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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주석
중풍병자를 고치심 (마가복음 2:1-12)
그리스도께서 얼마 동안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신 뒤에 이 때쯤이면 그에 대한 소문도 그를 따르던 무리도 많이 감소되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면서 그의 본부 가버나움에 돌아와 당신의 모습을 다시 들어냈다. 그럼 아래에서 이 말씀을 살펴보기로 한다. Ⅰ. 많은 무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왔다. 비록 베드로의 집이거나 예수께서 일시적으로 유숙한 곳이거나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다(1,2절).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이면 회당으로 나오실 것을 확신했지만 그 시간까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왕이 출현하신 곳에는 알현이 있기 마련이고 실로가 출현하신 곳에는(창 49:10) "많은 사람이 모여" 오기 마련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기회를 잘 이용하려면 시간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러 가자"고 초대를 했다. 그러므로 그 집이 방문객을 다 수용하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12절). 비록 그 집이 초라했지만 비둘기들이 제 집을 찾아 모여들 듯이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와 같이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밀려오는 것을 보는 것은 복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Ⅱ. 그리스도께서 모여온 방문객들에게 좋은 대접을 하셨다. 그의 집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접이고 어느 누구보다 더 나은 대접을 하셨으니 그것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었기" 때문이다(2절).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마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왔을 것이고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표적을 보려고 호기심에 끌려 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사람들을 맞이하여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었다". 비록 안식일 같은 적당한 시간에 회당문이 그에게 개방되기는 하지만- 어떤 이들이 그것은 적당치 않은 장소요 적당치 않은 시간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평일 중 어느 날이나 어느 집에서라도 복음전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하시었다.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 32:20). Ⅲ. 그리스도에게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불쌍한 불구자가 사람들에게 메워 왔다. 그 병자는 중풍병 환자였다. 마태복음 8장 6절에 나온 사람과 같이 "몹시 괴로워하지"는 않은 듯 보이나 전연 활동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3절) 마치 관에 누운 듯한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4절) 메고 왔다. 이 병자가 사람들에게 메워 와야만 했다는 것은 그의 가련함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인생의 비참한 상태를 말해 준다. 사람들이 그 환자를 예수께로 메워 왔다는 것은 그들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그것은 역시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동료들에게 베풀어야 할 그런 동정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동정을 베푸는 것이 마땅한 것은 우리도 언제 그런 불행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친절한 친척들이나 이웃들은 그들이 단 한 번만 이 불쌍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메고 오면 다시는 그를 메고 다닐 필요가 없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힘들어 그 병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었다(4절). 나는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전하신 이 집이 다락방이라고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본다. 물론 유대인들은 다락방에 신성한 집회소나 기도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러했다면 무엇 때문에 지혜를 구하는 자들과 같이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전하신 이 집은 다락방도 없고 마당에서 지붕에 오를 수 있는 조그마하고 초라한(그리스도의 외모와 같이) 그런 집이었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이 불쌍한 중풍병 환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을 때" 실망하지 않고 갖은 방법을 다하여 그들의 불쌍한 친구를 지붕 위로 데리고 올라가서 기왓장들을 벗겨 내고 침상에 끈을 달아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앞에 달아 내리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믿음과 열심을 말해 주고 있다. 결국 이 사실은 그리스도에게 대해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떠나지도 아니하고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한 그런 끈기 있는 열심을 보여 준다. Ⅳ. 그리스도께서 이 불쌍한 병자에게 친절히 말씀하시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아마 그 문둥병 환자는 장기간의 질환으로 야기된 그의 성질이 그의 신앙의 훈련에 적지 않은 지장을 주었을 것이므로 "저의 믿음"이 아니고 그를 데리고 나온 "저희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예수께서 고쳐 주실 때에는 백부장이 비록 그 하인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거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그의 하인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는 "저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시었다(마 8:13).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난관을 무릎쓰고 그들의 친구를 주께로 데리고 나온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시었다. 참된 신앙과 강한 신앙은 다양하게 역사 한다. 때로는 신앙에 따르지 않는 이성을 굴복케도 하고 때로는 신앙에 따르지 않는 감정을 극복하게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나타나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받아드려지고 인정을 받게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여기에 "소자야"라고 부른 이 칭호가 얼마나 부드러운가 말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버지다운 배려와 관심을 나타내 보여 주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한 신자를 그의 아들처럼 여기신다. 아직 중풍병이 낫지 않았지만 "소자야"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처럼 대해 주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한 이 말씀에도 그리스도의 다정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1. 죄는 우리의 모든 고통과 병의 원인이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질병으로부터 그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 죄에 대한 생각들을 씻어 버리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데 더욱 관심을 갖게 한다. 2.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실 때 병의 찌름과 악성을 은혜롭게 제거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질병에서의 회복은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인 것이다(사 38:17; 시 103:3). 어떤 결과를 제거하려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사죄는, 병이 치유되거나 모든 악령을 물리쳐, 모든 질병을 근절시키는 요인이 된다. Ⅴ.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서기관들의 생트집과 그들의 트집의 부조리에 대한 논증. 그들은 율법 선생들이다. 그리고 피조물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특권인 죄를 사해 준다는 일은 참람되다는 그들의 교리는 옳다(사 14:25). 그러나 그런 선생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들의 그런 항의는 옳지 않았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무식과 적대감의 결과였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절)한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충분히 증명해 주셨음에도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실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8절). 이 말씀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해준다. 그리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알게 하려 하느니라"(10절) 한 말씀을 확실하게 하였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 인줄 알지라"(계 2:23). 물론 하나님의 주권은 분리될 수 없으며, 사람의 생각을 아시는 그 분이 우리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다. 죄를 사해주시는 일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생각들을 아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죄의 중함과 특성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고 계시지만 용서해 주실 준비가 다 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중풍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증명하였다(9-11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일을 못하셨다면 병을 고쳐 주시는 일도 못하셨을 것이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10,11절). 1. 이 사실은 그 자체에 논쟁할 만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병의 원인이 된 죄를 제거하시지 않았다면 죄의 결과인 병을 고쳐 주실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죄는 영혼의 병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쳐 주시는 일은 죄를 사해 주시는 일의 상징이 된다. 죄 사함을 받으며 병 나음도 받는다. 말씀으로 표적을 행하시는 분은 그 표적이 의미하는 일도 행하실 수 있다. 2. 이 사실은 그들에게 합당하였다. 이 육적인 서기관들은 병 고침을 받으려면 죄 사함을 받아야 된다는 이 합당한 결론에 대해 납득이 갔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다른 더 신령한 결론보다도 쉽게 설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9절)고 물으신 것은 타당하였다. 그와 같은 벌에서 사면을 받음은 곧 죄 사함을 받음이다. 병을 능히 고치시는 분이 죄를 능히 사하실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33장 24절을 참고하라. Ⅵ. 병자에 대한 치유와 이 사실이 사람들에게 준 인상(12절). 그 병자는 "침상"에서 완전하게 일어났을 뿐 아니라 그에게 원기가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12절).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은 전례 없었음을 주의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기 위해 무엇을 행하시나를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레위를 부르심 (마가복음 2:13-17)
Ⅰ. 그리스도께서 바닷가에서 복음을 전하심(13절).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두 번째 시험은 어디로 가시나 그 많은 청중을 수용할 만큼 큰 방이나 넓은 길거리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닷가에는 얼마든지 모여들어도 되었다. 주 예수께서는 아마 튼튼한 목청을 가지셨으며 큰 소리로 외치실 수 있었고 그렇게 외치셨던 것 같이 생각된다. "지혜가....광장에서 소리를 높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이면 비록 그게 바닷가라 할지라도 많은 무리가 그에게 나왔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성실하게 전파되는 곳이면 그 곳이 거리의 모퉁이거나 광야기거나 우리는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Ⅱ. 그리스도께서 레위를 부르심. 레위는 마태라고도, 부르며, 세관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곧 그가 세리였음을 말해 준다. 그 장소는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보며 그리스도께서 그리로 지나가시다가 그 곳에 들려 레위를 만나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다. 이 레위는 여기에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말했는데 알패오(글레오바)는 동정녀 마리아의 자매나 친척으로 보는 저 마리아의 남편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레위는 야고보나 유다나 가나안 사람 시몬의 형제였을 것이며 그들 네 형제는 모두가 사도였다. 마태는 아마 사치를 즐기는 젊은이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유대인으로서 그가 세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셨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죄인 중의 괴수"였지만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큰 죄도 용서해 주시는 자비가 있고, 가장 큰 죄인도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다. 마태는 세리로서 복음 전도자가 되었고 복음서의 첫 권을 기록하였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장 원만하게 기록하였다. 회개하기 전에 있었던 중한 죄나 허물은 하나님의 귀한 은사나 은혜나 신앙의 전진에 방해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후에 새 사람이 된 그런 자들로부터 더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선수를 써서 이렇게 마태를 부르셨다. 예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실 때는 많은 무리가 찾아왔으나 영적 병을(죄) 고치실 때는 그러하지 않았다. 죄의 병에 걸려 있는 자들은 고침을 받으려는 안타까움이 없으니 영적 병의 고질과 위험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심(15절). 1.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15절). 레위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집을 떠나는 마당에서 친구들을 위해 송별회를 마련하고 여기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초청하였다. 그런 송별회는 엘리사와 같이(왕상 19:21)그가 모든 것을 등지고 그리스도를 따름에 대하여 즐거움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마련하였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념으로서도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마치 불 속에서 나무토막을 끄집어 내듯 세관에서 건져내 주신 그 친절에 대해서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2.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쫓음이러라"(15절). 그들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좇았다고 본다. 그들은 사정상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에서 그리스도를 보려고 레위의 잔치에 참석하였다. 그들이 어떤 동기에서 여기에 모였던지 그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세리들은 여기에서나 다른 곳에서나 죄인들과 같이 취급되었다. (1) 세리들은 대개가 그러했다. 세무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일을 범했으니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뇌물 등 부당 취득을 하고 무소하였다(눅 3:13, 14). 성실하게 그 직무를 감당해 낸 사람은 드물다. 로마에서 그 세무직을 맡아 보면서 자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은 사비너스(Sabinu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묘비 비문에 "여기에 한 정직한 세리가 잠들어 있다"(kalw/j telwnh,anti)라는 찬사가 기록되었다. (2) 유대인들은 세리들과 세무직에 대하여 자기 나라의 자유에 대한 모욕이며 자기들의 속박에 대한 상징이라고 혐오를 가졌다. 그러므로 세리들에 대해서 악명을 붙였고 그들의 일행 중에 그런 자가 보이면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죄인의 모양으로 오신" 우리 주님은 이러한 세리들과 기꺼이 대화를 나누시었다. Ⅳ.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일을 공격하였다(16절). 그들은 예수의 설교를 들으러 나온 것이 아니다. 설교에 그들은 감동을 받을 수 있었고 교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앉아 잡수시는"것을 보려고 나왔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주가 거룩하고 덕을 지닌 그런 훌륭한 분이 아니라고 비난하기에 열심이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절).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우시고 가장 훌륭하신 분이 훌륭하게 계획하시고 행하신 일이 잘못 판단을 받고 비난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음을 기억하라. Ⅴ. 이 일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정당화하시었다(17절).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공격을 해 왔지만 당신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정당함을 주장하고 나가셨지, 베드로가 훗날에 한 것처럼(갈 2:12)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이 미명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절하였으며 그런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선한 일을 보임으로 그들의 명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런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세리들은 마땅히 증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그들은 동정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으며, 그들은 병들었으니 의원이 필요하고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세리들과 멀리 하실 줄로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임무는 그들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절). 그리스도께서는 또 다음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다. "만일 세상이 의롭다면 회개하고 죄 사함 받으라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내가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냄을 받은 것은 이 죄 많은 세상이다. 그러므로 나의 임무는 세상에 있는 큰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까"(말 3:7). 또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회개할 수 있으리까? 라고 묻는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세리는 회개하라고 청함을 받거나 권함을 받는 것을 기뻐한다. 희망이 있는 자들을 다루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그러면 누가 바랄 것이 있는 자인가 보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6:12).
금식과 안식일에 대한 논쟁 (마가복음 2:18-28)
그리스도께서 앞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대화를 가졌던 일에 대하여 자신을 정당화 시켰는데 여기서는 제자들을 정당화하였다. 그들이 무엇을 하였든지 당신의 뜻에 따라 행한 것이면 그들을 옳다고 인정하셨고 그들은 결코 쫓아보내지 않으셨다.
Ⅰ.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비난의 초점으로 몰고 온 "제자들의 금식하지 아니함"에 대해서 변명하시었다. 왜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습관적으로 금식을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식 금식하였는데"(눅 18:12) 요한의 제자들도 역시 그런 식으로 금식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레위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던 바로 그 날이 그들의 금식일 이었던 것 같다. "금식하고 있는지라(nhsteu,ontej)"(18절). 이점이 그들의 공격을 더 가중시켰다. 완고한 교수들은 그들 자신의 실습을 표준으로 삼고 그것에 충분히 미치지 못하는 다른 모든 것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쉽다. 바리새인들은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변명하신 대로 죄인들에게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해 세리들에게 가셨다 하더라도 그의 제자들은 금식이나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먹기를 탐하는" 것이라고 불쾌한 말을 하였다. 악의(惡意)는 언제나 최악의 일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변명을 하시었다.
1. 지금은 제자들에게 편안한 시기이므로 금식할 때가 아니지만 이후에 금식할 때가 올 것이다(19,20절). 모든 일에 때가 있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육신에 고난"(고전 7:8) 과 염려가 있을 것을 예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혼식을 올리는 동안에 그들은 즐거울 것이며 결혼 생활이 그들에게 그렇게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손이 결혼하여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그 앞에서 울었음은"(사 14:17) 우스운 일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지금 새로 결혼을 하였으며 신랑은 아직 그들과 함께 있다. 아직도 결혼 축하연이 계속되고 있었다(특히 여기 마태의 축하연이 계속하고 있다). 신랑이 그의 일로 그들을 떠나 먼 나라에 가게 되면 신부는 과부와 같이 홀로 앉아 금식하기에 적당한 때를 맞이하는 것이다.
2. 지금은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는 초기이므로 그들은 훗날에 가능한 그런 종교적 훈련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장기간 동안 그러한 엄격한 종교 생활에 익숙해 왔고 세례 요한 자신도 잘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금욕 생활을 해 왔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금욕 생활에 자신들을 단련해 왔으므로 엄격하고 빈번한 금식에 대하여 쉽게 견디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들의 주께서는 잡수시기도 하시고 마시기도 하셨으며 아직까지 어려운 종교 의식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육하시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모두 즐거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들을 그렇게 빈번한 금식을 시킨다면 그들은 아마 사기를 잃고 그리스도의 곁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거나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것 같은 나쁜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어린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계심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같이 해야 마땅할 것이다(롬 14:1). 또한 우리는 그 날에 알맞은 일과(日課)이상 많은 것을 욕심부리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일과는 능력에 알맞게 바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날에 따르는 능력의 부여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렸을 때 과식했던 일이 있는 어떤 음식에 대해서 혐오를 갖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초기에 부담이 되었던 경건 생활과 헌금 강요에 대해서 어두운 선입감을 가진다.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은 과중한 부담을 갖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명예가 그 본래의 목적대로 쉽고 즐겁고 유쾌하게 하라(마 11:30).
Ⅱ.예수께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일에 대해서 변명하시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행한 이와 같은 일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감히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그들의 장로들의 전통에 분명히 위배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앞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 사실에서 마치 그들이 받은 교육은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받은 교육처럼 그렇게 엄하지 않음을 보여 주듯 그리스도 학교의 교육을 반영하고 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딤후 3:5) 흔히 형식에 대하여는 세심하며, 그들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대하여는 비판적이었다. 그럼 아래에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안식일 아침에 그들이 예배를 드리러 가는 중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얼마나 초라한 조반을 먹었나 보라(23절). "그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니" 그것이 그들의 소유한 최선의 것이었다. 그들은 신령한 진미에 여념이 없어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도 잊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음식을 대신했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그들을) 삼키었다."(시 9:9; 요 2:17).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맛있는 음식을 드는 것을 종교의 한 관습으로 여겼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엇으로도 만족하였다.
2. 바리새인들은 "이삭을 자를"는 일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금지되어 있는 육체적 노동이라고 추측하고 예수의 제자들을 간섭하였다(24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만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면 그리스도께서도 같이 계셨으므로 그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 것이요, 그것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될 것이고 그의 명성에도 불명예스런 손상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마치 싸움을 붙이는 사람들처럼 그리스도께서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될 때에는 제자들에게 고자질을 하고 제자들이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될 때에는 예수에게 고자질을 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켜 집안 싸움을 붙이자는 속셈이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3.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제자들을 그들이 범한 일에 대해서 옹호했나를 살펴보자.
(1) 다윗의 예를 들어서. 예수께서는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진설병을 먹은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옹호하면서 그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하였다(25,26절). 만일 우리가 성서에서 읽은 말씀을 회상하게 된다면 우리의 많은 잘못이나 올바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비난들이 고쳐지게 될 것이다. 성서에 의한 호소는 가장 설득력이 있다. 예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들어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다윗이 시장할 때에 율법에 의하여 제사장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도 주었던 일을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의식에 대한 준수는 도덕적 의무에 대하여 간용을 베풀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한 경우에 한하며 따른 경우에는 그럴 수 없다. 다윗은 대제사장 아비아달 때나 아비아달 제사장 때보다 조금 이전에 이 일을 행하였다고 한다. 아비아달은 그의 아버지 아히멜렉에게서 제사장직을 직접 계승받았다. 그러므로 아비아달이 그 때 에아버지의 대리나 보조자로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 학살을 피하여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 찾아 온 분도 바로 이 아비아달이었다(삼상 22:20).
(2) 논리에 의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이……이삭을 자르는" 일에 대하여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그들로 생각하게 하셨다.
[1] 누구를 위하여 "안식일"이 있는가?를 그들로 생각하게 하시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27절). 이런 말씀은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안식일은 거룩하고 신성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하나의 과제나 고역으로가 아니라 하나의 특권이나 은총으로서 영접하고 환영해야만 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도록 계획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안식일을 그렇게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안식일이 제정되기 하루 전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섬김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죽는게 인간에게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의 생활에 필요한 보급을 받는 일조차 안식일의 율법에 의해 제지를 받도록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은 안식일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고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함에 있어서 우리의 몸을 고려해서 이 세상의 끊임없는 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너무 고달프지 않게 하기 위해 쉬도록 하신 것이다(신 5:14). "네 남 종이나 네 여 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우리의 육체의 휴식을 위해 안식일을 의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경우 몸을 위해 필요한 양식을 취하는 것을 안식일 법령이 억제케 하는 것을 확실히 의도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안식일 제도는 인간의 교화를 위함이지 인간의 파멸을 위함이 아니 그 자체 의도에 모순이 되게 해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②.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안식일은 다만 거룩한 일을 위한 날과,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한 날이 되게 하기 위해 쉬는 날로 제정하시었다. 안식일에 세상일로부터의 휴식은 우리가 이 거룩한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더욱 친밀하게 드릴 수 있고 공사간에 모든 시간을 여기에 드릴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시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 우리의 몸을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일에서 우리의 영혼과 몸이 보조를 맞출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허용된 것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 더 생각해 보자.
첫째, 우리는 얼마나 선하신 안식일의 주인을 섬기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모든 안식일에 대한 제도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점을 관찰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다면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현명한 일이다. 안식일을 지키므로 이득을 보는 자는 그 주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둘째, 비록 우리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안식일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생각해 보자. 만일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이 안식일에 비해 내가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는 밤에 우리 자신을 향하여 묻게 될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제정하신 종교적 준수 사항들이 우리자신들에게나 타인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떤 주의를 해야만 되는지 생각해 보자. 안식일이 제도에 부조리한 억압들을 가하는 일이나 그 제도에 위배되는 부정한 일들을 범하는 행위들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렇게 안식일에 대하여 열심 있는 행위는 우리에게 고역이 될 수 있고 또한 안식일에 위배되는 행위들은 쾌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누구에 의해 안식일이 제정되었나를 생각해 보자(28절).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어떤 부가로 말미암아 안식일의 제도에 대한 당신의 친절한 의도가 좌절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들은 인자의 날들임을 주의하라. 주는 그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영광을 위한 방향에서 안식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해야 한다. 그에 의해서 세상이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해서 안식일이 처음 제정되었다. 그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다. 그러므로 제 4계명은 그에 대한 율법이다. 어느 날 안식일이 한 주의 첫 날로 옮겨지므로 말미암아 안식일에는 약간의 변화가 곧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은 주의 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계 1:10).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다. 그러므로 인자, 그리스도, 중보자는 언제나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공경 받아야 한다. 주께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라고 비난을 받을 때에도(요 5:16) 이 논리로서 주께서는 당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