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방재 ~ 댓재 <제13구간>
1. 산행 정보
1) 일 시 : 2013. 05. 05. (일) 05:30 ~ 15:45(날씨 : 맑음)
2) 주요산 : 두타산(1357), 청옥산(1407), 고적대(1357), 상월산(970.3)
3)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동해시, 삼척시
4) 코 스 : 댓재 – 두타산 – 청옥산 – 고적대 – 이기령 – 상월산 – 원방재
들머리 :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변천리 산57-5 댓재
날머리 :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산9-1 원방재
2. 댓재 ~ 원방재 (도상 : 22.0km) - 북진
댓재 – 1.5km – 통골재 – 2.5km – 명주목재 – 2.3km – 두타산 – 3.7km – 청옥산 – 2.3km – 고적대 – 2.0km – 갈미봉 – 4.5km - 이기령 – 1.8km – 상월산 – 1.4km - 원방재
댓재(810)에서 963봉(햇대등)으로 오르며 두타산과 청옥산 능선을 조망한다. 작은통골재로 내려섰다가 명주목재를 거치며 쉬엄쉬엄 고도를 높여가면 두타산이다. 두타산에서 덕항산의 풍력발전시설을 조망하며 지난 행로를 점검하고 박달령(1160)으로 내려선다. S자를 그리며 문바위를 거쳐서 청옥산에 이른다. 청옥산에서 연칠성령을 지나면 바위 길이 시작된다. 바위들의 다양한 얼굴을 접하며 고적대에 오르면 전경이 시원하다. 고적대를 내려서서 수직절벽의 짜릿함을 맛보며 고도를 낮춰가면 이기령(750)이다. 이곳에서 힘을 모아 상월산으로 오르며 암벽의 절경을 맛본다. 암릉을 감상하다 보면 이내 원방재이다.
3. 산행의 흐름과 메아리
1) 들머리에서
바람이 어둠을 몰아간다. 봄바람에 옷깃을 세우며, 아침식사를 하고 삼수령을 넘어서 댓재로 접어든다. 하늘이 붉게 불타오르는 동해의 기운을 품는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놀란 댓재 표지석에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고 백두대간으로 들어선다.
2) 댓재 – 963봉 - 작은통골재 - 명주목재 – 두타산 – 박달고댕 - 청옥산 (05:30 ~ 10:10)
댓재에는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몰아친다. 5월임에도 봄은 오지 않고 동토의 시간이 흐른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왼쪽 어깨로 막아내며 963봉에 이른다. 이곳에서 ‘<’자로 꺾이며 작은통골재(860)를 거쳐서 1032봉으로 안착한다. 963봉과 1032봉에 다리(외줄)을 놓으면 바로 갈 수 있는데 아이고, 다리야.....
소나무의 우아함과 바람과 추위로 자라는 나무들의 비뚤어짐에서 희망과 삶의 애착을 상상하며 길을 따르니 명주목재이고 1016봉의 전망대이다. 동해바다에 반사되는 햇살이 찬란한 광명을 선사하는데 왜 우리들은 바다에 대한 애착이 없었을까? 일본처럼 고관대작들이 나서서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지도 없고, 오로지 내부분열을 일으켜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한심함.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의 사악함에 부서지는 민초들의 답답함을 달래며 꿈틀거리는 능선을 이어져 간다.
산은 무생물이 아니라 유생물로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울창하게 도열하는 소나무 군락을 따라서 젊고 고결함을 찾으며 통골재에 이른다. 통골재에서 일차적으로 소나무군락지를 통과하면 갈참나무와 떡갈나무가 이어진다. 산의 높이에 따라서 성장하는 나무들의 변화를 만나며 얼레지가 화려하게 장식하는 능선을 숨을 헐떡이며 올라간다. 올라도 올라도 올라야하는 길에 서서히 나무키가 낮아지더니 두타산이다. 둥근 돌 표지석에서 인증 샷을 날리며 파란하늘의 싱그러움을 만나는 것이 그저 행복하다. 광활하게 펼쳐지는 전망, 꿈틀대는 산세들의 움직임에 광명이 따로 없다. 이곳에서 두타산성으로 내려갈 수 있다.
바람에 밀려서 혹은 바람을 피해서 박달령으로 내려가며, 무릉도원계곡을 못 보는 것이 아쉽다. 백두대간 구간을 나눌 때, 유명한 관광지는 꼭 들러볼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하면 좋겠다. 백봉령에서 올라와 무릉계곡으로 빠지고, 댓재에서 올라와 무릉계곡으로 빠지면 관광도 하면서 백두대간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덕항산의 환선굴 구간도 동일한 방법을 택하면 더 좋을 듯하다.
박달령에서 내려가서 만날 수 있는 무릉계곡을 상상하며, 문바위를 거쳐서 청옥산에 이른다. 두타산과 청옥산은 말안장처럼 ∪형으로 나란히 바라보고 있다. 청옥산 송신탑에 소식을 날리고 싶어도 소식을 보낼 수 없단다.
3) 청옥산 – 연칠성령 – 고적대 – 이기령 – 상월산 - 원방재 (10:10 ~ 15:45)
청옥산에서 파란하늘을 청옥으로 살리며, 능선을 따라가니 나무들이 기운을 잃어간다. 얼키고 섥히고, 쓰러져도 생명을 이어가는 몸부림 속에서 봄이 꼭꼭 숨어서 애처롭다. 나무들은 올해의 새 잎을 터트리지도 못하는데 주목나무만이 독야청청이다. 경쟁력은 이런 것이다. 남이 못할 때 독보적으로 치고 나가는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주목의 차별화에 감탄하며 연칠성령에 안착한다. 이곳에서 무릉도원으로 내려갈 수 있다.
서서히 암릉이 이어지며 우측으로 절벽이 이어져 길을 우회한다. 앞에 삼각형으로 솟은 봉우리가 고적대란다. 우회할 수도 없는 바위산을 로프와 바위틈을 이용하여 재미를 더해가며 오르고 오르니 고적대 정상이다. 땀 흘린 보람을 절경으로 보상받고, 길이 지루하면 융단의 포근함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동해바다, 삼척, 무릉도원 등의 삶의 움직임으로 개발된 자연의 상처와 서쪽으로 펼쳐지는 첩첩산중의 순수함과 평온함을 대조하며 어떤 삶이 더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복잡함을 떨치고 그냥 무릉도원으로 가고 싶다. 무릉계곡에서 이어지는 바위절벽 속에는 명소들이 꼭꼭 숨어서 빛을 발산하고 있겠지.
고적대에서 바위들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을 이어가며 절경을 감상한다. 바위들도 세월을 탓하는지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객을 만나고 이별을 한다. 전망대에서 청옥·두타산과 바위절벽의 짜릿함과 힘찬 기상을 담는데, 짐승 뼈가 유골로 남아서 양육강식의 현상을 남겨두었다. 애절한 동물 뼈를 현장에 남겨두고 바위절경과 구상나무들이 혼연일체가 되는 전경을 재미있게 즐기며 얼마 남지 않은 행로에 안식을 떠올린다.
갈미봉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이어가며 전망대에서 산으로 파고드는 임도를 바라보며 이어갈 백두대간을 찾아본다. 고도가 낮아지고 온도가 상승하는 길에 진달래가 피어나 여간 반갑지가 않다. 진달래가 만발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라고 상상하며 1170봉을 거쳐 내려가는데 앞에 1142봉이 봉긋하게 솟았다. 일행은 우회하는데 정도를 걸어야 한다면서 혼자서 1142봉으로 오른다.... <이때부터 혼자가 된다.>
일행은 1142봉을 우회하여 능선을 이어가다 이기령을 만나고, 이기령에서 상월산으로 오르며 바위절벽의 강건함과 기개의 절경을 담고 원방재에 안착하며 여정을 마무리 한다.
* 나는 봉긋한 봉우리로 올랐는데 뒤에 봉우리들이 숨어 살랑살랑 꼬리를 친다. 이왕 왔으니 가자며 1142봉으로 올라 헬기장에 선다. 헬기장에서 북북동쪽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인적이 없고, 시그널도 없다. 헬기장을 돌아 나와 발자국이 많은 길을 따르는데 동쪽방향이고, 깊은 계곡으로 빠져 내려간다. 위험을 감지하고 돌아 나와 원점회귀하려는데 중간에 백두대간 시그널이 살랑거린다. 희미한 길은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원하는 방향과 벌어진다. 원점으로 돌아가기는 멀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일행과 통화하고 삼척방향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간다. 길이 희미해지면서 사라져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편해 보인다. 계곡 끝자락에 삶의 흔적이 보인다. 에라~ 계곡을 향하여 내려가니 낙엽이 무릎까지 빠지며 미끄러져 내린다. 급한 경사에 미끄러지며 계곡에 이르니 암반이다. 암반에 쌓인 낙엽아래도 물이끼가 끼여서 걷는 것조차 힘들다. 웅덩이 암반은 깊이를 알 수 없어서 나무에 의지하며 우회하기를 거듭하다가 안전지대로 들어선다. 암반이 적절하게 펼쳐지며 물도 그림을 그리듯이 흘러서 천상의 낙원이라며 콧노래를 부른다.
암반의 끝자락이 하늘과 맞닿아서 더 이상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이 쌓아놓은 돌탑 두 개!. 그런데 갈 곳이 없다. 수직절벽의 암반. 아! 이곳이 무릉도원 학소대의 최고 높은 지역이구나. 이곳에서 학들이 신선과 어울리며 살았을법하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곳이 없는 진퇴양난. 저 아래 삼화사가 보이는데 그림의 떡이다. 능선의 좌측을 따라 돌아간다.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도록 나무에 의지하며 계곡과 능선을 들락거리니 너덜지대이다. 너덜지대를 따라 내려가려해도 끝자락 이후를 알 수 없고.... 너덜지대를 횡단하여 능선을 따라도 절벽은 계속 이어진다.
구조요청, 점심 때 산에 짐승용으로 남겨둔 김밥, 동물 뼈 등의 온갖 생각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 동화되며 살았으니 무사히 귀환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주변을 살핀다. 짐승발자국이 있다. 그래 짐승발자국을 따라가자. 짐승발자국도 사라진다. 산세를 살피니 급경사라도 이제는 내려갈 수 있겠다. 나무와 바위틈을 의지하며 내려간다. 바위절벽! 발을 딛고 내려설 곳이 보인다. 내려서면 또 바위절벽. 그래도 길이 보여서 천만다행이다.
안정된 곳으로 내려서서 물로 목을 적시고 물에 과거를 씻는다. 삼화사 뒤편으로 들어서서 일행에게 상황을 알리고 무릉계곡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한다.
재미삼아 단순하게 봉우리를 넘으면 일행과 만나는 줄 알았는데 산줄기가 여러 개로 나뉘어졌고, 지도 없이 행동한 것에 후회도 해 본다. 아니 어쩌면 말이 씨가 된다고 하듯이 무릉계곡의 그리움으로 어떤 인력에 끌려서 무릉계곡으로 안내되었나 보다. 그래 무엇에 기대려는 것보다 어려운 상황이라도 잘 헤쳐 나왔다는 것에 위로를 하자. 살아가면서 이런 일이 허다하게 발생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왔다. 그런 것들에 대한 훈련이라 생각하며, 지금부터 무릉도원이나 감상하자. 무릉반석과 계곡의 맑은 물에 흥을 돋으며 땀과 상처로 번벅이 된 흔적을 떨어낸다. 계곡에 누우니 선계로다.
4) 날머리에서
일행을 만나 헤어진 시간들을 쏟아낸다. 백두대간에서 일어버린 거리. 일행이 불러주는 “탬방은 언제나 하나~ 탬방을 어떻게 하나~ ” 노래에 피로를 날리며, 일행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며 지난 여정을 회상한다. 삼척 온천에서 정비하고 영덕에서 물회로 바다를 먹으며 어둠이 쏟아지는 길을 뚫고 안전하게 귀환한다.
4. 문화유적과 전설
1) 댓재(해발810m)
영동과 영서를 잇는 고갯길로 산죽이 군락을 이루어 죽현(竹峴), 죽치령(竹峙嶺)라고 하였으며, 두타산 산신각(頭陀山 山神閣)이 자리하고 있다.
2) 명주목재
삼척지방을 넘나드는 고개로 "데바지령"이라 하였다.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르기 때문에 오르기가 힘들다는 뜻을 담고 있다. 댓재 방향의 작은통골재도 비슷한 뜻을 담고 있다.
3) 해동삼봉 (고적대•청옥산•두타산)
해동삼봉(海東三峰)은 고적대, 청옥산, 두타산을 묶어서 부르면 명칭이며, 물은 오십천, 한강 등으로 흘러든다. 암릉지대의 산세로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작품을 만드는 무릉도원에는 신선이 산다는 무릉계곡과 신라시대에 창건한 삼화사를 비롯하여 용추폭포, 쌍폭, 관음사, 학소대, 두타산성 등이 있다.
- 고적대(高積臺1357)는 동해시, 삼척시, 정선군의 분수령이며, 기암절벽이 대를 이루고 있다.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며, 무릉계곡의 시발점이다.
- 청옥산(靑玉山)은 청옥(청옥)이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 두타산(頭陀山)은 인간사의 모든 번뇌를 털어 없애고 물질을 탐착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뜻을 담고 있다.
4) 연칠성령(連七星嶺)
삼척시 하장면과 동해시 삼화동을 오가는 곳으로 험준한 일곱 개의 산세가 연이어 이어져서 열칠성령이라하며, 하늘만 보이는 깊은 령이라하여 난출령(難出領)이라고도 불린다. 조선 인조(1623년)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중봉산 단교암에 은퇴하여 이곳에 올라 한양을 사모하여 망경(望京)대라고도 한다.
다른 설은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보기도 하고, 사원터에서 하장면 방향으로 늘어선 일곱개의 봉우리에서 따온 일설로 보기도 한다.
5) 이기령(耳基嶺) :
동기(銅基)는 순수 우리말로 구리터이며, 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구리터가 귀(耳)로 압축되어 이기령이 되었다. 구한말 삼척, 동해지방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통로로써 정선의 삼배와 약초 등의 특산물과 영동의 소금, 해산물 등을 교환하던 장소로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6) 이승휴(李承休) - 제왕운기(帝王韻紀)
이승휴(李承休)는 약 700여년전 고려 충렬왕 때 직언(直言)과 파직(罷職)을 거듭하면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집필한 인물이다. 상, 하권으로 구성된 제왕운기는 상편은 帝를, 하편은 王을 언급하고 있다. 帝는 중국의 황제, 王은 고려의 왕을 의미하는 것이니 상편은 곧 세계사이며, 하편은 국사인 셈이다. 우리나라가 중국과는 구분되는 독립국가임을 천명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승휴는 하편에서 우리 민족은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신화로 전승된 단군신화를 한국사의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특히 발해를 최초로 고구려의 계승 국으로 인정하여 만주 일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영토회복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중국이 최근에 이르러 동북공정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발해뿐만 아니라 고구려마저도 자기들 역사라고 우기지만 이미 700여 년 전에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이승휴의 안목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대간 관점에서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백두와 지리를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하나 이승휴는 친가(親家)가 경상도 경산임에도 외가(外家)에 머물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했다는 점이다. 이승휴의 외가가 강원도 삼척이며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 여기 두타-청옥 아래 흐르는 무릉계곡이다. 두타-청옥이 대간의 중요 부분임을 감안하면 이승휴가 여기서 제왕운기를 집필한 것이 예사롭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http://blog.daum.net/bumyee/717 펌>
|
첫댓글 역시 어러움 속에 꽃이 핀다더니 글쏨시가 최곱니다. 원박사 학위취득 축하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