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PD
- 초창기 방송의 프로듀서들
님 향한 일편단심, 독야청청하고
1927년 2월 16일 1kW출력으로 방송을 시작한 'JODK'는 일인이
세운 방송이라고는 하지만, 초창기에는 우리말 방송과 일어 방송의 비율이 1대 3이었다. 그러다 개국 수년 만에 2대 3으로 바뀌고, 1933년
4월 26일에 이르러서야 'JODK'는 이중방송으로 우리말만을 하는 주파수가 배정되기도 하였다. 초창기에는 일인들이 편성을 일방적으로
전담하였으나, 이중방송이 시작되면서 어려운 여건하에서나마 한국인에 의하여 방송이 편성되기도 했다.
우리말 방송을 담당한 제2방송과의 초대 과장은 윤백남선생이었고, 2대
과장은 김정진선생 3대 과장은 심우섭선생이었다. 여기서 특기할 일은 비록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으나, 김정진과장은 취임 후 <조선어강좌〉란
프로그램을 신설했고, 심우섭과장은 제2방송을 통한 일본어 방송을 반대하다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내고 방송국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우리말을 갈고
닦기 위한 조선어강좌의 신설과, 일본어 방송을 반대하고 사표를 던진 사실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선배님들의 이같은 몸가짐은 당시의 한국인
청취자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은 일임에 틀림없다. 비록 몸은 일본인에 매이고 감시를 받고 있었으나 님 향한 일편단심은 독야청청하였다
하겠다. 오늘의 PD격인 대선배님들의 몸가짐과 그 심지가 이러했음을 알면서도 어찌 방송 60년이란 역사를 부정 할 수 있을 것인지? 비록 일인이
한국을 침략하고 우리말을 말살하려 발버둥쳤으나 왜정하의 우리말 방송은 우리말을 간직하고 갈고 닦았던 것이다. 그뿐이랴, 기록에 의하면 연극계의
대원로이신 유치진선생을 비롯해 박 진선생 등 연극인의 활동무대를 방송이 제공하였으며 우리 국악을 보급하고 양악을 널리 소개함으로써 이 땅의
문예진흥의 기초를 든든하게 하였다고 하겠다. 또한 고담(古談)·만담(漫談) 등은 은연 중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내세웠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단파수신기와 무차별 검거바람
〈경성중앙방송국〉청사 2층 제2스튜디오 안에서는 귀속말이 오고 가면서 두
젊은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때는 1944년 8월 어느날이었다.
「이봐 일본해군이 솔로몬군도에서 전멸했대.」
「아니 ! 그게 정말이야?」
「내가 들었어.」
「일본도 머지 않았군.」
「쉿!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할려구.」
「이봐 일본해군이 솔로몬군도에서 전멸했대.」
「아니 ! 그게 정말이야?」
「내가 들었어.」
「일본도 머지 않았군.」
「쉿!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할려구.」
외국 단파방송의 청취를 금지하기 위하여 모든 단파수신기를 모조리 압수하던
당시에 우리의 핏줄을 이어받은 우리의 기술자는 몰래 단파수신기를 조립하고 있었다. 이승만박사의 고국동포에게 고하는 단파방송 내용이 이즈음 세간에
퍼지고, 미국의 소리 방송과 중국 중경에서 나오는 우리말 방송은 귀에서 귀로 퍼지고 패망의 길에서 단말마적인 발악을 하던 일본경찰이 마침내
냄새를 맡게 되고 말았다. 동포 상인들의 입과 귀를 통해 널리 퍼지게 되고 일본경찰은 그 근원을 찾기에 혈안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단파수신기는 모조리 압수했는데 어떻게 일본이 전쟁에 지고 있다는 뉴스를 알게 된 것일까? 일본경찰은 마침내 방송국으로 쳐들어와 불문곡절 선량한
우리 방송인들을 검거해 갔다. 일본경찰에 의해 검거선풍은 서울에 국한한 게 아니라 전국적인 것이었다. 단파수신기를 만든 성기석씨, 정계지도자에게
정보를 전달해 준 이이덕씨, 송진근씨, 양재현씨, 박용신씨, 이 현씨, 이루 선배방송인들의 성함을 다 들 수가 없다. 검거된 인원이 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성기석씨 등 검거된 우리 방송인들은 8·15 해방이 될 때까지 옥살이를 하였으니 그들에게 당한 고통은 짐작하고도 남을 처절한
일이었다. 이이덕씨는 옥고에 의한 병으로 해방되자 자유의 몸이 되었건만 저세상으로 떠나셨다고
한다.
해방 직후 방송인의 양심선언
때는 1945년 8월 20일 전후해 때아닌 전범재판(戰犯栽判)이
서울중앙방송국 1층 응접실에서 개정되고 있었다. 재판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검사는 물론 변호사가 있는 법정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피고인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피고인들인데, 피고인이 때로는 검사가 되기도 하고 판사가 되기도 하는 묘한
전범재판장이었다. 당시 피고인으로 법정에 입장한 인물을 보면 이덕근씨, 윤길구씨, 장운표씨, 조동훈씨, 그리고 문제안씨, 유용노씨, 전인국씨 등
보도과 직원들이었다.
「일본의 전쟁수행에 앞장 섰나?」
「앞장 선 것은 아닙니다.」
「아니긴 ! 당신이 학병에 가라 또는 징병에 기꺼이 응해라 운운하는 방송을 하지 않았는가?」
「하긴 하였으나 써준 것을 읽기만 하였습니다.」
「읽기만 했다고?」
「네, 읽기만 했습니다.」(일동 웃음소리)
「읽었으니 앞장 선 것이지.」
「억울합니다.」
「억울하긴 ? 누가 써 주었나?」
「저기 앉은 -」
「제가 써 준 게 아니라 동맹통신을 베껴 써주기만 했습니다.」
「아니, 변명만 하긴가?」
「변명이 아니라 사실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일동 웃음소리)
「동맹통신을 베껴 써주었건 또 이를 소리내어 읽었든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하여 앞장선
것이지.」
「앞장 섰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입니다.」
「표현 ?」(일동 웃음소리)
「검사의 입장에서 구형합니다. 과장은 제일 책임이 무거우니 징역 5년을 구형한다.」
「그건 중형입니다.」(일동 우우 소리)
「OOO아나운서는 박력있게 방송한 죄로 3년을 구형한다·」(우우 소리)
「OOO편집자 역시 3년을 구형한다.」
「OOO아나운서는 여자의 간드러진 목소리로 선동하였으니 역시 3년을 구형한다.」(일동 우우 소리)
「OOO편성원은 그 편성의 영향이 컸음으로 중형이 마땅함으로 징역 5년을 구형한다.」(우우 소리와 웃음소리, 박수)
「앞장 선 것은 아닙니다.」
「아니긴 ! 당신이 학병에 가라 또는 징병에 기꺼이 응해라 운운하는 방송을 하지 않았는가?」
「하긴 하였으나 써준 것을 읽기만 하였습니다.」
「읽기만 했다고?」
「네, 읽기만 했습니다.」(일동 웃음소리)
「읽었으니 앞장 선 것이지.」
「억울합니다.」
「억울하긴 ? 누가 써 주었나?」
「저기 앉은 -」
「제가 써 준 게 아니라 동맹통신을 베껴 써주기만 했습니다.」
「아니, 변명만 하긴가?」
「변명이 아니라 사실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일동 웃음소리)
「동맹통신을 베껴 써주었건 또 이를 소리내어 읽었든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하여 앞장선
것이지.」
「앞장 섰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입니다.」
「표현 ?」(일동 웃음소리)
「검사의 입장에서 구형합니다. 과장은 제일 책임이 무거우니 징역 5년을 구형한다.」
「그건 중형입니다.」(일동 우우 소리)
「OOO아나운서는 박력있게 방송한 죄로 3년을 구형한다·」(우우 소리)
「OOO편집자 역시 3년을 구형한다.」
「OOO아나운서는 여자의 간드러진 목소리로 선동하였으니 역시 3년을 구형한다.」(일동 우우 소리)
「OOO편성원은 그 편성의 영향이 컸음으로 중형이 마땅함으로 징역 5년을 구형한다.」(우우 소리와 웃음소리, 박수)
검사의 구형은 이어졌다. 우우 하는 소리와 간간이 박수에 웃음소리가
교차되었으나 단순히 장난기 섞인 모의 전범재판은 아니었다. 물론 장난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하나의 양심선언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해방직후 방송인들은 죄인이란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이 독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방송을 깨끗이 넘겨줌으로써 자신들의 속죄를 만분지 일이라도
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올바르고 공정한 방송을 한다는 굳은 신념에 넘쳐 있었던
것이다.
맥맥이 흐르던 그 ‘애국’
해방 직후의 혼란기 특히 8·15 이후 미군이 진주한 9월 9일(미군이
JODK를 접수한 날)까지의 완전에 가까운 공백기 동안 서울중앙방송국을 지킨 것은 오직 당시의 양심적인 방송인의 필사적인 노력에 있다고 본다.
필자는 당시의 방송인의 노력을 단순한 직업적인 사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애국적인 충정의 발로로 이룩된 크나큰 업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 직후의 사회상을 흔히 일대 혼란기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으나 그 혼란기 속에서의 방송의 위치를 놓고 볼 때 어떠했을까? 생각만해도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좌우대결의 싹이 터지기 시작한 무렵이라고는 하지만 지하조직을 형성했던 공산당세력은 결과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그들 나름대로의 조각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한 일종의 움직임은 방송국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마치 정부를 수립 공포(公布)하는 듯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여운홍, 내무장관에 박헌영… 대통령을 위시한 조각명단의 발표를
방송을 통해 널리 공포하자는 요구는 마침내 서울중앙방송국에 강요된 바 있다. 공인된 것이 아닌 일부 좌익정치집단의 결정을 방송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당연히 거부되었음은 새삼 늘어놓을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로선 유일하다시피한 정치세력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며 우여곡절이 자연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좌익계열임을 자처한 팽진호아나운서는 자신이 저녁 뉴스담당임을 기화로 소위
건준의 조각명단을 편집되지도 않았음에도 편집된 뉴스원고 뒷전에 감추어 가지고 뉴스 스튜디오에 들고 들어갔다가 편집실무책임자인 문제안기자에게
발각되어 압수되는 촌극까지 빚어 졌었다. 뉴스 시간에 발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깡패와 같은 건준의 행동대원들은 뉴스가 끝나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 양상을 글로 쓰기에는 창피한 일이기에 언급을 피하겠으나, 당시 동원된 흉기는 권총을 필두로 몽둥이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두니
당시의 상황을 나름대로 상상하기 바란다. 방송을 천직으로 방송을 지키고 방송을 사랑했던 방송인들의 애국심의 발로는, 일본이 침략정책 수행을
목적으로 세운 JODK였지만, 주어진 제약된 여건 속에서도 뚜렷했으며 안간힘을 다한 하나의 역사적인 결과인 것이다. 맥맥이 방송인들의 가슴에
흐르고 이어 내려 온 정신은 하나의 전통으로 이루어져 참으로 가슴이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겨레의 마음, 하늘 높이
시대를 초월한 퇴역 방송인들이 그들의 정성과 성의로 방송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7년 9월 3일 우리 방송의 효시를 이룬 서울중앙방송국의 옛터인 정동 1번지 현 덕수국민학교교정 스탠드 위에 세운 '첫
방송터’기념비 비문에 그 전통이 다음과 같은 글로서 명문화되고 있다.
첫 방 송 터
1927년 2월 16일 이 자리에서 한국의 방송전파가 처음으로 퍼져 나갔다. 비록 우리말을 끝내 지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가슴 깊이 감춘 채였으나, 여기서 비롯된 우리 방송 전파는 우리 손으로 우리 배달겨레를 위해서 힘차게 자라, 앞으로 한자람 푸른물과 마뫼 높은 바위가 마르고 닳도록 겨레의 마음을 실어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쏘아 올려야 한다. 그 뿌리를 잊지 않고 더욱 더 빛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 첫 방송터에 비를 세워 오래 오래 기리고자 한다. (1987년 9월 3일 방우회장 문시형)
비문에 남긴 깊은 뜻을 되새겨 볼 필요도 없겠으나 겨레의 마음을 싣는다는 큰 뜻을 우리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매 오늘의 방송인 특히, PD의 좌우명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첫 방송터' 기념비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한가지만 더 강조해 보고자 한다. 너비 5m 30Cm, 가로3m가 넘는 기념비 건립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퇴역방송인의 자발적인 성의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출연금에 대한 상한선도 없고 하한선도 없었다. 단 한가지 조흥은행 계좌번호 344-1-008009 방우회란 저금통장 하나가 방우회 회원들에게 알려졌다. 단돈 5,000원에서 백만원에 이르는, 형편에 따라 '첫 방송터' 기념비 건립 기금이 모아져 그 금액이 무려 1,200만원에 이르렀다. 연인원 122명의 퇴역방송인이 뜻을 모은 것이다. 방우회장이라기 보다 한 PD의 아이디어가 퇴역방송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참여의식을 고취시킨 결과이다.
첫 방 송 터
1927년 2월 16일 이 자리에서 한국의 방송전파가 처음으로 퍼져 나갔다. 비록 우리말을 끝내 지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가슴 깊이 감춘 채였으나, 여기서 비롯된 우리 방송 전파는 우리 손으로 우리 배달겨레를 위해서 힘차게 자라, 앞으로 한자람 푸른물과 마뫼 높은 바위가 마르고 닳도록 겨레의 마음을 실어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쏘아 올려야 한다. 그 뿌리를 잊지 않고 더욱 더 빛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 첫 방송터에 비를 세워 오래 오래 기리고자 한다. (1987년 9월 3일 방우회장 문시형)
비문에 남긴 깊은 뜻을 되새겨 볼 필요도 없겠으나 겨레의 마음을 싣는다는 큰 뜻을 우리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매 오늘의 방송인 특히, PD의 좌우명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첫 방송터' 기념비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한가지만 더 강조해 보고자 한다. 너비 5m 30Cm, 가로3m가 넘는 기념비 건립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퇴역방송인의 자발적인 성의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출연금에 대한 상한선도 없고 하한선도 없었다. 단 한가지 조흥은행 계좌번호 344-1-008009 방우회란 저금통장 하나가 방우회 회원들에게 알려졌다. 단돈 5,000원에서 백만원에 이르는, 형편에 따라 '첫 방송터' 기념비 건립 기금이 모아져 그 금액이 무려 1,200만원에 이르렀다. 연인원 122명의 퇴역방송인이 뜻을 모은 것이다. 방우회장이라기 보다 한 PD의 아이디어가 퇴역방송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참여의식을 고취시킨 결과이다.
‘노래자랑’이란 신조어가 탄생되고
해방 후 6·25피난 때까지의 편성의 주역은 제일 먼저 송영호씨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순수창작에 가까운 프로그램 개발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으나 인기프로인 〈스무고개>,〈천문
만답>,〈노래자랑>,<거리의 화제>,<인생역마차〉,<마이크인터뷰〉,〈건설의 밤〉,〈결전의 모습〉,<라디오
꽃다발>,<가정오락회〉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프로가 라디오의 전파를 탄 것이다.
송과장 : 「6시 45분 띠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김서봉 : 「그 시간대에 강연의 시간이 있어 걱정입니다.」
문시형 : 「딱벌떼가 올 것 같은데요.」
일 동 : 「그렇지 하하하..」
배준호 : 「교양프로로 편성하지요.」
조규택 : 「강연담당자로서 좀 서운한데요.」
송과장 : 「그 시간대 띠를 교양프로로 편성해 보도록 하시오.」
김서봉 : 「그 시간대에 강연의 시간이 있어 걱정입니다.」
문시형 : 「딱벌떼가 올 것 같은데요.」
일 동 : 「그렇지 하하하..」
배준호 : 「교양프로로 편성하지요.」
조규택 : 「강연담당자로서 좀 서운한데요.」
송과장 : 「그 시간대 띠를 교양프로로 편성해 보도록 하시오.」
6 ·25 피난 당시 특히 딱벌떼가 임시수도 부산거리를 휘젓고 다닐
무렵의 PD 주역들의 일종의 편성회의의 한 토막을 소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당시 〈우리들의 건강〉,〈법률상식〉,〈병무상담〉,〈마이크
인터뷰〉등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프로그램이 새로이 생겼으며 이러한 교양프로그램의 개발로 학자 내지 법조인의 신형 탤런트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특히
오늘날 아무 거부감없이 사용되고 있는 '마이크 인터뷰'라는 신조어(新造語)는 방송이 만들어 낸 말의 하나이다. 마이크인터뷰가 방송이 만들어 낸
말이라고 하니깐 생각나는 말이 있다. 수복 후 음악담당의 김창구 PD가 새로이 개발한 프로그램 <노래자랑>역시 방송이 만들어 낸
우리말이다. 말로 하자면 노래의 자랑이지 노래자랑이라는 고유명사는 당시로선 어색하고 없었던 말이다. 방송이 하나의 고유명사를 만들어낸
'노래자랑'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KBS 제1TV의 일요일 낮시간을 장식하고 있는
인기프로이다.
명사가 된 두 아나운서
공개방송에 모여드는 방청객을 수용할 수 없어〈스무고개〉공개방송과 더불어
<노래자랑>이 공개방송으로 등장한 것은 1956년 6월의 일이다. 정동에 있는 방송협회 4층에 마련한 제1스튜디오는 50평 남짓한
제법 큰 스튜디오였는데〈스무고개〉공개방송을 하는 날이면 사람으로 꽉 메워지고 아직 초여름이 되지 않은 5월이건만 땀으로 목욕을 할 지경이었다.
물론〈스무고개〉박사님들 앞에는 큰 얼음덩어리가 버티고 있어 냉방역할은 못하나 얼음기둥이라는 시각적인 효과로 다소나마 더위를 가셔 주는 역할을
했었다. 사회를 맡은 장기범 아나운서는 아무리 더워도 방청객 앞이니 정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담당PD는 물론 〈스무고개〉박사님도 넥타이를 맨
정장을 해야 했으니 땀으로 내의를 세탁했었다는 말은 하나도 과장된 말이 아니다. 공개방송이 끝나고 방청객이 물러나면 얼음기둥을 껴안다시피 한
것은 자연법칙에 가까운 현상이었으며 땀에 젖은 런닝셔츠를 벗어 얼음물에 헹궈 가며 가시지 않은 더위와 땀냄새를 털어 버리곤 했었다. 이같은
곤욕을 치러야 하는 공개방송을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생각 끝에 당시 〈동화백화점〉지금의〈신세계백화점〉4층에 극장이 마련되어 있으나 허가관계로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들어 마침내 공개방송이 방송국 스튜디오를 떠나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다.〈스무고개〉 30분의 공개방송만으로는 방청객에게
미안하지 않느냐는 관점에서 편성회의는 수삼일에 걸쳤고 마침내는 김창구PD의 제안에 따라〈노래자랑〉이 탄생된 것이다.〈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의
공개방송이 실시되는 〈동화백화점〉은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 방청객의 줄은〈동화백화점>을 돌고 돌아 에워싸곤 했었다. 장관이라기보다 일대
혼잡을 이룬 것이며 그러기에 서울장안 소매치기꾼들의 집합장소가 되고, 서울시경 형사들은 총동원이 되다시피
했었다.
〈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은 날이 갈수록 인기상승 프로로 명사회자
장기범아나운서와 임택근아나운서는 일약 장안의 명사가 되고 호남형인 두 아나운서는 특히 젊은 여성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게 되어 항간에는 심심치
않은 화제를 뿌리기까지 했다. 거리로 나간〈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은 마침내 외로운 낙도, 적과 대치하고있는 백령도로 전출하거나 휴전선에서
조국을 지키는 일선장병을 찾기도 하고 강릉으로 대구로 공군장병을 찾기도 했다. 이어 산업전사들을 찾아가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특정기업의 선전물이
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되기도 했었다. 공영방송이라고 자처하면서 서슴치 않고 협찬 광고를 내는 오늘의 방송과는 참으로 동떨어진
방송이었으며, 공영 아닌 관영이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방송을 천직으로 알던 일벌레들
해방 후 새로운 포맷에 의한 프로그램을 개발한 송영호씨(편성과장으로만
10년 가까이 지냈다)를 정점으로 한, 1960년대 민간상업방송이 등장할 때까지의 PD를 손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 김서봉씨 (편성담당 PD)
¨ 박화목 시인 (유치원시간담당)
¨ 배준호씨 (어린이시간 및 편성담당)
¨ 이영기씨 (교양방송담당)
¨ 조규택씨 (강연 등 시사담당)
¨ 김기형씨 (교양담당)
¨ 노정팔씨 (사회교양담당, 어린이시간의 〈누가누가 잘하나) 프로개발)
¨ 김창구씨 (음악담당)
¨ 조백봉씨 (음악담당)
¨ 송영수씨 (대중음악담당)
¨ 임석규씨 (클래식담당)
¨ 김명희씨 (클래식담당)
¨ 강정수씨 (국악담당)
¨ 장사훈씨 (국악담당)
¨ 조남사씨 (문예담당)
¨ 박화목 시인 (유치원시간담당)
¨ 배준호씨 (어린이시간 및 편성담당)
¨ 이영기씨 (교양방송담당)
¨ 조규택씨 (강연 등 시사담당)
¨ 김기형씨 (교양담당)
¨ 노정팔씨 (사회교양담당, 어린이시간의 〈누가누가 잘하나) 프로개발)
¨ 김창구씨 (음악담당)
¨ 조백봉씨 (음악담당)
¨ 송영수씨 (대중음악담당)
¨ 임석규씨 (클래식담당)
¨ 김명희씨 (클래식담당)
¨ 강정수씨 (국악담당)
¨ 장사훈씨 (국악담당)
¨ 조남사씨 (문예담당)
물론 나도 위에 열거한 PD의 말석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나 어린이시간
담당 PD로 안병원씨·한용희씨를 들지 않을 수 없으며,〈재치문답〉 창안자인 박종민씨를 비롯한 조부성씨, 대학교수들을 새로운 탤런트로 발굴한
최종채씨 등 흘러간 PD는 많으나 그 모두가 방송을 천직으로만 안 일벌레들이었다. 글 문시형(KBS TV 편성과장, 라디오 편성국장
지냄)
자료:KBS 방송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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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르코니
한덕봉
'한국의 마르코니
환국(還國)하다'
이 말은 한덕봉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한국방송의 모체인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건설하고자 할 때, 한덕봉은 해외를 항해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세계일주 항해를 여러 차례 한 바 있는 1급 무선통신사로,
단독으로 송 · 수신기를 책임지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또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한국방송 건설에 한덕봉을 영입(迎入)하기로 된
것이었다. 그가 제물포항(祭物浦港·현 인천)에 입항하고 서울에 입성(入城)할 때에는 큰 환영을 받았다. 경성방송국이 정식으로 개국하기 2년여
전부터 실험방송을 했는데, 이때는 방송의 주무관청에 현직관리로 있었던 노창성이 50w 소출력인 간이 방송시설을 설치하는 공사를 전담한 것이었다.
노창성은 일본 구라마에(藏前)공과대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사람으로, 라디오에 관한 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노창성은 건장한 체구와 부지런한
성격으로, 주야불철하고 불고가사하면서 방송시설의 설치공사를 직접 주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한덕봉과 노창성 두 사람은 우리나라 방송기술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비록 1kw 밖에 안 되는 미약한 방송출력이었으나, 그 위력은 실로 경탄할 만했다는 것이다. 정규방송이 나가고 한국민요 등이
전파를 타고 방송되자, 가정에서는 너무 신기하여 마법상자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여러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정규방송을
시작했으나, 라디오 수신기의 등록대수는 극소수이고 라디오의 가격이 매우 비싸, 부유한 사람이 아니고는 구입할 능력이 없었다. 당시는 청취료가
유일한 방송운영의 재원이어서,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자 노창성과 한덕봉은 우선 진공관 없이도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싼 값의 광석식 라디오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라디오 무료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강습료가 무료인데다가 광석식 라디오를 만드는 재료만 구입하면 손쉽게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터이어서 이 모임은 대인기였다. 신청자가 쇄도하여 국민학교 교실을 빌어 사용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에 힘입어 라디오 등록대수도
점차 늘어나서 눈에 띄게 증가되었던 것이다.
애프터 서비스 제도 만든
노창성
또 노창성은 일찍부터 라디오 청취자에 대한 서비스 제도를 창안해낸 뛰어난
아이디어의 소유자였다. 그는 요즘과 같은 애프터 서비스제도로 순회진료 제도를 만들어 고장난 라디오를 고쳐주었다. 또 라디오병원이 흔치 않던
시대에 라디오상담소를 설치하는 등 청취자에 대한 봉사로 청취자수를 늘려나가는 기발한 착상들을 창출해내기도 하였다. 기술자인 노창성은
개국공신(開局功臣)으로서, 또 기발한 아이디어 창출의 공을 인정받아 함흥방송국 국장직에 발탁되었으며, 그 후 조선방송협회 사업부장의 요직에
승진되면서 참사(參事)의 서열에 오른바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도 공보처 방송국장에 보직된 후 초대 방송관리국장으로 재직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기술자로는 최고로 출세를 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한덕봉은 자그마한 체구에 인자하고 빈틈없는 성실한 성격으로
만인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덕인(德人)이었으나, 굳이 흠을 꼬집어내자면 박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늘 정장으로 차려입지
않고, 앞단추가 네개 달린 멋쟁이 콤비차림을 하고, 머리는 상고머리형으로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특이한 마도로스 풍의 사람이었다. 그의 방송기술은
대전력 송신기술면에서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폭넓은 박식형의 방송기술자였으며, 특히 방송현업 기술간부로서는 한마디로 빈틈없고 확인 또
확인을 되풀이하는 완벽주의자였다. 필자는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녹음중계반에서 같이 일해본 적이 있는데, 너무 꼼꼼한 성격과 완전무사고로
방송을 운영하라는 엄격한 지시에는 진땀을 흘린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서울운동장에 경성 대 평양 축구시합 중계를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리시버 한
개가 없었다. 경기가 승부가 나지 아니하여 연장전까지 했기 때문에 날이 저물었던 탓으로 리시버를 분실한 듯 했다. 그의 불호령이 떨어져 나는
리시버를 찾기 위해 무려 3일 간이나 서울운동장 주변을 헤매야 했다. 결국 시말서를 써서 제출하고 용서를 빌었다. 나는 지금도 한덕봉의 그
꼼꼼하고 정확한 업무수행 태도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터이며, 그때 그로부터 배운 방송현업에 대한 철학이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는
듯하다. 한덕봉은 성실성과 꼼꼼함을 인정받아, 평양과 함흥 두 방송국의 기술과장직에 발탁된 바 있었으며, 그 후 8·15 해방까지 중앙방송국
기술과의 부과장으로 재직하다가, 해방 후 일본인들로부터 전국방송기술을 인수받은 한국인 네명 중의 유일한 기술자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기술국장으로, 혼란기의 방송기술 총책임자로 재직하다가, 6·25 사변 때 납북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얼음으로 스튜디오 냉방
무더운 삼복 중에는 스튜디오 안이 마치 찜통과 같다. 그래서 한덕봉과
이남용 등 원로 기술자들은 고심 끝에 얼음 덩어리를 방송실 안에 놓아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당시는 에어콘이니 하는 말은 생각지도
못했던 때이고 제빙공장도 눈에 띄지 않던 시절이라, 겨울철에 한강에서 톱으로 채빙(採永)하여 지하창고에다 보관했다가 여름철에 사용하던 때였다.
당시 스튜디오는 밀폐형으로 전혀 통풍이 안되는 완전 방음형이었다. 여름철에 민요방송을 하기 위하여 기생(妓生)들이 목청을 돋우어 창을 부르는데,
모시 저고리가 마치 냉수를 뒤집어쓴 물제비와 같이 흠뻑 젖어 남자아나운서들의 눈요기가 되기도 했다. 운영난에 허덕이던 당시로서는 값비싼 큰
얼음덩이를 매일같이 여러 스튜디오에 놓아두는 비용도 수월치는 않았다. 실험방송 시대부터 연희송신소가 생기기 전까지는 아주 소수의 직원으로
방송현업이 운용되었다. 한 건물 안에 지하실에는 송신기, 발전기, 축전지 및 배전 설비가 있었으며, 2층에는 지휘실(조정실)과 방송실이 있고,
송신공중선과 '카운터 포이스' 접지시설까지 모두 동일 건물 내에 시설되어 있어 현업기술과에 근무하던 몇 사람 안 되는 직원으로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선배 기술진은 한덕봉, 노창성을 비롯하여 이주호, 이남용, 장문원, 양길승, 염준모 등올 들 수 있으며, 연희송신소가
따로 생겨나면서부터는 기술진이 증원되었고, 부산을 비롯한 평양, 청진, 이리 및 함흥방송국이 개국한 1938년 말까지는 전국에 많은 한국인
방송기술자가 근무하였고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산하에도 직원이 대폭 증원되어 나갔다. 이 무렵에 방송현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일본인들을 앞지르는
탁월한 기술을 발휘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1940년 이후 해방까지 근무했던 방송기술인의 수는 백여명에
달한다.
지방에서는 아나운서
노릇도
사실 일제시대의 방송인은 너무 많은 고생을 감수해야만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술자들이 로컬방송도 담당하는 간이 아나운서의 발령까지 받고 마이크 앞에 서야하는 적도 있었다. 이때 지방방송국에 근무하는 한국인
기술자들에게는 '방송을 취급하는 사람으로 임명한다'는 발령사항이 하달되어 당연히 한국말 아나운서 노릇을 해야만 되었다. 한국말 방송 전용송신기
출력이 50kw 대전력으로 된 것은, NHK가 아직 10kw이었을 때였는데, 송신소의 황태영, 장문원, 정일모 등은 일본인들을 능가하는 우수한
기술진으로, 그들의 연구논문은 당시 높이 평가된 바 있는 터이다. 그 중 황태영은 우리나라 통신기기 제작 면에서도 선구자적인 존재로 1956년
종로에서 한국 최초로 TV국을 만들어 이 나라 방송기술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람이며, 정일모는 예비역 육군대령으로 우리나라 군통신의 선구자적인
존재이자 최초로 FM 방송국을 만든 인물이다. 방송기술인들은 여러 방면에서 이 나라 방송통신을 크게 발전시킨 초석이 되었다. 우리나라 경찰
통신을 창설한 이남용, 김두식, 이인화, 최동곤, 이상훈, 조선기, 군 통신을 창설한 심궁구, 심상웅, 이천기, 외무부 통신을 발전시킨 한진동,
주석환 등은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UV-171D라고 하는 50kw용 출력관은 길이가 1백75cm, 직경이 26cm나 되는 대형 3극
진공관이었다. 따라서 키가 작고 몸이 약한 기술자는 진공관을 취급하기 어려웠다. 또 운반하고 교체할 때도 항상 든든한 두 사람이 필요했다. 이
진공관에서 발생하는 고열은 물로 냉각해 주어야만 했다. 따라서 지하수를 파고 옥내 물탱크를 만들어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는 거대한 시설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찬물로 진공관의 열을 식히지 못하면 방송은 자동적으로 끊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1시간에 소요되는 찬물의 양은 6천 6백L 이상이나
되었다. 이때 전력실과 펌프실을 담당했던 이종훈 선배는 겨울철이면 냉각수 시설이 동파되지 않도록 온갖 신경을 다써야 되었다. 한편 무더운
삼복더위는 진공관의 열을 식힌 물을 송풍기로 식혀서 다시 지하우물에다 집어넣는 작업에도 늘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감전으로 순직한 방송사의
초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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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로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가 있을 때 송신기 조정작업 중 불의의 감전사고로 현장에서 순직한 이성실기사는 일편단심 방송기술만을 위해 살다가
꽃도 다 피우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다. 이성실은 괴뢰군이 정동방송국을 점령한 후에도 연희송신소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방송을 이끌어간 바
있는 방송사에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감전사고로 순직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추서나 추훈은 전혀 없는 터이다. 방송역사를 연구하는
필자의 머리에는 수원송신소에서도 송신기 보수작업 중 감전으로 순직한 박재위기사가 있는데, 그의 성실하고 근면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터이며, 연희송신소에서 감전사고로 치명상을 입었던 박수한 동지와 대전에서 송신기 보수작업 중 감전사고로 구사일생을 겪은 전해종 동지의
몸서리나는 흉터는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수많은 선배 방송기술인들의 희생이 오늘의 세계적인 방송을 만든 초석이 되었다. 일제시대에
방송국에 입사하여 많은 격동기를 겪으면서 일생을 방송기술에 몸바쳐 일하다가 KBS에서 정년으로 물러난 사람은 이종훈, 이종만, 유병은, 김원용,
한기선, 강대현, 김규학, 한영희 등으로 방송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글: 유병은 (대전방송국장
역임)
자료:KBS
방송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