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산 여행13 - 화경에서 멱춘원을 지나 여림호 호수를 보고 고령진 마을을 걷다!
10월 22일 여산경구(庐山景区) 버스 로 함파정과 여산박물관에 모택동 여산시사원을 보고
여산회의구지와 미려별서를 거쳐 황룡담 폭포와 대천지를 구경한후 어비정과 선인동
(仙人洞)을 보고 금수곡 (锦绣谷)을 걸어 천교 지나 여림호 호수에서 화경 을 구경합니다.
화징 (花徑 화경 꽃길) 의 화경정 (花徑亭) 에서 백거이(白居易) 친필 "화경(花徑)"
글자와 "대림사 도화" 시를 보고는 연못가에 백거이가 손수 지었다는
草堂(초당) 을 둘러보고 올라와 호수를 따라 걸어서 멱춘원(覓春園) 을 구경합니다.
멱춘원(覓春園) 에 들어서니 등나무가 올라간 그늘집 외에 소주의 졸정원에서 본 것 처럼
숫자가 엄청 많은 분재 를 보노라니 심심하지가 않으니, 분재(盆栽) 란 나무를 분에
심어 가꾸는 일을 말하는데... 나무가 자연스럽고 고목다운 운치 를 풍겨야 한다고 합니다.
분재(盆栽) 는 일본 에서 발생한줄 아는 사람도 있지만 중국 당나라 때 장회태자묘 벽화에
그려진 것으로 미루어 8세기 부터 중국에서 성행 하였으며 고려시대 이규보 (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에 기록된 가부중육영(家盆中六永) 에서 석류(石留) 와 대(竹) 를 노래합니다.
조선시대 전록생(田綠生) 이 영분송(映盆松) 시에서 분(盆) 에 심어진 소나무 를 노래하고
있으며 세종때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 에 분재 가꾸기 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중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에 건너가 꽃피웠다고 보입니다?
분재(盆栽) 는 나무는 작으나 웅장한 느낌과 예술적 아름다움 이 나타나야 하는지라 회화
(繪畫) 나 조각 처럼 하나의 예술작품 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나무를 바라볼때 대자연이
그려내는 한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 연상되고 운치와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려시대 최자(崔滋) 는 분죽(盆竹)과 석창포에 대해 언급하는데 석창포는 수반(水盤) 에
백사(白沙)를 담아 심어 가꾼다했으며 이색은 분에 심은 소나무 를 읊고있는데 굽힘을
당한다는 왕피(枉被) 라는 말이 나오니, 인위적으로 수형(樹形)을 꾸며내는 기술을 보여
주며 정몽주는 “분종송죽란매시 盆種松竹蘭梅詩” 라고 분재 연작시(連作詩) 를 남겼습니다.
조선초 강희안 (姜希顔)은 우리나라 유일의 원예고전(園藝古典)“양화소록” 을 저술했으니
노송 을 비롯하여 만년송(萬年松)· 오반죽(烏班竹)· 매화나무· 석류나무· 산다화
(山茶花 동백)· 자미화(紫薇花 배롱나무)· 철쭉나무· 귤나무· 석창포를 다루고 있습니다.
강희안 은 시· 서· 화에 능해 삼절(三絶) 이라 일컬어졌던 인물로 “분재도 盆栽圖” 라는
그림에는 네모진 큰 분에 괴석 과도 같은 큰 고목이 심어져 있는 그림으로 옆에는 두
동자가 나무를 돌보고 있는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는데 동자의 키보다 나무가 커 보입니다.
조선후기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 분재로 가꾸어지는 식물로 노송· 만년송· 대나무
매화나무· 국화· 산다화· 치자나무· 석류나무· 철쭉나무· 월계화· 해당화
배롱나무· 석창포가 있고 박세당의 “색경증집”에는 매화나무· 철쭉· 월계화·
옥잠화· 추해당(秋海棠)· 미인초(美人蕉) 의 여섯 가지 식물의 재배 요령 이 있습니다.
분재 는 수려한 자연의 경관을 연상하고 운치를 즐기기 위하여 가꾸어지는 것이므로
그 대상이 되는 나무의 생김새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다양하니 줄기의
굴곡이 심한 이른바 번간(蟠幹) 이라고 불리는 수형을 높이 치는데 .....
조선 중기에는 자연스러운 생김새를 가진 문인목(文人木) 을 즐기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고려와 조선을 통해 소나무와 매화나무 가 분재의 주종을 이룬 것도 두 나무가 번간이나
문인목의 수형에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니 조선 후기 한 분 속에 세그루의 소나무 를
심어 산림의 원경(遠景) 을 꾸며내는 방법이 유행했으니 서유구 는 이러한 분재를 바라
보면 언덕이나 산봉우리 위에 올라앉아 있는 듯하여 여름의 더위도 잊을 있다고 햇습니다.
분재는 사랑방 탁자나 책상머리에 놓아 즐겼으며 문갑(文匣) 위도 좋은 자리가 되었는데
궁궐에는 침전의 후정(後庭) 에 꾸며진 화계(花階) 위에 분재를 놓아 감상하였으니
경복궁의 침전 교태전(交泰殿) 자리의 뒤에 꾸며진 아미산(峨嵋山) 이라 이름한
화계 위에는 지금도 분재를 올려놓고 즐겼던 정교한 받침대 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분재 는 잔가지에 이르기까지 철사를 감아 판에 박은듯한 이상적이고도 정교한
생김새를 꾸며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 나라의 분재는 일본과는 달리
지나친 기교를 부리지 않으니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를 즐기자는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현대에 들어서 분재(盆栽) 는 작은 분(盆) 에 키 낮은 나무 를 심어 그 노거목
(老巨木)의 특징과 정취를 축소시켜 가꾼 것이니 우거진 숲이나 고산절벽
을 연상시키는 등 다양한 기교와 창의력을 발휘해 여러 가지 수형을
구성하여 작은 분에 창출하는 것이라..... 인공적인 배양 기술 이 필요합니다.
일찍이 중국 수(隋)나라 양제(煬帝) 가 읊은 석류분시(石榴盆詩) 나 장회태자 이현의
묘에서 발견 된 분경화(盆景畵) 며 송나라 때의 도요지에서 발견된 화분과
수선분(水仙盆) 등을 통해 이미 600년대에 분재가 일반화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일본 에서 한층 더 함축적 이고도 섬세한 "분재라는 기예(技藝)" 가 발생 하였습니다.
고려 말 전녹생(田祿生) 이 8세 때 분재의 정취를 읊은 “영분송(詠盆松)”을 보면...
(山中三尺歲寒姿/移托盆心亦一奇/風送濤聲來枕細/月牽疎影上窓遲/
枝盤更得栽培力/ 葉密會沾雨露私/ 他日棟樑雖未必/ 草堂相對好襟期)”
“산속의 석자나무 풍상겪은 그 모습/ 화분에 옮겼더니 또 한번 기특하네/
바람은 속삭이듯 베갯머리에 와서 닿고/ 가지에 걸린 달은 창에 뜨기 더디어라/
힘들여 가꾸기에 새 가지 돋아나고/ 이슬비 흠뻑 젖어 잎마저 무성하네/
동량의 재목될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서재에서 마주 보면 마음이 통한다네
오늘날 한국의 분재 는 도자기 처럼 오히려 일본의 영향 을 받았으니 기교적으로 발달된
일본 분재 가 1960년 이후 한국 분재계에 영향을 끼쳐 일본풍 분재 가 만연했으나
이즈음은 한국 고유의 정서와 기질 에 어울리는 분재의 미를 창출해 내고 있다고 합니다.
문득 제주 한경면 에 있는 “생각하는 정원” 이란 식물원 에 적혀있는..... “분재는 뿌리를
잘라주지 않으면 죽고 사람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빨리 늙는다” 는 글귀가 떠오릅니다.
식물은 화분속에서도 뿌리생장 을 계속하는데 화분과 닿는 부분은 갈색으로 변하며
굳어지고 이런 뿌리는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하므로 그냥 놔두면
나무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것 이니..... 뿌리를 잘라주고 주기적으로
분갈이 를 해주면 나무는 다시 회춘하여 수명이 길어지니 오래 사는 것 입니다!
인간도 낡은 생각 을 주기적으로 잘라내야 새 롭고 창의적인 생각의 뿌리가 새로
돋아 젊어지는 것이라니...오래된 고정관념과 아집 을 버리지 못하면 설사
나이가 젊다고 하더래도 생각이 늙어버리니 주위에 사람들이 차츰 떠나가는 것입니다!
식물의 가지와 잎 은 사람으로 치면 기득권 내지 잘나갔던 시절의 기억 이니 세월이 흐르면
새로운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새 뿌리와 가지가 돋아나는 것 입니다!
그러고는 멱춘원 을 뒤로하고 다시 루친후(如琴湖 (여금호) 호수를 따라 7~8분을
걸어서 오른쪽 호숫가에 이르러 상해의 예원 처럼 일명 九曲橋(구곡교)
라 일컬어 지는 돌다리를 건너서.... 호수속에 자리한 섬 에 세워진 정자 로 갑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주장(九江 구강)의 백수호 공원 호수 안에 있는 섬 양수팅
煙水亭 (연수정) 으로 갈때도 역시나 오늘처럼 九曲橋(구곡교)
돌다리 를 건넜으니 중국에서는 거의 예외가 없이 모두 구굑교 인가 봅니다?
누구 여행기에 보니 멱춘원(覓春園) 을 지나 강서성 여산중학교 (江西省廬山中學校) 근처
빙탁(氷卓 : 비래석(飛來石) 을 보았다는데.... 우린 호수를 다시 되돌아 걸어서
화경로구 정류소에서 庐山景区旅游观光车 (여산경구여유관광차) 를 탄지라 보지 못합니다.
이제 여산 관광을 마치면서 생각하니 여산에는 1897년 부터 25개국의 서양인 들이 별장을
지었으니 1000여채 에 달했다는데, 우리나라 조선에도 같은 곳이 있으니 강원도 원산의
갈마반도와 고성 화진포 인데, 강원선 철도로 안변역에 내려 동해북부선으로 갈아탄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로 내려가면 석호(潟湖) 의 풍광에 해변에는 ‘해수욕장’ 이 많습니다.
조선 최초의 해수욕장인 원산 명사십리 와 금강산 삼일포, 감호, 동정호, 시중호 등이 있고
평창올림픽 우리측 스키선수들이 비행기로 내린 갈마반도 는 1920년대부터 들어선 서양
선교사 250명의 별장 이 있었던 곳이라는데, 1937년 갈마비행장이 들어서면서 별장은
고성 화진포 로 옮겨갔으니.... 김일성 별장,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 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1921년 일본 니가타 에서 원산에 온 원산 중학교 일본인 교사가 스키 2 대 를 가져왔으니
평창올림픽 한국 선수들이 찾아간 마식령스키장 인근 삼방협 에는 스키장 이 조성됐고
1931년 삼방협역이 개통되자 경성엔 용산스키구락부 가 탄생해 주말에 경원선 열차 로
오가며 삼방협에서 스키를 즐겼다는데 스키는 오스트리아 츠다르스키 가 개발했다고 합니다.
일본 니가타현 다카다 주둔 13사단장 나가오카 가이시 는 군사용 으로 사용하려고 스키를
주문했으니, 오스트리아의 레르히 소령 은 1911년 1월 12일 니가타현 조에쓰시 다카다
高田 의 가나야산에서 장교 12명에게 강습 을 시작했는데 군사용으로는 안맞는걸로
보고는 민간에 보급 하니 불과 10년만에 일본인이 스키를 조선의 원산에 가져온 것입니다.
环山路(환산로) 를 지나 허난루(河南路) 에 내려 구링전(牯岭镇) 마을 상점들을 구경 하면서
누구 여행기에 나오는 따판지(新疆大盘鸡) 라고 큰 접시에 담은 닭고기 란 뜻의 따판지는
닭고기에 감자와 야채 등을 넣고 간장 조린 음식이라기에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가 않네요?
어쩔수 없어 캔맥주 2개를 사서 호텔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니 무슨 연속극 인
모양인데.....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던 시기에 국민당 정부군 부대와
공산군인 홍군 그리고 시골 농촌마을 에서 벌어지는 대일항전을 다룬 극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대충보니 원수같이 싸우던 국민당과 공산당 이 일본군의 중국침략에
맞서 제2차 국공합작을 한후 손잡고 일제와 싸우는데 일본군이 도시를 공격하자 국민당
장교의 가족과 부유층 여인들이 달아나는데, 도중에 일본군 부대가 숨어 대열을 요격합니다.
그러자 그 일본군 배후 에서 무장이 아주 시원찮고 군복 조차 변변찮은
공산당의 홍군이 기습 을 벌여 전세가 백중 이나 일본군
증원 부대로 인해 모두 도망치다가 어느 농촌마을에 까지 쫃기게 됩니다.
공산 홍군에 나간 아들은 장손이자 나이가 많으니 고향의 아버지는 이러다간 손주를 못보고
집안의 대가 끊길까 염려해 신부를 구한다음 아들에게 연락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서
옛날식 시끌벅적한 혼례를 치르는데 온동네 사람들이 마치 자기일인 것처럼 함께 참여합니다.
한참 결혼식 이 무르익어 갈 무렵 일본군에게 쫃긴 공산 홍군 과 이어 국민당 간부
들의 부인등이 마을로 쫃겨 들어오고 이어 추격해온 일본군의 대포 포탄 이
터지면서 조용하던 마을은 아수라장 이 되어 대 혼란에 빠지면서 집들이 불탑니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이런 류의 옛날 역사 연속극 을 자주 트는 모양인데.... 자연히
일본인에 대해 반감 이 생기고 해서 반일 감정 으로 일본상품 에 대해
거부반응 이 생기는지라 그간 우리 한국은 재미를 많이 본 것 도 사실인가 합니다?
내일 아침에는 경구내 버스를 타고 회의중심 으로 가서는 시외버스를 타고 주장(九江 구강)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다시 시외 고속버스를 타고 징더전 으로 가서 도자기
들을 구경한 후에 버스로 무원 에 가서 마을 버스를 바꾸어 타고 리캉 李坑(이갱)
마을로 가는데... 다음날 도착해 보니 새벽부터 버스를 다섯번에 택시를 3번 타야 했네요?
첫댓글 분재의 역사는 중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에 건너갓군요.
일본이 맨 먼저 시작한줄 알았는데 잘못알고잇엇네요.
아 예? 분재도 중국에서 생겼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