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1 두레교회 수요예배
마 28:16-20(마태복음강해 85)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을 마무리하면서 전체적인 윤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사복음서는 각각의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요한복음은 타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였다고 하여 높이 오르는 독수리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상징은 황소입니다. 누가복음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황소를 상징으로 정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날개달린 사자가 상징입니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맨 처음에 쓰인 책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마태복음의 상징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의 상징은 날개달린 사람입니다. 또는 이것을 천사로 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에 관해서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특히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저기 동쪽에서 박사들이 찾아와서 왕으로 나신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고 경배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존귀하신 분으로, 경배를 받으실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악한 무리들에게 내 던져 지셨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람은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확인이 불가능한 소문이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신화나, 꾸며낸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이 죽어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 참 신기한 일이다”라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2000여 년 전 갈릴리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다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이 땅에 계시다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 가셨으며 거기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십니다. 이 말을 좀 더 간단히 줄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람과 똑 같은 육신의 몸을 가지신 예수님은 시간과 환경을 초월해서 계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몸을 가지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사건의 핵심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백성들의 고난과 아픔의 현장에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마태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거기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고서 조금 추상적인 표현을 합니다만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분명하게 갈릴리라는 말을 넣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혼돈과, 실망과 고난 가운데 있는 삶의 현장에 찾아 가서 그들의 삶과 신앙에 용기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볼 때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자기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갈릴리에서 오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말하기를 “갈릴리에서 뭐 좋은 것이 나온다고, 왜 하필이면 갈릴리 사람이냐”고 했습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갈릴리는 지역적인 이점이 없는 땅입니다. 무엇이든지 갈릴리라는 이름만 붙으면 멸시 당하고, 외면당하는 형편입니다.
너무나 대조적으로 예루살렘은 거룩한 땅으로 여김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는 환영을 받았지만 예루살렘에서는 배척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서 자기들의 겉옷을 땅에 깔며 “호산나”라고 외쳤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예루살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흉악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부정과 부패의 근원이 되었던 예루살렘은 더 이상 구원의 소망이 없는 곳이었으므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곳은 갈릴리와 같이 희망이 없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빛나는 분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우리들의 삶이되기를 소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제자들은 모두가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니 인생의 목표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절망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버리고 포기 할 수 있었지만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현실에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니 그들은 한낱 보잘 것 없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에게만이 예수님은 삶의 전부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없는 곳에서 철저한 실패와, 절망과, 무의미함을 경험한 사람에게만이 예수님은 희망과 의미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없이 방황해 본 사람만이 예수님이 자기 삶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심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 님이 없이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하고, 얼마나 부족한지를 깊이 깨달으며, 죽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하기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메시지 가운데 공통점은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낙심했던 제자들이 믿음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보면 예수님의 부활은 실패와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의 복음을 믿고 전도하면서 살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의 힘이 우리에게는 없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부터 자기를 구원하지 못했으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며, 그를 통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도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모든 실패와 절망을 능히 이기고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15:57절 아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며, 한번 실패하고 절망에 처한 것이 삶의 마지막이라면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실패와 절망의 아픈 경험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며, 생명의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갈릴리와 같은 이곳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낙심한 가운데에서도 다시 새 힘을 얻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쓰였습니다. 그 시대는 평화를 외치던 시대였지만 평화롭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처처에 난리과 극심한 기근이 있었고, 신앙의 공동체는 탄압을 받고 있었으며, 곧 오실 것이라던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으며,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에서 쓰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으신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나타나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 하는 긴 결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고난의 때에 “주님은 어디 계신가” 하고 예수님의 현존을 찾는 상황을 충분히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님을 찾습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멀리 계신 것 같이 느끼기도 합니다. “왜 빨리 오셔서 이 어려움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는가?”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마지막 명령을 내리십니다. 주님은 바로 이 말씀을 전해 주시려고 갈릴리로 모이라 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주님은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 24장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합니다. 행 1:8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의 결론은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본문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고, 말씀으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닫고, 교회공동체가 가지는 신앙의 목적이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 아래에서는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여러 가지 표적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인 그대로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데는 문제가 따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모두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경험하고 체험했던 것에 근거한 기록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삶에 이런 기적들이 나타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것을 이런 여러 가지의 표적으로 경험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주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삶은 복음을 전하는 삶이라는 것을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에도 복음 전하는 것을 위해 자기의 전 삶을 바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들 모두가 옛 사도들과 같이 생업을 떨쳐버리고 복음만을 전하는데 매여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살던지 우리 삶의 목적을 복음 전하는데 두고 살아갈 때에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삶”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삶에 기적이 있습니다. 이 삶에 십자가의 진리가 있고, 부활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확신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