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
이영광
모두가 살려고 한다
나는 놀란다
분양 풍선이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익사체를 찾는가,
물에 찔러 넣은 장대처럼 마을을 휘젓는 동안
질세라,
오늘 개업한 뼈 해장국집 앞에서 풍선 인형이
사정없이 관절을 꺾으며 춤춘다
오일장에선 모두가 곱게, 미친 것 같다
뭘 팔고 사러 모여드는 장 골목에, 사는 게 대체 무언가
하는 물음 따윈 없다 살고 산다 여념이 없다
도합 십만 원이 안 되는 좌판들은 저승꽃들은
온종일 냉이며 쪽파 다듬고
헐벗은 계산 속으로
기장이며 팥이며 서리태에, 이름도 모를 곡식들을 되면서도
깎아주면서도 신이 난다
흥정은 엄숙한 것이다
살려고 발버둥치지 않은 것,
그것이 나의 발버둥이었지만 오일장엔 아예
발버둥이 없다 때 절은 전대와 목장갑 낀 손과
불쑥 고무장갑이 된 손에서
뼈가 다 보일 듯 뼈로 지핀 듯, 고요한 불꽃이 탄다
썼다가 벗고 놓았다 다시 집으며
속옷 풀 듯 지갑을 열어 셈하고 거슬러 받고
비닐 봉다릴 나눠 쥐고 가는 손들에도,
답이 안 나오는 월급봉투에도 뜯어버리고 싶은 가계부에도
여념 없이, 같은 빛의 고요가 탄다
세상이 당장 망하기야 하겠나 망해버리라지 뭐
나름대로 반짝이는 반짝이 샤쓰와
만원에 두 장 하는 최고급 추리닝 바지가 있다
원산지 불명의 빤쓰 부라쟈에
악다구니와 성난 전화 목소리 드높은 길바닥,
도라지 같은 인삼에 인삼 같은 도라지를 벌여놓고
쭈그려, 냄비 째 한 끼를 후룩대는
벌건 입김들이 있다
경제는 신기루 같아도 경기는 뼈에 사무치니
녹던 동태들은 다시 얼어 어디로든 또 군 경계를 넘어야겠지만
굴러온 대형 마트들은 퍼질러져 긴 밤 잘들 자거라
근심을 근심으로 눌러 죽인 눈빛들,
땅거미에 젖어서도 좌판들은 전의를 불사른다
좋은 것은 헐벗은 계산 속에,
정말 좋은 것은 웃음인 듯 울음인 듯도 한 떨이 속에 있어야겠다
사는 게 웬 날벼락인가 하는
마음 가난한 물음은 가난하다 하염없이 살고 있는 엄숙 앞에서
나는 어이없는 대박 나세요가 싫지 않다
비루한 부자 되세요도 할 수 없다
아, 좋다, 좋아서 미칠 것 같다
나는 자꾸자꾸 미쳐서 반드시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시장은 근본적으로 본전이므로
인간은 한 덩이 허기이므로
궁핍은 문제가 아니다 주림 모르는 야만보다는
그러니, 자기를 갉아먹고 쇠약해진 영혼도
절뚝거리는 물음들 목발처럼 내려놓고
해장국 한 그릇 말아 넘기고,
비금 섬초나 서해 꽃게나 생물고등어보다는 더 싱싱해져서 가라
호두알만큼 밤톨만큼 초롱초롱해져서 가라
모두가 살려고 한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그저 이런 생각을 하며, 헛배로 터질 듯한
풍선 인형 곁을 지나간다
이 생이 이렇게 간절하여 나는 살고 싶으니
자꾸 죽자 자꾸 죽자
죽기 전에
계간 『열린시학』 2012년 봄호 발표
이영광 시인
196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빙폭〉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2003)와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와 『아픈 천국』(창비, 2010)이 있음.
첫댓글 좋은글감사합니다전철에서도읽고또읽습니다
음미하면 할수록 진한 맛이 느껴지는 훌륭한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