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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想 4
** 핏줄과 같았던 軍隊同期戰友(군대동기전우)를 찾습니다 **
**뒷줄 왼쪽부터:3포사수: 유 병수. 5포: 남 호근. 6포: 박 상목 1포: 양 승만
**앞줄 왼쪽부터:SIG 강 차희. FDC: 묵향. 4포: 이 윤홍 등의 동기들이 고무신을 신고는 휴일의 여유를
P.X 에서 막걸리 한 잔씩을 걸치고는 연병장의 포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
열악했던 그 시절의 <양승만>이 입은 군복바지의 무릎을 꿰맨 모습에 더욱 그리움이 가슴 가득하다.
1973년 12월은 그 어느 겨울보다도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甲種一級(갑종1급)을 받고도 약 2년이 지난 후에야 훈련소로 입영을 한다.
내 친구들은 이미 상병계급장을 달고 휴가를 나와서 의기양양한 패기로 내 앞에 앉아
군대생활의 쓰고 고달픈 야담을 털어 놓으며 술잔을 기울이는데,
국방부에서는 부를 생각조차도 하지를 않으니 원...
입영통지서가 고향집으로 들이 닥쳤다.
1973년 8월경에 군 입대 통지서를 면사무소 병무계에서 묵향의 아버지에게 등기우편으로 송달을 했고
입영통지서를 받아 든 아버지가 급히 버덩말(동네이름) 안 씨 아저씨 댁으로 가셔서
소위 딸딸이 전화(교환원을 통하여 연결하는)를 이용하여 큰누나 댁으로 연락이 왔다.
“ 큰애야... 큰일 났다. 일 났어! ”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에 큰누나는 영문도 모르고 가슴부터 감싸 안아야 했단다.
왜냐하면, 연로하신 아버지는 누이동생과 함께 시골에서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 왜요? 아부지! 몬일 있어요? 어디 아프세요? ”
큰누나는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에 행여 좋지 않은 일이 아니길 바라면서 되묻고 있다.
“ 아니, 그런게 아니라 큰애야... 태훈 이가 군대를 가야한다고 영장이 나왔어! ”
“ 호호...깜짝 놀랐잖아요. 아부지! 무슨 큰일이 난줄 알고...휴...”
“ 이놈이 글쎄...군대를 안가는 줄 알았더니만 이제서 영장이 나오다니 원..”
아버지는 간절히 원했었다.
약해빠진 큰 아들놈이 제발 군대에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겉보기에 가냘프지 벗겨 놓으면 얼마나 멋진 몸인 줄을 아버지는 모르고 계셨다.
“ 아부지, 걔는 군대를 갔다가 와야 사람이 돼요. 걱정 마세요 ”
“ 너 그런 소리 하지마라! 빨갱이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시국에....
장남이 가서 죽으면 어쩌려고... “
그렇게 아버지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큰 누나가 아버지를 진정 시켜드리고는
그 즉시 내게 전화를 해왔다.
“ 태훈 아, 너 국방부에서 부르는 것 같던데? ”
“ 어디서 불러? 누나? ”
“ 국방부.....”
“ 거기서 왜?? 헌병대에서? 전번에 해병대 녀석이 술 먹고 깽판을 치기에 혼내줬는데...
그 때문인가?? 모를 텐데??....“
“ 푸히히히....그게 아니구 너 군입대 영장이 나왔다고 아부지가 전화를 하셨어. ”
“ 그래? 에효...남들은 제대를 하는데 난 이제서 들어가야 하다니...”
** 군입대 전 덕수궁의 가을에 묻혀 카메라에 추억을 남겼다
친구들은 고참 서열에 끼어서 신참의 애로사항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그것도 손발이 아리도록 추운 겨울에
훈련소에 입소를 해야 한다니...
병과: 108 기갑(전차)
입영일: 1973년 12월 18일
입영부대: 38 사단 신병교육대
원주의 도심거리를 휘청거리며 걸었다.
내일이면 훈련병이 되어서 호된 훈련을 받아야 하고 자대 배치를 받으면 또 언제나 자유로운 이 거리를 거닐 수 있을까...
어느 이발소에 들어가서 스포츠형 머리를 더 짧게 자른뒤 까까머리를 하고는 원주 시내를 방황하는 사람처럼 걸었다
굳이 입소 장소에까지 오시겠다는 아버지를 강제로 집을 향하여 밀어제치고는
고향친구 둘과 함께 패잔병들의 모습과도 같이 어슬렁거리며 훈련소 정문의 위병소를 통과하여 들어간다.
“ 아....이젠 되돌아갈 수가 없다 ”
헌병들이 인도를 하는 연병장으로 향하며 힐끔 힐끔 멀어져가는 자유로운 세계를 아쉬운 듯 바라본다.
위병소를 지나 가는 도중에 제대 말년인 듯한 병사가 하는 말이다
" 임무교대~~~~~!! 하하하..."
인생2막에 접어들며 그들과 또 다른 임무를 교대 하는 것을 실감을 하며 따라 들어간다.
마침 예비군복을 입은 제대장병들이 왁자지껄 희희낙낙 하며 위병소를 향하여 자유의 세계로 가는 중이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정신이 아찔해 진다.
" 느그들 0 뺑이 한번 쳐봐라! 우리는 둥지를 떠난 새다. 얏호!! "
그들은 입소병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저 멀리 사라져 버리고
펑펑 내리는 눈송이를 머리에 받아 이고는 3년의 고생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혹독한 추위에 눈은 왜 그리도 많이 내리는지...
한 번 내렸다 하면 무릎까지 빠지는 것은 기본이다.
같이 입대를 한 다른 동기들 보다 군번이 빨랐다.
중대에서 3번째로 빠른 군번을 부여 받은 줄을 훈련이 끝나고 후반기 교육이나 자대배치를 받을 때 알았다.
65041799..... 내 앞으로 65041797...65041798 번 2명이 있었다는 이유로
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받고 난 후 같은 동기들 중 맨 오른쪽에 서서 배속 보고를 해야만 하는 떨리는 일들이 있다.
내 뒤로 주루룩 9명이 칼로 무를 자르듯 잘려서는 홍천의 와루바시(젓가락)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떨어지고,
다시 6명이 같은 포병부대로 배치가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기타를 다룰 줄 아는 병사의 노래반주와 함께<이장희>의 <그건 너>란 노래를 열창하고 있는 묵향
이 중 1명은 브라보(B)포대의 수송부로 배속이 되고 나머지는 브라보 포대 전포반에 배치가 되어
3년 동안의 긴 시간들을 동고동락을 하며 전역의 그날까지 형제와 같은 우애를 과시하며 시간들을 보낸다.
일 빵빵(100,보병) 보다 엄청 군기가 강한 기계화 부대는 내무생활이 엄격하며 살벌하다.
기갑부대에 비하면 조금은 군기가 약한 편이지만, 보병들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할 기강에 병사들은
칼날 같은 위엄 속에서 생활을 한다.
사격지휘본부(F,D,C)에 배속을 받아 엄청난 무게의 포를 방열하는 훈련과 포사격훈련의 고됨은 없었지만,
상황실에서의 많은 정신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군 생활에 적응이 되고 사격지휘본부에 근무를 하면서 작전과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졸병이지만 전포반의 선임 병들로부터
제재를 당하지 않고 3년의 세월을 호령과 명령으로 군생활을 한다.
**155mm 포 앞에서 단독군장에 대검을 차고 똥 폼을 잡은 묵향
군 생활은 제하기 나름이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지휘관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군대생활을 잘 하는 놈은 사회생활도 잘한다.>
생각해 보면 백번 맞는 말인 것 같다.
단체로 받는 훈련이나 기합은 열외가 될 수가 없기에 어쩔 수가 없지만, 개별적으로 선임 병(고참)에게
구타를 상습적으로 당하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군대 말로<뺑이 치게 열심히 하는데 누가 싫어할까..>
당시의 군 기강은 엄격한 상명하복<上命下伏>이다
선임자 또는 상관이 팥을 콩이라 하면 콩이라 믿어야 한다.
적절한 이유를 붙이면서 때리면 맞아야 하고 시키면 해야 한다.
그것이 1970년대 이전의 군대생활이다
*고참병에게 구타를 당하지 않는 방법*
1.내무생활의 모든 일에 선임 병이나 상사가 시키기 전에 행동한다.
2.기상시간 5분전에 일어나 미리 옷을 입고 침구에 누워 있다가 불침번의 기상 구령이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일어나 본인의 침구를 정리를 하고나서 고참의 침구정리를 돕는다.
3.소속된 분대에 말년병장이 있으면 일조점호 후 비누와 칫솔을 준비하고 대야에 세숫물을 준비한다.
4.아무리 억울한 빠따(구타)를 맞아도 얼굴을 찡그리어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5.내무생활도 훈련도 최선을 다한다.
6.졸병 때에는 항상 구보로 이동한다.
7.점호를 받을 땐 항상 명확하고 신속하게 대답을 한다. 등등....
어차피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주어진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좋든 싫든 운명적인 일이 아닌가...
인생 70년을 기준으로 3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 생각을 한다.
아픔도 즐기고
고통도 즐기며
평생 그곳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라 생각을 하며 군 생활을 한다.
다섯 놈의 동기들을 그렇게 타이르고 구슬러 가며 형제와 같이 지냈다.
경주출신: 남 호근
경북 봉화출신: 깎사 권 오덕
영월출신: 유 병수
경상도출신: 양 승만
경상도출신: 박 상목
삼척출신 이 윤홍...
전라도출신: 강 차희
이름을 잊은 엇비슷한 동기들이여...
서울태생으로 인식이 돼있던 사격지휘본부(F.D.C) H.C.O 김 주영이 너희들을 찾는다.
**가을 어느 날 포병대대 야전무대에서 마포구 어머니회의 위문단원인 한 어머니와 함께 공연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묵향
구쌍오(955) 대대에 너희들과 같이 복무를 하는 부대 창설후 최초로 2년 연속 위문공연단을 유치하며 대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김주영을 기억 하는가?
차라리 제1전선의 최전방으로 배속을 받았더라면 더 멋진 군대생활을 했을 것 같았던 우리들의 마음은,
제2전선의 고된 훈련과 엉덩이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일명 빠따를 달고 생활을 했던 그 혹독한 군대생활이
새삼 그리운 것은 어인일인가...
군대에 입대를 하던 날로부터 벌써 4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꿈속에선 그 내무반 그 침상에서 비상이 걸려 군장을 꾸리고는 포차에 가득 실은 포탄과 함께
155mm 곡사포를 견인하고는 진지로 투입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은 어인일인가?
40여 년 동안 너희들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꿈속에서는 그 때의 그 모습으로 서로 장난질을 치며
때로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그때의 자네들과 내가 했던 것처럼 목청 높여 호령하며 적진(타겟)에 포탄을 날리는 상황을
재현 한다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건강하게 아직도 그 시절과 같이 용감하게 인생을 살아가는지..
아님....
어쩌다 우리들 보다 먼저 저 세상에서 평안을 찾았는지..
혹여...
자네들의 자제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본다면...
울 아버지의 군대동기인가 보다 하여 자네들에게 귀 뜸을 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 죽기 전에 그 시절을 상기하며 그 고달팠던 그 부대를 찾아가 보며 후배들의 노고를 감사함이 어떠한가...
기다리겠네.
만약에 이 글을 읽고 나를 기억한다면
꼭...댓글로 연락을 바라네
그리운 전우들이여....
2014년 6월23일 그리운 군대동기들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