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 HOMEPAGE ) 12-07 12:07 | HIT : 1,765
개인적 몽상, 그리고 집단적 사회비평
-최인호 시인의 시세계
강 희 근
1.
최인호 시인의 시를 참 오랜만에 읽었다. 그가 시를 넘치게 쓰는 시인이 아닌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필자가 어느 문예지에선가 그의 시를 읽었다는 기억이 아슴프레한 것으로 보아 과작의 시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한꺼번에 그동안의 노작들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한겨레 신문 기자로 들어가 일하는 동안 귀향하는 길목에서 귀하게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지인들의 안부를 묻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으로 되어 있었는데, 어쨌든 그가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를 필자에게 내어놓고 한 번 읽어 봐 달라는 것 아닌가. 무슨 횡재한 기분으로 그가 내고자 하는 시집 ‘그 해 오뉴월 불가락지’ 원고를 읽어내려 갔다.
역시 그의 시는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았다. 시인이 몸담고 있는 신문사, 시인의 평소의 사색과 생각들, 그리고 서부경남의 한 산골, 큰 산 밑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사실 등이 올실 날실로 짜여져 나름의 청정세계를 이룩하고 있을 것이라는 그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은 것이다.
2.
최인호 시인의 시는 시야가 넓고 포괄성이 강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세계도 마냥 사회 비평 일변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순서정에서 개인적 몽상의 세계, 다시 집단적 익명적 사회 비평으로 나아간다.
비 긋자 잠자리 날고
해님도 얼굴 열고
저 건너 산허리 백로도 비껴나네
이윽고 풀벌레 울어대는 뒤꼍
여름 한나절
- <잠자리> 전문
잠자리 나는 여름 한나절의 서정이다. 잠자리, 해님, 백로, 풀벌레 등이 등장하여 이루는 한나절이 그 상태일 뿐이지 무엇인가를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지 않는 그 서정이 순서정이다.
며칠 내리 장대비
걸레 속옷 마를 새 없더니
황톳물 들판 날아앉는 두어 마리
백로야 반가워라
비 긋고 날 드는 줄 알겠다마는
제비 소식 감감이라
- <제비> 전문
장대비 그치고 백로 날아 앉고 ‘날 드는’ 한 지점의 서정이다. ‘제비소식 감감’이라 하여 봄이 더디 옴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 춘래(春來)를 재촉하기 보다는 그 성정에 대한 누림이라 보면 좋을 것이다. 최인호의 시는 여기까지는 갈급한 어떤 지향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있다. 인간은 제대로 두면 자연에 깃들이는 무목적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그의 주변이 시달림을 갖게 되면 순서정은 제껴지고 그 자리에 도전이나 응전의 깃발을 꽂게 된다. 말하자면 세상과 시인은 불화의 관계로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반천 지나 거림골
이 골 저 골 깃든 집
산중에 길 닦이니
산중맛이 떫구나
도사는 어디가고
나그네만 기웃거려
반천 건너 굴길 지나
고운동으로 갈거나
고운동 청학동 어지럽다
갈티 아래 정개산 밑
발봉으로 내려가자
- <반천> 전문
지리산 반천골에 가서 거기서 세상의 한 촉수를 만나게 된다. 반천 거림골에 길이 나서 산중 맛이 나지 않는다고 세상의 손이 들어와 산을 망가뜨리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고운동 청학동도 아예 개발붐에 심히 뭉개져 있을 것으로 보고 발봉으로 내려 가겠다고 한다. 시인과 세상은 깊디 깊은 반천골에서도 만나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어디를 가야 순서정의 세계에서 안락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3.
최인호 시인의 시를 두고 ‘촛불’의 시학을 생각하게 된다. 시집 제3부 ‘그 해 오뉴월 불가락지’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를 소재로 하여 쓰여진 점과 관련해 볼 때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2-1962)의 촛불의 미학과 김지하가 말하는 ‘자기 조직화’의 집단 현상이 최인호 시인의 시적 이행 과정에서 어떻게 조응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지 않은가 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최인호 시인의 시적 이행 과정을 3단계로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단계 : 순서정의 세계
2단계 : 개인적 몽상의 세계
3단계 : 집단적 익명적 사회 비평의 세계
제 1단계는 전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촛불의 시작 쪽에서는 열외의 단계라 할 수 있다. 2단계는 우리로 하여금 몽상하도록 하는 것, 상상력과 기억력이 일치하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과 연결된다(이가림의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으로 바라본 촛불문화제> 참조).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것이 촛불의 이미지에 걸맞다는 것이다. 3단계는 김지하가 말하는 자기 조직화에 의한 집단 문화현상과 연결되고 최인호 시인의 이 단계 시적 발언은 집단적 익명적 현실 응전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최시인의 사회적 발언이나 의식은 2단계에서 ‘개인적 몽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3단계에서 ‘집단적 익명적 사회 비평의 세계’를 드러낸다.
세상은 강건너 저편
건넌마을 건넌산 보기
아침저녁 산그늘 내리는
저마다 건넌마을 바라기
이건너 저건너 감아 떠돌다
돌아와 건넌마을 바라기
오늘은 장대비
황톳물 닥쳐 구르는 다리에 서서
- <다리> 전문
화자의 세상 바라보기를 보여주는 시다. ‘건넌마을 건넌산 보기’로 뭘 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아침 저녁 바라기, 떠돌다 돌아와 바라기라는 것이다. 답답한지 하늘은 장대비를 내리지만 화자는 기껏해야 ‘황톳물 닥쳐 구르는 다리’에 까지만 진출한다. 시인은 골똘히 바라보기를 견지할 동안 행동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 바슐라르의 ‘고독한 개인적 몽상’(이가림의 같은 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촛불은 홀로 눈물 흘리며 고독하게 타 내린다. 스스로 서 있는 채로 스스로를 갉고 스스로를 소비해 갈 뿐 바깥으로 소리를 치거나 불을 댕겨 이웃을 불태우는 일을 하지 않는다. 따옴시에서는 화자가 갈등을 겪는 내연하는 의미를 제시하지 않는다. 개인적 몽상의 초입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혼자 뜨고 혼자 진다
소나무 칠엽수 봄꽃 사이
밤은 가로등빛으로 몸 찢기고
포개진 상자 안에는
겹겹이 잠든 사람들
신문도 우유차도 오지 않는다
새벽 길바닥 소스라치며 달리는
자동차
도시의 달은 그때 뜬다 남쪽하늘에 매달려
봄날 새벽이다
- <도시의 달> 전문
달이 인간들과 무관하게 뜨고 지는 도시 삶의 비인간화를 노래하고 있다. 밤의 가로등 빛으로 몸 찢기고 아파트는 포개진 상자, 그 속에서 도시민들은 겹겹 잠들고 있다. 자동차도 소스라쳐 달리고 달은 남쪽 하늘에 매달려 있다. 가위 눌리고 불안하고 위태롭다는 느낌을 준다. 어찌보면 모더니즘의 문명 비판 쪽과 연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시인은 얼마간씩 첨단 사조의 증후군과 연대하면서 또 물리치면서 그렇게 스스로의 활로를 열어가는 것일 터이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도시에 대한 막연한 비판 의식에 젖어 있을 뿐 도시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언급은 유보하고 있다. 이 말은 도시적 현상에 자아가 함몰되었거나 일정부분 정서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촛불처럼 화자는 아직 혼자 타면서 혼자 도시의 비정성에 젖어 있다. 그렇다고 절망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촛불이 스스로는 눈물을 흘리지만 촛불 앞이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희망의 빛깔로 타고 있는 것처럼.
한 시절 마음 잃고
한 십년 마음 놓아
스무해 빈마음 그 하찮음
독짓기 길삼하기 적자치기도 길이었다
붉은칠 심심하면 먹자라도 치면서
길내고 우물파기 쉽잖아
메뚜기 벼멸구 볏잎 갉아먹듯
거침 없는 생글 그 글수다
불주둥이 던져 굽기
그러구러 십년
먹고사는 일념으로
잣고 나르고 풀질 솔질 끝
도투마리 떠난 베 양잿물 빨랫줄 오가고
마름질 바느질에 강산조차
제빛 잃네
- <마음 놓기> 전문
따옴시는 시인의 자화상 내지 자전적 기록으로 읽힌다. 그런데 그 자화상 안에는 촛불의 ‘붉은빛’과 ‘흰빛’이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화자의 살아가기에 ‘독짓기’, ‘길쌈하기’가 있고 거기에 ‘적자치기’가 있다. 적자(赤字)란 원래 범죄인의 대문에다 붉은 글자로 표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에서는 화자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과 사람을 향해 잘못을 확인시켜주는 행위로 쓰여져 있다. 화자는 붉은칠이 심심하면 ‘먹자’라도 친다고 하는데 이것은 화자의 비평적 의식이 강하게 잠재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런 의식은 ‘메뚜기 벼멸구 볏잎 갉아먹듯’한 생래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거침 없는 생글’로 드러나는데 이것은 시인의 언론사 직무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거침 없지만 ‘생글’이라는 것이다. 잘 매무새 되지 못한 불완전한 글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산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런 삶에 대한 강한 자조 의식을 내비치기도 한다. ‘불주덩이 던져 굽기’가 자학이면서 약간의 불안정한 면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적자치기’로부터 ‘잣고 나르는’ 내면적인 스스로의 삶으로 돌아온다. 촛불에서의 ‘흰빛’인 셈이다. 적자치기의 그 붉은 빛과 자기 정화의 조용한 흰빛이 갈등 구조를 보이면서 흰 빛의 상승, 붉은 빛의 하강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인호 시인의 두 번째 세계는 이런 구조로 개인적 몽상의 세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의 시에서는 3단계의 예비단계로 잠시 머물고 가는 세계일 뿐이다.
4.
최인호 시인은 시집의 제 2부 ‘공덕동에서’ 연작시 와 제3부 ‘그해 오뉴월 불가락지’ 연작시를 통해 사회적 발언을 거침없이 해나간다. 이것은 촛불이 촛불로서 혼자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촛불과 촛불이 다수로 만나면서 연대해 타오르는, 문화제 내지 공동체적 미학의 마당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최인호 시인은 이제 혼자 조용히 켜고 있던 촛불을 집 밖으로 들고 나와 사람과 사람 사이로 들어가고 있다. 몽상에서 깨어나 집단의 의미를 일깨우고 시대의 징후와 그 속에서의 가치를 찾아가는. 이른바 실천과 이행의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연작 <공덕동에서>를 보자. 전체 41편으로 된, 각편 독립의 연작시인데 <서시>에 해당되는 ‘1’을 읽기로 하자.
임들의 삶과 죽음을 보고 듣고
때로는 내 삶과 죽음을 얘기한다
임이 먼저이자 이웃이요 남이며 겨레여서
그들 얘기로 오늘을 사는, 이런 삶은 무엇인가?
돌아보아 나날은 엄정하고 쉼없이 도는데, 따라잡지 못하고 뒤집지 못하면서 닳아간다.
성긴 기틀, 야합과 모리와 애리, 그리고 착한 사람들 …
그것이 일상이라면 달리 값질 것 없으리
그것으로 가락지 벼릴 일
- <공덕동에서 1> 전문
이 짧은 시는 연작 <공덕동에서>의 작시 의미를 분명히 밝혀 준다. ‘임’이 사는 삶을 본받는 것이야 말로 겨레 공동체를 살아가는 것이고, ‘남’과 ‘이웃’을 전제로 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임’은 단순한 ‘임’이 아니라 만해 한용운의 ‘님’이기도 한 겨레, 국가, 가치가 우선하는 임이다. 그런데 나날은 쉼 없이 돌고 있지만 임을 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가 갖는 ‘성긴 기틀’, ‘야합’ ,‘모리’, ‘애리’를 물리치기 위해 ‘가락지 벼릴 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가락지를 날카롭게 달구는 일은 무엇인가? 정의 실현을 위한 약속이 가락지이고, 가락지는 둥글게 하나의 지향으로 굳건히 뭉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정의를 실현하는 정신으로 날카롭게 무장해야 한다는 뜻일 터이다.
이제 최시인은 혼자 타면서 혼자 고독한 중심에 몽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 곁으로, 임 곁으로 나아가는 응전의 대장정을 시작하고 있다.
다름을 말해 본적 있는가
난 데 배운 데
물도 말도 같은데
우습구나
촌놈이 읍놈을, 섬놈이 뭍놈을
손가락질 하는 것은
낯설어서 그럴 뿐인데
한배 나도 시 따르고 씨 다르고
이젠 너이고 나인데, 내 안에서도
너이고 나인 여럿이 사는데,
다름을 찾는 것 나무랄 일 아니네.
촌놈이 촌놈인 것으로
패거리 지어 떼싸움 하는 것도
다름보다 달리봄에 속상할 일일 것 없는 것은
그대로는 못살아 드나드는
이민자들을 보면 알 일
섞이고 갈려 노는 짓 탓할 일일까.
너와 나
다른 것 찾아가다 보면
같은 것만 보이누나
- <공덕동에서 2> 전문
따옴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주제로 쓰였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개성을 존중하는 일이고 그것은 그 바탕 위에서 초월적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흑백논리가 판을 치고 있고 또 좌, 우도 서로가 서로의 날개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그러기에 사회는 언제나 경색되어 있고, 점점 시야도 좁혀지는 자기 우물파기에 급급하고 있을 뿐이다. ‘촌놈이’ ‘읍놈을’, ‘섬놈이’ ‘뭍놈’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현상에서 벗어나 ‘다른 것 찾아가다 보면 / 같은 것만 보이누나’라는 것이다. 최시인의 시야가 넓고 그 경지도 상당한 높이를 확보해 있어 보인다. 사회를 향해 뭔가를 말할 때 말하는 기준이 다른 것, 다양한 것에 가치를 두는 것, 그런데서 불가가 말하는 불이(不二)의 경지를 얻어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떠날 수 있는 이는 행복하다
사악과 욕망을 뭉쳐 정의와 책임으로 싸우는 것이거나
신의로 뭉쳐 사악과 사익을 챙기는 모임이거나
그로부터 떠날 수 있는 이는
거기 그대로 남은 이도
저주는 저주대로 욕설은 욕설대로
당부와 수용과 묵언은 묵언대로
떠나는 자의 몫이다
버릴 수 있는 이 버릴 것 있는 이의 버릴 것
괭이를 총칼을 부와 명예를
노녘한테는 핵무기가
이녘한테는 미군이
쓸모없도록
- <공덕동에서 20> 전문
따옴시는 버릴 수 있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이는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와 책임의 명분이든, 사악과 사익을 챙기는 욕심이든 그로부터 떠나는 것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성서의 ‘산상수훈’이 생각나게 하는 시다. 지금 슬퍼하고 지금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는 그 역설이 이 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저주, 욕설을 넘어 수용과 묵언을 넘어 더 넓고 더 높은 가치의 언덕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끝대목은 우리에게 주목을 요한다. 북녘에게는 핵무기를 버리는 것, 남녘에게는 미군이 쓸모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것이다. 최시인은 그가 들고 있는 촛불을 사회 속으로 갖고 들어가 떠날 수 있는 것임에도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 떠나는 것이 영영 떠나는 것이 아님을 일러준다. 촛불과 촛불이 빛을 나누는 것처럼 나눔과 연대를 통해 더 큰 머무름의 세계를 열 수 있음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최시인이 <공덕동에서> 연작에서 발언하고 있는 것들은 먹고 먹히는 일이 아닌 관점에서 남북관계를 본다는 것, 촌지 떡값에 관한 이야기, 도시가 갖는 병폐에 관한 이야기, ‘1노 3김’ 정치 이야기, 나라일에 발벗고 나선 이들에 대한 격려 이야기, 정치는 믿음·참음·의리로 가는 길이라는 것, 생각 같지 않은 총선에 대한 이야기, 자연 파괴의 참상에 대한 이야기, 해외로 갔던 정치인 돌아오는 이야기, 종교 내부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 늘 적은 새롭게 나온다는 이야기, 노래는 부끄러움으로 온다는 것, 세상에 대한 비감과 절망의 이야기, 차라리 파괴의 씨앗이라도 뿌려야겠다는 이야기 등이다. 일정기간 신문에 오르내리는 것들에 대한 비판이거나 세태 바라보기에 속하는 내용이다. 바라보기라는 것도 몽상적 태도를 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무엇인가를 추적해 가는 태도를 보이는 것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최 시인은 <공덕동에서> 40과 41에서 결사에 해당하는 마무리를 보이고 있다.
언제나처럼 적막속으로 한 사내가 간다. 적막과 사내는 일행이 되어 도시로 간다. 그곳에서 어둠을 치고 우리를 늘리고. 산으로 간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때가 있었다. 산이든 도시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무덤도 남기지 않는다.
- <공덕동에서 40> 전문
저 평화의 대지에 갔다가 오지 않는 일이 적막인가 아닌가. 그대는 말 할 수 있는가. 그 구별은 무슨 소용인가. 분별은 끝없는 분별을 낳고 변하거나 변치 않거나 한가지인 큰집의 일 속에 그대는 그냥 든 것일 뿐이네. 잘가라 말도 아니하고 웃던 그대만 남아
- <공덕동에서 41> 전문
결사로 읽히는 두 편은 어떻게 보면 비장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서사의 ‘가락지 벼릴 일’은 언제나 적막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는 일이다. 평화의 대지를 가는 일이지만 돌아오지 않는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든 ‘큰 집의 일 속에 그대는 그냥 든 것’임에 유의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소한 일인 것처럼 일희일비할 일도 아니고 하루 이틀 안에 해결될 일도 아니므로 세상을 집으로 삼아 ‘큰집’에 사는 사람이 되어라는 것이다. 최시인의 이런 발언은 그의 사회적 시대적 발언이나 지향이 어쩌면 당대에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함을 표명한 것으로 읽힌다.
최인호 시인은 또 다른 연작시로 촛불을 들고 촛불의 불가락지 속으로 들어간다. 시집의 제3부 ‘그해 오뉴월 불가락지’가 그것이다. 이 시는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를 소재로 오월, 유월, 칠월, 가을 겨울, 다시 봄 순으로 시간적 경과에 따른 촛불시위 내지 촛불문화제의 진행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공덕동에서>가 사건별, 정황별 무작위 취재를 했던 반면에 <그해 오뉴월 불가락지>는 월별 시간대별 진행적상황의 취재라는 점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후자가 기록성이 훨씬 강하다. 말하자면 촛불을 든 군중들 속에서 그 촛불이 띠를 두르며 가락지가 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비롯하되 비롯함이 없는
끝이되 다함이 없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하나 열 온 즈믄 골 잘 울
허울 없는 그늘에 하늘 땅 열려
뭇신령 맞이 은은한 불꽃
물 하늘 땅 골목길 돌아
광화문 세종로 한길 나선 여린 불꽃
손에 손잡고 어깨 결어
모이고 흩어지나 마음은 하나
벌나비 날고 해일도 되는
사라지되 사라짐 없는
- <그해 오뉴월 불가락지> 시작하는 부분
따옴 대목은 <그해 오뉴월 불가락지> 연작시의 서두부분이자 서사에 해당된다. 여기서 촛불 시위의 뜻이 규정되고 있다. ‘비롯하되 비롯함이 없는 / 끝이되 다함이 없는’이라 하여 주최가 뚜렷이 없는 사위이고 끝이라 하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땅에 사는 사람들만 구가 하는 행사가 아니라 신령들과 교통하는 비나리 형식이라는 것이고 ‘마음이 하나’로 벌나비 같이 봄 기운으로 퍼지는 기운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해일이 되기도 한다는 데에 주목할 수 있다. 촛불 시위의 미학적, 문화적인 코드를 암시해 주고 있다 하겠다. 거리를 구석구석 밝히는 것이 문화이고 불로서 가락지를 이루는 것이 미학일 수 있겠다.
시 진행이 시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는데 주요 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서사
○ 촛불 시위의 당위성
○ 교육문제, 쇠고기 수입 문제
○ 중고등학생들 입지지옥 거부
○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길바닥 임자
○ 담화문과 촛불가열
○ 유월 촛불의 대함성
○ 민주주의 함성, 그 굿판
○ 당시의 구호들
○ 대운하 접다
○ 촛불에 대한 반격
○ 두루 잘하라는 일침
○ 신앙인들 일어서다
○ 7.5 국민 승리 선언
○ 걸어다니는 사람과 차 몰고 다니는 사람
○ 좌절의 과정
○ 비나리는 계속된다
이 <그해 오뉴월 불가락지> 연작시는 기록성이 강하다 한 대로 형상화보다 서사적 문맥이 겉으로 노출된 부분이 많다. 소설가 이병주가 말한 어록에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소설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한 것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이병주는 기록의 심저에 시심과 시정이 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멀리서 가까이서 깃발들 모여들다
깃발은 하늘 하늘은 사람
수많은 하늘이 깃발로 펄럭이고
하늘인 사람들이 깃발 사이로 모여들다
하늘시장 신시가 다로 없어
예가 바로 그곳인 듯
불어나는 굿판에 쳇증 뚫리는 이 많아
촛불과 그늘 사이 깃발 나부끼는 유월
확성기 정제된 소리 때로는 불지르는 선동
대낮부터 벌이는 낯익고도 낯선 굿판
그 사이 부끄러운 이 한 사람 낀다
- <그해 오뉴월 불가락지 - 유월 1>
비교적 형상화의 각을 받쳐 주고 있는 대목이다. 전반보다 후반이 진술이 강한데 그렇더라도 제일 끝줄이 서늘한 느낌을 준다. 장르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이병주의 그 시심과 시정이 맺혀 있다는 묘한 감을 준다. ‘그 사이 부끄러운 이 한 사람 낀다’가 그런데 부끄러워함과 동참이라는 두 가닥이 하나로 만나면서 촛불이 갖는 응전의 힘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첫연에서 ‘깃발은 하늘 하늘은 사람’이 강하게 눈에 띈다. 이것은 김지하가 말한 후천개벽을 연상시켜 주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한 대목을 보자.
“촛불이 무엇입니까? 후천개벽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압니까? 동서고금 일체의 선천 문명에서 이제껏 그저 한낱 보호대상에 불과했던 꼬래비, 천덕꾸러기, 욕을 밥 먹듯 하고 몽둥이나 회초리, 아니면 그보다 더 악질적인 교육이란 이름의 매질과 주리틀기도 경쟁력이니 몰입영어교육이니 하며 단 한 순간도 가만 안 놔두고 밟혀온 어린이, 청소년들 그리고 부엌데기, 집 지킴이, 설거지꾼, …… 소외 여성들이 세상일의 중심이요 전면인 ……”
김지하는 이를 일러 ‘기위친정(己位親政)’, 즉 꼬래비가 정치의 주가 되는 것 그것이 곧 후천개벽이라는 것이다. ‘깃발은 하늘 하늘은 곧 사람’이라는 말은 이를 축약해낸 글구로 읽힌다. 우리는 후천개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꼬래비“에 대한 관심은 두루 깊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최시인 시의 장시 <그해 오뉴월 불가락지>의 결사를 보자.
축복과 위로와 저주의 불꽃
경배와 헌신과 모심의 불꽃
섬김을 받아야 할 이들의
섬김의 불꽃 땅과 그늘과 사람의 비나리
……
떼거리바람이다 냄비들이다 깃발시위다 뭉개지만 모두들 여기에 오고 모일 여기가 있다는 복됨만도 얼만가
부디 여기를 열고 저리를 막지 마시라
최시인은 비나리로서의 촛불시위를 복된 것이라 규정한다. 그래서 ‘부디 여기를 열고 저기를 막지 마시라’고 조용히 타이르듯 당부한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깃발은 그것이 어떤 상황에 놓이든 하늘이고 하늘은 또 어떤 구름에 가리워져도 그것은 사람이라는 인식에 도달해 있기 때문일 터이다.
5.
지금까지 최인호 시인의 시를 놓고 순서정, 개인적 몽상의 세계, 집단적 익명적 사회 비평의 세계 순으로 살펴봤다. 우리는 대개는 시에 대한 해설이 지나치게 지루할 때 오히려 독자를 짜증나게 한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래서 여유로운 아름다움, 그 시 한편 읽으면서 짜증을 해소해 주기를 빈다.
저 아련한 것 무언가
들판 끝 물안개
안갯속 산울림
논틀 뜸북소리
하늘 끝 무지개
저 아련한 것이
떠난 임 옷자락가
기새꽃 울음 한 점
나비 날아앉는 대낮
적막 끝 저 아련한 것이
- <저 아련한 것이> 전문
필자는 아련한 것, 안개속 산울림을 좋아한다. 기새꽃 울음 한 점도 귀하게 듣는다. 부디 촛불을 저 멀리 두고 시인이 적막 끝 저 아련한 곳으로 달려가기를 바란다.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시인을 풍경으로 바라보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