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현지시간)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차량으로 이동 중이던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정예부대(쿠드스군)
총사령관이 미군 공습으로 사망했다.
미국이 이란 군부 지도자를 참수작전으로 살해하고 이에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미사일을 퍼부으면서 중동에서
전면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이 한미 동맹을 이유로 우리 정부에게 중동지역 파병을 요청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7일 한국군의 파병을 거론하면서 파병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
중동 파병이 실제로 이뤄질 경우 이는 1960년대 베트남전과 2000년대 이라크전에 이은 3번째 실전 파병 사례가 된다.
이란이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공습 살해한 것과 관련,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라크의 아인 아사드 공군기지에 지대지미사일 수십기를 발사했다고 이란 국영 TV가 8일 보도했다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파병은 우리 정부에게 좋은 기억이 아니다. 서보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저서 '배반당한
평화-한국의 베트남·이라크 파병과 그 이후'에서 "한국이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에 파병한 것은 각각 반공, 반 테러리즘을
명분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는 미국의 세계안보전략에 동참하며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며 "두 전쟁 모두 미국이 일으킨
추악한 전쟁'으로 혹평을 받았다. 파병이 평화를 구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배반한 것"이라고 평했다.
베트남 전쟁
서 교수에 따르면 베트남전 당시 박정희는 미국이 우리에게 베트남 파병을 요구하기 앞서 스스로 파병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에게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 제안은 박정희가 정권의 정통성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미국의 승인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제안은 군사 정권의 물리적 기반인 군대를 감축하라는 미국의 압력을 회피하려는 방책이기도 했다.
상황은 박정희의 의도대로 전개됐다.
베트남전 전황이 악화되자 미국 린든 존슨 정부가 1964년 4~5월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동맹과 우방국들에게 요청했다.
월남 파병
이에 화답한 박정희 정부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4차례에 걸쳐 파병해 약 5만명 규모 부대를 운용했다.
이는 미군에 이어 2번째로 큰 병력 규모다.
미군의 파병 요청에 응한 나라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대만, 필리핀, 태국, 영국 등 7개국에 그쳤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미국의 군사 원조 증대를 이끌어내려 했다.
미국의 국방장관과 부통령이 방한해 전투병 추가 파견을 요청하자 박정희는 미국에 군사·경제 원조를 대가로 요구했다.
추가 파병은 브라운 각서로 알려진 미국의 대한국 군사·경제 원조 합의 직후에 이뤄졌다.
월남전 참전 50주년 기념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2015.9.24.
브라운 각서에 따라 미국은 한국군 현대화 계획을 위해 1971년부터 1975년까지 10억3400만달러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이는 한국군의 군사력 현대화에 쓰였다.
다만 파병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과의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을 타결해야 했다. 또 대규모 파병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수립하며 박정희 정부를 실망시켰다.
베트남전 파병으로 우리 국민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인원 32만여명이 투입됐고 우리 청년 5000여명이 전사했다.
아울러 우리 군은 베트남 현지에서 최대 9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반인도적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라크전 참전은 베트남전과는 과정과 결과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라크전쟁
미국 부시 정부는 9·11 테러를 당한 후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이라크 전쟁을 준비했다.
미국은 이라크 공격을 앞두고 2002년 11월 전 세계 50여 동맹국과 우방국에 이라크 공격 지원 의사를 문의했다.
주한 미국대사는 같은 해 12월 우리 외교부 장관에 인도적 지원, 전후 복구 지원, 수송 장비 전투근무(공병, 의료진)
지원, 지뢰 제거 부대 등 지원이 가능한지를 문의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라크 난민 지원,
주변국 지원, 전후 복구지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
김대중 정부의 파병 방침은 대통령 선거로 인해 실행돼지 않았다.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자 미국 정부는 다시 한번 이라크 파병을 요청한다.
이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이 벌어지고 찬반 논쟁이 격화됐다.
파병을 거부할 경우 한미 동맹 약화로 투자 이탈, 남북관계 악화, 국내 금융시장 불안이 나타날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
자이툰,다이만 부대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3월20일 '이라크 전쟁 발발에 즈음한 대통령 담화문'에서 미국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가장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파병을 결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제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데 한미 관계의 안정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파병을 통해 대북 강경 일변도였던 부시 정부를 달래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당시 부시 정부는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노무현 정부는 파병 규모와 성격, 시기에서 이라크와의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2003년 1차 파병에서는 600명 규모 건설공병단, 100명 규모 의료지원단이 파견됐다.
2004년 2차 파병에서는 평화재건지원부대로 3000명 규모가 파견됐다.
서희부대, 제마부대, 자이툰부대, 다이만 부대 가 이라크 현지에서 재건지원 활동을 벌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 결정은 반대 세력인 보수진영의 국내정치적 저항을 잠재우지 못했을 뿐더러 지지 세력이었던
진보진영으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했다. 서보혁 교수는 "어떤 명분과 목적으로도 처음부터 자국이 직접 연루되지 않은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일은 대단히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다.
경제적 보상이 아무리 커도 또 아무리 영웅으로 떠받들어도 목숨을 내놓는 파병은 어려운 결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