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무대의 현장-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였던 중구 초량동 옛 남선창고 건물. 2008년 철거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사진(남선창고)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제공
- 대원들의 사기는 높았다. - 소문으로 아는 수정산 외팔이 돌팔매 사내가 뽑혀왔기 때문이었다.
- 봉래각 각 층 유리문이 열리면서 일본인들이 머리를 내밀고 살피더니 총구 몇 개가 마당을 향했다. 배코머리 몇이 창밖으로 나오는 순간 남선창고 마당 깊은 지점에서 돌이 날아오르고 비명이 터졌다.
- 다음 날 부산신문 1면 - 두 번째 큰 기사 제목은 이랬다. '전광석화와도 가튼 작전으로 봉래각 되찻다'.
초량 거리가 기차역이 있고 시장이 자리한 데다 영주고개로 넘어가는 본래길이라 항용 부산스런 데지만 오늘은 좀 별나게 시끌댔다. 시나미찌 입구의 남선창고는 들고나는 화물차와 우마차 짐 부리는 소리, 짐꾼들 목도 메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이라지만 일본군 장교 숙사인 봉래각 앞이 행상인들로 시끄러운 건 예외 일이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건물 입구의 보초가 "저리 가!"라고 한 마디 하면 끝날 일이지만 세상이 달라졌으니 그들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장사꾼들도 그런 사정을 환하게 꿰뚫고 있다는 듯 저마다 맘껏 소리쳤다.
"유성기 있소, 라디오 있소!"
"옷 사소, 옷! 철도관사서 막 나온 일본사람들 고급 옷들이요."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설탕 있소! 사분도 있고 백분에 탕고 도랑 화장품, 뾰쪽구두에 고급 파라솔 있소!"
"자, 이빨 시린 냉차요, 목부터 축이고 물건 구경해도 누가 잘못됐다 안 카요!"
작은 장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물건이 다양한 건 불과 닷새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5일 뒤로 일본인들 가정집에서 내놓은 살림살이 잡동사니에 전시통제물자까지 음으로 양으로 막 풀려 나오고 있었다. 봉래각 앞 일본군 보초는 두 명이고 사거리 남선창고 모퉁이에 동초 한 명이 소총을 어깨에 메고 너 댓 걸음 제 자리를 맴돌았다. 시끄러운 난장판 속에서도 그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은 것은 며칠 전 일단의 조선인들이 겁도 없이 요새사령부에 찾아가 사령관을 만나니 어쩌니 하다 쌍방 간 총까지 쏘아댔기 때문이었다.
시각은 중식이 막 끝나가는 오후 1시, 장사치들 속에 수박과 참외를 파는 사내가 목판 밑으로 손을 가만히 넣었다 빼고는 사거리 쪽 가게에 눈을 주었다. 차양 아래 볕을 피하고 앉은 몇 사람이 그의 눈길을 받자 사내는 냉차장수와 라디오를 파는 사람, 그리고 물건 구경하는 몇을 살폈다. 때마침 초량역을 떠나 영주정으로 달려가는 전차가 땡땡거리며 큰길을 지나갔다. 사내가 물건이라도 챙기려는 듯 목판 앞으로 나오는데 뜻밖에도 낡은 국민복 왼쪽 긴 소매가 너펄거렸다. 사내는 봉래각 정문을 향해 딱 한 걸음 걷고 멈추고는 오른쪽 손목을 가볍게 두 번 까닥였다. 쌩, 전차 쇠바퀴 굴러가는 소리에 얹혀 돌팔매 두 개가 거의 동시에 보초를 향해 날더니 윽 하는 비명 소리와 같이 둘은 정강이를 붙들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기라도 한 듯 어느 틈에 권총과 목검을 든 냉차 장수와 라디오 장수가 봉래각 입구로 달려들고 아리사카 38식 소총을 든 몇 사람이 뒤를 따랐다. 그런 광경을 목격한 사거리의 동초가 어깨에 맨 소총을 풀 때 수박장수 사내의 오른 손목이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가볍게 움직였다. 차양 밑에 앉았던 두 사람이 단거리 달리기 출발하듯 뛰어 무릎을 붙잡으며 주저앉는 동초를 가볍게 제압했다.
건물 안으로 뛰어든 선두는 계속 계단을 오르고 뒤따르는 중위와 후위는 차례대로 한 층 한 층을 점거해 나갔다. 옥상에 태극기가 내걸린 건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외고 펴며 복닥거리던 장사치들과 구경꾼들은 치안대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제각기 정해진 위치에서 경계를 섰다.
초량동 옛 백제병원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 장교숙소인 봉래각이 들어섰던 곳이다. 부산시는 이곳을 근대건조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저녁에 봉래각 2층에서 회의가 열렸다.
"동지들 모두 수고했소."
거사를 주도한 성 대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보다 더 화급하고 중차대한 일이 남았지만 그래도 며칠 전 사태에 더해 본보기를 보인데다 이곳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니 우리 한 일이 회자되고 남을꺼요."
15일 정오 항복 방송은 있었지만 하루 아침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떠나는 건 아니었다. 일본의 항복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을 대상으로 한 것일뿐더러 38선 이남의 일본군 무장해제는 미군 진주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행정상의 공백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치안은 여전히 일본군과 경찰의 손아귀에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객관적 상황과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자중 자제 호소가 수월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일반 대중에게 해방은 행동에 의해 실감되어야 했다.
며칠 전 초량과 영주정 일대의 일부 자생적 치안대원들이 요새사령부로 몰려가 무장 해제를 주장하며 정문 주위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다 쌍방 공포 두어 발씩을 쏘고 물러난 일이 있었다. 그날 일은 보다 치밀하고 현실성 있는 활동을 하도록 치안대원들을 각성시켰다.
봉래각은 장교 숙소이기에 점령만 한다면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큰데다 번잡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 작전에 따라 점령 가능성도 높았다. 거기다 등을 대고 있는 남선창고와 더불어 우리 민족이 세운 번듯한 건물이라 부산부 사람들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명태고방이라 불리기도 하는 남선창고가 개항과 더불어 반성한 객주업의 산물이라면, 봉래각은 본디 현대식 종합병원이었다. 김해 갑부 출신 의사 최용해가 5층 높이에 석재와 적벽돌로 지어올린 모던한 빌딩의 백제병원은 도청 옆 부립병원과 초량역에서 몇 걸음 떨어진 철도병원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부산의 3대 병원 중 하나였다. 최신 의료설비에다 독일 의료진 초빙으로 일본인들의 질시에 따른 보이지 않은 방해와 괴소문으로 문을 닫고, 중국인 부호가 인수한 뒤 청요리집으로 요정으로 흥청대다 일본군 손에 넘어간 비운의 건물이기에 오늘의 점거는 곧 쾌거 그 자체였다.
잠시 지나간 시간의 감회에 젖어있던 자리는 한 대원의 묵직한 목소리에 깨졌다.
"모두 힘을 썼다 해도 먼저 돌팔매 친 공로만은 구분해야 합니다."
"그럼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오늘은 틀렸심더. 이 동지에게 우리 모두 박수를 칩시더."
짝짝짝, 누가 먼저랄 것도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맨 뒷자리에 서 있던 돌팔매 사내가 인사했다.
"면구스럽습니더. 구주탄광서 팔 하나 잃고 화 삭일라꼬 매일 집 뒤 수정산에 올라 성한 손 하나로 바우 마치고 나무 마치고 나뭇가지 마치고 새 마친 결과가 나라를 위했다니 다행입니더."
사내는 봉래각 접수 방법을 두고 고민하던 치안대 간부들이 특별히 수배한 경우였다. 무기가 태부족한 건 그만두고라도 살상은 피해야 했기에 큰 상처를 내지않는 초반 제압에 돌팔매를 택한 것이다.
"옛날 임꺽정 휘하에 댓창 잘 던진 두령이 있었다더니 이 동지가 꼭 그 사람 같습니다."
"아, 그 이가 박유복인데 돌팔매질은 그래도 배돌석이지요."
몇 사람이 벽초가 쓴 소설 이야기를 꺼낸 뒤 본격적인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일본인들이 풀어놓는 통제 물자를 둘러싼 혼란 방지와, 개인적 원한이나 사적 이익을 위한 일본인과의 충돌 방지도 중요했지만 가장 긴요한 것은 치안대의 무장 강화와 일본인들의 재산 반출 방지였다. 결론은 지역별로 마구 창설되고 있는 치안대를 건국준비위원회 산하로 통일하는 것, 그리고 우선 별동대를 따로 두어 일인들의 재산 밀반출을 단속키로 했다. 일본인들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 아직 자기네들 경찰과 군대가 버티고 있을 때 재산을 실어내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선 감시 대상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산 경남 일대의 토지를 긁어모은 하사마와 악덕 고리대금업자 오이케, 그리고 남해안 일대 어장을 장악한 수산업 부호 가쓰이로 정했다.
현재 남아 있는 남선창고 옛 담장.
일주일 뒤 저녁 무렵, 소낙비가 한소끔 지나간 뒤 일본군 장교 한 명이 봉래각에 들어섰다. 맨 몸도 아니고 리볼버 권총까지 찬 그는 매우 위협적이고 거만스러웠다.
"책임자를 만나야겠다. 봉래각을 넘겨라! 아직 미군이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불법 무력행사를 용납할 수 없다!"
언쟁이 몸싸움으로 번지고 마침내 치안대원들이 일본군 대위의 권총을 빼앗고는 밖으로 내보냈다.
"뭔가 시비를 걸려고 온 것 같애. 대원들을 증강하지."
"저녁 늦게 절로 모일텐데."
그 시각, 대부분의 대원들은 밖에서 임무를 수행중이라 건물에는 10여명의 대원들만 남아 있었다. 우선 급하게 남선창고의 건장한 인부 몇 명을 불러들이고 가까운 건준 사무실에서 청년 대원 다섯이 뛰어오고 난 직후 봉래각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 포위되었다. 아주 작정을 한 듯 트럭 두 대의 병력이 먼저 도착한 뒤 세 번째 트럭에는 기관총까지 실려 있었다. 뒤늦게 건준 간부와 치안대원들이 몰려들었지만 이중 삼중으로 길을 막고 선 일본군들 앞에서 별다른 수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화선도 끊겨 당장 봉래각 내 대원들과의 연락 방도부터 없었다. 밤이 깊어 남선창고 창고 옥상에 그림자 하나가 얼씬대더니 납작한 조약돌이 3층 열린 창 안으로 사뿐히 떨어졌다. 그 돌에 편지 한 장이 끈으로 묶여있었다. '동지들, 별도 명령이 잇을 때까지 죽음으로 버티시오!' 그림자의 주인공은 외팔이 돌팔매 사내였다.
다음날부터 건준 간부와 치안대 간부가 일본군 측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요구와 답은 단 한 마디, 봉래각을 넘기라는 것뿐이었다. 부산항은 몰려드는 자국민들 철수의 교두보이기에 부산 주둔 일본군의 위세는 꺾일 줄을 몰랐다. 결국 건준 지휘부는 일주일만에 봉래각 대원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음식 반입이 끊인 상태에서 대원들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우리 손으로 얻지 못한 해방이기에 분루를 삼키고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 무렵 또다른 전쟁은 부산신문사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인 직원들이 일본인 사주와 기자들에 맞서 싸워 신문 발행이 우리 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문제는 활자였다. 한글 활자를 구할 수 없어 내처 일본어로 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한글 활자를 찾아 우리글로 신문을 내는 것, 그게 모든 한국인 사원들의 지상과제였다. 매일같이 부산 시내 인쇄소를 뒤지던 끝에 마침내 한글 활자판을 찾았다. 그것도 봉래각 건너편의 협동인쇄소 창고에서였으니 별다른 인연이고 감격이었다.
달이 바뀌어 9월 4일, 미군은 아직 상륙전이었지만 건준이 제대로 짜임새를 갖추고 산하에 부산치안대가 정식으로 출발했다. 상황이 하루가 급박하게 흐르고 있던 차, 봉래각에 일본군 장교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면서 일본 무뢰배들이 들락거린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치안 총사령 강대홍은 즉시 특별대를 꾸렸다. 처음 봉래각을 접수할 때 참가했던 대원들은 조선방직의 광목 등 전시통제물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혼란 수습에 투입되어 유경험자는 극히 소수였다. 그러나 대원들의 사기는 높았다. 소문으로 익히 아는 수정산 외팔이 돌팔매 사내가 뽑혀왔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가 속한 소조는 가쓰이의 저택과 부두를 감시하다 밀선에 실리기 직전의 짐들을 발견하고 국보급 조선도자기와 서화들로 채워진 궤짝들을 압수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총 보다는 일본도를 더 조심해야 할지도 몰라. 전국 팔도의 낭인패들이 다 모인 것 같아."
특별대 대장이 몇 마디 작전지시를 내렸다.
6일, 오후 세 시가 되자 남선창고 마당이 부산스러웠다. 집에서 쓰는 대나무 사다리부터 남선전기에서 쓰는 제대로 된 사다리까지 옮겨지고 동아줄까지 들어왔다. 봉래각의 각 층 유리문이 열리면서 일본인들이 머리를 내밀고 살피더니 곧 총구가 몇 개가 마당을 향했다. 얼마 뒤 무슨 수신호라도 받았는지 치안대원들이 사다리를 들고는 일시에 봉래각 담에 바투 붙어섰다. 건물에서 그들에게 총을 쏘기 위해서는 상체까지 내밀어야 했다. 배코머리 몇이 창밖으로 나오는 순간 남선창고 마당 깊은 지점에서 돌이 날아오르고 비명이 터졌다. 그 소리가 신호가 되었는지 봉래각 정문에서 우리말 함성이 터지고 곧이어 총소리가 빵 빵 빵, 세 방 터졌다.
다음날 부산신문의 1면 두 번째 큰 기사 제목은 이랬다. '電光石火(전광석화)와도 가튼 작전으로 봉래각 되찻다'
■ 필자 조갑상 약력
조갑상 소설가
소설가. 현 경성대 국문과 교수.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소설집 '테하차피의 달' 등과 장편소설 '밤의 눈' 등을 냈다. 부산관계 저서로 '소설로 읽는 부산', '이야기를 걷다'가 있다.
조갑상 소설가·경성대 교수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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