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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몇 년간 진보교육계 바로 옆에서, 혹은 그 속에서 진보교육감을 경험해 왔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13개 지역에서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면서 진보 교육감의 입장과 역할에 대하여 관심과 기대가 부쩍 높아졌다. 이 와중에 진보교육감 주위에서 가장 많은 억측을 불러일으키는 세가지 주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속사정을 풀이해보려 한다.
1. 혁신학교
혁신학교를 들여다본 사람들은 무엇보다 아이들이 학교 생활을 즐거워하고, 탐구와 참여와 협업이 일상적으로 벌어짐으로 인해 수업시간에 소외되거나 자는 아이가 없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변화의 기저에 있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교사들이 '회의'를 한다는 데 있다. 교무회의에서 한 마디 하는 데 10년 넘게 걸리는 경우가 즐비한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학교들과 달리, 혁신학교에서는 교장과 교감과 부장교사와 평교사들이 '계급장 떼고' 회의를 한다. 의사결정구조가 전환되고 이를 통해 실질적인 협력관계가 성립되는 순간, 교사들의 자발적 실천들이 시너지를 내기 시작한다. 혁신학교의 질적인 차별점은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숱한 시범학교·연구학교들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자생력과 지속력을 얻지 못한 데 비해, 혁신학교는 '현장으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기 때문에 남다른 성공이 가능했던 것이다.
혁신학교에 대한 대표적 오해는 학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것은 혁신학교와 비혁신학교를 평면적으로 비교한 데서 나오는 오류이다. 혁신학교는 소득수준이 낮고 주거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에 지정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혁신학교와 비혁신학교를 비교하면 혁신학교의 학력이 낮게 나온다. 혁신학교의 학력과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혁신학교 지정 후 학력의 변화 경향이다. 경기도의 대표적인 혁신학교인 시흥시 장곡중학교의 경우, 전국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기초 미달' 평가를 받은 학생의 비율이 2009년에서 2012년 사이 국어는 4.7%에서 1.1%로, 영어는 6.5%에서 0.4%로, 수학은 11.2%에서 2.9%로 크게 낮아졌다. 혁신학교 전체를 놓고 통시적으로 분석한 통계는 없지만, 주요 혁신학교들의 결과는 예외 없이 학력이 향상되었음을 나타낸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중심에 놓고 보다 신경쓰는데 학력이 낮아질 리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중학교까지는 이러한 교육을 통해 기초 역량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현행 대학입시에도 불리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혁신학교 옆으로 이사하는 학부모들이 점점 늘고 있는 상황이다.
혁신학교가 전교조의 작품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전교조 로고에는 '참교육'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있는데, '참교육'을 정부 정책이나 사회운동의 수준이 아니라 학교현장에서 구현해보려는 흐름이 전교조 내에 존재해왔다. 나는 이를 '전교조 비주류'라고 통칭하는데, 전교조 비주류는 크게 학교개혁운동과 수업개혁운동이라는 두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학교개혁운동은 특히 경기도에서 활발했다. 2000년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초등학교, 양평의 조현초등학교 등에서 폐교 위기에 몰린 학교를 멋지게 재활시켰고 이우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2009년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흐름을 제도화시켜 '혁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그런데 혁신학교의 유래가 전교조에 있다고 해서 현재의 혁신학교가 '전교조 학교'인양 말하는 것이 타당한가? 이것은 마치 '태권도는 한국 것'이라는 주장이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태권도는 한국에서 유래했지만 광범위한 국제화를 통해 더 이상 한국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처럼, 혁신학교는 전교조에서 유래했지만 더이상 전교조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참고로 2012년 통계를 보면 경기도 혁신학교 교사들 중 교총 회원은 31%, 전교조 조합원은 14%였고, 심지어 전교조 조합원이 한 명도 없는 혁신학교도 경기도에 20개, 서울에 5개나 있었다.
2. 전교조
대표적 보수언론들은 '진보'교육감이라는 표현 대신 아예 '친전교조'교육감이라는 호칭을 사용해 왔다. 진보 교육감들이 선거 시기에 전교조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 때로는 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정책 기조가 전교조와 유사한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친전교조'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친전교조'라는 표현이 부당한 첫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경험해온 사람이라면 서로 유사한 교육정책 기조(경쟁의 경감, 교육과정과 평가의 다양화, 소외집단에 대한 관심, 관료주의 혁파 등)를 공유하게 되며, 이것이 전교조만의 특성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호랑이가 사자, 표범, 퓨마와 친척관계인데 유독 '사자와 친척'이라는 점만 강조한다면 부당한 것임과 마찬가지이다. 진보교육감의 입장은 전교조와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범진보 진영의 교육에 대한 평균적인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친전교조'라는 표현이 부당한 둘째 이유는 교육감의 권한상 전교조 편을 들래야 들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시도교육청은 지방(교육)자치단체로서의 위상도 가지고 있지만, 아울러 교육부의 하위행정기구로서의 위상도 겸하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전교조가 교원평가를 아무리 반대해도 교육감이 법령상 교원평가를 거부할 수 없다. 교육감이 법률·시행령을 비켜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교원평가를 어떤 방식으로 하라는 장관의 훈령이나 지시도 거부할 수 없게 되어있다. 따라서 설령 교육감이 전교조의 입장을 대변하려 한다 가정해도, 현실적으로 교육감의 권한상 그렇게 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제 진보적 교육감의 정책수립과 결정 과정을 내부에서 들여다본 나의 경험에 비춰보면, 전교조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당선된 진보 교육감들 가운데 전교조 지부장·지회장 출신이 8곳에 달하지만, 지난 4년간 진보적 교육감들의 교육청 운영방식을 참조하여 판단해볼 때 이 가운데 전교조가 교육감의 정책수립과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많아야 한두 곳에 그칠 것이다.
3. 일반고
서울의 조희연 교육감이 '일반고 르네상스'를 선언하고 서울의 자사고를 없애거나 대폭 줄이겠다는 입장을 보임으로 인하여 고교체계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자사고-일반고 논란을 바라볼 때 주의할 점이 있다. 기성세대는 '일반고'라고 하면 예전의 '인문계고'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일반고의 위상은 과거 인문계고의 위상과 크게 다르다. 일단 전기고에서 학생들을 뽑아간 다음 남는 학생들이 후기 일반고로 배정되기 때문이다. 전기고에는 특목고(마이스터고 포함), 자사고, 그리고 특성화고가 속한다. 기성세대는 인문계고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특성화고(옛 실업계고)에 진학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관계가 역전되어 전기의 특성화고에 떨어져서 후기의 일반고로 진학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옛날에는 인문계고에 배정되는 것이 하나도 창피한 일이 아니었는데, 요새는 일반고에 배정되면 뭔가 어둡고 주변적인 곳으로 밀려난다는 느낌이 강하다. '고교서열화'의 문제는 1990-2000년대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가 야금야금 늘고 특히 이명박정부 시기 자사고가 대거 도입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특히 자사고가 26개나 있는 서울에서 고교서열화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지금은 박정희대통령이 1970년대 도입한 고교평준화가 완전히 깨진 상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준화를 과거와 같은 형태로 복원할 수 있느냐, 만약 새로운 고교체계를 설계하고 추진한다면 어떠한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은 초미의 문제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희연 서울 교육감에 대해 '외고는 내버려두고 자사고를 손대겠다는 것은 아들이 외고를 나왔기 때문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외고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조희연 교육감만이 아니라 진보진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다양한 교육'이라는 외고의 설립목적은 분명 긍정적이지만, 별도의 선발을 통해 특정한 학생에게만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즉 외고에 대한 진보진영의 이중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외고가 '다양한 교육'과 '특권적 선발'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고교체계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선발'을 없애거나 줄이면서 '다양한 교육'을 가능하도록 보장하느냐는 문제, 구체적으로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과목 선택권을 어떻게 보편적으로 보장할 것이냐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번 교육감 선거 공약을 보면, 경기도와 세종시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고등학교에 '수강신청'이 본격 도입될 것이 기대된다. 이것이 발전해가면 서구 선진국과 유사한 고교 체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서구 선진국 고등학교가 우리나라 고등학교와 가장 다른 점은 첫째로 정규수업 시간에 객관식 문제집을 푸는 일이 없고, 둘째로 진로와 적성에 따른 다양한 교육의 기회가 '수강신청'을 통해 보장된다는 점이다. 일반고에서 다양한 외국어 수강신청 기회가 보장된다면, 별도로 외고가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경기도와 세종시에서 예체능·외국어·IT 분야에서부터 도입될 '수강신청'에 새로운 고교체계를 수립할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일반고-자사고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은 이러한 저변의 큰 흐름의 변화에 비하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범 (교육평론가), 허핑턴포스트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