는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의 기능을 유지하고 현대사의 정리 편찬에는 소홀히 하였다. 국사편찬위윈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새로이 정부기록보존소가 설치되고 이를 승계하여 국가기록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국가기록원을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고심하여 새롭게 수립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가기록원은 국가기록학이라는 전 세계 국가의 기록학의 경향을 참고로 하고 있음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만이 아니라 세계인의 역사를 수용할 때 그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을 승계해야할 방안은 아직 제시되지 못하였다.
국가기록원이 단순히 문서의 보존, 정리를 중요업무로 생각하고 있지만 원래 문서란 결과만을 위한 것일 뿐 그 생성 과정을 알지 않으면 죽은 시체와 같아 진정한 역사자료라고 할 수 없다. 생성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국가기록원의 관원이 현장에 직접 참여하여 기록을 남겨야 한다, 즉 국민이 통치행위를 위임한 최고 집권자 대통령과 행정부의 최고 결의 기관인 국무회의의 논의 과정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국회는 속기록을 남기기 때문에 논의 과정이 정확히 기록된다. 그러나 사법부의 헌법재판소나 대법관회의 등에도 속기록을 남기거나 아니면 이를 기록하는 전문원이 두어져야 한다.
이 목적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특별법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그 기록은 예민한 정치적 사안으로 일정 기간 비밀로 간직해야 한다. 이런 기록을 맡은 기록관을 ‘史官(사관)’이라고 칭한다면 그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특별법에 명시되고, 철저한 신분보장과 상대한 대우가 따라야한다.
이런 선례를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역사편찬기관으로는 춘추관이라는 기관이 있었다. 춘추관의 장은 당시의 영의정이 겸직하고 있었고, 춘추관에는 전임사관(專任史官)은 12명이었지만 그 밖에 승지 등 겸임 사관은 64명에 달했다. 전임사관은 전국에서 과거 시험에 1-2등을 한 수재들이 담당했다. 겸임사관은 오늘날 신문사나 방송사 기자들이 대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임 사관은 우리에게는 실제로 없다.
전임사관은 국왕을 수행하여 언행을 낱낱이 기록하였고, 어전의 백관 회의에 반드시 참석 해 기록했다. 이를 전임사관의 기록을 ‘사초(史草)’라 하고 이들 ‘사초’는 춘추관에서 정서했다. 사초에는 기록과 자신의 견해를 구분해 썼다. 자신의 견해는 ‘사론(史論)’이라고 썼다. 왕조실록의 사론에는 전임사관의 글과 실록 편찬 시에 써 넣은 편찬관의 사론이 함께 들어 있다. ‘사초’는 조선왕조 초기에는 사관이 개인이 간직했다가 후기에는 춘추관에 보존하도록 했다. 조선시대의 ‘春秋館(춘추관)’은 고려 광종대(재위 949-974)에 설치된 ‘사관(史館’을 계승하여 역사를 정리한 10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사관(史館)’제도는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우리가 수용한 것이지만 전임사관의 기록은 우리만이 유지 발시켜온 한국적 기록문화의 금자탑이이었다. 실록은 오당대에 누구도 볼 수 없이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왕조가 망한 후에 일반에게 공개되는 후손을 위한 기록이었다. 이는 후손에게 기록을 넘겨주기 위한 우리 선인들의 고귀한 역사정신이었다. 그래서 국왕과 신료들은 먼 후일 왕조가 멸망한 후에 만천 하에 공개될 사관의 기록을 두려워 행동을 극히 조심했다. 당시 왕들은 역사기록은 후세에 공개될 심판으로서 신의 심판을 믿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가장 두려워한 역사의 심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국정을 논의하는 과정이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그 한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조선 태종(재위 1400-1417)이 1417년 9월에 사노비의 수를 140명으로 제한하려는 두 번째 논의과정에서 그 법이 폐기되었는데 그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회의 중에 태종에게 호조 판서 박신(朴信)이 귀속 말로 왕에게 “이 법이 제정되면 공가(公家)가 제일 이롭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태종은 그 법의 제정을 중단시켰다. 공가라 함은 왕자와 공주의 집을 뜻한다. 당시 왕자와 공주들은 1000여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고 조선조의 노비는 왕실과 양반들의 재정원이었다. 노비가 가장 많았던 때는 16세기로서 전국민의 3분지 1이상이 노비였다.
우리는 이런 소중한 오랜 역사경험을 되살려 현대사의 기록과 미래의 역사창조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이 조처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세계사에 특기되어야할 문화적 쾌거라고 할 수 있다. 행정자치부장관에게 이런 기회를 마련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바이며 국회의원들에게 이 칼럼을 통해서 ‘국가기록원의 특별법’ 제정을 청원하는 바이다. 또한 우리 역사정신의 중심축을 살리는 성인 교육이 국가기록원에서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를 희망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시의에 적절하고 부합되는 청원 내용으로 꼭 필요한 제도로 생각하며 적극 지지합니다.
康寧하신 體候에 餘更希爲道珍重하시오며 益增棋力하소서!
참으로 필요한 법제정 청원입니다. 나라 안의 전체 역사학자들이 동의참여하여 실현되도록 하심이 좋겠습니다. 특히 지금 야만적인 정권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