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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앞서-
먼저 오늘은 "오야마 마스타츠"(大山倍達) 최영의 총재의 극진회가 만들어지기 까지
그가 접했던 무술과 그의 가라데가 체계화 되기 전까지의 과정과 탄생배경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제가 평소 최영의 선생님의 업적과 그의 무도관에 대해 논하지 않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때문이기도 한데 평소 이와 관련하여 문의 메일이 잦아들기도 해서
깊게파고 들지 않는 방향으로 최대한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적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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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가라데 자체의 계보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몇가지만 짚고 넘어가볼까 합니다.
*가라데 북파 기원설?*
가라데의 기원이 중국 남파권법이 류쿠왕국(오끼나와)으로 전해져 내려와 집대성 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 입니다.
하지만 알려진 것 과는 다르게 가라데라고 하여 그 모두가 남파권법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본래 가라데란 이름으로 집대성 되기 전까지의 오끼나와데라는 것은
크게 나하데(수),수리데(수),박수로 나뉘어 져 있는데
이중 수리수(데)의 시초는 바로 가라데 명인으로 잘 알려진 "마츠무라 조공"선생에 의해서입니다.이 마츠무라 명인은 중국북파권법가에게 권법을 익히게 되었는데 이때 배웠던
중국의 권법과 오끼나와 고유의 토착무술이 병합되어 수리수(데의) 근원이 되었던 거죠.
이 시점을 계기로 문파라는 개념이 잡히기 시작해 그는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게 되는데
그의 제자중 한 사람인 "이토스 야스츠네"는 마츠무라 명인의 수리수를 좀 더 집대성 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내게 되는데 그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인 "기친 후나고시"가
송도관(쇼토칸)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고
그의 가라데는 근대가라데의 체계와 그 기초를 잡은 몇안되는 유파로 평가받게되어
당시 대일본체육협회장이었던 "가노 지고로" 의 도움을 받아 일본황실에 까지 전해져
유도,검도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가라데로써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 입니다.
<근대가라데의 아버지 "기친 후나고시">
이 북파의 영향을 받은 가라데 유파들은 송도관(쇼토칸)외에도
마츠무라 명인의 유명한 제자였던 쿠와에 요시마사,이토스,야사토 야스츠네 형제 등에 의해 집대성 되어 또 다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수갈래로 나뉘게 되어
실동류,현우류,고바야시류등의 수많은 가라데 유파가 만들어 졌고 이중 이토스 계열의
기친 후나고시의 송도관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고 볼 수 있겠지요.
결론적으로 극진회를 제외한 나머지 유파중 가장 널리알려진 송도관(쇼토칸)은
그 계보상으로 따지자면 중국 북파권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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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중국남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정작 뭐냐고들 하실텐데
이 나하데(수),수리데(수),박수로 불리던 오끼나와데 3대 오끼나와데 중에
남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나하데(수)입니다.
나하데(수)는 중국무술가에 의해 권법을 배운 "히가시온나 간료"에 의해 만들어져
그의 관문제자 "미야기 초준"이 강유류로 집대성 하였는데 또 다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오끼나와 강유류가 나뉘어졌고
미야기 초준의 제자 중 한사람인 "야마구치 고겐"은 미야기의 강유류를 현대적으로 체계화
시켜 전일본 가라데 강유회의 회장으로 서게 됩니다.
<강유류의 시초 "미야기 초준"> <전일본강유회 "고겐 야마구치">
"야마구치 고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총재와는 같은 조선출신의 강유류 선배
조영주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며 최영의 총재의 마지막 스승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최영의 총재가 강유류를 접한 것도 야마구치의 관문 수제자인 조영주 때문이며
본 까폐회원이신 paleway님이 보내주신 메일의 의하면
US오야마 가라데의 조일삼(오야마 시게루)조태언(오야마 야스히코)사범들이 자신의 외삼촌
이며 이분들이 바로 조영주 선생과는 친척 되는 관계인데
이 조일삼 조태언 형제의 어머니는 바로 kbs수요기획에서 최영의 총재의 절친한 누나로
알려진 오야마씨 랍니다. 이분과의 인연으로 최총재는 조일삼 조태언 형제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고 이 기묘한 인연으로 인해 조영주 선생과도 만남이 이루어 졌다고
하는데요..
(여기까진 paleway님의 말씀에 근거한 내용이므로 100%확신하지 못함을 알려드립니다.)
최영의 총재에게 조영주 선생은 힘든 객지생활에서 터놓고 지낼수 있는 몇안되는 사람이었으며 강유류를 접하며 자신의 무도철학을 심어준 스승과는 다름 없는
정신적 지주와도 같었다고 합니다.
<강유류의 선배 "조영주">
사실 최총재는 방학기 화백의 원작 만화와 소설인 "바람의 파이터",고우영 화백의 "대야망"
카지와라 잇키의 "공수바보일대"등의 의해 유명해진 건 분명 부인 할수 없겠지만
여기서 다뤘던 야성적이고 타고난 재능을 자랑하는 그런 모습과는 다르게
실제론 모르는 부분에 대해선 겸허히 받아들이고 노력하는 노력파 중에 한 사람이셨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최총재는
야마나시 소년 항공학교에 다닐 당시 송도관 가라데와 고도관(강도관)유도를 익히면서
각각 초단을 획득했고 후에 기친 후나고시의 아들 "요시타카 후나고시"의 사설 도장에서
따로 수련을 하기도 했는데 이후에 최총재는 타격기인 가라데의 부족함을 매꾸고자
유도장에 나가 단기간에 4단을 따내기도 했고 대동류합기유술에도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는
이런 저런 생활을 하던 중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학도병으로 차출되기도 했는데요..
최총재는 학도병 차출 당시 대일본무덕회에서 내린 송도관 가라데4단을 받고
특출한 실력으로 학도병들의 사범을(지금으로 치면 조교)하기도 했는데
게릴라정탐부대 사범과 가미가재 특공대에 지원한 것 처럼 묘사한 만화와 실제사실과는
많이 다르죠.
<소년 시절과 야마나시 항공학교 재학시절>
최총재는 전쟁이 끝나고 1946년 와세다 대학 체육학부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요..
(전쟁 이전엔 척식대학에서 학업을 한걸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만...잡지에서 최총재의
와세대 대학 재적증명서를 직접 본 저는 자세한 진상은 알수없지만 KBS수요기획에서
최선생의 척식대학 후배로 알려진 분이 나오기도 한 걸 보면 척식대학을 분명
다니긴 하셨나 봅니다.)
이 와세다 대학과의 인연은 후에 동문출신인 요시칸 아이키도의 "시오다 고조"와의
만남으로 이루어 지게 되는데 최총재는 시오다선생의 도장에 자주 들르기도 했으며
이 인연으로 인해 아이키도 창시자인 "우헤시바 모리헤이"에게 직접 찾아가
그의 시연과 수업을 견학하기도 했답니다.
<"우헤시바 모리헤이"> <요시칸 아이키도 "시오다 고조">
이어서 최영의 총재는 대동류합기유술의 시초인 다케다집안의 관문 수제자인
"요시다 키타로" 선생에게 맨손 유술과 지팡이 우산등을 겸한 호신술을 사사받었는데
최총재가 저술한 책중 셀프디펜스(호신술)에 관한 부분을 보면 극진 호신술의
상당수가 이 대동류의 흔적이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대동류 "요시다 키타로">
아무튼 최총재는
1946년에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를 읽고 입산수행을 결심하게 되는데
실제 최총재는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2번의 입산수행을 했는데 그 첫번째로
미노부의 한 야산에다 작은 판자집을 짖고 각종 웨이트기구를 놔두고
반년이 넘는 수행을 했습니다.
<身延山(미노부)산 입산 당시와 단련된 신체와 정권>
<강유류7단이라 나와있는 재적부>
그렇게 수행을 마치고 내려온 최총재는
1947년 교토 가루야마 체육관에서 열렸던 전후최초의 전일본 무도회 대회(가라데부분)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게 되었고 출전 당시엔 조영주 선생과 야마구치 선생으로 부터 강유류를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최총재는 전일본 대회 우승후에도 자신의 무도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주위에서 가장 가까이 지켜보던 선배 조영주와 야마구치 선생으로 부터 또 다시 입산수행 할 것을 권유 받으며 기요즈미산에서 장장18개월이라는 기나긴 수행을 시작 하게 되는데요...
<"최영의"(중간)와 "고겐 야마구치"(오른쪽)> <"야마구치"선생과의 쿠미테(대련)>
이 엄청난 입산수행 속에서 산에서 뱀잡아 먹고 개구리 잡아먹으며 자급자족한 것은
아니었고 조영주선생을 비롯한 몇몇 친구에게만 먹을것과 입을 것 읽을 책따위를
지원받었으나 후에는 진정한 수행을 위해 친구에게 약간의 쌀과 된장같은 기본적인 반찬거리를빼곤 철저하게 문명세계와 단절하여 외롭고 고독한 기나긴 수행을 하기 됩니다.
그렇게 최총재는 자기만의 독특한 가라데를 확립하기에 이르러
입산수도를 끝내고 산에서 내려와 타테야마의 한 작은 해변가에 조금한 판자집을 짖고 살며
애들을 가르치며 한나절 이상을 소를 죽이는 연구에 몰두하며 자신의 가라데의 강함을
알리는데 애썼고 일본에 있는 각계의 무도도장을 찾아가 대결을 신청하는 등
진정한 무도수행의 탐구와 실전을 경험 하는데 힘쓰게 됩니다.
<소를 통한 가라데 위력 시범>
그렇게 최총재는 일본내에서 가라데계의 이단아로 평가절하를 받는 와중에도
재일동포출신의 한 흥행사의 눈에 띄어 일본유도국가대표 출신의 "엔도 고키치"와 함께
미국에서 프로레슬링 무대에 서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각지의 무술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총재의 행적에 관해 진실유무가 맞물려 논란의 여지가 있을 듯
하여 적지않겠습니다.하지만 분명한건 여지껏 국내에서는 공개조차 되지 않았던
대부분의 자료가 동경 대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된 수많은 증거 자료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당시의 기사들> <하와이 출신의 가라데 사범"리차드 김"과 함께(안경)>
<세계적인 力(역)사 스타인 보우와 최영의와 대전했던 레슬러들>
<에드 설리번쇼에 출연> <트로피>
<유도 명인 "기무라 마사히코"와 함께(왼쪽)>
이 몇년간의 피와 땀이 결실을 맺어 우여곡절 끝에 동경 메지로가의 한 귀퉁이에 세워진 곳이
바로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몇일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는 전설의 대산도장입니다.
최총재는 대산도장을 개관한 이래에도 수행을 멈추지 않고 유럽과 남미등의 순방길에
올라 자신의 가라데를 알리며 세계각지의 무술과 실전을 경험했고
<대산도장 당시 제자들과 함께>
또한 대산도장을 운영하던 당시엔 최영의총재와 친분이 있던
태기권의 창시자 "사와이 켄이치"선생이 도장에 자주 방문하여
"노초웅"(로야마 하츠오),"히로시게 쯔요시",네덜란드에서 온 유학생 "얀 칼렌파하"등이 지도를
받으며 극진가라데의 기술이 한층 더 진보하게 됩니다.
<태기권 "사와이 켄이치"> <극진출신으로 태기권 관장이 된 "얀 칼렌파하">
이렇게 해외 각지를 돌며 고생했던 피와 땀들이 결국 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아
1964년 동경 이케부쿠로 소재 "국제가라데 연맹 극진회관"이 정식으로 발족되어
세계 최대의 가라데 단체로써 자리매김 하게 된 것입니다.
<1923-1994> 大山倍達의 묘지
글쓴이: 이종격투기 까폐 " 오로치돗포"
날 짜 :2004년 11월3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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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시시작합니다요..일단 터치님의 와일드오키드가 강렬한 인상이었다부터...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두 노인네를 더이상 받아줄수없다는 암묵의 시위..왜 아이콘은 진지한 얼굴이 없는거지..코트형님 어떻게 해요? 힘을 합쳐야혀...두 노인네 크로스!!
푸헐헐헐
밥은 먹어야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죄송.... 허락없이 가져가서.... 일단 지웠구요... 허락받고 가져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