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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카페지기 서봉석(소선)의 블로그
"소선의 음악이야기" blog.naver.com/bongarr 에서 옮긴 것입니다.
재즈이론 최초의 전수자 이교숙, 이판근
본 카페지기(서봉석)은 60년대 후반 재즈이론 최초의 전수자 이교숙(李敎淑-당시 이화여대교수)님에게서 재즈빅밴드 편곡이론
과 순수관현악 기초이론, 그리고 1973년에 이판근님에게서 재즈 즉흥연주(Imprvisation)이론을 배웠다.
지금처럼 대학교에 실용음악과가 있거나 서점에 재즈관련 서적이 넉넉하던 시절이 아니고 그런 류의 교재는 서점에서 전혀 구할
길이 없던 시절이라 위 두분은 진취적인 대중음악연주인들에게는 길고도 긴 가뭄 속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이 고마운 분이셨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재즈 교육기관인 미국 보스턴의 버클리(Berklee)음대도 초기에는 작은 학원 규모로 시작된 것이 1945년이라
고 하고 그나마 초기에는 재즈가 아닌 클래식류의 음악을 강의했다니 이교숙님이 수학했던 시기인 1955년이면 재즈의 빅밴드편
곡이론이 음악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어 가는 초기였을 것이고
이판근님이 재즈의 즉흥연주 기법을 일본 책(일본의 미국 유학파 저자)으로 독학하던 시기는 그보다 약 10여년 후인 1970년대 초
반의 것이라고 추리해 보면 재즈도 여러형태로 변천되어 가면서 보스턴의 버클리음대에서 즉흥연주와 편곡에 관한 재즈이론이
틀이 잡혀 정립된 시기라고 보아진다.
그 당시에는 대중음악계에서 아무도 도전해 보려고 생각도 해보지 못한 분야에서 두 분의 강하고 절실한 집념과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의 재즈맨들과 편곡지망생들은 배움의 갈망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그동안(1980년대까지)에 우리 연주인들은 재즈 연주의 경우, 재즈음반을 직접 듣고 그대로 흉내 내려고 애썼고, 미군부대에 공연
을 가게 되면 클럽매니저를 통해서 재즈음반 및 재즈관련 서적을 구해보려고 애썼으며 또 다른 루트로는 당시 한일간의 교류가
중단된 일본을 통해 그러한 교재를 힘들게 구해서 스스로 독학을 하며 재즈를 배우려고 애썼다. 미8군 연예대행기관인 화양(한국
흥행주식회사) 같은 연예기업에서는 미8군 쇼 오디션을 담당하는 음악전문 미국인들에게 부탁해서 편곡된 악보 등을 들여 온 적
도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꾸준히 재즈만을 고집해 오던 전설적인 재즈맨이 바로 이정식(1932~1970 Tenor Sax.)님이다.
이분에게 영향을 받은 분이 제1세대 재즈맨인 이판근(Bass,재즈이론가) 강대관(Trumpet) 김수열(Tenor Sax.) 손수길(Piano)님 등
이다. 대스타 이봉조님도 이정식님에게는 동갑 친구지만 이센세이(李先生의 일본어)라고 농담으로 부르곤 했단다.
이교숙님이 만주 신경교향악단 시절에 같이 활동하던 국내 교향악단의 원로 바이올린,비올라,프랜치 혼의 멀티 뮤지션 이재옥
(서울음대교수, KBS교향악단 창설멤버)님이 이정식님의 부친이시다.
대중음악 편곡의 경우 재즈이론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 이전에는, 클래식 작곡이론에서 편곡자들이 음반을 듣고 또 Hit Kit 나
Song Folio(미군 도서실에 수시로 공급되는 팝송책자)에 적혀있는 코드를 보면서 자기나름대로 Jazz의 이론을 정립(?)해 나가면
서 편곡작업을 해 왔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분들이 참으로 멋진 음악을 만들어 낸 걸 보면 대단히 유능한 분들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국내에서는 남산 드라마센터에 있던 서울예술전문학교에서 1982년 국악과를 신설하면서 김희조선생(국악학과장)을 모셨고 다
음 해인 1983년에 대중음악과를 국악과에 두기로 하고 길옥윤(본명:최치정)님을 주임교수로 초빙하였다. 그 후임으로 온 정성조
교수(1988년 부임-미국 버클리음대 유학파 재즈맨)때부터 실용음악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음악
전문 음악교육기관의 효시가 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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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교숙 (李敎淑 1924~2017 원산 출생 - 트롬본, 하프, 작곡가, 재즈이론가, 교수)
음악경력
만주국 신경방송교향악단(1944~ 1945) 단원(트롬본) 겸 신경방송국 음악 선곡 담당자로 활동.
(신경은 현재의 장춘시로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1938년 만주국을 세우고 신경을 수도로 정함.
교향악단을 조직하여 처음에는 신경음악협회 관현악부로 칭했었음. 이때 국내의 진취적인 연주인들이 이 악단으로
많이 입단하여 후에 국내 교향악단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됨)
해방 직후 귀국하여
고려교향악단 단원 (1945~1948) -
(1948년 고려교향악단이 운영난으로 해체됨. 1946년 창설된 서울관현악단과 해체된 고려교향악단으로
서울교향악단이 1948년 발족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해체)
해군 입대(1949 - 해군군악학교 창설시 교관으로 병조장=하사관 최고 계급 부여)
해군 장교 임관 (1953 - 해군사관후보생 16기)
미국 유학 (1956~1957-1년6개월 장교코스 - 워싱턴의 미해군 USN 음악학교에서 하프와 재즈화성학을 수학)
해군군악학교 교장 (제2대 교장 - 진해 - 1957~1961)
해군본부군악대 대장 (제4대 군악대장 1962~1967 소령 예편) - 군 재직중 연세대경영대학원 졸업
이화여대 교수 (1967.10 ~ 하프, 관현악이론)
서라벌예대(= 후에 중앙대 합병) 출강 (1970.03 ~ )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출강 (1974.03 ~ )
재즈화성학 강의 (1967~ 국내 처음으로 대중음악인들에게)
한국하프연주자 모임 초대 회장 역임
한국 관악지도자협회(후에 관악협회) 회장 역임
작품
군 가 : 해군가, 대한의 사나이,
행진곡 : 애국행진곡, 고향그리워 & 바위고개 행진곡, 성벽행진곡 외 다수
관악곡 : 해군행진곡(애국행진곡) Tromboneology, 제주 I, 제주 II, My Cat 외 다수
현대음악 : 직선과 곡선(직선은 양심을 곡선은 사심을 표현 - 1970년대초 KBS교향악단에서 직접 지휘 발표)
실내악곡 : 음시(音詩 Tone poem- 1974 제6회 서울음악제 출품)
하프곡 : 하프를 위한 "Concertino"(2002 호암아트홀에서 발표) 기수(奇數 1967) "음시(音詩) 길"(1975)
하프를 위한 환상곡(1990) 음시(音詩) Wall Street (1957)Pantomine(1974) 등 50여곡
※ 현재 국내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때 연주되는 트럼펫 위주의 의식곡은 이교숙님이 해군 재직시 작곡하신 곡으로 작고하신 뒤
인 2020년9월4일 제4회 "지식재산의 날"에 유족들이 국가에 저작권을 기증해서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수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제19회 - 음악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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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숙님 하면 1950~60년대에 트롬본을 하던 젊은이들에게는 이교숙님은 트롬본 톤 연습할때 악기를 실에 매달아 놓고 손 안대
고 가볍게 입술 대는 연습을 한 분이라고 잘 알려져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해외유학 붐이 일어났고 그들
이 귀국해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좋은 주법으로 연주를 하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금관악기 소리 내기가 힘들어서 얼굴이 벌개
가지고 힘으로 소리내는 주자가 많던 시절이었기에 고음을 힘 안 들이고 깨끗이 내는 이교숙님은 비법(?)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신비스러운 대상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원산은 항구도시이다보니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선진국가의 예술을 접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보아진다. 특히
러시아의 음악문화도 유입되어 있었고 일본 유학파 중에는 후에 유명 음악가가 된 분도 많았을 정도로 음악문화가 넘칠 정도로
선진적이었다. 이교숙님 가정이 크리스천 가족이다보니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음악문화를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
냈다고 보아진다.
이교숙님은 해방 직전인 1944년 20세때 만주 신경방송교향악단에 트롬본 주자로 입단하였으며 아르바이트로 신경방송국에서
음악을 선곡하는 업무도 맡아보았다. 신경교향악단에는 후에 국내 교향악계를 이끌어 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이재옥(비
올라,호른) 전봉초(첼로) 안병소(바이올린) 김성태(바이올린,작곡) 김생려(바이올린) 님 등도 함께 활동했었고 가고파 작곡의 김동
진님도 바이올린과 작곡, 지휘 등으로 활동했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고려교향악단에서 활동하던 중 1948년 악단이 해체되었고 1949년에 해군군악학교(2년제음악전문
학교처럼 육성계획)가 창설되면서 사회에서 활동하던 유명 젊은 음악인들을 교수(군대에서는 교관)로 스카웃하게 되면서 이교숙
님은 하사관(=부사관)의 최고 계급인 병조장(현재의 상사~원사)으로 임명되어 복무중, 장교교육을 이수하고 1953년 군악장교로
임관된다. 해군에 입대하게 된 동기로는 미 해군군악학교에 유학을 갈 수 있다는 언질이 크게 작용했다.
이교숙님은 해군에 입대하기 전부터 현대음악에 심취해서 현대음악을 탐구했지만 그 시절에는 순수음악인 대부분이 현대음악에
무관심했던 시기였기에 이교숙님은 자신과의 싸움으로 심히 고민하던 시기였다고 하겠다.
해군에 입대한 후에도 이러한 고민은 계속되었지만 군 생활 속에서 그의 음악행로에서의 변환점을 맞게 된다.
바로 미해군(USN)군악학교 유학(1956~1957 장교 코스)이었다. 관현악 이론은 이미 터득한 후였기에 국내에 없는 학문을 배우고
저 하여 하프와 재즈빅밴드편곡이론(재즈화성)을 수학하게 된다.
특히 이교숙님에게 하프를 가르친 미국인 티 카메론교수는 1년동안 배울것을 단 2개월만에 마쳤다며 이렇게 빨리 깨우치는 사람
은 처음 봤다고 하며 칭찬을 하더란다.(이교숙님의 제자가 미국 유학 가서 들었다는 후일담)
국내에서 하프과를 가장 먼저 신설한 이화여대에서는 이교숙님의 예편 시기(1967.10.)에 맞춰 하프를 배우고저 하는 학생들이
처음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교숙님이 미국에서 재즈빅밴드 편곡이론을 수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장 먼저 제자되기를 자청한 음악인이 당시 미8군
연예대행기관 소속 단체에서 테너색스를 연주하던 맹원식(1935~2019)이었다. 그는 이교숙님이 진해에서 서울의 해군본부군악
대장으로 부임(1962~)한 후 개인적으로 주말이면 댁으로 찾아가서 수강을 하곤했고 그 열성으로 그는 이교숙님의 수제자답게 국
내 유일의 재즈빅밴드 편곡자로 일생을 보냈다.
1967년 예편 후에는 미8군연예대행사중 가장 큰 한국흥행주식회사(일명 화양)에서 옛 해군군악학교 제자들로 구성된 민들레악
단 멤버를 중심으로 많은 연주인들을 대상으로 그룹강의 또는 개별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제자들 중에는 후일 유명하게 된 음악인들이 많이 있다. 향수와 뮤지컬 "명성황후"의 작곡가 김희갑, 국내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 KBS관현악단장을 역임한 재즈맨 정성조 등을 비롯하여 방송음악분야의 대중음악 편곡자, 레코딩스튜디오의 편곡자와
수많은 연주자들이 이교숙님을 사사하여 가요나 가곡, 팝송등을 자신들의 능력으로 편곡하여 이전보다 수준 높은 작품을 많이 만
들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또 편곡이 아니고 재즈의 즉흥연주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60년대 한국 재즈의 레전드라고 할 수있는 테너색소폰의 故이정식
(1932~1970 비올라 이재옥님의 아들)과 Modal Jazz 를 즐기는 테너색소폰의 김수열을 비롯 몇몇 재즈맨들도 이교숙님의 가르침
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서울예술전문학교(서울예전- 서울예술대학의 전신)에 실용음악과가 국내 처음으로 설립되어 재즈를 비롯
한 대중음악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게 되었지만 이보다 20년전에 이교숙님은 개인의 힘으로 그 역할을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
말로 찬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필자도 60년대 말 2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재즈빅밴드편곡법과 관현악법 기초를 수학, 1972년부터 방송편곡자로서 활동을 시작
하여 2017년에 이르기까지 80년대 KBS간판쇼프로였던 백분쇼와 현재의 KBS열린음악회, 가요무대 등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했
고 팝스오케스트라와 빅밴드 연주곡등을 편곡하면서 항상 스승님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이교숙님은 해군군악대 시절에는 해군의 대표적인 군가인 "해군가"와 "국기에 대한 경례"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과 장성,영관에 대
한 경례 음악과 신호음악을 비롯 많은 행진곡과 관악곡의 작곡,편곡물을 남겼다.
1967년 예편 후, 이화여대를 비롯 중앙대(=서라벌예대) 서울대,연세대,한양대 등에서 하프와 관현악법 강의로 후진을 양성했다.
하프의 국제적인 활동을 주선하는 등 국내 음악계의 해외 개척에 많은 역할을 함으로서 국내 음악계의 발전에 끼친 업적이 중차
대하다고 하겠다.
일본은 하프의 역사가 1930년대부터 시작되었기에 그간에 유명 연주자도 많이 배출했다. 1970년대에는 일본의 유명한 하프지도
자인 아베 요시에 여사를 만나 그가 주도하는 일본 하프섬머스쿨에 국내의 제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미국의 하프
섬머스쿨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등 후진 양성에 정성을 쏟았다.
군악대에서 오랫동안 관악을 위한 수많은 작곡과 군악대 지도에 많은 열정을 기우렸으며 예편 후에도 관악을 위한 작곡활동도 꾸
준히 했고 한국관악지도자협회 회장을 맡는 등 관악단체 중흥운동에 앞장 서기도 했다.
(이교숙선생님에 대한 기록이 많지가 않아서 2010년6월10일 충무로4가의 자이아파트 자택으로 찾아뵙고 간단히 경력을 확인하
여 본인이 카페지기인 daum의 KBS관현악단출신모임 카페에 등재할 수 있었다. 1999년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손주를 데리고
KBS로 저를 찾아오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는 청력이 좋으셨지만 11년 후인 이날 댁에서 뵐때에는 크게 얘기해야 들으시는 것이
많이 안스러웠다. 이때가 86세이셨으니까 당연한 건강이시지만...........
같은 해 12월5일 오전11시에는 음악평론가이며 국재델픽위원회 명예위원이신 이상만님의 주선으로 순수음악 월간지인 "음악
춘추"에서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故이교숙 추모좌담회를 코스모스악기사 10층에 새로이 문을 연 하프갤러리에서 가졌다.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전 고양시 아람누리 총감독)
이향일(고인의 따님-교수)
배용자(하프연주가 - 고인의 첫 제자)
곽 정(하프연주가 -교수)
서봉석(KBS편곡자, 지휘자,KMC빅밴드 단장)
(재즈 전문 편곡자이며 고인의 재즈이론 첫 제자인 맹원식님은 필자가 함께 참석하자고 전화를 드렸으나 건강문제로 불참.
맹원식님은 2년 후인 2019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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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판근 (李阪根 1934~ 부산 출생. Alto Sax. Bass, 재즈이론가. 작곡, 편곡, 교수)
음악경력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1958) - 졸업후 2~3년간 직장생활 후 청산하고 음악에 전념.
미8군 공연단체 - 미8군 New Star Show에서 활동(Alto Sax.) (1960년 전후)
故이정식 재즈밴드(1960년대 초반)
미8군 공연단체 - Jazz Combo "Hepcat" 밴드리더(E.Bass 연주) (1960년대 중반)
이판근 재즈밴드(1970년대)
재즈 이론 강의 (미국의 버클리음대 교재를 기초하여 - 재즈 즉흥연주와 재즈편곡이론 1972~ 2010 )
동아방송대 출강
한국영상대 실용음악과 외래교수
작품
964마리의 종이학, 은행나무 사랑, 분 꽃, 소월길, 당신은 나의 누구세요, Y.J.H Blues ,
이판근 프로젝트 의 여러곡 등 외 200여곡
음반
"이판근과 코리안 재즈퀸텟"(1978)을 비롯 이판근님이 작업에 참가한 재즈음반은 수없이 많고 또
재즈싱어(윤희정을 비롯)들의 공연에 음악감독을 맡은 경우도 많이 있다.
수상
2012 제 9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2023 제20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출신으로서 특이하게도 국내 유일의 재즈즉흥연주 이론과 재즈편곡이론을 후진들에게 전수하신 이판근님
은 1970년대 초부터 재즈를 체계있게 배우고 싶어하는 연주자들에게 즉흥연주(Improvisation)이론과 재즈편곡이론을 전수하게
된다.
그는 본적이 부산이지만 일본 오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나고 교토(京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부친께서도 음악을 좋아하셔서
재즈음반도 가지고 계셨기에 어릴때도 재즈음악을 들을 기회가 있었고 또한 동네 형들이 미국의 재즈밴드 흉내를 내며 연주하는
것을 보고 재즈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는 재즈곡인 "Perdido" 가 좋아서 듣다가 그 곡을 채보(곡을 듣고 악
보로 적는 것.Transcribed)해 보기도 하고 그게 재미 있어서 중학교때에는 하루 종일 채보만 한적도 있었단다. 이런 연유에서인
지는 몰라도 필자가 공부할 때 이판근님은 5도권을 설명하면서 Perdido의 Bridge를 인용했었다. (C7 - F7 - Bb7 - Eb7- )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여 마산상고를 다닐때 밴드부에서 앨토색스를 연주했고 후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면서도 아르
바이트로 미8군에서 연주활동을 했었다. 1958년 대학 졸업 후에 상과 출신이 할 수 있는 직장을 2~3년 다녔었지만 재즈가 하고파
서 그만 둔다. 재즈는 미칠 수 있는 음악이기에 연주자가 재즈에 미치면 돈 버는 것은 상관 안 하게 된다. 그냥 재즈 좋아하는 연주
자끼리 모여서 Jam Session을 하게 되면 그 만족감과 희열은 이루 말 할수 없이 좋은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다보니 가족들
이 경제적으로 힘든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1960년대 들어서는 앨토색스를 포기하고 전기베이스(Electric Bass)로 악기 포지션을 바꿔서 재즈에 몰두한다.
60년대 한국 재즈의 레전드인 테너색스의 故이정식악단에 합류한다. 1970년 이정식(1932~0970)님이 별세한 후에는 국내 재즈
맨의 전용관(?)이라 할 수 있는 무교동의 Star dust Hotel의 나이트클럽에서 재즈의 묘미를 신들린듯 발산했다.
그는 그 호텔에서, 돈을 버는 것과는 무관했지만 재즈 연주를 허용해 주는 국내의 유일한 업소였기에 그때가 재즈맨으로서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재즈만을 마음 편히 연주할 수 있었으니까............
(당시 스타더스트호텔에는 클럽이 4개가 있었다. 나이트클럽이 본관에 1. 일반클럽(본관 1, 지하층 1, 신관 1)이 3개가 있었는데
사장이 3개를 직영했고 지하층 1개는 임대였는데 대부분 재즈밴드가 주로 출연했다.
나이트클럽에는 2팀의 밴드, 그 외의 일반클럽은 11시까지 1팀의 밴드로 연주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83년말까지 야간통행금지제도(0시부터4시까지)가 있어서 철야 영업할 수 있는 나이
트클럽은 관광호텔에만 허가가 되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새벽 4시에 연주가 끝나면 단원들이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가서 소주한잔 기울이면서 그날 그날 연주했던 재즈이
야기로 꽃을 피우고 토론도 했던 그때가 이판근님은 눈물겹도록 그립다고도 했다. 다른 한편 자랑스럽다고도 했다. (이렇게 힘들
게 지낸 선배들 덕분에 90년대부터는 재즈가 국내에서도 팬들이 많아지게 된다.)
60년대 70년대의 재즈맨들은 재즈와 사회적 현실과의 괴리에서 신음하고 고민하던 시기였고 언제 끝날줄 모르는 앞이 안 보이는
기나 긴 터널을 지나는 분위기였다. 너무도 암울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재즈를 연주하고 또 연구하면서 발전
시켜 왔다.
그는 일본에 수시로 가서 일본 재즈맨(미국유학파)이 번역한 버클리교재를 구해서 재즈이론을 독학으로 습득하고 두뇌가 뛰어난
분이기에 재즈이론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정리했다. 이러한 과정을 옆에서 보던 후배들 중에 테너색스의 정창균이 하루는 "형님!
이 좋은 교재로 우리들에게 재즈이론을 가르쳐 주십시요" "그래 볼까? 잘 될랑가~"
이렇게 해서 이판근님의 재즈 즉흥연주 이론 강의(한 그룹 3개월 완성)가 1972년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가 좋아서 연주자들 사이에 소문이 나고 재즈 지망생들이 하나 둘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수제자 정창균
앞에서 말한 정창균 - 197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미국에서 재즈공부를 하고 또 미국 재즈맨들과
함께 연주하고 또 자신의 재즈밴드를 구성하기도 한 정창균(1945~2022 테너색스,작곡.편곡,목사)은 이판근님의 첫 제자이고 가
장 아끼고 자랑하는 수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1975년 미국으로 이민, Cornish Institute 에서 재즈를 공부했는데 이론은 이판근님
에게 배운 것을 다시 배우는 수준이었기에 이론은 제켜놓고 실기에 몰두할 수 있었고 또 그 대학에서 교수들로 이루어진 빅밴드
에 함께 참여해서 졸업 후에도 연주를 계속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재즈실력이 교수들과 같은 수준이라는 의미다. 그는
미국에서 동시에 색소폰 3개를 화음으로 연주하는 Once 3 Saxes 연주자로 유명해졌다. 2000년대 초에는 필자의 주선으로 KBS
열린음악회, SBS스타 킹에 출연하여 Once 3 Saxes를 선보였으며 국내의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판근님은 그를 가리켜 "한국의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라고 불렀다.
로랜드 커크는 1960년대에 미국에서 3개의 색소폰을 동시에 연주한 흑인 재즈맨이다.
필자가 1973년에 5명이 그룹으로 공부를 했는데 이때가 두번째라고 했다.
필자도 정창균과 함께 무교동 클럽에서 연주활동할 때에 그 의 주선으로 이판근님에게 재즈 수업을 받게 되었다.
필자가 수강할때는 레슨 장소가 마땅치가 않아서 종로에 사는 이판근님 지인의 집 문깐방에서 강의를 들었다.
이후로는 간헐적으로 그룹레슨을 하다가 1977년 기자촌 2층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레슨을 하게 된다.
그 집은 국내 연주자들과 가수들 중에 재즈에 관심있는 사람은 거의 다 거쳐갔을 정도로 개인적인 재즈학교(?)로 유명해졌다.
90년대 들어 미국 보스턴의 버클리음대로 유학 가는 재즈 지망생들이 많아지면서 미리 한국어로 재즈이론을 익히고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에 많은 유학생들이 이판근님을 사사하기도 했다.
필자는 2002년 KBS관현악단에서 퇴직하고 팝스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있을때인 2003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라틴 재즈편곡법을
배우기 위해 기자촌 이판근님의 재즈강의실을 찾았었다.
재즈강의실은 일반 개인주택의 좀 큰 방의 사이즈인데 거기에는 대형 TV모니터가 있었고 벽면마다 재즈CD원판. 전축음반 일부,
카세트테이프, 동영상으로 된 재즈공연 DVD 등이 빼곡이 진열되어 방이 비좁았었다. 강의를 마치면 다음 학생이 올때까지 판근
형님(평소 형님이라고 부름)과 재즈이야기를 비롯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유식한 분과 대화를 나누면 참으로 들을 것이 많고 나도 유식해지는 것 같아 그분에 대해 존경심이 생긴다.
이판근님은 재즈이론도 시대에 따라 진화, 발전하는 것이기때문에 가끔씩 - 세계적인 재즈축제가 열리는 미국이나 일본에 직접
가셔서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필요 서적, 음반등을 구해서 또 연구하곤 했다.
그 시대에 맞게 이론이 정립되어야 젊은 세대들과 호흡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자촌 지역이 강북지역 뉴타운 시범지구로 지정되면서 은평뉴타운이 들어서게 되어 2010년에 34년간의
이판근 재즈강의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곳에서 재즈이론을 수학한 유명 연주자와 그룹사운드 멤버, 가수들의 면면을 보자면
연주 : 김점배, 강태환, 정창균, 홍순기, 이정식, 임인건, 전성식, 한충완, 정원영, 김광민 외,
최의철, 전태관, 김종진 외
가수 : 윤수일, 심수봉, 김수철, 박학기, 인순이, 심민경, 김은영, 윤희정, 웅산 등
이외에도 팝분야에 종사하는 연주자들 중에도 그의 제자가 대단히 많다.
필자는 1967년 미8군 연예대행기관 소속의 밴드 시절에 당시 의정부 미1군단 하우스밴드인 재즈캄보 "Hepcat" band의 리더로
활동하시던 이판근님을 처음 만났었다. 당시에 하우스밴드에서는 사실 재즈맨으로만 구성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않는 상황이었
지만 이판근님은 테너색소폰 주자에게 곡마다 일일이 Adlib. 라인을 그려줘가면서 연습을 시키고 재즈밴드로서의 틀을 갖추려고
애쓰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는 재즈 색소포니스트 故이정식님이 악단을 구성, 전쟁중인 베트남의 미군쇼 단체로 떠난 후여서 재
즈에 대한 열기를 분출할 데가 없이 답답한 때였다.
필자가 속해 있던 Sunset밴드의 리더인 박봉구(Trumpet)님이 그의 마산상고 밴드부 선배이자 1960년경 미8군쇼단체 New Star
Show의 밴드리더였고 그 쇼밴드에서 이판근님이 앨토색스를 연주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박봉구님 댁에 가끔 들리곤 했었고 릴
녹음기를 틀어놓고 편곡을 해 주고 가시던 때도 있었다. 그때 편곡을 해 준 곡이 그 시절 국내에서도 대단히 히트했던 트럼펫 듀엣
위주의 Herb Alpert & Tijuana Brass 의 히트곡 "A Taste of Honey" (꿀맛) 였었다. 그 곡에 대한 음악적인 해석과 라틴음악에
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악단이 창안해 낸 리듬들을 Amerish Rythm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이판근님은 곡 하나하나에 관해서도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음악과 음악 외적인 것까지도 설명해 주시기에 참으로 음악에 대해 박
식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판근님의 재즈인생을 뒤돌아보면
1960년에 미8군쇼에서 연주하던 앨토색소폰에서 전기베이스로 바꾸면서 재즈에만 전념하게 된다.
당시 국내 최고의 재즈 색소포니스트이자 두살 위의 故이정식과 만나서 재즈에 대한 갈증을 푼다.
故이정식은 당시 미8군쇼의 다른 색소폰 연주자들이 스탄 게츠를 탐닉할때, 그는 다른이들보다 앞선 1950년대 후반의 Modal
Jazz를 즐겼고 존 콜트레인을 연구하며 프리재즈에 속하는 무한대의 즉흥연주를 즐기던 수준이었다.
이판근님의 말을 빌리면 故이정식의 재즈는 당시 일본 재즈맨들도 부러워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일본에 와서 같이
재즈를 하자고 약속도 했었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1970년 39세의 나이로 별세하게 되어 약속이 물거품이 되었고............
故이정식님 별세 후인 1970년대에는 후배들에게 재즈이론을 가르치면서 재즈연주를 병행하던 시기였다고 하겠다.
당시 국내 유일의 여성 재즈보컬리스트 故박성연님이 1978년에는 신촌에 재즈클럽 "야누스"를 개업했고 또 이태원에 재즈클럽
"All that Jazz" 가 오픈하는 등 재즈맨들의 연주공간이 생기게 되자 그 클럽의 단골 악단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재즈맨들이 마음
껏 숨쉴 공간이 둘이나 생기니 언론에서도 재즈와 재즈맨에 대해서도 가끔 기사화 하곤 했다.
1978년에는 재즈애호가 故엄 진님이 이판근에게 재즈 음반 제작을 의논했다. 자신의 작곡 두곡도 편곡해서 넣어주고 다른 곡은
이판근님에게 일임하는 것으로 하고 악단을 동원해서 마장동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것으로 하여
"이판근과 코리안 재즈퀸텟" 이란 재즈음반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음반은 1978년 LP로 출시된 것을 재즈평론가 황덕호에 의해 35년만인 2013년 CD로 복원되었다.)
우리 민요와 대중음악을 편곡하여 국내 재즈맨들이 연주한 음반이어서 국내의 정통재즈로서 유일한 음반이라고 인정받는다.
이판근 편곡에 강대관(트럼펫) 김수열(테너색스) 손수길(피아노) 이수영(베이스) 최세진(드럼&봉고)등이 연주를 맡았다.
여기에 피아노의 손수길은 이 이후 재즈에서 팝으로 옮겨서 재즈계에서는 잊혀져 간 인물로 되었지만 그는 어린 시절 클래식의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소문이 났었고 나이 20대에 들어서면서 재즈에 푹 빠져 지냈었다.
이판근님은 이 곡들중 "한오백년"음반작업 때의 손수길을 당시 최고의 재즈피아니스트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판근님은 재즈수강생들에게 항상 "한국의 재즈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 고 각자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일본은 벌써 일본 고유의 음계가 미국 재즈계에 알려져 있고 세계젹인 스타재즈맨도 여러명 나와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가 못하다고........ 하지만 근래의 한국 재즈맨들의 수준은 대단히 높아져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격려한다.
1984년에는 경기도가평군의 자라섬에서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이 시작되어 세계 각국의 재즈팀과 국내의 재즈팀이 연일 출
연하며 페스티벌의 그레이드를 높여주고 국내의 재즈맨들의 발전상이 눈에 보인다. 참 대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판근님
은 이 시기부터 연주(Elec.Bass)생활을 접고 창작활동과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는 이판근님의 작곡과 편곡으로 된 순수 우리 국산 재즈넘버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2004년 제7회
때부터 연주되었다. 이름하여 "이판근 프로젝트" 팀이 연주하는 여러 곡들~~~
그후 2010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으로 이사한 뒤, 고양박물관에서 볍씨를 보고 온 딸 이민영(재즈피아니스트)에게서 설명을 듣
고 그 볍씨에 관심이 가게 된다. 고양시에서 5000년이 넘은 것으로 알려진 재배볍씨 "고양 가와지볍씨"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
는 의미있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을 주제로 6일이 걸려 곡을 완성하게 된다.
2016년에 작곡된 이 곡은
"가와지 랩소디" (볍씨의 춤 I, 볍씨의 춤 II, 화석이 된 볍씨, 볍씨싹트기,볍씨페스티벌 등 5파트로 구성)
이 곡들에서는 우리 민요의 쾌지나칭칭나네" 에서 보여주듯 재즈의 흥미있는 요소 중의 하나인 Call and Responced 형식이라고
도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재즈 이전에 우리나라 민요 속에서 흔히 볼수 있는 장면이기에 굳이 재즈에서 빌려 온 형식은 아니라고 한
다. 이런 장면에서 그의 애국심이 절로 나온다.
악단 편성은 색소폰, 피아노, 베이스, 드럼 등 재즈퀸텟.
그는 우리 민요를 재즈와 접목하는데 혼신을 다 했다. 미국의 블루스를 바탕으로 발전한 재즈도 아프리카 흑인들의 한(恨)이 서려
있는 음악이지만 우리나라 민요도 그에 못지않게 한(恨)이 많은 곡들이어서 서로 통하는 그 무엇이 있기에
우리 민요를 재즈와 접목하는 것이 꼭 필요하고 글로벌화 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한국에는 대단히 유능한 젊은 재즈맨들이 많다. 창작물도 많이 나오고 대다한 수준의 연주자도 많이 배출되었기에 머지않아
그들이 K-Pop 이 아닌 K-Jazz를 보급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내 유일의 재즈이론가인 이판근님이 자신의 세대에서 이루지 못
한 것을 후진들이 이루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크나 큰 숙제이기도 하다.
이판근님은 성격 자체가 자신을 내세운다든가, 남보다 돋보이려고 한다든가, 출세욕 같은 것이 전혀 없기에 그의 뛰어난 재즈의
능력에 비해 대중들에게 어필되지를 못했다.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24.03.03.오전 재즈계의 거목 재즈 작곡가 겸 이론가인 이판근,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시다
안타까운 것은 2010년 기자촌에서 고양시 백석동으로 이사온 후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재산을 잃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건강도 나빠지면서 기억력도 감퇴되어 2022년부터는 치매로 인해 요양원에서 지내고 계시다
가 결국
2024.03.03.오전 소천하게 된다.
우리나라 재즈계에 큰 나무와 뿌리를 튼튼하게 심어 놓으신 분이 노후에 고생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시는 모습을
뵈니 너무 안스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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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는 글
♬ 대중음악 연주계의 어제와 오늘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과거 유명 연주자들은 사실상 재즈를 바탕으로 1930년대 부터 미국의 이름난 재즈맨들의 음반을 듣고
흉내 내면서 자생 성장했다고 하겠다. 클래식음악과 국내의 가요와는 전혀 다른 ,그 새롭고 매력 있는 재즈와 한국의 옛 가요음악
을 어떻게 융합해야 할까 고민하며 우리 가요계에 정착, 접목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시절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고 보여진다.
1950년대 들어서서는 미군의 장기 주둔으로 인해 미국의 대중음악을 수시로 접하면서 재즈에 대한 이론서적이나 편히 들을 수
있는 음향장비도 구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미국의 재즈를 위시한 여러 나라의 세련된 음악을 듣고 그와
비슷하게 연주하는 훌륭한 연주자들이 계속 이어서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예술적 감각과 재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DNA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나 유추해 보게 된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연주계에 다행스러운 것은, 1980년대 말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에 대중음악 전공의 실용음악과 설립을
필두로 그 이후 1990년대에는 국내 대학교에 대중음악 전공학과의 신설이 확산되고 거기에 맞춰 재즈 교육의 최고봉인 미국 보
스턴의 버클리음악대학을 비롯한 선진국의 음악대학에서 재즈를 수학한 엘리트들이 국내 대학의 강단에 서게 되면서부터 엄청난
발전을 하게된 것도 우리나라 대중음악 연주계의 크나큰 수확이라 하겠다.
가끔 TV에서 연주자 경연대회에 출전하는 멤버들을 보면 악기연주의 기본인 음정, 박자. 테크닉 등은 이미 초월했고 감정표현 내
지 창의력, 팀웍, 관중흡인력 등을 중점적으로 가리게되는 그런 수준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래고 또 놀랜다. 하지만 이 뛰어난 고
급 인력이 활동할 공간이 별로 많지가 않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 우리나라에서 관악기 연주계가 발전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시기를 살펴보면
1930~40년대 가요의 탄생과 악극단 성행 및 8.15직후 미군 3년간 주둔 시기에 재즈를 처음 들어보며 접해보던 악단 연주활동
1950~60년대 미군의 대병력 국내 주둔 시기에 미8군연예대행기관(1958~)에서의 본격적인 재즈와 팝음악 연주활동
1970~80년대 국내 라디오(1948~) 및 TV(1961~)방송사의 개국과 방송전속악단의 활동
1980~90년대 국내 재즈밴드의 활성화 와 재즈 유학생 증가 및 각 대학교의 대중음악과목 신설 등 교육저변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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