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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http://www.mapo.seoul.kr/organization/intro/history/20040906/1_2619.html
1944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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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령 제 350호 서대문구(西大門區)의 일부와 용산구(龍山區) 의 일부를 분리하여 마포구(麻浦區) 신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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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구역 : 23개 정(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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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현정, 공덕정, 신공덕정, 도화정, 마포정, 토정정, 용강정, 염리정, 대흥정, 신수정, 구수정, 현석정, 신정정, 하중정, 창전정, 동교정, 서교정, 상수일정, 하수일정, 당인정, 합정정, 망원 정, 율도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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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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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구의 '구역소'를 구청으로, 구장을 '구청장'으로 개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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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4월 18일 (시 조례 제 6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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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의 '동회'를 '동'으로, 각 구청에는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 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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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는 아현 1,2,3,4동, 공덕 1,2,3,4동, 신공덕 1,2동, 도화 1,2동, 관란동, 대흥동 염리동, 신석동, 세교동 등 19개 행정동을 두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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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6월 1일(법규 제 164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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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의 노고산동과 대현동 일부가 마포구에 편입되고 마포구의 아현동 일부가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는데 이 때에 노고산동이 신설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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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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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 및 관할구역 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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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는 아현 1,2,3,4동을 아현 1,2,3동으로, 공덕 1,2,3,4동을 공덕 1,2동으로, 신공덕1,2동을 신공덕동으로, 관란동을 용강동으로, 신석동을 신수동으로, 서강동을 창전동과 상수동으로, 세교동을 분리하여 서교동과 합정동 으로 하여 전체의 행정동 수를 20개에서 18개로 축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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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12일(대통령령 제 654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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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의 성산동,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편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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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의 동교동, 서교동 일부가 서대문구에 편입 변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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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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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9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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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령 제 7816호(1975년 9월 23일)로 구 관할지역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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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7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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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례 제 1413호(1980년 3월 31일 공포)로 동사무소 설치 [서교동분리 동교동 신설, 망원동을 망원1, 2동으로 증설-22개 행정동에서 24개 행정동으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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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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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례 제 2016호(1985년 8월 8일 공포)로 용강동 일부를 염리 동에 편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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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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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마포구동명칭및구역획정 조례 제84호(1989년 5 월 29일 공포)로 하수동 전역을 상수동, 망원동 28번지를 서교동, 망원동중 망원1, 2동 관할 구역을 제외한 지역을 합정동으로 동명칭 변경
마포의약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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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서부 한강연안에 위치한 마포지역은 안산에서 갈라진 와우산 구릉산맥과 노고산 구릉산맥, 용산 구릉산맥이 한강으로 뻗어 세 산맥연안에 호수처럼 발달한 서호, 마포, 용호가 있었는데, 이 3호를 삼개(三浦-3개의 포구)라고 불렀고 이 삼개중 지금의 마포를 마포강, 마포항 등으로 불려 마포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마포구는 이처럼 옛날부터 수상교통의 요충지로서, 또는 삼남지방에서 오는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는 지역으로서 일찍부터 발달된 어촌이 형성되었다. 마포구 일대는 조선 전기에는 한성부 관할구역으로서 성밖 10리내에 있기는 하였으나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설정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후기 두모방, 한강방, 둔지방, 용산방, 서강방 등 5개의 방이 한성부 행정구역으로 새로 설정되면서 마포구 일부가 용산방과 서강방에 속하게 되었다.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는 1495년부터 존속되어 오던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여 경기도에 예속시켰고, 이듬해 4월에는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에 부, 면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이때 종전의 용산방과 서강방은 용산면, 서강면으로 개칭되었고 각각 31개 동리와 10개 동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1년의 지방관제는 3년만에 개편되어 1913년 12월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마포는 용산면 일부가 경성부 서부로 편입되고, 서강면은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그후 마포구는 여러차례 행정구역 변천을 겪다가 944년 1월 23일 총독부령 제 350호에 의해 서대문구와 용산의 일부를 분할하여 지금의 마포구가 신설되었으며, 설치당시의 관할구역을 보면 아현정, 공덕정, 신공덕정, 도화정, 마포정, 토정정, 용강정, 염리정, 대흥정, 신수정, 구수정, 현석정, 신정정, 하중정, 창전정, 동교정, 서교정, 상수일정, 하수일정, 당인정, 합정정, 망원정, 율도정등 23개 정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어 일제가 물러나고 미군이 입성하여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1945년 10월 16일에 각구의 행정을 담당하는 "구역소"를 "구청"으로 "구장"을 "구청장"으로 개칭하였으며, 이때부터 마포구역소는 마포구청으로, 행정구역 명칭인 "정"은 "동"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1955년 4월 18일에는 시조례 제66호에 의하여 종전의 동회를 동으로 하였으며, 각 구청에는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때 마포구는 아현1,2,3,4동, 신공덕1,2동, 도화1,2동, 관란동, 대흥동, 염리동, 신석동, 세교동 등의 19개 행정동을 두었다.
그후 여러차례의 동명 및 관할 구역 변경을 거처 1985년 9월 1일 시조례 제 2016호로 용강동 일부를 염리동에 편입하고, 1989년 6월 1일을 기해 서울특별시마포구동명칭및 구역획정조례 제84호로 하수동 전역을 상수동으로, 망원동 28번지를 서교동으로, 망원동중 망원1,2동 관할구역을 제외한 전지역을 합정동으로 동명칭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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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특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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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는 서울의 중서부 한강하류 연안에 위치한 구(區)로서 북쪽으로는 경기도 고양시와 서대문구에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용산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서쪽은 한강을 끼고 있다.
지세는 동고서저로 동쪽은 아현동, 공덕동, 신공덕동, 도화동, 마포동의 구릉지대를 이루고 서쪽은 서교, 동교, 합정, 망원, 연남동이 평지를 이루면서 조용한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으로 강서지역과 공항, 영등포를 연결하는 수도서울의 관문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통과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주요 간선도로는 관문가로(關門街路) 역할을 하는 마포, 양화, 성산, 신촌로가 있으며, 특히 마포로 주변은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되어 교통이 한층 편리해졌고, 도심재개발 사업과 불량주택 재개발사업으로 빌딩숲과 고층아파트가 어우러져 나날이 새로워지는 마포의 발전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며, 지하철 2호선이 경유하는 양화로 주변은 편리한 교통망과 정비된 주택가로 변했고 서편의 성산로 주변 성산동 지역은 시영아파트 단지를 이루고 있다.
한편 서부한강변은 난지도 매립지 등으로 그동안 발전에 장애가 되어 왔으나 난지도 안정화 사업과 상암지구택지개발, 2002년 서울월드컵경기장 건립 등으로 이 일대에 대단위 아파트단지와 편익시설, 녹지공간이 조성되고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어 서울속의 살기좋은 마포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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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 및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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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이북에 위치한 마포구의 산계(山系)는 한북산맥(漢北山脈 → 일제시대부터 광주산맥이라 함)의 서쪽 변두리에 솟구친 북한산에서 갈라진 안산(목악)이 다시 다섯갈래로 갈라져, 한강연안에 연장된 얕은 구릉산지가 발달한 지역이다. 북한산지의 말단에 위치한 마포구의 산지 지형은 100m이하의 노년기에 속하는 낮은 저산성 구릉지이다. 마포구 전역은 장기간의 침식으로 깎이고 벗겨져서 구릉화된 낮은 언덕과 한강 및 지류(마포강, 봉원천, 사천, 진관천)의 퇴적으로 이루어직 충적 평야가 발달한 지역이다.
마포구의 동서남북에서 가장 끝이 되는 지점인 4단(4端)을 경도와 위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1-1-1> 마포구의 위치 |
소 재 지 |
단 |
경도와 위도의 극점 |
총 면 적 |
지 명 |
극 점 |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275-3 |
동단 |
공덕동 7-183 |
북위 37도 33' 10" 동경 127도 57' 47'' |
23.87㎢ (서울시 전체 605.52㎢의 3.94%) |
서단 |
암동 506-1 |
북위 37도 34' 21'' 동경 126도 51' 44' |
남단 |
마포동 427-1 |
북위 37도 31' 51" 동경 126동 56' 49" |
북단 |
상암동 1013 |
북위 37도 35' 17" 동경 126도 53' 3"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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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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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는 지리학상 포구문화가 일찍부터 번성하였으며, 성밖 농촌취락으로 발전되었는가 하면, 강변풍경이 아름다워 전국의 시인묵객들이 즐겨찾는 정감 넘치는 고장이었다.
마포나루(지금의 토정동, 마포동 일대), 서강나루(지금의 신정동, 하중동, 상수동일대), 양화나루(지금의 절두산 서쪽부근)가 있었는데, 이곳이 워낙 절경이었기에 옛 사람들은 일찍이 마포8경(麻浦八景)이라 일컬어왔고, 풍류시객과 중국사신들이 경치를 조망하며 시문을 읊던 정자(亭子)가 서강지역만도 30여개가 넘었으며, 전하는 시문(詩文)만도 50여수가 된다고 한다.
<표 1-1-2> 마포구 문화재 현황 |
종별 |
명 칭 |
소유자 |
소재지 |
지정일 |
국가지정 문화재 |
사적 제399호 |
양화나루 잠두봉유적 |
천주교서울대교구 |
합정동 97-1 |
199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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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지정 문화재 |
서울시 기념물 제9호 |
망원정지 |
마포구청장 |
합정동 457-1 |
19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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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민속자료 제17호 |
정구중가 |
개인 |
용강동 335 |
1977.3.7 | 또한, 구한말 개항장으로서 관문역할을 하여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었고, 1866년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프랑스함대가 서강의 하중동 앞까지 올라와 병인양요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는 등 풍운의 역사를 겪기도 하였다. 그후 서울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물화집산의 포구로서 마포의 기능이 점차 줄어들었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강화만이 막혀 한강으로 배들의 출입이 금해지자 마포의 포구문화는 사라지게 되었다.
옛 마포사람들은 마포나루터의 안녕과 번영은 물론, 마포항을 드나드는 선박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나루굿을 매년 5월 단오절 이전에 실시해왔다.
서구문명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곳으로 절두산 순교성지, 외국인 묘지등 다양한 근대사의 문화유적이 있으며, 서울시 기념물 제 9호인 망원정, 토정동의 토정 이지함 집터 표석, 양화진 나루터 표석, 삼개포구 표석, 마포종점 노래비 등이 역사를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사통팔달 교통과 도시속의 업무중심지구로 발전하면서 신세대의 패기와 활력이 넘치는 홍대앞 거리, 신촌거리와 함께 아현동 웨딩거리는 젊은 감각과 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으며 사라진 마포나루굿을 재현하는 등 전통문화가 펼쳐지는 마포나루 축제, 한여름밤의 강변축제, 홍대앞 거리미술전,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등 다양하고 독특한 지역문화축제와 구민체육대회를 개최하여 전통과 건강한 젊음이 함께 하는 지역문화를 꽃피우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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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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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마포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가 있어 전국의 배들이 드나들었고, 한강이남 영등포지역을 잇는 주요 교통로가 있었다. 이를 중심으로 전국의 화물이 집산하게 되고 저자(시장)거리가 형성되는 등 선박과 공미를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서울의 관문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며, 동쪽의 마포로를 중심으로 현대화된 빌딩이 숲을 이루어 업무중심지구로 급속히 성장하게 되고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지하철 2호선, 5호선, 6호선과 내부순환도로, 자유로, 강변북로와 한강을 가로지르는 마포, 서강, 양화, 성산, 가양대교가 있다.
특히, 발달된 교통을 중심으로 마포로 양화로에 들어선 초고층 빌딩의 도심업무시설은 가까운 영종도 신공항의 지리적 여건과 맞물려 비즈니스 하기에 가장 각광받는 최적의 경제활동의 기반이 되고 있으며, 도화동, 공덕동, 용강동, 합정동 등에 위치한 깨끗하고 친절한 숙박시설과 전통의 마포숯불갈비, 주물럭 등 먹자거리와 잘 어우러진 휴식공간으로 서비스 산업의 중심지이다.
앞으로 상암동 일대 200만평에 생태환경과 디지털 미디어 산업이 어우러진 미래형 복합도시인 『새 천년 신도시』가 조성되면 이곳은 영종도 신공항선, 경의선 등의 광역 교통망이 지나는 요충지로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도시」, 첨단디지털·미디어 기업이 집적된 「정보도시」, 세계로 통하고 남북한을 잇는 「관문도시」로 조성되어 꿈과 희망이 넘치는 미래형 도시로 화려하게 태어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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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이전의 마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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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의 마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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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국시대에는 한강유역을 먼저 차지하는 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예로는 선진문화를 갖고 있던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 일파가 남하하여 기존의 토착사회를 정복 동화시켜 국가체제를 이룬 백제를 들 수 있는데 백제는 기존 마한인(馬韓人)의 활동 무대를 잠식하고 점차 인근 정치세력까지 세력 확장을 하여 정복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해 나가서 이미 온조왕 때에 북으로 낙랑.대방군의 압력과 동북방면 세력의 남침을 막을 수 있는 대치상태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룬 4세기 때 북방진출에서 남방으로 그 세력의 판도를 바구어 한강유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는데 광계토왕때 4만명의 군사로 백제 북변을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 관미성(關彌城)등 10여성을 함락한 이래 4년 후에 다시 백제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과 700여개의 촌락을 공취하고 한성까지 진격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인의 한강진출시도는 475년에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신라는 이들 두나라보다 훨씬 늦어서 551년에 진흥왕이 한강의 중상류 지역에 10군을 설치하였다.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은 곧 삼국을 제패하는 기반이 되었는데 557년에는 한강유역의 관리를 위한 행정구역을 별도로 설치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라는 병칭으로 하면서 여러번 치폐를 반복하였다. 신주라 함은 새로 설치했고 국방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었다. 경덕왕때인 757년에는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하는 대신 서울지방은 별도로 한양군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부터 마포지역은 나루터로서의 기능이 시작되었다. 서울의 비중이 높아갈수록 이와 연결될 수 있는 교통로도 발달되었고 따라서 한강을 건너야하는 문제는 곳곳에 나루터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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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의 마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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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기에는 한강유역이 지방호족들의 군웅할거지로 되었는데 그중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성을 복속시켜서 관직을 정함에 따라 이 무렵부터는 궁예의 지배지로 되었다. 한강유역을 장악한 궁예는 곧이어 황해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성을 더 함락시킨 후 개성으로 옮겨 충주.청주. 지역까지 진격하였다. 9-4년 국호를 마진(摩震 :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는 한편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남쪽으로 상주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철원에 도읍을 정한 태봉은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지금의 광장교. 한강대교,마포대교가 놓여있는 곳에서 분산하여 배를 탔을 것으로 추측된다. 강폭이 비교적 좁거나 아니면 넓어도 물살이 약한 곳을 이용하여 나룻배를 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봉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개성의 호족출신인 왕건(王建)이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918년 고려를 건국하여 왕이 되면서 곧이어 신라와 후백제에 대한 회유,공격의 방법으로 936년에는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 무렵에도 역시 많은 지방세력들이 한강변을 비롯하여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왕건은 세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을 포섭 회유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호족의 딸과 자신이 결혼을 하는 이른바 결혼정책을 시행하였고 그러지 못할 경우 중앙의 고위직으로 맞아들였다. 한강 유역에 있던 대표적 호족- 로는 왕규(王規) 와 금주강씨(衿州姜氏 혹은 衿川姜氏)로 명한 강감찬(姜邯贊)의 5대조 강여청을 들 수 있다. 왕규는 광주의 중심세력이었고 강여청은 금주(시흥)의 토착세력이었으므로 왕건이 한강유역의 제압을 위해서는 이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왕규의 두 딸과 겹결혼을 하였으나 오히려 정권에 비상한 관심을 둔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 게승시키려는 음모를 꾸며 난을 일으켰다. 왕권에 대해 정면 도전한 이같은 왕규의 난은 한강 유역 호족의 첫번째 난이었다.
금주강씨의 경우 강궁진(姜弓珍) 때 태조에게 협력하여 세력을 내림으로써 한강 남쪽 시흥 일대의 세력으로 등장하는데 아들인 강감찬은 아버지의 세력기반을 입어 중앙관계에 진출한 후 거란이 침입했을 때 귀주대첩(龜州大捷)을 세워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한강하류지역으로서 지금의 마포 서쪽 지역에 해당되는 곳의 호족으로는 풍덕유씨(豊德柳氏)가 있다. 태조의 제1왕비와 제6왕비가 각각 풍덕지방의 호족출신의 딸이므로 마포지역이 일찍부터 역사무대에 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초는 아직 왕권이 확립이 되지 못했던 관계로 개경지방이 정치중심이 되었다.
한편 신라말에 유입된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에 따라 1068년에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한 이래 1096년에는 김위선(金謂蟬)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들어 남경천도를 건의하였고 3년 후에는 왕이 친히 남경의 지세를 살피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까지 두었으며 1104년에는 남경에 왕이 거주한 궁궐을 완성하였다. 1308년에는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외에도 판관.사록과 같은 관직을 두었다.
1325년 8월 충숙왕은 왕비인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와 함께 한양에 행차하여 용산의 높은 언덕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장막을 치고 행궁(行宮)으로 삼아 머물렀으나 20여일 후 공주가 아들을 낳은지 9일만에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다. 습기찬 강가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했기 때문에 산후조리를 못한 왕비는 죽음을 맞았지만 왕의 순주시에 사용했던 행궁이란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용산 행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이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유력하게 꼽는 곳이 지금의 한강대교 북단 근방이라는 설과 난지도 근방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강대교 북단은 조선시대에도 군사요충지로 꼽았던 곳이고 난지도 근방은 조선시대에 성산(城山)을 쌓았던 곳이며 맞은편 양천(陽川)에서 봉화를 받아볼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말에는 왜구(倭寇)가 교동.강화지역에까지 출몰함으로써 한강하류지방도 그 피해권에 들게 되어 해상교통이 마비되는등 지방민에게 큰 불편과 위협을 주었다. 한강은 고려시대에도 남쪽지방의 조세를 운반하던 조운(遭運)으로 사용되었는데 왜구의 창궐로 인하여 조운이 막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운의 페쇄는 곧 개경에까지 영향력이 파급되었으며 조정에서는 한양천도론까지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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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마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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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지지(地誌)에 기록된 마포
고려말부터 대두되던 한양천도론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2년이 지나면서 실천되었다. 지덕(地德)이 끝난 개경에서부터 새로운 지기(地氣)로 확장되고 있는 한양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주장은 신왕조의 개창에 앞장섰던 사람들이고 이들의 주장에 따라 곧바로 실현에 옮기게 된 것이다. 이성계의 왕위등극과 함께 개성의 왕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구 귀족세력의 반발에 대처할 필요성 또한 천도의지를 가속화 시켰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려 했던 첫번째 이유는 한강을 끼고 있는 인문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1 경도 상에 보면
경도는……남쪽으로 한강이 옷깃과 띠처럼 둘러있고 왼쪽으로는 널리 높은 관령이 연접해 있으며 오른쪽으로 넓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라고 하며 마포 서쪽의 한강하류지역까지를 그 지세에 포함을 시키게 되었다. 용산강 하류인 마포는 백사장을 지나 바로 시흥으로 가는 길이 되므로 고려 초기부터 호족들이 근거지로 삼아 개경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여겼다.
한편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생리조 에서도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조운의 편리함 때문이라 할 정도로 조운의 발전은 약속된 것이었다. 전국의 세곡이 조운을 통해 한양으로 모였을 뿐만 아니라 도성 안의 일반 생활품도 대부분 선박으로 한강을 통해 공급됨에 따라 한강 곳곳에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조고되어온 곡물은 대개 한강의 5강을 통하였다. 한강 5강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권3, 한성부 산천조), 동국여지비고(권2 한강조), 강현지략(권2 산천편한강조) 등에 나타나 있는데 대략 용산강.마포강.노량진.뚝섬.양화도를 일컫는다. 이중 지금의 마포지역과 관련되는 곳은 용산강.마포강.양화도이다.
용산강은 경상.강원.충청.경기도 상류로부터 북한강을 따라 조운되어온 종착지점인데 당초에는 10리의 긴 호수로 되어 연화가 만발한 관광지였으나 조선초 건너편 염창 부근의 모래언덕이 무너지면서 용산강이 호수가 없어지는 대신 조수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의 세곡수송선이 모두 용산강으로 밀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는데 오랜시간이 지나면서 상류로부터 운반된 퇴적물이 하상을 점차 높혀 수위가 낮아지고 염창 모래언덕에는 해마다 진흙이 쌓여 조수가 들어오지 않자 조선 중기에는 각도의 조운 선박이 마포와 서강 방면으로 정박하게 되었다.
마포강은 용산강 하루로 3남 지방의 곡식운수는 물론 어물류의 집산지이기도 했는데 각지에 연결되므로 서울의 무여항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웃한 동막과 함께 번성하였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도성 서쪽 15리 지점의 서강까지를 서호라 하였으며 황해.전라.충청.경기도 하류의 조운이 모두 모였다. 양화도는 도성 서쪽 15리 지점으로 바다를 거쳐 들어오는 물자를 서울로 반입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인천 강화로 통하는 간로(間路)가 되며 그 북쪽이 마포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한강은 조운뿐만 아니라 남북여결의 진도(津渡)로서의 위치도 중요하다. 강폭이 넓으면 진, 좁으면 도로 불렀다. 진도에는 소형배가 소속되어 사공 혼자서 노를 저었는데 마포지역과 연결되는 나루터는 용산지.마포진.서강진.율도진.양화도.곰암진.행주진으로 한강 본류 18개 나루터 가운데 7개였다. 용산진고 마포진.양화도는 5강에 속하였으며 서강진은 서해안 지방의 조운 종착점인데 [동국여지비고]에는 마포에서 이곳까지를 서호라 하고 하삼도에서 들여온 세곡을 이곳의 광흥강창.풍저강창에서 저장하였다.
율도진은 지금의 밤섬으로 당시에는 모래사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여의도와 인접해 있으며 백사장 건너 인천으로 가는 간로가 되었다.
공암진은 공총진(孔叢津)으로도 부르는데 한강의 최하류 부분에 속하며 남쪽은 도성출입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지만 양천현의 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암진의 북단은 지금의 당산철교 부근이 되는데 강화.양천부근에서 오는 사람이 대개 이용하므로 도성출입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보면 년간 12번에 걸쳐 지내는 기우제 가운데 첫 번째, 여섯번째는 한강에서, 일곱번째는 용산에서 하여 이 지역이 조운이나 교통로 이외에 신성지역으로서의 기능도 담당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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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전략지로서의 마포
선조 25년 4월 14일 왜장 고니시의 군대가 부산포에 상륙하여 곧 부산포와 동래성을 함락하고 약 20만명의 왜군이 북상했는데 동 28일에는 충주에 도착하여 1진은 여주를 경유, 남한강을 건너 한성으로, 2진은 죽산 경유 한강을 건너 한성으로 침입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여주의 남한강은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한강의 제천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신각(申恪)이 군사를 이끌고 방어에 임하였으나 양쪽다 왜적의 저지에 실패하여 한강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진 도성은 이미 왕이 의주로 몽진한 이후여서 텅비어 있었기 때문에 들이닥친 왜적의 약탈과 만행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1593년 1월부터 명나라의 원군이 본격적으로 동원됨에 따라 조명연합군의 작전활동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와 함께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승병활동으로 왜적은 군량부족과 사기저하로 지쳐있었는데 2월에는 행주산성에서 권율(權慄)의 군사 3,000명과 그 열배에 해당되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하였다.
행주대첩으로 조선군의 사기가 충천했고 이를 계기로 각지의 관.의병 반격작전이 시작되었다. 권율은 적의 재침공을 예상하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충청수사 정걸(丁傑)등으로 하여금 수군으로서 한강입구에서 용산서쪽 한강중심부까지 진출시켜 적의 병세(兵勢)를 남북으로 분리토록 하는 한편 이 구간의 진도에 있는 선박을 모두 모아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권율의 이같은 작전으로 보급로의 차단과 기한에 시달리게 된 왜군은 한성 탈출이라는 긴박한 사정에 놓이게 되자 더 이상 전쟁을 끌면서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명나라에 대해 강화요청을 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측은 명.왜의 이같은 밀담에는 상관없이 용산창의 곡식과 광흥창.풍저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마저 불태워 만일의 경우 이 지역을 왜적이 점령했을 때에 대비하는 등 갖가지 작전을 구상, 실천하였다. 조선측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월 15일 강화에 있던 명나라의 심유경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소서행장을 만남으로써 회의는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철저하게 조선측이 배제된 가운데 용산강 위에서 필담을 통한 강상회담을 하던 강화회담은 4월 18일 이여송(李如松)이 지켜보는 가운데 왜적이 철수를 하고 남은 군량미 2만석을 명나라 심사련에게 넘기며 조선의 순화군.임해군과 황정목.황혁.이영의 세 사람을 데리고 한강을 건너면서 가설한 부교를 철수함으로써 한강변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서울지역에서의 임진왜란도 매듭지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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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장으로서의 마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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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제도의 개편
1866년 전국적인 천주교에 대한 대금 압령을 내리고 교도에 대한 박해와 학살을 감행한 것이 병인사옥이다. 이 박해에서 조선으로 몰래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해 오던 프랑스선교사 12명중 9명이 살해되었으나 그중 리델신부와 시노 11명이 함께 탈출하여 중국 천진에 체류하고 있던 프랑스 아시아함대사령과 로즈제독에게 그 내용을 보고하였다. 로즈는 곧 이 사실을 주청프랑스공사 베로네에게 보고하고 청국에 엄중한 항의를 한 후 선교사 박해 문책을 이유로 조선원정을 단행하였다. 이에 동년 8월 10일 청나라를 출발 12일 물치도(勿淄島) 앞 바다에 정박하여 1856년 제작된 해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한강 어구의 수로탐색을 위한 탐측항해에 착수하였다. 18일에는 양화도를 거쳐 서강인 마포 하중동까지 들어와 닻을 내리고 수심탐사를 하면서 근방의 산천등 생활필수품의 보급로가 거의 끊어지게 되어 인심은 더욱 흉흉해졌는데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프랑스군의 서울침입 소문까지 나돌았다. 다음날까지 머물던 프랑스함대는 상세한 지도제작을 한 후 22일 중국산동성으로 귀항하였다.
프랑스함대의 마포정박사건은 대원군 정권에 대한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이일은 병인양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강화광성진의 이기조(李基租). 정족산성의 양헌수(梁憲洙). 문수산성의 한성근(韓聖根)이 특별히 한강 어구 방어를 위해 편성되어 9월 7일부터 10월 4일까지 약 한달간 전투가 지속되었다. 한강어구싸움에서 조선측 승리는 프랑스군의 포함외교를 실패로 이끌었었다. 곧 로즈제독이 한강 수로를 면밀하게 검사한 결과 함대운항이 불가능하고 해안경비가 견고하다는 것을 파악하여 조세미와 양곡의 보급로인 강화를 점령하면 조선이 굴복하리라는 예상을 하였지만 조선정부의 강력한 대응으로 결과는 조선측의 승리로 끝났고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나 1875년의 운양호사건은 더 이상 조선이 쇄국정책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듬해 강화조약이 맺어지면서 개항을 하게 만들었다. 1877년 8월 인천에 도착한 주한 일본대리공사 하나부사일행이 10월 21일 서울에 들어올 때 마포지역의 사람들은 투석을 하며 저지한 일도 있었다.
더욱이 인천이 개항장으로 확정되면서 서울의 관문이 되는 마포지역의 변화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1895년 전국의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될 때 이 지역에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다. 1884년에 일본은 용산개시(龍山開市 )를 요구하였고 이듬해 2월부터는 일본 민간인의 입경과 정주도 허용되면서 오늘날 마포동부지역과 용산일대에 일본인의 거주중심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88년에는 마포~인천간을 취항하는 기선 13t급 삼호호(三湖號)와 16t급 용산호(龍山蝴)로 하여금 육로를 통하지 않고 인천에서 서울로 직접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서울에 들어온 일본 상인들은 인천까지 운반해온 쌀, 쇠가죽, 해초 등을 마포나루를 통해 서울로 반입시켰기 때문에 마포일대는 매우 번성하였으나 비정상적인 이들의 거래방법으로 인해 마포객주들은 거래 때마다 긴장하였다.
이듬해에는 인천의 독일계상사 세창양행(世昌洋行)이 35t급 재강호(濟江號)를, 1890년에는 미국인 타운젠트가 운영하는 순명호(順明號)가 차레대로 치항하여 명실공히 마포항은 무역항으로 등장 활약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청국측은 한강수로에 중기선의 왕래가 잦아지자 1892년 마포나루에 경사국(警査局)을 설치하여 이 지역 단속을 엄중히 하면서 마포지역은 청.일 양국의 세력 교전장으로 변하여 갔다.
이러한 국내외의 정세변화에 따라 1894년에는 한성부를 비롯한 전국의 행정구역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는데 마포지역은 서부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으로 성외(城外)지역에 포함되었다, 곧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편입된 이 때의 면적은 용산방의 공덕리계.옹리.동문외계.진휼창계.신창내계.탄항계.형제정계.구수철리계.창전리계.하중리계.신정리계.상수일리계.하수일리계.당인리계.율도계로 대략 지금의 마포구 일원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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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부설과 마포의 성쇄
조운이 모든 물자의 수송을 전담하던 시기의 마포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무역항으로 발전하여 도성 안 종루가에 버금가는 상업지역으로서의 번영을 누려왔다. 그러나 1897년 경인철도 기공식에 이어 2년 후인 1899년에 시작된 경부철도 부설공사가 1905년 서울~초량간 전 구간이 완공.개통됨에 따라 마포지역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되었다.
곧 육상교통을 철도편에 의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수운에 의한 물자 수송을 할 필요가 없었고 이 결과 마포가 담당해야할 기능도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경인철도부설이전에는 서대문~아현동~한강, 남대문~만리재~한강, 청파동~마포~용산으로 가는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으므로 반드시 마포를 경유했다. 이 때문에 서대문 밖이 번성하였고 마포 일대는 이들을 상대로 하는 상업이 발달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철도 부설공사의 시작으로 판도가 바뀌게 되었다. 경인.경부선에 이어 1896년 프랑스 그레테회사에게 경의철도 부설권을 허가하였으나 3년이 지난 후까지 측량조차 않고 있었으므로 이용익(李容翊)이 프랑스회사에 대해 부설권 소멸을 통지한 즉시 왕실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고 2년간의 측량끝에 1902년에는 서울 ~개성간 철도부설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공사는 당인리에서 기공식을 시작하여 선로공사까지 끝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한국 내의 모든 정치.군사.경제권은 일본 소유로 되고 말았다.
경인 경부철도의 부설공사로 인해 발전하기 시작했던 마포지역은 젓갈종류 집산 판매장소로 전락하기 시작했으며, 경의선의 깃점이 될 수 있었으나 러일전쟁으로 중단되면서 마포지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마포구의 지역적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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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의 지리적 위치는 구민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 크나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위치의 특수한 점을 세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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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관문이요 외항인 요충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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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중앙부를 흐르는 한강은 민족의 젖줄이요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 강이다. 한강 연안에는 국내에서 가장 넓은 34,473㎢ 유역평야가 전개되어 농산물의 보고가 되고 있다. 따라서 신석기 시대부터 문화 발달의 터전이 되어 왔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초중기의 5백년 수도가 위치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합하면 무려 천백여년이라는 긴세월 동안 일국의 수도가 위치한 고장이다.
민족의 생명선인 한강의 큰 물결을 안은 마포구는, 한강 하구에서 55km 내륙에 위치하며, 국방상 요충지가 되는 9.65km의 긴 한강 연안선을 차지한 구이다.
더욱 서울의 도심에서 중서부 10~15리 거리에 위치한 마포구는, 수륙 교통의 요충지가 되는 하항을 차지하기 때문에, 서울의 관문으로서 또한 방어상 요충지가 되어서 군사적으로 많은 침해를 겪어왔다.
지정학적으로 마포 연안은 삼국시대부터 쟁패의 혈전지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정묘호란 등 여러차례 양요때마다 수도 방어상 가장 중요한 방어지가 되었다. 특히 구한국말기의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때에는 프랑스와 미국 군함이 마포 서강연안에 침입하였으며, 임오군란(1882년)전후의 일본군 침략때 가장 중요한 나루가 되었다.
또한 구한국 말기에는 한때 증기선인 용산호와 삼호호가 인천과 마포 사이를 운행하였으나, 근대 철도 교통이 개설된 후부터 한강의 조운이 쇠퇴하게 되었다. 더욱 6.25이후 휴전선이 한강 하구를 막게 된 이후부터는 배 교통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 김포~인천, 중남부 방면의 김포공항에 직통하는 간선도로인 마포로, 양화로, 성산로의 개통으로 육상 교통상 요로가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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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가 드나드는 하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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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의 하구에서 55km 내륙에 위치한 삼개 연안의 평균 수위는 약 2m였다.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의 만조 때에는 밀물이 서빙고 연안까지 올라 오게 되어, 적재량 100~200섬의 목선이 항해할수 있게 되었다. 지형상으로 가장 수심이 깊은 서강과 마포 연안은 좋은 하항이 되어 5백여년간 삼남지방에서 배로 실어 들이는 곡물과 해산물을 부리고 도산매 하던 중심 요항이 되어서 번성하였다.
또 지형적으로 안산(296m)에서 갈라진 용산구릉산맥과, 노고산구릉산지, 와우산구릉산맥이 한강에 향하여 뻗었는데, 세산맥 사이에 호수같이 내륙에 발달한 세연안의 물굽이인 만을 용호, 마호, 서호라 불렀고, 또 서해의 조수가 아침 저녁으로 밀려 올라오는 갯가이기에, 위의 3호를 3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해의 만조가 조식으로 밀려 올라오면 마포 연안에는 한강이 거슬러 역류현상이 생기게 되고, 한때 강물과 조수가 얽혀서 정지현상이 생기게 된다. 이때에는 마포 전체 연안은 하나의 큰 호수가 되기에, 크게는 삼개라고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 원로들은 오늘날도 용산삼개니, 마포삼개니, 서강삼개라 하면서 구별하여 각각 불러오고 있다. 삼개의 연안선 총길이는 3.6km이며 연속된 개는 지형적으로 각각 홀모양 같이 휘어진 아늑한 서호, 마호, 용호 세 포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국초부터 3개라고 불렀으나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기 위하여 삼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삼마자를 따서 3개를 마포라고 쓰게 되어서, 마포라는 한자식 지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현재의 마포동에 인접한 대흥동은 최근까지 동막이라고 불렀으나 조선조 중기의 원 지명은 옹막이었다. 이 일대에는 오거독과 그릇을 생산하는 가마와 막이 많은 마을이었기에 오지그릇 = 한자 옹(甕)자를 따서 옹막이라고 불러 오다가 근세에 와서 동막으로 바뀌었다.
더욱 용산구릉산맥의 서쪽 좁은 경사에 위치한 마포동은 삼생산지로 유명한 고장이될 근거도 없고, 또 생산지가 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은 전연 없다.
또한 전국 지명에서 강 연안에 위치한 포구에서 삼생산지로 유명하기에 삼마자로 표기한 지명은 한곳도 없다. 3개중의 하나인 용산연안은 한강의 퇴적으로 점차 강깊이가 얕아져,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이 정박하기에 불편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심이 깊고 넓은 강항인 마포와 서강이 조운의 중심 항구가 되어 근세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성하였다. 그중에서도 서강 강항에는 삼남지방에서 배로 실어 내리는 곡물을 점검하는 점검청과, 세금을 부과하는 사세청, 그리고 관리들의 봉급으로 제공하는 곡식을 저장하는 국가에서 가장 큰 광흥창이 있었다.
마포는 하구가 휴전선으로 막힌 이후부터는 옛날의 번영을 잃었으나, 경인운하가 개통되면 한강 상류에서 서해안까지 대형선박이 운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경인운하의 종점 예정지에 가까운 상암동 연안은 중.일.북한.동남 아시아에서 실어오는 무역품을 받는 하항으로 발전 할 수 있는 유망한 지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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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마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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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웅대한 산세가 안산으로 뻗치고, 다시 안산은 용산구릉산맥, 노고산구릉산지, 와우산구릉산맥의 세갈래로 한강연안까지 뻗었는데, 한강의 침식을 받아 농바우, 잠두봉, 선유봉 등의 기암절벽이 발달하였다. 동쪽에는 남산이 보이고, 북에는 병풍같이 부드러운 와우산과, 노고산이 지켜선 그 사이로 멀리 안산, 인왕산, 백련산과 하늘높이 솟구친 삼성산, 관악산, 기장산의 원경도 절경이다. 눈아래에는 유유히 넘쳐 흐르는 한강과 강건너의 밤섬과 여의도는 더욱 강산 풍광의 아름다움을 돕는다. 더욱 호수 같이 잔잔한 한강의 물굽이는 강산 풍광의 극치를 이룬다.
이와 같이 수려한 삼개에는 수많은 철새들과 백로가 너울거리며 날으는데, 저녁이면 양화진 강 하늘에 낙조가 걸려 벌겋게 물들 때에 수백척의 ?단배가 모여 드는 광경은 과연 한폭의 그림이었다. 따라서 예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과 시민들이 찾아와 뱃놀이를 즐기든 풍류의 고장이 되었기에 국초부터 서호8경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서호8경은 최근에 와서 옛풍경이 대부분 변하게 되었으니, 옛 강산 풍광을 회고하면서 서호8경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 용산강에 비 개인 날 저녁에 뜬 달 구경
- 삼개 나루로 돌아오는 수많은 돛단배의 경치
- 방학교 부근의 샛강에서 밤 낚시하는 등불 원경
- 밤섬 주변에 쌓인 깨끗한 백사장의 원경
- 농바위 부근의 많은 인가에서 저녁 짓는 연기 오르는 경관
- 와우산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
- 양화진 강 하늘에 붉게 물든 낙조와 노을의 장엄한 경치
- 관악산에 맑게 개인 날 어른거리며 오르는 아지랑이의 신비로운 원경
참고로 서호8경의 서호는 「현재의 마포에서 서강에 이르기까지의 연안을 통칭하여 부른다」라고 옛 지리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전한다. 대체로 서강과 혼용해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서호라고 특별히 명명하게 된 까닭은 고려말의 기록에도 전한다. 예전에는 밤섬과 서강나루 일대는 강폭이 넓고 강류가 완만하였으며, 조석으로 밀썰물이 드나들 때에는 한때 강물이 정지되어, 마치 큰 호수로 변했다. 따라서 뱃놀이를 즐기는 호수와 같다하여 풍류를 겸하여 서호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강산 풍경이 수려한 고장이기 때문에 예부터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서강의 풍광을 따라 와서 저택이나 별장과 누정을 짓고 자연을 즐겼다. 마포 전역에 34개의 정자가 있었는데 그 중심인 서강부근에 30여 정자가 집중하였던 것으로 보아서도 더 잘 알수 있다. 이와 같이 강산 풍관이 좋고 수많은 누정이 밀집한 고장은 국내외에서 따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니, 삼개의 강변 풍광은 과연 세계적인 자연과 인문의 조화를 어울린 승경의 고장이다.
을축년 큰 홍수에 유실된 유서 깊은 망원정이 1989년 10월에 복원되어, 옛 모습을 되찾게 되어 눈 아래에 성산대교를 바라보며 먼 김포 평야와 한강이 서천 멀리에 흘러 가는 강산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삼개의 명물인 황포돛단배도 제작하여 진수식을 올리고, 마포나루굿도 발굴하여 다시 계승하게 되었으니, 삼개의 풍최를 더욱 엿볼수 있다.
이상 세가지 면으로 요약해서 마포구의 한강하류 연안으로서의 특색을 살펴보았다. 마포구는 서울시의 25개구 중에서도 다른 구에는 찾아 볼수 없는 강변 풍광을 지니고 있으니, 이 모두가 위치와 지형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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