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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훈화와 격언
1. 일반적인 것
1)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12장에서 곁들여 말한 "분별 있는 자는 쾌락이 아닌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라는 명제를 모든 삶의 지혜의 최고 원칙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쾌락 대신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다. 이 명제의 진리성은 모든 쾌락과 행복은 소극적인 성질을 띠는 반면, 고통은 적극적인 성질을 띠는 데 기인한다. (132쪽)
* 빨간색 부분은 150쪽에도 나옴. (박희택)
모든 일이 뜻대로 진행되더라도 한 가지 일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것이 자꾸 뇌리에 떠오른다. 계속 그 일만 생각하며, 뜻대로 진행되는 다른 더 중요한 일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경우 침해받는 것은 의지다. 앞의 경우는 신체로 객관화된 의지고, 뒤의 경우는 인간의 노력으로 객관화된 의지다. 두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의지의 충족은 언제나 소극적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직접 느껴지지 않고 기껏해야 성찰의 과정을 통해 의식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의지의 억제는 적극적인 것이라서 스스로 그런 사실을 알린다. 모든 쾌락은 단순히 이러한 억제의 제거에, 억제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으므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132-133쪽)
"행복은 꿈에 불과하지만, 고통은 현실이다(<플로리앙 후작에게 보내는 편지>, 1774년 3월 16일)"라는 볼테르의 말도 잘못된 것이라 해야겠다. 하지만 사실은 그 말이 진실이다. (...) '행복하게 산다'는 말은 '덜 불행하게' 즉 그럭저럭 견디며 산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해야 한다. (...) 가장 행복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다지 큰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지, 대단히 큰 기쁨이나 엄청난 쾌락을 맛본 사람이 아니다. (133쪽)
최고의 기쁨이나 향락으로 인생의 행복을 재려고 하는 자는 잘못된 잣대를 잡은 것이다. 향락이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향락이 행복하게 한다는 생각은 질투심이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품는 망상이다. 반면에 고통은 적극적으로 느껴진다. 그 때문에 고통이 없다는 것은 삶의 행복을 재는 잣대다. (134쪽)
어리석은 자는 인생의 향락을 좇다가 결국 속은 것을 안다. 현자는 재앙을 피한다. 현자가 재앙을 피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운명 때문이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 고뇌가 없는 동안에는 불안해하는 소망이 존재하지도 않는 행복의 환영을 눈앞에 그려 보이며, 우리를 미혹해 그 환영을 좇게 만든다. (...) 그것은 악마가 최고의 현실적인 행복인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소망이라는 환영을 통해 우리를 끊임임없이 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134-135쪽)
적극적인 행복이라는 환영을 좇는 노력을 하지 않을수록 이 계획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괴테가 [친화력]에서 언제나 남의 행복을 위해 힘쓰는 미틀러의 입을 빌려 한 말도 이와 같은 의미다.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는 자는 완전히 눈뜬장님이다." 그런데 이 말은 "더 좋은 것은 정말 좋은 것의 적이다"라는 프랑스의 멋진 잠언을 생각나게 한다. (135-136쪽)
행복과 향락이란 멀리서만 보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지는 신기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반면에 고뇌와 고통은 현실성을 지니고 있고, 직접 자신을 드러내며, 착각하거나 기대할 필요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가르침이 결실을 맺으면 행복과 향락을 좇는 것을 그만두고,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고통과 고뇌의 접근을 막으려고 애쓴다. (...) 너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너무 행복해지려는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137쪽)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시인 호라티우스가 이렇게 노래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중용의 미덕을 지키는 자는 쓰러져 가는 오두막의 더러움을 당연히 멀리하고, 분수를 알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궁전의 화려함을 멀리한다. 키 큰 소나무일수록 폭풍에 흔들리는 일이 잦고, 우뚝 솟은 탑일수록 더욱 힘차게 무너지며, 벼락을 맞는 것은 산봉우리다([송가])." (138쪽)
"인간의 일은 무엇이건 크게 애쓸 만한 가치가 없다([국가론] 제10권 604)"라는 플라톤의 말과 아울러 다음 시구의 취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소유물이 다 사라진다 해도 슬퍼하지 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 세상의 소유물을 다 가졌다 해도 너무 기뻐하지 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 고통과 환희도 지나가 버리는 것이니. 세상을 지나쳐 가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안와리 <소헤이리>)." (138-139쪽)
기쁨만은 축제의 자리에 참석을 거절했다. 기쁨이 실제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초대받지 않고 알리지도 않은 채 자발적으로 으스대지도 않고, 조용히 살금살금 다가온다. 기쁨은 종종 전혀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계기로, 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 즉 결코 빛나지도 영광스럽지도 않은 기회에 나타난다. 기쁨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금처럼 우연의 변덕에 따라 아무런 규칙도 법칙도 없이 대체로 대단히 미세한 알갱이로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며 큰 덩어리로 있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39쪽)
슬픔도 기쁨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긴 장례행렬이 느릿느릿 움직이면 얼마나 우울한 기분이 드는가! 뒤따르는 마차의 행렬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차 안을 한번 들여다보라. 모두 텅 비어 있다. (140쪽)
2)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대충 알아보려면 그가 어떤 일에 즐거워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일에 슬퍼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 자체로 볼 때 사소한 일에 슬퍼할수록 더욱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사람이라야 사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불행한 상태에 빠지면 그런 사소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141쪽)
우리는 삶에 많은 요구를 하면서 삶의 행복을 넓은 토대 위에 세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 토대 위에 세운 행복은 자칫하면 무너지기 쉬우며, 재난이 일어날 기회가 훨씬 많아서 이러한 재난이 꼭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건물은 토대가 넓을수록 견고한 것과 달리 우리의 행복이라는 건물은 이런 점에서 반대다. 따라서 자신이 지닌 온갖 종류의 수단과 균형을 맞추어 요구수주을 되도록 낮추는 것이 큰 불행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141쪽)
* 파란색 부분의 취지는 150쪽에도 나옴. (박희택)
3) 일반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행하든 삶에 대한 시시콜콜한 준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빈번하고 어리석은 일 중 하나다. (...) 어떤 일을 힘들여 달성하고 보니 그것이 우리에게 더 이상 맞지 않은 경우가 왕왕 생긴다. 때로는 우리가 어떤 작품을 준비하는 수년 동안 알게 모르게 그 일을 실행할 힘이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 오랜 노고와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얻은 부를 우리가 더 이상 누리지 못하고 결국 남 좋은 일을 한 경우가 가끔 생기기도 한다. 우리가 다년간 노력해서 마침내 얻은 지위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 호라티우스도 앞에서 기술한 것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백년대계에 견디지 못하는데, 왜 그대의 정신을 혹사시키는가([송가])?" (141-142쪽)
* 파란색 부분의 취지는 150쪽에도 나옴. (박희택)
이러한 잘못을 자꾸 저지르는 이유는 정신의 눈으로 볼 때 불가피하게 생기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그런 착시현상 때문에 인생이란 출발점에 서서 보면 끝이 없는 것 같지만, 종착점에서 되돌아보면 매우 짧은 것으로 드러난다. 착시현상이 없으면 위대한 일을 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니, 그것에도 좋은 점이 있기는 하다. (...) 때로는 우리가 추구하던 것과 다른 것, 즉 더 나은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때로는 추구하던 것 자체를 처음에 잘못 접어든 길과 완전히 다른 길에서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일관되게 기본저음으로 흐른 생각도 바로 그런 것이다. (143쪽)
* "때로는 추구하던 것 자체를 처음에 잘못 접어든 길과 완전히 다른 길에서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는 '비인과적 연기'를 표현한 것임. (박희택)
훌륭하고 고상한 인물이라면 운명이 주는 교육을 이내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유연하게 순응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세상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행복은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에 따라 희망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는 데 익숙해져 결국 페트라르카처럼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행복도 느끼지 못한다([트리온포 다모레])." (...) 연금술사가 단지 황금을 얻으려다가 화약과 도자기, 의약품과 자연법칙까지 발견했듯이, 우리의 사정도 그와 같다고 할 것이다. (144-145쪽)
* 빨간색 부분도 '비인과적 연기'의 표현임. (박희택)
2.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태도
4) 어떤 건물을 짓는 일을 돕는 건설 노동자가 전체 계획을 알지 못하거나 항시 그것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듯, 하루하루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도 자신의 인생행로와 그 성격의 전모에 대해 그와 같은 관계를 갖는다. 이 인생행로가 가치 있고 의미 있으며 계획성 있고 개인적일수록 그것의 축소판인 평면도, 즉 설계도를 가끔 눈앞에 떠올려 보는 것이 더욱 필요하고 유익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인생의 설계도를 축소판으로 바라보는 것이 다른 것 이상으로 힘을 북돋워 주고 격려해 주고 분발하게 하며, 행동하도록 고무해 주고, 옆길로 빠지지 못하게 막아 줄 것이다. (145쪽)
5) 삶의 지혜의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일부는 현재에, 일부는 미래에 쏟고 있는 주의(注意)의 비율을 올바로 조정해 한 쪽이 다른 쪽을 망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너무 지나치게 현재 속에 살고 있다. 경솔한 사람들이 그러하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미래 속에서 살고 있다. 불안과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 비율을 정확히 조절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 미래를 위한 계획과 걱정에만 온통 마음을 쏟거나 과거에 대한 동경에 빠지지 말고, 현재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유일하게 확실한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146-147쪽)
* 237쪽과 통함. (박희택)
6) 모든 범위를 제한해야 우리가 행복해진다. 우리의 시야, 활동 범위, 접촉 범위가 좁을수록 우리는 행복해지고, 그런 것이 넓을수록 고통이나 불안을 느끼는 빈도가 잦아진다. 그 범위가 넓어질수록 걱정이나 소망, 두려움도 커지기 때문이다. (...) 정신적인 면까지 포함해서 모든 범위를 한정해야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 알다시피 고뇌는 적극적인 것이고, 행복은 소극적인 것이므로, 의지의 자극이 적을수록 고뇌도 적어진다. 활동 범위가 제한되면 의지를 자극하는 외적인 유발 동기가 줄어들고, 정신을 제한하면 그런 내적인 유발 동기가 줄어든다. (150쪽)
* 파란색 부분의 취지는 141-142쪽에도 나오고, 빨간색 부분은 132쪽에도 나옴. (박희택)
7)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우리의 의식이 무엇으로 차 있으며 무엇에 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충격과 고통의 연속이고, 성공과 실패가 늘 번갈아 가며 일어나는 현실 생활보다 전반적으로 보아 순전히 지적인 생활이 그럴 능력을 지닌 정신의 소유자에게 훨씬 많은 일을 해줄 것이다. (151쪽)
8) 완전히 사려 깊은 생활을 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교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가끔 돌이켜 생각해 보고, 지금까지 체험하고 행동하고 경험하면서 느낀 것을 다시 한 번 개괄할 필요가 있다. (...) 또한 자신의 경험은 텍스트로, 사고와 지식은 그 텍스트에 대한 주석으로 볼 수 있다. (152-153쪽)
9)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고 자기 자신이 전부일 수 있어서, "나는 모든 재산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확실히 우리의 행복에 가장 유익한 특성이다. 따라서 "행복이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의 것이다([에우데모스 윤리학] 제7장 2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자꾸 되뇔 필요가 있다(이것이 내가 이 책의 서두에 표어로 제시한 샹포르의 문장이 대단히 점잖게 표현하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생각이다). 왜냐하면 약간이나마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으며, 사회생활에 따르는 고충과 불리, 위험과 불쾌한 일이 수없이 많은데 이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유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자유롭기 때문이다. (...)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자아의 가치에 정확히 비례해서 고독을 피하며 싫어하거나, 견디며 사랑하는 것이다. 고독한 상황에 있을 때 (...) 각자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느끼는 것이다. 나아가서 인간은 자연의 순위표에서 상위에 있을수록 고독한 상태에 있다. 더구나 그것은 본질적이고 불가피한 고독이다. (153-154쪽)
* 인간이 고독해야 하는 이유(2)를 명확하게 설명한 대목임. (박희택)
인격적으로 탁월한 자는 용서를 빌어야 하거나 숨어서 지내야 한다. 정신적 우월함은 특별히 자신의 의지를 전혀 내세우지 않더라도 단순히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 평범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면 천박하고 고루할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심한 자기 부정을 하고, 자기 자신의 4분의 3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다. 자신의 가치가 많은 사람일수록 이익이 손실을 메우지 못해서, 결국 거래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끝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155쪽)
* 정신적 우월함을 지닌 이의 운명에 관한 서술임. (박희택)
인간은 원래 자기 자신과만 완전히 융화할 수 있다. 친구와도 애인과도 완전히 융화할 수 없다. 개성이나 기분이 달라 사소한 것일지라도 언제나 불협화음을 초래한다. 그 때문에 마음의 진정하고 심원한 평화이자 완전한 내면의 평정, 즉 건강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이 지상의 재화는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철저한 은든 상태에서만 지속적인 기분으로 가질 수 있다. (...) 고독과 적막 속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재앙을 느끼지는 못한다 해도 한눈에 조망할 수는 있다. (...) 고독이 행복과 마음의 평정의 원천이기 때문에 젊은이는 고독을 견디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자신이 전부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키케로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고, 자신에게만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완전히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패러독스] 제2장 17절)"라고까지 말한다. (156-157쪽)
* 인간이 고독해야 하는 이유(3)를 명확하게 설명한 대목임. (박희택)
지적으로 뛰어나 사람은 고독으로 이중의 이점을 얻는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 함께한다는 이점이고, 둘째는 타인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이점이다. 모든 교제에는 많은 강제와 고충,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감안할 때 두 번째 이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다는 데서 생긴다([성격])"라고 라브뤼예르가 말했다. (...) 고독은 심지어 각자의 자연스러운 상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고독은 우리를 최초의 인간 아담으로 만들어 자신의 본성에 맞는 본래적인 행복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준다. (160-161쪽)
* 인간이 고독해야 하는 이유(4)를 명확하게 설명한 대목임. (박희택)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미망의 바다에서 헤매는 다른 사람들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고, 야비함과 천박함의 어두운 심연에 빠져 있는 그들을 저 높은 광명의 길로, 교양과 세련됨의 세계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사실 다른 사람들 틈에서 살아야 하겠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의 일원은 아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청년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과 현격히 다른 존재라고 느끼지만, 세월이 감에 따라 서서히 그런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으니 신체적으로도 거리를 두어, 일반적인 천박함이 다소 면제된 인물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신경을 쓴다. (166쪽)
* 인간이 고독해야 하는 이유(5)를 명확하게 설명한 대목임. (박희택)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내용을 살펴보면, 고독을 사랑하는 마음은 원래적인 충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주로 좀 더 고상한 사람들에게서 점차적으로 발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군서 본능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속삭임의 반격을 받는 경우도 있다. "시름에 잠겨 있지 마시오. 독수리처럼 그대의 생명만 쪼아 먹을 테니, 아무리 형편없는 무리와 어울린다 해도 그대도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임을 느낄 것이니([파우스트] 제1부 1635-1638행)." 고독은 뛰어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과 같다. 그들도 때로는 고독을 탄식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두 가지 재앙 중에서 덜한 것이라며 언제나 고독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리 분별 있게 행동하라(호라티우스 [서간집])!"가 점점 쉬어지고 자연스러워진다. 그러다가 60대가 되면 고독에의 충동이 정말로 보다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이 된다. (166-167쪽)
* 인간이 고독해야 하는 이유(6)를 명확하게 설명한 대목임. (박희택)
10) 질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럼에도 질투란 악덕인 동시에 불행이다. 우리는 질투를 행복의 적이라 간주하고 악마로 보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에 대해 세네카는 멋진 말로 우리에게 지침을 준다. "자신의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말고 즐기도록 하자.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괴로워하는 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분노에 대하여] 제3권 30장)." "많은 사람이 너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많은 사람이 너보다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라([서간집] 제15권 11통)." (170-171쪽)
11) 어떤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충분히 검토해 보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을 철저히 심사숙고한 뒤에도 인간의 인식이 불충분함을 감안해, 조사와 예견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온갖 계산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상황이 여전히 생길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을 유의해 항상 저울의 적게 나가는 쪽에 비중을 두고, 중요한 부분은 까닭 없이 건드리지 않도록 한다. 다시 말해 "굳이 평지풍차를 일으키기 말라(살리스티우스, [카틸리나])"와 같다. (172-173쪽)
12) 이미 어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된 경우,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하면 그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다간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커져서 자학하고 만다. 그러기보다는 오히려 다윗왕처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다윗왕은 아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애원하고 간청하며 여호와를 귀찮게 했지만, 아들이 막상 죽고 나자 가볍게 무시하고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확실히 따져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는 것이 좋다.(174-175쪽)
* '후회'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조언임. (박희택)
13)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과 관련한 모든 일에 상상력을 억제해야 한다. 무엇보다 공중누각을 쌓아서는 안 된다. 쌓아 올리자마자 한숨을 쉬면서 다시 허물어뜨리면 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 상상력은 아직 활동 중인 밤에 잠자리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다. (...) 나는 앞에서 상상력을 억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에 우리가 당한 불의, 손해, 손실, 명예훼손, 냉대, 모욕 등을 다시 생생히 떠올리거나 마음속에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 (175-176, 178쪽)
* '상상력' 문제는 제18항에서도 언급한 바 있음. (박희택
14) 우리는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보면 곧잘 '이게 내 것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 대신에 가끔 "이게 내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말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을 잃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179쪽)
15) 우리와 관계되는 일이나 사건은 완전히 따로따로, 아무 질서나 상호관계도 없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즉 그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이 복잡하게 뒤섞여서 나타난다. 그러니 그러한 사정에 보조를 맞추려면 우리도 그런 문제를 두서없이 생각하고 염려해야 한다. (...)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강제를 피하려면 무엇보다 자기 강제방법을 쓰는 것이 가장 좋다. "모든 것을 네게 복종시키려면 우선 너 자신이 이성에 복종하라([서간집] 제37권 4통)!"라는 세네카의 말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180-181쪽)
16) 개개인은 자신이 소망하는 모든 것 중에서 극히 작은 일부분밖에 손에 넣지 못한다. 하지만 수많은 재앙은 누구나 당하게 마련임을 항시 명심하고 우리의 소망에 하나의 목표를 세워 욕구는 억제하고 분노는 제어해야 한다. 즉 한마디로 말해 "단념하고 견뎌 내야" 한다. (181쪽)
17) "생명의 본질은 운동에 있다([영혼에 관하여])"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옳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적 생명이 오직 끊임없는 운동을 본질로 하고, 그것에 의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내적인 정신적 생명도 지속적으로 일에 종사하기를, 행위와 사유를 통한 무언가에 종사하기를 요구한다. (...) 중요하고 위대하며 짜임새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을 자각하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자각으로 좀 더 고귀한 종류의 관심이 삶 전체에 퍼져,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매력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183-183쪽)
18) 우리가 노력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상상력에서 나온 영상이 아니라 명료한 사유를 거친 개념이다. 하지만 대체로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자세히 검토해 보면 우리가 결단을 내릴 때 마지막 심급으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대체로 개념이나 판단이 아니라 대안의 한쪽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환상이다. (184쪽)
* '상상력' 문제는 제13항에서도 언급한 바 있음. (박희택)
19) 앞에서 든 원칙은 '어떤 경우에도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것에 대한 인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보다 일반적인 원칙에 포괄된다. 이러한 인상은 단순히 생각하고 안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강렬하다. 이유는 극히 빈약한 경우가 많은 인상의 질료와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형식, 즉 직접성과 구체성 때문이다. 직접성과 구체성이 마음에 스며들어 마음의 안정을 방해하거나 마음의 결심을 흔들어 놓는다.
20) 인간은 건강한 동안에는 온몸과 신체 각 부위를 잔뜩 긴장시키고 고통을 주어 온갖 종류의 좋지 않은 영향에 저항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르도록 몸을 단련해야 한다. (...) 근육은 많이 쓸수록 강해지지만, 신경은 그럴수록 약해진다. 그러므로 근육은 적당히 긴장시켜 단려내야 하지만, 신경은 결코 긴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뇌는 억지로 지나치게 오랫동안 쓰거나 때아니게 혹사하면 안 된다. 따라서 소화하는 동안은 뇌를 쉬게 하는 것이 좋다. (...) 근육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안이나 그 후에도 뇌를 쉬게 하는 것이 좋다. (...) 뇌는 성찰에 필요한 한큼의 충분을 수면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187-188쪽)
3.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
21)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행동에 조심하고 아량을 베푸는 것이 필요하다. 조심하면 손해와 손실을 막을 수 잇고, 아량을 베풀면 다툼과 싸움을 피할 수 있다. (...) 사람에 대한 인내심을 배우려면 무생물을 상대로 자신의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 좋다. 무생물은 역학적물리적 필연성에 의해 우리의 행위에 완강하게 정항한다. (...) 우리를 방해하는 자들도 무생물이 그런 작용을 하듯이 그들의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엄격한 필연성에 의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191-192쪽)
22)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서로의 정신과 마음의 동질성이나 이질성이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아무리 사소한 일에서도 동질성과 이질성을 느낄 수 있다. (...) 이러한 사실을 통해 첫째로, 왜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그토록 사교적이고, 어디를 가나 쉽게 좋은 교제 상대를 발견하는가 하는 점이 설명될 수 있다. 더구나 제법 괜찮고 사랑스러우며 착실한 사람들을 말이다. 비범한 사람의 경우에는 이와 반대의 결과가 된다. 탁월한 사람일수록 그런 사실이 더욱 두드러진다. (...) 누구나 상대가 자기를 생각하는 것만큼만 상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래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홀로 둥지를 트는 법이다. (...)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떨어지는 두 사람이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에게 다가가려고 열심히 노력해서,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반갑게 인사하고 급작스레 친해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알다가 모를 일이다. 불교의 윤회설에 따라 그들이 이미 전생에서부터 친구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다. (192쪽)
23) 아무도 자신을 넘어서 볼 수 없다. 이 말은 누구나 타인을 볼 때 그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만큼만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다. 누구나 자신의 지성에 따라서만 타인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5쪽)
24)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러므로 아무 할 일이 없어서 그냥 앉아 있을 때, 지팡이나 나이프, 포크 등 수중에 있는 물건으로 박자에 맞춰 두드리거나 달그락거리지 않는 그 사람이야말로 백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존경할 만한 사림이라 하겠다. 그런 사람은 필경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시각이 사고의 작용을 완전히 대신한다. (196쪽)
25) "누군가를 존경하는 동시에 매우 사랑하기는 어렵다"고 한 라로슈푸코의 말은 적절한 지적이다. 그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랑을 얻으려고 할 것인가, 존경을 얻으려고 할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 왜곡되지 않은 진지한 마음으로 해야지 경멸에 뿌리를 두고 있는 관대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사랑은 주관적이고 존경은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둘 중에서 사랑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7쪽)
26) 대부분의 인간은 극히 주관적이므로 오로지 자신에게만 흥미를 느낄 뿐 그 밖의 것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그 때문에 남이 무슨 말을 하건 즉시 자신부터 생각한다. (...) 그들에게는 오로지 자아만 소중하지 그 밖의 것은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197쪽)
27) 사람들 사이나 사회에서 불합리한 일이 이야기되거나, 문학 작품에서 그런 것이 쓰이고 잘 수용되어 반박되지 않는다고 절망하고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99쪽)
28) 인간은 너그럽게 대하면 버릇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그 때문에 타인을 너무 관대하거나 다정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돈을 꿔달라는 부탁을 거절한다고 해서 친구를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돈을 꿔주면 금방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 "존경하지 않는 자는 존경받는다"는 적절한 이탈리아 속담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실제로 매우 소중한 경우 마치 범죄라도 되는 듯 그런 사실을 그에게 숨겨야 한다. 이것이 썩 유쾌한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실이다. 개도 너무 다정하게 대하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데, 하물며 인간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199-200쪽)
29) 보다 고상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너무나 자주 젊은 시절에 세상인심에 대한 지식과 처세술의 부족을 현저히 드러내기 때문에, 기만당하거나 속아 넘어가기 쉽다. 반면에 본성이 저급한 사람은 훨씬 빨리 세상에 순응할 줄 안다. 그 이유는 경험이 부족하면 선천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어떠한 경험도 선천적인 판단에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자아가 이러한 선천적 판단을 넘겨주지만, 고상하고 탁월한 사람에게는 넘겨주지 앟는다. 본래 고상하고 탁월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상하고 탁월한 사람이 자신의 기준에 따라 남의 사고와 행동을 평가하면 계산이 맞지 않는 것이다. (200-201쪽)
인간의 6분의 5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인 면에서 볼 때 사정상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어야 하는 자가 아니라면, 즉 그들과 굳이 접촉하지 않아도 된다면 애당초 피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이다. (...) 자연은 서투른 글쟁이와 다르기 때문이다. (...) 자연은 그 일을 할 때 셰익스피어나 괴테처럼 한다. (...) 그 인물은 마치 자연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원칙에서 전개된다. 그 원칙에 의해 인물의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때로는 필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악마는 뿔을, 광대는 방울을 달고 돌아다니기를 기대하는 자는 언제나 그들의 먹이가 되거나 그들의 노리개가 될 것이다. (201-202쪽)
인간은 사람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가면을 착용한다. "아무리 사나운 개라도 사람에게 꼬리를 흔드는 법이다"라는 탁월한 이탈리아의 속담을 명심하고 밀랍 먹인 천으로 된 것처럼 그 가면을 존중해야 한다. 어쨌든 새로 알게 된 어떤 사람을 너무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용서하고 잊는 행위는 자신이 한 값진 경험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격이다. (202-203쪽)
어떤 사람이 상황이 변했는데도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이혜관계가 바뀌면 신속하게 신조와 태도를 바꾼다. (...)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어떤 상황으로 옮길 생각을 하는 경우 그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문제에 관해 그의 약속이나 맹세를 믿어서는 안 된다. (204쪽)
30) 어떠한 성격을 지닌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 그냥 맡겨 두고 전적으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 개념과 원칙에 의한 지도가 필요하다. (...) 규칙을 이해하는 일은 이성에 의해 단번에 가능하지만, 실행하는 법을 익히는 일은 연습에 의해 점차 가능해진다. (...) 어떤 허세도 부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허세는 언제나 경멸을 불러일으킨다. (205-206, 207쪽)
31) 인간은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와 달리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결점이나 악덕은 깨닫지 못하고 타인의 결점이나 악덕만 알아챈다. (208쪽)
32) 보다 고상한 부류의 인간은 젊었을 때 인간들 사이의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상황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관계가 관념적인 관계, 즉 신조, 사고방식, 취미, 정신능력 등에 기인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그것이 현실적인 관계, 즉 어떤 물질적인 이해관계에 근거하는 관계임을 깨달을 것이다. (209쪽)
33) 은화 대신 지폐가 유통되는 것처럼, 세상에는 참된 존경과 참된 우정 대신 외적인 과시와 그러한 존경과 우정을 되도록 자연스럽게 모방한 거동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말로 그런 존경과 우정을 받을 만한 인물이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어쨌든 나는 백 가지 과시나 거동보다 충실한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에 더욱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 (210쪽)
34) 지력과 분별력을 보여 주면 사교계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참으로 풋내기에 불과하다! 오히려 압도적인 대다수의 사람은 그런 것을 보고 미움과 원한을 품을 뿐이다. (...) 어떤 사람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정신적으로 월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느끼면 그는 은연중에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열등함과 편협함을 깨닫고 느낄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런 간단한 삼단 논법이 그의 격렬한 미움과 원한, 분노를 일으킨다. 그 때문에 그라시안이 "인기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동물 중에서 가장 아둔한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는 일이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옳다. 지력이나 분별력을 드러내는 것은 간접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의 무능력과 우둔함을 비난하는 셈이다. (...) 그러한 혼란을 은밀히 부추기는 원흉은 질투심이다. (...) 상대는 지성의 영역에서 의지의 영역으로 넘어가는데, 의지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복수 기회를 엿본다는 면에서 만인은 평등해진다. (212-214쪽)
모두 몰래 다른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굴욕을 안겨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기회가 오기만 벼른다. 아무리 겸손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정신적 우월함에 대해서는 거의 용서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사디는 자신의 저서 [굴리스탄]에서 "분별 있는 사람이 무분별한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것보다 무분별한 사람이 분별 있는 사람에게 느끼는 혐오감이 백배 크다는 가실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정신적인 열등함은 진솔한 추천장과도 같다. (...) 남자의 경우에는 정신적 특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고, 여자의 경우에는 미모가 확연히 떨어지는 사람이다. 남이 자기에게 다가오도록 하려면 많은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열등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반면 그런대로 봐줄 만한 소녀가 아주 못생긴 남자를 진심으로 친절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라. (...) 남자들 사이에서는 멍청하고 무식한 사람이, 여자들 사이에는 못생긴 사람이 일반적으로 호감을 사고 인기가 있다. (...) 모든 종류의 정신적 우월함은 자신을 남과 고립시킨디. 사람들은 정신적 우월함을 싫어한다. 그에 대한 구실로 그런 사람에게 온갖 종류의 결점을 갖다 붙인다. (214쪽)
35) 우리가 타인을 신뢰할 때 태만, 사욕, 허영심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스스로 조사하고 감시하고 행하지 않고 남을 신뢰한다면 태만한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에 이끌려 나에게 무언가 털어놓는다면 사욕이 작용한 것이다. 남에게 털어놓는 것이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허영심이 발동한 것이다. (215-216쪽)
36) 중국인이 기본 도덕으로 생각하는 예의에 대해 [윤리학]에서 하나의 근거를 밝혔지만, 여기서 또 다른 근거를 밝히고자 한다. 예의란 도덕과 지성 면에서 빈약한 서로의 성질을 보고도 못 본 체해, 그것을 들추어 내지 말자는 무언의 합의다. 노출되는 경우가 적어 서로 이익이 되는 것이다. 예의는 현명함이고, 따라서 무례는 어리석음이다. 쓸데없이 경솔하게 적을 만드는 것은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미친 짓이다. (...) 예의란 계산용 모조 화폐처럼 명백한 위조 주화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위조 주화를 아낀다는 것은 무분별의 증거이고, 반면에 그것을 인색하지 않게 나누어 주는 것은 분별이기 때문이다. (...) 현실적 이해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예의를 차리는 것은 계산용 모조 화폐 대신 진짜 금화를 넘겨주는 행위와 같다. (...) 예의가 인간에게 하는 작용은 열이 밀랍에게 하는 작용과 같다. (...) 일반적인 예의란 히죽거리며 웃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앞에 떠올리 것이 좋을 것이다. (216-217쪽)
37) 우리는 타인을 자신의 행동거지의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나와 타인의 처지, 상태, 사정이 같지 않고, 성격이 다르면 행동에도 상이한 분위기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해도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충분히 숙고하고 날카롭게 통찰한 후에 자신의 성격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실천적인 면에서도 독창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행하는 일이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218쪽)
38) 남의 견해를 반박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불합리를 하나하나 설명해 생각을 고치려고 한다면 므두셀라만큼 오래 산다 해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는 쉽지만, 사람을 바로잡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듣는 경우라서 화가 나기 시작할 때는 두 사람의 익살 광대가 대화를 나누는 희극 장면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218쪽)
39) 자신의 판단에 대해 남의 신뢰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흥분하지 말고 냉정하게 말해야 한다. 격렬한 행위는 모두 의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람은 본래 냉정한 성격을 띤 인식이 아닌 이러한 의지 탓에 그런 판단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근본적인 것은 의지고, 인식은 단지 부차적이며 부가된 것에 불과하므로 의지의 흥분이 단순히 판단에서 생겨났다기보다는 오히려 판단이 흥분된 의지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218-219쪽)
40)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가 있더라도 자화자찬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허영심은 흔히 볼 수 있지만, 공적은 흔히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9쪽)
41) 어떤 사람이 거짓말한다는 의심이 들면 믿는 척하는 태도를 보여라. 그러면 대담해진 그는 더욱 심한 거짓말을 해서 결국 들통 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이 숨기고 싶어 하는 진실의 일부를 자신도 모르게 발설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을 때는 그것을 믿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여라. 그러면 나의 반박에 자극받은 상대방은 모든 진실을 하나하나 발설 할 것이다. (219쪽)
42)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는 모두 비밀로 간주해야 하고, 친한 사람에게도 그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전혀 모르게 놓아두어야 한다. 아무리 무해한 문제라도 그들이 알면 나중에 뜻하지 않게 불리한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별력을 드러낼 때는 말보다 침묵이 더 낫다. 침묵은 현명함의 문제고, 말은 허영심의 문제다. (220쪽)
43) 남에게 사기를 당해 빼앗긴 돈이 가장 유용하게 쓴 것이다. 직접적으로 현명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221쪽)
44) 될 수 있는 한 누구에게도 적의를 품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임을 확신하고 사람들마다의 행동을 가슴에 잘 새겨 기억해 두어야 한다. (...) 그렇게 하면 어리석은 친밀감과 어리석은 우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마라"라는 말에는 모든 처세술의 절반이 담겨 있다.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아무것도 믿지 마라"에는 다른 절반이 담겨 있다. (222쪽)
45) 분노나 미움을 말이나 표정으로 드러내는 것은 무익하고 위험하고 현명치 못하고 어리석으며 천박하다. 분노나 미움은 오로지 행위로만 드러내야 한다. (222쪽)
46) "격한 어조로 말하지 마라"라는 처세가의 오랜 원칙은 자신이 한 말의 해석을 타인의 분별력에 맡기라는 뜻이다. (...) 경우에 따라서는 예의 바른 태도와 친절한 어조로 말하면 무례한 내용이더라도 직접적인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222쪽)
4.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그 운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
47)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더라도 언제나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오두막이든 궁정이든, 수도원이든 군대든 어디서나 본질적으로 같은 삶이다. (223쪽)
48) "세상을 지배하는 세 가지 힘이 있다"는 옛 사람의 말은 매우 적절하다. 그것은 현명함과 강함과 운이다. 내 생각에는 운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 스페인의 속담이 이러한 운의 힘을 더없이 탁월하게 표현한다. "네 자식에게 행운을 주고 바다에 내던져라." 어쩌면 우연은 되도록 일의 결정을 맡겨서는 안 되는 악한 힘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 앞으로도 분에 넘치는 많은 선물을 겸허하게 받을 수 있다는 즐거운 희망을 품어도 된다고 아주 명료하게 보여 주는 유일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우연이다. 우연은 자신의 은총이나 자비에 비해 온갖 공적은 무력하고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깨우쳐 주는 굉장한 솜씨를 터득하고 있다. (223-224쪽)
49) 언제나 시간의 작용과 사물의 덧없음을 염두에 두어,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반대를 즉각 상상해 보는 것이 좋다. 행복에는 불행을, 우정에는 적의를, 좋은 날씨에는 나쁜 날씨를, 사랑에는 미움을, 신뢰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때는 배신과 후회를 생생하게 그려 보고, 반대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언제나 사려 깊게 행동해서 그다지 쉽게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세상을 사는 참된 지혜의 영속적인 원천이 될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시간의 작용을 예견할 것이다. (227쪽)
* '교차적 접근'을 말한 것임. 이런 안목은 손자에게도 보임([손자] 제9편 구변편 智者之慮 必雜於利害). (박희택)
우연은 모든 인간사에 커다란 유희 공간을 갖고 있어서, 우리가 멀리서 닥쳐올 것 같은 위험에 대해 즉시 희생을 치러 예방하려고 하는 경우, 일이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이러한 위험이 가끔 사라지기도 한다. (...) 그 때문에 우리는 예방책을 강구할 때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연에도 의지하고, 마치 검은 먹구름처럼 금방 지나갈 것으로 기대하고 여러 위험에 대담하게 맞서야 한다. (227쪽 주)
* '비인과적 연기'에 대한 언명임. (박희택)
* 황동규의 시집에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3)이 있음. (박희택)
사람들은 이러한 원인에 의지해,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원인이 그러한 결과를 야기한 것이니, 그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 전제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 언제나 모두 함께 그런 잘못을 범한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그들이 재난을 당할 때도 언제나 함께 당하는 반면,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경우 혼자 재난을 당한다. 덧붙여 말하면 이런 점에서 오류는 결과로부터 근거를 추론하는 데서 생긴다는 나의 명제가 확증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참조). (228쪽)
* '비인과적 연기'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음. (박희택)
50) 평범한 두뇌와 영리한 두뇌 사이에는 일상생활에서 매우 번번히 나타나는 특정적인 차이가 있다. 평범한 두뇌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숙고하고 평가할 때 언제나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 일에 대해서맡 염려하는 반면, 영리한 두뇌는 혹시 일어날 수도 있는 일까지 숙고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 년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 분만에 일어날 수 있다"라고 스페인 속담이 말하는 점을 염두에 둔다. 여기서 언급한 차이는 물론 당연하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통찰하려면 분별력이 필요하지만, 일어난 일을 통찰하는 데는 감각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229-230쪽)
51) 어떤 돌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기뻐하거나 크게 슬퍼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편으로는 모든 사물에 변화 가능성이 있어서 언제라도 사건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무엇이 유리하고 불리한지 잘못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거의 누구나 크게 슬퍼했던 일이 나중에 최상의 일로 드러난 경우나 크게 기뻐했던 일이 커다란 고통의 원천이 되었던 경우가 한 번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권한 신조를 셰익스피어는 멋진 말로 표현했다. "갑작스러운 기쁨이나 슬픔을 숱하게 맛보았으니, 이젠 그런 일을 당한다 해도 처음부터 담담하게 대한다([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 제3막 2장)." (230쪽)
내가 "의지의 자유에 대한 현상 논문"에서 그 진리의 궁극적 근거를 추론해 확인한 것으로, 다시 말해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아무리 큰 것에서 아무리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다"라는 진리를 확신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재난을 의연하게 견딜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가피하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곧 순응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사실을 인식하면 인간은 모든 일을, 심지어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일어난 일조차 마치 아주 잘 알려진 원칙에 따라 완전히 예상하고 있던 대로 일어난 것처럼 모든 일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선 내가 [의지와 표상으서의 세계] 제1권에서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점을 인식할 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작용에 대해 말했던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232쪽)
* '비인과적 연기'의 '우연과 필연'에 관한 고찰이라 할 수 있음. (박희택)
52) 세상 사람들이 흔히 운명이란 부르는 것은 대체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 때문에 [일리아드](제23권 313행 이하)에서 호메로스가 현명한 숙고를 권하는 멋진 대목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나쁜 행동은 저세상에 간 뒤에 죄의 대가를 치르겠지만, 어리석은 행동은 가끔 관대한 처분을 받기는 해도 이 세상에서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233쪽)
53) 우리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특성으로 현명함 다음가는 것은 용기다. 물론 이 두 가지 특성을 스스로 얻을 수는 없고, 현명함은 어머니한테서, 용기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는다. 그렇지만 의지와 훈련에 의해 가지고 있는 현명함과 용기를 키울 수는 있다. (...) 전체 인생이 투쟁이고,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리는 싸움을 벌인다. 따라서 "인간은 검을 뽑아 들어야만 이 세상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손에 무기를 든 채 죽는 것이다"라는 볼테르의 말은 정당하다고 하겠다. (234쪽)
제6장 나이의 차이에 대하여
우리는 평생에 걸쳐 현재만을 소유할 뿐 결코 그 이상은 아니다. 같은 현재인데 차이가 나는 점은 처음에는 우리 눈앞에 긴 미래가 펼쳐져 있지만, 마지막이 되면 긴 과거가 우리의 뒤에 보인다는 사실과, 우리의 성격은 변하지 않지만 기질은 여러 번 친숙한 변화를 겪어 매번 현재의 색조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237쪽)
* '현재'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은 '기질' 변화와 관계가 있다는 시각임. 다만 쇼펜하우어가 말한 '성격'과 '기질'의 관계는 재론을 요한다고 하겠음. 왜냐하면 성격은 기질의 표현이기 때문임. (박희택)
* 147쪽과 통함. (박희택)
모든 사물은 보기엔 근사하지만 그것으로 존재하기는 끔찍하다. 그런데 앞에서 기술한 것에 따르면 유년기에는 사물을 존재의 측면인 의지의 측면에서보다 보는 것의 측면, 그러니까 표상의 측면, 객관성의 측면에서 훨씬 더 많이 안다. 그런데 표상의 측면이 사물의 보다 바람직한 측면이고 주관적이고 끔찍한 측면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어린 지성은 현실과 예술이 보여 주는 모든 형상을 행복이 넘치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것을 바라보고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훨씬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눈앞의 세계는 마치 에덴동산처럼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태어난 고향인 아르카디아다. (240쪽)
청년기가 슬프고 불행해지는 이유는 인생에서 행복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전제를 바탕으로 행복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환멸이 생기고 거기서 불만이 생겨난다. (241쪽)
인생의 전반기를 지배하는 성격이 행복에 대한 충족되지 않은 동경이라면, 후반기를 지배하는 성격은 불행에 대한 우려다. 인생의 후반기가 되면 온갖 행복이란 환영과 같은 반면, 고뇌는 현실적이라는 인식이 다소나마 분명하게 드러난다. (242쪽)
뛰어난 장점의 정도에 따라 다소 혼자 고립되어,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갖는다. 청년기에는 자주 인간세계에서 버림받은 느낌을 받는 반면, 노년기에는 인간세계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는다. (242-243쪽)
성숙한 인간은 무엇보다 사물을 매우 단순하게 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청년이나 소년의 눈에는 스스로 만들어 낸 변덕스러운 생각, 인습적인 편견, 기이한 환상으로 이루어진 환영이 진짜 세계를 뒤덮거나 일그러뜨린다. 경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청년기에 만들어진 환영이나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243쪽)
인생이란 수놓아진 천에 비유할 수 있다. 인생의 전반기에는 누구나 자수의 겉면만 보지만, 노년기에는 그 이면을 볼 수 있다. 이면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지만 실이 어떻게 꿰매져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도움이 된다. (244쪽)
산 너머 반대편 기슭에 있는 죽음은 산을 오를 때는 보이지 않는다. 청년기에 명랑하고 삶의 의욕에 차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산의 정상을 넘어서면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던 죽음이 실제로 눈에 보인다. 그러면 곧바로 삶의 활기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삶의 의욕도 감퇴해 청년기의 오만함이 물러가고 음울한 근엄함이 지배해, 얼굴에도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가 젊을 때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든 인생이란 무한하다고 생각해, 시간도 그런 식으로 다루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을 경제적으로 이용한다. 노년이 되면 하루를 보낼 때마다 교수대로 한 발짝씩 끌려가는 범죄자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245-246쪽)
노년기는 행동과 활동의 시기인 반면, 청년기는 본래적인 파악과 인식의 시기다. 청년기에는 관찰이, 노년기에는 사고가 지배한다. 그 때문에 청년기에는 시문학에 빠지고, 노년기에는 철학에 빠져든다. 실제로도 청년기에는 관찰된 것과 그것이 주는 인상에 의해 규정되고, 노년기에는 사고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252쪽)
인간의 성격이나 심정뿐만 아니라 지성, 즉 두뇌도 근본 특성으로 보면 선천적이지만 성격이나 심정이 변하듯이 결코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변화를 겪는다. 그런 변화는 대체로 규칙적으로 일어난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한편으로는 지성이 육체적인 토대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성이 경험적 소재를 지니기 때문이다. (254쪽)
우리 인생의 첫 40년은 본문을 제공하고, 그다음 30년은 그것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지닌다. 이 주석은 본문에 들어 있는 도덕과 온갖 정교한 맛 말고도 본문의 참된 의미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법을 가르친다. 인생의 끝 무렵은 가면을 벗는 가장무도회의 끝 무렵과 같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접촉해 온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 성격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행위가 결실을 맺고, 그동안 거둔 성과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며, 온갖 환영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일은 인생의 끝 무렵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특히 세계, 즉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목표와 목적을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점이다. (255쪽)
노년기의 삶은 명상적인 색조를 띤다. 인식이 자유로워지고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란 그 자체로는 고통이 없는 것이기에 인식이 의식 속에서 우세할수록 의식이 더욱 행복해진다. 열정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 여러 향락을 맛볼 수 없다고 해서 노년을 탄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갖 향락은 소극적인 성질을, 고통은 적극적인 성질을 띠고 있음을 곰곰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256쪽)
청년기의 고유한 특징은 우울함과 비애이고, 노년기의 특징은 명랑함인 것이 확실하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청년기에는 아직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심지어 그의 종노릇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 악마는 청년기에 쉽게 자유로운 시간을 허용하지 앟는 동시에 인간을 노리거나 위협하는 거의 온갖 재앙의 직간접적인 장본인이다. 하지만 노년기는 오랫동안 몸에 채우져 있던 족쇄에서 풀려나 이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의 명람함을 지니고 있다. (256-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