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돌아갈 수 없는
살아가는 일은 이따금 향수를 먹는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서 있는 향수. 더더욱 현실일 수 없는 향수. 어린 날을 생각하면 벌레 먹은 복숭아가 떠오르고 복숭아가 떠오르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그 뒤에 그림자처럼 사관생도가 따라 붙는다. 그 향수를 먹고 나면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져 몇 달 멀쩡하게 살아간다.
어쩌면 향수는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모른다. 과수원엔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서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부셨던 사관생도는 대령으로 예편한지 오래 전이다. 헛배 불렀던 아이들은 동문체육대회에 참석해 두둑한 찬조금을 내밀고, 그의 어머니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그래서 향수는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나무꾼과 선녀가 함께 살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기억 속에 꼭꼭 묻어두어야 하는 것을.
나는 여름 태양이 짙어지면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꺼내 자일리톨 껌처럼 질겅거린다. 내 어린 날의 여름과, 태양 속에서 벙어리소녀 눈빛처럼 부드럽게 익어가는 복숭아 속살과,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발가벗은 아이들을.
어린시절 복숭아 따는 날 과수원은 떠들썩했다. 아주머니들은 복숭아를 따고 아이들은 원두막에서 게임을 하거나 식물채집을 하며 여름방학을 보냈다. 수확한 복숭아를 선별하여 나무상자에 담고 그 상자를 실은 리어카가 읍내로 떠나고 나면 아이들 세상이 됐다. 파치 복숭아 앞에 앉은 아이들의 시간은 멈춰있는 듯 했고, 복숭아 한 양동이를 눈 깜짝할 사이 먹어치운 배는 금방 솟아올랐다. 위확장에 걸려 봉긋해진 배위로 밀려난 난닝구는 복숭아물이 들어 누런 했고, 검고 가는 목덜미에서는 땟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눈매가 매서운 동식오빠는 우리들과 달리 먹을 것을 탐하지 않았고 차림새도 깔끔했다. 그런 그에게 어른들은 각별했다. 파치 중에서도 좀 나은 것을 그 앞에 밀어 주며 동식이는 공부를 잘하니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듯 했다. 태양을 받으며 익어가는 여름과일처럼 아이들 뱃속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희망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그 싹을 누런 난닝구가 가리고 있지만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는 것을.
여름의 아이들은 이따금 복숭아 실은 리어카를 밀며 읍내에 따라가곤 했다. 읍내는 아이들이 가기엔 멀고 두려운 곳이었다. 왕성극장이 있고, 청자목욕탕이 있고, 택시와 버스가 있었다. 반짝거리는 금은방이 있고 먼 나라 사람들이나 입을 것 같은 멋진 양복점이 있는 딴 세상 같은 곳이었다. 특히 철길과 기차를 보는 일은 신바람 나는 일이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을 싣고 달려가는 기차를 보며 먼 미지의 세계를 동경했고, 장터의 소란함과 보석상의 위엄 넘치는 거리에서 돈의 위력과 가난이 공존하는 것을 배우며 커 가고 있었다. 우리들은.
길에서 벗어나야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듯 세상을 얼마간 살아보니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지 알 것 같다. 비록 배부르지 않았고 좋은 옷 입지 못했지만 그 때는 사람을 속일 줄도 이용할 줄도 몰랐다.
어른이 되어 기차 길에서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상처를 입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하며 우리는 세상 물(?)이 들기 시작했고, 돈만주면 누구나 탈 수 있는 기차엔 소매치기도 술주정꾼도 범죄자도 탈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도 했다.
요즘 한창 익어 가는 미백도 속살은 벙어리소녀 눈빛처럼 부드럽다. 베로도 같은 겉옷을 훌훌 벗겨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고이는 부드럽고 담백한 즙을 나는 차마 삼키지 못한다. 손안에 든 너무 소중한, 잘못 잡으면 깨질 것 같은 조심스러운. 그 알 수 없는 예감에 저절로 눈 감기는 그 순간이 나는 좋다. 그것은 어떤 직감 같은 것이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가을 햇살에 끌려 동해로 떠나던 날 한계령 바람에 첫 눈의 예감이 묻어 있는 것을 느꼈을 때와 같은. 그 순간을 뱃사내는 갑판에 서서 불어오는 남풍을 맞으며 느낄 것이고, 연어는 남대천 물길을 뛰어 올라 모천에 알을 부화하며 경험할 것이다.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으며 그 조심스런 예감에 승부를 건다고 했다던가.
그 수수께끼 같은 보약과 통일벼를 먹으며 자란 아이들은 전자회사에 취직을 하고, 여공이 되고, 교사가 되고 회사원이 되었다. 동식오빠 역시 어른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사관학교에 합격을 했다. 방학이 되어 생도복을 입고 마을에 나타나면 동네 언니들은 향나무아래 모여 그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에 대한 관심만큼 키가 작다느니 눈매가 무섭다느니 도도하다느니. 흉을 보며 웃던 언니들의 볼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었었다. 나도 그 이야기 속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내 세월은 더디기만 했다.
종일 과수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리어카엔 파치복숭아가 가득했고, 그것은 이웃과 정을 나누는 통로역할을 했다. 나는 사관생도가 된 그 집에 파지 복숭아를 가져다주는 일이 죽을 만큼 싫었다. 정작 그는 내가 건네는 파지복숭아에 대해 또한 나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었지만 그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선별된 복숭아상자엔 번호가 매겨진다. 특이라고 쓴 것은 그날 수확한 것 중에서 제일 좋은 상품으로 저급 상품에 비해 곱절의 가격을 받는다. 특 상품이 많은 날 매상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기분 좋게 취해계셨다. 그런 날이면 식구들까지 둥둥 떠 있는 것 같았고 나도 덩달아 알 수 없는 웃음이 나왔다.
어느 날. 특자가 붙은 미백도 일곱 상자가 눈에 뜨였다. 아이보리색에 노란빛이 약간 감도는 복숭아는 참으로 먹음직스러웠다. 몇 개 없어진들 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하실 것 같았다. 아버지 몰래 한 상자에서 서너 개의 복숭아를 빼내 뒤꼍 울타리 아래 숨겨두었다. 저녁나절 파지복숭아 속에 숨겨 그의 집으로 향했다. 가슴을 쑥 내밀고 우아하게 걸었다.
사단은 이튿날 아침 일어났다. 상인과 값을 흥정하다 복숭아가 부족한 것을 확인한 아버지는 이성을 잃으신 듯 했다. 집안 식구들을 차례로 불러가며 복숭아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설마 막내딸의 짓이라곤 생각지 않으신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떨고 있었다. 고함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역정보다 그가 우리 집을 향해 귀 기울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스러웠다.
이제 내게는 누군가를 위해 복숭아를 훔쳐낼 만한 열정도 남아있지 않고, 아버지는 역정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곳에 계시다.
꽃샘추위가 아무리 심해도 복사꽃은 폈고, 태풍이 순식간에 잘 익은 과일을 휩쓸어가도 이듬해 열매는 또 다시 붉어지는데 지나간 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이 평범한 진리가 나를 돌아 갈수 없는 시간 속에 서 있게 한다. 신음조차 들리지 않는 향수를 먹게 한다.
벙어리소녀가 막 사랑을 시작한 세상에서......
첫댓글 <그 돌아갈 수 없는>
그래서 더욱 그리운 복숭아빛 추억.
새콤달콤한 글이네요.
두 번째 수필집 출간을 축하합니다.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빕니다.
요새 <그 돌아 갈 수 없는>에 푹 빠져 좋았었습니다. 오빠 김대령은 잘 계시겠지요? ~~~ㅎㅎㅎ
김윤재 선생님의 특징이 잘 나타난 작품집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누구나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기 마런이지요, 선생님 답게 툭툭 가지를 처내고 살면서 겪어 낸 인생소회를 강하게 압축시킨 작품들로 새콤달콤한 맛이 독자들을 강하게 매료시킬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두 번째 수필집《그 돌아갈 수 없는》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23일이 더욱 기다려집니다.
선생님들 죄송합니다. 마지막교정본이 아닌 것을 나현샘께 보내 오자가 있습니다. 파지는 파치로 읽어 주세요^^
그 돌아갈 수 없는~~을 받아들고 참 행복했지요?그날밤 시간 가는줄 모르고 김윤재선생님 마력에 빠져들었답니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올려주신 김나현선생님 감사합니다
모샘 충북지부일로 바쁠텐데.. 고마워요^^
저도 가끔 그 돌아 갈 수 없는, 향수를 먹으며 단백한 맛에 취하다 올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 < 그 돌아 갈 수 없는 >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 돌아갈 수 없는>제목부터가 어떤 기억을 아련히 불러내는 것 같습니다.
예쁜 책, 지은이의 정성이 곳곳에 묻었을 책입니다. 출간 축하드립니다.
파지 복숭아->파치 복숭아가 맞단 말이지요?
그 복숭아와 함께할 아련한 추억의 그림이 선히 그려집니다.
윤샘 반가워요^^ 18일에 만나요. 나현샘 누가 일러줬어요. 파지는 종이 못쓰는것이고 과일 상처난 것은 파치라고요^^
김윤재 선생님, <그 돌아갈 수 없는>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선생님의 달큰한 복숭아가 나에게도 유년의 향수를 불러오게 합니다.
김윤재 선생님
<그 돌아갈 수 없는> 두번째 수필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16년도 좋은 작품 기대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글들로 엮으셨겠어요,로 드립니다.
출간, 큰
<그 돌아갈 수 없는> 그래서 때로는 위경련을 일으키듯 고통스럽기까지한 그리움, 김윤재 선생님의 모습을 닮은 작품입니다. 감칠맛이 납니다. 복숭아 빛처럼 곱고 달고 새콤하며 맛있습니다. 두 번째 수필집, 대박나시길 기원합니다. 제가 어디 좀 다녀오느라 보내주신 귀한 수필집, 아직 읽지를 못했습니다. 맛있고 숙성된 과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좋습니다.잘 읽겠습니다. *^^* "사관생도 대령 예편" 제 남편인 듯 눈에 힘이 갔습니다.ㅎㅎㅎ
감사합니다. 아직도 덜익은 도사리들 뿐입니다. ~~~~
김윤재 선생님 <그 돌아갈 수 없는>출간을 크게 축하드리며, 필력에 경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