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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동녘지를 통해 기고된 김기희씨의 글을 다시 싣는 것 입
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궁금하지만, 혹시 이
곳에 올려진 글을 보실 기회가 있고 더 보충하실 것이 있으시면
보시고 추가해 주세요.
1980년 8월 15일. 이 날은 내 인생의 해방 기념일이다.
섭리의 후배들이 항상 나를 만날때 마다 "선생님 어떻게 만났어
요?" 한다. 수백 번 이상 들은 질문이다.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우리는 제 2의 생에 온전히 접하게 되기
에 그 때를 깃점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하고저 한다. 선생님께
서도 간증 얘기 시킬 때는 옛날 얘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
서 만날 때부터 증거하라고 하셨다.
그날은 S.B.F. (선교단체) 의 담임 목자와 성경 공부를 하는 날
이었다.
회관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친구와 약속 시간이
되어 이대앞 다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를 헐레
벌떡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어디서 본 듯
한 얼굴이다. 선생님은 그 당시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S.B.F.
형제 자매들을 전도하시느라 회관 (신촌학사)에 들르시곤 하셨는
데, 그때 한번 뵌 적이 있었다.
회관에서 처음 뵌 모습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영계의 우주인 같
았다. 뭔가 특이한 분으로 선생님이 서 계신 곳의 공기와 우리
가 서 있는 곳의 공기와는 다른 것 같았다. 그 분의 걸음걸이
도 우주를 책임진 것인양 심각하고, 10평 남짓한 회관의 벽이라
도 뚫고 가겠다는듯이 바삐 움직이셨다. 초창기의 선생님의 모
습은 언제나 서 있는 모습이셨다. 역사가 마름하는 날 까지 그
분은 서 계실 것이다. 선생님의 잠언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다
. "사명자는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사명의 뜻을 이루고 나
면 환영하는 자밖에 없지만 사명을 하기까지는 불쌍한 사람이
다."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축소판 노정을 걷고 있다.
선생님은 대뜸 하시는 말씀이, "학생은 여의도 광장 안가요? 이
번이 민족 집회로는 마지막인데" (그 당시 80년 민족 복음화 대
성회 기간임)
첫 물음이었는데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마
치 선지자 같았다.
"어제 다녀왔어요. 갈 마음이 없어요."
"왜요?"
"피터 바이엘 하우스 목사님이 우리나라에 구원받을 성도가 얼마
안된대요. 그때 듣는 순간 저는 말씀이 100% 틀렸다고 확신했기
에, 어이가 없고 해서 갈 필요성을 못 느껴요."
"으음, 그건 열왕기상에 나오는 바알에게 무릎굻지 아니한 7,000
명 (왕상 19:18)을 상징적으로 말한 숫자예요. 학생, 성경공부
한번 해 볼래요?"
"사실, 정말 속 시원히 제대로 한번 배워보고 싶어요."
"내가 가르쳐 줄께."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쉽게 자신있게 대답하셨다. 그
때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다.
선생님은 "내가 목사야."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고
개가 숙여 졌다. 원래 기독교 가정이라 목사님 말씀이라면 주
의 종, 종 하면서도 깜빡 죽던 시절이다.
지금은 첨단의 멋쟁이지만 그 때는 보통사람의 눈에도 동정을 불
러 일으킬 정도의 초라해 보이셨기에 뭐라도 도와드리고 싶은 심
정이었다. 선생님은 쑥스러우신 듯 말을 더듬으시면서, "학생
은 뭘 좋아해요?" "저요? coffee요." 했더니 사 주겠다고 하
시면서 다방에 들어가자고 하셨다.
5분만 말씀하시겠다는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하늘시간이라 축
소 확대를 잘 해야 한다.) 2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친구는 옆 다방에서 기다리는데 초조했다. 그것도 담배 연기
자욱하고 시끄러운 음악과 소음으로 가득찬 다방인데 형형색색의
도표를, 그 중에서도 다른 것도 아닌 타락론 도표를 보이시면서
강의해 주셨다. 차를 나르던 레지들은 그 광경을 보고 킬킬거
리며 웃었다. 나 또한 쑥스럽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으
나 감히 말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도 진지한 모습이셨
다. 그날 강의는 들리지도 않았고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소
음 때문이라기 보다는 귀가 뚫리지 않아서일께다. 전혀 감동이
없었는데 선생님은 도표를 챙기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시길,
"어제밤 꿈에 주님이 널 보여 주셨는데 여의도 광장에서 네 머리
에 빛을 찬란하게 비추더라." 또한 내 영인체가 슬픈 베옷을 입
고 울면서 해변가를 거닐고 있을 때 주님께서
"저 애를 전도하라." 고 하셨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정말
빈 들에 마른 풀같이 갈급한 영혼이었다.) 옷 차람새까지 정확
히 가르쳐 주셔서 하루종일 나를 찾다가 따라다니는 천사들을 보
고 발견했다고 하셨다. 하늘이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인간책임
분담을 해야 100%이루어 지는 역사다. 나는 꿈 얘기에 정신이
맑아졌고 귀가 솔깃했다. 어느 땐 꿈을 시리즈로 꾸기도 했기
에 무척이나 나의 영적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한 부분이었다.
그 당시 주님은 내게 꿈을 통해 정확히 계시해 주셨기에 거의
100% 신뢰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너 연국 좋아하지? 연극
하는 모습까지도 환상으로 봤다." 고 하시면서 나의 상황을 다
알고 계셨다.
어디서 문제가 풀릴지 모르기에 30개론을 다 가르쳐보면 자기의
인식관이 분명히 깨지는 데가 있기 마련이다. 그날 이후 아침
부터 저녘까지 이화여대 뒤편에 위치한 봉원사에서 천사론, 공중
휴거론, 사탄론 등을 듣기 시작했다. 그 때는 30개론이라고 부
르지 않았다. 역사는 가면서 체계화되는 것이기에 XX론 이라고
만 했다. 이튿날 공중 휴거론을 듣다가 너무 충격을 받아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데, 나는 의식을 잃은 듯 고개를 숙인 채 4
시간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선생님도 울고 나도 울었
다. 선생님은 "내가 바로 그 일을 하러 온거여." 하셨다.
그것은 역사의 진실이었다. 그날밤 집에 돌아가 하얗게 밤을
새워가며 그 분에 대해 알고 싶어 기도를 했었다. 새벽녘에 주
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그는 완전 영의 사람이므로 육에서 자유
함을 얻었으니라."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물소리 같은 편안한 음성이었다. 그때부터
완전 영에 속한 사람, 하늘 사람이란 걸 깨닫고 마음놓고 선생님
을 따라 다녔다.
이제까지 내가 신앙했던 주님이 동일하고, 과거 역사하신 하나님
은 지금도 역사하시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외엔 나 혼자밖에 모르는 진리라 생각하니 감격스
럽고도 감당하기 어려웠고, 어느땐 섭리의 비밀을 지키기가 너무
힘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식을 땀을 줄줄 흘리면서 "임금님 귀
는 당나귀 귀다." 라고 소리 지르듯 이불을 물고 끙끙 앓기도 했
다.
어느 땐 선생님께 "내 자신이 부족하고 무식하다." 고 하면 선생
님은 화를 내시면서 "이 지구상에서 나 다음엔 네가 유식해." 하
고 심정적으로 하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셨다.
이렇게 하여 역사는 신촌의 조그마한 방, 그 비좁은 곳에서 시작
된 것이다. 그 방이 너무 좁아, 전도하면 데려다 앉힐 자리가
없어 선생님은 곤고하다 하시면서 모든 물건을 공중휴거시키겠다
고 선반을 매달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쬐그만 방에서 전 우주
를 횡단하셨고, 주님과 직접 대화하시면서 초능력을 보이셨다.
우주의 비밀 (화성과 목성에 관해서도 뉘늦게 신문에 발표되기도
함) 과 민족적인 환난 등에 대해서도 은밀한 중에 계시 받은 내
용들을 선포하셨다. 그 당시 전기세, 수도세, 오물세도 제대로
낼 수 없는 형편이라 주인 아주머니는 나더러 "학생들이 걷어서
달라." 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항상 엄청난
거부가 될 터이니 회사 이름도 하나 지어 놓으라고 하시고 방송
국도 만들 예정이라고 하셨다.
또한 세계인이 선생님을 만나러 이끝에서 저끝까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다고 하셨을 때, 당장은 실감이 안났지만 내가 뒤집어
지듯이 다른 사람들도 분명 변화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느땐 수첩을 가져오라 하시면서 친구들 명단을 보시고는, 당장
에 한 명이라도 전도하라고 하셔서 S.B.F. 의 아는 언니를 버스
정류장에 나가서 최초로 전도하기도 했다. 그 이후 구현형제,
형만형제 외에 다른 자매들도 같이 신촌섭리를 만나게 되었으나
지금의 목사가 된 두 사람 외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
는 남는 자의 역사이고, 그루터기 역사이다. 이런 때도 있었다
. 선생님은 내 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는지 투시하시고 배 고프
시다면서 짬뽕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하시고, 축지법으로 깜짝
놀라게도 하셨다. 우리집이 아파트 12층인데 엘리베이터 보다
도 훨씬 빨리 앞서 가셨던 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주님과 영과의 심정통역, 만물투시, 인간투시, 천리안
등 다양하게 신령한 역사를 계속적으로 보여 주셨다.
진리 때문에 능력이 나간 것이기에 당연한 이치들이었다.
선생님은 믿음의 발판들이 형성되자 마음놓고 이적과 표적을 보
여 주었다. 분명 선생님의 능력은 진리의 능력이었고, 진리의
능력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말씀 듣고 처음 6개월간은
충격과 경이감 속에 매일 눈물을 글썽이면서 보냈다. (신촌 역
사를 중심으로 기록함.)
또한 이런 질문을 2번째로 가장 많이 받았다.
"초창기에는 얼마나 환난이 많았어요?"
"어떻게 이겼어요?" 라고들 묻는다.
물론 오랫동안 같이 있던 MS들이 불신하고 나갈때는, 인간적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져 내리는 것 같았지만, 역사를 나
갈만한 환난은 한 건도 없었다.
진리가 맞는데 다른 것들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진리는
하나님 것이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혹시 사는 법이 있다 할지
라도 진리 떠난 인생은 사는 법이 없는 것이다. 책임분담 때
문에 한없이 뢰로워하고, 부족하기에 죽고 싶은 적도 많았다.
아픈만큼 성숙했던 것도 사실이다.
섭리로 인해 다니는 학교도 이단학생이라 하여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었고 온전한 1가지를 위해 99가지를 버려야 했다. 이건 역
사의 공식이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속에 모두가 들어 있었고
난 겨자씨만큼 버렸다면 큰 정자나무만큼 얻게 된 것이었다.
선생님은 거센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더 깊고 오묘한 뼈저린 하
늘심정을 전해 주시어 뿌리깊은 나무가 되게 하셨다. 그러기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나귀가 잘 나서가 아니라 등위에 타셨던 분
이 주님이라서 대우를 받은 것처럼 선생님때문에 나도 어디 가나
전설의 인물로 환영받고 사랑받고 있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사실 역사의 2번이 된 것은 전쟁터에서 가장 심하게 부상한 자를
끄집어 내어 치료하듯, 부족한 것이 많아 먼저 다듬지 않으면 기
둥으로 쓸 수 없기에 불러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의
시점은 언제나 현재이다. 과거에 의인이라 할지라도 현재에 악
인이면 과거의 의는 기억된 바 없듯이 지금 현재 잘 해야 한다.
지금의 나의 소원은 사명의 땅, 생명의 땅, 사랑하는 광주의 섭
리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의 미래도 주의 장중에 붙
들린 바 되겠지만 지금 난 역사의 주님을 모시고 힘차게 달리는
백마가 되고 싶을 뿐이다.
끝으로 하늘 앞에,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를 하나 적고
싶다.
이 시는 하늘이 주신 능력으로 내 동생 지연이가 받아 적은 영시
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분담을 통감하며 섭리를 가는 모든 이
들과 같이 음미해 보고 싶다. (이 영시는 헬렌켈러-미국의 여
류 저술가-의 시이다.)
노 력
하나의 결실을 얻기위해 나는 노력했다.
피나는 노력을 뼈 아픈 고통을 참으며,
그것을 향하여 난 힘쎴다.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능력과 나의 환경을
외면하고 씩씩한 성지의 골짜기를 향해 행군했다.
푸른 가로수는 언제나 신선한 것 같지만
가로수도 외롭고 쓸쓸할 때가 있는 것과 같이
노력의 행군도 때로는 지치며,
때로는 고뇌와 외로움에 취할 때가 많다.
마음이 허락지 않더라도 그대는 행군하라.
희망은 호흡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정상에 왔더라도
정복의 깃발을 꼿을 수 없으니 끝까지 호흡하라.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마라.
행군의 끝까지 행군의 장화를 벗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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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언제가 요한님이 모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애천의 전반적 분위기를 모르던 저로서는 요한님이 올려주셨던 애천멤버들의 글을 통해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들의 붕괴가 무엇인지 귀한 가르침을 받었던 글입니다. 제 컴에 보관하며 오랜동안 자주 보았던 글입니다. 이곳에 다시 올려볼터이니 많은 교감을 나누셨으면 합니다. 다 문제가 있지만 이글을 유심히 보면 김기희씨가 정선생이 너에게 천사가 둘러쳐져 있어서 알았다는 둥... 그것을 그대로 믿은 것같은 김기희씨....... 전형적인 상투적인 수법이니 조심들 하셨으면 합니다. 정명석은 오랜동안 기도원을 다니며 이미 많은 이들이 왜 신앙을 가지고 열광하는가 너무나
잘 알았던 독심술의 대가였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독심술의 대가들은 오늘도 길가나 산중,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셨으면 합니다
그대님, 보관하고 계셨군요. 저의 삶도 그랬지만, 아무 상관 없던 그대님의 열심을 보노라면, 인연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합니다. 독심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적인 힘도 강했구요. 83년 여름 저를 전도한 분과 인사겸 식사당번을 하느라 갔었던 신입때의 어느날의 기억이 가끔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만해도 강대상에 서면 6~7시간 모두를 압도할 때였지요. 저와는 개인적으로 대화도 크게 없던 시절인데, 어느날 밤 열시정도, 식사당번 끝내고 방에 있는 선생에게 문을 열고 서서 가겠다고 인사를 했더니 대뜸 쳐다보며 하는 말이 '내가 조금있다 너희집에 갈겨.' 마침 둘만의 대화였고, 순간적으론 영적인 얘기란걸 알아챘지만
현실적으론 황당한 얘기고, 그동안은 어떤 특별한 대화도 없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태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못 알아들은체 하면서 되물었지요. '네? 뭐라구요?" '이따가 너가 도착한 시간에 내가 너네 집에 간다구..' 그리고, 몇몇자매들, 형제들과 섞여 불광동 언덕배기를 내려오면서, 버스안에서, 그 환상적인 대화에 골돌했지요. 집에 도착해 조금 있었는데, 저도 놀라왔던 일이, 방 분위기가 싸아하게 정리 되면서 분명 영적으로 선생이 온 강한 느낌이 한동안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삼십분정도..예민한때 불리할 얘길 왜 쓰고 있는지 스스로 황당하네요..이번엔 또 어느쪽에서 짱돌이 날라올까요..ㅋㅋ
현대사의 미스터리는 정선생과 애천같습니다.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서백일이나 박태선 등 병치유의 귀재라면 이해가 되지만 그도 아니고 산부인과 검사만 도튼 어수룩한 이에게 대학물 먹은 현대 지식에 접한 이들이 그렇게 맥없이... 정선생에 못지않은 영적인 힘은 동방교의 노교주도 있었지요. 논산의 철태사의 박 주지도 대단했다고 합니다. 단지 어떤 이가 그시절 남긴 기록으로 감이 오더군요. 낙성대 교회내에서 춤과 노래가 설교나 기도못지않게 열광적으로 행해졌다고... 벽에 예수의 사진이 아닌 정선생의 사진으로 만든 달력이 곳곳에 붙어있고, 축구 신화로 무슨 신통력이 있다는 것으로 몰고 가던 야스러운 분위기...
이 말을 정선생도 알았으면 하네요. 교주는 자존심이다. 자존심 버리는 순간 양아치다. 그래도 박태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자존심... 혼자만 먹고 즐긴게 아니고.. 자유당에서 그 이후 박정희가 탄압하면 하는대로 이리저리 피하고 도망치는게 아니고 혼자 책임 뒤집어 쓰고 감옥으로....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여자 등만 비누칠했다........ 양아치가 따로 없네요. 차라리 목욕탕간적 없다고 오리발 내밀면 웃고 말지만 남아있는 신도들 생각했다면 그런 말 하지 않았으리라
스스로 도닦고 수련한 기운이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고갈되고, 말씀하신 밑바닥 근본이 드러난 것이라 이해합니다. 초창기 엠에스들, 괜찮은 사람들 참 많았습니다. 섹스 중독, 룰을 계속 어기면서, 변질되면서, 시도때도 없이 강대상에서 신경질부리고, 그럴수록 늘어나는 말 안듯는 사람들 치고 욕하고 하면서, 강하고 좋은 에너지 서서히 깍아먹기 시작하더군요. 분위기는 갈수록 썰렁해졌고, 예민한 사람들은 괴로와하다 나가고, 충성파들은 뭔가 이상은 했겠지만 초창기의 열정을 되새기며 선생과 같은 모습으로 후줄근해 지더군요. 그러면서 광란의 구십년대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