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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存愛院
― 김형수 *
차례 1. 머리말
2. 임진왜란과 상주지역 사족의 의병활동
3. 상주 서애학단西厓學團과 교화론敎化論에 입각한
지역질서 재건
4. 존애원存愛院의 설립과 상주사족의 결집
5. 맺음말
요약
임진왜란은 조선사회에 매우 큰 충격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
* 金炯秀,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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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전쟁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경상도는 전쟁 이후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 이후 재건의 중심에는 사족士族
들이 있었고,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바탕으로 지역사
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상주지역은 임란 초기 북천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구심점을 잃
고, 산 속으로 숨어들어갔으나, 선조의 교서, 김성일의 격문 등을
근거로 김각金覺‧김홍민金弘敏‧이봉李逢 등이 의병을 일으켜 일
본군과 전투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 상주지역의 서애문인들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의 재건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들은 향안鄕案의 중수, 향약鄕
約의 시행 등 예교(예의와 교화)를 우선으로 하는 개건 방향을 정
하였으며, 그 중심인물은 김각‧정경세‧이준李埈‧이전李㙉 등이었
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국醫局인 존애원
存愛院을 창설하여 의료활동을 전개하였다.
존애원은 의국으로 출발하였으나, 백수회白首會를 개최하고,
교육장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존애원은 17세기 중엽 급격히 쇠
퇴하였다. 1607년 도남서원이 창설됨으로 인하여 사족들의 교육
공간으로서의 기능과 여론 형성 장소로서의 역할은 도남서원으로
넘어갔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의
국(병원)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하였다.
상주지역의 서애문인들은 상주지역의 현안이 전쟁으로 황폐해
진 전답 등을 소복하여야 하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충격은 이들에게 경제적인 소복보다는 다른 차원
의 질서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인륜의 파괴
는 이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결국 임란 이후 질
서 재편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예교의 복원을 들고, 이를 위하
여 존애원의 창건과 향안의 중수 및 향약의 실시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주제어
: 존애원存愛院, 의병, 정경세, 이준李埈, 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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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조선시대는 양반(사족)이 지배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양반(士
族) 신분은 조선초기부터 법제적 신분은 아니었다. 양반이 특권적
신분으로 확립되게 되는 것은 16세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림의
진출과 관련이 있다. 이들 사림들은 성리학을 이념적 무기로 훈구
세력과 대립하면서 새로운 인간형인 성리학적인 ‘군자君子’를 이
념적 모델로 삼으면서 소학에 근거한 일상적인 도덕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고위관료라 하더라도 도덕적인 기준에 어
긋나면 사림으로 불릴 수 없었다. 이들 사림들은 선조대 이후 정
치를 주도하면서 조선중기 이후의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나갔
다.847
847 조선전기 신분구조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4신분설과 良賤制설이
대립하고 있다. 이는 양반사족의 형성시기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조선은 건국 초 ‘齊民支配’ 構造를 지향하였던 것은 분명하고, 兩班士族은 관직자와
그 가족으로 구성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사족층의 성장과 신분화는 15~16세
기 사림세력의 성장과 연관이 있다(김성우, 「사회신분」, 한국사연구회 엮음,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2008, 454~461쪽). 이러한
입장은 지방사회에 거주하는 士族의 존재에 대하여 주목하고 이들의 활동이 조선사회
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는 점에서 ‘사족지배체제’로 규정하기도 한다(고석규, 「지방사회」, 한국사연구회 엮음, 앞의 책, 446~449쪽). 최근 한 학술회의에서는
사족의 형성시기와 지역에서의 활동에 대하여 많은 견해가 제시되었다(한국국학진흥
원‧경북대학교 사학과 BK21플러스사업단‧조선시대사학회, 세계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지역엘리트, 사족, 2015). 현재 연구는 일찍 재지사족이 형성된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또한 실록의 기록을 주로 이용하여 사족의 형성시기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족의 형성은 지역 별로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즉 지역적으로 사족의 정착시기, 그리고 ‘사족지배체제’의 형성은 달랐다.
같은 경상도 지역이라고 할지라도 사족의 入居시기는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고,
이들이 지역질서를 주도하게 된 시기도 차이가 있다. 이들이 그 지역사회의 주도권을
가지는 시기가 언제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최소한 조선후기 경상도에
서 지역 사족들이 정치적 편향성을 띠면서 지역의 ‘公論’을 주도하는 것과 관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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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사림세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지역사회의 주도세력으로 확고히 자리
를 잡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
다. 이후 사족들이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족들의 의병활동에도 상당한 원인이 있었다.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상주지역은 고려말高麗末 김득배‧김
선치 형제를 비롯한 상산김씨 등 재지세력의 사족화가 이루어지
고 있었고, 15‧16세기를 거치면서 외가 또는 처향을 따라 이주한
흥양이씨‧진양정씨‧영산김씨‧광주노씨 등이 정착하여 사족사회를
형성하였으며, 특히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노수신盧守愼을 비롯
한 일군의 학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주지역에서 사족
들이 학문적 결속력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은 류성룡柳成龍이 상
주목사로 재임하면서 교육을 진흥하였을 때부터였고,848 임진왜
란 당시 상주사족들이 전개한 의병활동은 전후 상주지역의 재건
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해 주었다.849 그러므로 임란
이후 상주지역 사회의 재편과정에서 이들이 가졌던 기본 입장과
재건 방향은 임란 이후 상주지역의 향촌질서를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850 이들 상주 사족들은 임란 직후 지역사회의 재건에서 우
있으며, 지역적으로 ‘사족이 없는 (無班) 곳’으로 지목되는 지역이 있는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상주지역의 경우 다른 지역에 비교하여 빠른 편인 16세기 士族이
형성되고 있었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들의 향촌지배력은 확고해졌다.
848 상주지역 서애학맥의 형성과 서애문인집단에 대해서는 김호종, 「서애 류성룡과
안동, 상주지역의 퇴계학파」(한국의 철학 28, 2000) 참조.
849 정진영, 「임란전후 상주지방 사족의 동향」, 민족문화논총 8, 1987(조선시대
향촌사회사, 한길사, 1999)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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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으로 시도하였던 것은 도남서원의 창건으로 대표되는 서원의
건립과 향안鄕案의 개수改修 및 향약의 시행이었다. 또한 이들은
임란 이후의 각종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존애원存愛院이라는
의료기구를 창설하고,851 이를 통하여 사족들이 주도하는 향촌질
서로 재편해 나갔다. 이는 이들이 추구한 향촌사회의 방향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우선적으로 임란 당시 상주사족의 의병활동을 살펴
보고, 이들이 임란 직후 상주지역을 재건하기 위하여 진행한 여러
사업들 중 향안의 중수와 향약의 시행을 교화론에 입각한 재건이
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상주사족들
의 활동이 집약된 사업인 존애원 창설을 통하여 상주지역 사족들
이 결집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임진왜란과 상주지역 사족의 의병활동
1592년 4월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 동안 동북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이끄
는 일본군 1대는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하여 16일에는 기장機
850 최근 임란 이후 상주지역 사족의 동향에 대해서는 송석현, 「17세기 상주지역
사족의 동향」(영남학 27, 2015)이 제출되었다.
851 存愛院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조된다.
권태을‧김기탁‧김자상‧한기문 공저, 조선최초 사설의료원, 존애원,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원, 2005. ; 우인수, 「조선후기 상주 존애원의 설립과 의료기능」, 대구
사학 104, 2011.; 한기문, 「조선후기 상주 존애원 설치의 배경과 의의」, 상주문화연
구 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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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과 좌수영을 점령하고, 17일에는 양산梁山, 18일에는 밀양, 21
일에는 대구성大丘城을 점령하였다. 왜군이 북상하자 경상도 방
어사 김수는 20日 금호琴湖에 병력을 집결시켜 결전을 시도했으
나, 피난민을 왜군으로 오인하고 병사들이 도주함에 따라 전투를
포기하고 조선군은 칠곡漆谷 석전石田으로 퇴각하였다.852 대구
읍성大丘邑城이 함락될 때 대부분의 군민軍民들은 부사의 인솔
하에 공산성으로 퇴수退守하였고, 주민들은 산곡山谷에 숨었으
며, 미처 피신하지 못한 민인民人들 가운데는 피살된 자도 많았
다. 대구를 점령한 1번 대는 인동仁同‧선산도善山道를 돌파하여
상주를 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이 이끄는 2번 대는 언양
彦陽‧경주慶州를 거쳐 영천永川‧신령新寧‧군위軍威‧비안比安용궁
龍宮‧풍진도豊津道를 지나 문경聞慶에서 1번 대의 뒤를 따라 충
주에 들어갔다가 다시 좌우종대左右縱隊로 나누어 1번 대는 여
주驪州‧양근도楊根道를 따라 한성漢城 동쪽으로 나오고 2번 대
는 죽산竹山‧용인龍仁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나왔다. 한편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3번 대는 김해金海‧창녕도昌寧道
를 따라 좌우로 분진分進하여 그 우종대右縱隊는 무계茂溪 성주
도星州道를 그 좌종대左縱隊는 초계草溪‧거창居昌‧지례도知禮道
를 북상하여 김산金山에서 합치고 영동永同‧회덕懷德‧청주도淸州
道를 따라 한성漢城으로 진격하였다.853 상주는 대구를 거쳐 북상
852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4월 20일‧23일.
853 이수건, 「월곡 우배선의 임진왜란 의병활동 ― 그의 창의유록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13, 1992,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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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의 공격을 받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상주지역의 최초의 전투는 북천전투였다.854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한 조선의 중앙군 약 60여 명과 상주판관 권길‧박걸 등이 밤
세워 소집한 장정 4~500여 명이 25일 왜병과 분전하여 전원이
전사하였다.855 이미 상주에서는 20일 금호전투에서의 패전 소식
이 전해지자 다투어 피신하였고,856 병사들도 모집하기 매우 곤란
한 상황이었다. 이 전투에서 순변사 이일이 인솔한 관군과 상주지
방에서 창의한 의병들이 왜군의 기습을 받아서 종사관 윤섬尹暹‧
이경류李慶流‧박호朴箎 등과 상주판관 권길權吉, 사근도 찰방 김
종무金宗武, 호장 박걸朴傑, 의병장 김준신金俊臣‧김일金鎰 등
수 많은 군사들이 순절하고 패전하였고, 상주의 사족들은 거의 대
부분이 산곡山谷으로 피신하였다.857
상주를 점령한 일본군들은 후방기지를 건설하고 상주에 주둔하
고 있으면서 주변의 용궁‧가은‧화령 등지까지 진출하여 겁략劫略
하고 있었다.858 인근의 수령들은 도주하였으며,859 이에 따라 행
854 북천전투의 개황에 대해서는 이형석, 임진전란사(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74), 258 ~264쪽 참조.
855 임란 이후 상주는 선조로부터 상주 전역에 復戶의 恩典을 입었다(상산지(창석
본) 風俗).
856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4월 23일(상주문화원 편, 상주사료집(1998) 所收,
이하 黔澗壬亂日記는 이 책에서 인용함).
857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4월 26일, 6월 2일‧5일.
858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5월 6일, 6월 27일‧28일. ; 可畦集 권7 「辰巳日記
」1592년 6월 28일, 7월 2일.
859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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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완전히 공백상태가 되고 말았다.860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민들의 이반과 약탈이 수반되면서861 이
제 자구를 위하여 사족들은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에 접어들어 초유사 김성일의 격서로 인하여 각 지역에서의 의병
기의起義가 이루어지자 상주지방에서도 이봉李逢의 창의군倡義
軍862과 김각金覺의 상의군尙義陣863, 김홍민金弘敏의 충보군忠
報軍864 등 여러 방면에서 의병이 조직되게 되었다.865 안동지방
의 경우 김해를 대장으로 하는 연합의진인 안동열읍향병安東列
邑鄕兵이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상주지역의 경우 분산적인 조
직으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860 정진영, 앞의 책, 161쪽.
861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5월 2일‧5일‧28일. ; 可畦集 권7 「辰巳日記」
1592년 5월 21일.
862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7월 30일.
863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9월 13일.
864 可畦集 권7 「辰巳日記」1592년 8월 16일.
865 金覺의 尙義軍은 임진창의록에 의하면 5월에 조직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倡
義錄」, 상주사료집 所收, 이 「倡義錄」은 상주물관에서 발행한 석천집에는 壬
辰倡義錄이라는 題銘의 책으로 영인되어 실려 있다), 이는 산발적인 저항조직이었
고 의병으로 편성된 것은 9월이 되어서 비로소 가능했다(정진영, 앞의 책, 165쪽).
이외에도 金嗣宗과 權署 등에 의하여 6월 이전에 자구적인 조직으로 軍이 조직되기는
하였으나, 6월 15일 경 일본군과의 한차례 전투로 인하여 궤멸되었고, 정경세도
부상을 입는 등 큰 타격을 입고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6월 15일). 후에 金嗣宗이 領兵으로 尙義軍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金嗣宗
부대는 尙儀軍의 前身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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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상주지역 의병 조직866
부 대 직 임 성 명 결성일자
倡義軍
주 장 李逢
1592.07.30 中衛將李天斗
佐 幕全湜‧趙光緩‧趙靖
기 록 蔡天瑞‧洪慶業‧趙靖(겸)
忠報軍
大 將金弘敏
1592.08.16 中衛將李悌慶
佐 幕張天賚‧盧大河‧趙翊
掌 書金弘微‧趙翊(겸)
尙義陣
大 將金覺
1592.09.13 召募官鄭經世‧李㙉‧李埈‧宋亮
領 兵金嗣宗‧盧涵‧金光輻
佐 幕金慶德‧金應德 등 26인
이들 상주 의병 중 형제가 각기 창의군倡義軍과 충보군忠報軍
으로 다른 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조정‧조익), 비슷한
시기에 창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합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
아 분산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전‧이준 형제와 같
은 경우처럼 부모가 같이 일본군에 피살된 경우도 있고,867 정경
세의 경우 아우 흥세興世와 모친이 피살되는 등868 사족들 자신도
안전을 보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869 처음부터 연합작
866 정진영, 앞의 책, 163~165쪽에 의함.
867 상주박물관 편, 석천집 ― 상주 최초의 의병장 김각을 이야기하다, 민속원,
2014, 41쪽.
868 박주, 「조선중기 경상도 상주지역의 효자, 열녀 ― 상산지를 중심으로」, 한국
사론 41‧42합집, 서울대 국사학과, 1999, 591쪽.
869 宋亮의 아들 宋以晦는 여동생과 더불어 宋亮 부부를 구하려다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 었다(愚谷集 권4 附錄「覺悔公墓碣銘」(鄭宗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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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을 펴기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조직된 의병들은 각각 복병을 설치하여 매복전을 시행
하고,870 관군과 연합하여 상주‧함창 등지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상
당한 성과를 올렸다.871 이들은 상호 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으
나, 종시 연합부대를 결성하지 못하였고, 관군의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성과를 크게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 상
주 사족들의 의병활동은 전쟁이 종식된 후 향촌에서 그들이 주도
권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상주 서애학단西厓學團과 교화론敎化論에
입각한 지역질서 재건872
실제로 상주지역에서는 전쟁이 종식된 후 가장 먼저 시도한 것
은 임란 이전 상주사족들의 모임인 낙사계洛社契를 재건한 것이
었다. 낙사계는 임란이전 존재했던 상주지역의 사족들의 모임인
병인계丙寅契‧무인계戊寅契의 참여자 중 임란 이후 생존한 자들
을 모두 합하여 새로운 사족들의 모임을 결성한 것이었다. 이러한
낙사계는 향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상주 사
족들의 결속을 도모하고 사족을 중심으로 향촌질서를 재건하여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873 낙사계의 중수와 아울러 추진된 것이
870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9월 14일 ; 可畦集 권7 「辰巳日記」1592년 8월
24일.
871 정진영, 앞의 책, 169~171쪽.
872 이 장은 김형수, 「17세기 초 서애학단과 상주지역사회의 재건」(민족문화연구
69, 2015) 4장 부분을 재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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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당시 소멸된 향안의 복구였다. 1617년 이전李㙉은 상주의
좌수로 있으면서 강응철康應哲‧정언황丁彦璜‧이대규李大圭와 협
력하여 전쟁으로 소멸된 향안을 복구하여, 아전과 백성을 누를 수
있는 사족을 중심으로 “한 고을에 기강을 세워서 백성들의 풍속
을 바르게” 할 것을 도모한 것이다.874 임란 이후 상주지역을 재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은 정경세‧이준을 비롯한
상주지역 서애문인들이었다. 상주지역은 1580년 류성룡이 상주
873 우복집 권14 「洛社合禊序 己亥(1599)」, “就吾鄕吾黨爲尤盛 稧之修於丙寅
者 皆父老尊長也 其子弟幼少不敢與列焉 又自爲一籍 卽戊寅稧也 每歲春秋 擇良
辰而會飮 必有禮樂 禮樂者何 敬與和之謂也 長者敦乎愛 少者篤乎恭 秩秩焉有序
于于焉以懽 德業則相勸 過失則相規 未嘗以暴戾之色惰慢之容 加之於言語獻酬之
間 經世於其時年甚少 愚且無狀 猶得齒於下席 有所觀效 知其甚樂而無厭也 今年
春 病解職歸鄕曲 兵火之餘 萬事蕭條 非復前日 感念存沒 悲不自勝 一日 父老及親
舊皆來在坐 相與合辭言曰 亂離餘生 幸得復我鄕井 復修舊事 重講好會 在不可已
而平昔朋從 零落略盡 僅有吾輩若干 形影踽踽 不成行序 對坐之際 適足興哀 今不
如合兩稧而一之 共爲忘年之好 蘭亭之稧 少長咸集 此何傷於義理 而必以舊籍爲
拘耶 遂相與講定約條 悉依平日所行而稍增減焉 又言曰 亡者已矣 典刑猶存 則其
子若弟可相遠乎乃就舊籍中有子弟者悉書之 無則書其壻 惟以不忘舊好 無替久遠
爲務 籍旣成 命經世曰 此美事也 子其可無一言乎 謹復之曰 先王之理民也 固欲其
親睦 而民不可家喩而戶曉 則亦敎之孝悌而已 故曰 人人親其親長其長 而天下平
其爲道豈不約而易耶 吾鄕風俗之美 吾猶及見之矣 亦能言之矣 一經變亂 人失常
性 或不知孝悌爲何事 鄕黨之間 時有乖戾之習 彼徐行後長 豈其所難 而亦不肯爲
或欲正言之 則忿氣相形 以若人心 求相親睦而興禮讓之風 豈不難哉 嗚呼 在人者
吾無奈何 但當自盡其在我者而已 稧凡二十四人 有父兄焉 有子弟焉 古人與父兄
言 言使子弟 與子弟言 言事父兄 蓋欲各盡其道也 今日盍相與勉之哉 若夫謳歌賤
伎 尙能變河西齊右之風 又安知同有良知者不爲之觀感興行 而吾鄕忠厚惇睦之風
不自吾黨倡耶 盍相與勉之哉 咸曰善 令書以弁之.”
874 상주지역에서 향안의 중수는 이미 임진왜란 중인 1595년 金鍊‧金體信‧金覺‧康
益敬‧朴汝珩 등에 의해 尙州鄕案舊籍으로 1차 중수 되었다. 그러나 기억에 의해
정리되었기 때문에 20~30%만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1617년 李㙉이 좌수가
되어 2차 정리를 시도한 것이다(우복집 권14, 「尙州鄕案錄序丁巳(1617)」). 李㙉
에 의해 정리된 2차 정리본은 商山鄕彦錄이라는 題銘으로 상주향교에 소장되어
있다(嶺南鄕約資料集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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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로 재임할 당시 문하에서 수학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고, 이
들은 이후 상주지역 사족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875 류성룡
은 부임 이후 매월 초하룻날 향교에서 교생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각 리里에 사장師長을 두고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고, 또한 리吏도 재야에 있으면 민民이라고 하여 관리가 민을
침학하지 않도록’ 하였다.876 상주지역의 문인들은 대부분 상주목
사 시절 수학한 인물들이다. 류성룡의 문인록 중 가장 많은 문인
들을 수록하여 정리한 「서애문현록西厓門賢錄」에는 모두 23인의
상주권尙州圈 문인門人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도시하면 다
음의 <표 2>와 같다.877
875 현전하는 류성룡의 문인록은 2종이 있다. 西厓全書에 실려 있는 「西厓門賢錄
」에는 모두 118명의 문인들이 수록되어 있고, 一愚 洪鍾善(1834~1898, 봉화 거주,
홍우정의 후손)이 편집한 것으로 柳膺睦(1841~1921)의 參訂을 거쳐 1911년 완성한 「厓門諸子錄」(家學淵源錄 所收, 筆寫本)에는 71명이 수록되어 있다. 「厓門諸子
錄」은 西厓全書에 실려 있는 「西厓門賢錄」에 앞서 편집된 것으로 1910년대까지
서애문인의 범주를 확정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애문인들의 지리적 분포는
안동‧예천‧상주‧용궁‧군위 등에 한정되어 있고, 상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친인척으로 구성되었다. 「厓門諸子錄」에 실려 있는 상주지역의 서애문인은 13인(자
질 제외), 「西厓門賢錄」에는 22인이 수록되었다. 19세기 柳台佐도 문인록의 편찬을
시도하였던 것 같으나 완성본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厓門諸子錄」에는 成灠‧成泳형
제 등 서애 문인으로 알려져 있는 서인계 문도들은 제외되어 있다. 이들은 후에
편집된 「西厓門賢錄」에는 수록되어 있다.
876 상산지(창석본) 名宦 柳成龍.
877 만약 함창을 상주권으로 분류하면 상주권 문인은 23명(「西厓門賢錄」)이다.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63
순 성명 자 호 본관 거주지 생년 관 직 비 고
1 鄭經世景任愚伏晋陽(尙州) 1563文/大司憲/贈左贊成/諡文壯
享道南書院‧開寧德林‧慶山孤山‧大丘硏經‧江陵退谷‧尙州愚山
2李 㙉叔載月澗興陽(상주) 1558 司馬/知禮縣監
3李 埈叔平蒼石興陽(상주) 1560生員/文/副提學/贈吏曹判書/ 諡文簡 享玉成‧豊基愚谷書院
4全 湜淨遠沙西沃川(상주) 1563司馬/知中樞府事/贈左贊成/ 諡忠簡임란창의/享玉洞/商山三老
5 孫 汝受鼎翁慶州(상주) 隆慶丁未司馬/贈戶曹參議
{ 按 융경년간에는 丁未가 없다. 己未(1559), 丁卯(1567)중 1 }
6 郭守智 景含浩齋淸州(함창) 1555 參奉임란창의
7趙 翊棐仲可畦豊壤상주 1556 生員/文/掌令 黔澗 趙靖 弟/享涑水書院/임란창의
8 金弘微昌遠省克堂商山상주 1557 進士/文/大司諫后溪 金範 子
9 黃廷幹公直七峰長水尙州山陽1558 進士/遺逸/正郞李榘撰行狀
10韓 瑺子玉杜谷淸州尙州
11 康應哲明甫南溪載寧(尙州) 1562
12 金光斗汝遇一黙齋商山尙州1562
<표 2> 「서애문현록西厓門賢錄」소재 상주권 문인
464 ∙ 국학연구 Vol.30
순 성명 자 호 본관 거주지 생년 관 직 비 고
13金 혜 晦仲松灣商山(상주) 1566 進士/文/豊基郡守
14 趙光璧汝完北溪豊壤(상주) 1566 進士/察訪임란창의
15 金知復旡悔愚淵永山상주 進士/文/司藝/ 贈都承旨金守溫 後
16韓 瑞廷玉佳村西原상주 1568 佐郞/直長임란의병/韓瑺弟
17 金 頲商山상주 文/正郞
18 丘山立平海尙州
19成 泳士涵苔庭昌寧尙州吏曹判書
20 曺友仁汝益頤齋/ 怡齋/ 梅湖尙州承旨享鳳山書院
21成 浹士悅聽竹昌寧尙州縣監/贈參判成泳弟/享雲溪‧勿溪書院/ 一名 灠/ 栗谷‧牛溪門人
22趙 濈和仲花川豊壤尙州生員/文/參判
23黃 紐會甫槃澗長水상주 進/文/校理
상주지역의 서애문인들은 상주지역의 현안이 전쟁으로 황폐해
진 전답 등을 소복하여야 하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878 그러
나 전쟁으로 인한 충격은 이들에게 경제적인 소복보다는 다른 차
원의 질서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인륜의 파
괴는 이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879 결국 이들이 선택한
878 상산지(창석본) 貢賦, “自經兵亂 版籍俱灰 九賦九貢之法 無從可考 正經界
均貢賦 最爲今日之急務.”
879 黔澗壬亂日記 선조 25년 5월 2일‧12일‧19일. 특히 5월 19일의 일기에서
조정은 “한 고을의 사족 집에서 적들에게 더렵혀진 자들이 한 둘이 아닌데 생명을
버려 의를 취하는 자를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분개하였다.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65
전후 질서의 재건은 예교禮敎의 복원이었다. 정경세와 더불어 임
란 이후 상주의 사론士論을 주도하던 이준에게도 가장 중요한 과
제는 예교의 복원을 통한 국가의 재건이었다. 이준은 1632년 올
린 상소문에서 국가가 우선시하여야 할 것은 예교를 회복하는 것
이라고 하고, “나라에 예교禮敎가 있는 것은 나무에 줄기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고 임진왜란 이후 “예교가 폐지되어 패륜하게 되
어”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예교의 복원으로 국가를 복원하여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그는 우선적으로 학교를 정비하여 선비들에게 예학을 학
습시키고 민간에까지 예에 의한 교화가 자리 잡도록 하자고 하였
다.880 그러므로 향리인 상주지역에서도 우선 적극적으로 추진하
880 창석집권5 「請行禮讓之敎疏 壬申」(1632) “…… 竊念國之有禮 如木之有榦
木而無榦則無以自立 國而非禮則亦無以序上下定名分 國不得以安 聖人之治天下
也 制爲秩然之禮 立爲當然之法 頒之學宮之中 設爲師儒之教 講明其理 推行其道
使之有所敬而不敢忽 有所畏而不敢犯 唐虞三代之治 無不以是爲急 玆豈非安上治
民之本 而爲後世之所法也 恭惟聖朝崇尙禮義 旣擧王朝之禮以肅朝綱 且頒鄉約, 鄉飮酒之禮以正民俗 德行以相勸 過惡以相規 其出作而入息者 皆在乎禮法之中
出口而入耳者 亦無非勸戒之語 兵興以後 禮廢不講 傷彝敗倫之變 慘目驚心之患
不待辛有之見野 虜騎之渡江 而禮俗之變於夷習 已可知矣 至於魘魅咀呪之術 本
出於鄙野之俗 豈知偷習漸滋 至竟行兇於大内至嚴之地也 孟子曰 經正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凡此積習之惡 皆由於教化不明 禮經不興 故曰 水防惟土 土潰
而水決 國防惟禮 禮壞而國亂 以此而見之 今之敦五禮之教 復三代之風者 豈不甚
於衣食之救凍餧也 聖明更化 十年于兹矣 而治道未隆於上 俗習猶疵於下 過去歲
月之難追 前古盛業之未復 在廷之臣 尙無以古昔大猷而補益弘化者 豈不以封疆之
有虞 禮樂之未遑也 春秋戰國之際 可謂多事 而孔子有禮讓爲國之訓 孟子有不教
殃民之戒 子産處二強國之間 以禮爲國而不受兵 歷代人主之有意於興化者 尙且講
明禮教於兵戈擾攘之中 故曰 我聞以禮而止亂 未聞作威而防亂 何今日論治之有異
於古耶 伏願聖明毅然奮發 思以新一代之治 必自朝廷先倡禮教 敦厚人倫 以立禮
之本 嚴明法度 以行禮之用 且令儒學之臣通讀禮經 嚴其程課 糾其怠慢 遇有朝廷
變禮 隨處通解 不至如無燭之夜暗中索物 內而成均 外而州學 至如鄕遂閭比之間
遵行讀法 本之以忠信謙遜 習之於儀章度數 如關中之明禮教 湖州之設學政 庶見
466 ∙ 국학연구 Vol.30
여야 할 것은 예교의 회복이고, 이를 위하여 오현五賢을 모시는
도남서원을 건립할 것을 주장한 정경세의 주장에 적극 찬성하여
도남서원 건립의 창설계에 참여하였다.881 그러므로 이준에게 있
어서는 우선적인 과제가 형정刑政과 용인用人이 아니라 바로 학
교의 복구와 향약의 시행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준에게는 우선적
으로 서원에서 교육하여야 할 것은 소학小學으로 사자士子들
이 소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집에서는 효제하고 온공溫恭한 것
이 없고 무리지어서는 농담하고 장난치는 것을 일삼을 뿐이라고
하였다.882
한편 정경세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의
입장에 있었다.883 대동법은 광해군 정권 당시 추진하였던 것이
며, 인조대에 김육‧최명길에 의해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德性堅定而陋習去 善俗日興而弊源革矣 夫禮之於人 如水火之切於日用而不可無
今者爲治則以刑政爲急 用人則惟務奬材能 中外之所注意 惟急於括軍兵加賦稅而
已 至於禮之實用 則視爲第二件事 臣未知先後之序緩急之宜果何如也 更願斷自宸
衷 謀及卿士 依呂氏之約 頒之中外 亦望聖明以此禮而爲躬行之本.……”
881 도남서원지 232쪽 創設稧案 乙巳(1605)
882 창석집권11 「答道南山長」“即承來喩 欲倡率多士勸讀小學 其興學善俗之
意非偶然也 但念士風之瀾倒久矣 處家則非孝悌溫恭之實 群居則以謔浪嘲戱爲業
全然不知小學設敎之爲何事 其橫奔驟決之習 固不可回之於咄嗟之頃 必須在我者
有誠心以爲之本 有學令以驅策之 不以邪慮而汨之 不爲他好所移 然後可見其勸課
之效 無玩愒之失矣 足下於衰邁之境 不以邐迤往來爲難 而慨然於糾檢之事 子曰
子率以正 孰敢不正 又曰 其身正 不令而行 多士聳動之機 政在此矣 一番通讀 固無
益於進修 必須逐朔課讀 使之講貫之體認之 涵而泳之於聖賢義理之訓 反而求之於
日用人倫之間 庶幾誦諸口思諸心 無非所講之說 雖不可驟語以成德之事 亦可謂粗
爲知讀書者矣 然無學令以糾之 則無激發之地 考其勤慢而升黜之 亦勸課之所不可
已 須待鄕老他日之會 嚴立課程 免爲解弛之歸.”
883 대동법 실시 논의에서 정경세가 취했던 입장에 대해서는 이정철, 대동법 조선최
고의 개혁, 역사비평사(2010), 76~77쪽 참조.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67
러나 정경세는 이러한 대동법의 추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드러내었다. 정경세는 “상주 1읍邑으로 논하자면 대동大
同 1결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미米‧두豆 및 기인포其人布‧쇄마
가제색刷馬價諸色을 두루 계산하여도 한해에 목木 2필 정도에
지나지 않은즉 일부一夫에 대략 17필疋을 넘지 않습니다. 지금
선혜청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은 일결一結에 3필을 취하는 것이니
일부一夫로는 24필疋을 거두는 것이니 평년에 거두는 것과 비교
하면 거의 ⅓이나 더해진 것입니다. […중략] 신이 생각하기로는
천천히 생각하고 깊이 강구하여 행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큰 이
익도 없고, 또 큰 손해도 없습니다.”884라고 하여 세수의 증대를
위하여 대동법을 고치고자 하는 입장에 대하여 공박하였다. 즉 대
동법의 확대시행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정경세의 입장은 국가전
체의 세수 확대보다는 향촌지역에서의 소복蘇復을 중시하는 입장
에 서있었던 것이다.885
이들은 결국 임란 이후 질서 재편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예교
의 복원을 들고, 이를 위하여 서원의 창건 및 향안의 복구 및 향약
의 시행을 시도하였던 것이다.886 이러한 학교의 재건과 향약의
시행887 등 예교질서의 수립이라는 관점은 대구와 예안에서도 보
884 우복집 권8, 「宣惠號牌便否議:癸亥」.
885 이러한 정경세의 蘇復論은 향촌의 경제적 재건은 아니었다.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한 예교적 질서의 재건이었다.
886 이준이 임란 이후 상산지를 편찬하면서 상주지역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에 부역한 자가 없었다.”고 애써 강조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887 家學淵源錄 「厓門諸子錄」李㙉, “甲戌(1634) 金公尙宓 承朝旨 行呂氏鄕
約 推公爲正 修巖爲副 爲文告約中曰 聖賢之書 無非此道 而小學一書 尤切於日用
468 ∙ 국학연구 Vol.30
이고 있다.888 상주지역은 이미 1610년(경술)경 향약이 시행되고
있었으며 상주의 향약은 향정鄕正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
다.889 이러한 향약은 동 단위로도 구성되어 각 동별로도 구성되
기도 하였다. 1617년 김혜는 임란이후 퇴락해진 민심을 바로잡기
云云.”
888 김형수, 「17세기 초 대구사림의 형성과 분화 ― 손처눌의 모당일기를 중심으
로」, 역사교육논집 36, 2006 ; 김형수, 「17세기 초 월천학단과 예안지역사회의
재건」, 민족문화연구 65, 2014.
889 창석집 권13 「鄕射堂重修記」, “堂以鄕射名者 卽禮之合鄕射敎飮酒之遺義
也 事之盡禮樂立德行者莫若射 故古聖王之治民也 必以是爲重 立賓主 序老少 相
接以尊讓 而其所以爲敎 則必本於孝悌 由是而恭敬行 無暴亂之禍 貴賤明 有隆殺
之辨 由親而及於長 自家而達於國 孔子之所謂要道 孟子之所謂在邇是也 而三代
之所以治隆於上 俗美於下 皆用此道也 降及後世 禮廢不講 而其意則猶存 今之列
邑皆建鄕堂 而其名號之必取於此者 豈非愛禮存羊之意歟 尙之爲鄕 素稱文獻 旣
有鄕正之設 又有鄕約之行 其相與講明而勸勉者 一以孝悌爲本 是致鄕遂之間蔚有
美俗 少長之際凌節不見 奈何淳源渴而醨風始煽 善俗亡而偸習漸滋 好惡易萌 是
非無眞 至以唇舌細故而失歡意 錐刀小利而起詞訴 惇睦罕聞 乖戾相加 有欲正言
而救之 反致忿氣之形焉 憂世道者不能無思古之歎 蓋有年矣 今年春 宋君彦明爲
鄕正 行講信禮于鄕堂 三讓以賓升 揚觶而告于埈曰 惟我上洛一邦 雖在嶺中 而山
川之秀 禮樂之習 代有耆德以淑諸人 薰陶濡染 易於爲善 十年多難 雖運氣暫否
而一變至魯 將轉移有術 卽今鄕堂鼎新 耆老咸集 此政湔舊習去偸風之一會也 子
盍叙此堂廢興之由 仍下一轉語 以爲反薄回醇之助乎 余乃作而語曰 子之言及此
誠一鄕之幸也 閭比之誼 周制所重 畫溝井樹枌楡 沿人情而設敎 欲民風之歸厚 於
是而有鄕大夫之職 導之以德行 而有不率之糾 今之鄕正 卽古鄕大夫之職也 民彝
天性 亘古不泯 而三物八刑 其具皆在 今欲行之 何待贅述 但請以平昔所慨然者
爲今日座中誦言可乎 喪亂之餘 親朋有幾 晨星漸濶 觸景成悲 是宜轉鄕隣之好 爲
骨肉之情 出入相友 緩急相須 各惇和協之風 勿啓鬪辨之釁 時節往來 愛有浹洽
吉凶慶吊 禮無欠缺 庶幾人人循理 家家興讓 粲粲然有序 融融然相樂 則其於觀感
之際 豈少興起之人 古所謂一人善射 百夫決拾 非虛語也 不然而讌集于玆 惟事號
呶 論州府之政 訐朋友之過 任氣而侵人 循私而背公 險狠爲心 頗僻行己 敗鄕之厚
俗 爲天之弊民 則此實裘㸃之所斥 亦此堂之所不齒矣 堂故邑人韓知縣順所創 而
劬躬董事 有鏤榜掛壁 壬辰之亂 堂與榜俱災 越十九年庚戍 韓侯之孫仲瑩爲鄕正
因舊址而復立 百年文物蕩然灰燼之餘 展拓間架 風采立異 使一鄕之人爲之改觀
仲瑩之於此堂 雖謂之肯搆 非過也 仲瑩名璡 彦明名光國 皆以上舍提鄕紀 有志於
正鄕俗者也.”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69
위하여 서애 류성룡의 「신정십조新定十條」를 원용하여 향리에서
동약洞約을 실시하였다.890 류성룡의 「신정십조」에서 특이한 것
은 ‘훈동몽訓童蒙’조가 첨가되어 학행이 있고 사표가 되는 자를
선정하여 소학지도小學之道로 가르치고 재주가 있는 자는 녹명
錄名하여 향교에 진학시킨다는 점이었다.891 류성룡의 「신정십조
」가 원용되었다는 것은 상주지역의 향촌운영 방침에 류성룡의 입
장이 하나의 준거틀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주지역의 향약 시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은 이준李埈이
었다. 이준은 향약의 시행을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실
제로 향약의 시행을 도모한 적이 있었다. 이준은 당시 향약의 시
행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선비들의 학문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김세렴의 현풍향약을 준용할 것을 도모하기도 하였다.892
890 영남향약자료집성 116 「洞約序」(김혜, 송만일고 권1).
891 영남향약자료집성 48 「新定十條」(영가지 권5).
892 창석집 권11 「與鄕約都廳」, “約條相議之事 自有前修已講之具 規模旣備矣
其間節目 雖有一二或添者 此不過措置中一事 欲望直月各就其所居之里 逐朔一會
講之精明 使之耳濡而目染 行之堅固 使之身履而心安 如魚之游泳江湖 到處皆水
則風俗之變 自覺月異而歲不同矣 大槪人於此事 須有誠心 然後有所得之實 張子
曰 敎之而不受 則雖强吿之無益云 必以眞實爲心 刻苦着力 庶可相與持循 而有向
上之望矣 若倨傲以爲習 輕浮以自養 無克己從善之心 有敗群不率之害 雖有良法
美敎 恐無救拔自家處矣 道之全體雖高且大 其要則實在於日用細微切近之間 聖人
設敎 皆以孝悌爲本 周禮師氏之官敎三行 一曰孝行 以親父母 二曰友行 以尊賢良
三曰順行 以事師長 孔子以孝而爲至德要道 孟子以親親長長而爲天下平之本 然其
爲敎 不過使人反而求之至近之中 以開其講學之端 馴致日滋月益 而漸趨於道之全
體之大也 自后溪諸老倡興孝敬之道 後人皆知事親之爲人倫日用之常 而今獨於悌
長一節 不知其事之與孝爲一物 若於此而歧而二之 則聖人之言孝 何乃與悌竝擧
而小學立敎 何乃以少事長共率是而言於事親之下乎 橫渠所謂驕惰凶狠之習 其來
非一日也 雖然 此非士之罪也 良由於敎不素明 學不素講也 今幸以呂氏之約 而將
講於一鄕 此豈非禮俗興行之一大機會也 欲變鄕風 須以變士習爲先 士習旣美 鄕
約之行 正如牛刀割鷄也 金道源苞山鄕約 以學規爲先 其意甚善 亦可以倣而行之
470 ∙ 국학연구 Vol.30
이는 임란 이후 혼란한 사회의 여러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
서 상주지역의 향권鄕權을 둘러싸고 향청에서 삭적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또 향회에서 격론을 벌여 상호 비방하는 사태까지 벌어
졌으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한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기 때문이
다.893 이러한 상황에서 이준은 향중에서 폐습을 바로잡기 위하여
풍속을 해친 사례를 일일이 적시하였던 것이다.894 그러므로 이준
은 향교의 여러 인사들에 서한을 내어 향약 시행을 위한 모임을
가질 것을 제의하고,895 당시 현풍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김세
렴의 현풍향약을 상주지방에 적용할 것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
也.”
893 창석집 권11 「與一鄕」, “[전략] 鄕黨乃父老宗族之所在也 其禮至嚴 而若其
相好之義 則有骨肉之情 故先儒有言曰 千金難買是鄕隣 又曰 少少乖忤 務相涵容
時節徃來 恩意浹洽 此豈非居鄕之所可佩服而造次無忘者乎 嘗聞他郡之俗 有以眉
睫之失 多至於攘臂相加 心常恨之 豈意近日某某之事有類於是也 夫以不近之累而
被之於身 至削鄕薦 此雖常情所忿 然而鄕堂公會之地 何可於怒目相向乎 此某之
所以先失其道也 某旣有次骨之憤 則某於相知之間 宜愓然心思 以遜言而解之 而
今不能然 乘醉怒罵 負屈爲愧 終靳一謝 撕捱之甚 遂至於兩敗俱傷而後已 是與昆
蟲之相噬而自殘其軀 無甚别也 論其失則齊,楚同科 攷諸古則廉,藺可愧 此而不
論 俗習相沿 吾鄕禮義之地 終成爭鬪之風 相規之義 所不可廢也 兩皆相知 非有予
奪於其間 願一鄕之諒之也.”
894 창석집 권11 「與鄕堂」, “鄕會欲獲尾英游 未知此計無謬悠否 記文拈出語
似傷忠厚 然欲提起下段相糾事 則必先言其弊習 文字間抑揚之體然也 齊魯之邦
孔孟遺敎在焉 而其間傷風駭俗之事 在前史可見 然中國之人 不以是倂詬其地 若
稱禮義之俗 必以二邦爲首 以我東而言 推火與宣城亦稱文獻 而佔畢齋以誹謗官府
驕淫相尙 倡言于鄕而直斥之 退溪先生亦以强弱相軋 習俗漸訛 至形於記文 況此
所言 只是些些不緊之語 而本無所指斥 則恐無傷於吾鄕之厚風也 僉敎雖如是 而
意涸文澁 不得刪改.”
895 蒼石先生續集 권4 「與校中諸老友」, “[전략] 窃念本月初四 乃州學釋菜之
日也 進參大祭 此是所願 而老人筋力 實所未逮 但有一事相議者 藍田之約 略擧其
槩 行之一鄕者 誠有所不容緩緩者 而荏苒因循 尙未修擧 見義不爲之責 實有所當
之者矣 先進乃一鄕之望 賢者是禮義之倡 以上游名義之地 其不思爲四鄰之倡乎
倘於罷祭後 相聚校中 另議可擧頭緖耶.”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71
러한 이준의 노력은 조정趙靖 등의 협력을 얻어 상주에서 향약鄕
約을 실시할 수 있었다.896
당시 전쟁의 혹독함을 겪은 경상도 사족들은 무엇보다도 형정
刑政을 비롯한 국가적 질서의 정비보다는 향촌단위에서 교화를
통한 인륜의 회복을 더 우선시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교 중심
의 소복책을 추진한 인물들은 상주에 근거를 두고 있는 류성룡의
문인집단이었다. 이들은 도남서원을 중심으로 사족의 구심점을
마련하고자 하였고, 향약을 실시하여 ‘세족世族’들이 주도하는 향
촌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4. 존애원存愛院의 설립과 상주사족의 결집
이러한 상주지역의 재건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
던 것이 존애원存愛院이었다. 존애원이 설립된 것은 임진왜란이
종식된 지 1년 뒤인 1599년이었다. 임진왜란은 전국적으로 많은
피해를 주었고, 상주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주지방은 초기 관
군이 실질적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임란 직후에는 농지의 황폐화와 아울러 유민의 발생으로 인하여
전전戰前에 비하여 경작지가 ⅓에 불과하였다.897 그러므로 상황
896 창석집 권10 「與趙安仲靖」, “近日動靜若何 生 再昨低此 今與數三年少 上
東皐 望裏秋山有佳色 恨不與老兄同賞也 頃見鄕所通文 明日之會 是一州大擧措
也 城主於新政之初 慨然以淑人心變俗習爲意 欲行藍田之約 吾儕老人 頃先倡率
鄕人 以助成美事 想老兄必投袂而起 以爲一鄕之倡也 生 數日勞攘之餘 頗覺困頓
而然必欲策蹇而進耳.”
897 상산지(창석본) 「田賦」, “元額 陸田七千三百七十八結 水田六千六百七十
六結 廩陸田二百十一結八十二卜 水田四百十五結 續陸田七百七十二結 水田一百
三十八結 右平時結數 陸田一千四百七十結 水田二千三百四結 右兵後 癸卯量田
起耕結數.”
472 ∙ 국학연구 Vol.30
에서 향촌사회의 복구는 경제적 소복蘇復이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898 경제적 소복을 위해서는 인적 자원을 확보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정경세에 의해 존애원 건립이 발
의된 것도 이러한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899
정경세는 1599년 성람成灠과 의논하여 존애원을 설립하였
다.900 정경세가 존애원을 설립하고자 한 1599년은 그가 경상관
찰사를 사임한 직후였다. 정경세가 경상관찰사를 사임한 것은 정
인홍과의 알력 때문이었다. 정경세는 당시 의병을 지휘하던 정인
홍과 의병해산을 놓고 갈등을 벌였다. 당시 국가에서는 적이 일시
물러가자 의병을 해산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의병을
해산하지 않았고, 정경세는 정인홍의 휘하 병사들을 체포하여 힐
난하였다. 그 후 이귀李貴가 영좌소모관嶺左召募官으로 내려왔
을 때 정경세를 만나 정인홍의 행동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이귀는
곧 정인홍의 비위非違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정경세의 말
로 증거를 삼았다. 이로 인하여 헌대憲臺에서는 정경세를 공격하
는 상소를 올려 정경세는 파직되었다.901 낙향한 정경세는 고향인
상주로 낙향하여 전후 상주지방의 소복을 위하여 의국醫局인 존
애원을 창설한 것이다.902
898 상산지(창석본) 「貢賦」
899 정경세가 성람 등 상주 지역 서애문인들과 논의하여 醫局이었던 存愛院을
창설한 것은 스승이었던 류성룡의 성향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류성룡도
의학에 관심을 기울여 鍼經要訣이라는 의학서를 직접 편찬하기도 하였다.
900 창석집 권13, 「存愛院記」
901 우복집 별집 권4, 年譜 선조 35년 2월.
902 상산지(청대본) 「學校」存愛院, “在外南 萬曆己亥刱設 本醫局 李埈有記”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73
존애원은 비록 정경세가 발의하였지만 상주지방 사족들의 힘을
결집한 것이었다. 당시 존애원 창설에 관여한 인물들은 대부분 상
주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고, 전후 낙사계에 참여한 인물들이었
다. 당시 존애원 창건 당시 참여 인물을 도시하면 <표 3>과 같
다.903
및 창석집 권13 「存愛院記」“吾黨有達官者 慈悲如菩薩 抱負皆經濟 往在己亥秋
罷官家食 一日 諗于其友成士悅曰 吾人以血肉之軀 受寒暑之侵 病有四百之攻 藥
無一二之備 往往有非命而死 其不同於巖墻桎梏之歸乎 今公以詩書之學 而通岐黃
之術 公之心卽古人禱靈祠之心也 其可視一體痛痒 而漠然不以槩諸心耶? [중략] 余時適縻郡印 不得與斯舉, 而見諸公用意之勤 綜理之密 未嘗不義其事而樂其成
效 今因諸公之屬 識其起事之由 且以勉來者於後日 而其施置之目則有院規在 此
不書 達官謂誰 愚谷鄭公經世也 記之者誰 拙修翁李埈也.”
903 송석현, 앞의 논문, 339~340쪽의 표를 바탕으로 필자가 수정‧첨가한 것이다.
의병 여부는 권태을‧강경모, 존애원지(상주존애원, 2007) 및 黔澗壬亂日記‧可
畦集권7 「辰巳日記」에 의존했고, 서애문인 여부는 西厓門賢錄(서애전서본)
및 존애원지를 따랐다.
474 ∙ 국학연구 Vol.30
참여자 본관 생몰년 관직 낙사계참여 의병
서애문인
비고
金 鍊昌原1534 ~ 1603 幼學丙寅稧尙義軍
宋 亮礪山1534 ~ 1618 前參軍丙寅稧尙義軍
金 覺永同1536 ~ 1610 前縣監丙寅稧尙義軍
鄭而弘晋州1538 ~ 1621 前直長尙義軍
鄭而慶晋州1539 ~ 1576 幼學丙寅稧(?) 鄭而弘
從弟
尹 瑱茂松1541 ~ 1612 前縣監丙寅稧, 戊寅稧
金應德尙州1544 ~ ? 幼學戊寅稧尙義軍
李彦博全州1546 ~ ? 海川令
康應善載寧1548 ~ 1622 幼學
金之衍商山1554 ~ 1603 幼學戊寅稧尙義軍
黃顯元長水1555 ~ 1620 幼學
金有聞商山1557 ~ 1619 幼學義 兵
李 㙉興陽1558 ~ 1648 幼學戊寅稧尙義軍○
金知節永同1558 ~ 1618 幼學戊寅稧金覺子
李 埈興陽1560 ~ 1635 郡守戊寅稧尙義軍○
康應哲載寧1562 ~ 1635 進士戊寅稧義 兵○ 연보
金光斗尙州1562 ~ 1608 幼學戊寅稧義 兵
鄭經世晋州1563 ~ 1633 前監司戊寅稧尙義軍○
金知德永同1563 ~ 1620 幼學金覺子
鄭鳴世晋州1564 ~ 1589 幼學尙義軍
宋以脩礪山1564 ~ 1613 幼學宋亮子
金知復永同1568 ~ 1635 幼學○ 金覺子
康伏龍信川1570 ~ ? 幼學○
鄭而龍晋州1572 ~ 1605 生員
韓 瑺淸州1562 ~ 1634 幼學追入○
權 鼈醴泉1589 ~ 1671 幼學追入
成 灠昌寧1556 ~ 1620 幼學修行○
孫 禟慶州1567 ~ 1629 幼學修行○
韓 瑞淸州1568 ~ 1607 幼學修行○
禹成績丹陽1578 ~ 1637 幼學修行
<표 3> 「존애원수정안좌목存愛院修正案座目」 명단(30인)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75
존애원 건립을 주도한 이들은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임란 의병
들이 중심이 되었다. 추입追入과 수행修行 6인을 제외한904 최초
창건 인물들 중 13명이 상주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인물들
이며, 서애문인이 6명이다.905 이 중 정경세‧이준‧이전 등은 서애
문인이자 의병 참여자이다. 이는 존애원의 창설에 있어서 의병참
여자들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존애원의 창
건과 동시에 이루어진 낙사계의 참여자들이었다.906 이준이 「존애
원기存愛院記」에서 “흔쾌하게 힘 보태기 바랐던 여러 벗들”이라
고 표현한 사람들은907 바로 낙사계의 구성원들이었던 것이다. 그
러므로 존애원은 비록 의국醫局으로 창건되었으나, 임란 이후 상
주사족들의 중심이었던 낙사계원洛社契員들이 전폭적으로 참여
함으로써 상주사족의 구심점이 되었다.908
당시 존애원 설립에 참여한 인물들 중 정경세鄭經世와 이준李
904 송석현은 「존애원수정안좌목」은 최초 설립되었던 1599년에서 1603년 사이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이해하고 추입과 수행은 처음 존애원이 설립되었을 당시 참여자는
아닌 것으로 보았다(송석현, 앞의 논문, 342~343쪽).
905 당시 존애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했던 成灠이 修行으로 기재된 것은 성람이
낙사계의 참여인원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람은 처가를 따라 상주로 이주하
였기 때문에 재지적 기반이 약하였기 때문에 창녕성씨로는 1596년 최초로 상주향안
에 등재되었다(「尙州鄕彦錄」上 1596년).
906 우인수, 앞의 논문, 16쪽.
907 창석집 권13 「存愛院記」, “諸士友亦訢然願致力.”
908 이러한 존애원의 역할은 도남서원 창건과 이후 연속된 서원의 창건으로 인하여
축소되고, 그 역할을 도남서원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도남서원의 창건을 발의한
것은 정경세를 비롯한 상주 사족들로 류성룡의 문인으로 좌정한 자들이 중심이었다.
정경세와 전식 등 상주지역 서애학단 사림들은 도남서원을 창건하여 상주지역 퇴계학
파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정경세를 비롯한 상주사림들이 상주에
연고가 없는 五賢을 상주의 서원의 주향으로 세우고자 한 목적이기도 했다.
476 ∙ 국학연구 Vol.30
埈은 전식全湜과 더불어 ‘상산삼로商山三老’로 불리면서 임란
이후 상주 지역사회의 재건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이들과 더불어
존재원 창건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이준의 형 이전李
㙉과 송량宋亮(愚谷, 1534~1618)‧강응철康應哲(南溪,
1562~1635)‧김각金覺(石川, 1536~1610)을 들 수 있다. 송량은「
애문제자록厓門諸子錄」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나, 상주지역의 서
애계 인사로 임란 이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비록 류
성룡의 문인은 아니나, 류성룡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였을 때 류성
룡과 함께 향교에서 강석講席을 열었고, 이후 류성룡의 문인들인
정경세‧이준 등과 더불어 도남서원의 창건을 주도하였다.909 강응
철은 류성룡의 상주목사 시절 급문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함창
의 사인들과 더불어 이봉李逢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전후 정경세 등과 함께 1602년 존애원의
창설, 1606년 도남서원의 창설 등을 주도하였다.910 김각金覺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상의군尙義軍의 대장으로 상주일대에서 유
격전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사천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상주의 대
표적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911
존애원은 이렇듯 1599년 상주지역의 사족들의 협동으로 설립
되었다.912 존애원의 설립 목적은 우선적으로 의국醫局이었다. 그
909 愚谷集 권3 附錄「行狀」(許厚)
910 南溪集 「年譜」1580‧1602‧1606년.
911 상주박물관 편, 석천집 ― 상주 최초의 의병장 김각을 이야기하다, 민속원,
2014, 20~21쪽.
912 존애원의 설립은 1599년이었으나, 존애원의 건물인 存愛堂이 세워진 것은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77
러므로 설립 초기에는 “우리나라 약재는 노는 일손들을 모아 채
집하게 하고, 중국 약재는 쌀과 베를 내어 무역하게 하였다. 약재
가 갖추어지자 출납할 장소가 있어야 하기에 곳간을 지어 관리하
였고, 또 찾아오는 병자가 날로 늘어나자 머물러 숙박할 곳이 있
어야 하므로 집을 지어 병자들의 숙소로 삼았다. 약을 팔 때는 값
대로 받았는데, 원금은 보존하고 이윤을 늘렸으며, 그것으로 창고
를 채우고 여러 약재를 모두 마련하여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주었으니, 그 효과가 민간에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고913 할 정도
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존애원은 의국으로서 시작하였으나 실재 활용은 사족들의 전반
적인 향촌 활동에 모두 이용되었다. 존애원 건물이 갖춰진 1602
년 12월에 여러 사족들과 중용을 강독하는 것을 시작으로914
1607년에는 향촌의 부로父老들을 초청한 백수회白首會를 개최
하고,915 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정경세는 1605년 김상용이 상주
목사로 부임하자 그를 존애원으로 불러 모임을 열기도 하고,916
숙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917 존애원이 청대본 상산지 서당조
에 들어간 것도 단순한 의국의 기능만이 아닌 사족들의 교육, 집
1602년이었다(한기문, 앞의 책, 42쪽).
913 창석집 권13 「存愛院記」, “於是鄕藥則募游手而採之 唐材則出米布以貿之
材料旣備 不可無出納之所 於是營庫間以貯之 賓旅日集 不可無止泊之處 於是立
堂宇以待之 賣藥而受直 存本以取殖 倉儲充牣 諸料皆辦 有求輒應 獲效如響.”
914 愚伏集 卷4 「年譜」, ‘十二月 與諸生會存愛院 講中庸’.
915 愚伏集 卷14 「稧中爲高年設宴請文」.
916 仙源遺稿 「仙源先生年譜」1605년 “十月 與愚伏鄭公經世 會于存愛院”
917 愚伏集권10 「答李叔平」“明日當宿于醫舍 倘可蒙枉否 餘俟面罄”
478 ∙ 국학연구 Vol.30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918
존애원의 활동은 17세기 중엽 급격히 쇠퇴하였다. 이전의 아들
이신규李身圭가 17세기 중반 이미 재원이 부실해져서 운영이 어
려움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아919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의국으로
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920
존애원은 설립초기 의국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사족들의
강학 장소로 활용되었지만 1607년 도남서원이 새로이 창건됨으
로써 사족들의 강학 공간으로서의 기능과 공론형성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도남서원으로 넘겨주었던 것으로 보인다.921
918 송석현, 앞의 논문, 343쪽.
919 우인수, 앞의 논문, 25쪽.
920 송석현은 존애원의 쇠퇴를 도남서원의 창건과 연결짓고 있다. 즉 송석현에
따르면 도남서원 건립 이후 공론 형성의 역할이 도남서원으로 옮겨지고, 존애원은
단순한 남촌지역 사족들의 교유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이해하였다(송석현, 앞의 논문,
346쪽).
921 도남서원의 창건당시 서원 창건을 발의한 인사들은 모두 6인으로 康應哲‧宋亮‧
金覺‧鄭經世‧李㙉‧李埈이다. 이들은 모두 존애원의 창건 당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인사들이다. 도남서원의 창건에 있어서 류성룡의 자문을 받아 주도하였던
인사는 정경세였지만, 宋亮의 역할도 매우 두드러졌다. 송량은 도남서원 건립을
반대하는 인사들을 강력히 규제하고, 鄕罰에 처할 것을 규약으로 정하기도 하였다(
愚谷集 권1 通文「道南書院刱建時定約通文 附條約」). 존애원을 창건할 당시 주도
하였던 인물들이 도남서원의 창건 당시 주도인물들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것은 존애원
과 도남서원의 관계가 매우 밀접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향촌사족
주도의 이러한 향벌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낙사계와 존애원을 중심으로 결집한
상주 사족들의 향촌 장악력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79
5. 맺음말
16세기에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사림세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지역사회의 주도세력으로 확고히 자리
를 잡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
다. 이후 사족들이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족들의 의병활동에도 상당한 원인이 있었다.
상주지역은 임란 초기 북천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사족들은 구
심점을 잃고 산곡山谷으로 둔거遁居하였으나, 7월부터 초유사 김
성일의 격서 및 선조의 교서 등으로 인하여 각 지역에서의 의병
기의起義가 이루어지자 상주지방에서도 이봉李逢의 창의군倡義
軍과 김각金覺의 상의군尙義軍, 김홍민金弘敏의 충보군忠報軍
등 여러 방면에서 의병이 조직되게 되었다. 이렇게 조직된 의병들
은 각각 복병을 설치하여 매복전을 시행하고, 관군과 연합하여 상
주‧함창 등지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이들은
상호 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연합부대를 결성하지
못하였고, 관군의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성과를 크게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 상주 사족들의 의병활동은 전쟁
이 종식된 후 향촌에서 그들의 주도권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상주지역의 사림들은 지역사회의 재건을
도모하게 되었다. 상주지역의 재건과정은 주로 상주지역의 서애
문인들과 의병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전‧
이준 형제가 전쟁 이후 상주지역에서 우선적으로 추진했던 향안
480 ∙ 국학연구 Vol.30
의 중수‧향약의 시행 등도 상주지역 서애문인들의 향촌관과 밀접
한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경세 등에 의해 설립된 존
애원은 의국醫局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상주지역 사족들의 구심
점으로 기능했다. 존애원의 창건에는 정경세‧김각 등 임란 당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낙사계원洛社契
員들이 전폭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정경세와 이전‧이준 형제가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상주지역 서애학맥이 상주지역의 향촌
운영에 있어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상주권
서애문인들은 도남서원의 창건을 구체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상주지역의 서애문인들은 상주지역의 현안이 전쟁으로 황폐해
진 전답 등을 소복하여야 하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충격은 이들에게 경제적인 소복보다는 다른 차원
의 질서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인륜의 파괴
는 이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결국 임란 이후 질
서 재편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예교의 복원을 들고, 이를 위하
여 존애원의 창건과 향안의 중수 및 향약의 실시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 2016. 07. 11 : 논문투고 ∙ 2016. 07. 28 ~ 08. 12 : 심사
∙ 2016. 08. 16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
【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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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ˆ】임란직후 상주 지역질서의 재편과 존애원 ∙ 485
Abstrac
t
The Reorganization of Order in the Sangju areas
and Jonaewon(存愛院) after Japanese Invasions
of Korea
―
Kim, Hyeong-su
Advanced Center for Korean Studies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 was truly a shocking
historic event for the Joseon Dynasty. In particular,
Kyoungsang province where the ravages of the war had been
worst needed the restoration of new order. Gentry played key
roles in reconstruction after the war as taking the leadership
in the local history from activities of voluntary army at th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The gentry in the Sangju areas lurked in the mountain for
losing their central roles for being defeated at the Bukcheon
battle (北川戰鬪) in the beginning of the war. However, due
to the authority of King Seonjo’s message and Kim seongil’s
manifesto, Kim gag (金覺), Kim hongmin(金弘敏), and Lee
bong(李逢) had considerable successes at fighting the Japanese
through raising voluntary army.
They promoted to reorganize local community with
486 ∙ 국학연구 Vol.30
Seoae’s followers after the war. Kim gag, Jeong kyoungsae(
鄭經世), Lee jun (李埈), and Lee jeon(李㙉) played leading
roles in taking the direction of reconstruction, which prioritized
the edification issues related to the remolding of
Hyangan and enforcement of Hyangyak. They also executed
medical activities with establishing a public clinic, Jonaewon.
Although Jonaewon(存愛院) started a medical clinic, it
was also used as a place for educational purpose and party
for the elderly. It lost its main function as a public clinic for
financial trouble in the mid-17th century. In addition, Donam
seowon(道南書院), founded in 1607, became a central place
for academic meeting and formation of public opinion among
gentry.
Seoae’s followers in the Sangju areas recognized that the
most urgent issue was the recovery of devastated fields after
the war. However, the damage of war motivated them to establish
a different kind of social order rather than economic
recovery. Destruction against humanity during the war was
the most shocking problem to them. Therefore, they decided
to reestablishment of Enlightment for civility(禮敎) as the most
critical task in reorganizing social order. For such a purpose,
they tried the establishment of Jonaewon, Hyangan, and
Hyangyak.
Key words
: Jonaewon(存愛院), voluntary army, Jeong kyoungsae(
鄭經世), Lee jun(李埈), Enlightment for civility(禮敎)
|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