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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12년이 타이타닉 침몰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거대 유람선의 침몰은 더이상 없을것으로 생각했는데 작년초에 이탈리아에서 초호화유람선이 좌초뒤어 수십명이 사망했던 사건도 있었습니다
영화 타이타닉도 올해 3D로 재개봉되서 옛추억 생각하며 한번더 봤는데 당시 사고의 기록을 보면 자연환경, 사람의 부주의, 외면등 최고의 악조건이 겹쳐서 사고가 났던것이네요 그 상황을 다시금 객관적으로보면 인간들이 어떻게 상황판단을 잘못하고 어떤 조건과 상황을 주의해서 보면 생존확율이 높아지는지 알수있을듯합니다
처녀항해라 승무원들도 대부분 훈련이 안되있어서 사고 조치과정중 많은 실수를 했더군요 구명보트 자체가 승객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으며 65인승 구명보트에 20명도 안태운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도 사고 초기에는 대부분 빙산이 떠다니는 차가운 바다에 작은 구명보트를 타는것보다는 270미터짜리 대형 여객선에 가만히 있는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움직이지 않았다고합니다
흥미로운건 1등석,2등석,3등석 각 객실별 생존율이 다르다는것입니다 아무래도 1등석 승객들이 좀더 높았군요 그래도 3등석 여자와 아이들도 상당수 구조가 됬는데 이는 그당시 선장과 승무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약자들을 먼저 태우려 노력한 결과입니다
작년 이탈리아 여객선 사고때는 선장과 승무원들이 사고소식을 정확히 알리지 않고 대피를 지연시켰으며 상황이 악화되자 자신들 먼저 도망가서 큰 원망을 들었었죠
그때 승객중 일부 한국인 학생들이 있었는데 방송에선 안전하다 객실에서 가만있으라고 했지만 스마트폰 기울기 어플을 이용해 배가 계속 기우는 것을 확인하고 미리 구명조기를 챙기고 대피로를 확인하며 준비를 해서 생존한 사례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안전을 대비해도 사고와 재난은 항상 생기게 마련입니다 스스로 준비하고 예고를 체크한다면 생존할수 있을것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정확하고 아주 상세하게 그리고 편하게 알수가 있습니다 네이버의 지식인처럼 엉터리 정보도 아닌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를 위키피디아같은 사이트의 도움을 통해서 알수가 있는거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자료를 늘리는 집단지성의 힘이라 생각하는데 어젯밤에 들어가보니 상단에 재정난을 호소하며 간절히 모금을 부탁하는 글이 떠있더군요 많이 쓰지는 않지만 고마운 마음에 만원이라도 기부할까해서 클릭해 들어갔는데 이런 비자,마스터카드등 해외통용 카드만 되서 포기했던 --; 그리고 오늘 아침 다시 들어가보니 그 메세지마져 사라졌더군요 오늘밤에 메세지가 또 뜰지는 모르겠지만 관련 카드를 가지고 있는분들은 한번 살펴봐주시길바랍니다^^
타이타닉
![]() 취역일 촬영한 타이타닉호 | |
배의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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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여객선 |
명칭 | RMS 타이타닉 |
모항 | 리버풀 |
선급 | 올림픽급 |
제작 | 하란드 월프 |
국적 | 영국 |
운용 | 화이트 스타 라인 |
진수 | 1911년 5월 31일 |
취역 | 1912년 4월 10일 |
제원 | |
배수량 | 52,310 톤 |
전장 | 269.0 m |
선폭 | 28.0 m |
흘수 | 19.7 m |
추진 | 증기 터빈 |
속력 | 21 Kn |
승무원 | 3,327 |
승객 | 2,435 |
보트 | 구명정 20척(정원 1,178명) |
기타 정보 | 1912년 4월 15일 침몰 |
RMS 타이타닉(통용: RMS 타이태닉, 영어: RMS Titanic)은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이 운영한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이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첫 항해 중에 4월 15일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타이타닉의 침몰로 1,514명이 사망하였으며, 이는 평화시 해난 사고 가운데 가장 큰 인명피해 가운데 하나이다.
RMS 타이타닉은 첫 항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 가운데 하나였다. 화이트 스타 라인 사는 RMS 올림픽을 시작으로 세 척의 올림픽급 여객선을 운용하였으며, RMS 타이타닉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RMS 타이타닉은 벨파스트에 있는 하란드 월프 사가 1909년 건조를 시작하여 1911년 5월 31일 진수하였다.
첫 항해에 오른 승객은 다양했으며 이 가운데에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다수는 영국과 스칸다나비아 반도 등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이었다. 출항 당시 승선 인원은 2,223 명이었다.
타이타닉호는 선내에 체육관과 수영장, 그외 호화로운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그런데 느슨한 규제때문에 구명정은 20척 밖에 없었다. 구명정의 정원은 1,178명이었다. 1911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선내 시각, GMT -3)빙산과 충돌하였고 이 때문에 주갑판이 함몰되면서 우현에 구멍이 났다.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완전히 침수되어 침몰하였다. 타이타닉호는 방수용 격벽이 설계되어 있었고 문들도 물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실제 사고에선 역부족이었다. 구명정에 타지 못한 채 바다로 뛰어든 수많은 사람들은 수 분 내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였다. 침몰할 당시까지도 배에는 천여명의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구명정을 타고 있다가 몇 시간 뒤에 RMS 카파시아에 의해 구조된 사람은 710명에 불과하였다.
북아일랜드 앤트림 주에 있는 벨파스트에서 건조된 RMS 타이타닉은 세척의 올림픽급 대양횡단선 가운데 두번째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두 척은 RMS 올림픽과 RMS 브리타닉(건조 당시 이름은 기간틱)이었다.[1] 올림픽급 여객선은 건조 당시인 1912년에 소유 선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이 지닌 배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었다.[2]
올림픽급 여객선의 건조 계획은 화이트 스타 라인의 사장인 J. 브루스 이즈메이와 화이트 스타 라인의 모회사인 인터내셔널 머천타일 마린 컴퍼니를 운영하였던 미국 자산가 J. 피어폰트 모건이 나눈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1888년 초 브루스 이즈메이의 아버지 토머스 헨리 이즈메이는 이 크기의 여객선 네 척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알맞은 엔진을 구할 수 없어 포기하였던 것이다. 당시 화이트 스타 라인은 경쟁사였던 큐나드 라인이 RMS 루시타니아와 RMS 모러타니아와 같은 새로운 대형 여객선을 건조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즈메이는 모건에게 보다 빠르고 보다 크면서 승객에게 안락함과 화려함을 제공하는 그런 여객선이 있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였다.[3]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당시 북대서양 항로에 있어서 속도 경쟁보다는 느긋하고 쾌적한 선박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고 설계하였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서 방수구획이 있었다. 방수 격벽은 16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었고, 2구역(뱃머리로부터 4구역)까지 침수해도 침몰하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격벽은 제어실에서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호는 침몰하지 않는 배로 소문났다. 그러나 방수 격벽은 완전히 밀폐된 구역이 아니고 상부의 주 갑판에 구역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는 타이타닉 호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격벽 한계치를 넘어서면서 넘쳐나는 물이 다른 구역을 차례대로 침범하여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 회사에는 타이타닉보다 1년 일찍 건조한 올림픽호와 상선인 HMS 브리타닉호가 재적했다. 원래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 배 한 척으로는 운항에 차질이 생긴다. 따라서 북대서양을 항해하려면 항상 배가 두 척 이상 필요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이러한 필요에 맞춰서 올림픽호를 먼저 건조하고 같은 해에 타이타닉호를 건조하였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브리타닉호를 건조하였다.
타이타닉호는 올림픽호와 거의 동시에 건조하기 시작했다. 대계단이나 식당의 장식, 식사의 메뉴나 객실의 서비스등, 그 외관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닮았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호가 가장 거대한 배처럼 연출되었지만, 당시에는 올림픽호가 대표적인 배였으며, 타이타닉호와 브리타닉호는 자매선이었다. 이 세 선박을 통틀어서 올림픽 클래스라고 불렀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호의 사진으로 종종 올림픽호 사진이 사용된다.
앞서 운행되고 있던 올림픽호의 문제점이나 개선점을 듣고 타이타닉호 설계는 다소 변경되었다. 먼저 외관부터 올림픽호와는 다소 달랐다. 예를 들면 북대서양의 추운 강풍을 막기 위하여 A 갑판의 1등석 전용 산책용 갑판(Promenade)의 창에 유리를 장착했다. 이러한 변화는 외관상으로 두 개의 자매선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 밖에도 올림픽호는 B 갑판의 창가 전체에도 산책용 갑판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타이타닉호의 설계도에서는 B 갑판의 산책용 갑판이 폐지되었고, 대신에 창가 전체에 1등 선실을 새롭게 마련하였다. 그 결과, 1등실 수가 올림픽호에 비해 훨씬 많아져 올림픽호에는 없는 스위트 룸이 설계되었다. 스위트 룸은 자체 산책 갑판까지 있었다.
당초 자매선의 중량은 거의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타이타닉의 객실의 수가 증가하면서 최종적으로 타이타닉호의 중량은 올림픽호의 45,324톤보다 1,004톤 무거운 46,328톤이 되었다.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타이타닉호는 올림픽호를 넘어,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다. 그러나 그늘에 숨은 타이타닉호가 유명해진 이유는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탓이다.
총 11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타이타닉 1등실 시설[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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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실에는 총 329명의 부유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급한 사정보다는 즐기려고 승선한 승객들이 많았다. 객실은 최상층인 보트 갑판부터 갑판 E(상갑판)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호화 호텔 수준이었고 개인 목욕탕이 있었다.
2등실에는 총 285명의 중산층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등실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많이 편리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객실은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흡연실(갑판 B), 레스토랑(갑판 B), 도서관(갑판 C), 상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3등실에는 총 710명의 가난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주로 아메리칸 드림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승선한 승객들이었다. 객실은 2등실과 마찬가지로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시설은 1등실과 2등실만 못하고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다른 배들에 비해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배에 탑승하기 전에는 검역을 걸쳐서 전염병이나 이/벼룩을 확인했고 여자와 남자는 배의 앞머리와 뒷머리에 각각 따로 떨어져 승선했으나 가족 단위일 경우 같이 승선할 수 있었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 · 승객을 합쳐서 2,200명 이상되는 사람을 태우고 첫 항해를 시작했다. 이 배는 프랑스의 셰르부르(Cherbourg)와 아일랜드의 퀸즈 타운에 기항한 다음, 미국의 뉴욕으로 향했다.
출항 당시 승무원들에게 쌍안경 보관함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 망지기들이 눈으로만 위험 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이는 후에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한 요인이 된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배의 속도와 약간의 안개 때문에 쌍안경으로도 빙산의 발견에 아주 늦은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타이타닉호는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떠다닌다는 소식을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받았는데, 특히 4월 14일에는 빙산 경고를 6통이나 받게 된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통신사 잭 필립스는 승객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통신사들은 이 계절에서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에는 자주 있는 일로 생각하여 빙산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심각한 실수를 하였다. 또 빙산 경고를 선장에게 보냈지만 선장이 없어 항로를 변경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가 마지막 빙산 경고를 보냈다. 타이타닉의 통신사 잭 필립스는 바쁘다면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지만 늦은 시간이었기에 통신사 에반스는 이미 잠이 든 뒤였다. (이는 1,500여명의 사람을 죽게 하는 또 한가지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레지날드 리와 함께 견시 당직을 서던 갑판선원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미터에 높이 20미터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 플리트가 급히 무전을 쳤으며,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가 조타실에서 그것을 받고 윌리엄 맥마스터 머독 1등 항해사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그는 바로 우측으로 키를 돌릴 것을 명령하고 (당시에는 왼쪽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키를 돌려야 했다.) 텔레모터(원격 조정 장치)를 "전속 후진"로 돌려놓아 기관실에 지시한 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의 방수 격벽이 닫힐 것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빙산을 피하려고 오른쪽으로 키를 최대한 돌렸으나 배 우현은 빙산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접근하였으며, 정통으로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배와 빙산이 충돌을 했다. 아랫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으나, 윗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을 뿐 잠에서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충격을 느끼고 올라온 사람들이나 갑판 위에 있었던 승객들은 오히려 즐거운 분위기였다. 3등실 승객들은 올라나와 얼음조각으로 축구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기념으로 위스키에 쓸 얼음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6번과 5번 보일러실은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화부들은 물을 피해 도망갔다.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은 방수 격벽의 스위치를 내렸다. 조타실과 망루에서는 빙산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으나, 우현은 수면 아래로 약 90미터가 손상되어 5구획에 걸쳐서 엄청난 해수가 배 안으로 들어왔다. 4번째 방수구역까지 물이 들어오면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지만 5번째 방수 구역에 38000t 이상의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애초에 격벽이 위 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해수는 격벽을 넘어서 차례차례로 다른 구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뱃머리에 실린 물로 배는 서서히 앞으로 기울고 뱃머리가 해수면 아래로 점점 들어갔다.
스미스 선장은 배수 펌프로 해수를 밖으로 빼내려고 했지만 그저 몇 분의 시간을 버는 정도였다. 12시 45분, 타이타닉 호는 조난 신호를 발신하고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했다. 불과 20 km 정도의 거리에 정박중인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있었지만, 통신사가 타이타닉의 통신사에게 일침을 듣고서는 화가 나서 취침중이라 타이타닉 호의 긴급 신호를 받지 못했다. 약 90 km 떨어진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가 조난 신호에 응답해 전속력으로 타이타닉이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배의 최대 속도가 17노트밖에 되지 않는 카르파티아 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은 지 약 1시간 30분이 지난 새벽 3시 55분이었다.
스미스 선장은 탈출 명령을 내렸다. 우선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누어주기 시작했으며 좌현에서는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우현에서는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이 구명보트를 하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승객 대부분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구명보트에 탈 생각조차 안했는데 나무로 만든 조그만한 보트보다는 차라리 260미터의 강철로 만들어진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날씨 때문에 귀찮아했던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배에서 가장 부자였던 존 제이콥 애스터도 아내에게 "여기가 저 조그만한 보트보다 안전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선장에게 여자와 어린이를 먼저 태울 것을 건의하고, 선장은 승인했다.1등 항해사 머독은 더 이상 여성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는 등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한 대응을 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여자와 어린이 먼저"를 "여자와 어린이만"으로 받아들여 혼란을 막기 위해 여성과 어린이 우선의 관습을 철저히 실시했다.
타이타닉호가 참사가 된 원인 중 하나는 구명보트의 부족 때문이었는데, 당시의 영국 상무성의 규정을 보면 여객선은 여객 정원만큼 구명보트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당시 규정에서는 978명, 그나마도 배의 배수톤수 기준이었다! 또한, 미관, 비용 등의 이유로 인해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최종적으로 타이타닉 호에 1,178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보트만 준비했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맨 처음 구명보트를 하선할 때에는 많은 승객들이 탈 수 있어도 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언비어가 승무원 사이에 떠돌았다. 정원 65인승의 보트에 70명을 태우는 실험을 했는데 배는 뜰 수 있었지만 추진과 균형 잡기가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급작스런 사고에 당황한 승무원들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고 황급히 구명보트를 하선했다. 게다가 그 누구도 그런 배가 침몰할 거라고 생각을 못했기에 선원들도 정원이 얼마인지 헛갈렸고 사전에 안전 교육도 계획이 있었지만 취소되어 전혀 실행하지 않았다. 많은 보트들이 정원을 채우지 않은채로 바다에 내려졌다. 만약 정원이 완전히 채워졌다면 승객의 반은 살수 있었을 것이었다.
12시 45분쯤 구명보트 7호가 정원 65명에 28명을 태우고 처음으로 내려졌다. 곧 이어 55분에 좌현에서 구명보트 6호가 7호와 마찬가지로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다. (여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빙산에 부딪히고 있었을때 배를 맡았던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 빙산을 목격했던 두 견시 당직자 - 프레드릭 플리트와 레지날드 리 - , 그리고 훗날 "Unsinkable"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마가렛 몰리 브라운도 있었다.)
한편, 배 밑 보일러실에서는 화부들과 기관부 선원들이 물이 보일러에 접촉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증기와 해수를 배출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관실에는 계속해서 전력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배수를 시작하고 얼마 후 5번 보일러실에서 첫번째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기관사 몇명이 펌프질을 하다가 6번 보일러실의 석탄 저장고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익사한것. 화부장이었던 프레드릭 바렛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또 한편 우편 직원들은 침수하는 우편물 저장고에서 우편물을 물에서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리고 하갑판에 남아있던 몇몇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물이 복도 구석구석에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구명보트는 좌현과 우현 양쪽에서 하나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 정원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내려졌다. 구명보트 5호는 41명이 탔고, 3호는 32명이, 8호는 39명이 탔고 ,1호는 겨우 12명(정원 40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이제 점점 혼란이 가속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사고도 약간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여성은 구명보트 10호와 배 사이에 떨어져 끼었다가 구조되었다.
어떤 승객들은 구명보트에 타기 위해 줄을 타거나 뛰어들기도 하였다. 물론 이 와중에 부상자들도 생겨났다. 이제 승객들도 상황의 심각함을 어느정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한편 무전사 잭 필립스와 해롤드 브리드는 계속해서 모스 신호를 보내었고 하늘에는 계속해서 로켓이 발사되었다. 캘리포니안 호에서도 이것이 조그만하게 보였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선박이 목격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선박은 후에 포경선으로 밝혀졌으며, 해안경비대로 착각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상황이 지속되고 배가 서서히 기울어짐에 따라 이제 혼란이 훨씬 더 가중되었다. 이제 대다수의 승객들이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닫고, 공황에 빠졌다. 아직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약간씩 있었다.
1시 30분쯤에는 배의 앞머리가 잠기기 시작하고, 혼란은 계속해서 가중되었다. 구명보트도 이제 정원에 어느정도 맞추기 시작했다. 구명보트 11호는 정원을 다섯명을 초과해서 내려졌고, 배에서 펌프질로 빠져나오는 물이 들어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13호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지만 마찬가지로 가까스로 피했으나, 밧줄에 문제가 생겨 옆에서 함께 내려지던 15호 바로 위에 내려져' 깔리게 일보직전까지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구명보트에 타고있던 프레드릭 바렛을 포함한 선원들이 아슬아슬하게 밧줄을 잘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명보트 14호가 내려지려 하자, 공황에 빠진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타기 위해 우르르 밀려왔다. 이에 14호를 맡은 5등 항해사 로우는 혼란을 저지하기 위에 허공에 권총으로 경고 사격을 했다. 5분 후에는 구명보트 16호가 내려졌는데, 여기 타고 있었던 사람들 중 간호사였던 바이올렛 제솝은 후에 자매선 브리타닉이 침몰했을때도 살아남았다.
구명보트가 하나둘씩 내려짐에 따라 이제 후미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접이식 보트 C는 1시 40분에 내려졌으며 이 보트가 내려지기 직전에 두 사람이 몰래 탑승한다. 한명은 가족을 구명보트에 미리 태운 승객이었으며, 나머지 한명은 화이트 라인 사의 사장이자 배의 선주였던 브루스 이스메이였다. 이로 인하여 이스메이는 구조된 후에도 대중들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사장직을 사임한다. 1시 45분에는 구명보트 2호가 내려졌다. 이 때 신원미상의 외국 승객들이 승선을 시도했으나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권총으로 위협하여 쫓아냈다. 존 제이콥 애스터는 어린 아내를 태우고 아직도 빈 공간(40명 중에 25명이 타고 있었다)이 많은 것을 보고 타도 되냐고 물었으나 라이톨러에 의해 거절당했다. 마지막 구명보트(선교 위에 비상용으로 있었던 접이식 보트 2개는 제외)는 접이식 보트 D로, 2시 5분에 내려졌다.
이 와중에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노부부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이 좋은 노부부였는데, 이사도라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은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하고 하인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구명보트에 태운 뒤 함께 죽었다.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현지처와 하인을 보트에 태우고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2시 5분, 접이식 구명보트 2개를 제외한 마지막 구명 보트인 접이식 보트 D가 떠났다.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모두 제 살길을 찾으라고 했으며 배를 포기하겠다고 선포했다. 배에 남은 사람들은 접이식 보트 2개를 기다리거나 바다로 뛰어들거나 선미로 달려나갔다. 배가 기울며 프로펠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2시 10분에는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다. 그때쯤 체육관 바깥쪽 휴식터에서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악단이 구슬픈 찬송가를 마지막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떤 곡이 연주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Nearer, My God, to Thee와 Autoume이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채로 선교에 들어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고 하며 배의 설계자 토마스 앤드류스는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고 한다.
2시 15분에서 17분사이에는 배가 보트 갑판이 있는 곳까지 가라앉았다.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리드는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침수되는 통신실에서 빠져나왔다.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 두 척은 파도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보트 B는 30여명의 사람들이 선 상태로 뒤집혔고, 접이식 보트 A는 제대로 뜨긴 했으나 물이 반쯤 찼다. 이때 몇몇 사람들(아치발드 그레이시, 2등 항해사 라이톨러, 전파사 브리드와 필립스도 있었다)이 환기구 때문에 빨려들어갔지만 다시 보일러실에서 발생한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면서 물속으로 빠져나와 뒤집어진 구명보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던중 굴뚝 1이 선교루 쪽으로 쓰러지면서 (존 제이콥 애스터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을 덮쳐버렸고 그 여파로 생긴 파도가 접이식 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쓸어내렸다. 조금 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파도에 의해 깨져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배가 급속도로 기울면서 가라앉기 시작하자 온갖 종류의 배 내부 물체들(가구, 그릇, 보일러 엔진 등)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발생했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시켰다. 배가 더 기울어지자 잡을 것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들 또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이후 침수되면서 굴뚝 2도 차례로 쓰러졌다.
2시 18분,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더 커졌다. 그러던 중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잠깐 깜박거리다가 완전히 정전되었다. 잠시 후, 바닷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2번째와 3번째 굴뚝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굉음과 함께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동시에 굴뚝 3과 환기구인 4가 부러졌다. 2012년 내셔널지오그래픽 팀이 의뢰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타이타닉 호가 절단될 당시의 수면과의 최대각도는 23도 였다.
마침내 운명의 시각 2시 20분, 선미가 그대로 사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침몰하였다.
배에 남아 있던 1500여명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려졌다. 구명보트에 탔던 사람들은 배가 침몰한 곳에서 울려퍼지는 온갖 비명과 아우성을 들었다. 가장 적은 탑승수인 12명을 태운 1번 보트에 탑승한 화부 헨더릭슨은 현장에 돌아가자고 요구했으나 더프-고든 부부와 배를 맡은 시몬스가 반대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으며 결국 무산되었다. 5번 보트의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만 또한 현장에 돌아가려 했으나 몇몇 여자들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6번 보트에서는 마가렛 몰리 브라운 또한 현장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요구했으나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길 것이라며 거절했다. 한편,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점점 줄어들면서 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14번 보트의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 보트들을 재편성한 뒤 지원자는 남기고 다른 사람들을 다른 구명보트로 옮긴 뒤 구조를 향해 나섰으나 그가 준비를 갖추어 구조로 향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대부분이 30분 안에 죽었다. 저체온증 이전에 심장마비로 몇 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사망자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채 함께 동사한 여성도 있었다고 하며 결국 4명의 생존자가 추가로 구조되었다.
배가 침몰한 뒤 약 1시간 30분 후인 새벽 3시 55분에 도착한, 선장 아서 로스톤이 맡은 카르파티아 호는 약 4시간 30분 동안에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5명의 생존자는 구명보트 안에서 사망하였으며, 생존자들은 따뜻한 커피, 담요,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았다.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한 후, 속도를 줄이고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으나 대부분의 시신들은 해류에 쓸려갔으며 흩어진 잔해들과 시신 1구만이 발견되었다. 카르파티아 호는 결국 더 이상의 수색은 포기하였으며 뒤늦게 사고 해역에 도착한 캘리포니안 호에 추가 생존자 수색을 인계한다. 그로부터 3일 후 카르파티아 호는 뉴욕에 도착한다.
며칠 후, 시신 인수를 위해 맥케니 베넷 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이 보내졌다. 총 328구의 시신이 바다에서 인수되었는데, 그중 119구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그리고 선원들의 시신(바다에서 죽은 선원은 자신의 고향인 바다에 묻힌다는 전통에 따라)은 영국에서 바다에 장사지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 승무원과 각 호실, 또는 남녀, 아동간 구조된 인원과 구조되지 못한 인원들은 다음과 같다. 1등실에 탑승한 어린이 중에서는 당시 2살이였던 헬렌 로레인 알리슨양만 유일하게 구조되지 못했으며 2등실에 탑승한 어린이는 전원 구조되었다. 반면 2등실에 탑승한 성인남자 승객은 168명 중 겨우 14명만 구조되어 92%에 달하는 인원인 154명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부자들과 사회 각계층의 고위인사들은 1등실에 탑승했기 때문에 상당수가 구조되었지만 3등실에 탑승한 이민자들은 과반수 이상이 구조되지 못했는데 특이하게 이민자들보다도 신분이 낮은 하인들이 많이 구조되었다. 하인들의 경우 고위인사들을 보좌하기 위해 1등실에 탑승한 상태였는데 해당 하인의 주인들이 자신의 하인을 구조하라고 승무원들에게 요구했기 때문이였다. 3등실의 생존률이 가장 낮은 이유는 가장 낮은 구역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구역이 잠겨있었고 배에 친숙하지 않은 승객들이 길을 헤멨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승무원들이 이들을 통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탑승자 종류 | 총원 | 구조율 | 사망율 | 구조인원 | 사망인원 |
---|---|---|---|---|---|
1등실, 어린이 | 6 | 83% | 17% | 5 | 1 |
2등실, 어린이 | 24 | 100% | 0% | 24 | 0 |
3등실, 어린이 | 79 | 34% | 66% | 27 | 52 |
1등실, 여성 | 144 | 97% | 3% | 140 | 4 |
2등실, 여성 | 93 | 86% | 14% | 80 | 13 |
3등실, 여성 | 165 | 46% | 54% | 76 | 89 |
1등실, 남성 | 175 | 33% | 67% | 57 | 118 |
2등실, 남성 | 168 | 8% | 92% | 14 | 154 |
3등실, 남성 | 462 | 16% | 84% | 75 | 387 |
승무원, 여성 | 23 | 87% | 13% | 20 | 3 |
승무원, 남성 | 885 | 22% | 78% | 192 | 693 |
어린이 총합 | 109 | 51% | 49% | 56 | 53 |
여성 총합 | 425 | 74% | 26% | 316 | 109 |
남성 총합 | 1690 | 20% | 80% | 338 | 1352 |
전체 총합 | 2224 | 32% | 68% | 710 | 1514 |
연주대가 연주한 곡이 어떤 곡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두 곡으로 성가인 '364. 우리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Nearer my God, to thee(가톨릭 성가로는 '151. 주여 임하소서')[6] 와 감리교회 찬송가인 가을/Autoume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연주대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 연주한 뒤에 행운을 빌며 헤어지는 것으로 나온다.
이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 끝까지 남아 운명을 함께하거나 구명보트에 탑승해 열심히 생존자들을 도왔다.
당시 최신 과학기술로 만든 타이타닉호의 침몰참사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문명의 진보와 인간의 이성에 낙관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당시의 서방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 희생자 수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3명에 달해 당시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라고 불렸으며, 살아남은 사람은 711명에 불과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항해의 안전성 확보에 대해서, 조약의 형태로 국제적으로 결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14년 1월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회의"를 열어 13개국이 참가, 1914년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SOLAS), 1914)이 채택되었다. 또한 영국 상무성은 구명보트 구비 기준을 배의 총 정원으로 변경하였다. 그 후로, 여러 배가 조약에 따라 구명보트를 늘렸으며, 이중에는 타이타닉의 자매선 올림픽호, 브리타닉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미국에서는 선박에의 무선 장치 배치의 의무 부여가 강화되어 무선 통신 기계가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 미국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Robert Ballad)는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최초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과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수심 약 4000미터에서 발견된 두 동강난 선체는 각각 600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약 20% 정도가 침몰 과정과 그 후의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배의 앞쪽 부분은 비교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훼손도 된부분이 있어고 뒷쪽 부분은 선체가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서 훼손이 심했으며, 잔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배의 모든 연돌은 침몰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망루는 선교를 뭉개고 쓰러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옷은 발견되었으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마 조류로 인해 흩어졌거나 바닷물의 유기물에 녹아 없어진 듯 하였다. 발라드는 배를 발견하고 한동안은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으며, 참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1993년 9월에는 미국 조선 전문가 윌리엄 가츠케(Wiliam Garzke)가 당시 기록을 근거로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로 해석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배가 빙하와 충돌하는 순간 엄청나게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고 증언했는데, 그 소리는 저급 강철판이 만들어낸 대재앙의 신호였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건져올린 선체 파편을 연구한 결과 충돌시 휘지 않고 부서지는 질이 낮은 강철판을 사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면 침몰을 막았거나, 침몰시간이 지연되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7] 그러나 타이타닉를 만든 회사가 사용한 강철판은 가장 좋은 것이었다. 당시 제철기술로는 최고급 강철판조차 황의 함유량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낮은 온도에선 휘어지기보단 부서져버리게 된 것이다.
첫댓글 여기서도 자본주의 논리가 좀 작용한듯 하네요.
사람 목숨에까지 선실등급에 따라 퍼센테이지가 달라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