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수업도(松下授業圖), 능호관 이인상 선생
대표적인 문인화가 능호관(원령) 이인상 선생이 그린 <송하수업도(松下授業圖)>에는 한 선비가 동굴 입구처럼 둥근 바위가 있는 낙락장송 아래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꼿꼿하게 앉은 나이 든 스승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는지 오른손을 연신 움직이고 있다. 혼신의 힘을 다 해 자신의 지식을 전해주려는 스승의 의지가 진한 먹으로 그린 그의 옷 주름 선(線)에 투영되어 있다. 배움의 자세도 진지하긴 마찬가지다. 몸을 구부린 채 바닥에 종이를 펼쳐 놓은 제자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인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붓을 들어 먹을 적실 자세가 되어 있다.
능호관 이인상 선생(1710~1760)의 <송하수업도>는 종이에 담채로 그린 28.7×27.5cm 크기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두고 이동주 선생은 ‘분위기가 삼엄한 선비 그림’이라 했다. 깔깔하게 점을 찍듯 그린 나무와 바위. 국화꽃이 핀 가을날, 스승과 제자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 햇살, 투명하게 부는 바람 속에서 행여 시상(詩想)이라도 떠오를까 기대하며 꺾어다 놓은 ‘늙은 학생’ 옆의 국화꽃 한 송이, 단원 김홍도의 <서당(書堂)>에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움이 이 그림에서는 정적(靜寂)과 고요함으로 대체되어 있다. 킥킥거리며 손을 가리고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훌쩍이는 매 맞는 아이 대신 선비의 고결함과 정신적인 교감에서 오는 무언의 감동이 배어 있다.
이젠 큰소리 내어 공부 하게하는 강요 없이도 스스로 찾아서 글 읽을 줄 알고 시(詩)도 지을 줄 아는 나이, 그래서 나이 들어 하는 공부는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하다. 경전(經典) 속에 들어 있는 한 구절 한 구절을 대할 때마다 가슴으로 받아들일 줄을 아는 것이다.
능호관 이인상 선생은 명현(名賢) 백강 이경여 선생의 후손이었으나 서출(庶出)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운신(運身)과 벼슬길의 한계를 느끼며 살아야만 했다. 벼슬은 현감까지 지냈지만 그것도 관찰사와 사이가 나빠 일찍 사퇴하였다. 가정형편이 어렵고 몸은 병약하였는데 성격은 고매하고 강직하며 진리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이런 인품은 그의 ‘종강모루(鐘岡茅樓)’에 부친 모루명(茅樓銘)’에 잘 들어나고 있다.
작은 누정(樓亭)에 나를 담으니,
고요히 지내면서 명문(銘文)을 짓는다.
문장은 실(實)함에서 들뜨지 않고
행실은 명예를 좇지 않는다.
말과 행동은 속(俗)됨에 들지 않고
독서는 경전(經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담담(淡淡)함으로 벗을 얻고
옛 것을 스승으로 삼는다.
실천(實踐)하매 천명(天命)을 어기지 않으니
자나 깨나 맑음 뿐이로다.
그의 그림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고 담백하여 속기(俗氣)를 거의 느낄 수가 없다. 그의 <설송도(雪松圖)>에서 느껴지는 서릿발 같은 문기(文氣)는 조선시대 선비의 고고함을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어떤 불의(不義)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고고한 선비정신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선비가 살았고, 그런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던 한 시대를 경이롭게 만드는 그림이 그의 그림이다.
김홍도의 그림 <서당>앞에 서면,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소리가 낭자하게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그림에 그려진 이인상 선생의 수업장면을 보면 가르치는 사람은 물론 배우는 사람의 진지함과 소명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모름지기 가르치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소중한 장면임에 틀림없다.
2023. 1.27. 素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