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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한국 의료 선교 역사
김선영-충남의대 내과 교수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정식으로 전파되게 된 배경에는 의료사역을 떼놓고는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어 한국 교회사의 시작은 의료 선교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의료 선교 활동이 한국 근대의학의 보급과 발전에 기여한 업적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지만 선교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에서의 의료선교운동사를 고찰하는 일은 한국 선교운동사를 이해하는 방법인 동시에 오늘의 한국교회의 세계선교 운동에도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주리라 믿는다.
***한국 기독교 전래
1.경교와의 접촉
o 아마도 8세기경 경교(Nestorian)와의 접촉이 처음
*네스토리아주의-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인정
cf: 카톨릭-마리아를 Mother of God vs 마리아 인간
o 635년(당 태종 9년)에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전래->
781년에는 당나라 수도 장안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비석 세움->
A.따라서 아마도 신라시대에 조선에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신라와 당의 빈번한 접촉
2)금강산 장안사에 중국 것과 같은 경교 비 발견(1971년)-연구위해 세워진 것
B.서기 31~84년 사이 전래 되었다는 설
1)경북 영풍군 왕유동의 ‘분처바위’, 순흥면 읍내리의 벽화고분, 안동군 학가산 의 비석 등에서 추적
2)가야문화가 기독교 문화였다는 설
2.천주교와의 접촉
o 임진왜란-일본인중 15,000명 정도의 천주교인 있었고 이들을 위한 신부 파견
-포르투칼 신부 세르페데스가 1593년에 옴
o 중국에서 활동 중인 예수회 선교사들-종교보다 학문으로 먼저 소개
->마테오릿치가 1603년에 중국어로 쓴 “천주실의”를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을 통해 소개
o 1784년 2월-이승훈이 북경에서 셰례 받고 귀국-영세 받은 첫 한국인
->이후 이벽, 김범우, 권철신 등과 서울 명래동에서 공식집회 가짐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3.개신교와의 접촉
o 네델란드인 벨트브레나 하멜, 영국인 바실 홀 접촉-선교와는 무관
->중국에서 모리스가 한문 성격 전해 줌
o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1832년 7월 17일 황해도 백령도 찾은 구츨라프목사
-독일인, 화란 선교회 소속, 인도네시아, 태국, 중국 거쳐 황해도 도착
->군산, 흥주 등지를 돌며 40일간 한문 성경으로 전도
***의료선교의 기원과 발전
교회의 의료 활동 또는 의료 사역은 근본적으로 복음 증거를 위한 선교 사역이지만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도 주위적 봉사였다. 이런 의료 활동은 복음화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고 무엇보다도 기독교 선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예수님 이래로 선교는 전도, 교육, 의료이었다. 그러나 이 세 영역의 선교가 제대로 시행된 것은 19세기 이후라 할 수 있다.
1.이때까지는 목사 선교사에 의한 설교사역이 주된 영역이었으나 평신도 선교사(전문인 선교사)가 강조되었고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지역에서는 의료 활동과 선교지에서 환영을 받아서 주요 사역됨
2.여성 선교사의 출현- 19세기 말에 와서는 의사, 간호사를 포함한 여성선교사의 숫자가 남자 선교사의 숫자를 능가 ->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사역이 강조된 것을 반증
3.선교 주도권이 유럽 교회에서->미국교회로 옮김: 미국인들의 실용적인 사고와 정책이 선교 영역에서 나타남 ->결과로 선교사역이 선교지에서 의 선교사의 사역만이 아니라 이를 위한 호소, 선교교육, 그리고 본국에서의 사역도 교회의 선교활동으로 이해하게됨
*교회의 의료적 봉사는 윌리안 캐리의 현대선교운동과 거의 동시에 시작-
1793년 윌리암 캐리가 인도로 갈 때 동료 존 토마스는 의사였고 그를 통해 선교지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의료선교사로서는 인정받지 못함.
*1819년 미국 의료 선교사 존 슈더는 미국 교회가 파송한 최초 의료 선교사-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36년간 봉사, 자녀7명이 사역을 이어받았고 손녀도 의료선교 사역
*최초의 여자의사 선교사=1870년 미국 감리교가 파송한 Clara Swain
최초의 간호사 선교사=1884년 중국 상해에 도착한 미국 Elizabeth M McKechnie
***개신교가 들어오게 된 4가지의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건들
1.토마스 목사 순교 사건
o 영국 목사아들로 태어나 1863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음
->그해 12월에 중국에 도착
->1865년 9월 비밀리 한국 소래지방을 방문하여 한국어 습득 후 돌아감
->다음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타고 대동강 입항-_9월 1일 순교
2.성경 번역 운동
o 스코트랜드 선교사들은 1863년 만주 지방 선교를 시작 이중 로스, 매킨타이어목사가
만주 지방에서 선교 활동 중 한국인과 접촉 ->1876년에는 이들이 세례 받음
->1878년에는 서상륜과 성경번역사업 시작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1883년 사도행전
->1887년 신약전서가“예수셩교젼서”란 이름으로 출판
*서상륜 등이 한글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전도하여 세운 교회가 1884년 황해도
소래교회이다.
o 이수정의 성경 번역 사업=한국의 마케도니아인
-“일본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인에 의해 선교하라“
*1881년 일본으로 가서 일본인 쯔다 박사에게서 농업을 배우던 중 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됨
*1883년 4월 29일 (주일)에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루우미스목사의 부탁을 받고
성경번역 작업 시작
*1883년 말까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완역,
1884년 초에 누가복음 번역본 출간
->1885년 1월 일본에 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 번역본을 받고 매우 기뻐했으며
이것을 가지고 한국에 입국
3.1882년에 이루어진 한청간의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및 한미 양국간의 수교
(한미수호통상조약)-정식으로 외국인이 내한하게 됨
1)청나라 이홍장에 의해 파견된 독일인 뮐렌도르프는 한국 海關總稅務司로 일함
2)일본에 파송 된 멕클레이(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한국에서의 병원 및 학교사업 신청 이 조정에 의해 허가 됨(1884년 6월)
-1883년 미국 방문한 민영익을 만난 고우쳐 목사가 감리교단 선교부에 기부금
2,000불과 함께 조선 선교를 강력하게 요청->교단 선교부는 맥클레이 목사에게 사정 을 알아보도록 함 -> 이때 일본에 와 있던 김옥균과 친분을 갖고 있었기에 1884년
조선을 방문하여 의료 사업과 학교 사업을 신청하여 7월 4일 허가를 받아 일본으로
돌아감
4.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중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하다가 1884년 9월 미국 영사관의 공의자격으로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알렌이 갑신정변때 개화파에 의해 크게 다쳐(밀렌도프-30군데 이상의 칼 맞음)사경에 빠진 민영익(민비 조카, 가우쳐목사, 그린피스 목사, 카나다인 게일-당시 20세-기도부탁을 받음)을 3개월간 치료하여 낫게 해줌으로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어의로서 일하였고 제중원(광혜원:1885년)을 열어 의료선교의 첫발.
***광혜원(제중원)의 설립과 발전
1.Horace N Allen(安連, 1858~1932, 미 북장로회 소속)의 입국과 활약
1)1884년 9월 20일 제물포도착, 22일에 서울도착-미국 공사관의 공의 신분
2)갑신정변 때 민영익 치료건을 계기로 고종의 侍醫로 임명-典醫로까지 됨
**사건 2개월 전에 보내신 하나님**
3)1885년 4월 10일 재동 이윤봉 집에 한국민을 위한 최초 근대식병원 광혜원 개원
23일에 제중원으로 개명
4)1885년 5월3일 스크랜톤(미 북감리회 소속), 6월 21일 헤론(,,), 1886년 최초의
여의사 엘러즈(,,)가 입국-부녀과 개설
5)1886년 3월 29일 경쟁시험을 거쳐 16명의 학생선발-영어, 기초과학, 의학 교육
6)알렌은 1887년 가을 주미 한국 공사관 개설되면서(초대 공사 박정양 參贊官)
고문으로 임명받아 한국을 떠났다가 2년 임기 마치고 1889년 다시 입국
그후 잠시 제중원 책임을 맡았다가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면 서 선교 사역을 떠남
2.John H Heron(1858~1890, 미 북장로회 소속)
1)알렌, 스크랜톤에 이어 3번째로 1885년 6월 내한한 의료선교사
1887년 9월 알렌에 이어 제중원 책임을 맡음
2)1883년 테네시의대 졸업,
1884년 북 장로교 선교부를 직접 찾아가 조선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 정세 혼란 으로 1884년 우선 일본으로 보내어 진 뒤 정세를 보아가며 입국하도록 선교부에서 결정하여 정식으로 한국 선교사로 파송된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1883년 일본 장로교 선교사 녹스, 중국 선교사 리이드 등은 조선선교 강력 요청 중
3)병원이 비좁아서 1887년 구리개(현 을지로 2가)로 이전
4)1889년 10월 선교사 공의회 조직, 의장직 맡음
5)1890년 6월 “대한셩교셔회”(예수교문서회)를 창설-문서 선교 활발하게 전개
6)1888년 3월에 호튼(1893년 언더우드 목사와 결혼)입국하여 엘러즈(감리교 선교사 벙커, 육영공원의 교사: D.A. Bunker와 결혼후 사퇴)가 맡았던 부녀과 인계받고 정동 과 모화관에 있는 진료소 책임 맡음.
**육영공원: 조선 정부가 주도한 교육기관으로 1883년 핼리팩스가 입국하여 이루어졌 고 1886년 5월에 길모어, 벙커, 헐버트 3명의 유니온 신학교 대학원생이 입국 계속
7)많은 업무, 무리한 순회 진료, 다방면의 복음전도여행으로 피로가 겹친 가운데 이질로 인해 아내와 두 딸을 남긴 채 1890년 7월 26일 순교.
한국 땅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최초의 서양 선교사가 되어 처음으로 양화진에 안장
**미망인 헤론 여사는 선교를 위해 계속 남아 있다가 1892년 4월 7일 그녀를 돌봐 주 던 게일과 재혼하여 선교활동 계속. 1908년 3월 29일 서울에서 지병인 폐결핵으로 눈을 감고 남편 헤론의 무덤 옆에 묻혔다.
**게일: 카나다 선교사로 1863년 생으로 1886년 토론토 대학 재학시절 무디 못가의 설교에 감동, 1883년 미국 방문한 민영익을 만난 것을 떠올리며 조선에 대한 키워왔고
1888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YMCA선교사로 임명받아 그해 12월 15일에 부산도착 함
3.C Vinton
1)헤론이 순직 후 카나다출신 의사 하디가 1891년 4월까지 임시 원장, 그 후 빈튼이 1891년 4월 내원하여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
2)국립병원인 제중원에서의 복음 사역이 제약이 있다고 해서 1892년 9월1일부터
자택에서 진료소를 개설-> 4개월간 사역하며 전도, 의료사업은 복음전도의 첩경임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보고
4.Oliver R Avison(1860~1956)
1)북장로교 선교부는 제중원의 여러사정을 고려, 카나다 의대 젊은 교수인 에비슨 파송
2)1892년 한국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의 토론토 보고회에서 감명->한국 선교 자원->
1893년 7월 16일 일본을 거쳐 부산 도착. 11월 1일부터 제중원 원장으로 일했
으며1935년 12월 75세로 은퇴하기까지 42년간 한국에서 일함
*에비슨 취임 당시의 제중원 현황
ㄱ. 변변하지 못한 의료기구와 의약품
ㄴ. 34명에 달하는 잡급직 직원들이 병원 관리- 월급이 없기에 환자들에게서나 정부 로부터 오는 예산을 횡령하여 살고 있음
ㄷ. 기생, 무희들을 간호 인력으로 사용
*에비슨 원장은 이들의 파견을 거절-> 테이트와 아부클 선교사 동원하여 간호 일 을 보게 하고 과부나 쫓겨 난 첩들을 훈련시켜 간호사로 일하게 함
3)이런 상황을 파악한 후에 운영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임을 원함-> 알렌이 중재
-> 에비슨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해결되면 일 하겠다 함
①자신의 연락 관으로 일할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관리 철수 할 것
②자신의 임의대로 조수를 선발 할 것
③병원의 전 재산권을 장로교 선교회에 넘겨 줄 것
④미 북 장로교 선교회는 장차 모든 병원 개조와 운영에 관한 비용을 담당 할 것
-> 6개월간의 협상 결과 수락되어 병원 경영 일대 전기 이룸
-> 1894년 후반부터 미 북 장로교 선교부기 제중원 관할, 적극 후원함
4) 1891년 11월 어빈, 1895년 4월 여의사 화이팅 합류, 1897년 2월 여의사 피시,
5월~9월까지는 하디, 1898년 8월 여의사 필드, 1899년 9월 셔록스가 합류
*제이콥슨은 1894년 파견된 첫 정식 간호사->1897년 이질로 사망
-> 뒤이어 실즈가 합류=초창기 한국 간호사 제도 발전에 기여
5)건강 문제로 임시 휴가차 1899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친구인 건축가 고든에게 현대식
병원 설계 부탁
6)1900년 봄 뉴욕에서 열린“해외선교에 관한 에큐메니칼회의”에서 한국 의료선교 강연
->강연들은 스탠다드 석유회사 지배인 세브란스씨가 기부한 1만 달러 갖고 1902년
도동에 병원건축 시작 ->1904년완공 11월에 개원=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씨
①의료 선교사 한 사람 사역비 지원-1934년까지 일한 허스트씨
②1907년 자신의 주치의 루드로우와 함께 방문-3만 달러 추가 기부하고 주치의를 파송, 1938년 한국에서 은퇴 시 까지 외과의사로 일하게 했다.
③세브란스씨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딸 인 죤 세브란스와 프렌티스가 1939년 일제 탄압으로 선교사들의 입국이 금지될 때까지 후원을 계속함
7)1899년부터 정식 의학교육 시작 ->7명이 의학 교육을 받은 후 각종 시험에 합격 1908년 졸업과 동시에 의사가 됨, 또한 기존의 의료조수, 약제사 교육은 계속
1904년에 한국 최초 여의사 에스더 박 귀국, 의학박사 오긍선이 1907년 귀국
8)에비슨은 제중원,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 의학교, 연희전문학교의 책임자로 한국
의료 선교 역사와 한국의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민간 병원들의 설립과 운영
1.施病院과 스크랜톤(施蘭敦, 1856~1922, 미 북 감리회 선교사)
1)감리교 선교부로부터 파견, 1885년 5월 3일 한국에 오게 된 두 번째 의료 선교사
2)1882년 뉴욕의대 졸업, 2년간 개원의사, 1884년 12월 목사 안수, 조선선교사로
임명 받음, 어머니와 함께 1885년 내한
(어머니는 52세 나이인 1884년 10월 아들보다 먼저 선교사로 임명 받음)
3)헤론이 파견되기까지 알렌을 도와 제중원에서 일함 -> 왕실 중심 의료 펴는 알렌의 선교정책 때문에 6월 24일 그만둠-> 민중 특히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독자적 의료
사업을 준비
4)1885년 9월 10일 정동에 진료소(‘미국 의사 진료소’)를 개설
->1886년 고종이 시병원이라는 이름 하사받고, 진료소에서 입원환자 받음
->감리교 선교 본부에 다른 진료소 개설건의 하여 1888년 12월에 아현동과 상동에 진료소 개설
->1887년 시병원을 구리개로 옮겨 남대문 상동병원으로 개칭
5)스크랜튼이 선교부에 제시한 의료선교 확장을 위한 4가지 계획안
①전 국토에 걸친 의료 전도 여행
②동대문 밖의 진료소 건립
③서울 중심부에 현대식 일반 병원 건립
④제물포 항구에서의 의료 활동
-> 서울 도처에, 지방 각지에 병원과 진료소가 세워짐
6)1892년 상동병원 내에 ‘상동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가 됨
->직원들 기도회 인도, 직접 환자에게 설교, 전도사에게 환자들에게 전도하게 함.
자신의 부인과 간호부장을 성경(전도)부인 역할까지 시킴
7)미 공사관과 한국 정부에서 복음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에 제동을 걸기 때문에
의료 선교사역이 중요 역할 한다고 감리교 선교회로 인정토록 함
->감리교 선교부 회계를 거쳐 관리책임자로서 선교부를 지휘.
->따라서 한국에 파견되는 선교사의 반은 의료 선교사로 한다는 결정 내림
->1887년 여의사 하워드, 1889년 여름 맥길, 1891년 홀, 1892년 1월 루이스
(간호조무사), 1893년 부스테드, 1893년 봄 커틀러 등 속속 입국
8)1907년 6월 22년간의 한국에서의 공식적 활동 마치고 은퇴하였으나 독자적으로
의료선교 활동 펼쳤고 말년에는 일본에서 활동 중 고베에서 66세 일기로 소천
***스크랜톤은 남보고 선교가라고 권유했으나 결국은 본인이 가게 됨
(선교 보고에서 감명 받음---선교 보고가 중요하다)
2.保救女館
1)스크랜튼은 부인들과 아이들을 위한 병원을 구상하고 여의사 파견을 요청
->1887년 10월 31일 하워드가 내한 이화학당 구내에 여성과 어린이만을 위한
진료소 개설 -> 명성황후가 ‘보구녀관’이라는 이름 하사.
2)하워드는 건강상 1889년 9월 귀국, 대신 셔우드가 1890년 10월 14일 내한 계승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 하에 여성의료교육을 시작
첫 여의사 박에스더(김점동)가 미국 볼티모어의대 교육을 마치고 1900년 귀국
->정동부인 병원에서 일하였다.
1893년 동대문 분원 설치=볼드윈 시약소라 불렀다.
셔우드는 1892년 감리교의료선교사이자 목사인 홀과 결혼하였으나 2년 후인 1894년
남편과 사별 후 1935년까지 한국에서 일하였다.
3)커틀러는 1893년 입국 셔우드와 함께 일했고, 해리스는 1897년 10월 입국
소장으로, 에른스버그가 1899년 9월 입국.
정동에서 동대문으로 이전=1907년 착공하여 1912년 준공. 이 병원에서 5년간
일하다가 건강악화로 귀국, 1902년 소천한 해리스를 기념하여 릴리안 해리스 기념
병원으로 개칭, 1930년부터 동대문 부인 병원으로 불렸다.
이 병원이 이화의대 병원의 전신이다.
3)휴 오넬 기념 진료소
언더우드 목사 부인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여의사로 1893년 서울 정동 구내에 부녀자 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진료소 개설
4)‘간호’라는 어휘는 1903년 에즈먼드에 의해 보구녀관에서 간호사 양성소가 개설
되면서 사용하기 시작-처음으로 사용함
***최초의 의과 교육 기관, 세브란스 의학교
1.1885년 제중원에 의학교육부가 알렌에 의해 개설-13명의 학생을 선발, 교육
2.1893년 에비슨 이후 의학교육이 구체화됨, 1899년 제중원 의학교 정식 설립
3.에비슨, 웰스, 샤록스, 허스트 등이 일함
->제일 먼저 Gray 해부학 번역, 화학, 생리학, 약물학, 세균학, 위생학 등 교과서 편찬.
4.1908년 7명의 학생들(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치, 홍석후, 홍종은) 배출
대한 정부로부터 1~7번까지 면허 받음-졸업생 전원이 에비슨 도움
5.에비슨에 의해 교육과정 4년을 마친 후 1년 각과를 돌며 수련하는 인턴제도 도입
6.1908년까지 미 북 장로교회 단독 운영
-> 미 북 감리교소속 폴웰, 영국 성공회소속 와이어, 미 남 감리교소속 레이드 등이
부임하면서 한국 연합 선교회로부터 재정원조 받음
->1912년에는 다섯 교파로부터 7명의 의학교수가 파견
->1913년 ‘세브란스 연합 의학전문학교’라 불림
7.오긍선은 루이빌 의과 대학 인턴 과정을 마친 후 1907년 미 남장로교 선교부 파견 된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인 의료선교사이다.
*1901년 군산 야소병원장으로 일하던 알렉산더가 부임 직후 자신의 부친상으로
미국으로 가면서 오긍선을 데리고 가서 의학 교육시킴-> 1912년 부터는 세브란스
에서, 1934년 에비슨이 은퇴하자 첫 한국인 병원장으로 일하는 등 50년간을 세브란스
에서 일하였다.
**배재학당: 아펜젤러 목사-벧엘(정동)교회-1887년 10월9일
이화학당: 스크랜턴의 어머니 스크랜튼 여사, 아펜젤러 아들과 딸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언더우드 목사-새문안 장로 교회-1887년 9월 27일
정신학교: 엘러즈
의료선교의 필요성
1.1893년 장로교 공의회가 정한 선교정책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친숙하게 지냄으로써 가르칠 기회를 찾게되고, 깊은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시약만 가지고는 별 효과를 볼 수 없다.
병원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고향의 마을에 자주 왕래케 하여 의료선교사들의 인애에 넘치는 간호의 경험을 본받아 전도의 문을 열도록 해야한다.
2.1880년 이후 적어도 1930년까지 한국에는 각종 전염병과 피부병이 만연하였고, 외거적 질환은 말 할 것 없고 안과, 치과 질병도 심각하였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한국인에 대한 보건, 의료 활동은 필요하고도 적절한 선교방법이었다.
의료 선교의 발전과 개신교의 지역 의료 선교
선교 초기와는 달리 각국의 여러 교단들에서 선교사들이 파송됨에 따라 선교상의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지의 분할, 조정이었다.
이런 선교지 분할, 조정은 1890년대 초에 시작되어 1910년대까지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협의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서울과 평양같은 대도시는 공동선교지역으로 조정되었고 각 지방는 각 선교부의 주 활동지역으로 선정.
미 북 장로교-황해도, 평안도, 경북 일대
미 북 감리교-평안도 일부, 충청도, 강원도 남부
캐나다 장로교-함경도
미 남 감리교-경기도 북부, 황해도 남부, 강원도 북부
호주 장로교-부산, 경남
미 남 장로교-전라도
영 성공회-경기도
1.평양, 평안도 지역-미 북 장로교, 미 북 감리교
1)홀 선교사 일가
*로제타 셔우드
1865년 9월 19일 뉴욕 출생. 펜실베니아 의과대학 졸. 1889년 11월부터 뉴욕 빈만가
의료 선교사로서 메디슨 진료소에서 홀과 함께 사역하다가 1890년 8월 먼저 입국하여
스크랜튼의 부인병원에서 일함.
*홀
1860년 1월 16일 캐나다 온타리오에 출생. 뉴욕의 벨레뷰 병원 의과대학 졸. 미 북
감리교가 운영하는 뉴욕의 메디슨 자역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하다가 1891년 미 북 감리교 목사 및 의료선교사로 내한.
1892년 존스 목사와 북쪽 지방 순회한 후 평양 지역에 진료소 개설.
1892년 6월 로제트 셔우드와 결혼 함께 의료선교 감당.
1894년 청일 전쟁발발-격전지였던 평양에서 많은 부상자 치료.
1894년 11월 24일 과로와 전염병(장티부스)로 순교
짧은 3년간의 사역이었지만 고상한 인품과 깊은 신앙심 그리고 박애주의 사상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모든 동료 선교사로부터 칭송 받음.
*로제타 홀
o1805년 11월 아들 셔우드와 집안일과 병원 일을 돌보던 박 에스더와 그 남편을
대동하고 임신 6개월 몸으로 미국으로 귀국.
(**박 에스더는 볼티모어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일함)
o남편의 순직을 기념하는 병원을 설립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1897년 2월 1일
‘기홀 병원’을 평양에 개설-미 북 감리교는 이 병원의 사역 위해 폴웰을 파견
o->기홀 병원은 북한 모든 지역에서 오는 환자를 담당.
->미 북 장로교가 평양에 개설한 래드 병원으로 시작하여 평양 기독병원으로 발전한
의료 기관과 연합하여 1923년 ‘평양 연합 기독 병원’으로 발전.
o 그녀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의 맹아 교육을 위해 맹아 교육법 연구
->1897년 11월 10일 셔우드와 에디스를 데리고 한국으로 와 기홀 병원에 한국
최초 맹아 학교 ‘정진 학교’ 세움
o 한국으로 돌아 온지 1년 만에 에디스가 구토와 설사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남
o 그녀는 47년간을 의료 선교사로 봉사하였고 1940년 한국을 떠나 1951년 4월 5일
85세로 세상을 떠남
o 그녀는 한국의 여의사 양성을 꿈꾸면서 일본 동경 여자 의학 전문 학교을 졸업한 여의사 길정희와 함께 수 년간 계획한 끝에 1928년 9월 4일 ‘경성 여자 강습소’을 열었다. 이는 훗날 경성 여자 의학 전문으로 발전->수도 의과대학의 전신
._우석의대 -> 고대 의대
*아들 셔우드 홀
o1911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마운트 유니언 대학 졸업.->토론토 의과대학 졸
o같은 뜻을 지닌 버텀리를 만나 결혼하여 1926년 부산 도착.
o 해주 구세 병원에 일하였고 1928년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해주에
설립. 또한 결핵협회를 조직하고 1032년 12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
o1940년까지 한국에서 일하다 일제에 의해 추방->인도로 가서 23년간 선교사로 봉 사 한 후 1963년 은퇴. 1992년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양화진에 안장.
o1978년 ‘닥터 홀 조선 회상’ 자서전을 출판.
2)웰스
*1895년 입국.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 구제와 예방에 힘씀.
10월 평양으로 가서 로제타 홀과 협력하여 일한 안과 전문의.
3)모펫
*평양 신학교를 세운 미 북 장로교 모펫 목사 부인의 아내. 의료선교사로 평양에서
활동하였으며 1912년 평양에서 순직
4)샤록스
*1901년 미 북 장로교에서 파송, 평북 선천에서 1906년 약국을 내고 진료소 시작
->나중에 ‘미동병원’이 됨
*그 후 팁턴, 키솜이 간호사 헬스트롬, 센더스, 잉거스 등과 함께 일함.
*보조의사, 간호사 양성
5)밀즈
*미 북 장로교 파송, 강계에서 1909년 의료 선교 시작.
*플레쳐, 비거 등과 같이 일하면서 ‘케네이 병원’ 설립
2.함경도 만주 지역
1)맥길
*원산은 주로 미 남 감리교가 사역 담당. 1889년 8월 27일 내한한 맥길이 1892년에
원산에 정착. 의료선교 시작. 1891년 4월까지 잠시 혜중원 원장으로 일했던 목사.
의료 선교사 하디가 함께 일한 1898년부터 구체화 됨.
*1901년에는 로스가 합류. 후에는 로스가 운영-> ‘원산 구세 병원’
->그 후 데모리가 일제 강점 말기 원장으로 일하다가 강제 추방
-> 그곳에서 오랫동안 봉사해온 한국 의사 전영을이 광복 때까지 원장으로 병원운영
2)그리어슨
*1900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원산으로 파견.
*1901년 성진으로 옮겨 병원 설립. 이 때 맥밀란과 함께 일함.
둘이 함께 함경도 회령에서도 사역
3)*그리어슨, 머레이, 블랙 등이 함께 1908년 6월 함흥에 ‘제혜 병원’을 설립.
*용정, 성진 등에서도 사역. 특히 용정의 ‘제창 병원’은 마틴이 병원장으로 있으면서
독립 운동가 및 기독교 지도자들의 활동을 도움.
3.황해도 지역-북 감리교
1)노튼
*자기 어머니를 기념하는 병원을 해주에 1913년 설립=‘루이자 홈스 노튼 병원’
-> 후에 해주 구세 병원‘ 셔우드 홀이 1928년 부설 결핵요양원 세움
2)파이팅
*재령 지방에 미 북 장로교 소속 여의사 파이팅에 의해 의료 선교 사역 펼쳐짐.
4.강원도 지역-미 북 감리교
1)모리스
*원주에서 1900년부터 의료 선교 시작
->후일 맥라니스가 활동-1912년 스웨덴 기념 병원 ‘서미감 병원’ 설립
->원주 기독 병원, 원주 의대 병원 모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도 연합으로 원주 기독 병원에서 사역
2)메이어스
*기타 강원도 지역의료선교는 미 남 감리교의 메이어스가 1910년 파송되어 시작
->병으로 귀국하고 1911년 보맨이 그 사역을 게승
-> 그 후 로스에 의해 더욱 활성
->1915년에는 캐나다 장로교와 합동으로 의료 선교와 복음 전도에 큰 성과 거둠
1924년 금강산 부근 고저에 진료소 설치하고 한국 의사 박태형으로 관리케 함
5.경기도 지역-성공회, 남북 감리교
1)*인천에서-외과의사 와일즈와 코르프 주교에 의해 시작.
*1890년 영국 성공회 소속 랜디스가 가정집에서 의료 선교 활동
->다음해 ‘성 누가 병원’으로 이어짐 ->1898년 4월 과로한 몸과 장티프스 생겨
순직 -> 그 후 바로우에 운영되다 폐쇄
2)여주-영국 성공회 소속 로우스가 병원 설립
3)미 북 감리교에서 인천, 수원, 공주 등지에 진료소 개설->
인천 진료소는 ‘인천 기독병원’ 수원 진료소는 ‘수원 기독 병원’ 으로 발전
4)개성-미 남 감리교에서 하디와 로스를 1898년에 파견하여 시작하였으나 잘 되지
않아 로스는 원산으로 돌아가고 하디는 1899년 ‘남성 병원’ 설립
-> 레이드의 적극적 모금운동으로 1907년 새롭게 ‘남성 병원’이 현대식으로 건립
기부자의 동생인 아이비가 초대 원장으로 일함
*간호사 양성소를 세워 남자 간호사 양성. 해방 전까지 활발히 사역
6.충청도 지역
1)청주-1907년 대구에서 일하던 미 북 장로교 소속 눌 부부에 의해 시작.
->퍼피안이 계승. 1910년 4월 ‘던칸 기념 병원’을 세움
2)진천-영국 성공회 소속 로우스가 ‘애인 병원’ 세움
3)영동-미국 구세군 담당 사관 전용섭의 노력으로 1942년 ‘영동 구세 병원’개원
->고병간이 원장으로 임의선, 설경동 등 한국 의사 참여
4)홍성- 미 구세군 활동-1922년 ‘구세 약방’ 개설하고 사역
5)공주- 미 북 감리교 버스커스가 파견 되어 일함.
->1912년 세브란스 연합 의학 전문학교로 전근
7.전라도 지역-미 남 장로교
1)전주 예수 병원
*1892년 목사 의료 선교사 데이트. 해리슨 도움으로 1897년 내한한 여의사 잉골드는
전주에 1989년 11월 3일 진료소 개설-> 전주 예수 병원으로 발전
*1902년 해리슨이 외래 진료소 건립. 1912년 다니엘 병원장에 의해 20병상 병원 건립
*1935년 병원장 보그스는 화재로 타버린 병원을 35병상으로 재 건축.
*병원 폐쇄를 거쳐 1947년 재 개원-크래인이 11대 원장으로 취임
*1950년 간호사 프리챠드에 의해 간호 학교 창설
*1969년 실이 12대 병원장으로 취임-1987년 까지 근무
-> 그 후 정원태가 한국인으로 첫 병원장 됨
2)군산-1987년 다니엘이 처음으로 의료 선교 시작->4년 후 미국으로 돌아감
->알렉산더가 일했으나 6개월 만에 귀국
*다니엘은 1916년 4월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수로 재 파송 됨
3)1904년 입국한 오웬, 포사이드, 놀랜 등이 전라도 의료 사역 담당
*포사이드가 광주 부근에서 한 여자 나환자를 데려와 진료를 시작
윌슨이 ‘광주 나병원’을 개설->오늘날 ‘여수 애양원‘으로 발전
4)오웬은 1904년 입국. 다음해 공주에 병원 설립->‘광주 기독 병원’으로 발전
5)포사이드가 1899년 목포에 병원 설립. 10년 간 운영-말라리아 때문에 본국으로
가고 1911년 오긍선이 책임을 맡음
8.대구, 경북지역-미 북 장로교
1)1897년 존슨이 대구에 진료소 개설. 1906년 병원 신축
-> 1910년 플래쳐가 그 일을 맡았고 눌, 스미스, 호이트 등이 그 뒤 계속 사역
카메룬 등 많은 간호사들 이 일함. ->협력하여 ‘대구 동산 병원’을 이룸
*이 병원의 지방 병원으로 ‘경주 기독 병원’, ‘포항 선린 병원’, ‘안동 성소 병원’ 등
설립
*1913년 플래쳐에 의해 나 병원이 설립.->1963년 현대식으로 ‘애락원’으로 발전
2)안동-1909년 플래쳐가 진료소 개설->스미스가 뒤를 이어 사역
->1914년 ‘코넬리우스 기념 병원’이 설립-해방 때까지 운영
9.부산, 경남지역-미 북 장로교, 호주 장로교
1)부산에서 의료 선교 사역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YMCA 파송 선교사 하디이다
*1865년 출생 1890년 토론토 의대 졸업. 그 해 내한하여 부산에서 2년간 사역
-이때 캐나다 독립 선교사인 게일과 함께 사역
*1891년 서울 제중원에서 헤론이 죽은 후 잠시 원장으로 있었음.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서 1892년 11월 까지 일함.
*원산으로 가서 독립 선교사 펜윅의 집 한 켠을 빌려 간이 진료소 개설
*1898년 YMCA계약 기간 끝남으로 미 감리교로 이적하여 1899년 개성으로 파견
-> ‘남성병원’을 설립
*1903년 8월 중국에서 활동하던 화이트 선교사 초청-원산 부흥운동을 시작
-> 그 후 1907년 평양 대부흥회 강사로 연합 사경회 개최하여 한국 교회
대부흥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부산에 두 번째로 온 의료 선교사는 1891년 12월에 미 북 장로교에서 파송한
브라운- *자기 집에서 시약소 개설. 결핵에 감염되어 1893년 귀국.
1986년 1월 6일 뉴욕에서 병사
2)1893년 11월 미 북 장로교는 어빈을 파송-1911년 3월 까지 부산에서 일한 후
선교사직을 사임
*부산에 온지 얼마 안되어 ‘메리 콜린스 휘팅 시약소’가 건립
1903년 9월 뉴저지 제일 장로교회 목사인 정킨을 기념하기 위한‘정킨 기념 병원’
이 건립
*1904년 당시 부산에는 17명의 의사(외국 선교사, 일본인, 한국인)와 2명의 치과
의사, 2명의 약사, 11명의 산파원이 있었다.
*어빈이 사임한 후 밀스, 비거 등이 이 병원에서 일했다.
3)1913년 선교지 재조정으로 부산, 경남지역은 호주 장로교가 담당
파송 선교사는 커를인데 1902년 파송. 부산에서 사역.
일신여학교 작은 교실 하나 빌려 진료 시작
-> 그러나 부산에는 이미 미 북 장로교 선교사들과 일본인 의료진이 있기에 호주
장로교의 허락을 받아 진주로 감
*1906년 ‘베돈 병원’을 호주 여전도회의 후원으로 설립-1915년 까지 원장으로 일함
-> 이 병원이 설립되자 1910년 간호사 클라크, 데이비스가 내한.
1911년에는 신경정신과 의사 맥크라렌 이 파송됨. 그는 세브란스 교수직 겸함.
->1923년까지 원장으로 있었음.
->1918년 여의사 데이비스가 내한. 이미 일하고 있는 언니와 함께 근 30년 봉사.
1938년~1941년까지 원장으로 일함. 1923~1938년까지는 테일러가 원장직 맡음
4)통영(충무)-1913년 3월 테일러가 건강 관리소 설치.
보트타고 섬 마을로도 진료 다님.
1928년부터 츠르딩거 목사가 간호사인 부인과 함께 시약소 운영. 소아 진료소 운영.
1937년 레인 목사가 간호사인 부인과 함께 이 지역 의료 선교 담당.
5) 1904년 어빈, 빈튼, 스미스 선교사 등이 나환자를 위한 위원회 위원으로 지명.
나 환자를 위한 특수 사역이 이 지역에서 시작. 1909년 나환자 수용소가 영국의
나병 선교회 후원으로 건립-> 현재 ‘국립 상애원’인 ‘부산 나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6) 미 침례교가 6.25후 ‘침례 병원’을 설립 오늘에 이름
의료 선교사들의 활동
1) 의료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봉사로서의 의료사역은 고유 업무인 환자 진료 사역과 고정 또는 순회 진료소 사역, 병원의 설립과 운영 외에도, 지역사회 보건 위생 증진사업, 의료 사회사업 및 결핵이나 나병 같은 특수 만성병 및 전염병 사역 등을 포함하였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후학들을 위한 의학교육과 의학교과서 편찬, 그리고 의사, 간호사 및 약사 등 의료 인력의 양성을 위한 학교설립 또한 중요한 사역이었다.
동시에 성경 공부 반 운영, 기도회 및 예배 주관, 순회 전도 여행 그리고 각종 문서선교 등의 선교사역에도 동일하게 힘을 다하였다.
많은 의료인들 중에 특히 스크랜튼, 하디, 화이팅(에비슨의 부인), 맥길, 오웬, 그리얼슨 그리고 빈튼 같은 사람은 자신의 의료활 동과 맞먹는 복음전도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오웬과 그리얼슨은 장로교 목사로, 스크랜튼은 감리교 목사로 안수 받고 일했다.
모든 선교사들의 활동이 다 어렵고 힘들겠지만 의료선교사의 활동은 더욱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사역이었으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묵묵히 전력을 다해 해 나갔다.
2) 의료선교사들의 고난
많은 의료선교사들이 누적된 과로와 열악한 환경에서 오는 질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쓰러져 갔다.
헤론은 제중원에서 일하다 1890년에 이질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히는 첫 (의료)선교사가 됐고, 랜디스는 인천에서 일하다 1898년에 장티프스로, 여선교사 해리스는 평양부인 병원에서 일하다 1901년에 장티프스로 세상을 떠났다.
또 1895년에는 평양에서 홀이, 1909년에는 광주에서 사역하던 오웬이, 1912년에서는 평양에서 일하던 모펫이 한국에서 순직하였다.
또한 샤록, 소오돈(JE Sawdon), 브라운, 포사이드 등은 한국에서 일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뒤 세상을 떠났다.
특히 여성 선교사들은 더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당시 한국사회의 남존여비 풍습이 여자의 의료 활동을 경시 여겼으며, 심지어는 선교부내에서도 차별을 받았는데, 선교회의 내부문제에 대한 투표권조차 갖지 못하였다. 또한 의료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큰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교사들에게 발병한 질환(1920년 조사통계)
열병(135), 말라리아(135), 급성설사(40), Chrn(16), 이질(54), 장훕스붠증(15), 장티프스(10), 디프테리아(10),폐결핵(10), 충수염(10)심장병(15), 신경과민(40)
/ 총 276명의 선교사
**선교사 자녀 사망현황
천분율 1910년 미국 유아사망율
1세미만 230 11 47.8 114.6
1 - 2 208 5 24.0 27.6
2 - 3 191 4 20.9 12.3
3 - 4 173 4 23.2 12.3
4 - 5 150 2 13.3 7.8
5 - 6 136 3 22.0 5.6
6 - 11 119 3 25.2 4.6
11 이상 47 2 42.5 14.7
내한 의료선교사 현황(1884 - 1994)
1) 내한 선교사 분포
1884년 알렌의 내한 이후 100년 동안 이 땅을 찾은 선교사 및 가족들은 전부 2259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활동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활동이 있는 선교사는 1058명에 이른다.
이중 의료선교사는 263명, 목사선교사는 302명, 교육선교사는 305명, 기타 일반선교사가 224명으로서 중복한 사람까지의 총수는 1091명이었다.
2) 의료선교사의 직능 및 성별 분포
의사선교사가 143명(의사 겸 목사선교사 9명 포함: 54.3%), 간호사 선교사가 76명(28.9%), 치과의사선교사 7명(2.7%), 기타 37명이었다.
의사선교사 143명 중 남녀 비는 110명 대 33명이었으며, 여의사의 대부분은 미혼인 점을 생각하면 상당한 수의 여의사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당수의 여의사들이 한국에서 목사선교사와 결혼하였다. 간호사 선교사는 1명만 남성이었고 75명이 여성이었다. 의료선교사 전체의 성비로 보면 128명 대 135명으로 여성이 좀 더 많았다. 따라서 젊은 여성 의료선교사들에 의하여 이 땅의 여성의 교육 및 건강증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3) 내한 의료선교사의 국적 및 소속 단체 현황
미국이 220명(83.7%)으로서 제일 많고, 영국이 14명(5.3%), 캐나다가 14명(5.3%), 호주가 13명(4.9%)이고 스위스 및 독일이 각각 1명이었다.
소속 단체별 현황을 보면 미 북장로교가 75명(28.5%), 미 북감리교 66명(25.1%), 미 남장로교 36명(13.6%), 미 남감리교 27명(10.3%), 호주 장로교가 14명(5.3%), 구세군 및 남 침례교가 각 8명(3.0%), 캐나다 연합교회 5명, 영국 성공회 7명, 해외선교회 및 연합장로교가 각 2명, 극동사도선교회, 동양선교회, 정통장로회, 안식교가 각 1명이었다.
4) 활동지역별 분포
서울 경기 지역은 대개 중복되지만 138명(32.4%)이 활동했고, 전라도가 69명(16.2%)이었고, 경상도가 66명(15.5%), 평안도 51명(12.0%), 충청도 및 강원도가 각각 23명(5.4%), 함경도가 22명, 황해도 21명, 만주, 간도가 6명 울릉도 1명, 기타 6명이었다.
5)활동 기간별 현황
2년에서 5년 사이가 19.8%로서 가장 많았고, 6년에서 10년 사이가 16.3%, 11년에서 15년 사이가 13.3%, 21년에서 25년 사이가 12.6%, 16년에서 20년 사이가 9.1% 등 으로서 15년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상이 49.1%이었다. 50년 이상 사역한 사람도 키손(Kison : 1914-1989), 벙커(AE Bunker, 엘러즈 : 1886-1937) 및 스코필드(FW Scofield : 1916-1970, 수의사) 등 3명이나 된다.
한국 의료선교사의 파송 현황
1)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 현황
한국 감리교회 세계선교의 시작은 1902년 인천 내리교회에서 하와이 농업이주민을 위해 홍승하 선교사를 파송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장로교의 선교의 역사는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조직되니 이를 '독노회'라 하고,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하였다.
191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되고 이를 기념으로 유교의 창시자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에 선교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 김영훈, 박태호, 사병순목사, 1916년 방효원목사, 1917년 홍승한목사, 1918년 박상순목사, 1923년 이대영목사, 1927년 방지일목사, 1931년 김순효 전도사를 각각 파송하였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 조약이후 일제하의 무단정치와 착취 그리고 교회근절을 위한 무서운 박해로 기독교 지도자들의 감금과 선교사 추방 등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치욕적인 36년간의 일제 탄압이 물러가자 또다시 선교의 범위가 아시아를 향하여 웅비의 날개를 펴고 1956년 최찬영, 김순일 목사를 태국에 파송했고 1957년 계화삼 목사를 자유중국 주재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59년 9월 장로교는 통합과 합동으로 나누어지면서 각각 선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합동은 1969년 양승만 목사를 남미 브라질 선교사로, 차남진목사를 미국 주재 선교사로 파송하였으며, 1970년 인도네시아에 서만수 목사를 시작으로 아시아 15개국 국가에 108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어 지도자와 교계 지도자를 양성하고, 또 독노회를 조직하여 현지교회 성장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1980년 1월 김충일 목사를 아르헨티나에 김재창목사를 파라과이로 1976년 이연호목사(순직)와 그의 아내 김신숙 전도사가 애굽의 선교사로 파송 받아 사역을 시작한 후 1979년 이준교목사가 합하여 애굽에서 선교활동을 이어갔으며 1976년 10월에 강승삼목사(현:대한 예수교장로회 합동 선교국 국장)가 나이지리아 주재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2) 의료선교사 파송 현황
가) 1979년 2월 18일 예수병원에서 이용웅(내과의)부부와 박혜인 간호사를 장로교(통합) 선교사로 방글라데시 다카 난민촌으로 파송, 1986년까지 사역하였다.
나) 1982년 강원희선교사(외과의)를 장로교(통합)선교사로 네팔에 파송(월드컨선 협력)하였고, 1986년 이용웅선교사가 귀국하면서 방글라데시에 잠시 있다가 스리랑카에서 다시 수년간 사역하였고,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네팔에서 다시 사역하였고 귀국하여 안동 성소병원장으로 잠시 일하였고 2004년에 이디오피아로 다시 파송되어 일하고 있다.
다) 1984년에 김정윤(간호사)선교사를 월드컨선 선교사로 우간다에 파송하여 클루바 병원 및 간호학교 사역을 담당케 하였고, 현재는 골리 보건소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라) 1985년에 예수병원 간호사 출신 이춘심선교사가 네팔에 파송되었고 그 후 네팔 청년과 결혼하였고 현재 남편(신학박사)과 함께 교회개척, 신학교 사역, 고아원 및 교육 사역 등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으며, 여러 단기 팀들과 연계하여 의료사역도 펼치고 있다.
마) 1987년에 장성희(간호사)선교사가 방글라데시로, 조재선(의사)선교사를 CCC 아가페에서 파키스탄으로 파송하였다.
바) 최초의 약사선교사는 1983년에 소말리아로 파송된 조성덕선교사였다
사) 1989년 10월8-9일 광림교회에서 제 1차 의료선교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지금까지 개인이나 개 교회 또는 개개선교단체별로 진행되고 파송되던 일들이 좀더 체계적이고 서로 연결되게 되었고 많은 선교지망자들을 발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 1990년 주선미, 박정남(간호사)선교사를 장미회와 협력하여 네팔에 파송하였고, 1991년에는 김명호(의사)선교사를 비롯한 23명의 연세대 소속 의사들이 수개월씩의 단기로 파송되었는데 이때 비행기사고로 홍사옥선생이 순교하는 사건이 1992년에 발생하였다.
자) 제1차 의료선교대회이후 선교지망자들을 훈련해야 할 필요에 의해 의료선교협회 산하에 ‘의료선교교육훈련원’이 개설되었는데 서울(1991년), 부산(1992년), 광주(1997년), 대전(1998년), 경북(2004년), 전주예수병원(2004년) 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 1990년대에 이르러 국제 협력단 소속으로 의료인들인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차) 1995년부터는 KOICA 파견 공중 보건의들의 사역에 기독인들이 참여하여 파송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의료선교 사역형태
가) 선교병원 운영
나) 간호학교 및 진료소 운영
다) 이동진료
라) 보건사업
마) 현지 의료기관 참여사역
바) 현지 의과대학 참여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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