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의 스승 고 송덕기 옹 (1893~1987)
자료 출처: http://kuee.korea.ac.kr/~kjh1905m/taek-kyun/songdukki.html (2002년1월1일 현재 접속불가)
고 송덕기 스승님에 대해서 간단히 말해보고자 한다.
스승님은 1893년 현재의 사직공원 옆 필운동에서 태어나셨다. 피운동 근처ㅡ 누상동, 누하동, 사직골 등은 서울에서 마지막까지 택견이 성행했던 곳으로 스승님 또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택견을 익히셨다. 12세 때부터 당대의 이름난 임호 선생님으로부터 비슷한 또래의 동네 소년 10여명과 함께 본격적인 택견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스승님은 임호 선생님으로부터 사사받은 후 부터는 부쩍 실력이 늘어 16세쯤에는 마을의 택견꾼들과 함께 사직골, 유각골, 옥동, 애오개 드의 택견꾼들과 겨루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셨다. 스승님은 체격이 작았지만 동작이 날쌔고 정확하셨고 특히 솟구치며 쓰는 발길질이 뛰어나 인기가 높았다. 17세 때 결혼을 하셨고, 곧 군에 입대하셨으나 여전히 택견을 즐기셨고, 그 때 막 들어온 축구를 익히기도 하셨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일제의 탄압이 강해지면서 택견 수련이나 시합이 철저히 금지를 당했고, 집안에서도 만류하는 바람에 22세 때 부터는 황학정 에서 국궁을 배우기 시작하셨다. 스승님은 명궁으로 소문났었고, 돌아가시기 몇 해전까지도 활을 잡아서 국내에서 활을 가장 오래 쏘신분으로 "한국 인물 도감" 에 소개 되시기도 하였다.
또한 스승님은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군대에서는 사병들에게 뜀틀과 철봉 등의 근대식 체조를 가르치시기도 하셨고 "불교축구 선수단"에 선수로 발탁되어 월급 80원(당시 쌀 한가마니에 7원 70전이었다 한다.)을 받고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23세 때 군을 제대하고 26세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 평양 축구단과의 경기에 참가한 경력도 보유하고 있다. 그 후에는 금을 캐보려고 몇 해 동안 돌아다니기도 하셨지만 별다른 직업없이 운동으로만 한 평생을 즐기신 한량이셨으며, 1.4후퇴 때 경남 밀양으로 떠난 것 이외에는 평생을 사직동에서 사셨다.
1958년 경에는 경무대 경찰서의 이승구 경관이 스승님이 택견의 달인 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이승만 대통령께 시범을 보여 달라는 부탁을 했다. 택견은 어떤 일정한 형이 있는 것이 아닌 만큼 혼자 시범을 보이기 마땅치 않아 옛날에 스승님과 같이 몇 달 동안 택견을 배운적이 있는 김성한이라는 분을 한 달 정도 가르치며 준비를 하셨다. 당초 시연을 경무대 뜰에서 보이기로 하였으나 전날 눈이 많이 와서 옛날 개한문 앞 "유도회관" 자리에서 택견 시법을 보이셨다.
그러나 스승님은 그 때에는 택견에 대한 깊은 애착과 택견꾼으로서의 자부심은 있었으나 당신이 실존하는 민족무예의 마지막 기능보유자라는 사명감까지는 없으셔서 택견의 보급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실 생각은 없으셨다. 더욱이 당시 택견을 지켜보았던 많은 이 땅의 지식인들도 일본 아류의 무도에 눈이 멀어 춤사위 같은 택견의 굼실거림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못했던 것 같다.
1960년 이 후 태권도계의 사람들이 찾아와 태권도와 택견의 접목을 시도하는가 하면, 가끔씩 어떤 단체나 언론등에서 스승님을 무예의 고수 내지는 달인으로 추켜 세워주며 시상하기도 하였고, 특히 1981년에는 "제 1회 대한민국 전통무예 예술제" 에서 무도대상을 타기도 하셨지만 슬하에 자녀분이 없으신 스승님의 생활은 연세가 드실수록 어려워지기만 하였다.
1980년 12월 25일에는 서로 의지하며 노년기를 보내시던 사모님마저 세상을 떠나셔서 더욱 외롭고 쓸쓸한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운동뿐만 아니라 손재주가 좋으신 스승님 께서는 한 때 연을 만들어 1개에 500원씩 수출업자에게 넘기기도 하시는 등 이런저런 일들을 해 보셨으나 특별히 꾸준한 직업 없이 활과 택견으로 평생을 보내신 이 시대 마지막 한량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