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장군 동상이 서 있는 나라에서 맥아더와 이여송을 생각함
| » 사진/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그의 생전 건립된동상은 청산돼야 할 주권국가의 흉물이다. (Economy21 이주노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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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가면 자유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1888년 러시아 토목기사 사마틴이 측량하여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이 공원의 명칭이 변화한 과정에는 우리 현대사의 굴곡이 잘 나타나 있다. 19세기 말 외세가 조선을 침략해오는 관문이었던 인천의 사정을 반영하여 만국공원으로 문을 연 이 공원은 일제강점기에는 서공원(西公園)으로, 그리고 한국전쟁 뒤에는 자유공원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1957년 9월15일에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이 공원의 정상에 건립되어 46년째 우뚝 서 있다.
인천상륙작전과 평양성의 왜군 대파
올해는 2002년 임오년, 근대에 들어와 우리나라에 외국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이 1882년이니까 꼭 120주년이 되는 해다. 그때로부터 단 하루도 이 땅에서 외국군대가 없던 날이 없었다. 이 땅을 거쳐간 외국군대만 하더라도 청나라·일본·러시아·미국·소련·중국·미군 이외의 유엔 깃발 아래의 15개국 군이니 중립국 감시군을 빼더라도 헤아리기에 손가락·발가락이 모자란다.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남의 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나라도 우리말고는 없겠지만, 더 기막힌 일은 외국군대의 주둔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이다.
맥아더 장군, 어려서부터 우리는 그를 우리 민족의 은인으로 배워왔고 동상까지 세우며 기려왔다. 그러나 과연 그가 민족의 은인인지, 또는 살아생전에 동상까지 세워 기려야 할 만큼 훌륭한 인물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맥아더가 구국의 은인이라면,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李如松) 역시 구국의 은인으로 칭송되어야 마땅하다. 이여송이 평양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것이나,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도 이여송을 구국의 은인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물론 이여송이 그렇게 기억되던 때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지배층들은 그를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다 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낸 은혜를 베푼 인물로 추앙했다. 오죽했으면 평양성 전투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이여송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우고 생사당(生祠堂), 즉 살아 있는 인물을 위한 사당을 짓기로 결정했을까? 이렇게 해서 조정에서는 평양에 무열사(武烈祠)를 세우고 이여송과 그의 동생 이여백(李如栢), 병부상서 석성(石星), 도독 양원(楊元) 등 명나라 장수 6명의 화상을 걸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또 1599년에는 총독 형개(邢 )를 모신 선무사(宣武祠)란 사당을 짓고 선조가 친필로 ‘재조지은’ 네 글자를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의 저자인 한명기 교수는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할수록 당시 집권자로서의 권위가 실추되었던 국왕 선조나 대신들의 어려운 입장이 다소나마 완화될 수 있었다고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했다. 즉, “위기를 극복해낸 공로의 대부분을 명군의 것으로 돌리고, 나아가 그 명군을 불러온 주체가 자신들임을 부각시킴으로써 전쟁 초반의 연이은 패배 때문에 실추된 권위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이순신이나 권율같이 정규군을 이끈 명장들이나 김덕령(金德齡)·곽재우(郭再祐) 등 의병을 이끈 진짜 구국 영웅들의 역할과 의미는 축소되고, 명군을 불러들인 조정 신료들이나 왕을 호종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이 강화된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공신책봉에서 전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봉한 선무공신(宣武功臣)은 이순신·권율 등 18명만이 책봉되었는데 그나마 의병장은 단 한명도 끼지 못했다. 반면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도망가서 명군을 불러들인 공로로는 명나라에 파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갔던 정곤수(鄭崑壽)가 일등공신으로 책록된 것을 필두로 무려 86명이 공신이 되었다.
쇠말뚝 전설의 원조, 이여송
재조지은에 대한 강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재조지은의 압박에서 벗어나 보려고 민생에 큰 부담을 줄 명의 출병 요구를 거절했으나,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폐위되었다. 이제 재조지은은 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정권교체의 명분이 될 정도로 강력한 이념으로 등장했다. 이후 청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을 당해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수모를 겪은 조선의 조정은 청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조공의 예를 갖추었으나, 내부적으로는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는 등 재조지은의 논리를 한층 강화하게 된다.
재조지은의 논리가 계속되는 한 그 주역인 이여송은 조선왕조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맥아더마냥 일방적으로 미화되는 구국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은 이여송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근대 이전에 문자로 된 기록은 거의 지배층이 독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정서와 생각을 공식기록을 통해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대중 속에 전승되어온 구비설화는 대중의 정서와 의식을 읽어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구비설화 속의 이여송은 지배층의 공식 기록에 나타난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구비문학 전공자나 민속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이여송 설화는 전국의 어느 곳에서나 가는 곳마다 채록된다고 한다. 임재해 교수의 분류에 의하면 이여송 설화는 첫째, 조선의 사신이 명나라에 들어가 수모를 겪으면서도 마침내 이여송을 청병해오는 전설, 둘째, 이여송이 조선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날 것을 시기하여 명산의 혈(穴)을 잘랐다는 전설, 셋째, 이름 없는 소년이 이여송의 행패를 저지하고 조선에서 쫓아내는 전설, 넷째, 명산의 혈을 함부로 자르다 보니 자기 할아버지 혈까지 잘라버려(공식기록에서도 확인되지만 이여송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마침내 자신도 망하게 되었다는 전설 등 크게 네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관변 쪽의 기록이 일방적으로 이여송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반면, 구비설화에 보이는 민중의 인식은 이여송의 못된 면만을 부각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여송의 단혈(斷穴), 즉 명산의 혈을 잘랐다는 전설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기를 끊고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사례가 많이 보고되었다. 실제로 북한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명산에서 뽑아낸 쇠말뚝이 수십개에 이른다. 그런데 이 쇠말뚝 전설의 원조가 바로 이여송인 것이다. 이여송이 실제로 쇠말뚝을 박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민중의 눈에 이여송은 구국의 은인이 아니라 쇠말뚝을 박는 인물로 비쳤다.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
| » 사진/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왔던 명군 장수 이여송. 평양성에서 왜군을 대파할 때 조선인 1만명이 노근리 학살을 능가하는 죽음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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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중은 이여송을 평양성 전투의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고 쇠말뚝을 박는 인물로 기억한 것일까? 그것은 명군이 조선에 주둔하면서 보인 행태 때문이다. 평양성 전투에서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군이 베었다는 왜군의 머리에서 절반은 실상 조선 백성 것이었다. 이여송이 평양을 공격할 때 조선 백성의 머리를 벤 다음 앞머리털을 빡빡 깎아서 왜군의 머리로 만들어 전공을 속였다는 것은 명나라 병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사실은 명군 내부에서도 문제가 되어 산동도어사(山東都御使) 주유한(周維翰)은 이여송을 탄핵하고 조사관을 보내 망건 자국이 있는 조선인과 머리를 빡빡 민 일본인의 수급을 구별하는 작업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여송의 평양성 공격 당시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조선인이 1만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선조실록>에 보인다. 노근리 학살을 능가하는 처참한 학살이 임진왜란 당시 재조지은의 주역 이여송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명군의 폐해는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연 인원 20만명의 명군을 먹여살리고 그들에게 급료를 주느라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조선의 백성은 죽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명군은 민가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명군이 온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다 도망가버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명군의 노략질이 오죽이나 심했으면 민중 사이에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까지 돌았을까? 명군의 행패가 심해지자 민심의 이반은 극에 달해 “어찌하여 왜적이 오지 않아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가?”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의 조정은 명군의 행패를 뻔히 알면서도 명군이 철수하면 나라가 장차 어찌 될지 모른다면서 명군의 계속 주둔을 희망했다. 그러나 구비설화 속에서 이여송은 이름모를 소년이나 초립동(草笠童), 노인, 산신령 등에 의해 혼이 나서 조선에서 쫓겨간다. 권율이나 곽재우, 김덕령 등 민중의 사랑을 받은 장수들을 구타하고, 이순신 장군의 전과를 가로챘을 뿐 아니라, 민중을 쥐어짠 명군을 민중은 설화를 통해서나마 스스로 쫓아낸 것이다. 이여송의 죽음에 대해서도 애도 일색이었던 조정의 분위기와는 달리 설화에서는 “이여송이가 제 발등을 제가 찍고서 돌아가 그 후손까지 결딴났다”고 고소해했다. 임재해 교수는 당시 민중은 대국과 소국 간의 종속관계란 혈연의 친연성이나 혈맹관계 등에 의해 선린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명군의 횡포를 직접 겪어야 하는 수난의 당사자였던 민중은 이렇게 냉철하고 치열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삼은 코미디
한국전쟁 이후 반공의 광풍 때문일까, 민중의 맥아더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 민중의 인식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다. 1998년 인하대 서규환 교수가 인천지역 청소년 1170명을 대상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역사인물을 조사했는데 여기서 맥아더는 20.3%를 얻어 비류백제의 시조인 비류(沸流)의 4.3%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1위를 차지해 충격을 주었다. 이 조사에 대해 서 교수는 “청소년들이 맥아더 장군을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은 것은 청소년들의 그릇된 인식이라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인천의 역사와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한편 양담배를 단속하던 1970년대에는 맥아더을 무속신으로 모신 무당이 맥아더에게 양담배를 공양하다가 단속반에 걸렸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언젠가 필자는 한 유명한 재야인사가 4월학생봉기 당시 이승만이 하야하자 시위대 속에서 누군가가 “맥아더 장군에게 가자!”라고 외쳐 인천까지 와 맥아더 동상에 헌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같이 인천 자유공원에 가서 꽃을 바친 그 재야인사는 뒤에 맥아더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는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했다.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이 이야기를 일본 현대사를 전공하는 한 미국인 교수에게 했는데 그는 박장대소하더니 자기도 그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미국에 돌아와 의회에서 연설할 때 자신이 초등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는 수업을 중단하고 라디오로 중계되는 연설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 그 교수는 다른 급우들과 함께 맥아더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에 감동하여 엉엉 울었는데, 나중에 일본현대사를 공부하면서 맥아더의 사람됨을 알고는 너무 억울했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사건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매우 애석해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모신 것도 그를 최영 장군, 남이 장군 또는 관우 장군처럼 큰 한을 품은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1951년에 트루먼이 맥아더의 주장대로 만주를 폭격했더라면 통일은 그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64년 맥아더가 사망했을 때 <조선일보>는 추도 사설에서 한국통일의 절호의 찬스가 맥아더의 해임으로 유실되었다면서, 그의 주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다시 애달프게 생각한다고 했다. 또 1996년에는 당시 대통령 김영삼이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여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폭격의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원자폭탄의 사용을 전제로 한 맥아더의 만주폭격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이는 한반도의 통일이 아니라 즉각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일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는 당시 합동참모본부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할 목표지점으로 한두곳이 아니라 무려 26곳을 선정하여 보고하면서 즉각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도 1차로! 이런 위험한 발상을 한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한반도를 위해서나 세계평화를 위해서나 천만다행인 조치였다. 맥아더가 이렇게 강력한 주장을 한 것은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자신의 판단착오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끊임없는 정보보고에도 불구하고 이북군의 공격 가능성을 무시했으며,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을 묵살하고 38도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단행했다. 더구나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중국군이 개입하자 미군은 미군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기억되는 장진호 패배를 당하는 등 중국군에 크게 밀린 상황이었다. 맥아더는 1960년 자신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주장했다는 트루먼의 주장은 완전한 허위라고 말했지만, 뒤에 간행된 회고록에서는 30∼50발의 원자탄을 투하할 것을 계획했다고 기록했다.
맥아더 해임은 실로 천만다행
| » 사진/ 한국전쟁 당시 인천에 상륙하는맥아더. 그의 만주폭격 주장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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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맥아더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군인도 없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문민우위의 원칙에 도전했다가 해임된 맥아더는 한편에서는 미국의 시저, 또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심지어 신으로까지 추앙받지만, 최근에는 그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애리조나 대학의 마이클 샬러 교수는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의 장군>에서 흔히 높이 평가되는 맥아더의 군사적 업적도 객관적으로 평범하거나 수준 이하인 경우가 많았으며, 인간적으로 볼 때 맥아더는 독선적이며, 이기적 기회주의자이자 자아도취적 소아병 환자였다고 주장했다. 선글라스에 옥수수 파이프, 팽팽한 모자에 잘 다린 바지로 상징되는 튀는 옷차림에 대해 트루먼은 70대의 5성 장군이 19살 소위같이 하고 다닌다고 못마땅해했다. 한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의 와인츠로브 교수도 <맥아더 장군의 전쟁>에서 맥아더가 “한국전 당시 대통령도 무시할 정도의 제왕주의적인 태도와 국제정세에 대한 빈약한 판단력 때문에 결국 강제 전역됐다”고 평가했다.
맥아더는 이승만 정권 시절 살아생전에 동상이 건립되었을 뿐 아니라 생일이면 신문에 기사가 실릴 정도로 정권에 의해서 찬양받았다. 재야나 학생들의 주장 이외에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문제제기는 최근에야 <한겨레21>이 용미(用美)와 철미(撤美)의 대화라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제기할 정도로 이 땅에서는 엄청난 금기사항이었다. 일반 대중의 미군에 대한 인식 역시 임진왜란 당시 일반 백성의 명군에 대한 인식에 비하면 대단히 호의적이다. 그러나 대학생들에 의해 반미 구호가 나오기 훨씬 이전에 채록된 구비설화에 일본군이 아닌 미군이 우리 산천의 혈을 자른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생산되어 전승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맥아더나 주한미군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과 옹호와는 다른 기류가 아주 낙후된 형태로나마 만만치 않게 흐르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김남주 시인의 시에 인용된 한 농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의 나라 군대 끌어다 제 나라 형제 쳤는데 / 뭣이 신난다고 외국 장수 이름을 절에까지 붙이겠소 (蘇定方의 이름을 딴 부여의 定方寺, 來蘇寺를 지칭) / 하기야 인천 가니까 맥아더 동상이 서 있더라만 /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서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더만.”
노근리 학살을 거론하고, 맥아더의 동상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게 배은망덕이라고? 입장을 바꾸어 이북이 만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彭德懷)의 동상을 세웠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지만,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노병의 동상을 보며 나는 자꾸 숨이 막힌다.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