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84)
죽은 줄도 모르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 안에서 쏟아진다
그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올린다
- 김혜순(1955- ), 시집 『어느 별의 지옥』, 문학동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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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 중에는 ‘드라큘라’가 있습니다. 드라큘라는 영국의 작가 브램 스토커(1847-1912)가 1897년에 지은 소설로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드라큘라는 이후 수백 편의 영화, 연극, 뮤지컬로 재탄생하며, 고딕 호러 장르 전체를 대표하는 고전이 되었습니다.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로는‘뱀파이어’도 있습니다. 흡혈귀라는 점에서 뱀파이어는 드라큘라와 같으나 뱀파이어는 외모가 매혹적이며 드라큘라보다 덜 음험하고 훨씬 낭만적입니다. 뱀파이어도 수많은 영화와 게임 등으로 제작되었고 우리에게 알려지기로는 드라큘라보다 늦게 알려졌으나 탄생 시기로 보자면 드라큘라보다 많이 앞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로는 ‘강시’도 있습니다. 강시는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움직이는 시체입니다. 강시는 몸이 뻣뻣하고 검은 손톱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있으며, 발목을 사용해 두 발로 뛰며,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앞으로 뻗는데, 관절 대부분이 구부러지지 않아서 높은 곳을 뛰어서 넘지는 못합니다. 중국 여행 때 안내자가 중국의 문지방이 높은 것이 강시 때문이라고 해서 한참을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로는 최근에 영화, 드라마, 소설, 게임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활용되어 엄청나게 유명세를 날리는 ‘좀비’가 있습니다. 좀비는 서인도 제도 아이티 섬의 부두교 의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강시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시체입니다. 좀비는 애초에는 주술사의 조종으로 움직이는 존재였으나, 조지 로메로(1940-2017) 감독이 1968년 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나중에‘로메로 좀비’라고 불리는 인간을 해치는 초자연적인 좀비를 재탄생시킨 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2009년에 연상호(1978- ) 감독의 블록버스터급 영화 ≪해운대≫가 천만 영화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꾸준하게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 게임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게임을 하는 동안 좀비 광고를 하루에도 무수하게 봅니다. 영화 ≪해운대≫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좀비로 변한 사람들을 소재로 해서 제작되었고, 이후 제작된 대부분의 작품 또한 전염병과 연관해서 이루어져 있지만, 워낙 많이 보다 보니 제가 본 영화의 주인공이 드라큘라였는지 뱀파이어였는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는 없어도, 젊은 시절 어느 해인가 영화를 보다가 저는 흡혈귀로 지칭되는 현상이 전염병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이 자료를 확인하려고 검색하다 보니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는 나라마다 지역마다 꽤 많습니다. 그럼 오늘의 시에서의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는 “그는” 이 존재 중의 누구일까요. 떼로 다니지는 않으니 일단 강시나 좀비는 아닌 듯 보이지만, 강시나 좀비도 전략 전술을 쓸 줄 아는 존재로 발전해서 각개 배회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의 시가 수록된 시집 『어느 별의 지옥』은 김혜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으로 1988년 애초 청하에서 출판하였으나 음란물로 찍혀 작가에게 시련을 안긴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를 출판하였다고 등록 취소가 되면서 절판되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시집은 1997년 문학동네에서 ‘포에지2000’으로 복간한 시집인데 현재 구판 절판되었고, 2017년 문학과지성사에서 ‘R시리즈’로 재복간한 시집도 현재 품절 상태입니다. 제가 시인의 오래된 시집을 다시 꺼낸 것은 이 오래된 시집이 최근 영문으로 번역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는데, 하필 이 시에 딱 꽂혔습니다. 이것은 상황이 눈길을 멈추게 한 사례입니다. ‘배회’는 목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목적이 없지는 않지만,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고 배회하는 존재들, 요즘 자주 목격하시지요. 어쩌면 바로 옆에 두고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다시 죽음에 들면서/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한마디 쩝쩝거리며/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올린다” 오늘은 여기서 끝맺습니다. (20250219)
첫댓글 노벨문학상 수상자 급에 있는 김혜순 시인의 1988 ; 1997년 시집의 시 소개 감사합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시인의 시의식을 봅니다.
최근 기사에서 한강 작품 속에 김혜순이 있더군요. 그리고 또 다른 노벨문학상이 나오기 기다립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82418.html
https://www.wome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