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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神父의 - 외줄위를 걷는 人生
51.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
여보! 당신 그렇게 힘든 과정을 겪고서도 또 교회로 되돌아가겠다는 거에요?”
“효중이가 곧 부제성직고시를 치고나면 다음에는 내 차례고, 내가 서품을 받아야 교회갱신운동이 정리가 된다하지 않소. 내가 이러고 사는 것이 교회로 복귀한 동지들에게도 마음에 부담이 되는 모양이오.”
“이해가 안돼요. 그렇게 싸우고 그 수모를 당하고도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 걸 보면. 도대체 사제가 되려는 진짜 의도는 뭐에요? 당신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는 보았어요? 그리고 답은 얻었나요? 내가 뭐라고 핑계를 대는지 꼭 한번 듣고 싶어요.”
“그래! 나도 이게 명예욕 때문인지, 아니면 쫓겨난 것에 대한 오기와 복수심인지, 그것도 아니면 부르심을 받고 뜻을 세운 것이니 끝장을 봐야겠다는 심리적 집착이나 강박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성취욕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딱 부러지게 정리는 못 하겠어.
그런데 사제가 되어있는 친구나 후배들을 만나면 마음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분명한 것은 내가 나를 모르겠고 혼돈에 빠진다는 거야.”
“당신이 그릇이 작기 때문에 제도권에 연연해 한다는 걸 왜 인정하지 않죠? 한 마디로 빌붙겠다는 거 아니에요?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칠 능력은 모자라고.”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봅시다. 교회복귀의 의미가 분명해지기 전 까지는 다시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지는 않을게.”
“여보! 제발 부탁이야. 이번 성탄은 홍성의 풀무학교로 가서 지냅시다. 홍선생님도 뵌 지 오래 되었고. 결혼하고서 인사도 드리지 못했으니.”
“교장선생님 말이오?”
“그래요. 한번 가 봐요. 거긴 당신이 좋아하는 함석헌 선생이 계시던 무교회주의 사람들이 중심이니 당신과도 맞을지 몰라요.”
홍성에서 홍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서 내리니 그야말로 한적한 시골마을이 나타났다.
아내가 앞장서고 우리는 그저 아담하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작은 시골고등학교로 들어섰다.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였다.
교사건물 앞 입구에 옆으로 누운 둥그런 바위가 서 있었고, ‘위대한 평민이 되자’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가슴이 뜨끔했다.
무언가 숨어있는 나의 복잡한 내면을 들킨 기분이었다.
성탄예배가 시작되었다.
홍순명교장선생님이 설교하다 말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집요하게 파고드는 논리가 그의 추구하는 삶을 드러내 주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한 마디로 군더더기 없는 영혼의 맑고 순수함이 느껴지는 예배였다.
참가한 분들은 대부분 선생님이나 교직원가족 또 졸업생들인 것 같았다.
한복을 입은 분들이 많아 명절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예배가 끝나고 친교모임이 있었고, 손님으로 온 나는 뻘쭘하게 공간 한 귀퉁이에서 또다시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들이 서로들 반갑게 악수하며 정을 나누는데 나는 여전히 타인으로 홀로 서서 누군가의 친절에 기대어 간신히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나는 뿌리 뽑힌 존재가 되어 이렇게 떠돌아 다녀야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갑자기 막막한 서러움이 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왔다.
격동의 한해가 마지막 방점을 찍으며 가고 있었다.
교구에서 3년간 성직고시를 칠 자격을 박탈한 것에 대해 분을 못 이겨 나 자신을 할퀴며 살아왔지만 결론적으로 나의 밑바닥을 보게 되면서 하느님은 참 정확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 한해였다.
완전히 무너지기 전 까지는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없는 게 인간인 모양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담임 선생님은 친구들을 선동해서 시외버스를 타고 버스종점까지 가서 놀다온 나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으로 모두 벌을 세우고, 호되게 얻어맞아 우는 나의 얼굴을 똑바로 보라며 거울을 들이대었었다.
나는 올해 내내 거울을 통해 일그러진 나를 보아야 했다.
한해를 마감하는 일기를 쓰다가 쓴웃음이 나왔다.
88년은 유난히 헤매고 다닌 일 년이었다.
정초에는 영국의 김북경목사님이 운영하는 선교단체로 갈려고 준비하면서 몇 달간 예수원을 혼자 나와서 살았고, 예수원에 복귀해서는 출판일을 다시 하며 주도권 싸움에 휘말려 신경전을 벌리느라 헛힘을 썼다.
그리고 덕동으로 가서는 아이를 지게작대기로 후려쳐 아름다웠던 공동체를 깨버리는 큰 실수를 저질러서 호의를 베풀었던 현주형의 입장만 난처하게 만들었다.
갈 데가 없어 덕동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하다가, 친구 따라 평택에 와서 돈을 벌 요량으로 팝콘형 불량닭 오천 마리를 키우면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걸 느끼면서도 철사줄 같은 인연에 엮여,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허덕이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 한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고난에 대한 선물인 양 홍동의 홍교장선생님을 만났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 하는 인생의 어리석음을 어찌하랴.
그저 나란 인간의 얄팍함과 저급함을 오물통에 처박히고 발길에 채이면서 깨달은 한해였다.
가장의 미련함과 고집 때문에 가족들은 고생보따리를 함께 짊어져야 했다.
망신을 당할 대로 다 당하고 자존감을 가질 수 없는 정도로 바닥에 쑤셔 박히고서야 갈 길을 찾은 셈이었다.
홍선생님은 며칠 동안 우리가족을 자택에 머물게 하며 홍동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해 주었다.
아내는 처녀시절에 여기를 드나들며 살았었기 때문에 이곳이 고향처럼 친근한 곳이었다.
그는 우리가족이 홍동에 정착하기를 진심으로 원했고, 하루라도 빨리 이사 오기를 희망했다.
기거할 집이 날 때까지 우선 불편한 대로 선생님댁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홍동은 이상주의자들의 집합소였다.
또 전 세계에서 이상주의자들이 찾아와 마을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정열을 불태우는 곳이었다.
동시에 마을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실질적인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 사람들에게 매료되었다.
시골에 살면서 세계와 소통하고 지역에서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모습이 향기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홍동에 대해 소개 받고 일부러 찾아온 외국인들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마을을 살피며 다니고 있었다.
이 중심에 홍선생님이 있었다. 홍선생님이 세계로 향하는 통로였고, 창구역할을 맡고 있었다.
개발도상국가들의 뜻 있는 프로젝트를 도와주는 해외자본이 홍선생님을 통해 들어오고 공동체마을건설의 밑천이 되고 있었다.
홍동은 미래에 대한 꿈과 설계로 들떠 있었다.
홍선생님은 소시지나 치즈 만드는 것을 배워보면 어떠냐며 내 의사를 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판매로 이어지면 그 다음에는 공동체 시리즈로 농민수준에 맞게 100권 정도 기획해서 출판하는 사업을 해보자고 제의했다. 여하튼 어떤 분야든 전문인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홍선생님은 우리가 할 수 있고 마을이 필요로 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열거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슈마허학교’에서 보았다는 신문지를 재활용해 만든 계란판이나 몸에 좋은 통밀빵을 만들어보는 것도 고려해보면 어떠냐고 했다. 문제는 판로였다.
우리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라 도시에 인맥이 있어 거래처를 뚫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통밀빵 아이템이 유난히 귀에 솔깃하게 들어왔다.
나는 벌써 터널의 깜깜한 어둠 속에서 햇빛 쏟아지는 출구로 발을 내딛는 기분이 되어 홍동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렸다.
미칠 것 같은 흥분 때문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입에서는 노래가 절로 나왔다.
평택으로 돌아와 효중이를 만났다.
“효중아 며칠 뒤에 홍동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
“뭐라고? 죽은 춘기의 뜻을 이루자고 소리 지를 때는 언제고 네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냐? 며칠이나 되었다고. 며칠 전 춘기 기일 때 자네가 후배들 앞에서 선언한 것은 다 없던 일로 하자는 거냐?”
“꼭 신부가 되어야만 춘기의 뜻을 실현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
“모인 사람들은 자네가 교회로 복귀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잖아?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
“너하고 나하고 같이 움직이면 될 것도 안 돼. 너 서품 받고 그 때가서 다시 생각하자. 너하고 나하고는 경우가 틀리다. 나는 위험한 사람으로 이미 낙인이 찍혀 있다. 너까지 희생 될 수는 없잖아? 나는 네가 이해하리라고 본다.”
“이참에 같이 묻어가야지. 그러면 너 혼자 또 복권을 시도해 볼 작정이냐?”
“정말 사제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인지 한번 더 생각해 봐야겠다. 다시 교회에 복귀했다가 중간에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이고, 사생결단을 하고 덤벼들려면 내 안의 뜻이 확고한 지 철저하게 점검해 봐야지.”
“도망가는 거냐? 자신 없어서.”
“그런 지도 모르지. 그 동안 겪은 방황도 끔찍하니까.”
“경일아.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올라 타야 돼. 차 떠난 뒤에 손 흔들어봤자 소용없다는 거 몰라?”
“될 일이라면 어떻게 되든 되게 되어있어. 마지막 기회라는 건 없어. 안 될 일이니까 안 되는 거지.”
“ 잘 났어. 정말. 나중에 후회 하지는 마. 다시 잘 생각해 봐. 평생 떠돌이생활 할 거냐?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목표를 정했으면 끝까지 가는 거야.”
89년 1월 8일 아침.
“이사 도와주는 사람 아무도 안 와요?”
“온다더니 끝내 안 나타나는군. 효중이가 화가 나 있으니 직원들이 겁이 나서 못 오나보다. 월급 받는 처지가 그렇지 뭐.”
“아니 이 짐을 한꺼번에 다 어떻게 싸요? 곧 차가 들이닥칠 텐데.”
“싸는 데까지 싸 봐야지.”
“밤낮으로 어울려 술만 마시고 다니더니 그 정도의 인간적 배려도 없어요?”
“오늘 효중이 성직고시 보러 가는 날이야. 괜히 화 돋구지 말고 조용히 여길 뜹시다. 격려는 못 해 줄망정.”
“당신두 발을 따로 걸치고 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해요. 깨끗이 마음을 정리해요.”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그래도 그 친구 아니었으면 덕동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었겠어?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그 친구 원하는 대로 못 해줘서 미안할 따름이지.”
“여기서의 생활! 정말 사람 사는 게 아니었어요. 매일 괴로워하는 당신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지긋지긋 했구요. 나야 집에만 있었지만 꼭 현장을 봐야 아나요? 밥 먹고 사는 게 그렇게 힘들어서야 어떻게 살아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좋은 경험 했다고 칩시다. 빨리 짐이나 쌉시다.”
“경일아! 너 꼭 이런 식으로 해야겠냐? 나 오늘 성직고시 시험 혼자 치는 거야. 시험장에 나 혼자 있다니까. 같이 시험 보는 친구 하나 없이. 나 같으면 시험 치는 거 함께 가서 격려라도 해 주고 갈 것 같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모질고 매몰차냐? 나 너무 외롭고 힘들어. 나 떼 놓고 그냥 이렇게 가야해? 시험 보는 날 아침에?”
“효중아! 미안하다. 약속이 공교롭게 그렇게 되었다. 너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오늘 하루 종일 기도할 게. 내 마음 모르겠냐?”
“그래! 가라! 갈 놈은 가야지. 너를 누가 막겠냐? 혹시 사고 터져서 마음 바뀌면 전화해라.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거야. 힘들면 연락해.”
“고맙다. 시험 잘 쳐.”
홍동에 도착하니 마침 집회 중이던 학생 마을청년들이 모두 몰려나와 이삿짐을 날라주었다.
홍선생님과 나는 첫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같이 살면서도 샴쌍동이처럼 딱 붙어 떨어지질 못 했다.
낮에는 물론 밤에도 새벽이 온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기 일쑤였다.
결국 사모님이 제지를 하고 나섰다.
우리는 눈치를 보면서도 틈만 나면 무언가를 얘기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 도망 다니면서 얘기하는 식이었다.
한 마디로 절제를 할 수 없었다.
나는 홍선생님의 그 박람강기와 박학다식에 탄복하며 그의 전 세계를 넘나드는 비젼과 꿈에 푹 빠져들었다.
홍선생님은 인류의 희망과 미래를 이데올로기나 체제가 아닌 협동조합에 두고 있었다.
하루는 도야마 아끼오라는 분이 홍선생님댁을 방문했다.
도야마씨는 일본의 양심세력으로 알려진 무교회신자로서 일본의 풀무학교격인 독립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한국사를 전공하고, 일본어강사일을 하며 이 시대에 한국을 도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일본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색소와 방부제를 전혀 섞지 않은 무공해 햄과 소세지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돼지를 해체하는 일부터 완제품을 만드는 일까지 전직원이 모두 달려들어 중노동을 감수하며 직접 수작업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무공해식품이라 빨리 소비되지 않으면 쉬 상하므로 폐기처분을 할 수 밖에 없어 인체에 무해한 식품을 생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2-3년 후에 다시 한국에 들어와 자신의 원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결심임을 분명히 했다.
그의 꼿꼿한 자세와 맑고 깨끗한 얼굴, 열린 사고와 굳은 신념,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는 주위를 환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홍동의 풀무학교는 이런 눈빛이 깊은 전 세계의 이상주의자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드나드는 곳이었다.
결국 홍선생님과 긴 의논 끝에 통밀빵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뒤 한살림소비자협동조합 이사장님이 방문했다가 대화 중에 제빵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곳을 소개해 주었다.
부천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소사라는 곳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신앙공동체가 있다고 했다.
물어물어 찾아가니 큰 가건물에 주로 신학생들이 콩나물과 두부 빵을 만들어 주문제로 생산하고 배달까지 해주고 있었다.
대표라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제빵공장에서 오후 내내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으나 누구도 말 붙이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해도 지고 해서 내심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제빵기술자로 보이는 내 또래 사람이 나를 불러 세웠다.
“보소! 당신 참 순진하네. 눈치 보면 모르요? 누가 기술을 공짜로 가르쳐 줍니까?”
“나는 그렇게 전해 들어서.”
“그래 하는 말 아니요. 그렇게 전하는 사람도 한심하고. 그걸 믿고 오는 사람도 우습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소?”
“죄송합니다.”
“내 한 수 가르켜줄 테이까 잘 들으소. 물을 끓여가지고 발효기 내부온도가 17도를 유지해야 빵반죽이 가라앉지 않는 기라. 그리고 반죽은 손으로 많이 치대야 똑 같이 잘 부푸는 기고. 그게 특급 노하우요. 그 외에는 책에 다 나와 있고.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는 기라. 더 이상 가르칠 것도 없고. 마 가소.”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상 원망하지 마소. 다 그런 기요. 한 사람이라도 더 가르치면 내 밥그릇이 작아진다 아이요. 알았지요?”
“ 예! 알겠습니다.”
2월 13일. 홍선생님댁 바로 위쪽 태양열집이 비게 되어 이사를 하였다.
한 달이 넘도록 우리 가족은 교장선생님댁에서 얻어먹으며 공짜로 얹혀 지냈다.
나는 함께 생활하면서 홍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인간적 따뜻함은 말 할 것도 없고, 홍선생님은 한 인간이 어떤 생각으로 사느냐에 따라 시골 한 귀퉁이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고, 인류의 희망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해주었다.
그는 그때까지 내가 만나 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가도 아니고 종교로 밥 먹는 사람도 아닌 교육자로서 마을공동체운동으로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담금질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상이 현실적으로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었다.
신용조합, 농민생활협동조합, 생산자조합, 갓골어린이집 등 시간이 지나면 모두 속도가 붙게 마련인 이 지역에서 꼭 필요한 사업들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홍선생님에게서 다양한 라면요리를 하는 방법을 곁눈질로 전수 받게 되었다.
낮이고 밤이고 사모님이 안계시면 홍선생님은 라면요리를 해 드셨다.
또 홍선생님이 들며나며 집 옆에 한 그루 옮겨다 심은 포도나무에 바짝 붙어 서서 살짝 익은 포도를 따 먹는 걸 문틈으로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인생을 즐기며 사는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것을 찾는 호기심 많은 50대 소년 바로 그 자체였다.
태양열집으로 옮기고 난 뒤로 어른들하고 같이 살면서 참았던 부부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구! 이걸 그냥 한 대 쥐어 박어? 말어?”
“당신 나하고 싸우면 이길 수나 있어? 나의 이단옆차기를 한번 맛봐야 정신을 차릴 거야?”
“아니? 당신 태권도 했어?”
“그래! 대학 다닐 때 했다. 왜?”
“얼마나 했기에 이렇게 날아다니는 거야?”
“한 달 정도다. 태권도부에 들었는데 체력이 안 된다고 나가라 하더라. 그래서? 어쩔래?”
“한 달 실력 치고는 꽤 파괴력이 있는데? 어쭈.”
장인어른이 오셨다.
“아니 밥상이 왜 이 모양이냐?”
“윤경이 아빠가 화난다고 주먹으로 내리쳐서 귀퉁이가 날아갔어요. 이 상이 내 얼굴이죠. 나를 부신 거나 마찬가지에요.”
“말이 지나치잖아?”
“내가 틀린 말 했어요?”
“거 참 손님이든 누구든 오기만 하면 꼭 밥상을 펴서 이런 식으로 말하네. 당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누가 와서가 아니라 당신 그 주먹 함부로 휘두르는 버릇 고쳐야 해요.”
“내가 언제 당신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고 그래? 새로 사놓은 상도 있는데 손님이 오면 일부러 꼭 부서진 상을 어디서 찾아 꺼내 온단 말이야. 누구 망신 줄 일 있어?”
“그래요. 당신 이게 망신이라는 걸 알기나 해요?”
“그만 해라. 밥이나 먹자.”
“내 이놈의 상을 아예 불태우든지 해야지.”
“그 상 없어지면 집 나가 버릴 테니 그런 줄 아세요.”
“아이고. 공주마마 무서워서 어디 살겠나 이거?”
독일에 사는 처제가 통밀빵 제조법이 실린 책을 보내오고, 나는 집내부의 공장자리에 임시로 비닐을 쳐서 빵공장 시설을 했다.
발효기와 빵틀, 가스오븐기를 사고 작업대도 놓고, 마침 제과점을 하다 폐업하게 된 아내의 친척아저씨에게서 운 좋게 대형반죽기를 비롯한 기기일체를 물려받았다.
드디어 처음으로 반죽을 해서 빵을 만들어 보았다.
통밀을 주로 넣고 호밀 옥수수 보리를 약간 섞어 4가지 곡식으로 독일식 묵직한 식빵을 만들어 홍선생님에게 시식을 부탁했다.
홍선생님이 너무도 맛있게 드셔서 나도 안심하고 먹어보았다.
발효가 너무 지나쳐 시큼한 맛이 났고, 반죽허리 부분이 꺼져버려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선생님은 이렇게 매번 실패하는 통밀식빵을 10개씩 가방에 넣고 다니며 서울에 갈 때마다 지인들에게 팔아주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서툴러서 어설픈 우리가족을 일으켜 세우느라고 그렇잖아도 바쁜 홍선생님은 바람소리가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