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와 카메라의 밖. 카메라와 카메라의 전화기, 카메라의 전화선, 카메라의 탁자 다리, 카메라의 탁자 평판. 카메라의 밖에 있지 않은 것은 카메라의 밖이 아니다. 작가가 그쪽으로만 열어둔 카메라. 카메라 안으로 자기 이미지를 밀어 넣고 있는 작가. 조명 아래 빛나는 사물들. 카메라의 밖으로서의 우주의 조각을 세심하게 선택하고 있는 작가. 눌러지기 직전의 셔터. 찢어졌던 카메라와 작가가 하나로 봉합되기 직전이다. 실패다. 작가는 다시 카메라 셔터에서 손을 뗀다. 작가는 카메라의 밖을 만든다. 사물이 움직인다. 작가가 움직인다. 전화기 줄이 한 번 더 꼬인다. 하나가 되기 전에 수시로 멀어져야 했던 카메라의 밖과 작가. 빛과 암실의 세포막 렌즈. 우주와 내 세계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그곳이 카메라의 밖이 되어야 마땅할 지점이라 여기고 있는 작가. 우주를 향해 들이밀어진 총포, 카메라. 형편없이 실패할 수도 있어.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한편 자신의 이미지에 전화기가 꼭 있어야 하는 지 돌이켜 물어본다(反省). 이러한 카메라와 이러한 카메라의 밖이어야만 하나? 전화기는 이러해야만 하나? 전홧줄은 이러해야만 하나? 탁자 다리는 이러해야만 하나? 탁자 평판은 이러해야만 하나? 아예 없다면? 사물의 고유한 떨림을 받아들일지, 자신의 떨림으로 사물을 반죽할지를 판단해야 하는 작가. 작가가 외롭게 반죽하고 있는 이 방은 장미로 된 울타리이다. 벗어나려하기에는 너무나 매혹적인. 그러나 이곳은 일종의 한계. 내가 책임져야하는 한 단위의 장소.
이윤진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에 고민한다. 카메라의 밖과 어렴풋이 자신의 안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겹쳐보면서 양쪽을 다 조금씩 분명히 해간다. 아직 찍을 만큼은 아니다.
시선과 내면은; 수정구 밖과 수정구 안처럼 하나였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세계가 불편함으로든 편함으로든 상관없이 어떠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우리는 느끼는 것이다. 그 세계는 존재와 우주를 양축으로 하는 좌표계 안에서 우리와 멀리 떨어진 한 지점일 뿐, 우리와 아예 단절된 어떤 차원일 수는 없다. 이렇게 내 안의 떨림을 내 몸에 닿게 하듯이 우주를 직접 흔들어놓을 수는 없지만, 세계 밖의 우주가 우리와 통하는 연속선상의 것이라면 우리는 아주 미미하게라도 공진하게 할 수 있다. 거리이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 거리를 만들지 독존적인 무를 만들지는 않는다. 일컫자면, 이윤진은 렌즈를 손으로 만져 그 거리를 조정하였던 것이다. 카메라와 내 눈의 떨림이 공진한 세계가 찍히는 것이다. 풍경사진은 풍경을 보는 내 눈을 찍은 것, 정물사진은 정물을 보는 내 눈을 찍은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서 밖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카메라 앞에 선 존재'인 나가 우주의 덩어리를 필요한 만큼 떼어내 반죽할 수 있었던 바이다.
블랑쇼의 『아미나다브』에는 내 안의 어둠과 바깥의 빛의 만남에 대한 극적인 묘사가 있다. 이 소설, 『아미나다브』의 주 무대인 건물은 카메라와 놀랍도록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카메라의 어원 cameraobscura라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의미한다. 이 말을 더 거슬러올라가보면, kamara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방 중에서도 천장이 둥근 방을 의미한다. 바로 아미나다브의 무대가 되는 건물이 이러한 건물이다. 주인공 토마는 시종일관 어두침침한 이 건물의 한층 한층 오르다 마지막 층에 도달하여 말한다. “둥근 천장은 존재하는 것일까? (……) 어쩐지 둥근 천장을 구성하는 궁형이 꼭대기에 해당되는 부분에서 망가져버려, 건물의 천장의 중심이 되는 돌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커다란 환기통이어서 거기서 햇빛이 비쳐드는 것 같았다.”(블랑쇼, 『아미나다브』, 하동훈 번역, 506쪽) 각층마다 퍽 카프카적인 자기 고백들을 통해 어두움 속에서 자기 내면의 회로를 탐사하던 토마는 여태 볼 수 없었던 눈부신 빛을 통해 바깥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마치 카메라처럼. 토마는 자기의 어둠 끝 바깥과 접하는 그곳에서 어떤 기호를 보고자 한다. [“창이라고요?” 토마가 말했다. “그것 참 기묘하군. 창으로 다가가서 손을 들고 서보지 않겠어요?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신호를 하며, 들어오라고 청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은데.”](539쪽) 강건한 토마 앞에서 이 층을 지키고 있던 뤼시는 이야기한다. 뤼시의 말은 자기 안에 있는 이미지, 추억을 나아가게 한 사진작가에게 내놓을 수 있는 찬사와 다르지 않다. [“누가 (당신처럼) 이토록 강한 기억력을 보인 적이 있었을까요? 분명히 인정합니다만, 당신은 뛰어난 분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때까지 지낸 생활을 잊어버리는데, 당신은 조그마한 추억을 지켜, 그 어슴프레한 표적을 놓치지 않았던 거예요. 물론, 역시 많은 추억이 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당신은 아직도 나에게 몇 천 킬로미터나 저쪽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545쪽)]
프루스트, 혹은 뒤라스라면 지독히도 소상히 묘사했을테지만, 블랑쇼는 암시한 것으로 그친 '과거' 뤼시는 누구일까? 뤼시는 어디에서 왔는가? 사진이 작가의 안에서 길어야 하는 것이라면, 만드는 자의 생명은 어디까지를 추억으로 품는 것일까? 과감히 나아가보건대 생명은 우주 초기의 역사까지도 자신의 대과거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를 만들어낸 원자가 탄생한, 그리고 그것이 비견했던 원자들이 탄생한 그 과거까지도 생명은 저 뒤의 뒤로서 달고 있다고 나아가보자.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생명체와만이 아니라 사물과도 공연적일 수 있다. 만드는 자는 사물과도 공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이 다시 한 번 만나게 될 플로티누스가 말한 모두와 통하는 단 하나의 영혼 우주영혼은 생명체의 과거일 수 있다. 이전을 거슬러가던 에번스의 탐사대는 크레타문명의 장대함을 만났었다. 그처럼 원시 생명의 시원적인 정교함이 있을 게다. 이윤진, 그리고 인류의 몸도 결국 어딘가에서부터 만들어졌을 것이기에, 우리 심층의 의식의 덩어리, 우리가 직접 보기에는 우리의 너무나 깊숙이에 있는 의식의 의식이 이러한 생명의 대과거와 함께 만들어져서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졌다는 상상이 무리스럽기만 한 상상은 아니다. 이윤진의 사진과 이윤진의 사진 속 사물들처럼, 시어와 의미처럼 생명체와 그것을 이루는 시간-과거는 미끄러지더라도 따로일 수는 없게 언제나 함께 한다. 그 상호 미끄러짐의 양상은 소쉬르와 라깡에게 매우 흥미로웠던 기표와 기의의 관계와 흡사하다(? 장 뤽 낭시 『문자라는 증서』참고).
의식의 덩어리에서 한 충동은 우리 현재 지각으로 솟구쳐 오르면서 점점 제 자신의 원형을 잊게 된다. 너무나 철저하게 잊어버려 단절처럼 보일지라도 어제를 즉시 잊어버리는 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자신의 생각처럼 어제와 단절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것은 여전히 꼬리가 달린 솟구침이다. 이것이 이미지가 되었을 때에야 우리는 말해볼 마음을 먹게 된다. 의식의 의식이라는 추억으로부터 이미지는 화산처럼 솟아오르기도 하고, 돌이켜보는 자가 용케 끌어올리기도 한다. 둘 다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사진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 ‘카메라 앞에선 존재’는 매순간 의식의 의식을 이미지로 끌어올리는 데에, 그리고 이 이미지를 사진으로 제대로 말하는 데에 여러 번 실패했을 것이다.
비슈누와 그의 바다를 만나자. 인도신화 속에서 비슈누는 우주적 대양을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뱀 위에 누워 떠다니는데 그가 꾸는 꿈이 세계가 된다. 의식의 의식이 우주적 대양이라면 이미지는 우주적 대양을 떠다니는 비슈누이다. 이 은유는 몹시 흥미롭다. 이미지인, 비슈누는 제게 맞는 기호를 찾는데, 그것이 이 신화 속에서는 꿈일 테고, 이 기호들은 세계를 꾸린다. 이미지가 떠다니는 의식의 의식은 이미지의 깊이로, 이미지라는 표면 없이, 어떠한 방식으로도 말해질 수 없지만(느껴질 수는 있을까?), 이미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장대한 것이다. 그 바다는 안에서부터 뒤엉키고, 들끓고, 뒤엎는다. 우리 과거조차도 고정 불변의 무엇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의식의 의식의 바다는 그 총량이 어떻게 되더라도 변하지 않기에, 과거는 아무것도 흩어지지 않는다. 이미지가 그 의식의 의식의 요동을 반영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비슈누 신이 바다 위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기호를 아래에서부터 주관할 것이다. 의식의 의식이 지나치게 너울거려 비슈누를 잠식할 때 이미지는 의식의 의식으로 그대로 침잠해버린다. 신화에서는 비슈누가 우주적 대양에 침몰하는 경우는 가정하지 않는다. 이럴진대 이미지에게서 한 기점 더 떠올라 세계를 꾸리게 된 기호가 자신은 생각지도 못할지라도 이 흔들림과 공진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도인은 락슈미가 같은 뱀 위에 타고 비슈누의 발을 만지작거리는 탓에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잠을 자는 비슈누의 꿈이, 이 글 식으로는 기호가 세계라고 말하는데, 이는 의식의 의식에 함몰되지도 그렇다고 거기서 완전히 각성되지도 않은 어떤 상태에서만이 우리가 기호를 길어내고, 그 기호에 세계를 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그러한 잠을 이끄는 것은 락슈미라기보다 바다, 의식의 의식의 요동 자체일 것이다. 한 기호를 완전히 읽어낼 수 있다면 바슐라르 식의 다종다양한 콤플렉스는 물론이고, 우리는 단지 일신의 콤플렉스만이 아니라, 우주의 과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적 상상력이 한껏 가미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이러한 번역 작업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게 한다.
그 이미지를 밖에서 볼 수 있게 끌어올렸을 때 사람은 작품을 만든 것이다. 발표되기 보다 표현되었다면 그것은 기호이다. 이윤진은 사진을 찍은 것이다. 기호와 이미지의 관계는 이미지와 의식의 의식의 관계처럼 들끓음과 표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미지를 기호로 만드는 것은 작업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슈누에게서 보았듯이 몽상이야 말로 작업이다.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있는 것을 구태여 ‘끌어올림’과 ‘내세움’을 행한 것, 즉 지적노력을 감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작업이다. 토마는 그 내면의 험로들을 기꺼이 통과해서 가장 위에 도달했다.
‘기호’와 ‘이미지’의 사이는 완전히 투명하지는 않더라도 ‘이미지’와 ‘의식의 의식’의 관계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투명하다. 우리는 글을 쓴 작가의 세포의 역사를 글에서 읽을 수는 없어도, 작가의 문체적 특징은 어렵지 않게 읽는다. 장 스트로뱅스키는 루소의 기호들을 추적해서 투명성과 장애물의 이미지를 읽었다(『투명성과 장애물』). 첫 개인전 이후 이윤진에게 근원적인 이미지는 ‘던져져 있는 나’와 관련이 있다. 그는 세계와 나를 겹처 보이면서도 서로에게 포섭되지는 않는 긴장감을 재현하고자 한다. 첫 개인전 '뒤뜰' 인터뷰에서 그는 말한다. "독일유학시절의 나는 철저히 남이었다. 그들의 세계에 편입되어 살아가고 느끼고 배웠지만, 나는 결국 남이었다. '뒤뜰'시리즈 작업은 이러한 나 자신의 문제에서 비롯한다."(젊은미술가들45명과의인터뷰, 박찬국 책임편집, 160쪽)
이렇게 작가와 카메라, 그리고 카메라의 밖의 공진의 특유함을 눈치 챌 수 있었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아와 세계의 연속선을 강조하는 플로티누스의 주요한 성찰들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앞서 미약하게 행했던 그 공진의 기점들을 사유해 볼 수 있다. “이 감각적 세계를, 그 부분들 각각이 있는 그대로 다른 부분과 섞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유로써 포착하되, 그것이 가능한 한에서, 그 안에서는 마치 일체가 함께 어우러진 어떤 통일체와 같이 만약 그 부분들 중 어느 하나가 우리에게 나타나면, (……)일체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이 천구에 대한 빛나는 표상을 영혼 안에 간직하자. (……) 이 표상을 그대 자신 안에 간직하고, 이번에는 그 덩어리를 제거하면서 그대 자신 안에서 다른 표상(덩어리가 제거된 표상)을 형성하라.” (엔네아데스 V 8, 9, 1-12 또한 II 9, 17, 4참조, 피에르 아도,『플로티누스 시선의 단순성, 안수철 옮김, 재인용) 플로티누스는 감각적 세계와 영혼이 연속선을 이루면서 영혼이 감각적 세계의 표상을 형성하고, 다시 지우고, 다시 형성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여기서 감각적 세계는 감각했었던 세계가 아니라, 지금 감각하고 있는 세계에 가깝다. 이는 카메라의 밖과 작가가 카메라를 통해 연속선을 이루면서, 사진을 찍고, 필름을 돌리고, 사진을 다시 찍는 과정과 마찬가지의 작업이다─구식 수동 카메라, 앙리 까르티에가 끝까지 고수했던 LEICA M4 같은 기종은 필름을 수동으로 넘겨야 했다. 더 깊이 와 닿았을 것이다; 필름이 바뀌는 딸깍거림, 수동 카메라의 매력, 앞의 흔적을 넘기고 새로운 표상을 만드는 이 과정의 드러남.
플로티누스의 이 담론은 이윤진의 사진 앞에서 수정되어야할 부분도 있다. 사실 이 인용 바로 뒤에 있는 문장이 있다. “또한 공간을, 그리고 물질에 대한 상상을 제거하고, 그 덩어리로 그보다 더 작은 어떤 천구를 생각하라.” 플로티누스는 어떠한 지고의 순수한 형상과 소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항시 있는 것은 아닌 지고의 영혼을 불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명한 이 철인의 유언이 있다. “나는 내 안의 신적인 것을 우주 안의 신적인 것에게로 다시 올려 놓으려고 노력하고 있네." 플로티누스에게 하나를 향하는 바란 우리에게도 잠세 되어 있는, 그리고 생명 전체에게도 본원적인 힘의 덩어리로 있는 그 안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플로티누스의 사람에게는 지고의 영혼 자체가 아닌, 그 영혼을 깃들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잠재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플로티누스는 생명에 무궁한 창조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영혼을 깃들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몸과 불가분이라는 것을 말하면서도, 그 창조력이 영혼의 관조 대상이라는 주장을 계속해서 덧붙인다. 플로티누스에게 이 영혼은 우주적인 하나를 위한 열쇠처럼 우리의 위에 있었다. 하지만 왜 이것이 손안에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카메라를 쥐고 있는데.
우리 안과 우주를 이어내려는 플로티누스의 미덕을 잊지 않으면서도, 이를 수정하여 우리가 언제나 이 하나를 안에 품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카메라를 쥐고 있는 우리 안에 말이다. 플로티누스가 말했듯 아름다움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몸에는 이미 몸이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우리를 이루는 물질 자체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의식의 의식이 있다. 우리는 영혼을 만나려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내려가야 한다. 그것은 다시 우주를 향해 올라가기 위한 침잠이다─윤동주가 “ 나는 왜 다만 홀로 침잠하는 것일까?”(윤동주,「쉽게 씌어진 시」)라고 물었을 때 이 말은 답이 될 것이다.
의식의 의식을 바로 윤곽 짓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을, 아름다움에 대한 일을 하는 것일 터, 이윤진은 지나치게 풀어지지 않은 시선으로 사적인 장소들을 찍는다. 이윤진은 자기 세계를 이루는 물질들에 대한 탐사를 통해서, 그 물질들을 선택하는 자기의식을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그것은 찍힌 물질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일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있음에서 드러난다. 사진 찍기는 그 물질을 바라보는 자신의 몸을 그대로 껴안는 일이다. 그 몸 안에서 이뤄지는 의식-이미지-기호의 대류를 어느 때보다 분명히 느끼는 일이다.
그 속에서 생명력을 찾고 우리는 깊은 힘을 회복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생명력의 본원에서 사회 윤리를 찾자는 사회진화론의 틀 안에 억지로 집어넣어서는 아니 된다. 이 글에서 아름다운 일은 선한 일을 물론 포함하는 것이며, 그 힘이 윤리를 아우르는 것일 수 있고, 그렇다면 선함을 규정하는 것은 어떠한 신실한 체계의 꼭짓점이 아니니, 윤리성을 우리 자신의 생명력 안에서 찾자는 제언이 뒤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을 가로질러있는 사다리는 사회가 아니라 너무나 복잡하게 존재의 안쪽으로 얽혀 있는 추억(le souvnir)이다. 이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난한 작업, 우리 개성 안에서 형이상학을 찾는 그 작업이 우리를 아름다움과 만나게 한다. 그러니 그것은 사회학적 작업이 아니라, 문학적 작업이고 예술적 작업이다.
적어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때 작가 프루스트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윤진은 자신의 추억이 담긴 책과 의자와 전화기와 탁자를 찍었다. 그것들은 프루스트에게, 그리고 이윤진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 끌어올리는 일. 카메라에도 성스러움이 있다면, 그러한 내면의 운동을 세계 밖으로 즉시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진 찍기는 영혼의 운동이다. 물론, 어떻게 찍어도 성스러운 카메라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이 일을 지나치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자. 깊이 돌이켜보고 침잠하면서 나의 생을 통해 하나의 기호를 만드는 힘들지만 즐겁기도 한 작업이 바로 그러한 탐구의 작업이다.
■셔터를 반만 눌렀다. 세계 밖이 카메라의 초점 안에 들어온다. 이제 이 글은 아까보다는 더 온전한 문장을 쓸 수 있다. 작가는 아까보다 훨씬 더 오래 뷰파인더로 카메라의 밖을 바라본다. 카메라의 밖은 제일 먼저 볼록 렌즈에 담긴다. 카메라의 밖은 카메라에게 철저한 밖이다.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사물도 아니고, 반죽도 아닌 빛이다. 카메라의 감각으로 세계의 모든 굴곡이 너무나 신속하게 번역된다. 빛은 첫 번째 렌즈와 두 번째 렌즈와 세 번째 렌즈를 지나면서, 카메라의 구조를 실현한다. 빛은 사진이 될 한 장으로 수렴되는 구조에 의미를 부여한다. 빛은 이 길을 따르고 있지만, 카메라의 상이한 구조와 그 조작 방식에 따라, 빛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걸음 할 수 있다. 작게 만들어진 기계적 동굴 같아 보일지라도 카메라 안에 새겨진 길은 확실히 좁은 길이 아니다. 작가는 현상한 사진에 실망해 보았기에, 실망하지 않은 적이 더 드물었기에 그 길이 심지어 구불거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빛 자체의 섬세한 떨림들까지 작가가 모두 제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쏜 화살이 어디로 갈지 정확히는 몰라도 예측할 수는 있다. 또 한편 빛 또한 카메라의 오묘한 회로도를 무화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병사가 무겁다고 칼을 버리지 않듯이 작가는 카메라의 한계와 싸우면서 그것을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 작가는 파인더, 노출계, 초점……을 조절한다. 사진의 독특한 감성은 이 과정에서 꾸려진다. 이것으로도 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작가는 다시, 카메라의 밖을 만든다. 대화라고 하기에는 작가와 세계의 관계는 너무나 격렬하다. 작가와 세계는 끝까지 자신의 고유진동수를 버리지 않고 맞서다가 서로가 더 할 것이 없어진 극한에서야 한 기호를 서로에게 허용하면서 서로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밖이 남는다. 그리하여 아직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만들어질 그 기호는 세계도 작가도 아닌, 빛이고, 색이다.
사진이 즉시 찍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그렇지만, 이것은 어떤 부당한 비교로 이어진다. 이 부당한 비교에 대한 교정작업 마지막에서 이 글은 사진의 의미 있는 두 기점, 세계로서 세계, 우주 밖 우주-타자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셔터를 누르기 전은 전쟁에 나가기 전 전사처럼 결연한 것이며, 셔터 누르기는 전쟁에 나간 전사의 칼에서처럼 격렬함이 번쩍이는 것이다. 이윤진은 손을 걷고 반죽해볼만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고, 그것은 자기의 장소들을 찍는 일이었다. 광대한 영토를 막대한 노력을 들여 바꾸어놓고 사진을 남기는 대지예술 같은 것들도 있으나, 그것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 점이 쉽게 경시된다.
사진은 분명히, 사진작가의 시선이고, 시선은 어떤 식으로든 내면의 꼭짓점이지만 그렇더라도 그림 그리기보다 훨씬 즉시적이고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회화보다는 좁은 내면의 기저를 지니는 것처럼 여겨진다. 코로는 떨림을 감지하고 음미할 시간을 가졌지만, 이윤진의 사진기는 그러기에는 너무 전자적으로 움직이고, 비록 사진조차 이윤진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풍경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코로가 그림에 쏟아 부은 감성의 농밀함과 수고는 결코 이윤진의 사진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대가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 조차 1970년 사진을 그만두고 그림으로 돌아와서 “사진은 결코 회화 이상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즉석 드로잉이었다.”(앙리까르티에 브레송 사진집)라고 말하였을 때에, 그리고 샤를 보들레르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에 그들이 품고 있었던 비교가 이것이었을 것이다. [네메시스가 대중들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바라는 바 모든 정확성에 대한 보증을 사진이 제공해주니(오! 정신나간 사람들, 그들은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술은 바로 사진이다." 그 순간 이래, 역겹기 짝이 없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별 볼일 없는 이미지를 금속판에 비쳐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저마다 마치 나르키소스 같았습니다. 일종의 광란, 괴이한 광신 행위가 이 새로운 태양 숭배자들을 붙잡았습니다. 이상하고 가증스러운 행위들이 발현했습니다.] (「the modern public and photography」, 1859)
‘정확성’, ‘태양숭배자’, ‘나르키소스’. 보들레르가 사진의 성격에 대한 매우 중요한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여야 한다. ‘나르키소스’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은 맨 마지막에서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정확성’. 보들레르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으니,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우리의 밖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의 세계? 우리의 밖? 그것들은 과연 가능한 질문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백가쟁론이 있을 수 있다. 사진 한 장은 그 수많은 물음들을 묶어 놓은 듯하다. 디아섹 방식의 태 없는 액자로 표구된 이윤진의 대형 사진이 아니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큰 사진인 약 980cm×340cm의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미사용 비행기 격납고에 있는 사진이 아니더라도, 사진 앞에서 저것은 실재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무시할 수 없이 미묘한 맥락을 지니기에, 사진은 가볍지도 얇지도 않다. 사진은 깊다. 재치 있는 화가 마그리트 뒤라스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의 파이프가 파이프일지 아닐지에 대한 물음의 복잡함과, “이것은 무엇이다.”를 말하는 사진의 무엇을 무엇인지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물음의 복잡함은 유사함을 지니고 있다─여기서 그 논리학적, 미학적, 인식론적 논의들을 모두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진에는 코로의 작품을 볼 때처럼 쉽게 저것은 작가가 공진한 세계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도 못하게 하는 실재에 대한 까다로운 물음이 전면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사진은 보증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인 물음이다.
사진이 여전히 ‘태양 숭배자들’의 예술이고, 이것은 인정해야 할 지적이다. 사진기는 빛이 아예 없는 곳에서는 무거운 철일 뿐이다─다만 우리 우주에서 빛이 아예 없는 곳을 일부러 만들지 않고 자연 속에서 찾아내려면, 일단 지구를 벗어나 암흑물질 같은 것들에 대한 천문학적 관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는 카메라가 단순히 철일 경우가 흔치 않다는 이야기이다.
코로의 예술은 태양숭배자의 것이 아니다. 설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코로의 세밀한 붓질을 보면서 추억으로까지 내려간 세계를 다시금 기호로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다 썼다는 것을 누구도 모를 수 없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 걸맞은 세계의 한 풍광을 선택하여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솟구쳐 오르는 자기의 이미지들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의미에서든 보기 좋게 재연하는 것이었다. 그는 실재로 그림을 그림의 그 풍경 앞에서 완성하지도 않았다. 이윤진의 예술은 태양숭배자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독에 가까운 말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 코로와 다른 ‘태양숭배자’의 장기인 ‘정확성’의 세계,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담는 기예의 의의를 밝히면 자연히 드러난다.
눈이 처음 보듯이, 카메라의 작업은 코로가 생략했던 그 처음의 순간을 카메라의 바깥으로서 드러낸다는 데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코로가 모르트퐁텐 호숫가에 직접 그린 어느 정도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는 스케치들을 찾아보거나, 코로가 모르트퐁텐을 처음 들려서 호수 앞에서 찍은 사진을 상상해보거나, 사진을 먼저 찍은 후에 그것을 그림으로 다시 그리는 극사실주의 회화가들의 작업을 연상하면 카메라가 ‘처음의 순간’을 기억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한결 쉽다. 이 처음의 순간이 찍히는 순간, 앞뒤가 잘린 하나의 단위로서 ‘그것의 끝’(이준규 詩, 「그것의 끝」,『삼척』)이 되며 인화를 준비하게 된다.
실은 사진에서의 감성의 농밀함은 회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사진은 바깥을 지니고 있다. 또 카메라는 사물의 굴곡을 빛의 스펙트럼으로 번역하여 ‘우리의 밖’으로서 직접 받아들이는데, 이 일은 우리 눈의 능력을 꼭 빼닮아 있다.(도판 참고) 눈 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오감의 번역 능력들과도 닮아있다. 사진기는 우리가 우리의 밖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의 안과 관계하게 하느냐하는 문제에 대한 유효한 은유가 될 수 있다. 광란이라고 말하기에 그 문제에 대한 몰두는 수고가 필요한 일이다.
이것과 다른 논조의 어찌 보면 사진학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가장 강력한 가상이 하나 더 있다. 강력한 가상: 카메라의 밖을 보려, 카메라의 작은 뷰파인더에 불편하게 눈을 델 때, 사람은 감관의 어떤 제약이 나의 세계를 굴절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 불편한 느낌은 카메라 밖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내가 쉽사리 조정할 수 있는, 나와 차단된 어떤 세계라고, 수정구 밖과 안은 차단되어 있다고 상상하게 자극할 수 있다. 베허부부(GAS TANK 도판 참조)는 카메라 작가가 그러한 일정한 강도의 엄격함을 지키면서 작업을 한다면 세계를 ‘정확하게’ 찍고 있는 것이라는 여긴 듯하다. 이윤진은 카메라에 대한 가상들에 속지 않았다, 베허 부부(Bernd Becher & Hilla Becher)처럼 마지막까지 그 가상을 이용할 수도 없었지만. 하지만 이것은 극단적인 환상이다.
이윤진의 사진에 앞서 그의 스승인 독일인 베른트 베허와 힐라 베허의 이러한 사진이 있었다. 그들은 놀랍도록 유사한 형태의 유럽각지 가스탱크들을 가능한 건조하게 찍어서 작품집을 만들었다. 그들 부부는 같은 주제로 서로 다른 곳에서 사진을 찍었을 때조차 서로의 사진이 구분되지 않게 하려 애썼다. 1969년에는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의도는 오래된 산업용 건물을 유물로 묘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만 여러 형태를 포함하여 어느 정도 완전한 현상들의 연결고리를 창조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기술적 건축에 가장 매료되었고, 그것들의 역사는 관심 밖이없다."고 회고한다.](『GAS TANK』서문, 최두호 번역, 도판 참조) 베허부부는 가스탱크가 아니더라도 다른 인공구조물도 이러한 방식으로 찍어서 자기 작품으로 삼았다.
성장할 수 없는 이 구조물들은 사물에서 영혼의 잠재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제거한 결과물들로서 영혼 없는 헤아림의 세계, 기계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들이 모두 산업 사회의 표상이 된 인공구조물이라는 점에서 산업사회의 삭막함에 대한 경종으로 보이기도 한다. 떨림으로 가득 찬 코로의 작품과 가장 반대된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작품들은, 나아가지도 뒤로 가지도 않는 고정불변의 어떤 구조가 있고, 그것들을 찍으려는 끌림은 그것이 우리 영혼의 골조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라는, 세상에 대한, 사진에 대한 이상하게 일반화된 담론과 닿아있는 환상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실상은 이러한 영혼 없는 헤아림의 세계는 우리의 철저한 외부에만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밖으로 철저히 다가가면 갈수록, 돌이킬 수 없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이미지의 창조적 진화가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 어떤 세계에 접근하게 된다. 그 세계는 베허 부부가 증명하였듯이 기계적인 단일성이 지켜지는 몹시도 삭막한 세계이다. 만약에 단일성이라는 것이 뭉치로 있는 창발이 잠재된 의식이 아니라, 물음이 아닌 이데아의 예외 없는 관통을 일컫는 것이라면 이데아라는 제국의 식민지가 된 그 세계는 결코 정다운 곳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순수한 사물의 질서가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질서는 일단 가장 가까이로 뒤셸도르프 사진학파 일원들을 매혹시켰다.(이윤진을 포함하여,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슈트루트, 토마스 루프, 칸디다 회퍼 등의 독일 유형학적 사진작가들이 이 사진학파로 베허 부부의 제자였다) 베허 부부의 사진은 마치 사진에 존재의 밖을 재연할 권능을 부여한 듯이 보인다. ‘우리의 밖’이 아니라, ‘밖’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영혼에서 가능한 ‘멀어진’ 세계가 아니라, 영혼이 없는 세계이고, 지성적인 세계가 아니라 지성체인 세계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볼 수 있었다는 점만을 지적하여도 그것이 ‘밖’이 아니라 ‘우리의 밖’, ‘안의 밖’이라고 간단히 반박할 수 있다. 베허부부는 사진기를 통한 자신의 시선들이 뒤돌아보지 않고 곧잘 사물로 내달려서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런 시도는 역설적으로 안의 밖을 어는 때 보다 강렬히 드러냈다. 이것이 오히려 이들을 사진사에서 지울 수 없게 만든 그것이다.
■드디어 작가는 포커스가 잡혔다, 라고 확신한다. 카메라의 밖은 이제 떨리고, 반죽되고 분절되기보다 뭉쳐지고 고정되어 카메라 안에 있다. 이제 우리는 긴 문장을 사용하면서 말할 수 있다. 빛은 수렴이 끝나고도 끝가지 가기에 굴절된 상태로 감광판의 바로 앞까지 오는데, 이 감광판에 맺힌 상은 좌우만이 아니라 상하도 함께 바뀌어있기 때문에 돌리는 것만으로도 원래의 세계에 겹칠 수 있다─그러니 거울과는 다른 것이다. 카메라 발명가가 따라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구조와 원리가 놀랍도록 유사한 우리 눈에서도 상은 뒤집힌 채로 망막에 도달하는데, 오른쪽 눈의 정보는 왼쪽 뇌로, 왼쪽 눈의 정보는 오른쪽 뇌로 가서 뇌신경 체계 안에서 종합된다. 그렇게 다시 뒤집혀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엇갈리게 진화된 이유가 생존에 훨씬 필요한 구불거리는 움직임에 적당해지기 위해서라는 학설이 있다. 이렇게 몸의 안과 밖, 몸의 능력과 몸의 움직임은 긴 역사를 공유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능력의 발휘란 안을 밖으로 던져 떨어뜨려 놓는 것이 아니라, 안이 밖을 아우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안이 있다는 말이 인간 존재에게 헤아림의 능력이 본원적으로 부재 한다는 바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윤진의 정물 사진은 사선 구도나 격자 구도 두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사진은 드물다. 이윤진 사진의 탁자 다리와 전화기가 만들어내는 엄격한 격자 구도는 베허 부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이것은 어떤 엄격한 헤아림의 소산이다. 다만, 요컨대 우리의 영혼이 헤아림보다는 느낌에 뿌리박고 있는 무엇이며, 베허의 작품 활동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멀어져서 기계적인 것으로 다가가지 않고서는 ‘통일성’에 닿기 힘들다는 것은, 어떤 고정된 이데아에 접근할수록 지성을 더 많이 함양하게 된다는 생각을 철회하게 한다. 그리고 지성을 고정된 이데아에 접근하는 능력이라기보다, 지적활동 일반의 통칭으로서 의미 짓게 한다.
헤아리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 지성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게 철저히 등 돌려서 통일성을 추구하는 사람, 그렇게 등 돌려서 존재 여부도 몹시 의심스러운 지고의 진리로 곧장 나아가려 애쓰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돌이켜보는 회로를 지닌 사람이다.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지적인 활동에 지성적인 사람의 근거가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길이다. 아니, 기억 자체의 양식이다. 이윤진은 그런 식으로 이 구도들을 자기 양식으로 꾸려나갔을 것이다.
받아들인 세계는 의식의 의식으로까지 깊숙이 잠긴다. 사실은 그냥 내버려두더라도 받아들인 세계는,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과거로 스며들어간다. 이윤진의 사물들은 사진찍기가 아니었더라도 그의 과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는 자는, 한때 사람들이 영감이라 칭하기도 했던 어떠어떠한 자극을 받아 그것에 세계와 자신이 맺어지는 양태로서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여하는데 이것은 받아들인 세계가 의식의 의식으로 완전히 스며들지 않게 만든다. 이윤진의 사진찍기에 대한 열망은 자신의 장소를 그저 과거 일상의 한 부분으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이때 받아들인 세계는 사유의 알갱이로서(사건?) 의식의 의식과 이미지 사이를, 이미지와 기호 사이를 떠돌게 된다. 돌이켜보는 자가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헤아려 굳이 끌어올리는 수고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유의 알갱이는 기호, 예컨대 말로까지 드러날 정도로 길어 올려 질 수 있는데, 돌이켜보는 자는 자신이 방금 자기의 밖으로 내보낸 기호를 세계의 부분으로 새롭게 받아들인다. 이윤진은 현상된 사진을 보고, 다음에 자신이 어떤 우주의 조각을 택해야 할지 고려한다. 그 후에 다시 받아들인 그 세계는 위에서 말한 과정을 다시 반복하며 내면에 머문다. 다시 찍고, 다시 찍는다. 이것이 반복되고 있는 동안 그는 돌이켜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와 영혼은 거울처럼 서로를 반사하고 있지 않다. 그 속에는 반사가 아니라, 세계와 영혼 사이에는 기호를 가라앉게도 떠오르게도 하는 대류작용이 있다. 이 대류작용을 담아내는 것이 몸이다. 몸은 이 대류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고도로 정교화된 하나의 체계이다. 돌이켜보는 것은 몸 안에서 움직임을 통해 영혼의 욕망을 세계에 전하기도 하고, 세계의 복심을 영혼에 전하기도 한다. 돌이켜본다는 것은 지적인 활약뿐만이 아니라, 반사 반응 같은 것들까지도 포함하는 것인데, 다만 사진과 같은 기호를 창출하는 돌이켜봄은 지적 노력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바꾸기도 하고, 세계나 영혼을 바꾸기도 한다. 그것이 진화의 과정이다. 식물이라는 몸에게 그 대류작용은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 존재에게는 우울할 정도로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다. 이윤진은 돌이켜본 만큼 기꺼이 사진기와 세계 사이를 왕래했을 터.
돌이켜봄은 자기만의 길을 내는 방식으로 진전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걸음을 만드는 방식으로 진전된다. 하나의 기호가 늘 고정된 회로로 특정한 이미지와만 부착되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사유가 깊은 자는 내면을 헤매면 헤맬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자기 걸음을 뿌듯해 하리라. 그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다듬는 자이다.
이렇게 헤아림은 오히려 우리의 충만한 영혼 바깥쪽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영혼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사르트르가 무는 존재에 매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끈적거림에 대한 유명한 현상학적 묘사를 한다. 현존이 느끼는 끈적거림 안에 의식의 여러 층위들이 있고, 그 간격, 거리로서 무가 매달려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사진작가는 영혼에 대해 실사적인 묘사를 할 수 있다. 사진작가는 그 묘사를 통해 돌이켜보는 영혼은 세계의 이러저러한 결을 직시하고 있고, 이 직시는 다만 내적인 성찰이 아니라, 바깥을 매달고 있는 응시라는 것을 밝힌다. 그것이 바로 사진이다.
베허 부부는 과했다고 이윤진은 생각했을 법하다. 사진이 차단된 밖이라는 생각은 보들레르의 말이 아니었더러라도 정말로 지워내야 하는 생각이다. 사진작가의 활동은 화가의 활동보다 훨씬 더 세계의 바깥으로 옮겨와 있지만, 그렇다고, 사진작가의 손에 쥐여진 사진기의 암실을 무시하는 것이 어리석이 짝이 없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사진은 세계와 자아 사이의 가장 첨예한 접점을 자신의 안에 심게 된다. 그리고 사진 자신의 안을 갖게 된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이윤진의 스타일. 이윤진은 그의 스승이 제시한 사진의 ‘밖’─‘사진의 밖’이 아닌─이라는 과제를 버리지 않으면서, 베허부부와 결정적으로 다르게 정물들에 대한 자기 안의 떨림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과제는 주로 엄격한 구도를 유지하면서 해결한다. 이윤진은 나의 ‘사물’을 나의 ‘이미지’ 대로 찍으려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으로 ‘장소’로 현상되었다. 이윤진 사진이 하고자하는 바가 중산층 가정의 소유품 카탈로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역시 뒤셸도르프 사진학파의 일원인 안드레이 그루스키의 대형할인상점의 진열장에 대한 사진 등에서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욕망들과는 이윤진의 욕망은 한참 다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이윤진은 사물들에서 내밀한 이미지를 움트게 하는 어떤 구도를 발굴해낸다. 내 몸의 움직임, 그리고 그 흔적들까지도, 어쩌면 브르디외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하게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
이윤진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과 동시에 없는 그대로의 세계를 강력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즉, 이윤진의 사진은 작가 사생활에 대한 내밀한 고백과 함께 순수하게 미적인 구도에 대한 탐닉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윤진 사진 속 긴장감의 정체이다. 세계를 벗을 때 추상적으로 드러나는 구도, 미적인 순수함, 미지는 세계를 뛰어넘음 자체로 있는 세계의 절대적인 바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진의 사진은 이것들이 곁에 있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해 이것은 먼 곁이다. 그 절대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윤진이 찍은 지극히 사적인 세계보다 이 바깥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바깥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우주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셔터를 누른다. 사진 찍기에서 작가의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다는 이야기이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카메라가 뷰파인더와 렌즈 두 개의 눈을 가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렌즈와 일렬로 있는 감광판에는 뷰파인더로 본 것과 다른 빛이 새겨진다. 홀가 카메라(holga camera)처럼 카메라 기기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내는 뷰파인더로 보는 것만으로는 예상치 못하는 효과를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배려된 카메라의 경우 이것은 더 직접 느낄 수 있다.
뷰파인더와 렌즈에 들어오는 빛은 경로부터 다르다. 첫 번째 렌즈에 들어온 빛은 셔터 앞에 설치된 빛에 반사되어 뷰파인더 안의 거울로 들어오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빛이 거울에 한 번 더 꺾여서 뒤집힌 것이 다시 뒤집히게 된다. 즉 바로잡힌 상을 보는 것이다─우리가 보는 방식, 눈의 구조까지 고려하면 이 꼬임은 훨씬 더 복잡하게 묘사되어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에는 카메라의 기능이 부여한 여러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것만으로는 충분히 말할 수 없는 어떤 소여들이 사진 찍기에는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들: 의식─의식의 의식, 이미지─이미지와 이미지, 기호─기호인 기호는 공진한다. ‘의’의 깊어짐이 ‘와’의 넓어짐이 되고, ‘와’의 넓어짐이 부풀어서 ‘~ㄴ’ 부피를 품게 된다. 창조의 과정 속 의미 있는 지점들의 이러한 이름들을 이 글은 반복해서 불러왔다. 이 연속선에 카메라는 두 개의 차원을 더 덧붙이기를 강력히 제시한다. 세계─세계로서 세계, 우주─우주 밖 우주. ~로서의 세계는 기호에게 어떤 자격과 책임을 부여하는 기호의 밖이고, 기호의 틀이다. ~로서의 구조는 기호가 밖으로 던져졌음을 말한다. 사진은 회화보다 훨씬 강하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내던져짐의 짊어짐은 사진 안에서도 천차만별일 것이기에 부정 또한 허용한다.
기호가 하나의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 자는 또 이 기호가 다른 세계에는 가닿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을, 세계의 바깥─나에게서 가장 먼 우주 밖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레비나스라면 이토록 애매하게 분명한 미지에 타인이라는 이름을 겹쳐놓았을 게다. 공진하고자 하는 욕망: 지금 이 기호로 다른 이를 감동받게 만들고 말리라는 기대는 사실 자신의 파동을 저 바깥으로까지 내보내려는 강한 열망과 같은 것이며, 우리는 거의 이러한 방식으로 타인을 감지하기 때문이다─사르트르의 훔쳐보는 자에게 있는 타인을 염두에 두어도 좋다. 이럴진대 감동이란 것이 마법과 같은 순간이 아닐 수 있을까. 진정한 기호는 나와 타인에게 동시에 불가사의이다. 나의 기호가, 거의 내 안에 있는 타인과 완전히는 아니지만 유사한 나의 의식의 의식과 기호 저 너머의 타인이라는 우주를 함께 떨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기호는 단지 내 과거, 내 의식의 의식의 표출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침투하여 바꾸어 놓는 힘이 있다─아마 그것은 예술적인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 힘은 반대 방향으로 세계를 돌파하여 우주 한 켜의 타인의 안까지 흔들어놓는다.
■ 눌러진 셔터가 다시 올라오기 전까지 그 짧은 순간은 사진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셔터가 눌러져 있을 때 뷰파인더와 렌즈만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카메라와 카메라의 밖은 순간적인 단절이 일어난다. 셔터는 필름에 새겨지기 ‘적당한’양의 빛만을 담기 위해 조리개를 닫게 하면서 카메라를 카메라의 밖과 떨어뜨린다. 카메라는 밀폐된 하나의 방이 된다. 그리고 다음 필름으로 감광판의 판이 넘어간 이후에나 렌즈는 다시 밖으로 열린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진에 빛이 새겨지는 이 순간은 온전히 카메라의 몫으로 할당되어 있는 짧지만 사진 찍기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사진작가의 운동이 도달한 한 ‘따름’이다. 작가의 우주에 대한 이끌림이 세계의 한 조각을 수집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아갔었다. 이 욕망이 이끌림이고, 이 이끌림의 맨 끝에 있는 것이 따름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면서 내어 ‘놓는’ 일을 하면서, 점점 더 자기 ‘밖’을 따라가다가 급기야는 완전한 따름에 짓눌리게 되는 한 순간을 맞는다. 그러니까 밖과 안의 가장 합당해 보이는 교차를 스스로 결정한 그 순간,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이끌림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조각을 드디어 손에 넣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몫의 역할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 적극적인 수동성이 발현한 따름의 한 순간을 맞이한다. 따를 수밖에 없는 무언가인 완성된 사진을 얻기까지의 일이다.
사진가가 사진을 찍기까지의 느낌은 단지 성과에 대한 승복과 관련된 따름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우주의 조각으로 선택하여, 빛으로 변환하고, 색으로 바꾸어 끌어들인 이 세계가 역으로 작동하여 나를 매혹하고 나를 이끌게 되는 상황을 함축한 것이다. 사진 찍기는 나의 주체성이 침묵해야 하는 자리로 나를 이끌면서 세계에 묻힐 내 지문도, 세계가 나에게 묻힐 얼룩도 없는 어떤 지점으로서 인화된다. 이윤진 사진의 놀라운 밝음과 깨끗함이 다만 겉보기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본원적인 천진난만함이 있다. 찍는 자가 어떤 사건이라도 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카메라의 지금을 아끼듯이, 이윤진이 어떤 사건이라도 벌어질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내 장소의 지금을 아끼듯이, 사람들이 무엇이라도 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어린아이의 지금을 아끼듯이, 따르고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떤 천진난만함‘으로서’의 사진을 이윤진의 정물사진들은 꿈꾼다. 보들레르 이것이 나르시시즘인가?
이렇게 이윤진 세계의 원천은 사진에 담기지 않는 것으로 담긴다. 이미 우주도 나의 것도 아닌 시공간이 사진기 안에 움을 트고 인화지에 그것이 색으로 찍힌다는 말이다. 사진 속 장면이 무엇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전화기는 전화기의 물성을 버리게 되고 나는 더 이상 내 이미지대로 전화기를 옮길 수 없게 된다. 또 이 글은 여태 이윤진 사진의 잠세성을 탐구하면서, 사진 속 사물들에 대한 우주와 만드는 자 양쪽 모두의 특권을 승인하지 않으면서, 세계‘로서’의 맞부닥침이란 이름으로 지워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이 글의 작업을 우주와 자기를 중성화하는 사진찍기의 작업이 예언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가가 뷰파인더로 보는 밖과 사진에 남아있는 밖이 격리되는 그 때, 사진가의 몸과 사진가의 사건이 분리되는 그때, 그리하여 사진의 익명성은 탄생했던 것이다. 블랑쇼의 『아미나다브』의 맨 마지막 대사는 따라서 답에 가까운 물음이다. “당신은 누구요?” 뒤에 따라오는 이 소설의 침묵이야말로 사진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사진의 변경할 수 없는 초벌이 굳는다.
■ 나와 우주의 맞부닥침은 세계라는 불꽃을 일으켰다. 그것 모두, 심지어 스스로마저 불사르는 그 불꽃 속에서 나의 가장 깊은 안과 우주의 가장 높은 밖이 겹쳐 있는 것을 본다. 불꽃이 꺼지면 그곳은 누구나 서 있을 수 있는 한 자리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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