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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 5 - 모모야마 후시미성을 구경하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를 생각하다!
2019년 4월 9일 교토 에서 전철을 타고는 우지(宇治)시 에 도착해 뵤도인 平等院(평등원)
절을 보고 강변에 윤동주 시비 에 참배한후 우지가미진자 宇治上神社(우지상신사)
와 겐지모노가타리 뮤지엄 源氏物語 博物館(원씨물어박물관) 을 구경하고는....
케이한 전철을 타고 주소지마 中書島 역에 내려서 강변에 옛스런 나룻배 를 구경합니다.
사케의 명가 겟게이칸(月桂冠 월계관)을 구경하고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가 자객에게 칼을
맞았다는 데라다야 寺田屋(사전옥) 여관을 찾아 료마의 자취 를 회상해 보고는 후시미
거리를 걸어 상가를 구경하고 킨테츠선 모모야마고료마에역 에서 택시를 타고 산을 오릅니다.
후시미모모야마성 (伏見桃山城 복견도산성) 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지은 화려한 건물
이니 보기에는 근사한데...... 실은 이 성은 무너진후 시에서 재건한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기업 에서 재건한 건축물로 영화나 CF 촬영에 쓰일뿐 입장할수는
없습니다. 일본의 시대 구분에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 라는게 있으니....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방한 1573년 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에도 막부(江戶幕府)를 수립한 1603년 까지를 이릅니다. 오다 노부나가 의 본거지가
비와호숫가에 아즈치성(安土城) 이고, 도요토미히데요시 의 만년의 거처지가 바로 여기
교토(京都) 모모야마(桃山 도산)의 후시미성(伏見城) 이었으므로 그러한 명칭이 붙었다고 합니다.
불과 30년간의 짧은 시대였지만 일본 역사상 중요한 전환기 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한국을 침범한 시기 이기도 하며, 오다 · 도요토미 양인에 의하여 각지에
웅거한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 가 통일된 결과 싹트기 시작한 정치 · 사회 ·
경제상의 근세적 봉건체제가 정비 되고 바쿠항(幕藩) 체제의 기초가 형성된 시기 입니다.
문화 면에서는 국내 통일의 기운을 타고 지배자의 활달한 기풍 이 반영되고 체제의
안정화와 금 · 은의 산출 로 뒷받침된 모모야마 문화 가 출현하여 황금색의
호화스런 성곽, 현란한 벽화 등이 유행하였으니 몇 년전에 비와호숫가에
오다 노부나가가 지은 그의 거성인 아즈치성에서 여러 벽화 를 본 사실이 떠오릅니다.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石見銀山) 은 회취법(灰吹法) 을 사용했으니 잿더미에 은광석과
납석을 섞어 녹이면 납은 재에 흡수되고 은만 분리되는 우수한 제련법으로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산을 제치고 세계 최대 산출량 으로 "전세계 은의 40%를 생산" 했다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저 은을 사용해 조총과 배를 만들어 임진왜란 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오다 노부나가가 1573년 비와호수에 아즈치성을 쌓은데서 시작되니
아즈치성 벽화는 삼황오제 로 부터 시작하는데... 신선인양 하늘을 날고 있으니 3황은
복희씨(伏羲氏) · 신농씨(神農氏) · 여와씨(女媧氏) 라? 그런데 얼마전에 동아일보에
유원모 기자가 쓴 “옛 총독부빅물관 ‘비천상’ 모티브는 고구려 벽화” 글이 떠오릅니다.
“조선총독부가 경복궁내 동궁전을 헐고 지은 박물관 의 ‘비천상’ 은 104년전 일본 신예
미술가 2명 이 고구려 벽화에 감동받아 공동 창작 했으니.... 여인이 새깃이 달린
화관을 쓰고 푸른빛 피리 를 불고있는 모습인데, 1915년은 근대미술사에서 특기할
만한 시점이며 일본 청년이 조선의 경성(서울) 을 찾아와 유화 대작을 그렸던 까닭이다.”
“당시 막 발견된 고구려 강서대묘 벽화의 비천상 을 본뜬 그림으로... 길이 9m 넘는
큰 화폭에 비천상 벽화 를 그렸으니 푸른빛 하늘에 분홍빛 구름이 너울거리는
천상의 세계에서 피리 부는 팔등신의 풍만한 천녀 가 천의를 흩날리며 천상을
떠다녔으니 고구려 도상에 서구의 인상파 고전주의 화풍 이 녹아든 ”비천“ 의 탄생이다.”
“경복궁내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의 중앙홀 천장화 였는데 장식재로 고구려 미술을
모델로 한 그림 이 들어가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셈이니... 미술관은 박람회가
끝난 뒤 총독부 박물관 으로 바뀌어 고대 유산과 왕실 공예 유물의 요람
구실을 했으나.... 1996년 1월 김영삼 정부가 철거할 때 모두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미술사적 가치를 알아본 백찬규와 이상수, 한경순 은 친일 유산 이란 곱지 않은
시선을 무릅쓰고 길이 9.8m, 폭 6.35m 에 이르는 대형 벽화 를 떼어내어
보존하는 공법 을 처음 시도해 근대미술의 태동기 역사를 증언하는 작품 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근대기 미술 유산 보존의 좋은 선례 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 벽화는 근대미술사가 김영순 이 일본 각지를 수소문하면서 조사한 끝에, 일본 도쿄
미술학교 출신 일본 작가 안도 도이치로와 다나카 료 의 공동작업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김씨는 안도의 유족이 갖고 있던 작가의 비천상 스케치 와 벽화
의 최종 도안, 경성을 찾아와 작업했다는 기록이 담긴 스케치북, 편지 등도 확인 했다.”
“1915년 데라우치 조선 총독부는 미술관 을 건립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 에서 발췌한 비천상을
서양화 기법 으로 표현해 동서문화의 융합을 시도 하고 내선일체를 드러내려고 했다. 서구에
일본이 아시아의 문명 제국으로 자리를 굳혔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식민지 조선에는 조선의
고유 문물을 보호 앙양하는 문화적 통치 시책을 과시 하는 성격을 지녔다며 비천상 제작 을
통해 조선 미술은 모호한 동양화 장르, 동양의 미술로 흡수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분석 했다.”
“비천 은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불편하고 마뜩잖은 느낌을 주는 미술 유산 일 것이다.
하지만, 김영순씨의 지적처럼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 전시가 이 땅에서
처음으로 고대 부터 근대 까지 미술유산을 한데 모은 계기가 됐고.... 이를
통해 동양화 서양화 조각의 장르 개념 이 처음 제시되었다는 점 도 뚜렷한 역사다. ”
그런데 일본이 경복궁내 300채 전각 을 허물고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 는 해방후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되다가 1948년 부터는 대한민국 중앙청 으로 사용되었는데, 80여년만인
1996년 철거 하다가 놀라운 벽화 가 발견되었으니.... 대한민국 국무회의 가 열리던
홀의 천장 에 일본 건국 신화에 나오는 “이자나미신 과 이자나기신 의 벽화 그림” 이라!
아즈치-모모야미 시대에 그리스도교 가 전해지고 서양의 남만문화 (南蠻文化) 가 수입
되어 지구의(地球儀) · 지도 · 인쇄기 · 의술(醫術) 등의 과학적 지식이 보급되는
한편 종교가 지닌 무력은 금지되어 봉건체제 속으로 융합 되었으며 무사나 시민
들 사이에는 다도(茶道) 가 유행하고 가무가 애호 되는 등 문화적 풍조가 높아졌습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니 왜군은 철병하는데 천만다행한 일이니 하늘이 조선을 도우심 이라!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좀 더 살았다면 정유재란은 조선 8도를 점령하는 것을 전쟁목표로
했던 임진왜란 과는 전혀다르게, 경상도와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 등 하삼도를 할양 받는 것을
전쟁목표 로 했는데.... 참전 병력수는 일본군 14만, 명나라 11만 7천 그리고 조선군 3만 8천 이었습니다!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 에서 시작해 울산 가토 기요마사 까지 남해안에 26개 왜성 을 쌓고
늦은 봄이면 출격해 경상, 충청, 전라 3도를 유린 하고 늦가을이면 남해안으로 돌아와
겨울을 나면 보급 문제와 안전 및 겨울 추위 걱정이 없이 장기전 으로 갈수 있는데...
명나라는 농민반란에 몽고족과 여진족의 흥기 에다 멀리서 왔기 때문에 보급이 어렵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명나라 대신들은 한결같이 파병을 반대 했는데 명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환관의 횡포와 부정부패, 빈부격차로 농민반란 이 심해지고 몽고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전쟁중
이었기 때문이니..... 오직 병부상서 석성 과 만력제만 찬성해 발배의 난에 투입된 이여송에게
3천리를 행군해 조선으로 보낸 것입니다! 해서 중국인들은 만력제를 조선의 황제 라고 부릅니다?
어머니가 조정 인사에 참견 하자 반발해서 중국 내정에는 눈꼽만치도 신경을 쓰지 않고 방치하며 태업
하던 황제가 조선에는 7년간 25만 대병 에 은과 식량을 보내니 삐뚤어진 마음 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임진왜란 파병 때문에 무리한 군비지출로 재정이 파탄 나자 세금을 폭징하고 이 때문에 농민반란 이
나니 진압에 몰두하는 틈에 여진족이 흥기했으니, 결국에는 명나라를 망하게 한 원흉 이라는 것이지요?
선조는 황제가 준 은을 군비에 쓰지않고 비빈과 왕자 및 대신과 내시 에게 주니 조선군에 기대할게 없다는?
어전회의에 불참하며 국사는 팽개치던 만력제 는 꿈에 관우가 나타나 너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왕은 장비의 환생이니라... 일러준 다음날.... 조선 사신 유몽정이 흰옷 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나타나 머리를 찧어 피흘리며 통곡 하면서 선조가 "조선은 천조상국
의 아들 이며 어버이 천조국의 황제 폐하께서 구원해주실 것을 간청" 한다며 실신 합니다!
만약에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하지 않고 압록강변에다가 성채를 쌓고 군대만 주둔 시킨채
여진족 통제 하는데 신경썼다면 저리 허무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는데
십수년간 어전회의도 참석하지 않고 국정을 팽개친채 노는데만 탐닉했던....
만력제가 황제국으로 신하 제후국을 구해야 한다는 허명을 쫓다가 망국으로 이끌었네요?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마도주가 국서까지 위조하며 막으려 안간힘을 썼던
임진왜란은 기어이 터졌고 1598년 히데요시가 죽으니, 조선에 파병된 장수들은 이제
일본의 주인자리를 두고 내란 이 벌어질터이니 조선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눈을 일본으로
돌려서 철수 준비를 하니....... 조명 연합군은 4로 병진 공격 에 이어 노량해전 이 벌아집니다.
후계자는 6살 도요토미 히데요리 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야심을 드러내자 이시다
미쓰나리 는 아이즈(후쿠시마)의 우에스기씨 와 접촉해서는 에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위 하려고 계획을 세우자... 교토에 머물던 이에야스 는 미쓰나리를
유인하기 위해 도리이 모토타다를 요충지인 후시미성에 두고는 아이즈 정벌 에 나섭니다.
기회를 잡은 미쓰나리 는 서국의 영주들을 규합해 모리씨를 총대장으로 추대하니 1600년
7월 17일 히로시마의 모리 테루모토 는 오사카성에 입성해 히데요리에게 문안 하고
서군의 총대장으로 취임하자 미쓰나리는 거병선언 을 발표하여 주고쿠 (中国),
시코쿠(四国), 큐슈 (九州) 의 각 다이묘가 추종해 오니 10만의 병력 이 모이게 됩니다.
이에 미쓰나리 는 2년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숨을 거둔 바로 이곳 교토의 후시미성
(伏見城) 을 8월 26일에 4만 병력으로 공격 하자.... 불과 2천 으로 성을 지키던
도리이 모토타다 는 20분지 1 병력에 불과하나 성을 베개 삼아 무려 13일이나 버티니
4만대군은 여기에 발목이 잡혀 사기가 떨어져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미쓰나리 는 일본의 통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성을 점령해야 한다는 명분 에
사로잡혀 저리도 집착 했던 것인데, 그냥 이 성을 놔두고 세키가하라로 갔더라면....
2차 세계 대전때 히틀러 는 머나먼 스탈린그라드 를 무리하게 공격하는데 집착해
대세를 그르치는데.... 이는“스탈린” 이라는 도시 이름 그 명분에 집착 했기 때문 입니다.
만약에 미쓰나리가 후시미성을 못본체 지나쳐 세키가하라로 갔더라면 승리할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대군을 거느린 장수들은 큰 전투 를 앞두고 작은 승리를 쟁취해 병사
들의 사기를 올리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하니.... 두번째 사례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고 세번째 사례는 임진왜란 남도근왕군 전라도 관찰사 이광 입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는 38,000을 이끌고 세키가하라로 가는중 사나다 마사유키 의 우에다성
수비병이 2천 에 불과한 것을 보고 공격 하다가 실패하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동군과 합류하니, 서군 고바야카와가 배신 하지 않았더라면 동군이 패배한 원인 을
제공한 셈이 되었을 것이라 이에야스가 격분했지만 온화한 성품 덕분에 차기 쇼군이 됩니다.
임진왜란때 선조가 도망치자 전라관찰사 이광 4만, 충청관찰사 윤선각 8천, 경상관찰사
김수등 5만 남도근왕군 은 북진해 1592년 6월 3일 용인에 이르니 병사와 피난민이
합류해 7만 대군 을 이루는데, 왜군 와타나베 시치에몬등 6백명이 지키는 산채 에 이르자
광주유수 권율 은 그냥 지나가자고 했으나 이광은 서전에 승리로 사기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이광이 6월 4일 백광언에게 공격을 명하자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 내려와 보강된 문소산을
6월 5일 2천이 공격했으나 패하는데 6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왜군 1천 6백 이 아침밥을
짓던 조선군을 향해 돌격해 내려오자 급습을 당한 7만 조선군 은 달아나느라 밟혀죽고
깔려 죽으니 후퇴해 집결한 부대는 권율의 1천 뿐이라! 선조는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도리이 모토타다 (鳥居元忠)는 열세살때 스루가국 슨푸(시즈오카) 에서 이마가와씨
가문에 인질생활을 하던 8살 어린 이에야스 를 찾아가 시중 을 드는데
때까치의 사육 방법이 나쁘다고 해서 툇마루에서 걷어차인 일화 는
유명하니..... 노신들은 8살 이에야스 를 역시 우리 군주 라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도리이 모토타다 는 가이국(야마나시)에 쳐들어가 2천으로 호조군 1만을 격퇴 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사다나 마사유키를 토벌 했고 1600년 우에스기씨 정벌에 나선
이에야스로 부터 "후시미성을 수비할 것을 명령" 받았는데, 1600년 8월 26일에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여기 후시미성은 20배에 달하는 4만명의 서군에 포위 됩니다.
미쓰나리측의 우키다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시마즈 요시히로 등 대군이
공격했으니 "도리이 모토타다는 미끼로 버려진 말" 이 된 셈이었지만 굴하지
않고 2천 병사로 13일간에 걸쳐 농성 으로 저지하는데..... 모토타다는“싸우는
것이야말로 장수의 참된 길” 이라며 신하의 할복 권유를 뿌리치고 끝까지 분전 합니다.
결국에는 항복을 거부하고 전사 하니 "미카와 무사의 귀감" 이란 칭송을 받는데... 성안에
배신자의 방화로 적군이 쏟아져 들어오니 도리이 모토타다는 62세로 자결 했는데
후시미성 천장에 피가 묻어 있을 정도로 치열한 격전 이었으니..... 이에야스는
모토타다의 희생을 발판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1603년 에도 막부를 열게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후 그 보답 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사한 도리이 모토타다
(鳥居元忠) 의 유족인 장남에게 이와키타이라번 10만석 을 하사한후 그걸로는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야마가타번 24만석의 다이묘로 승격 시키는 파격을 연출 합니다!
도리이 모토타다 와 병사들의 유해 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 동안
후시미성에 방치 되었고 혈흔을 비롯한 흔적들이 마룻바닥을 붉게 물들였으니
아무리 지우고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지라..... 마룻바닥의 판자를 뜯어 부처 에게
공양하기 위해 절로 옮겨서는 천장으로 만들어 부처님에 대한 공양 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후일담인데,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 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조카를 좋아했다는데 오빠
기노시타 이에사다가 죽은후 유산인 빗추 아시모리번 2만 5천석을 장남 기노시타
가쓰토시 와 차남 기노시타 도시후사가 분할 상속 하도록 한 이에야스의 뜻에 거슬러
가쓰토시 가 단독으로 상속 받을수 있도록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부탁 합니다.
그런데 차남 도시후사 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에 속했고 장남 가쓰토시 는
여기 후시미성 수호의 임무 를 맡았으면서도 개전 직후 빠져나가 이에야스의 분노 를
샀기 때문에........ 둘다 가이에키 당하여 로닌 상태였는데 청탁이 마음속에 괘씸하게
생각해 왔던 이에야스의 역린 을 건드려 결국 영지가 몰수당하는 사태 로 이어집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서군이 유리하게 전투를 끌어가던 중에 마쓰오산에 포진한 서군
1만 5천 치쿠젠(후쿠오카) 의 다이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해 우군을
공격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어 동군이 승리 하는데, 히데아키는 가쓰토시와
도시후사에 이어 5남 으로 친형제간 이자 히데요시의 처 네네의 친정 조카들 입니다.
히데요시는 아이가 없으니 처조카 히데아키를 자신의 양자로 맞아 히메지성 을 맡겼는데
히데요시는 치쿠젠의 고바야카와씨 영지를 탐내 양자 히데아키를 다시 고바야카와가
에 양자로 보냈으니...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고모 네네가
서군에 속한 형들만 좋아하는데 불만을 품다가 후쿠시마를 통해 동군과 접촉했던 것이라?
근대에 후시미성의 혼마루 터 등 주요 성곽 자리에는 메이지왕의 능묘 가 들어선 때문에
출입이 불가능 하게 되었고, 꽃밭 자리에는 1964년, 유원지 '후시미 모모야마 성
캐슬랜드' 가 건설되었고 그 시설중 하나로 모형 천수각인 후시미 모모야마 성 이
세워졌다가 2008년 유원지는 폐쇄되었으며 '후시미 모모야마 성 운동공원' 이 되었습니다.
성을 뒤로 하고는 산을 걸어 내려와서는 시가지에 이르러 케이한 전철 후시미 모모야마역 에
들어가 간사이 쓰루패스 로 전철을 타고는 북쪽으로 달려서 5번째역인 후시미 이나리역
伏見稲荷(복견도하) 에 내려서 이나리진자(稲荷神社 도하신사) 를 구경하러 걸어올라 갑니다.
첫댓글 임진왜란 잘 들엇습니다.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더 살앗더라면 큰일날뻔햇군요.
명나라가 우리를 도와주느라 여진족경계가 허술했엇군요.
히데요시가 빨리 죽은게 조선에는 행운이지요?
그리고... 명나라는 그눔의 황제국이라는 체면 때문에
쇠퇴기임에도 7년간 연인원 25만에 달하는 대군을 파병하니
그 보급에 시달리며 군비로 재정이 파탄나니 세금을 폭징하고
민란에 대처하는 바람에 여진족 통제를 소호히 했으며
이번엔 여진족 막느라 산해관에 병력을 집중했다가
이자성군에게 베이징이 함락되어 망합니다.
그렇게 조선을 도왔거만...... 오늘날 한국인들 중에는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으니 허망하지요?
아 그렇게 명나라가 우리나라에게 큰 도움이 되엇군요.
저도 선생님에게 명나라가 큰 도움이 되엇다는것을
알앗습니다. 너무 고맙군요.
명나라는 나라가 망하면서 까지
조선을 도왔으니 중국인들은 만력제를 조선의 황제 라고 부
르는데 조선시대에는 "재조지은" 이라며 은인으로
생각했으나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 고마움을 모릅니다.
네 그런것 같습니다.
명나라가 황제국의 체면때문에 우리를 너무 많이 도와주엇군요.
너무 고마운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