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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十五回 樂羊子怒餟中山羹 西門豹喬送河伯婦
제 85회: 악양자가 노하여 중산의 국을 마시고, 서문표가 교활하게 하백의 부인을 보내다.
话说,赵无恤被豫让三击其衣,连打三个寒噤。豫让死后,无恤视衣砍处,皆有血迹,自此患病,逾年不痊。无恤生有五子,因其兄伯鲁为己而废,欲以伯鲁之子周为嗣,而周先死,乃立周之子浣为世子。无恤临终,谓世子赵浣曰:“三卿灭智氏,地土宽饶,百姓悦服。宜乘此时,约韩、魏三分晋国,各立庙社,传之子孙。若迟疑数载,晋或出英主,揽权勤政,收拾民心,则赵氏之祀不保矣。”言讫而瞑。赵浣治丧已毕,即以遗言告于韩虎。时周考王之四年,晋哀公薨,子柳立,是为幽公。韩虎与魏、赵合谋,只以绛州、曲沃二邑,为幽公俸食,余地皆三分入于三家,号曰三晋。幽公微弱,反往三家朝见,君臣之分倒置矣。
(이하 4단은 蔡元放 본에서 인용) 한편, 조무휼(趙無恤)은 예양이 그의 도포를 칼로 세 번 내리치자 몸서리를 쳤다. 예양이 죽은 후에 무휼은 도포에 칼로 찔린 자리마다 핏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이후로 병이 들어 해를 넘겨도 낫지 않았다. 조무휼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으나, 그의 형인 백로(伯魯)가 자기 때문에 적자 자리에서 밀려난 것 때문에 백로의 아들 조주(趙周)를 적자로 삼았다. 그러나 조주가 무휼보다 먼저 죽어서 이에 조주의 아들 조완(趙浣)을 세자로 삼았다. 무휼이 임종할 때 세자 조완(趙浣)에게 말하기를, “한위조(韓魏趙) 삼경(三卿)이 지씨를 멸하여 땅이 넓어져서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다. 마땅히 이때를 이용하여 한씨와 위씨 두 집안과 상의하여 각기 종묘사직을 따로 세우고 그 영토를 자손들에게 전해주자고 약속해야 한다. 만약 주저하면서 여러 해를 보내면 진(晉)나라 공실에서 혹 영명한 군주가 나타나 권력을 휘두르고 정치에 힘써 민심을 수습하면, 조씨의 제사는 보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눈을 감았다. 조완이 장례를 치른 후에 즉시 유언을 한호에게 알렸다. 그때가 주고왕(周考王) 4년이었다. 진애공(晉哀公)이 죽고 아들 유(柳)가 자리를 이었는데 이가 진유공(晉幽公)이다. 한호가 위조(魏趙) 두 가문과 모의하여 단지 강주성(絳州城)과 곡옥성(曲沃城) 두 고을만을 진유공의 식읍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진(晉)나라 땅은 셋으로 나누어 세 집안의 영토로 삼았다. 그래서 삼진(三晋)이라 불렀다. 진유공은 세력이 미약하여 오히려 세 집안을 찾아다니며 조현하니, 진(晉)나라의 군신 관계는 거꾸로 되었다.
再说,齐相国田盘,闻三晋尽分公家之地,亦使其兄弟宗人,尽为齐都邑大夫,遣使致贺于三晋,与之通好。自是列国交际,田、赵、韩、魏四家,自出名往来。齐、晋之君,拱手如木偶而已。时周考王封其弟揭于河南王城,以续周公之官职。揭少子班,别封于巩。因巩在王城之东,号曰东周公,而称河南曰西周公,此东西二周之始。考王薨,子午立,是为威烈王。威烈王之世,赵浣卒,子赵籍代立。而韩虔嗣韩,魏斯嗣魏,田和嗣田,四家相结益深,约定彼此互相推援,共成大事。威烈王二十三年,有雷电击周之九鼎,鼎俱摇动。
한편, 제나라 상국 전반(田盤)은 삼진이 진(晉)나라 공실의 땅을 모두 나누어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역시 형제와 종족들을 제나라의 모든 고을의 대부로 삼았다. 전반은 삼진에 사자를 보내어 축하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때부터 열국은 전(田), 조(趙), 한(韓), 위(魏) 네 집안과 교제하면서 스스로 이름을 사용하여 왕래했다. 제나라와 진(晉)나라의 군주는 두 손을 모은 나무 인형일 뿐이었다. 그때 주고왕(周考王)은 그의 동생 게(揭)를 하남(河南)의 왕성(王城)에 봉하여 주공(周公)의 관직을 잇도록 하고, 게의 어린 동생 반(班)을 다시 왕성의 동쪽 공(鞏) 땅에 봉했다. 공 땅은 왕성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왕자 반을 동주공(東周公)이라 부르고, 하남의 왕성에 봉해진 게를 서주공(西周公)이라 불렀다. 이것이 주나라가 동과 서로 나누어지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주고왕(周考王)이 죽고 그의 아들 오(午)가 뒤를 이었다. 이가 위열왕(威烈王)이다. 주위열왕 때(17년)에 조완(趙浣)이 죽고 그의 아들 조적(趙籍)이 군위를 이었다. 한건(韓虔)이 한(韓)의 군위를 이었고, 위사(魏斯)가 위(魏)의 군위를 이었으며, 제나라의 전화(田和)가 전씨의 군위를 이었다. 네 집안은 더욱 긴밀하게 맺어져서 피차 상호 간에 서로 도와서 함께 큰일을 이루기로 약속했다.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 주나라의 구정(九鼎 ; 우왕이 만든 아홉 개의 솥)이 벼락을 맞아 요동을 쳤다.
三晋之君,闻此私议曰:“九鼎乃三代传国之重器,今忽震动,周运其将终矣。吾等立国已久,未正名号,乘此王室衰微之际,各遣使请命于周王,求为诸侯。彼畏吾之强,不敢不许。如此,则名正言顺,有富贵之实,而无篡夺之名,岂不美哉?”于是各遣心腹之使,魏遣田文,赵遣公仲连,韩遣侠累,各赍金帛及土产之物,贡献于威烈王,乞其册命。威烈王问于使者曰:“晋地皆入于三家乎?”魏使田文对曰:“晋失其政,外离内叛,三家自以兵力征讨叛臣,而有其地,非攘之于公家也。” 威烈王又曰:“三晋既欲为诸侯,何不自立?乃复告于朕乎?”赵使公仲连对曰:“以三晋累世之强,自立诚有余,所以必欲禀命者,不敢忘天子之尊耳。王若册封三晋之君,俾世笃忠贞,为周藩屏,于王室何不利焉?”
삼진의 군주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은밀히 상의하기를, “구정은 곧 세 왕조(夏商周)가 나라를 전하는 중요한 보물인데, 지금 갑자기 진동했다니 이것은 주나라의 기운이 장차 끝난다는 것이오. 우리가 나라를 세운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 이름이 없으니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이때를 이용하여 각각 사자를 보내 주나라 위열왕에게 제후로 봉해달라고 요구하면, 그는 우리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이와 같이 하면 국호도 바르게 되고 말도 순조로우며, 부귀의 실질을 차지하여 찬탈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아도 되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소?” 했다. 이에 각각 심복을 사자로 보내니, 위씨는 전문(田文)을, 조씨는 공중련(公仲連)을, 한씨는 협루(夾累)를 사자로 삼아 각기 황금과 비단 및 토산물을 위열왕에게 바치고 제후로 책봉해 달라고 청했다. 위열왕이 사자들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진(晉)나라 땅은 모두 세 집안에 들어갔는가?” 하니, 위씨의 사신 전문이 대답하기를, “진(晉)나라가 정치를 잘못하여 안팎으로 이반하여 세 집안이 자기의 병력으로 반란군을 토벌하여 그 땅을 나누어 가졌을 뿐 공실의 땅을 가로채지는 않았습니다.” 했다. 위열왕이 또 말하기를, “삼진(三晉)이 이미 제후가 되고 싶으면 어찌하여 자립하지 않고 다시 나에게 고하는가?” 하니, 조씨의 사신인 공중련이 대답하기를, “삼진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강해져서 참으로 자립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이렇게 아뢰어서 명령을 받고자 하는 것은 감히 천자의 존엄함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왕께서 만약에 삼진의 군주들을 제후로 책봉해 주신다면 대를 이어 돈독한 마음과 충성과 절개를 바쳐 주나라의 변방을 지킬 것이니 어찌 왕실에 이로움이 없겠습니까?” 했다.
威烈王大悦,即命内史作策命,赐籍为赵侯,虔为韩侯,斯为魏侯,各赐黼冕圭璧全副。田文等回报,于是赵、韩、魏三家,各以王命宣布国中。赵都中牟,韩都平陽,魏都安邑,立宗庙社稷。复遣使遍告列国,列国亦多致贺。惟秦国自弃晋附楚之后,不通中国,中国亦以夷狄待之,故独不遣贺。未几,三家废晋靖公为庶人,迁于纯留,而复分其余地。晋自唐叔传至靖公,凡二十九世,其祀遂绝。髯翁有诗叹云:「六卿归四四归三,南面称侯自不惭。利器莫教轻授柄,许多昏主导奸贪。」又有诗讥周王不当从三晋之命,导人叛逆。诗云:「王室单微似赘瘤,怎禁三晋不称侯?若无册命终成窃,只怪三侯不怪周。」
위열왕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내사(内史 ; 왕명 전달 담당)에게 임명장을 쓰게 하여 조적(趙籍)을 조후(趙侯)로 삼고, 한건(韓虔)을 한후(韓侯)로 삼으며, 위사(魏斯)를 위후(魏侯)로 임명하여, 각각 예복과 예관, 구슬과 벽옥, 그리고 부차적 물품을 하사했다. 전문 등이 돌아와 조, 한, 위 삼가에 보고하니, 각각 왕명을 나라 안에 선포했다. 조나라는 중모(中牟)에 도읍하고, 한나라는 평양(平陽)에 도읍했으며, 위나라는 안읍(安邑)에 도읍하여 종묘와 사직을 세웠다. 다시 사신을 열국에 두루 보내어 제후가 되었음을 알리니, 열국 제후들도 역시 축하를 보냈다. 다만 진(秦)나라만 진(晉)나라를 버리고 초나라에 붙은 후에 중원과 통하지 않았고, 중원의 제후국들도 역시 진(秦)나라를 오랑캐로 여겼기 때문에, 홀로 축하를 보내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서 세 집안은 진(晉)나라 정공(靖公)을 폐하여 서민으로 만들고, 순류(純留)에 옮겨 살게 하고 다시 그 남은 땅을 세 집안이 나누어 가졌다. 진(晉)나라는 당숙우(唐叔虞)에서 정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29대 만에 그 제사가 끊어졌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한탄하기를, “육경이 사경이 되고 다시 사경이 삼경으로 되더니, 남면(南面)하여 제후라 칭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날카로운 무기를 경솔하게 권력자에게 주지 말아라! 허다한 혼군들이 간사하거 탐욕스런 신하들을 불러들였노라!” 했다. 또 시를 지어, 주왕이 삼진의 요구에 따르지 말아야 하는데 제후로 임명한 것은 사람들에게 반역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왕실의 힘은 미약해져서 단지 혹에 불과했으니, 어찌 삼진이 제후를 칭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만약 주왕이 임명하지 않았다 해도 도적질했을 것이니, 삼진의 제후들을 탓해야지 주왕을 탓하지 말아라.” 했다. (이상 蔡元放 본에서 인용 보충)
卻說,三晉之中,惟魏文侯斯最賢,能虛心下士。時孔子高弟卜商,字子夏,教授於西河,文侯從之受經。魏成薦田子方之賢,文侯與之為友。成又言:「西河人段干木,有德行,隱居不仕。」文侯即命駕車往見。干木聞車駕至門,乃踰後垣而避之。文侯嘆曰:「高士也!」遂留西河一月,日日造門請見,將近其廬,即憑軾起立,不敢倨坐。干木知其誠,不得已而見之。文侯以安車載歸,與田子方同為王賓。四方賢士,聞風來歸。又有李克、翟璜、田文、任座一班謀士,濟濟在朝,當時人才之盛,無出魏右。秦人屢次欲加兵於魏,畏其多賢,為之寢兵。
한편, 삼진의 군주 중에서 위문후(魏文侯) 사(斯)가 가장 어질어 능히 허심탄회하게 선비들을 공경했다. 그때 공자의 제자인 복상(卜商)은 자가 자하(子夏)인데 서하(西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위문후가 자하를 찾아가 경서를 배웠다. 동생 위성(魏成)이 전자방(田子方)이 어질다고 천거하자 위문후가 그와 친구가 되었다. 위성이 다시 말하기를, “서하 사람 단간목(段干木)은 덕행이 있으나 은거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위문후가 즉시 어가를 매게 하여 찾아가서 만나보려고 했다. 단간목은 위문후의 수레가 문에 이르자 뒷담을 넘어 피해 버렸다. 위문후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고고한 선비로구나!” 하고, 서하에 한 달을 머물며 매일 단간목의 집을 찾아가, 만나기를 청하려고 그 오막살이가 가까워지면 문후는 즉시 일어나서 수레의 가로 지름대를 잡고 감히 걸터앉지 않았다. 단간목이 위문후의 정성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위문후를 만났다. 위문후가 단간목을 편안한 수레에 태워 안읍(安邑)으로 돌아와 전자방과 같이 왕의 빈객으로 모셨다.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풍문을 듣고 위나라에 몰려들었다. 또한 이극(李克), 적황(翟璜), 전문(田文), 임좌(任座) 같은 모사들이 조정에 많이 있어서 당시 인재들이 성하기로는 위나라보다 나은 데가 없었다. 진(秦)나라 사람이 여러 번 위나라에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려고 했으나 위나라에 어진 인물이 많음을 두려워하여 그 때문에 침략하지 못했다.
文侯嘗與虞人期定午時,獵於郊外。其日早朝,值天雨,寒甚,賜群臣酒,君臣各飲,方在浹洽之際,文侯問左右曰:「時及午乎?」答曰:「時午矣。」文侯遽命撤酒,促輿人速速駕車適野。左右曰:「雨,不可獵矣,何必虛此一出乎?」文侯曰:「吾與虞人有約,彼必相候於郊,雖不獵,敢不親往以踐約哉?」國人見文侯冒雨而出,咸以為怪,及聞赴虞人之約,皆相顧語曰:「我君之不失信於人如此。」於是凡有政教,朝令夕行,無敢違者。
위문후가 일찍이 우인(虞人 ; 산지기)과 날짜를 정해 오시(11시에서 1시경)에 교외에서 사냥하기로 약속했다. 그날 이른 아침에 마침 비가 내려 매우 추웠다. 위문후는 여러 신하에게 술을 내리고 마셨는데, 바야흐로 거나해진 때에 위문후가 좌우에 묻기를 “시간이 오시에 이르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이 오시입니다.” 했다. 위문후가 황급히 술자리를 파하게 하고 마부를 재촉하여 급히 수레를 몰아 들판으로 달려갔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비가 와서 사냥할 수 없습니다. 하필 이렇게 헛걸음해서 나가십니까?” 하니, 위문후가 말하기를, “나는 산지기와 약속을 했다. 그는 틀림없이 교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비록 사냥하지 못해도, 감히 친히 가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야지 않겠는가?” 했다. 나라 사람들이 위문후가 비를 무릅쓰고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 군주는 이처럼 사람과의 신의를 잃지 않으신다.” 하고, 이에 무릇 정치와 교화에 있어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행해졌으며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다.
卻說,晉之東,有國名中山,姬姓,子爵,乃白狄之別種,亦號鮮虞。自晉昭公之世,叛服不常,屢次征討,趙簡子率師圍之,始請和,奉朝貢。及三晉分國,無所專屬。中山子姬窟,好為長夜之飲,以日為夜,以夜為日,疏遠大臣,狎昵群小,黎民失業,災異屢見。文侯謀欲伐之。魏成進曰:「中山西近趙,而南遠於魏,若攻而得之,未易守也。」文侯曰:「若趙得中山,則北方之勢愈重矣。」翟璜奏曰:「臣舉一人,姓樂名羊,本國穀邱人也。此人文武全才,可充大將之任。」
한편, 진(晉)나라의 동쪽에 중산국(中山國)이 있었는데 군주의 성은 희(姬)이고 작위는 자작으로 백적(白狄)의 별종으로 또한 선우(鮮虞)라고 불렀다. 진소공(晉昭公) 때부터 복종과 반란을 반복하여 여러 번 토벌했다. 조간자(趙簡子)가 군사를 이끌고 도성을 포위하자 비로소 화의를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삼진으로 나라가 분리되자 오로지 속할 데가 없어졌다. 중산국의 군주 희굴(姬窟)이 밤새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낮을 밤으로 삼고 밤을 낮으로 삼으니, 대신들과 멀어지고 소인배들과 친해졌으며, 백성들은 생업을 잃고 재난이 여러 번 나타났다. 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려고 모의하니, 위성(魏成)이 나와 말하기를, “중산국은 서쪽으로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멉니다. 만약에 공격하여 얻더라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했다. 위문후가 말하기를, “만약 조나라가 중산국을 얻으면 북쪽 변경의 형세가 더욱 위중해질 것이다.” 하니, 적황이 아뢰기를, “신이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성은 악(樂)이고 이름은 양(羊)인데, 우리나라 곡구(穀邱)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 가히 대장의 임무를 맡을 수 있습니다.” 했다.
文侯曰:「何以見之?」翟璜對曰:「樂羊嘗行路,得遺金,取之以歸,其妻唾之曰:『志士不飲盜泉之水,廉者不受嗟來之食。此金不知來歷,奈何取之,以污素行乎?』樂羊感妻之言,乃拋金於野,別其妻而出,遊學於魯衛。過一年來歸,其妻方織機,問夫:『所學成否?』樂羊曰:『尚未也。』妻取刀斷其機絲。樂羊驚問其故。妻曰:『學成而後可行,猶帛成而後可服。今子學尚未成,中道而歸,何異於此機之斷乎?』樂羊感悟,復往就學,七年不返。今此人見在本國,高自期許,不屑小仕,何不用之?」
위문후가 말하기를, “무엇으로 그것을 아는가?” 하니, 적황이 대답하기를, “악양이 일찍이 길을 가다가 황금을 주어 집으로 가져오자 그의 처가 침을 뱉으며 말하기를, ‘뜻을 품은 선비는 도천(盜泉)의 물을 마시지 않고, 청렴한 사람은 푸대접으로 주는 음식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황금은 내력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취하여 깨끗한 행실을 더럽히겠습니까?’ 했다. 악양이 그 처의 말에 감복하여 황금을 들판에 버리고, 그 처와 헤어져 나가서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공부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자 그 처가 베틀에서 베를 짜다가 남편에게 묻기를, ‘학문을 다 이루었습니까?’ 했다. 악양이 말하기를, ‘아직 이루지 못했소.’ 하니, 그 처가 칼을 들어 베틀에서 실을 잘라버렸습니다. 악양이 놀라서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 처가 말하기를, ‘학문을 이룬 뒤에 행할 수 있는 것은 비단을 짠 다음에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당신이 학문을 아직 이루지도 않았는데 중도에서 돌아오면 이 베틀의 실을 자른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했다. 악양이 깊이 느껴 깨닫고 다시 배우러 가서 7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본국에 돌아와서 스스로 기대하기를 높게 하여 작은 벼슬자리는 하찮게 여기고 있으니, 어찌하여 그를 쓰지 않습니까?” 했다.
文侯即命翟璜以輅車召樂羊,左右阻之曰:「臣聞樂羊長子樂舒,見仕中山,豈可任哉?」翟璜曰:「樂羊,功名之士也。子在中山,曾為其君招樂羊,羊以中山君無道不往。主公若寄以斧鉞之任,何患不能成功乎?」文侯從之。樂羊隨翟璜入朝見文侯,文侯曰:「寡人欲以中山之事相委,奈卿子在彼國何?」樂羊曰:「丈夫建功立業,各為其主,豈以私情廢公事哉?臣若不能破滅中山,甘當軍令!」文侯大喜曰:「子能自信,寡人無不信了。」遂拜為元帥,使西門豹為先鋒,率兵五萬,往伐中山。姬窟遣大將鼓須,屯兵楸山,以拒魏師。樂羊屯兵於文山。相持月餘,未分勝負。
위문후가 즉시 적황에게 명하여 군주의 작은 수레로 악양을 데려오게 했다. 좌우의 사람들이 말리며 말하기를, “신 등이 듣기에 악양의 큰아들 악서(樂舒)는 중산국에 벼슬하고 있는데 어찌 악양을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적황이 말하기를, “악양은 공명을 추구하는 선비라! 그의 아들이 중산국에서 일찍이 그 군주를 위해 악양을 불렀으나 악양은 중산국의 군주가 무도하다고 가지 않았습니다. 주공께서 만약 부월(斧鉞 ; 임금이 주살을 허락하는 도끼)의 직임을 주면 어찌 성공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했다. 위문후가 적황의 말을 따랐다. 악양이 적황을 따라 조당에 들어와 위문후를 뵈니, 위문후가 말하기를, “과인이 중산국을 정벌하는 일을 그대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그대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악양이 말하기를, “대장부란 공을 세우고 업적을 남기기 위해 각각 그 주인을 위해 힘쓰는데, 어찌 개인적인 정으로 공적인 일을 폐하겠습니까? 신이 만약 중산국을 깨뜨려 멸하지 못한다면 군령에 달게 받겠습니다!” 했다. 위문후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자신하니 과인이 믿지 않을 수가 없소.” 하고, 곧 원수로 임명하고 서문표(西門豹)를 선봉으로 삼아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중산국을 정벌하게 했다. 중산국 군주 희굴(姬窟)이 대장 고수(鼓須)를 보내어 추산(楸山)에 진지를 구축하고 위나라 군사들을 막게 했다. 악양은 문산(文山)에 주둔했다. 서로 한 달이 넘게 대치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樂羊謂西門豹曰:「吾在主公面前,任軍令狀而來,今出兵月餘,未有寸功,豈不自愧!吾視楸山多楸樹,誠得一膽勇之士,潛師而往,縱火焚林,彼兵必亂,亂而乘之,無不勝矣。」西門豹願往。其時八月中秋,中山子姬窟,遣使齎羊酒到楸山,以勞鼓須。鼓須對月暢飲,樂而忘懷。約至三更,西門豹率兵壯銜枚突至,每人各持長炬一根,俱枯枝扎成,內灌有引火藥物,四下將楸木焚燒。鼓須見軍中火起,延及營寨,帶醉率軍士救火,只見咇咇啪啪,遍山皆著,沒救一頭處。軍中大亂。鼓須知前營有魏兵,急往山後奔走。正遇樂羊親自引兵從山後襲來,中山兵大敗,鼓須死戰得脫。奔至白羊關,魏兵緊追在後,鼓須棄關而走。
악양이 서문표(西門豹)에게 말하기를, “내가 주공의 면전에서 군령장을 쓰고 출전했는데 지금 한 달이 넘도록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소! 내가 추산을 살펴보니 가래나무가 대부분이었소. 참으로 담대한 장수 한 명을 뽑아서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산림에 불을 지르게 한다면 적군이 반드시 혼란에 빠질 것이오. 그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이기지 않을 수가 없소.” 하니, 서문표가 가기를 원했다. 그때는 가을철 중간 8월이었다. 중산국의 군주 희굴(姬窟)이 사자에게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추산의 진영에 보내어 고수(鼓須)와 군사를 위로했다. 고수가 달을 대하여 술을 마시고 즐거워서 경계를 잊었다. 대략 한밤중에 이르자 서문표가 입에 나뭇가지를 물린 군사들을 이끌고 갑자기 추산에 이르러 각각 긴 횃불을 들고, 마른 나뭇단을 가지고 그 속에 인화물을 부어 사방에서 가래나무를 태우기 시작했다. 고수가 군중에서 불길이 영채에까지 미치는 것을 보고 취한 중에도 군사를 거느리고 불을 끄려했으나, 불길이 온산에 번져 나무가 타면서 튀는 소리만 나고 한 곳의 불도 끄지 못했다. 중산의 군사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고수는 자기들 진영 앞에 위나라 군사들이 잠복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급히 추산의 뒤로 달아났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미 악양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추산의 뒤로부터 습격해 오니, 중산국의 군사들은 대패하고 말았다. 고수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그곳을 벗어나서 백양관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가 급박하게 뒤에서 추격하니 고수는 백양관을 버리고 달아났다.
樂羊長驅直入,所向皆破。鼓須引敗兵見姬窟,言樂羊勇智難敵。須臾,樂羊引兵圍了中山,姬窟大怒。大夫公孫焦進曰:「樂羊者,樂舒之父,舒仕於本國。君令舒於城上說退父兵,此為上策。」姬窟依計,謂樂舒曰:「爾父為魏將攻城,如說得退兵,當封汝大邑。」樂舒曰:「臣父前不肯仕中山,而仕於魏,今各為其主,豈臣說之可行哉?」姬窟強之。樂舒不得已,只得登城大呼,請其父相見。樂羊披掛登於轈車,一見樂舒,不等開口,遽責曰:「君子不居危國,不事亂朝。汝貪於富貴,不識去就。吾奉君命弔民伐罪,可勸汝君速降,尚可相見。」
악양이 거침없이 쳐들어가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격파되었다. 고수가 패잔병을 이끌고 희굴을 뵙고 악양이 용맹하고 지혜로워서 대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얼마 후에 악양이 군사를 이끌고 중산국의 도성을 포위했다. 희굴이 크게 노했다. 대부 공손초(公孫焦)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악양은 바로 악서(樂舒)의 아버지입니다. 악서는 우리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악서에게 명령하여 성 위에서 그 부친의 군사를 물리라고 설득하게 하십시오. 이것이 상책입니다.” 하니, 희굴이 그 계책에 따라 악서에게 말하기를, “너의 부친이 위나라의 장수가 되어 우리 성을 공격하니, 네가 만약 군사를 물리라고 설득하면 마땅히 너를 큰 고을에 봉하겠다.” 했다. 악서가 말하기를, “신의 아비는 전에 중산국에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위나라에 벼슬하여 지금 각기 그 주군을 위하니 어찌 신의 설득이 행해지겠습니까?” 했다. 희굴이 강압하니 악서가 어쩔 수 없이 성 위로 올라가 큰소리로 외쳐 그 아버지를 뵙기를 청했다. 악양이 군장을 갖추고 망루 차에 올라 한번 악서를 보더니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급히 꾸짖기를, “군자란 ‘위태로운 나라에서 살지 않으며 어지러운 조정을 섬기지 않는다’라고 했다. 너는 부귀를 탐하여 물러감과 나아감을 알지 못했다. 내가 군주의 명을 받들어 백성을 조문하고 죄 있는 군주를 정벌하려고 한다. 너는 네 군주에게 빨리 항복하라고 권해라. 그리되면 우리 부자도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했다.
樂舒曰:「降不降在君,非男所得專也。但求父暫緩其攻,容我君臣從容計議。」樂羊曰:「吾且休兵一月,以全父子之情。汝君臣可早早定議,勿誤大事。」樂羊果然出令,只教軟困,不去攻城。姬窟恃著樂羊愛子之心,決不急攻,且圖延緩,全無主意。過了一月,樂羊使人討取降信。姬窟又叫樂舒求寬,樂羊又寬一月。如此三次,西門豹進曰:「元帥不欲下中山乎?何以久而不攻也?」樂羊曰:「中山君不恤百姓,吾故伐之。若攻之太急,傷民益甚。吾之三從其請,不獨為父子之情,亦所以收民心也。」
악서가 말하기를, “항복하고 안하고는 우리 군주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단지 아버지께 공격을 잠시 늦추어서 저희 군신이 계책을 의논할 시간을 주십시오.” 하니, 악양이 말하기를, “내가 한 달 동안 군사를 쉬게 하여 부자간의 정을 보전하겠다. 너희 군신이 빨리 의논을 정하여 대사를 그르치지 말라.” 했다. 악양이 과연 명령을 내려 포위를 느슨하게 하고 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희굴이 악양이 아들을 사랑하여 결코 중산국을 세차게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다만 공세를 지연시키려고만 할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자 악양이 사자를 보내 항복하는 서신을 요구했다. 희굴이 다시 악서를 보내 관대한 처분을 청하게 했다. 악양이 다시 한 달의 말미를 주었다. 이와같이 세 번이나 기일을 연장해 주니, 서문표가 나와서 말하기를, “원수께서는 중산국을 정벌하지 않을 것입니까? 어찌하여 오랫동안 공격하지 않습니까?” 하니, 악양이 말하기를, “중산국의 군주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내가 토벌하러 왔소. 만약 내가 너무 급하게 공격하면 많은 백성이 다치게 되오. 내가 세 번이나 그들의 청을 들어준 것은 단지 나의 부자지간의 정 때문만이 아니고 민심을 수습하려는 까닭도 있었기 때문이오.” 했다.
卻說,魏文侯左右見樂羊新進,驟得大用,俱有不平之意。及聞其三次輟攻,遂譖於文侯曰:「樂羊乘屢勝之威,勢如破竹,特因樂舒一語,三月不攻,父子情深,亦可知矣。主公若不召回,恐老師費財,無益於事。」文侯不應,問於翟璜。璜曰:「此必有計,主公勿疑。」自此群臣紛紛上書,有言中山將分國之半與樂羊者,有言樂羊謀與中山,共攻魏國者,文侯俱封置篋內。但時時遣使勞苦,預為治府第於都中,以待其歸。樂羊心甚感激,見中山不降,遂率將士儘力攻擊。中山城堅厚,且積糧甚多,鼓須與公孫焦晝夜巡警,拆城中木石,為捍禦之備,攻至數月,尚不能破。
한편, 위문후 좌우의 신하들은 악양이 새로 등용되자마자 갑자기 크게 쓰이는 것을 보고, 모두 불평한 뜻을 가졌다. 악양이 세 차례나 공격을 멈춘 것을 알고, 마침내 위문후에게 참소하기를, “악양이 여러 번 이긴 위세를 타고 형세가 대나무를 쪼개는 것 같이 거침이 없었는데, 특별히 악서의 한 마디로 인하여 석 달 동안이나 공격하지 않으니 또한 부자의 정이 깊은 것을 알겠습니다. 주공께서 만약 불러들이지 않으시면, 우리 위나라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군비만 축내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했다. 위문후가 좌우의 말을 듣지 않고, 적황에게 그 의견을 물으니, 적황이 말하기를, “그것은 틀림없이 계책이 있어서일 것이니 주공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했다. 이로부터 여러 신하가 빗발치듯 상소를 올렸다. 어떤 자는 중산국이 장차 그 나라의 절반을 떼어 악양에게 줄 것이라는 둥, 또 어떤 자는 악양이 중산국과 모의하여 같이 힘을 합해 위나라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위문후는 그것을 모두 상자 안에 넣고 봉해 두고, 다만 때때로 사자를 악양에게 보내 노고를 위로했다. 미리 치소(治所)를 안읍(安邑)에 설치하고 악양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올 날만을 기다렸다. 악양은 문후의 처사에 마음속으로 매우 감격했다. 중산국이 항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침내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힘을 다해 공격했다. 중산성은 성벽이 견고하였고 또한 양식이 충분했다. 고수와 공손초가 주야로 순찰하며 성안의 돌과 나무를 쪼개어 방어에 대비했다. 위나라는 몇 달 동안 공격했지만, 아직 함락시키지 못했다.
惱得樂羊性起,與西門豹親立於矢石之下,督令四門急攻。鼓須方指揮軍士,腦門中箭而死。城中房屋牆垣,漸已拆盡。公孫焦言於姬窟曰:「事已急矣!今日止有一計,可退魏兵。」窟問:「何計?」公孫焦曰:「樂舒三次求寬,羊俱聽之,足見其愛子之情矣。今攻擊至急,可將樂舒綁縛,置於高竿,若不退師,當殺其子,使樂舒哀呼乞命,樂羊之攻,必然又緩。」姬窟從其言。樂舒在高竿上,大呼「父親救命!」樂羊見之,大罵曰:「不肖子!汝仕於人國,上不能出奇運策,使其主有戰勝之功﹔下不能見危委命,使君決行成之計﹔尚敢如含乳小兒,以哀號乞憐乎?」言畢,架弓搭矢,欲射樂舒。
고민을 하던 악양이 분노를 터트리며 서문표와 함께 친히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중산성의 네 성문을 급히 공격하라고 독려했다. 고수가 바야흐로 군사를 지휘하다가 정수리에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 성안의 집과 담장의 돌과 나무도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 다했다. 공손초가 희굴에게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위나라의 군사들을 물러가게 할 계책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니, 희굴이 묻기를, “어떤 계책인가?” 했다. 공손초가 말하기를, “악서가 세 번이나 말미를 청하자 악양은 모두 들어주어, 아들을 사랑하는 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공격이 아주 급한데, 악서를 묶어서 높은 장대에 매달고, 만약 군사를 물리지 않는다면 당장 그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고, 악서를 시켜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게 하십시오. 악양은 틀림없이 공세를 늦출 것입니다.” 하니, 희굴이 그 말에 따랐다. 악서가 높은 장대에 묶여 큰소리로 외치기를, “부친께서는 저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하니, 악양이 보고 큰소리로 꾸짖기를, “불초한 자식아! 너는 다른 나라를 섬기면서 위로는 기묘한 계책을 내어 주군이 전승하도록 공을 세우지 못하고 아래로는 나라의 위험을 보고 목숨을 맡겨 그 군주에게 화의를 결행하도록 하지도 못하면서, 아직도 젖을 빠는 갓난아이처럼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하느냐?” 하고, 말을 마치자 활에 화살을 메기어 악서를 쏘려고 했다.
舒叫苦下城,見姬窟曰:「吾父志在為國,不念父子之情。主公自謀戰守,臣請死於君前,以明不能退兵之罪。」公孫焦曰:「其父攻城,其子不能無罪,合當賜死。」姬窟曰:「非樂舒之過也。」公孫焦曰:「樂舒死,臣便有退兵之計。」姬窟遂以劍授舒,舒自剄而亡。公孫焦曰:「人情莫親於父子,今將樂舒烹羹以遺樂羊,羊見羹必然不忍,乘其哀泣之際,無心攻戰,主公引一軍殺出,大戰一場,幸而得勝,再作計較。」姬窟不得已而從之。命將樂舒之肉烹羹,并其首送於樂羊曰:「寡君以小將軍不能退師,已殺而烹之,謹獻其羹。小將軍尚有妻孥,元帥若再攻城,即當盡行誅戮。」
악서가 괴롭게 부르짖으며 성에서 내려와 희굴을 뵙고 말하기를, “제 부친의 뜻은 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지, 부자간의 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공께서는 스스로 계책을 세우고 싸워서 성을 지키십시오. 신이 주군 앞에서 죽음을 청하여 제가 적군을 물러가지 못한 죄를 밝히고자 합니다.” 했다. 공손초가 말하기를, “그 아비가 중산성을 공격하니 그 자식에게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죽음을 내려야 합니다.” 하니, 희굴이 말하기를, “이 일은 악서의 잘못이 아니다.” 했다. 공손초가 말하기를, “저에게 악서를 죽여서 적군을 물러가게 할 계책이 있습니다.” 하니, 희굴이 마침내 칼을 악서에게 주자 악서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공손초가 말하기를, “인정이 부자보다 친한 게 없다고 하니, 오늘 악서를 삶아 그 국을 악양에게 보내면, 악양이 국을 보고 틀림없이 슬픔을 참지 못할 것이고, 그 슬퍼하는 동안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주군께서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쏟아져 나가서 크게 한바탕 싸워서 다행히 싸움에서 이기면 다시 계책을 세우면 될 것입니다.” 했다. 희굴이 어쩔 수 없이 공손초의 계책을 따라 악서의 고기로 국을 끓여 그 머리와 함께 악양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 우리 주군이 악서가 위나라 군사를 물러나게 하지 못한 까닭으로 이미 죽여 삶아서 그 국을 삼가 바칩니다. 소장군의 처자가 아직 살아있으니, 원수께서 만약 다시 성을 공격하면 즉시 마땅히 그들을 모두 죽일 것입니다.” 했다.
樂羊認得是其子首,大罵曰:「不肖子!事無道昏君,固宜取死。」即取羹對使者食之,盡一器。謂使者曰:「蒙汝君饋羹,破城日面謝。吾軍中亦有鼎鑊,以待汝君也。」使者還報。姬窟見樂羊全無痛子之心,攻城愈急,恐城破見辱,遂入後宮自縊。公孫焦開門出降,樂羊數其讒諂敗國之罪,斬之。撫慰居民已畢,留兵五千,使西門豹居守。盡收中山府藏寶玉,班師回魏。魏文侯聞樂羊成功,親自出城迎勞曰:「將軍為國喪子,實孤之過也。」樂羊頓首曰:「臣義不敢顧私情,以負主公斧鉞之寄。」樂羊朝見畢,呈上中山地圖,及寶貨之數。群臣稱賀。
악양은 아들의 머리를 알아보고 큰소리로 꾸짖기를, “불초한 자식아! 무도하고 어리석은 군주를 모셨으니 죽는 것이 낫다.” 하고, 즉시 사자에게서 국그릇을 취하여 한 그릇을 다 먹고, 사자에게 말하기를, “네 군주가 보내온 국을 먹었으니, 성을 함락시키는 날에 얼굴을 대하여 감사하겠다고 해라! 우리 군중에도 큰 가마솥이 있으니 네 군주를 그것으로 대접하겠다.” 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희굴은 악양이 그 아들을 애통해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을 보고, 성을 더욱 급하게 공격하자 성이 함락되어 치욕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궁궐 뒷방에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공손초가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니, 악양이 공손초가 참언으로 모함하여 나라를 망하게 만든 죄를 열거하고 참수형에 처했다. 성안의 백성들을 위무한 다음에, 5천의 군사를 머물러 두고 서문표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중산국의 창고에 있던 보물들을 모두 거두어 군사를 돌려 위나라로 돌아왔다. 위문후는 악양이 공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성문 밖으로 나가 악양을 맞이하여 그 노고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장군이 나라를 위하다가 자식을 잃었음은 실은 과인의 잘못이라!” 했다. 악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하의 본분은 감히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 주공께서 부월을 내려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했다. 악양이 위문후를 뵌 뒤에 중산국의 지도와 보화의 목록을 바쳤다. 군신들이 모두 축하했다.
文侯設宴於內臺之上,親捧觴以賜樂羊。羊受觴飲之,足高氣揚,大有矜功之色。宴畢,文侯命左右挈二篋,封識甚固,送樂羊歸第。左右將二篋交割,樂羊想道:「篋內必是珍珠金玉之類。主公恐群臣相妒,故封識贈我。」命家人擡進中堂,啟篋視之,俱是群臣奏本,本內盡說樂羊反叛之事。樂羊大驚曰:「原來朝中如此造謗!若非吾君相信之深,不為所惑,怎得成功?」次日,入朝謝恩,文侯議加上賞。樂羊再拜辭曰:「中山之滅,全賴主公力持於內。臣在外稍效犬馬,何力之有?」
위문후가 궁정의 누대 위에 잔치를 베풀어 친히 술잔을 악양에게 내렸다. 악양이 술잔을 받아 마시더니 잘난 체하고 우쭐대며 공을 과시하려는 기색이 농후했다. 잔치가 끝나자 위문후가 좌우에게 명하여 단단히 밀봉한 상자 두 개를 악양에게 주어 집에 가져가게 했다. 좌우의 시종들이 두 개의 상자를 악양에게 넘겨주자 악양이 생각하기를, “상자 안에는 틀림없이 진주와 금과 옥 따위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주공께서 여러 신하가 시기할까 걱정하여 이렇게 봉하여 나에게 주는 것이리라.” 했다. 집안 노복들에게 명하여 상자를 집의 대청에 들여놓고 상자를 열어 보니 그 안에 여러 신하의 상주문이 가득했다. 그 상주문들은 모두가 악양이 반역한다는 내용이었다. 악양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원래 조당에서 이렇게 나를 비방했구나! 만약 주군께서 나를 깊이 믿지 않으시고 참소에 미혹되셨다면 내가 어찌 공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했다. 다음날 악양이 입조하여 은혜에 대해 감사의 말을 올리니, 위문후가 군신들과 의논하여 가장 큰상을 더 내렸다. 악양이 재배하며 사양하기를, “중산국을 멸한 것은, 오로지 안에서 지켜주신 주공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신은 나라 밖에서 견마지로를 다했을 뿐이지 어찌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했다.
文侯曰:「非寡人不能任卿,非卿亦不能副寡人之任也。然將軍勞矣,盍就封安食乎?」即以靈壽封羊,稱為靈壽君,罷其兵權。翟璜進曰:「君既知樂羊之能,奈何不使將兵備邊,而縱其安閒乎?」文侯笑而不答。璜出朝以問李克,克曰:「樂羊不愛其子,況他人哉?此管仲所以疑易牙也。」翟璜乃悟。文侯思中山地遠,必得親信之人為守,乃保無虞。乃使其世子擊為中山君。擊受命而出,遇田子方乘敝車而來。擊慌忙下車,拱立道旁致敬。田子方驅車直過,傲然不顧。擊心懷不平,乃使人牽其車索,上前曰:「擊有問於子,富貴者驕人乎?貧賤者驕人乎?」
위문후가 말하기를, “내가 아니었다면 경을 장군으로 임용하지 못했을 것이고, 경이 아니었다면 역시 과인이 준 임무에 부응하지도 못했을 것이오. 어쨌든 장군의 노고가 많았으니 어찌 식읍에서 편안히 지내지 않겠오?” 했다. 위문후가 즉시 악양을 영수(靈壽)에 봉하고 영수군(靈壽君)이라는 칭호를 내렸으나 그의 병권(兵權)은 회수했다. 적황이 나아가 말하기를, “주군께서는 이미 악양의 재능을 알아보셨는데 어찌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변방을 지키게 하지 않고, 놓아주어 편안히 지내게 하십니까?” 하니, 위문후가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적황이 조당에서 물러 나와 이극(李克)에게 물으니, 이극이 말하기를, “악양은 자기 아들도 사랑하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이것은 관중이 역아(易牙)를 의심한 까닭입니다.” 했다. 적황이 이에 그 뜻을 깨달았다. 위문후는 중산의 땅이 멀어서 반드시 친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지켜야만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자 격(擊)을 중산군(中山君)에 봉했다. 세자 격이 명을 받고 나와서, 낡은 수레를 타고 가는 전자방을 만났다. 세자 격이 황망히 수레에서 내려 두 손을 모아 길옆에서 공경하는 예를 올렸다. 전자방은 수레를 몰아 곧바로 지나가며 오만하게 쳐다보지도 않았다. 세자 격이 마음속으로 불평을 품고 사람을 시켜 전자방의 수레를 자기 앞으로 끌고 오게 하여,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이 격이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귀한 자가 교만해야 합니까? 아니면 가난하고 비천한 자가 교만해야 합니까?” 했다.
子方笑曰:「自古以來,只有貧賤驕人,那有富貴驕人之理?國君而驕人,則不保社稷,大夫而驕人,則不保宗廟。楚靈王以驕亡其國,智伯瑤以驕亡其家,富貴之不足恃明矣。若夫貧賤之士,食不過藜藿,衣不過布褐,無求於人,無欲於世,惟好士之主,自樂而就之,言聽計合,勉為之留。不然,則浩然長往,誰能禁焉?武王能誅萬乘之紂,而不能屈首陽之二士,蓋貧賤之足貴如此。」太子擊大慚,謝罪而去。文侯聞子方不屈於世子,益加敬禮。時鄴都缺守,翟璜曰:「鄴介於上黨邯鄲之間,與韓趙為鄰,必得強明之士以守之,非西門豹不可。」
전자방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옛날부터 다만 가난하고 비천한 자가 교만했지만, 부귀한 자가 어찌 교만할 리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군주가 교만하면 사직을 보전할 수 없고, 대부가 교만하면 종묘를 보전할 수 없습니다. 초영왕은 교만하여 나라를 잃었고, 지백 요는 교만하여 그 집안을 망하게 했습니다. 부귀는 족히 믿을 만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천한 선비들은 먹는 것이 변변치 않고, 입는 것이 초라하지만, 남에게 구하는 바가 없고, 세상에 대해서도 욕심이 없습니다. 오직 선비를 좋아하는 임금이 있으면 스스로 즐거워하여 찾아가서, 말을 들어주고 계책이 맞으면 열심히 일하며 머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거침없이 가버리니 누가 능히 그를 막겠습니까? 주나라 무왕이 만 승의 은나라를 멸하고 주왕(紂王)을 죽였음에도 수양산의 두 선비(백이 숙제)만은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빈천한 사람들도 이렇게 귀중한 것이 있습니다.” 했다. 태자 격이 매우 부끄러워하며 사죄하고 갔다. 위문후가 전자방이 세자에게 굴하지 않았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예를 다하여 존경했다. 그때 업도(鄴都)에 태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적황이 말하기를, “업도는 상당(上黨)과 한단(邯鄲) 사이에 끼어 있어서 한나라와 조나라와 이웃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굳세고 밝은 사람을 보내 지켜야 합니다. 서문표(西門豹)가 아니면 안 됩니다.” 했다.
文侯即用西門豹為鄴都守。豹至鄴城,見閭里蕭條,人民稀少,召父老至前,問其所苦。父老皆曰:「苦為河伯娶婦。」豹曰:「怪事,怪事!河伯如何娶婦?汝為我詳言之。」父老曰:「漳水自沾嶺而來,由沙城而東,經於鄴,為漳河。河伯即清漳之神也。其神好美婦,歲納一夫人。若擇婦嫁之,常保年豐歲稔,雨水調均。不然,神怒,致水波泛溢,漂溺人家。」豹曰:「此事誰人倡始?」父老曰:「此邑之巫覡所言也。俗畏水患,不敢不從。每年里豪及廷掾,與巫覡共計,賦民錢數百萬,用二三十萬,為河伯娶婦之費,其餘則共分用之。」
위문후가 즉시 서문표를 업도의 태수로 임명했다. 서문표가 업성에 이르러 거리가 쓸쓸하고 백성이 희소한 것을 보고, 부로(父老 ; 어르신)들을 불러 고생스러운 바를 물었다. 노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고통스러운 것은 하백이 부인을 취하는 것입니다.” 했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괴이하고 괴이한 일이로다! 하백이 어찌 부인을 취한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나에게 자세히 말해 주십시오.” 하니, 어르신이 말하기를, “장수(漳水)는 첨령(沾嶺)에서 발원하여 사성(沙城)을 거쳐 동쪽으로 흘러 업도(鄴都)를 지나면서 장하(漳河)가 됩니다. 하백(河伯)은 곧 맑은 장수(漳水)의 신(神)입니다. 그 신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여 해마다 부인 한 명을 들입니다. 만약 부인을 택하여 시집을 보내면 풍년이 들어 곡식의 낟알이 잘 여물게 하고 비를 골고루 알맞게 내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노하여 물이 넘치고 인가를 덮쳐 잠기게 합니다.” 했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이 일은 누가 먼저 시작하자고 했습니까?” 하니, 어르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고을의 무당이 주장한 것이지요. 이곳 사람들이 수해를 두려워하여 감히 무당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매년 동네의 호족들과 관청의 하급 관리들이 무당과 같이 모의하여 백성들에게서 수백만 전의 세금을 거두어, 2-3 십만 전은 하백의 부인을 취하는 비용으로 쓰고, 그 나머지는 함께 나누어 씁니다.” 했다.
豹問曰:「百姓任其瓜分,寧無一言乎?」父老曰:「巫覡主祝禱之事,三老廷掾有科歛奔走之勞,分用公費,固所甘心。更有至苦,當春初布種,巫覡遍訪人家女子,有幾分顏色者,即云『此女當為河伯夫人。』不願者,多將財帛買免,別覓他女。有貧民不能買免,只得將女與之。巫覡治齋宮於河上,絳帷床席,鋪設一新,將此女沐浴更衣,居於齋宮之內。卜一吉日,編葦為舟,使女登之,浮於河,流數十里乃滅。人家苦此煩費﹔又有愛女者,恐為河伯所娶,攜女遠竄,所以城中益空。」
서문표가 묻기를, “백성들이 그렇게 착취를 당하면서 어찌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습니까?” 하니, 어르신이 말하기를, “무당은 하백에게 축원을 드리는 일을 주관하고 삼로(三老 ; 마을 어른)와 아전들은 비용을 거두기 위해 분주하게 수고하여 비용으로 나누어 쓴다 해도 그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초봄에 들에 종자를 뿌리는 시기에 무당이 민가를 두루 찾아다니며 제법 미색을 갖추고 있는 처녀를 발견하면 즉시 ‘이 처녀는 마땅히 하백의 부인으로 보낼 만하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재물과 비단을 무당에게 바쳐 면하면, 무당은 다시 다른 처녀를 찾습니다. 가난한 백성은 재물과 비단으로 면하지 못해 할 수 없이 딸을 무당에게 줍니다. 무당은 강물 위에다 재궁을 설치하고 상석에 붉은 장막을 치고 새 이부자리를 깔고, 처녀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후에 재궁 안에 머물게 합니다. 길일을 점쳐서 갈대로 엮은 배에 처녀를 태우고 강물 위에 띄워 보내면 수십 리를 흐르다가 가라앉아 사라집니다. 집집마다 이러한 막대한 비용으로 고통을 받고, 또한 사랑하는 딸을 가진 사람들은 딸이 하백의 부인이 될까 봐 두려워하여 딸을 데리고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안이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했다.
豹曰:「汝邑曾受漂溺之患否?」父老曰:「賴歲歲娶婦,不曾觸河神之怒,但漂溺雖免,奈本邑土高路遠,河水難達,每逢歲旱,又有乾枯之患。」豹曰:「神既有靈,當嫁女時,吾亦欲往送,當為汝禱之。」及期,父老果然來稟。西門豹具衣冠親往河上。凡邑中官屬,三老、豪戶、里長、父老,莫不畢集,百姓遠近皆會,聚觀者數千人。三老里長等,引大巫來見,其貌甚倨。豹觀之,乃一老女子也。小巫女弟子二十餘人,衣裳楚楚,悉持巾櫛爐香之類,隨侍其後。豹曰:「勞苦大巫,煩呼河伯婦來,我欲視之。」
서문표가 말하기를, “이 고을에 일찍이 홍수의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습니까?” 하니, 노인들이 말하기를, “해마다 부인을 바친 덕분에 아직 하백의 노여움을 사지 않아 홍수의 피해는 비록 면했지만, 그것은 이 고을의 땅이 높고 길이 멀어 강물이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년 가뭄을 만나 곡식이 말라죽은 재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했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영험이 있다면 처녀가 시집을 갈 때 나도 또한 전송하고 백성들을 위해 기원해야겠소.” 했다. 이에 처녀를 하백에게 바치는 날이 되자 그 노인네들이 과연 서문표를 찾아와 알렸다. 서문표가 의관을 갖추고 친히 강가로 갔다. 고을의 모든 관속, 삼로(三老), 호족(豪族), 이장(里長), 그리고 마을의 어르신들이 모두 참석하고 원근의 백성들도 모두 모여, 그것을 보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삼로와 이장 등이 큰 무당을 데리고 와서 서문표에게 인사를 시키는데 그의 거동이 매우 거만했다. 서문표가 그를 살펴보니 바로 늙은 노파였다. 작은 무당인 여자 제자가 20여 인이고 옷차림은 정결했는데, 작은 무당들은 수건이나 빗, 그리고 향로 같은 제기들을 손에 들고 큰 무당의 뒤를 따랐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큰 무당께서 번거롭겠지만 하백의 부인이 될 처녀를 불러와 주시오. 내가 한 번 보겠소.” 했다.
老巫顧弟子使喚至。豹視女子,鮮衣素襪,顏色中等。豹謂巫嫗及三老眾人曰:「河伯貴神,女必有殊色,方纔相稱。此女不佳,煩大巫為我入報河伯,但傳太守之語:『更當別求好女,於後日送之。』」即使吏卒數人,共抱老巫,投之於河,左右莫不驚駭失色。豹靜立俟之,良久曰:「嫗年老不幹事,去河中許久,尚不回話,弟子為我催之。」復使吏卒抱弟子一人,投於河中。少頃,又曰:「弟子去何久也?」復使弟子一人催之。又嫌其遲,更投一人。凡投弟子三人,入水即沒。豹曰:「是皆女子之流,傳語不明,煩三老入河,明白言之。」
늙은 무당이 제자들에게 고개를 돌려 하백의 부인으로 뽑힌 처녀를 불러오게 했다. 서문표가 처녀를 보니 말끔한 옷에 흰 버선을 신었는데 얼굴은 중간 정도였다. 서문표가 큰 무당과 삼로와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하백은 고귀한 신이니 처녀는 뛰어난 미인이라야 비로소 성의를 칭찬할 것이오. 이 처녀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니 큰 무당은 번거롭겠지만 나를 위해 하백에게 가서, 다만 태수의 말이 ‘다시 마땅히 아름다운 처녀를 구해 후일에 바치겠습니다.’라고 한다고 전하시오.” 했다. 서문표가 즉시 군졸들 몇 명을 시켜 늙은 무당을 안아다가 강물에 던져버리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실색했다. 서문표가 조용히 서서 기다리다가 한참 후에 말하기를, “노파가 늙어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구나. 강물 속으로 간 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 돌아와 고하지 않으니 너희 제자들이 나를 위해 가서 재촉해라.” 하고, 다시 군졸들을 시켜 제자 한 사람을 안아서 강물에 던지게 했다. 조금 지나 또 말하기를, “제자가 들어가서 어찌 그리 오래 걸리는가?” 하고 다시 제자 중 한 사람을 시켜 재촉하게 했다. 또 지체되는 것을 싫어하여, 다시 제자 한 명을 강물 속에 던졌다. 무릇 제자 세 명을 던져 물속에 가라앉게 했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가 여자들이라 내 말을 분명하게 전하지 못한 듯하니, 번거롭겠지만 삼로가 물속에 들어가서 분명하게 전해주시오.” 했다.
三老方欲辭。豹喝:「快去,即取回覆。」吏卒左牽右拽,不由分說,又推河中,逐波而去。旁觀者皆為吐舌。豹簪筆鞠躬,向河恭敬以待。約莫又一個時辰,豹曰:「三老年高,亦復不濟。須得廷掾豪長者往告。」那廷掾里豪,嚇得面如土色,流汗浹背,一齊皆叩頭求哀,流血滿面,堅不肯起。西門豹曰:「且俟須臾。」眾人戰戰兢兢,又過一刻,西門豹曰:「河水滔滔,去而不返,河伯安在?枉殺民間女子,汝曹罪當償命!」眾人復叩頭謝曰:「從來都被巫嫗所欺,非某等之罪也。」
삼로가 사양하려고 하자 서문표가 외치기를, “빨리 갔다가 즉시 돌아오시오!” 하니, 군졸들이 좌우에서 끌어서 변명도 하기 전에 또 물속으로 밀어 넣어, 파도 속으로 휩쓸려 사라졌다. 주위에서 보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혀를 내밀었다. 서문표가 붓을 머리에 꽂고 허리를 굽혀 강을 향해 공경의 뜻을 표하면서 삼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대략 한 시간이 안 되어. 서문표가 말하기를, “삼로는 나이가 많아 역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구나. 모름지기 아전이나 마을 호족들이 가서 고해야겠다.” 하니, 아전과 호족들이 깜짝 놀라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흐르는 땀이 등을 적시더니, 일제히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피가 얼굴에 가득 흐르고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잠시 더 기다려 보자.” 하니, 사람들이 전전긍긍했다. 또 한 시간이 지나자 서문표가 말하기를, “강물은 도도히 흐르는데 가면 돌아오지 않으니, 하백은 어디 있단 말인가? 함부로 민간의 여자를 죽였으니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했다, 여러 사람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원래 모두가 늙은 무당에게 속았을 뿐이지 우리의 죄가 아닙니다.” 했다.
豹曰:「巫嫗已死,今後再有言河伯娶婦者,即令其人為媒,往報河伯。」於是廷掾、里豪、三老,乾沒財賦,悉追出散還民間。又使父老即於百姓中,詢其年長無妻者,以女弟子嫁之,巫風遂絕。百姓逃避者,復還鄉里。有詩為證:「伯何曾見娶妻?愚民無識被巫欺﹔一從賢令除疑網,女子安眠不受虧。」豹又相度地形,視漳水可通處,發民鑿渠,各十二處,引漳水入渠,既殺河勢,又腹內田畝,得渠水浸灌,無旱乾之患,禾稼倍收,百姓樂業。今臨漳縣有西門渠,即豹所鑿也。
서문표가 말하기를, “늙은 무당은 이미 죽었으니 이후에 다시 하백이 부인을 맞이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그를 중매로 하여 가서 하백에게 알리게 하겠다.” 했다. 이에 아전과 마을 호족, 그리고 삼로의 재산들을 몰수하여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돌려주었다. 또 어르신들을 시켜 백성 중에서 나이가 찼으나 장가를 들지 못한 사람과 젊은 무당을 결혼을 시키고 무당 풍속을 마침내 없앴다. 무당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시가 있어 증험하기를, “하백이 어떻게 아내를 얻겠는가? 어리석은 백성이 무식하여 무당에게 속았네. 한번 어진 사또가 의심나는 것을 없애니, 처녀들이 안심하고 잠잘 수 있게 되었다.” 했다. 서문표가 또 업도의 지형을 살펴 장수가 흐를 수 있는 곳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12군데의 물길을 파고, 장수의 물을 끌어들여 물살을 완만하게 만들었다. 다시 물길의 앞쪽에다 전답을 일구고 물길의 물을 대어 가뭄 걱정을 없애니, 벼농사가 잘되어 그 수확이 두 배나 늘어나서, 백성들이 생업을 즐겼다. 지금도 임장현(臨漳縣)에 서문거(西門渠)가 있는데, 바로 서문표가 판 것이다.
文侯謂翟璜曰:「寡人聽子之言,使樂羊伐中山,使西門豹治鄴,皆勝其任,寡人賴之。今西河在魏西鄙,為秦人犯魏之道,卿思何人可以為守?」翟璜沉思半晌,答曰:「臣舉一人,姓吳名起,此人大有將才,今自魯奔魏,主公速召而用之,若遲,則又他適矣。」文侯曰:「起非殺妻以求為魯將者乎?聞此人貪財好色,性復殘忍,豈可託以重任哉?」翟璜曰:「臣所舉者,取其能為君成一日之功,若素行不足計也。」文侯曰:「試為寡人召之。」
위문후가 적황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경의 말을 듣고 악양을 채용하여 중산국을 정벌했고, 서문표를 시켜 업 땅을 다스리게 했더니, 두 사람 모두가 그 임무를 잘 이루어내어 과인이 그들을 믿게 되었소. 요즈음 위나라의 서쪽 변경인 서하가 진(秦)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침범하는 길목이 되니 경이 생각하기엔 누가 가히 그곳을 지킬 수 있겠소?” 하니, 적황이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하기를, “신이 천거할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성은 오(吳)이고 이름은 기(起)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크게 장군의 자질이 있습니다. 지금 노나라에서 위나라로 도망쳐 왔는데, 주공께서는 속히 불러 쓰십시오. 만약 지체했다가는 다른 나라로 가버릴 것입니다.” 했다. 위문후가 말하기를, “오기라는 사람은 아내를 죽여 노나라의 장수가 된 자가 아니요? 내가 듣기로는 그 사람이 재물을 탐하고 여자를 밝히며 성격은 반복무상하고 잔인하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이런 자에게 중임을 맡기겠소?” 하니, 적황이 말하기를, “신이 그를 천거하는 것은 그의 재능을 취하여 주군께서 하루의 공업을 이루시라는 것이지, 만약 평소의 행동을 본다면 족히 헤아릴 게 없습니다.” 했다. 위문후가 말하기를, “시험 삼아 과인을 위해 불러오시오.” 했다.
不知吳起如何在魏立功,且看下回分解。
오기가 위나라에서 어떻게 공을 세울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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