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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선생시 8수 병풍 (작품해석)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은 조선조(朝鮮朝) 연산군(燕山君) 7년(1501) 6월 26일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慶南 陜川郡 三嘉面 兎洞) 에서, 아버지 언형(彦亨 官承文院判校),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忠順衛 菊의 딸) 사이의 삼남 오녀(三男五女)중 이남(二男)으로 태어났다. 본가(本家)는 삼가판현(三嘉板峴)에 있었고, 토동(兎洞 )은 선생의 외가(外家)다. 선생의 자는 건중(楗仲)이요, 호(號)는 남명(南冥)이다.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해서 아버지에게서 문자(文字)를 배웠다. 9세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생(生) 함이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하고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했다 한다. 소학기(小學期)에 들어서서는 이윤경(李潤慶), 이준경(李浚慶) 형제(兄弟), 이항(李恒)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 아버지가 단천군수(端川郡守)로 외임(外任)에 나아가자 잠시 거기에서 지내면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天文), 지리(地理) , 의방(醫方), 수학(數學), 궁마(弓馬), 진법(陣法)등 남아가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知識)과 재능(才能)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精神力)과 담력(膽力)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성운(成運) 종형제(從兄弟)를 만남으로써 커다란 변화(變化)를 가져왔다. 그것은 그들의 의기(意氣)가 염담(恬淡)하고 그들의 정신경지(精神境地)가 고초(高超)하며 그들의 도덕 문장(道德文章)이 방결청아(芳潔淸雅)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들의 영향(影響)을 받아 이왕의 짙었던 속기(俗氣)를 떨쳐 버리고 보다 높고 넓고 깊은 인생(人生)의 경지(境地)를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유서외(儒書外)에 노장(老莊)과 불서(佛書)를 섭렵하기도 하였다. 남명(南冥)은 좌류문(左柳文)을 좋아하고 고문(古文) 에 능하여 시문(時文)이 아닌 고문(古文)으로 시권(詩卷)을 써서 시관(試官)들을 놀라게 하고 그 글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기 까지 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가 죽고 숙부(叔父)인 언경가(彦慶家)가 멸문(滅門)의 화(禍)를 입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時局)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다. "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하고 안연(顔淵)의 학(學)을 학(學)으로 하 여, 벼슬에 나가면 유익(有益)한 일을 하고, 야(野)에 처(處)해서는 지조(志操)를 지킨다. 대장부(大丈夫)라면 마땅히 같아야 할 것이니, 벼슬에 나아가서도 하는 일이 없고, 산림(山林)에 처(處)해서 지킨 것이 없으면 뜻한 것, 배운 것을 무엇에 쓸 것이가. "한 구절을 읽다가 홀연히 깨달은 바 있어 다시 육경사자(六經四子) 및 주정장주(周程張朱)에 전념했다. 삼년려묘생활(三年廬墓生活)을 하였고 가난과 싸우면서 민생(民生)들의 고초(苦楚)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남명사상(南冥思想)속에 항상 민생(民生)을 잊지 못한 것은 이 때 생민(生民)의 어려움을 실제로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안정(安靜)된 공부(工夫)에 들어가니 태산(泰 山)에 올라 사해(四海)를 바라보는 기상(氣像)을 길렀고 한사존성(閑邪存誠), 악립연충(岳立淵沖)하는 학문(學問)과 인격(人格) 을 닦았다. 여기에 성대곡(成大谷), 이청향당(李淸香堂), 이황강(李黃江), 신송계(申松溪)등 명류(名流)들이 모여들어 기묘사화 이후(己卯士禍以後) 퇴상(頹喪)했던 사기(士氣)를 응집(凝集), 재기(再起)를 도모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되었다. 토동(兎洞)에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 정(雷龍亭)을 짓고 한편으로는 후진(後進)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처사(處士)로서 언론(言論)을 발(發)하여 국정(國政)을 비판( 批判)하였다. 김해(金海)에서의 18년 생활(生活)은 급기야 사림(士林)의 기풍(氣風)을 다시 진작(振作)하는 힘이 되어 사림(士林 )은 그를 영수(領首)로 추앙(推仰)하기 시작했고, 이를 안 조정(朝廷)은 그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그를 벼슬길로 나오도록 했으나 모두 사퇴했던 것이다. 오덕계(吳德溪), 정래암(鄭來庵), 노 옥계(盧玉溪)같은 기성학자(旣成學者)들이 문하(門下)에 들어와 사림(士林)의 종사(宗師)로 추대(推戴)되었다, 특히 여기서 올 린 이른바 단성소(丹城疎)가 조정을 놀라게 하고 사림(士林)을 용동(聳動)케 하자 선생의 명망(名望)은 극치(極致)를 이루었다. 벽립천인(壁立千 )이니, 태산교악(泰山喬嶽)이니, 추상열일(秋霜烈日)이니 부시일세(俯視一世)니하여 선생의 선비로서의 기상(氣 像)을 사람들이 추앙(推仰)하고 경도(傾倒)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뇌룡정(雷龍亭)에 있던 시대다. 선생의 학덕(學德)이 더욱 익 어가고 명망(名望)이 더욱 높아지자 조정(朝廷)에서는 더욱 예우(禮遇)를 하고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여 선비의 고고(孤高 )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바라보는 덕산(德山)의 사윤동(絲綸洞) 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60년 동안 갈고 닦고 쌓아올린 자신의 학문(學問)과 도덕(道德)과 인격(人格)과 정신(精神), 사상(思 想)을 후세(後世)에 전(傳)하기 위해 많은 영재(英才)들을 모아 가르쳤다. 우리나라 선비로서는 최고(最高), 최 선(最善)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그것은 여기서 길러진 학생(學生)들이 조선(朝鮮) 선조시대(宣祖時代)의 정치(政治), 학술계( 學術界)를 움직이는 주역(主役)이 되었고,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當)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항왜토적(抗倭討敵)한 절 의지사(節義之士)들이 대부분 선생 문하(門下)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학문지요(學問之要)를 말했다. 선조(宣祖) 가 등극(登極)하자 여러번 소명(召命)했으나 가지 안고, 헌책(獻策)을 진언(陳言)했으나, 조정(朝廷)의 호현(好賢)은 허명(虛名) 일 뿐, 반영(反映)되지 않아 속히 헌책(獻策)을 실행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71세 때의 일이요, 국정(國政)에 대 한 마지막 발언(發言)이었다. 사윤동(絲綸洞)에서 조용히 운명(殞 命)하였다. 운명 전 문병(問病) 온 노옥계(盧玉溪), 김동강(金東岡), 정한강(鄭寒岡), 하각재(河覺齋)에게 이는 하늘의 일월(日月 )과 같은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眞理)이니 힘써 지행(指行)할 것을 당부하였다. 부문(訃聞)이 발(發)하자 조정(朝廷)에서는 제물(祭物)과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사림(士林)은 모두 곡(哭)하여 만장(輓章)과 제문(祭文)을 올렸다. 선생이 선비로서의 외길과 천자(天子)도 신하(臣下)로 삼을 수 없는 선비가 있다는 고훈(古 訓)을 몸소 실천하여 선비의 고고탁절(孤高卓節)한 기상(氣像)을 보여 주었기에 사류(士類)들은 비로소 긍지(矜持)를 갖게 되었 고, 벼슬아치는 탐완(貪頑)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았다. 출처 : http://kr.ks.yahoo.com/servic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자락에는 남면 조식선생의 발자취가 흩어져 있다 지리산 계곡물이 덕천강을 이루고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덕산에는 선생의 묘지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세운 선생의 신도비,제자들을 가르치던 덕천서원,산천제가 자리하고 있다 합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처가가 있는 김해의 신어산에다 산해정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다 합천 뇌룡사 절을 거쳐 61세에 지리산 자락에 안착하여 72세 돌아가실때 까지 산천제에서 기거하였다
선생의 사상은 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 엿볼수 있다 선생은 조선관리들의 잘못을 과감히 꾸짓고 조정에 상소문을 올리고는 단성현감에서 물러난다 남명선생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태어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던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다 (같은 해는 아니지만 동시대의 인물로 서산대사와 남명선생은 임란으로 교류한다 서산대사는 하동 악양의 화계동천에서 승병으로 남명의 제자들은 산청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남명선생은 부귀영화를 누릴수 있는 버슬자리에는 애초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임금의 잘못된 정치에 대해서는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가 지리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엿볼수 있는 시 한수가 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복숭아꽃 뜬 맑은물에 산 그림자 조차 잠겼어라 아이야 무릉도원이 어디메뇨 나는 옌(여기)가 하노라
1.덕산복거(德山卜居)덕산에 살면서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 봄 산 아래라면 향기로운 풀 없으랴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 단지 천왕봉이 하늘에 가까 있음이 좋아라.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 빈손으로 와서 무엇을 먹을까 十里銀河喫有餘(십리은하끽유여) : 십 리 긴 은하수 먹고도 남음이 있도다. 2.산중즉사(山中卽事)산속에 읊다 從前六十天曾假(종전육십천증가) : 종전의 육십 년은 하늘이 빌려 주고 此後雲山地借之(차후운산지차지) : 차후의 구름 낀 산은 땅이 빌려 주었다 猶是窮塗還有路(유시궁도환유로) : 막다른 길에도 또다시 길 있으니 却尋幽逕採薇歸(각심유경채미귀) : 그윽한 오솔길을 찾아 고사리 캐어 돌아온다
3,강정우음(江亭偶吟) 강가 정자에서 우연히 읊다 臥疾高齋晝夢煩(와질고재주몽번) : 높다란 다락에 병으로 누으니 낮꿈 번거로워 幾重雲樹隔桃源(기중운수격도원) : 몇 겹의 구름과 나무가 도화원과 나누고 있나. 新水淨於靑玉面(신수정어청옥면) : 새 물빛은 푸른 구슬보다 맑은데 爲憎飛燕蹴生痕(위증비연축생흔) : 날으는 제비가 물결 차 생긴 흔적이 미워진다. 4,浴川 (욕천) 냇물에 몸씻기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 온몸에 쌓인 사십년 동안 허물은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 천석 맑은 못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 티끌이 만약 오장에 생겨 있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 지금 바로 배를 갈라 저 물에 띄워 보내리 斛(곡)- 휘(열 말의 용량. 또는 그 용량을 되는 연모)곡 倘(당)-만일(萬一)당, 刳(고)-가를 고. 付(부)-줄 부
5,제문견사송정(題聞見寺松亭) 문견사 송정에 제하다 雲袖霞冠尊兩老(운수하관존양로):구름에 젖은 소매, 노을에 젖은 갓을 쓴 두늙은이 常瞻長日數竿西(상첨장일수간서) : 긴 해 서쪽으로 몇 발이나 남았나를 언제나 바라본다. 石壇風露少塵事(석단풍로소진사) : 바람불고 이슬 맺힌 돌 제단엔 티끌 세상 일 적어 松老巖邊鳥不啼(송로암변조불제) : 늙은 소나무, 바윗가에는 새도 울지 않는구나. 6,송월(松月)소나무 사이의 달 寒聲浙瀝頻蕭颯(한성절력빈소삽) : 차가운 소리 서걱이고 쓸쓸한 바람 잦아 天桂交加淨復森(천계교가정부삼) : 하늘의 달빛 서로 어울려 맑고도 삼엄하다. 何處獨無繁好樹(하처독무번호수) : 어딘들 번성하고 좋은 나무야 없으랴마는 不常其德二三心(불상기덕이삼심) : 항상 그 덕은 두세 마음 갖지 않는 것이리라. 浙(절)-쓸쓸할 절, 강이름 절. 瀝(력)-비바람소리 력, 스밀 력. 浙瀝(절력)-비나 눈이 내리는 소리, 또는 가을 바람 부는 소리 蕭(소)-쓸슬할 소, 맑은대 쑥 소, 颯(삽)-바람소리 삽,
7.청학동(靑鶴洞) 獨鶴穿雲歸上界(독학천운귀상계) : 고독한 학, 구름 뚫고 천상으로 돌아가고 一溪流玉走人間(일계류옥주인간) : 한 줄기 맑은 개울, 옥같은 물결 인간계로 흘러온다 從知無累翻爲累(종지무루번위루) : 날개치며 날아감이 누 되는 누가 아님을 알아도 心地山河語不看(심지산하어불간) : 마음 속에 담은 산과 강들, 나는 못보았다 말하리라 8,만성(漫成)-편히 짓다 平生事可噓噓已(평생사가허허이) : 한 평생의 일들에 한숨만 나올 뿐인데 浮世功將矻矻何(부세공장골골하) : 뜬 구름같은 세상 부귀공명 힘써 무엇하나. 知子貴無如我意(지자귀무여아의) : 알겠노라, 그대는 귀하여 나 같은 뜻 없음을 那須身上太華誇(나수신상태화과) : 어찌 몸이 화산에 올라 과시해야만 하는가. 噓(허)_탄식허,불 허. 허허-한숨 矻(골)-돌 골, 골골-부지런한 모양. 那(나)-어찌 나, 誇(과)-자랑할 과,
-아래의 글은 中河 이민희선생(경주이씨종친회 다음카페운영자)의 글입니다-
-작품 소장: 후손 曺任道- |
첫댓글 아직도 모르는 글자들이 많아서 공부를 더 많이 해야 겠습니다!!
작품을 쓰신 선생님! 조임도 회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