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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율격미를 살린 현대수필 창작법
- 「강시 경력」 외
서태수
※ 필자 주: 수필가들의 율격미 이해에 도움이 되게 해달라는 출판 편집자의 요청에 따라 (*) 속에 필요한 설명을 삽입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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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수필의 현주소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한국수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한국 현대수필의 발전 문제는 공시적으로는 전통문학의 연면한 계승과 아울러 통시적 보편성의 확인으로 그 창작의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특히 전통 요소의 계승은 전통의 부활이 아니라 한 집단이 잃어버린 성정의 회복을 유도하면서 독서의 격조 높은 재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발현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와 현대가 시공의 보편성으로 통합될 때 현대 한국 현대수필의 확고한 공간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신라 향가에서부터 조선 후기의 판소리에 이르기까지의 고전문학 중 현대수필에서 창출 가능한 세부적 요소는 구성미構成美, 율격미律格美, 문체미文體美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중에서도 수필의 형식미학을 중심으로 원용援用 가능한 한국문학의 전통적 기법 가운데 율격미의 접목을 모색해보겠다.
(* 율격미란 문장에서 주로 단어의 배열과 글자의 수에 의하여 일정한 리듬감을 자아내게 하는 것으로, 동일 구조로 반복되는 소리의 질서이다. 한국어에서는 소리의 장단이 주로 이용되는데, 이 경우 음수율에 의한 3-4조, 7-5조를 많이 사용하며 이들은 4 또는 3음보율로 형성된다. 음보율音步律이란 현대음악의 박자와 비슷한 개념으로 시조는 3-4조를 기반으로 하는 4음보 율격의 정형이고, 민요 아리랑은 3음보 율격이다.)
(* 참고: 4음보 예시 / 3-4-3-4조의 기본 음수율)
청산리 / 벽계수야 / 수이 감을 / 자랑 마라
일도 / 창해하면 / 다시 오기 / 어려우니
명월이 / 만공산하니 / 쉬어 간들 / 어떠리
(*참고 : 3음보 예시 / 3-3-4조로 형성)
아리랑 / 아리랑 / 아라리요
아리랑 / 고개로 / 넘어간다
(*참고 : 3음보 예시 / 7-5조로 형성)
나 보기가 / 역겨워 // 가실 때에는
말없이 / 고이 보내 // 드리오리다
이 율격미는 고전문학에서는 필수적 장치였으나 현대문학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배제해버린 미학이다.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율격미의 필요성이 필요한 까닭이다. 김준오 교수는 그의 시론에서 “현대시가 리듬을 외면한다는 것은 감수성의 분리가 아니라 정서의 상실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따라서 정형정신에 입각해서 창출된 현대시조가 지닌 현대적 의의는 자유시가 잃어버린 정형적 서정을 시조적 리듬을 통해 보완하여 대중의 운율적 향수를 자극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 역할의 일부를 전통수필을 통해서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정형에는 리듬이 창출된다(* 리듬은 시간의 등장성等長性 속에서 형성된다. 즉, 동일 요소가 일정 시간을 간격으로 반복될 때 리듬이 생기는 것이다. 음악의 박자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형에도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하나의 특징적 정형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변주變奏가 이루어지는 것이 문학이다. 마찬가지로 수필이 산문이라 할지라도 굳이 율격을 천편일률적으로 배격해야 할 이유는 없다. 고전문학작품이 정격 속의 변격을 구사했듯이(* 고전 작품은 운율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지만 개별적으로는 다양한 변주의 작품들이 탄생한다. 일례로 엄격한 정형인 시조에도 엇시조, 시설시조 등의 변주가 형성되었다) 현대문학작품도 산문 속에 율격을 가미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모든 전통문학은 그렇게 획일적 구조를 지닌 양식이 아니었다.
율격은 고저, 장단, 강약의 규칙적 반복에서 형성되지만 한국 전통 율격미는 특정 보격步格을 기반으로 하면서 변주變奏를 형성하는 기법이다. 전통의 정격음보定格音步에는 2음보, 3음보, 4음보가 있다. 운용 방법도 정격률, 변격률, 자유율, 혼합률 등 다양하다(* 정격율: 3음보, 4음보 등의 규칙성 / 변격률: 규칙과 불규칙 율격의 혼용 / 자유율: 산문문장에서 얻어지는 자유로운 율격미 / 혼합률: 여러 종류의 율격이 혼재하는 경우).
4음보는 기본 음보인 2음보의 중복으로 정적靜的인 요소가 강하며, 3음보는 고려가요와 민요 등에서 주로 운용되어 동적動的인 특성이 있다. 문학작품에는 사설시조, 가사 등에서 나타나는 4음보격이 일반적인데 이는 조선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연관이 있다.
율감律感은 모든 문장을 통어統御한다.
문체미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어조語調다. 어조는 어휘, 조사, 어미 등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겠지만 특히 율격미가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공격적 내용도 율격에 실어 표현하면 부드러워진다.
한 편의 작품 속에는 작가가 의도하는 미적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산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집합적으로 엮이어 구조적으로 직조된다. 예컨대 율격미의 문장도 전반적으로 흐르는 산문율 속에 정격과 변격이 교차되기도 하고, 여기에 다시 각양각색의 문체미와 다양한 구성미가 뒤섞여 총합적으로 그려진다.
현대수필은 산문문학이므로 조선의 가사문학처럼 한 편의 작품을 통째로 정격률로 구사할 필요는 없다(* 가사문학은 시종일관 철저한 4음보 율격의 정형 구조이다). 반면에 시조는 4음보 정형률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장편 사설시조는 상당한 변격을 유도하는데 이러한 기법을 수필에 구사하면 율감이 출렁거리면서 흥취를 돋운다. 필자는 현대인의 서정적 율감에 맞게 일반적으로는 산문율을 바탕으로 하면서 적당한 조율에 의한 정격률과 변격률을 다채롭게 변주해보았다.
필자의 창작 과정에서 율격미를 원용한 작법 유형을 작법상의 전반적 운용 기법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격률, 변격률, 대구율對句的, 산문율 등을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복합적으로, 때로는 다면적 교집합으로 구사한다(* 대구율: 수사법상의 대구가 형성하는 율격 / 산문율: 산문문장에서 얻어지는 자유로운 율격미).
2. 율격미에 맞추어 주제와 제재의 성격에 따른 문체미를 구사한다.
3. 독자의 흥미 유도를 위해 화소話素(motif)의 효과적 배치를 통한 구성의 긴밀성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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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전체를 정격률에 기반하여 부분적 변주를 구사한 장편 사설시조의 보법을 원용한 작품은 「강시 경력」과 「쥐구멍에서 쏘아 올린 큰 공」이다. 「강시 경력」은 초장과 종장은 정격을 구사하면서 중장에 해당하는 부분은 매우 긴 사설을 펼쳤다. 4음보 정격과 파격을 부정기적으로 혼용하여 읽기의 변화를 유도했다(* 각 음보마다 /으로 표시하고 4음보 종결 부분에는 //으로 표시). 내용은 문단 세계에도 팽배한 군대식의 선배의식을 풍자했다. 특히 경력 단절 후 노령에 복귀한 자들의 선배연先輩然하는 행태를 사설시조의 풍자, 해학의 기법을 운용하면서 조롱했다.
강시僵屍가 / 겅중껑충 / 백주대로白晝大路 / 활보한다.
(* 시조 초장 형식과 동일한 4음보 율격. ‘겅중껑충’은 평음과 경음, 격음을 활용한 언어유희적 희롱)
완벽한 / 재생 능력 / 회색피부 / 이식 후에 // 백마금편白馬錦鞭 / 명품 옷에 / 귀빈貴賓으로 / 납시셨다. // 희번덕 / 이마에다 / 똥별 계급 / 하나 달고 // 굵직한 / 목덜미엔 / 녹슬은 / 청동 군번줄! // 딸랑딸랑 / 매달고는 / 여덟팔자 / 걸음이다.
(중략)
애시당초 / 허장성세 / 무적無籍의 / 허공 경력, // 허풍쟁이 / 장삿속의 / 과대포장 / 튀밥 경력,//(* 이상 4음보 율격) 교활한 /사기꾼의 / 애매모호 / 카멜레온 / 경력이라.(* 5음보의 변격으로 사용) // 이놈들은 증서로 대조해 보면 근거는 빈 깡통이라 들통나기 마련이지만. 허나, 어디 세상살이가 이런 시시콜콜 일상사를 일일 대조하겠더냐. 마음씨 고운 대중들이 지레짐작으로 알고 입을 다물 뿐이렷다. 눈앞의 오리너구리라. 오리로도 보고 너구리로도 보면서 대충대충 외면하지.(* 고정 율격을 배제하고 자유 율격, 즉 산문율로 전환한 부분)
(중략)
입문만 해 놓고 훌쩍 사라져서는 오랜 세월 지룡地龍을 파먹다가 이제 돌아와서 경력자로 회춘하여 용 무리에 끼인 강시 경력자들이시여. 인생 백세 시대를 맞아 은퇴 후의 재등장에는 강시 경력이 녹용영지鹿茸靈芝 보약이라. 인생도 길고 예술도 긴 무병장수 남은 생애 만수무강 아니련가.(* 고정 율격을 배제하고 자유 율격, 즉 산문율로 전환한 부분)
한 세상 / 원로 고물古物로 / 부귀영화 / 누리소서.(* 시조 종장 형식과 동일)
호흡의 유려함 유지를 위한 만연체 중심으로 엮으면서 반어와 역설의 냉소적 어조를 사용했다. ‘허공 경력, 튀밥 경력’ 등 어휘 조합도 풍자를 노렸으며 종장 부분에서는 ‘고물古物 = 고문顧問’의 언어유희로 마감했다.
고전문학에서 장편의 사설시조는 4음보音步의 변주가 매우 심하면서 문체미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구조다. 그러므로 현대수필 작법에 원용하기에는 정격 일변도의 가사보다는 훨씬 유리하다. 같은 교술양식이라도 가사는 점잖은 표현의 4음보 정격이므로 현대적 서정에는 맞지 않다. 오히려 사설시조적 보법과 표현이 풍자나 해학, 어조의 다양한 변화 등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다.
사설시조와 유사하나 종장의 형태를 깨뜨려 시조의 구조를 벗어난 작품으로는 「쥐구멍에서 쏘아 올린 큰 공」이 있다. 제목부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패러디하여 쥐의 수난과 업적을 나열하면서 쥐띠 해를 맞아 화합정신의 새 시대 도래를 희망했다.
쾌재快哉라, / 찍찍 - Cheep Cheep, / 새날이 / 밝는도다! (* 시조 형식의 4음보)
갑자무자甲子戊子 자자년子字年을 애타게 기다리며 숨죽인 숱한 세월 - 10년 하고도 삼백예순 날, 십이지十二支 축생畜生에는 고양이가 없어 어깨춤을 추었건만, 오호嗚呼 애재哀哉로다.(* 이상 자유 율격) 돼지에게 뜯겨죽고 개에게 물려죽고 // 닭에게 / 쪼여죽고 / 뱀에게 / 감겨죽고 // 재수가 / 없는 동족 / 소 뒷발에 / 밟혀죽고….(* 4음보 율격) // 긴긴 세월 속에 잔나비, 양, 토끼해만이 겨우 숨을 쉬었더니 고진감래苦盡甘來로다!(* 자유 율격)
(중략)
오호라, / 희희喜喜로다. / 무자戊子 쥐의 / 부활이로다.(* 4음보 율격) 쥐구멍에 볕이 들어 은혜와 사랑이 철철철 넘치는 세상이라. 웰빙well-being 시대 요즘 세상은 애완용 고양이도 알밥을 먹는 세상, 이러헌 평화 세상 또 어디 있을쏘냐. 60년 전 앵돌아선 남북도 화해무드요, 동서도 화합이니, 빈부 갈등 안팎 갈등 모다 해소하고 화평세상 도래로다. 세상 사람들아, 올해는 꿈속에 쥐에게 물리면서 ‘천석만석千石萬石!’ 소리쳐서 모두 다 부자 되고, 쥐 DNA 이식하여 딸 아들 펑펑펑 낳고, 사방팔방 세계화 시대를 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종횡무진하시길 축원하면서, 오늘 새날을 맞이하여 60년간 갈고닦은 바이오bio 생명공학의 첨단尖端 쥐들이 억조창생 기氣를 모아 알을 하나 낳으리니. 환희歡喜의 무자년에 ‘쥐구멍에서 쏘아 올린 큰 공’ 하나가 온 누리를 밝히리라.(* 자유 율격)
해야 솟아라. 박두진의 해야 솟아라. 칡범과 사슴이 함께 노니는 세상, 어둠을 살라먹고 둥근 해야 솟아라, 솟아라! - 찍찍 - 펑!
(* 마지막 부분에서 4음보 율격을 배척한 자유 율격)
역시 전체 흐름을 정격률 위주로 하되 부분적으로 변격을 구사한 작품이다. 화합 주제의 시 김남조의 「설일」, 박두진의 「해」를 활용하면서 서두에 한자, 한글, 영어를 동시 사용하여 글로벌시대 도래를 암시하고, 고전적 요소 가미를 위해 한자어를 병용하여 고풍스런 맛을 첨가하였다. 어조도 세태풍자와 해학을 겸한 경계와 힐난詰難의 리듬을 만연체의 병렬 구조로 엮었다.
부정형의 산문율에 부분적으로 정격률을 혼합하는 구조는 필자가 선호하는 작풍作風이다. 이는 산문율 속에 부분적으로 정격률이 개입함으로써 독자의 가슴에 잃어버린 율감을 생성시키게 하는 효과를 노렸다. 대표적으로 「강생이 어르기」가 있는데 두 문단 인용한다.
“불매불매 / 불매야 / 이 불매가 / 뉘 불매고 / 내 강생이 / 꽃불매지.”(* 6음보의 변격율 - 실제 음영하는 노래는 4박자의 빠른 반복임)
칠남매 아들딸을 한 번도 안아주지 않으셨다는 아버지께서도 손주 앞에서는 무거운 체통을 내려놓으셨다. / 조선 안방마님 같던 어머니도 ‘어이구, 내 강생이!’를 입에 달고 계셨다. // 강생이는 / 강아지의 / 경상도 / 사투리.(* 4음보 율격) // 돌을 갓 지나 재작재작 걸음마를 배우면서 강생이들은 할아버지 앞에서는 불매를 해달라고 두 팔을 벌리고, / 할머니 앞에서는 조막조막, 진진을 같이 하자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 부분은 ‘할아버지 ~ 할머니’로 대응하는 대구율)
문득, 자던 놈이 벌떡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고 ‘옹옹’ 짖는다. 누워 있던 놈들도 덩달아 ‘공공!’ 짖어댄다. 아이고, 내 강생이! 하마 밥값들 하는구나.(* 자유 율격) 동네방네 / 벗님네들, / 내 강생이 / 한번 보소. // 두 달도 / 안 된 것이 / 하마 벌써 / 짖는다오.(* 4음보 율격) // 아무렴 뉘 새끼라고.(* 2음보 변주 부분) // 우리 / 강생이들이 / 타고난 / 천재로고. // 이곳저곳 / 수소문해 / 영재교육 / 시켜야겠다. // 고양이 / 모셔 와서 / 외국어도 / 배우고, // 얼룩소 / 외양간에 / 그림도 / 그려보고, // 종달새 / 선생 만나 / 노래도 / 배운 뒤에, // 딱따구리 / 둥지 찾아 / 피아노도 / 등록하자.(* 4음보 율격)
제시문의 첫 문단은 문장 구조가 대구율을 이루는 부정형의 산문율이다. 생략된 부부은 대부분 이 유형으로 전개된다. 두 번째 문단은 산문율에 정격 4음보율이 혼재하는 구조인바, 최근의 조기교육을 해학적으로 풍자한 4음보 정격률이다. 전체적으로 문장의 유려流麗한 호흡과 경쾌한 리듬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강아지와 손주를 오버랩시켜 두 제재 사이를 자유로운 연상수법으로 시선을 왕복시키면서 식상한 손주 이야기를 벗어나 대상을 강아지로 대체함으로써 중의적 재미를 유도하였다. 어휘는 강아지 및 육아, 어린이 관련 고유어를 발굴 사용하였다. 어조는 내용에 호응시켜 문장의 장단을 대립시킨 긴장과 이완을 유지하면서 손주를 보는 즐거움이 담긴 유희적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했다.
아래 작품 「빨래를 치대며」도 비슷한 유형으로 독자의 흥겨운 분위기 형성을 위해 주로 시작 부분에서 잘 이용한다.
빨래를 치댄다.(* 2음보 율격으로 시작) / 어깨 출렁 / 엉덩이 들썩, / 온몸으로 / 치댄다. // 목줄띠에서 / 옮은 / 완고한 땟국도, // 뱃가죽에서 / 눌어붙은 / 게으른 / 땟자국도, //(* 4음보 율격) 발가락에서 / 밴 / 고리타분한 / 땟국물도 / 함께 치댄다.(* 4음보 혹은 5음보 같은 약간의 변주를 사용) // 머릿속에 / 남아 있는 / 꼬장꼬장한 / 생각도 치대고, // 소파에 / 뒹굴던 / 꼬질꼬질한 / 몸뚱이도 치댄다.(* 4음보 율격)
비정형의 율감과 동시에 대구적 흐름을 타고 있으며(* 대구적 흐름은 ‘어깨, 목, 뱃가죽, 발가락 머릿속, 몸뚱이’로 이어지는 의미망意味網의 대구를 형성한다. 의미망이란 단어나 문장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유사한 상관관계를 말하는바, 여기에서는 사람의 신체 부위가 공통이다) 다소 비속한 노골적 어휘 사용으로 해학적 비유를 겸하여 신선한 문체미를 자아내도록 구사했다. 아래 작품 「전자레인지 앞에서」도 유사한 구조다.
전자레인지 / 회전판이 / 빙글빙글 / 돌아간다. // 꽁꽁 언 / 곰국 덩어리를 안고 / 흥얼흥얼 / 잘도 돈다. // 흐릿한 / 조명발에 / 소음 같은 / 전자음악. // 곰국이 / 살살 녹아 / 은근한 / 맛을 내면 // 이 맛 저 맛 / 어울려 / 한 세상 / 한 끼 식사 / 금상첨화 / 아니더냐.(* 이 부분은 4음보에 2음보를 더 가미한 변주) // 물레방아도 / 아닌 것이 / 실시리시르렁 / 실시리시르렁, // 시름의 / 한세상을 / 흥겨이 / 돌아간다.
(* 이상 문단은 4음보 율격에다 다소간의 변주를 가미하였음)
돌려서 익히는 게 어디 한두 가지더냐. 국화빵도 돌리고 솜사탕도 돌리고 뻥튀기 기계도 돌린다. 돌리는 게 어디 음식뿐이랴. 바람개비도 돌리고, 상모도 돌리고, 고스톱 화투짝도 돌린다. 잘못은 남 탓으로 돌리고 영광은 내 덕으로 돌리고…. ‘돌리고 돌리다 보면 좋은날 꽃피는 날도 돌아올거야’라는 대중가요도 있거늘.
(* 이상 문단은 여러 종류의 음보율을 섞어 율격미는 살아나지만 자유율에 가까운 느낌으로 변주함)
비정형 율감에다 의태어, 의성어를 사용하면서 밑줄 친 부분처럼 ‘돌아간다’라는 어휘의 반복률로 세상사의 흥취와 풍자도 고려했다(* 반복률: 동일하거나 유사한 요소가 반복되면 율격이 형성됨).
아래 작품 「노인 예찬」은 대구적對句的 문장의 율감을 구사했다. 운용한 대구적 율감은 각 문장을 통해 작품 전체를 관류하지만 때로는 문장이나 문단 중심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봄은 꽃으로 아름답고 / 가을은 잎으로 아름답다.(* 앞뒤 구조가 대구율 형성)
봄과 가을은 모두 붉게 번지는 꽃불의 계절이다. // 봄꽃은 낱낱의 송이마다 꽃으로 피어나고, / 가을잎은 삼삼오오 벗을 모아 단풍으로 번져난다. // 청춘靑春의 피부처럼 싱그러운 꽃은 혼자서도 꽃이지만, / 노년老年의 피부처럼 까칠한 낙엽은 어울려서 꽃이 된다. // 청춘은 화병에 꽂아놓고 감상하는 꽃이고, / 노년은 책갈피에 끼워두고 사색하는 단풍이다. // 화사한 꽃같이 아름다운 청춘은 꽃봄[花春]의 계절이고, / 메마른 단풍같이 아름다운 노년은 잎봄[葉春]의 계절이다.
(중략)
꽃은 떨어져 씨앗을 남기고 / 잎은 떨어져 눈[牙]을 남긴다. // 지는 날까지 붉은 빛을 잃지 않는 꽃봄[花春] 인생은 열매를 잉태해서 행복하지만, // 연둣빛으로 태어나 푸르른 삶을 살다 붉게 어우러지는 단풍 되어 한 줌 부엽토腐葉土로 돌아가는 잎봄[葉春] 인생은 다 주고 가는 껍데기라서 행복하다.
위의 「노인 예찬」이 문장 중심의 대구율이라면 아래 작품 「밥상과 식탁」은 문장 혹은 문단 중심의 대구율로 구성한 것이다(* 대구는 작게는 어휘나 어구 또는 문장으로, 크게는 문단 구조로도 형성된다. 예를 들어 ‘가는 말아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앞뒤 어구의 대응이다).
밥상은 어머니의 손맛으로 차려내고, / 식탁은 아내의 정성으로 마련한다. // 과거완료형인 어머니의 밥상에서는 언제나 그리움이 묻어나고 / 현재진행형인 아내의 식탁에서는 오늘도 행복이 번져난다.(* 문장 구조의 대구율)
밥상과 식탁은 둘 다 사랑이 주재료主材料이다.(* 율격미가 없는 부분) // 밥상의 재료는 텃밭에 풍성하고, / 식탁의 재료는 냉장고에 넉넉하다.(* 대구율과 함께 4음보 율격도 동시에 지님) // 어머니는 부엌 문턱을 넘나들며 풋것들을 캐어와 밥상을 차리고 / 아내는 주방을 맴돌며 영양가를 계산해서 식탁을 마련한다.(* 어머니와 아내의 의미망으로 대구의 율격미를 형성함. 이상 두 문단은 주로 어구나 문장 중심의 대구율을 형성하고 있음.)
아래 두 문단은 각각 어머니와 아내의 공간으로 크게는 문단 중심의 대구율을 형성하면서 작게는 부분적으로 어구나 문장 중심의 대구율도 병행하는 구조이다.
어머니의 부엌에는 시시때때로 불청객들이 기웃거린다. 마당을 뛰놀던 조무래기들이 누룽지 조각을 찾아 문턱을 들락거린다. 복슬강아지도 코를 킁킁거리며 부지깽이 끝에 얼쩡거리고, 닭들도 덩달아 문턱을 넘어들다 신발에 얻어맞기도 했다. 그래도 부엌 입구에 수북이 쌓여 있는 땔감 사이에서 어른들 몰래 달걀을 발견하는 뜻밖의 소득도 있었다. 가슴 콩닥거리는 선물이었다. 구석에는 큼직한 물드무가 점잖게 앉아 있고 맞은편 부뚜막에는 겨우내 온기가 가시지 않는 무쇠솥이 조왕신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엌 중심)
주방은 아내의 전용공간이다. 아내의 주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긴 하여도 역시 만원이다. 가장자리에는 크고 작은 온갖 전자기기들이 하루 종일 눈을 뜬 채 반짝거린다. 각종 주방기계들이 일손을 대신하는 편리한 세상. 이것은 새벽부터 쉬지 않고 바장이던 우리 어머니의 아들딸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발명한 덕택이다. 그래서일까. 아내의 세월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밥솥의 신호. 무쇠밥솥이든 전기밥솥이든 밥이 끓고 뜸을 들이는 시각에는 한결같이 추억의 증기기차를 몰고 온다. 밥이 절정에 이르면 무쇠솥은 소댕이 들척거리며 기적소리를 내었다. 그 향수를 잊지 못하는 아내의 압력밥솥도 추를 흔들며 칙칙폭폭 증기기관차 소리를 낸다. 이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밥상에 대한 그리움이 그 아들딸들의 뇌리 깊숙이 스며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주방 중심)
위 작품은 앞 부분에서는 문장 단위로 3, 4음보의 대구율을 형성하다가 이후는 밥상과 식탁으로 대응하는 문단 단위로 대구율을 형성하는 구조다. 내용상 어머니에게 더 큰 비중을 두면서도 작품의 말미는 어머니와 아내의 오버랩으로 중첩시켰다. 상이한 두 제재를 대응하여 비교, 대조, 대구법을 활용하여 두 제재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다정다감한 어조로 섬세하게 부각시켰다.
다음 작품 「밭두렁 골프」도 대구적 율감이지만 원근법을 차용한 공간적 리듬감에다 병렬적 율감을 첨가한 구조다(* 원근법도 거리감으로 느끼는 대구적 율격미가 형성되며, 병렬적 전개도 리듬이 형성되기는 마찬가지임).
항아리는 비워야 채워지는 법. 없어진 것들 대신 내 골프장에서는 채워지는 특별한 것들이 많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서술) // 고개를 들고 멀리 하늘을 우러르면 학의 날개로 빙 둘러선 산등성 아래 짙푸른 수목이 있고, 그 숲 위로 훨훨 나는 산새들이 있고, 이따금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푸드득 솟아 나를 소스라치게 하는 꿩이 있고, 새순을 찾아 옹종거리는 산토끼가 있다.(* 고개를 들어 보이는 풍광을 ‘수목 - 산새 - 꿩 - 산토끼’로 대구와 병렬로 전개하여 율격미를 생성) // 고개를 낮춰 가까이 보면 바윗덩이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꽃들이 있다. 눈을 돌려 아래를 굽어보면 능선이 휘어진 길마 품에 옹기종기 산골마을이 정겹다.(* 반대로 고개를 낮춰 보는 풍광으로 ‘바윗덩이 - 시냇물 - 꽃 - 마을’로 전개)
율격미 형성을 위해 원근법을 통한 시선 이동 묘사와 은유법, 열거법, 점층법, 활유법 등을 구사하였으며, 시각과 촉각의 공감각을 운용하고, 단락의 연쇄법 연결을 의도하였다. 중반 이후에서는 감각적 표현의 묘미를 한껏 살려 문학성을 높이려고 했다.
수필의 산문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정격의 율감을 계획적으로 배려하지는 않았으나 문장의 유려한 분위기 형성을 위해 부분적으로 대구율, 정격률, 산문율 등을 혼합 사용한 작품들이 많다. 작품 「수필」의 첫머리를 보자.
인생이 / 강물이라면 / 수필은 / 물결이다. // 강물은 순리로 흐르고 / 물결은 윤슬로 반짝인다. // 순리로 흐르는 물줄기에는 역동逆動의 힘이 가미되어야 물결이 일어난다. 이 역동의 힘이 미학적 변주의 원동력이다. 이 변주는 작게는 반짝이는 잔물결에서부터 영롱한 물방울을 거쳐 찬란한 물보라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형성된다.
첫 문장은 4음보의 율감과 ‘인생 - 수필 / 강물 - 물결’의 어구적 의미망으로 된 대구율이고, 두 번째 문장은 각각 3음보로 전체 6음보 율격미를 형성하면서 의미망의 대구율도 개입시켰다. 마지막 문장은 ‘잔물결 - 물방울 - 물보라’의 점층적 대구율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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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창작에서 율격미는 마지막 기교가 될 것 같다. 율격미가 마지막 기교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활용도가 낮기도 하지만 그 운용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문학양식에서 의식적으로 율격미를 운용하는 이는 시조시인뿐이다. 시의 내용은 정서와 사상이고, 시의 형식은 운율이다. 그럼에도 자유시인마저도 창작에서 운율미를 기획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따라서 문학에서 율격미를 운용한다는 것은 앞의 두 요소 즉, 구성미와 문체미를 구현하고도 여력이 있을 때 가능한 작업이다. 실제로 유명 작품은 양식상의 차이를 떠나 리듬감을 지닌 문장이다.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자유시는 물론이려니와 「어린이 예찬」, 「페이터의 산문」, 「산정무한」 등 유명 수필 문장, 「메밀꽃 필 무렵」의 달빛 분위기를 돋우는 소설, 「기미독립선언」 같은 논설문도 정형 또는 비정형의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
현대를 살면서도 굳이 전통서정을 살려야 하는 데는 현대에 걸맞은 당위적 이유가 있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민족문학적 논리가 아니라 ‘왜 현대에도 전통서정이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 명제에 대한 대답은 전통 서정의 문학적 폭과 깊이가 현대 사회에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율격은 존재의 약동하는 생명성이다. 율감은 장단뿐만 아니라 고저, 강약, 문체의 강건, 우유, 화려, 건조, 만연, 간결을 유인하고 대조, 대구의 흥청거림과 애상적 비애까지도 통제한다. 이는 리듬은 대구를 생성하고 대구의 출렁거림은 독자 감정을 몰입시키기 때문이다. 이 가장 근원적인 약동을 현대문학 100년 역사는 억지로 버리려고 노력해 왔다. 속도를 지향하는 현대는 리듬 상실의 시대다. “리듬을 외면한다는 것은 감수성의 분리가 아니라 정서의 상실을 의미한다”라는 김준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제는 그 회복을 통한 인간 감성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할 때인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율격 운용이 ‘낯설게 하기’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2018, 『창작에세이』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