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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헬로 향하는 나무계단
김민재
클럽 ‘포 헬’로 내려가는 계단엔 입구부터 음악소리가 크게 들렸다.
‘너의 사랑 속에 있던 나 저 백사장의 소나무 였어 달디 단 꿈이었지 아니 꿈이었다고 생각해야지 길고 긴 꿈 너의 그 냉정함에 꿈에서 깨보니 나 덩그라니 혼자 사막을 지키고 있는 선인장 한 그루 였던 것이야 그것은 모래바람을 마셔 입술과 혀와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그 사막의 고통을 뿜어내는 가시를 내두른 선인장 말야...’(이문세 노래 양동근 피쳐링 [유치찬란])
좁고 어두운 나무계단은 사람들이 묻혀 온 빗물에 젖어있었고 계단의 맨 아래에는 동그란 접이식 의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의자를 지나 유리문을 밀고 실내로 들어서면 그리 넓지 않은 홀의 중앙에 각양 각색의 맥주들이 얼음을 베고 누워있는 타원형의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출입문의 건너편 쪽으로 손님용 테이블이 빙둘러가며 푹신한 의자와 함께 놓여있고 중간 중간 키가 높은 스텐드형 테이블이 있었다. 입구 오른쪽에 낙서가 어지러운 화장실 문이 있고 출입문 왼쪽으로는 주방과 작은 디제이박스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디제이 깜조는 앨범을 바꾸어 걸어놓고 차분히 씨디를 정리하고 있었다. 윤미래의 알앤비가 비오는 저녁 시간을 알맞게 적셔주고 있었다.
‘언젠간 나 없이도 살아 갈 수 있을 거야 차가운 그대 이별의 말에 할 말은 눈물뿐이라서 바라볼 수 없던 나의 그대 하루하루 지나가면 익숙해질까 눈을 감아야만 그댈 볼 수 있다는 것에 더 이상 그대의 기쁨이 될 수 없음에 나는 또 슬퍼하게 될거야...’ (윤미래 노래 [하루하루])
서너 명의 손님들이 취향에 맞는 술을 찾아 어슬렁대거나 의자에 걸 터 앉은 채 머리를 끄덕이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이때 출입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선 오삭이 주방 쪽으로 소리쳤다.
“좀 있음 사장님 온 댔는데 화장실 청소는 해놨냐? 야 빙?”
오늘따라 더욱 뽀족하게 머리를 세운 그는 빙을 찾았다.
“빙 아직 안 왔는데...”
바나나 상자를 옮기며 무원이 말했다.
“뭐? 에이 그 새끼 비 온다고 또 거기 간 거 아냐? 하여간 맛 간 놈은 어쩔 수 없다니까...”
“화장실 청소는 루가 했어”
“흠 역시 쓸 만 한 건 루 밖에 없어”
무원의 말에 오삭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에서 마른행주로 컵을 닦고 있는 루를 흘깃 봤다. 루는 손바닥만 한 링에 작은 구슬이 매달린 귀걸이를 하고 머리를 뒤로 올려 큰 핀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큰 귀걸이와 큰 머리핀으로 인해 작은 그녀는 더욱 외소하게 보였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창백한 얼굴에 은색 펄이 섞인 파란 아이세도우가 마스카라로 들어 올린 속눈썹주위를 두텁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더욱 모호하고 무표정해 보였다. 그녀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컵을 닦고 닦은 컵을 보기 좋게 정리했다.
오삭은 화장실과 홀과 주방을 오가며 청소상태를 점검하고 주방 뒤 창고로 들어갔다. 오삭이 창고로 들어가는 것을 본 루는 잠시 컵을 닦던 손을 멈추고 큰 눈을 껌벅이며 서 있다가 그가 무원을 부르는 소리에 다시 멈추었던 손을 움직였다. 오삭은 무원과 그날 들여온 술과 안주거리를 일일이 첵크 하느라 바빴다.
아직 손님들이 들이닥칠 시간은 아니지만 디제이 깜조는 서서히 빠른 템포로 음악을 바꾸고 있었다. 템포가 빨라질수록 깜조의 둥근 챙 모자도 더욱 빨리 끄덕였다.
‘술에 취하는 이 노랜 드렁큰 술병에 숟가락 리쿼 샷 태극기 휘날리는 한국인은 간첩이 아니라면 리쿼 샷 독도가 일본이면 장을 지지는 네 손을 높이 들어 리쿼 샷...’ (드렁큰 타이거 노래 [술병에 숟가락])
오늘처럼 주말이 아닌 평일은 손님이 많지 않기 때문에 깜조는 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선곡하곤 했다. 깜조는 요즘 그룹 ‘라다’나 ‘드렁큰 타이거’를 자주 틀었다. 외국인 손님이 많이 오는 주말에는 ‘아콘’이나 ‘넬리’를 자주 올렸지만 오삭은 그의 선곡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한물 간 곡만 선곡 한다는 게 불만의 이유였다. 그러나 디제이 깜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정도로 싹싹하지 않은 그였다.
창고에서 나온 오삭은 출입문 옆에 몰려있던 삐끼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늘 그렇듯 정신 차려서 일하라고 일장 연설을 하고는 주방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원이 뛰어가서 기니스 한 병을 들고 와 오삭 앞에 놓았다. 일찍부터 들어와 있던 몇몇의 사람들이 두엇 일어나 비트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있었고 구석의 테이블에서는 벌써 취기가 오른 남자가 여자 친구의 허벅지를 더듬고 있었다.
오삭이 기니스 한 병을 거의 다 비워갈 즈음 출입문이 열리고 비에 젖은 빙이 들어섰다. 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가 더욱 세차게 오는지 빙은 많이 젖어있었다. 젖은 바짓단을 끌고 절름거리며 창고로 들어갔다. 그것을 본 오삭은 이마에 팔자 주름을 만들며 남은 기니스를 마저 마셨다. 창고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털며 나오는 빙을 오삭이 불렀다.
“야 빙 너 또 거기 갔다 왔냐? 새끼야 거긴 뭐 하러 자꾸 가냐 너 없어서 루가 청소했잖아”
“히...비 비 오잖아 그 그 그 그래서....”
“미친 새끼 거기 가봐야 아무도 없다며 그리고 네 할 일은 하고 가야지 너 이따위로 일하면 확 잘라 버린다. 먹여주고 재워 주는 게 어딘데 새끼가 배가 불러서...”
“아 아 알았어 자알 하 할게”
빙은 여전히 헤픈 웃음을 흘리며 덜덜 거리는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빙은 몇 년 전에 사고를 당해 머리를 심하게 다쳤고 그이후로 언어장애와 왼쪽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한때는 잘나가는 양아치였다 하기도 하고 비록 지방대이긴 했지만 괜찮은 대학에 다니던 학생이었다고 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물으면 빙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웃기만 할 뿐 이었다. 작년 봄에 오삭이 데려와서 청소를 시키거나 입구에서 사람들이 출입할 때 유리문을 열어주는 일을 시켰다. 나무계단 아래 놓여있던 동그란 작은 의자는 빙을 위한 것이었다.
“됐으니까 나가 앉아 있어”
귀찮다는 듯이 오삭이 빙을 내쳤다. 덜덜 거리는 다리를 끌며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는 빙을 불러 세운 건 주방에 있던 루였다. 뭐라도 좀 먹었냐는 루의 질문에 빙은 그거 웃기만 할뿐이었다. 그걸 본 루는 손짓을 해서 주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낮에 먹다 남은 튀김만두 와 순대 몇 점이 담긴 접시를 건넸다. 빙은 오삭 있는 쪽을 흘깃 돌아보고는 접시를 받아들고 주방입구에 서서 천천히 집어먹었다. 루는 빙이 다리를 떨어가며 서서 먹는 것이 보기 싫었지만 한 번도 앉아서 먹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그런 빙을 볼 때마다 엄마 잃은 아기염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접시를 비운 빙은 느리게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드렁큰 타이거’는 이제 ‘긴급 상황’을 외치고 있었다.
‘하나 둘 둘 앤드 하나 괜히 네가 아침부터 우울한 날 술 취한 범띠 5집을 전축에 집어넣어 크게 틀어 지붕에 구멍이 나 하늘이 다 보이게 사장님의 가발이 뒤집어지게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여 고개를 끄덕여 어깨를 들썩여 손가락을 펴 쫙 손에 손뼉을 손바닥엔 네가 싫어하는 놈들을 그려 아주 빌어먹을 것 왼쪽 오른쪽 던져 어퍼 컷 아랫배 쪽에 힘을 주어 기공법 숨을 들여 마셔 콧구멍을 통해 빨아들여 내 뱉어 기합! 지금은 긴급 상황 하던 걸 중지해 지금 당장 지금은 긴급 상황 일렬로 행진해 지금 당장 레이디스 바비스 애기스 모두 무브먼트! 드렁큰! 타이거 밤!...’ (드렁큰 타이거 노래 [긴급 상황])
클럽 ‘포 헬’은 서울 중심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제법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주말이면 나무계단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붐비는 곳이었다. 사장은 일주일에 서너 번 들를 뿐 모든 경영은 거의 사장의 조카인 오삭이 맡아 하고 있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각 진 얼굴에 노랗게 물들인 머리, 눈썹과 콧방울에 해 박은 피어싱이 그의 인상을 더욱 강하게 보이게 했다.
사장이 다녀 간 후, 삼촌이 쥐어준 적잖은 돈에 기분이 한껏 고조된 오삭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친구들을 불러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오삭이 많이 취하는 날이면 루는 피시방에라도 가서 밤을 새우고 싶어 했다. 집을 나와 여기저기 떠돌다가 포헬에 와서 일하게 된지 몇 개월 쯤 된 루는 잠자리가 마땅찮아 영업이 끝나면 홀에 있는 쇼파에서 자곤 했는데 집이 없기는 빙도 마찬 가지였다. 그러나 빙은 진작부터 주방 옆의 작은 창고를 숙소로 삼고 있었다. 부족하지만 자신만의 잠자리 공간을 가지고 있던 빙이 미안한 마음에 몇 번 루에게 창고를 양보하려 했지만 루는 한사코 사양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선 답답해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손님들이 모두 나간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던 오삭은 주방을 정리하던 루를 불렀다. 피시방으로 도망가기엔 이미 늦은 걸 안 루는 체념한 듯 오삭을 따라 창고로 들어갔다. 이럴 때면 무원도 빙도 다른 누구도 창고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딱 한번 무심결에 빙이 창고 문을 열었다가 오삭에게 걷어차인 후로는 빙도 자신의 공간을 포기하고 의자에서 잠이 들곤 했다. 가끔은 영업시간 중에도 오삭은 루를 창고로 들여보냈고, 어두운 창고 안에는 흑인이나 백인 등의 낮선 외국인이 먼저 들어와 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는 창고에 들어갔다 나온 날이면 디제이 박스에서 헤드폰을 끼고 동이 틀 때까지 음악을 들었다. 그런 날이면 성질 까다로운 디제이 깜조도 루에게 디제이 박스를 허락해주었다.
가을이 깊어져 낡고 눅눅한 나무계단에 한기가 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출입문 밖에서 새벽까지 유리문을 열어주는 빙의 겉옷은 이미 두툼해 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빙이 열어주는 유리문을 넘어서면 뜨거운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시원한 맥주를 찾았고 열기 가득한 밤을 만들기 위해 악을 썼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그저 순리처럼 지나갈 뿐 별다른 변화 없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나날이었다. 술과 음악과 웃음과 환호성, 짧지 않은 욕설들이 지나고 포헬의 하루를 마감하는 즈음이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톡시크’가 스피커를 울리고 있었다.
‘당신 입술의 그 맛 난 진행중이예요 당신은 독성이 있어요 난 헤매이고 있어요 독성으로 가득 찬 맛을 보면서 당신에게 중독되었어요...’ (브리트니 스피어스 노래 [톡시크])
술에 잔뜩 취한 오삭이 설거지를 하고 있던 루를 데리고 창고로 들어갔다 나왔을 때 루의 아랫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나와 있었다. 무언가가 잔뜩 마땅찮은 듯한 표정으로 발소리를 쿵쿵대는 오삭이 나가고 나서야 모두들 루에게 괜찮냐고 한마디씩 물었다. 그러나 루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고는 묵묵히 주방을 정리했다. 정리를 마친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가고 난 후,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는 루를 흔들어 부른 건 빙이었다. 루는 끼고 있던 헤드폰을 벗고 빙과 나란히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루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콘’의 ‘론리’를 듣고 있었어. 세네갈 출신의 아콘은 청소년 때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거기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데. 그의 아버지는 재즈 피아니스트 였다나봐. 나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었어. 무대 위에서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 말야. 그 왜 있잖아, 뒤가 둥그렇게 휘어있고 뚜껑을 반쯤 열고 치는 피아노 말이야. 레이스가 많이 달린 분홍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그런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어. 그래서 엄마를 졸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었지. 피아노 선생님에게 제법 소질이 있다는 소리도 들었어.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중고이긴 했지만 반짝이는 영창피아노를 한 대 사주셨지. 그때가 초등학고 1학년 때였어. 학교만 끝나면 곧장 피아노 학원으로 가서 내가 렛슨 받을 순서가 아닌데도 학원 쇼파에 앉아 다른 친구들이 치는 소리를 들으며 발장단을 맞추곤 했어. 그렇게 기다리다 내 순서가 되면 난 폼나게 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 끝으로 경쾌하게 건반을 두드렸지.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로 튕겨져 나오는 소리가 어찌나 맑고 예쁘던지 그 소리에 심취해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어. 렛슨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서 또 피아노 뚜껑을 열고 그날 배운 걸 연습했어. 나보다 큰 언니들이 치는 ‘소녀의 기도’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엘리제를 위하여’가 치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했었거든. 그래서 하루 종일 피아노 앞에서 살다 시피 했어. 참 하루 종일은 아니었다. 해가져서 밖이 어두워지면 엄마가 피아노를 못 치게 했거든. 그래서 나는 늘 불만이었어. 하루가 내겐 너무 짧았거든.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이 지났는데도 생각보다 진도가 빨리 나가지는 않았어.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내 손이 너무 작아서 그랬던 것 같아. 그 작은 손을 아무리 쫙 펴도 도에서 라까지 닿지도 않았을 테니까. 얼마동안을 그렇게 피아노에 빠져 살았는지 시간으로 따져보라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린이 연습용 바이엘’ ‘상’권을 떼고 ‘하’권을 다 떼기 직전에 그만둬 버렸어. 갑자기 피아노가 싫어졌거든. 그 이후로 몇 번 피아노 앞에 앉아 보곤 했지만 한번 정이 떨어지니까 다시 치는 게 쉽지 않더라구. 피아노가 재미없어 진 이후로는 이상하게 다른 무엇에도 재미를 붙일 수가 없었어. 모든 게 다 시들하고 시시했지. 그래,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냥 다 귀찮고 재미없어. 넌 어떠니 빙?
난 말야 과학자가 되고 싶었어. 많은 아이들이 장래희망을 말할 때 흔히들 과학자라고 그냥 얘기 해 버리지만 난 달랐어. 난 진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위해 편리한 기계를 발명하고 싶었지. 그건 아마 우리 할아버지의 영향의 컸기 때문 일거야. 난 할아버지와 둘이 살았었어. 왜 둘이 살았냐고는 묻지 마.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냥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기억부터 난 언제나 할아버지와 둘이 살았었으니까. 할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았어. 동네에 버려진 것, 고장 난 것들은 모두 할아버지 손에서 새롭게 태어났지. 정말 신기했어. 무언가를 고치고 있을 때의 할아버지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누가 말을 걸어도 잘 못 알아들을 정도로 골똘하셨지. 나도 할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좋았는데, 할아버지는 자기처럼 고물이나 고치는 가난뱅이 말고, 진짜 굉장한 기계를 발명하고 고치는 과학자가 되라고 하셨지. 그래서 난 어렸을 때부터 진짜 과학자 되기로 마음먹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특히 고장 난 우산을 잘 고치셨는데 버려진 우산을 주워 다가 새것처럼 고쳐서 비오는 날이면 공짜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어. 비오는 날이면 내가 혜화동에 가는 거 알지? 그래. 할아버지를 보러 가는 거야.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이제 그곳에 안 오셔. 돌아가셨거든. 내가 사고 당하던 날, 할아버지는 죽었어. 그래도 거기 가면 할아버지가 눈에 선해. 그래서 가는 거야. 비오는 날 혜화동에 가면 말끔하게 고친 우산들을 양동이에 꽂아서 ‘거저 드립니다’라는 푯말을 걸어놓고 묵묵히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날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거든. 비오는 날 혜화동에 가는 것 말고는 나도 세상이 시시하고 재미없어. 근데 루, 너 자니?
클럽 포헬에서 달라진 것이라곤 없이 계절은 더 깊어져 갔다. 아직 첫눈은 내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가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첫눈을 기다렸다. 하늘 한조각 내다 볼 수 없는 지하에 자리한 포헬로 들어서면 여전히 지상과는 다른 계절이 멈추어 있는 듯 했다. 빙에게는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통로인 나무계단이 얼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하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까칠한 성격의 깜조가 오삭과 대판 싸우고 포헬을 나갔다가 이틀 만에 다시 돌아왔던 일 빼고는 여전히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첫눈을 기다리듯 간절하게 어떤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도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축복을 기대 하듯이.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는데 무슨 이벤트라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냐?”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없는 텅 빈 홀을 쳐다보며 무원이 큰소리로 말했다. 홀에는 ‘어셔’의 ‘예’가 가득 흐르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클럽에서 멋진 여자 하나 꼬시려하고 있어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 어떤 느낌인지 너는 알아야해 헤이! 헤이! 그때 그녀를 봤어 날 살펴보고 있었지 그 게임 속에서 그녀는 내게 말을 걸었어 마치 나를 아는 것처럼 보였어...’ (어셔 노래 [예])
“이벤트고 나발이고 간에 물 관리나 잘해. 초저녁에 손님 없다고 고딩들 받아서 수질 떨어뜨리지 말고. 이 장사는 물 관리가 젤이야. 야! 빙, 너 아무한테나 웃으며 문 열어주지 말아. 알았냐?”
“아 아 알 았 어. 근데 추 추 춥 자 아 나”
“새끼야 여기가 무슨 간이역 매표소냐? 손 쬐고 가는 연탄난로야?”
“히이.... 아 알 았 다 아 구”
빙이 실죽 웃으며 대답하자 미간에 팔자주름을 깊게 만들며 오삭이 다그쳤다.
“으이구 야 무원아, 빙 저 새끼는 못 믿겠으니까 계단위에 꼬맹이들 교육 단단히 시켜서 세워둬라”
오삭이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는 동안 루는 쌓아둔 컵을 세고 있었다. 열셋, 열넷, 열다섯, 열여섯. 맨 아래 칸에 있는 열여섯 개를 세고 위 칸의 컵을 세기 시작 했을 때 출입문이 열렸다. 그리고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왔다. 웨이브 진 단발머리에 갈색코트를 입고 검정색 손가방을 든 사십대 후반 정도의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볼 뿐 선뜻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출입문 쪽에서 제일 가까운 의자에 앉아 있던 무원이 어떻게 오셨냐고 말을 걸었고 그제야 아주머니는 말문을 열었다.
“저... 사람을 좀 찾고 있는 데요”
아주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자 컵을 세고 있던 루의 눈길이 출입문 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잠시 루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자신을 찾으러온 엄마라는 걸 알아보고는 무원과 이야기하고 있는 엄마의 손목을 잡아끌고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집에 가자”
손목을 잡아끄는 루에게 엄마가 먼저 말을 했다.
“또 찾아오면 다른 데로 가 버릴 거야. 그러니까 다신 오지 마”
계단 끝까지 엄마를 끌어 당기 던 손을 놓으며 루가 대꾸했다.
“대체 왜 그러는지 엄마한테 얘기를 해야 알거 아니니?”
“이유 없어. 그냥... 암튼 다신 오지 마”
말을 마친 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홀 안으로 들어서는 루에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는 않았다. 빙은 그날 늦게까지 계단위에서 서성이는 루의 엄마를 위해 자신의 작은 의자를 건네주었지만 루의 엄마는 고개만 저을 뿐 이었다. 그러나 영업이 끝나 계단의 조명을 끄기 전에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루의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루는 절룩거리며 홀 안으로 들어서는 빙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출입문을 단속한 빙이 자신의 잠자리로 들어갔을 때였다. 누군가 출입문을 세게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고 홀에 혼자 있던 루가 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술이 잔뜩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오삭이었다. 막 잠을 청하려던 루는 오삭이 달갑지 않았던 터라 비틀거리며 기대는 그를 밀쳐냈다. 더군다나 오늘만큼은 정말 누구와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루의 행동이 거슬렸는지 오삭은 거칠게 루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러나 루는 팔목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고 그러다 보니 팔목을 붙잡힌 채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이년이 오늘 따라 왜이래?”
화가 난 오삭은 잡고 있던 팔목을 놓으며 루의 뺨을 후려쳤다.
얼마 후, 시끄럽도록 크게 들리는 음악 소리에 빙은 잠에서 깼다.
‘그 큰 엉덩이로 뭐 할 건데? 그 청바지 안에 든 엉덩이 말야 널 비명 지르게 지르게 지르게 하겠어 널 소리 지르게 하겠어 소리 지르게 하겠어 그 쓰레기로 다 뭐 할 거야? 네 트렁크 가득한 쓰레기 말야 난 널 널 널 널 취하게 할거야 내 몸에 취하게 할거야...’ (블렉아이드피이즈 노래 [마이 험프스])
더 이상 잠을 청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였기에 창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빙은 주방 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오삭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가뜩이나 떨리는 왼쪽다리에 힘이 빠져버린 빙이 겨우 테이블에 기대 루를 찾았다. 루는 디제이 박스에서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으 으 으 음악 조옴 꺼 꺼봐”
빙의 외침에 루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어 음악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리 들어와”
빙은 거절 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루의 목소리에 다리를 끌고 디제이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앉으면 어깨가 닿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 나란히 앉았다. 루는 심하게 떨고 있는 빙의 왼쪽다리를 지그시 누르며 말을 시작했다.
들리니 빙? 내가 좋아하는 노래야. 늘 혼자 듣던 음악을 함께 들어줄 사람이 너여서 기뻐. 언젠가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고 얘기 했었지? 그래 사실은 지금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내 손끝에서 하얀 건반과 까만 건반이 눌러지며 생기는 아름다운 음률은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거든. 그런데 피아노 앞에 다시는 앉을 수 없었던 일이 생겼었어. 이제는 그때가 몇 살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도 않지만 바이엘 ‘하’권을 끝낼 무렵이었지. 조금만 더 있으면 큰 언니들이 치는 ‘체르니 30번’을 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어 하루하루가 더 즐거웠었어. 그날도 어김없이 피아노 학원에 들렀다가 집으로 뛰어와서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지. 거실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내 피아노를 비추고 있었고 나는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매치도록 열중하고 있었어. 그런데 바로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아빠가 나오시는 거야. 3교대 근무를 하고 있던 아빠는 종종 낮에 집에서 주무시고 밤에 회사에 가시는 일이 많았지. 엄마는 늘 할머니가 하시는 식당일을 도와주러 다니셔서 집에 없었어. 아빠는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날 일으켜 세우고는 안방으로 데리고 갔지. 평소에도 늘 조용하고 다정했던 아빠였는데, 그날따라 나를 더욱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지. 무섭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지만 이렇게 사랑해 주는 게 아빠들의 방법이라고 설명해 주셨어. 그렇게 며칠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으면 아빠가 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셨어. 그리고 아빠는 피아노 소리가 시끄러우니 아무도 없을 때 치라고 하셨지. 그런데 그 이후로는 아무도 없을 때나 누군가가 있을 때나, 심지어는 피아노 학원엘 가도 피아노를 칠 수가 없었어. 건반 위에 내 손을 올려놓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피아노 앞에 앉기도 싫어졌거든. 나중에 내가 더 컸을 때 알게 되었어. 아빠는 엄마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면 안 된다는 걸 말야.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났을 때 집을 나왔지. 그런데 이번엔 오삭이 날 사랑한다고 하더군. 이젠 내가 미안해해야 할 엄마가 없으니까 이렇게 사랑하는 게 바른 사랑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이상하지. 자꾸만 슬퍼지는 거야. 오삭이와 사랑을 해도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는 거야. 그래서 또 생각했지. 사랑은 이런 게 아니구나. 사랑은 내가 피아노를 생각하는 것처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심장에서 찰랑찰랑 물소리가 나는 그런 것이어야 하는 거구나 라고.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피아노와 같은 사람이 내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거든.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소녀의 기도’가 귓속에 맴돌고 내 맥박이 경쾌한 스타카토로 뛰고 있다는 걸 알았어. 참 조금 아까 엄마한테 전화를 했어. 이젠 정말 아주 오랫동안 볼 수 없을 거라고 말했어. 그리고 피아노를 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지. 그래야 엄마가 더 이상 나를 기다리지 않을 것 같아서야. 내 얘길 듣는 동안 엄마가 많이 우시는 것 같았지만 잘한 일인 것 같아. 그렇지 않니 빙?
어느새 날이 밝았는지 푸른 아침안개가 발목에 감기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산책로는 우레탄으로 잘 만들어져 있어서 이른 아침부터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간간히 눈에 띠었다. 작은 개천을 끼고 나란히 이어진 자줏빛 길이 푸른 안개에 가리 워 져 보라색으로 출렁이는 듯 했다. 이따금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리고 일찍 일어난 새들이 날개를 털며 날았다. 운동복 차림의 중년 부부가 갈색 코카스파니엘을 데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회색 모자를 쓴 남자가 자전거 폐달을 천천히 밟고 보라색 산책길에 자줏빛 가르마를 타며 지나갔다. 한강 하구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잦은 안개로 인해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었다. 신도시로 급조된 도시답게 스카이라인은 엉망이었고 넓은 평야였던 옛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출퇴근길은 늘 막히기 일쑤였고 아파트 값은 점점 더 오르기만 했다. 그래도 인구는 자꾸 늘어만 갔고 덩달아 아이들 학원비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런 도시의 아침, 휴일도 아닌 목요일 이른 아침에 여자는 아침준비를 할 생각도 않고 산책로에 나와 안개 속에 무릎까지 처박고 꼼짝을 않고 앉아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맞은편 아파트 꼭대기를 한번 씩 올려다 볼 뿐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참으로 평온하고 한가롭게 아침을 맞이하는 여유로움마저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여자의 눈물이 그녀의 피 묻은 손을 적시고 있다는 걸 발견하기 전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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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첨으로 완성한 짧은 소설입니다. 엉성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끄...)
안녕하세요. 우선 축하 드립니다. 소설은 시와 달리 끈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지요. 그래서 자신과의 싸움이 치열해야 하구요.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이니 좋은 결과를 기대해 봐도 되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참 좋습니다. 그리고 민재님의 더 크고 깊은 재능도 보았습니다.
아직 뭐라고 토를 달 수는 없지만, 우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쯤 캐나다 행 비행기 안에서 뭘 생각하실까? 좋은 경험하시고 오시면 한 번 더 업 되겠지요?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