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기지 둘레길(과거 전환의 길) 걷기
◇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 : 용산구 효창동 286-7
- 이봉창 의사가 살던 곳에 세운 효창동의 역사울림관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은 용산에서 나고 자란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가 살던 곳이다.
이 울림관은 2020년에 지상 1층, 연면적 70㎡ 규모로 전통 목구조에 기와지붕을 올렸으며, 전시실, 사무실, 툇마루를 갖췄다.
전시실로 들어서면 우선 김영원 작가(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의 작품인 이 의사의 흉상이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은 김호연 빙그레 회장(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용산구청에 기증했다.
전시는 흉상 왼쪽부터 둘러보면 된다. 이 의사의 생애에 맞춰 ‘용산구 효창동에서 이봉창과 마주하다’, ‘거사를 준비하며’, ‘다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로 주제를 설정했다.
지도와 사진, 그래픽에 그치지 않고, 키오스크(무인 종합정보안내시스템), 증강현실(VR) 등 최신 전시기법을 도입한 게 특징이다. 이 의사가 직접 쓴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의거자금 요청 편지’ 등 사료 · 유품(복제본)도 함께 전시했다.
전시를 둘러보고 나오면 건물 밖의 부지는 ‘이봉창 역사공원’으로 꾸몄다. 배롱나무, 사과나무, 매화나무, 소나무 등 수목과 초화류를 심고, 공원 경계 일부에 전통 한옥식 담장을 둘렀다. 역사울림관의 툇마루, 벤치에서 조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봉창 의사는 용산을 대표하는 독립투사이다. 1901년 8월 10일, 경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현 원효로2가)에서 태어났으며, 얼마 후 금정(현 용산구 효창동) 118번지로 이사했다.
이 의사가 13세 되던 해에 가정형편이 기울어서. 이듬해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약국 등에서 일을 하며, 일본어를 배웠다. 1919년 용산철도국에 임시 인부로 들어가 역부(驛夫)가 되었는데,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24세 때 사직하였다. 이때 이 의사는 금정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 이 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을 쓰고, 철공소 직공 생활 등을 하며 지냈다. 1928년에 일왕 즉위식을 보러 교토에 갔을 때 일본경찰이 이 의사 몸수색을 하더니 한글과 한문으로 쓴 편지를 소지하고 있는 이유만으로 9일 간 유치장에 가두었다.. 그는 오사카, 도쿄시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본 사회에 적응하려 했지만 일본인들의 차별 대우를 받자, 조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 의사는 1930년 말 중국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았다. 이듬해 5월, 이 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폭탄을 구해주면 일본에 가서 일왕을 살해하겠다”라고 결심을 밝히자, 김구 선생이 “폭탄을 구해주겠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1931년 12월 31일, 이 의사는 김구 선생이 주관한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었다. 이 의사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가슴에 선서문을 달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기념 촬영을 했다.
역사적인 동경 거사는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에 벌어졌다. 도쿄 경시청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이 의사가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나오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하여 이 의사는 현장에서 스스로 체포됐다. 이후 1932년 9월 30일, 일본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31세에 처형당하였다. 유해는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됐다.
이봉창 의사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온 건 광복 후인 1946년 5월 15일이다. 이 의사는 윤봉길 ·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환국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은 7월 6일, 이봉창 의사 등 삼의사(三義士) 국민장을 치른 후에 효창공원 내의 삼의사 묘역에 이들을 안장하였다.
◇ 효창공원 : 용산구 효창원로 177-18 일대(사적 제330호)
- 문효세자 등의 왕족의 묘역인 효창원을 공원으로 조성한 일본제국주의
효창공원은 본래 효창원(孝昌園)이다. 효창원은 정조대왕의 장남인 문효세자(文孝世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宜嬪成氏)와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淑儀朴氏) 및 그의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가 안장되었던 곳이다. 문효세자는 세자 책봉(冊封)까지 받았으나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으므로 이곳에 원(園)을 조성하고, 효창원으로 칭하였다.
일본인들이 이 효창원에 관심을 갖고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군이 출동하자 일본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오오지마 소장(大島少將)의 혼성여단(混成旅團) 3,000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킨 후 조선정부의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효창원 앞의 만리창(萬里倉)에 주둔하였다. 일본군은 이곳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하고 청일전쟁을 치르는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부는 조선인의 정신적 말살을 위해 1924년, 효창원의 일부(81,460평)를 토지와 수목을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이왕가(李王家)로부터 15년간 무상 임대를 받았다. 그리고 이 해 6월에 이곳을 공원용지로 지정한 뒤 순환도로, 공중변소 등의 설비를 하여 일반인의 유람지로 조성하였다. 일제는 1940년에 이곳을 총독부 고시 제208호로 공원으로 지정했다.
효창공원은 소나무숲이 울창하여 경치가 뛰어난 데다가 효창원이 있었던 곳이고, 삼의사 묘역과 임시정부요인 묘소가 자리하고 있으므로 정부에서 사적 제330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문효세자를 비롯한 효창원에 자리한 왕실의 묘소는 공원 관리를 위해 8.15광복을 전후하여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장하였다.
◇ 옛 경성 연합군 포로수용소 : 용산구 청파로 263(현 신광여중고)
- 일제말기에 영국군과 호주군 포로수용소였던 청파동 방직공장 자리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1942년 9월 25일에 이와무라(岩村) 제사소(製絲所)에서 방직공장이었던 청파동 4층 건물을 경성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이 수용소에는 태평양전쟁(1941∼1945) 때 싱가포르 등에서 벌어진 말레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된 영국군과 호주군들이 수감되었다. 이 포로수용소는 당시 대륙침략의 전초기지이자 병참기지인 용산 일본군사령부 바로 옆에 위치했다.
이곳을 경성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택한 것은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포로를 '방패막이'로 일본군의 군사 · 철도기지를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영국 · 호주군 포로 수백명은 약 3년간 이곳 이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 인근의 일본군 육군창고(현 캠프킴 부지), 경성역(현 서울역), 한강대교 등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포로들이 풀려나자 경성 포로수용소는 학교 부지로 용도가 바뀌었다. 1946년에 이곳에 들어선 신광기예초급중학교가 지금의 신광여중고의 전신이다.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건물은 2011년에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민주인권기념관 : 용산구 한강대로 71길 37(갈월동)
-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있었던 ‘남영동 대공분실’ 터
현재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對共分室 : 경찰청 보안국이 설치했던 기관)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역사적 장소이다. 이곳은 전두환 정권 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었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있었다.
1976년에 준공된 이 기념관은 원래 경찰청 보안3과로 사용되다가 세칭 ‘남영동 대공분실’로 사용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이다. 원래 5층 건물이었는데, 1983년에 2개 층이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7층이 되었다.
이 기념관은 2005년 7월~2018년 12월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이다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건물 운영권을 이전했다. 경찰청 인권센터는 이태원의 구 정보분실로 이전했다.
민주화 운동가를 고문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던 이 곳은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위장 명칭을 사용했다
2018년 6월 10일에 정부는 김근태 의장이 고문당하고,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남영동 대공분실에 민주인권기념관을 건립할 것을 발표하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비롯하여 공공기관, 인권단체들, 고문 피해자와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공간을 함께 만들고 키워갈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고 하였다.
이 기념관은 2021년 2월 말까지 개방하였으나 3월 1일부터 개축하기 위해 휴관에 들어갔다. 개축 후인 2023년 6월에 (가칭)민주인권기념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다.
◇ 용산공원 갤러리 : 용산구 한강로1가 1-1
- 서울시와 주한미군의 공동 역사전시관이자 시민 소통 공간으로 개관한 갤러리
서울시는 2018년 11월에 용산기지 캠프 킴(Camp Kim) 부지 내의 미군위문협회(이하 USO)로 활용하던 건물을 서울시 - 주한미군의 공동 역사전시관이자 용산공원 시민 소통공간인 ‘용산공원 갤러리’로 조성하였다. 서울시와 주한미군의 양측의 합의로 시민에 개방하는 것은 114년 만에 처음이다. 앞으로 편의공간과 자료실 등을 포함한 소통공간을 추가로 개방하기로 하였다.
용산공원 갤러리는 용산기지 반환 전에 기지의 장소적, 문화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전시관과 용산공원의 미래상을 시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려보는 소통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갤러리에는 서울역사박물관, 국가기록원, 개인 등이 소장한 사진, 지도, 영상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온전한 용산공원 조성애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이 건물은 적벽돌을 쌓아 올린 외벽에 시멘트 기와를 얹은 단층 건물인데 대한제국기 1908년에 일본 육군 창고 사무소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6.25전쟁 후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위문협회(USO)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