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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삶의 소외와 불안, 그리고 고독
박성민(시인)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가장 좋은 제도다. “인간은 요구의 창조물이 아니라 욕망의 창조물이다”라고 했던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욕망은 인간에게 있어 삶을 이어가는 근원적인 힘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 충족이 문명의 요구들과 마주치면서 그야말로 광범위하고 다양한 욕망의 층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시인은 욕망의 층위가 다양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불안정한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반성하며 그것을 새롭게 표현하려는 욕망을 지닌 존재들이다. 물화되고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는 시인의 예리한 눈빛에 걸려 그 실체가 하나 둘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냉혹한 시선은 아이러니하게도 끊임없이 물신주의 욕망에 의해 도전과 감시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러한 세계를 탐색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물질의 가치가 정신의 가치보다 높게 평가되는 이 시대에 자본주의의 모순과 비윤리적 구조를 고발하는 시인들의 시 쓰기는 개인의 반성과 더불어 사회의 윤리를 회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할 것이다. 다음에 인용한 시들은 물질의 풍요가 낳은 정신적 폐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삶을 저당 잡힌 존재들의 안타까움,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불안과 고독이 잘 드러나고 있다.
수수료 없는 대출, 무이자 주부 환영
고객님은 칠백만 원 가승인 상태입니다. 연예인 광고 보셨죠? 그 사람도 대출했어요. 아파트가 없다고요? 목숨도 담보됩니다. 고민하지 마세요, 신체포기 각서 있잖아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구든 대출합니다. 분유 값이 없다고요? 아기도 담보됩니다.
당신의 유전자까지 뭐든지 담보됩니다.
-이송희, 「대출 됩니다」(《시선》2012년 여름호)
이송희 시인은 사설시조 양식을 통한 해학과 풍자에 능한 시인이다. 그는 작가 층이 주로 서민층이었던 사설시조를 통해 물화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힘겨운 삶을 형상화하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와 모순된 사회의 계급구조를 예리하게 풍자한다. 그러기에 이송희 시인의 시에는 늘 짙은 페이소스가 기저에 깔려 있다. 고금리 사채 문제를 형상화한 이 작품도 부정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 이면을 파고듦으로써 본질을 더욱 뚜렷이 밝히고 있다. 정부가 ‘불법 사금융’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접수한 피해 사례만 3만 건이 넘었다고 한다. 악덕 대출 사채업자들은 “수수료 없는 대출, 무이자 주부 환영”과 같은 미끼로 서민들을 유혹한다. 사채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끼를 무는 것은 그만큼 열악한 경제 상황임을 의미하며, 이는 정부의 서민경제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텔레비전에까지 버젓하게 나오는 사채광고, 그들은 대중들에게 친숙한 연예인들까지 동원한다. “고객님은 칠백만 원 가승인 상태입니다.”와 같이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만, 고액의 선이자를 떼는 것은 물론 가족을 협박하거나 집에 방문하여 협박함으로써 자살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채무자의 재산을 빼앗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여성의 경우엔 “신체포기 각서”를 받고 성폭행을 하거나 인신매매로 넘긴다고 한다. “아파트가 없다고요? 목숨도 담보됩니다.”와 “분유 값이 없다고요? 아기도 담보됩니다.”는 서민들의 입장에선 본말이 전도된 상황으로, 불법 사금융의 폐해를 신랄하게 풍자함으로써 섬뜩함마저 느끼게 해주는 표현이다. 종장의 “당신의 유전자까지 뭐든지 담보됩니다.”에서 시인은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고 상품의 일부로 간주되어 사고파는, 사물화의 위험성까지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삶의 공간에서 개인의 위기와 사회구조의 모순 등을 ‘대출’이라는 광고성의 메시지로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로 하여금 현실의 모순을 곱씹게 한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자유가 뒷길을 간다 저녁을 침탈하는 가로등 눈초리 아래, 별빛도 깃털 접으며 자정 속을 잠적한다 깨진 유리 깔린 흙길을 디딛는 요즘, 조립된 뉴스들은 얼굴 없이 뛰어다니고 골목 속 시궁창마다 내일이 빠져있더군 황사마저 진득하여 유독 길기도 한데, 그믐과 초승 사이 며칠간 그 칠흑의 무월(無月), 입춘도 쫒기고 뜯긴 채 반쪽 낯이 초췌하데 막걸리 사발잔 너머 취기가 도시를 본다 쳇, 잘리고 분식된 채 너덜대는 석간 톱기사들, 철 이른 정신들의 눈이 행간마다 풀려 있데
-정휘립, 「합삭(合朔)1」(《시조시학》2012년 여름호)
현대의 민주주의와 자유가 그렇듯이 달은 자신의 동일성을 고집하지 않으며 자연적 순환의 법칙에 따라서 자신의 형태를 고통스럽게 수정하는 존재다. 이 시조에서 화자의 정신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달이다. 변화, 생성, 쇠퇴의 법칙에 종속되는 달의 속성은 화자에게 희망과 절망의 양가적인 감정을 싹트게 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음력 그믐과 초승 사이 약 4일간 달이 보이지 않는 무월(無月)의 순간, 즉 합삭인데, 이 자연적인 현상은 캄캄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현실과 직결된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자유가 뒷길을” 가고 있다. 칸트가 말한 대로, 자유는 계몽을 가능하게 하고, 계몽은 다시 자유를 확대시킨다. 그리고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계몽을 막고 역사의 진보를 막는 지배 권력을 극복하기 위해 그것과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녁을 침탈하는 가로등 눈초리”라는 부정적 현실상황 속의 ‘자유’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소외된 공간인 ‘뒷길’을 걸어갈 뿐이다. 작은 희망의 표상인 별빛마저도 “깃털 접으며 자정 속을 잠적”할 수밖에 없는, 완벽하게 절망적인 시·공간이 도시의 합삭이다. “깨진 유리 깔린 흙길” 위를 고통스럽게 걸어야 하는 화자에게 현실은 “황사마저 진득하여 유독 길기도”한 절망적 공간이다. “골목 속 시궁창마다 내일이 빠져있”고 “입춘도 쫒기고 뜯긴 채 반쪽 낯이 초췌”한 모습은 정휘립 시인이 직시하는 현실세계가 얼마나 비관적이고 비극적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론을 조작하는 언론기관들의 행태는 “조립된 뉴스들”과 “잘리고 분식된 채 너덜대는 석간 톱기사들”을 통해 극명하게 형상화된다. ‘분식’은 실제보다 좋게 보이려고 사실을 숨기고 거짓으로 꾸며낸 신문이라는 의미에서 조작된 언론의 보도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그래서 권일송 시인의 시처럼,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막걸리 사발잔 너머 취기가 도시를” 보는 장면은 허위와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 대한 환멸과 좌절의 감정적 대응인 것이다. 이 대응방식이 다소 소극적이고 냉소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이는 ‘합삭’이라는 암흑의 시간이 주는 절망감이 그만큼 크게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는 방증이다. 화자는 합삭 이후에 다시 차오를 만월의 시간이 자연의 섭리와 같이 다시 돌아올 것임을 믿으며 인내하고 있다. 이것은 취기 어린 눈이지만, 석간 톱기사를 노려보는 화자의 형형한 눈빛에서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1. 큰 기계 돌리고 난 기름때 절은 목장갑 손등에 무지개 핀다, 빗방울 떨어지는 마당귀 팔손이 잎이 자꾸만 어리댄다
2. 배알마저 다 빼내고 밴댕이 회 저며 놓고 수산시장 하루의 끝 비린내 밴 면장갑 도마 위 시퍼런 물길, 울컥 까치놀 삼킨다
3. 두고 온 흙 범벅 손 질긴 풀숲 쥐락펴락 비그은 뒤 아우성치는 돌무지 김매개 소리 바쁜데 뭔 벌초이더냐 혼잣말뿐인 형제섬
-조성문, 「여름장갑」(《시조시학》2012년 여름호)
이 시조의 1, 2, 3수는 각각 ‘산업 현장수산시장소외된 농어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목장갑면장갑흙 범벅 손’을 중심축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1수 “큰 기계 돌리고 난/ 기름때 절은 목장갑”에서의 ‘큰 기계’는 인간적인 삶과 가치를 획일화하고 기계화함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대산업사회의 표상이며, ‘목장갑’은 소외된 노동자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채우다가 손가락이 빠져 나가면 힘을 잃고 털썩 주저앉는 목장갑은, 서성거리면서 우물거리는 “마당귀 팔손이 잎”과 중첩되면서 철저하게 소외된 도시 노동자의 객관적 상관물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희망을 표상하는 무지개가 손등에 피어난다는 것은 역설적인 표현인데, 묘하게도 “손등에 무지개 핀다, 빗방울 떨어지는”은 ‘손등’, ‘핀다’와 연결되면서 ‘빗방울’이 아닌 ‘땀방울’, 혹은 ‘핏방울’로도 읽혀진다. “빗방울 떨어지는”이라는 행간 걸침을 통한 시인의 의도된 전략으로 읽혀진다. 2수는 하루가 끝나가는 저녁의 수산시장으로 카메라 렌즈가 옮겨진다. 하루 종일 도마 위에서 생선의 지느러미와 비늘을 자르고 벗겨내던, 비린내 밴 ‘면장갑’ 역시 힘겨운 도시노동자의 비애를 상징하며 “배알마저 다 빼”낸 ‘밴댕이 회’는 바로 소시민적 삶의 비애를 표상한다. 3수는 소외된 농어촌을 그리고 있다. 돌무지의 질긴 풀숲을 김매개(제초기)로 잘라내는 ‘흙 범벅 손’은 “바쁜데 뭔 벌초이더냐”는 혼잣말과 만나면서 소외된 농촌 풍경을 더욱 쓸쓸하게 그려낸다. 이렇게 볼 때 조성문 시인의 「여름장갑」은 현대산업사회 속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농어촌의 비애를 ‘기름때 절은 목장갑비린내 밴 면장갑두고 온 흙 범벅 손’이라는 이미지로 다양하게 형상화 한 시라고 볼 수 있다. 다음 시조는 현대인의 불안을 긴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골목길 접어든다 휙, 뒤를 돌아본다
그림자가 지나간다 머리가 쭈뼛 선다
소름이 확 밀려온다 재빠른 움직임이다
핸드백 움켜쥔 내 손을 스쳐가던
그림자가 나를 삼킨다 소리가 멈춰선다
나보다 더 놀란 고양이 두려움을 핥는다
-우은숙, 「소리가 멈춰선다」(《시조세계》2012년 여름호)
이 작품의 제목은 제논의 역설, ‘날아가는 화살은 사실 정지해 있다’를 연상하게 한다. 제논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어찌 보면 감각이 빚어내는 것들에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골목에 접어들면서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 뒤를 돌아보면 뭔가가 재빠르게 스쳐가는 느낌에 머리가 쭈뼛 서고 소름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림자가 지나간다”에서의 ‘그림자’는 자신의 육체와 대비되는 타자의 영혼을 상징한다. “내 손을 스쳐가던/ 그림자가 나를 삼”킬 때 소리까지 멈춰서는 모습은 이 시 속에서 불안감이 극대화된 장면인데, 그 그림자의 실체는 다름 아닌 고양이였던 것이다. 골목길로 접어든 화자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후다닥 뛰어가는 고양이, 그래서 “나보다 더 놀란 고양이/ 두려움을 핥는다”는 표현에서는 화자와 고양이가 모두 불안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된다. 그런데 우은숙 시인이 형상화한 현대인의 불안은, 밤에 골목길을 걷는 체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불안이 현대인의 본질’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불안하게 잠에서 깨고, 불안한 차를 타고 출근하며, 퇴근할 때도 불안한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가. 타자와 단절된 공간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지만 그 대상의 정체를 모를 때 우리는 극도로 불안해진다. 이러한 체험을 보편화하면 우리는 파놉티콘(panopticon)적인 감시와 만날 수 있다. 죄수를 감시할 목적으로 제르미 벤담(Jeremy Bentham)이 처음 설계했던 이 감옥은 중앙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바깥의 원 둘레를 따라 죄수들의 방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는데, 중앙의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하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해서 감시자는 감시당하는 사람을 볼 수 있지만 감시당하는 자는 감시자를 볼 수 없게 만든다.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감시받는 이런 느낌은 우리 현실의 CCTV 문제, 그 불안한 감시와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은숙 시인의 이 작품은 구체적인 정경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을 긴장감 있게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한 작품이다.
눈 뜨자 뿌리 잘려 꺾꽂이로 땅 짚었네
밑동에서 터져 나온 신망원 어린 꽃들
뭉텅한 시(詩)만 그리네 감쪽같이 지운 이력
헌 신발 밑창 같은 생의 이력 쓸어 모아
단물 빠진 껌을 뱉듯 은하(銀河) 깊이 뱉어 보지만
자물쇠 너무 쉽게 풀려 발등이 자꾸 시리네
-임성구, 「이력서」(《열린시학》2012년 여름호)
“눈 뜨자 뿌리 잘려/ 꺾꽂이로 땅 짚”은 어린 꽃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헤어져 보육원에 버려진 화자의 유년이다. ‘신망원’은 경남 밀양 예림에 위치한 보육원인데, “밑동에서 터져 나온” 화자의 유년시절 아픔이 배인 곳이다. “뭉텅한 시(詩)만 그리”는 화자에게 이러한 유년기는 감쪽같이 지우고 싶은 이력일 것이다. 화자는 “헌 신발 밑창”처럼 남루하고 고된 삶을 끌고 지금까지 힘겹게 살아왔다. 그의 삶에는 이빨자국이 새겨진 껌과 같이 오래 질겅대던 외로움과 단물이 다 빠진지 오래된 쓸쓸함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헌 신발 밑창 같”고 “단물 빠진 껌”같은 “생의 이력”이나마 쓸어 모아 “은하(銀河) 깊이 뱉어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입 안의 단물 빠진 껌’ = ‘은하에 뱉어진 별’이라는 우주적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데, ‘껌’이라는 절망적인 외로움을 ‘별’이라는 희망으로 변환하여 극복하려는 역설적 인식이 아름답게 빛난다. 그러나 “자물쇠/ 너무 쉽게 풀려/ 발등이 자꾸/ 시리네”에서 볼 수 있듯이 화자가 봉인한 가난하고도 쓸쓸한 삶의 이력은 너무나 쉽게 봉인 해제됨으로써 화자의 발등을 시리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의 ‘발’은 신체를 지탱하는 중심원리이며 발등은 화자의 영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고 ‘발등’은 화자의 마지막 자존심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성구 시인의 자전적인 이력서인지 허구적 대리인의 힘겨운 이력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작품 속에서도 이기적인 자본주의적 삶의 양태가 낳은 보육원의 힘겨운 삶, 그리고 그 유년기로부터 파생된 화자의 절망이 짙은 페이소스로 깔려 있다. 이렇듯 현대인은 자본주의라는 삶에서 철저하게 소외됨으로써 욕망이 굴절되고 타자와의 소통 부재로 인해 더욱 불안하고 고독해진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삶의 폐해를 극복하는 방안은 없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다음 작품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바로 자신을 온몸으로 밀고 가는 삶이다.
전라도 보성 벌교 저 갯벌이 종교다
날름 날름 주워먹는 꼬막은 구휼금이고
널배가 넓은 신전을 헌금도 없이 지나간다
-변현상, 「벌교」(《나래시조》2012년 여름호)
단수의 묘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은 꼬막축제가 벌어질 정도로 꼬막으로 유명한 곳이다. 화자는 이 곳 갯벌에서 가난한 어민들의 경건하고도 신성한 삶의 현장을 목격한다. 그것은 바로 온몸으로 널배를 밀며 살아가는 삶이다. ‘널배’는 꼬막을 채취하기 위해 갯벌에서 타는 배로, 물위를 떠다니는 배가 아니고 갯벌에서만 운용하는 일종의 갯벌용 스키다. 약 2m 길이의 판자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다른 한쪽 다리로 갯벌 바닥을 밀어 미끄러지듯 밀며 다닌다. 하루 종일 갯벌만을 바라보고 갯벌 위에서 살아가며 갯벌이 삶의 전부인 벌교 사람들에게 갯벌은 하나의 종교와도 같다. ‘벌교’에서는 갯벌이 ‘종교’인 것이다. “벌교/ 저 갯벌이 종교다”와 같이 효과적인 행갈이를 함으로써 ‘벌교=종교’라는 음의 유사성에 의해 의미가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초장에서 규정한 벌교의 속성은 중장과 종장으로 갈수록 더 역동적 이미지로 확산된다. 중장에서, “날름/날름”이라는 의태어는 갯벌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하는데, 널배 위에 채취한 꼬막들이 벌교 어민들의 가난을 구제하는 구휼금이라는 인식이 빛난다. 드넓은 갯벌 위를 지나가는 널배, 종장에서의 “널배가/ 넓은 신전을/ 헌금도 없이/ 지나간다”는 표현은 이 시조에 완결성을 더한다. 초장에서 변현상 시인이 규정한 벌교의 갯벌이 종교라는 인식은 구휼금-헌금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벌교 갯벌이라는 자연적 공간을 넓은 신전으로 치환 은유한다. ========================================================= <약력> 박성민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시집 쌍봉낙타의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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