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 연보
유득공(柳得恭 1748~1807)
12월24일(음력 11월5일)~10월1일(음력 9월1일)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문신, 시인이며 조선 정조 당시의 실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菴), 가상루(歌商樓), 고운거사(古芸居士), 고운당(古芸堂), 은휘당(恩暉堂)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고,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 제천,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풍천부사에 이르렀다. 규장각 검서 당시 다양한 서적을 읽으면서 신라사 위주의 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이후 발해고와 사군지 등을 출간하였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를 겸임하여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서얼 출신 학자로 실학 사상가이면서 역사가로, 발해고의 저자였다.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기 시작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본래 남인 가계로 그의 외5대조 홍석신은 만전당 홍가신(晩全堂 洪可臣)과 사촌 간이며, 남인의 중진 홍우원은 그의 외증조부 뻘 되는 친족이었다. 또한 외외증조부 이서우 역시 남인의 중진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 들게 되었고, 이후 노론 북학파로 전향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암기력에 능하였다. 후에 호를 영재(泠齋)라 하고 다른 호로는 영암(泠庵), 고운당(古芸堂) 등이 있는데, 특히 고운당은 지명으로 운동(芸洞)이라고도 불리던 한성부 교서관동(校書館洞, 후일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2가 부근)에 그가 오랫동안 살면서 지은 당호(堂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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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년(영조 24년)
음력 11월 5일 아버지 진사(進士) 유춘(柳璉)과 어머니 홍이석의 딸 남양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한성에서 출생했다. 유득공의 증조부인 유삼익(柳三益)과 외할아버지 홍이석(洪以錫)이 서자인 까닭에 그는 태어나면서 서얼 신분을 타고났다. 또한 그의 할머니 우계이씨 역시 이서우의 서녀였다.
1752년(영조 28년)
아버지인 유춘이 사망하자 남양의 외가로 이사했다가 1757년 외가에서 한성으로 돌아왔다.
유득공은 18, 9세부터 시짓기를 배워서 시에 능했다.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 다양한 독서를 하였다.
문장을 배운 후에는 중국의 고전과 중국 태고부터 원나라까지 역사인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었다.
또한 만주, 몽골, 타타르, 회회(回回, 이슬람), 인도, 안남(安南, 베트남), 남장(南掌, 라오스), 면전(緬甸, 미얀마), 대만, 일본, 류큐(琉球)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 영국), 불란서(프랑스), 아란타(阿蘭陀, 네덜란드) 등의 존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중국 일변도,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세 이후에는 박지원을 사사하고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 冷齋集》을 출간할 때 서문을 받는다. 이어 북학파인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을 만나 그들과 평생의 지기로 교류했다.
1772년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 東詩萌》 편저.
1773년(영조 49년)
생원시에 합격, 생원(生員)이 되었다. 그 뒤 영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덕무 박지원과 함께 평양과 개성을 둘러 본 후 유득공은 부여, 경주 등 옛 도읍지를 찾아갔다.
1777년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 中州十一家詩選》 출간.
1778년
심양으로 가다. 귀국길에 개성에서 북경을 다녀오던 박제가와 이덕무를 만났다.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1615년(광해군7) 한백겸이 편찬한 역사지리서. 1640년 경상감영에서 간인. 중국 사서의 열전에 나오는 우리나라 부족국가에 대한 기록을 인용한 부분과 삼국 및 고려의 3부분으로 나누어 우리나라의 역대 강역을 서술.)를 읽고,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를 쓴다.
1779년(정조 3) 32세
규장각 검서관(奎章閣 檢書官)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임명된 박제가·이덕무·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의 4검서’라 불린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일본의 사료 등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의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남길 수 있었다.
1786년 포천 현감(抱川縣監), 제천군수(堤川郡守), 1788년 양근군수(楊根郡守),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사도시주부(司寺侍主簿)를 거쳐 1792년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그 뒤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로 나갔으나 1800년 그를 아끼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1790년
건륭제 80세 생일 축하 사절로 열하를 다녀오며 《열하기행시주》를 썼다.
1801년
주자서(朱子書) 선본(善本)을 구하라는 왕의 명령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연행기 《연대재유록》
1807년(순조 7) 음력 9월 1일 59세로 사망했다.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송산리(松山里, 의정부시 송산동) 송산에 안장되었다.
저서: 《경도잡지 京都雜誌》, 《고운당필기 古芸堂筆記》, 《발해고 渤海考》, 《사군지 四郡志》, 《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 《영재집 泠齋集》, 《앙엽기 盎葉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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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연구
그는 최초로 발해사에 관심을 갖고,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봤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조선 역사의 체계 안에 포함시켜야 함을 주장했다. 또한 기존의 통일신라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규정했다.
그는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북방 중심으로 확장했고, 그 결과 《발해고》, 《사군지》를 저술하여 북방의 역사를 조명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는 《발해고》를 통하여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고,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발해고》 머리말에서 유득공은 역사가 신라사 중심으로 된 것을 고려의 탓이라 보았다. 유득공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자처한다면 당연히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 역사까지도 포함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하였으며,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대씨(大氏)가 고구려의 유민이었고 발해의 땅도 원래 고구려 땅이었으며 고구려인들이 구성된 국가임을 기록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하였다.
《발해고》는 발해에 대한 초기 연구이며, 유득공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丁若鏞)·한치윤(韓致奫)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