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홍엽…그림 같은 남도의 가을, '강秋!'
애기단풍 추색(秋色) 입은 백암산…화순 적벽에선 속세를 내려놓고
전국이 알록달록 오색 가을빛 수채화로 채색됐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계절. 가을이 사락사락 내려앉은 전남
장성과 화순을 찾았다. 가을 남도의 색(色)과 향(香), 미(味)를 만끽할 수 있는 장성과 화순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을빛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청명한 하늘은 먼 북녘에서 남으로 성큼성큼 남하하는 주홍빛 행진을 감춤
없이 드러냈다. 이번 주말을 전후로 해 온 산은 매서운 속도로 붉은빛으로 갈아입을 태세다. 다행히 아직 단풍
절정은 아니다. 만추절경(晩秋絶景)은 눈 깜짝할 새 기우는 법. 빡빡하게 살아온 일상을 저만치 내려놓고 곱디
고운 단풍이 소매를 잡아끄는 곳. 한상 가득 차려낸 맛깔스런 음식이 역마살을 자극하는 그곳으로 떠나보자.
△ 쌍계루 연못에 내려앉은 오색 황홀경 그림 같다. 전남 장성 백암산(白巖山)은 예부터 빼어난 산세에 감탄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찬사를 보낸 산이다. 산세와 풍광이 수려해 사찰이 많고 골마다 천년 역사가 흐른다. 어디서나 셔터를 누르면 그대로 작품이 된다.
'봄(春) 백암, 가을(秋) 내장'이란 말이 있듯 원래 백암산은 이른 봄 새싹의 신록이 유명하다. 그렇다고 가을 풍광이 뒤지는 것은 아니다. 신록이 좋으면 단풍이 좋은 법. 백암사무소~백양사에 이르는 약 1.5㎞ 남짓한 숲길을 걸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단풍철이면 이 숲길의 아름다움은 가히 비할 데가 없다. 수령 700년 된 갈참나무와 단풍나무, 벚나무가 양편 으로 늘어선 이 길은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 100선'과 '가장 걷고 싶은 길'에 이름을 올렸다. 새싹 돋는 봄엔 꽃 터널로, 여름은 안개 낀 골짜기와 원시림을 선사하고, 가을엔 곱디고운 단풍이,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엔 눈 터널로 유명하다. 장성 백암산의 단풍은 다른 산에서 보기 힘든 애기단풍이다. 단풍잎의 크기가 어린애 손바닥 크기만큼 작고 앙증맞아 붙여진 이름으로 백암산 일대서만 자생한다. 촘촘한 애기단풍의 붉은 빛깔은 잎사귀를 떨 군 채 주렁주렁 매달린 홍시감과 어우러져 만추의 색(色)을 완성 시킨다. 기상청은 북동쪽과 맞닿은 내장산, 북서쪽의 입암산과 더불어 '내장산 국립공원'이라 불리는 백암산의 단풍은 오는 7일이 절정을 이룰 것이라고 예상했다. 기상 여건에 따라 절정기가 조금 앞당겨지거나 늦춰질 수도 있기 때문에 꼭 정해진 날짜가 아니라 며칠 전후로 방문해도 산을 가득 메운 단풍에 푹 빠질 수 있다. 백암산 밑자락에는 고불총림 백양사(白羊寺)가 자리하고 있다. 천년고찰 백양사는 호남 선풍의 중심으로 장성 군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백제 무왕 33년(632년) 지어진 백양사는 1380년 역사를 지닌 가람(伽藍)으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다. 조선 선조 때 지완 스님이 영천암에서 수행할 때 하얀 양(白羊)이 산에서 내려와 설법을 듣고 천상에 들었다고 해 서 이름을 백양사로 바꿨다고 한다. 가을 정취가 잔뜩 내려앉은 경내에는 담홍색 꽃이 피는 매화 중에서 가장 뛰어나 호남 5매(湖南五梅)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고불매(古佛梅)'가 조용히 봄을 기다린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350년 동안 계속해서 꽃과 잎을 피워내는 이 생명체의 에너지가 경이롭다.
백양사 앞 쌍계루(雙溪樓)에서는 백암산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곳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는 풍경도 좋지만 연못 아래 징검다리 중간쯤에서 거꾸로 쌍계루를 올려다보는 풍광이 그림이다.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백학봉이 가파르게 솟아 있는데 한 눈에 봐도 기세가 웅장하다. 그 예사롭지 않은 자연 은 단단하고, 기품 있는 문향(文香)을 장성에 부려놓았다. 육당 최남선은 일찍이 백학봉을 "흰 맛, 날카로운 맛, 신령스런 맛이 있다"고 칭송했다. 백학봉 아래 운치 있게 자리 잡은 쌍계루, 별처럼 피어난 애기단풍, 이 모두를 잔잔히 비춰내는 쌍계루의 연못 풍경은 조선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백양사에서 길을 돌려 쌍계루에서 오른 쪽 길로 접어들면 비구니들이 거주하는 천진암이 나온다. 천진암은 암자라고는 하나 얼핏 봐도 독립된 사찰 못지않은 규모에 산뜻한 단청과 깨끗한 외관이 특징. 아직 덜 여문 탱자나무가 가을빛에 익어가지만 이곳을 찾아야 할 이유는 비자나무 숲 때문이다. 암자에서 왼편 숲길로 들면 이파리가 이색적인 비자나무 숲이 잘 조성돼 있다. 늦가을의 정취를 만취하고 싶으면 백양사 옆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백양사를 나오면 왼편으로 약사암 가는 산길이 놓여있다. 백양사~약사암~영천굴~백학봉~상왕봉~사자봉~ 가인마을에 이르는 8.5㎞ 구간을 많이 이용한다. 꼿꼿한 호남 선풍을 말해주듯 약사암을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르다. 30분 남짓한 산행에 숨이 턱에 찬다. 수고 의 대가는 감탄으로 채워진다. 약사암에서 내려다보니 새빨간 단풍 사이로 오롯한 백양사 경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래 샛길로 100M 정도 내려가면 백학봉에서 솟아난 약수로 유명한 영천굴과 석조관음보살상이 지키는 기도 법당이 있다. 청아한 목탁소리와 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는 울창한 삼림 너머로 길게 꼬리 물고 이어지면서 외 지인의 가슴을 청량하게 씻어낸다. △ 자연이 빚어낸 명경지수…'적벽'의 유혹 속으로 장성에서의 추억을 반추하고 광주를 거쳐 무등산 너머의 화순으로 향한다. 공자의 제자 복상이 스승에게 물었단다. "태평성대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지요?" 공자 왈 "화순(和順) 해야지. 온화하고 양순하게 살아야 한다." 지명처럼 화순(和順)은 순박하고 푸근함이 느껴지는 땅이다.
화순은 예부터 명승지가 많아 남주명향(南州名鄕)이자 순후지향(淳厚之鄕)으로 이름 매겨졌다. 선계(仙界)에 비유되는 적벽이 일등공신이다. 적벽은 화순 사람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절경.
중국 양자강 상류의 적벽과 비슷하다고 해 이름 붙은 화순적벽은 이서면에 있다. 화순과 곡성을 잇는 29번 도 로와 연결된다. 동복호로 흘러드는 창랑천을 따라 약 7km에 걸쳐 펼쳐진 수려한 절벽이 압권이다. 노루목적벽 과 보산적벽·창랑적벽·물염적벽 등이 있는데 이를 모두 아울러 '화순적벽'으로 부른다. 규모나 풍치 면에서 단연 최고로 치는 곳은 노루목 장항적벽. 산 병풍 아래 푸른 하늘을 담은 동복호와 깎아지 른 기암절벽이 빚어내는 비경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다.
1985년 동복댐이 만들어지면서 절반가량이 호수에 잠겼지만 웅장한 위용은 여전하다. 댐이 없던 시절에는 동 복호에 배를 띄워 적벽의 비경을 둘러보았다고 하니, 그들이 누렸을 호사가 부러울 따름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불렸던 김병연(1807~1863) 선생의 방랑벽을 멈추게 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적벽의 풍 광에 반한 그는 이곳에서 숱한 시를 남겼으며, 동복면 구암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쉬운 건 이처럼 빼어난 경관을 두고도 일반인의 출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동복호가 광주시의 상수원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까닭이다. 1년에 한 차례 수몰민들만 노루목 적벽이 바라다 보이는 망향정까지 출입할 수 있 게 제한하고 있다. 주민들은 적벽이 남도 제1경으로 손색이 없는 만큼 '조망권' 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적벽이 화순 관광의 '간판스타'지만 정작 군민과 관광객에게는 '호중지천(壺中之天·항아리 속의 별천지)'이나 다름 아닌 셈 이다. 망향정(望鄕亭)에서 그저 한나절 머무르고 싶은 아쉬운 마음 다독거려 다시 길을 잡는다. 화순에는 망향정뿐만 아니라 경치 좋은 곳마다 시인묵객들이 모여 토론하고 시 읊으며 붓질하고 잔질하던 정 자들이 널려있다.
'속세에 물들지 않는다'는 물염정(勿染亭)·망미정(望美亭)·영벽정(映碧亭)·환산정(環山亭) 등 이름난 것만 꼽 아도 여럿이다. 물염정은 배롱나무를 생긴 그대로 잘라다 쓴 우툴두툴한 기둥이 멋스럽고 보산적벽 아래 터를 잡은 망미정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판을 쓴 곳으로 유명하다.
고색창연한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세상일에 휘둘리느라 고단했던 마음도 몸도 착 가라앉는다. 깊어가는 가을 하늘보다 더 짙고 뭉클한 세월의 끈적함이 묻어난다.
숲과 절벽, 호수가 발산하는 색과 향에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풍요로워지니 이게 바로 열락(悅樂)이다. 청량 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낯선 풍경놀이에 푹 빠지다보면 일상의 고민들도 한 꺼풀씩 벗겨진다. △ 장성·화순 맛 집
전남 장성 백양사 입구에 즐비한 식당에서 반찬이 20여 가지 넘게 나오는 산채정식은 관광객들의 입맛을 돋 운다. 별궁민속식당(061-392-7401)이 유명하다.
화순에는 두부음식점이 유난히 많다. 화순군 동면 천덕리 달맞이 흑두부(061-372-8465)는 남다른 두부 요리 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곳이다. 흰 두부와의 차별화를 위해 검은콩으로 두부를 만들고 흑두부란 이름을 붙여 특허출원도 했다. 흑두부 생태전골(大 3만5000원/小 2만5000원)이 인기메뉴다. 화순과 담양의 경계지점. 소쇄원에서 차로 10분 거리에는 전통음식점과 한옥펜션을 겸하는 하여가(061-381- 9429)가 있다. 떡갈비와 오리훈제로 유명한데 9~12가지 젓갈이 나오는 젓갈정식도 인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