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둘레길 1코스
2019년 12월 28일(토)
북한산 둘레길 1코스 완주(용마산 대장님, 사나 총무님)
불광역-구름정원길-마실길-내시묘역길-효자길-충의길-송추마을길-산너미길-안골길-보루길-다락원길-도봉산역(37km, 평속 6.1km)
1.
또 한 해가 기울어간다. 여기저기 송년 모임이 선전포고처럼 쇄도한다.
날씨는 그다지 춥지 않아 견딜 만한데, 사람들의 마음은 아주 추운 모양이다.
추울 때 따듯한 난로 곁이 그리워지듯, 사람들마다 따듯한 난로를 마음과 몸 속에 가지고
있으니, 서로 모여서 알 수 없는 외로움, 상실감을 나누고자 모이는 게 아닐까?
산에서도 마찬가지다. 평월에는 종주꾼들은 산을 좋아하지 길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어제 북한산 둘레길 공지에 종주꾼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뭔가 신나는 구경거리가 있는 것처럼. 게다가 수도권 산악회에도 이와 동일한 코스의 공지가 동일한 날, 거의 동일한 시간에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누가 카피 켓인지 그건 따질 필요가 없다. 어차피 종주꾼들간에는 진작에 산악회 국경이 없어진 지 오래다. 종주꾼들에게 충성심을 기대하지 말자. 다들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라. 건드리면 개성이 견성(犬性)이 될 수도 있으니.... 오늘 있을 종주 합동 공지보다 인원수가 더 많다. 버스 한 대 대절해야 할 것 같은 인원이다. 사람이 많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왠지 맘이 들뜬다. 자기소개를 간단히 해도 누가 누군지 여전히 모르지만 우르르 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이 나뉘고 평소에 모르던 사람과도 인사를 트게 된다.
구름정원길 가는 길부터 슬슬 아메바처럼 분열이 시작된다. 둘레길의 영역이 넓다 보니 각 영역에 사는 토박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은 그 지역에 자신들만 아는 지름길이 있는 법이다. 은평구 폭포동 구간에서 용회장 님이 이끄는 본대가 빙 돌아갈 때 토박이가 이끄는 소수 정예들은 지름길로 질러 간다. 김 새는 일이겠지만 토박이들에게 돌아가는 길 역시 참을 수 없는 종주의 지겨움이다. 나 역시 졸지에 평소에 그닥 ‘친하지 않은 분도 계시는’ 솔샘길, 산수동, 유일호, 김종래, 미미랑, 엘린, 피돌산 님과 부지 불식간에 한 편이 되었다. 연말에 누구나 산에서든 길에서든 우아한 걸음을 예상하며 공지에 왔는데, “오늘 평속 4km 이상 가셔야 목표 시간에 도착해서 가성비 좋은 무한 리필 돼지갈비를 드실 수 있다”라는 용회장 님 지시부터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게다가 170KM의 TMB(뚜르드 몽블랑)를 48시간에 주파한 산수동 님(난 그걸 이번 여름에 10박 11일간 걸었다.)이 뒤태가 꼭 여자 같은 복장으로 평소와 달리 중간에 나타나지 않고 시작부터 함께한다니 불길한 예감이 커졌다. 산수동님은, 모창을 잘하는 사람이 있듯, 여산우 님 뛰는 모습을 모창하듯 흉내를 잘 내신다. 한 바탕 웃고난 후, 서북쪽 둘레길은 길이 쉬운 편이니 여기서 뛰면서 시간을 벌어둬야 의정부, 도봉구 오름길에서 조금 천천히 갈 수 있다는 솔샘길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솔샘길 님부터 기린처럼 뛰기 시작한다. 다들 백 미터 달리기에 등수 안에 들어 부상으로 ‘상(賞’)자 찍힌 공책 받으려는 어린이들처럼 뛰기 시작한다. 그래도 50대인 유일호, 김종래 님이 잘 뛴다. 근데 이들 뒤에 두 토끼인 미미랑, 엘린 님이 뒤쳐졌다 바로 바로 뒤에 붙는다. 이러구러 4-5구간을 지나 12시가 되기 전에 송추 마을길에 들어서서 점심 예약해 놓은 자장면 집에 가려고 하는데, 거기까지 가면 다시 올라오기가 귀찮고 십여 키로 가면 무한 리필 돼지갈비 먹을 텐데 그냥 가자는 의견이 대세라. 간만에 송추 자장면 먹고 싶은 필자도 결국 자장면을 포기하고 아침을 안 드신 피돌산 님만 거기로 가신다.
송추 마을길부터는 쉽지 않은 길이다. 처음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시는 분이 산수동, 솔샘길 님,나 빼고 네 분이나 된다. 유명한 산꾼들이 북한산 둘레길을 처음 걷는다니 의외였다. 젊은 두 사냥개 같은 유일호, 김종래 님이 처음 걸으면서도 제일 선두에서 ‘페메’ 역할을 한다. 길을 모르니 갈림길에서 엉뚱한 길로 갈 뻔할 때가 많았지만 맘 좋은 선배들이 제 길을 알려주곤 해서 알바를 면했다. 산수동 님도 지름길을 이용해도 네 사람을 못 쫓아가더니, 야중에 괜히 알려 줬다고, 알바하도록 놔둘 걸 후회하더라. 속이 안 좋은 유일호 님과 첫 구간만 페메한다고 선언하고는 계속 페메하는 김종래 님이 계속 속도를 빼면, 두 토끼(엘린, 미미랑님)들이 그들을 좇아 엄청 토낀다. 토끼가 사냥개를 좇는 이상한 추격전이 계속되었다. 나는 내 앞에서 두 토끼를 좇아가기 너무 힘들어서 칼을 빼들 듯 스틱까지 빼들고 좇아 가는데, 따라가기 버겁다. 이럴 때 폭탄이라도 하나 있어야 좀 쉬면서 기다렸다 따라가는데 오늘은 전장터같은 산에 폭탄이 없네. 이들은 중간에 쉬는 걸 죄악시하는 사람들 같다. 난 토끼를 좇는 사냥개라 생각했는데 나를 앞서가는 토끼는 집토끼가 아니고 깊은 산속 옹달샘물 마시며 등력을 키워온 산토끼임을 알았다.(엘린님은 진짜 토끼띠라 한다.) 난 산토끼를 좇는 사냥개가 아니고 토껴 봤자 집으로 가기 마련인 집토끼나 집적거리는 동네 개임을 실감했다. 이러다 우리가 정말 최대감집에서 진짜 무한 리필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도 사냥개들과 산토끼들은 계속 뛴다. 야중에 실토하는데 사냥개들이 산토끼에 쫓겨 쥐가 나기도 했단다. (근데 나는 낮에는 쥐가 안 나거든...꼭 밤에 자면서 쥐가 나거든. 내 침대 밑에 쥐가 사는지 잘 때 쥐가 내 정강이를 단단한 알타리무처럼 만들어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게 하거든.)
특히 마지막 다락원 구간은 오늘 코스의 하이라이트 코스로 이건 이름만 둘레길이지 사패산 정도의 높이를 계속 치고 올라가는 길이다. 마지막 구간이라 하니, 두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삶아진다는 옛사람의 격언도 잊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해묵은 승부를 다툰다. 둘 다 승부욕이 강하다. 지난 여름에 한번 만났을 때, 유일호 님 승리, 김종래 님 기진맥진이었는데, 오늘 설욕전을 하는 듯. 김종래님의 소종래(所從來)는 모르지만, 마초맨임에 틀림없다. 새벽 네 시에 나오면서 사모님 밥상을 받고 나온다는 얼굴이 까만 동안의 상남자. 유일호님은 내가 들어서 안다. 유소년 시절 복싱 충남 대표를 했을 정도로 사각의 링 출신으로 승부욕이 대단하다. 도대표를 우습게 볼 수 없는 게 요즘 수도권에서 종주 대부 역할 하는 ‘청○○’님은 강원도 마라톤 도 대표 출신. 본인 말로는 한 달에 25일 술 먹고 두어 번 산행하는데 이른바 “술과 장미의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55산(250KM), 26산(200KM) 일등으로 완주하고 지금까지도 병원 안 다니고, 후유증 없는 몇 분 중 하나다. 젊을 때 한 걸로 아직까지 계속 울거먹다니, 우리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우쩌 것습니까? 사람들 다 생긴 대로 사는 거 아입니까? 이번엔 김종래님이 간발의 차이로 승리했다. 셈셈인 셈이다. 더욱 놀라운 건 두 사람을 바짝 좇아간 분이 엘토끼님이다. 35KM 이상 걸어서 허벅지에 젖산이 쌓여 피로감이 역력할 텐데, 오르막을 타고 올라가고 내리막을 막 달려내려 가고, 발에 무슨 쎄루 모다가 달렸나? 난 멋모르고, 순간 동네 개가 사냥개로 스스로를 착각한 채, 좇아가다가 심근 경색, 정신 혼미로 황천객이 될 뻔했다. 이정도님의 반 정도, 그 정도의 등력으로만 알았지, 저 정도일 줄이야. 뚝방파들이 입으로만 산행하는 게 아님을 실감했다. 멀리 도봉산 탐방소 입구가 보인다. 저 절이 날 살렸다.
“걸음아! 날 살려라. 꽁지 빠지게 토끼는 엘토끼님.” 신고산 타령의 야멸찬 주인공처럼 내뺀 엘린님 미워. 날 버리고 사냥개 좇아간 엘린님 미워.
간다온다 말도 없이
훌쩍 떠난 그사람
야멸친 그 사람이
죽도록 보고 싶구나
어랑어랑 어허야 어허야
더어야 내 사랑아
치마폭 잡은 손 핀잔없이
떼치고 궁초댕기 팔라당
황초령고개로 넘어간다
어랑어랑 어허야 어허야
더어야 내 사랑아( 신고산 타령 중에서)
2
도봉산 탐방소 앞, 하산하는 등산객들이 개미처럼 몰려 내려와 북적거린다.
이젠 뒤에 내려올 팀을 기다리며 ‘무한 리필’하며 오랜만에 돼지갈비에 소주 한 잔해야지.
엊그제 앵야 송년회 과음으로 어제 하루 종일 아픈 배 움켜 잡고 방을 빙빙 돌았는데
산만 갔다 내려오면 괴로움 다 잊어 먹고 또 한 잔 생각 간절하다. 김종래 님이 일등 하산했지만 트랭글 평속은 5.9로, 일등은 놀랍게도 6.1인 엘린 님이다. 오늘은 현실이지만 오늘 지나면 내일부터는 역사가 된다. 역사에서는 기록만 남는다. 기록상으로는 영원한 일등은 엘린 님이다. 너무 억울해하는 김종래 님께 그래서 오늘 뒤풀에 가서 일등은 김종래라고 분명히 밝혀줄 테니 그래야 야사에서라도 구전으로나마 일등은 김종래라고 기억할 거 아닌가, 뒤풀이에 가자고 꾀여 간신히 뒤풀이에 모셨다. 뒤풀이에 가는 길은 또 얼마나 힘들었던가? 용회장께 전화한 것이 무릇 기하이며, 길거리에서 물어본 것 또한 무릇 기하였던가? 도봉산 앞에는 웬 무한 리필이라 쓰인 돼지갈비 집이 그리 많더냐? 명륜진사 무한 리필 돼지갈비, 박대감집 무한 리필 돼지 갈비.
인터넷에 아무리 검색해도 최대감집은 없었다. 물어 물어 겨우 찾아 가 봤더니 최대감이 아닌 최진사댁이다. 근데 더 놀라운 건 그 후로 세 시간을 무한 리필하며 최후미조가 내려올 때까지 고기를 먹었다는 거다. 유 셰프가 세 시간을 고기를 구웠고, 우째 ‘식신’이라 소문이 잘못 난 엘린 님은 먹는 건지 보기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진짜 식신은 먹는 게 안 보여야 식신이지. 그렇다면 식신이 맞는 것 같아. 아니면 오늘 드실 대방어를 위해 값싼 전지살은 안 드신 걸까? 모르겠다. “God knows where!” 김종래님 댁은 수원에서 한 시간을 더 가야 하는 화성이라 한다. 정말 화성에서 온 남자가 김종래요. 그 만큼 먼 거리에서 사는 엘리님은 금성에서 온 여자다. 두 사람이 멀리서 와서 남녀 1등 먹었다. 김종래 님은 졸다가 더 가면 목욕하기 좋은 온양이라니 오늘 모욕(목욕의 경상도 발음으로)할 생각하고 많이 마시고 고기고 마이 묵고 가시라 캐도, 어둠이 내려 우뚝 대장님이 드디어 내려오시고 일등 건배하고 표표히 엘린 님과 먼 곳으로 기분 좋게 떠나갔다. 나는 유일호 님과 함께 끝까지 일등을 예우하는라 창동까지 배웅했다. 집에 오다 보니 오늘 많이 뛰어선지 고질적인 왼 무릎이 경고를 보낸다. 우당당탕 둘레길 뛰느라 연말에 우울한 기분이 조금이 사라졌다. 아듀! 어제여.
2019년 12월 29일 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