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백석우화-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
9월 30일(토) 오후 7시 구리아트홀에서 ‘한다리길49’(문예창작동아리) 한, 재호, 형준이와 9학년 신혜와 함께 ‘백석우화’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백석우화는 백석의 시와 삶을 소재로 만든 연극이어서 일단 마음이 끌렸고요, 더군다나 한국 최고의 연출가인 이윤택 님이 연출을 맡았다고 해서 꼭 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이 연극을 작년에 두레학교 선생님들과 대학로에서 감상을 했는데, 그때 큰 감동을 받아서 나중에 다시 한번 보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구리아트홀에서 상연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얼른 예약을 했지요. 8월 말쯤 예약을 해놓고는 약 한달 간 설레는 마음으로 연극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연극이나 뮤지컬을 많이 보지는 않았는데, 제가 본 연극이나 뮤지컬 중 백석우화는 단연 최고였습니다. 왜 그런지 좀 말씀을 드리려고요.
첫째, 백석의 시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연극은 백석의 시 ‘여우난 곬족’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화자의 친인척 한명 한명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명절날 엄마를 따라 간 큰집의 풍경을 판소리 창으로 정말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또한 1930년대 조선을 강타한 연애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지금 읽어도 낭만적입니다. 백석이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낼 때 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대로 ‘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 중 하나’입니다. 인터넷에 보니 어떤 분은 이 시가 자살을 막아주었다고 하더군요. 밑바닥까지 한없이 떨어졌지만 갈매나무를 바라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화자의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비록, 제가 참 좋아하는 시 ‘흰 바람벽이 있어’는 연극에서 소개되지 않았지만, 백석이 쓴 동시나 산문 등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은 극중에서 노래로 불려졌는데 곡이 참 좋았습니다. 음원이 있다면 구입하여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듣고 싶을 정도였어요. 악보가 있으면 제가 기타 치며 부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수업을 할 수 있기를! 어쨌든 연극 백석우화는 한편의 시이고, 백석의 시를 알려주는 시 수업이었습니다.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
둘째, 백석의 삶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백석은 ‘시인’으로만 널리 알려졌으나, 러시아 문학을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하고, 동시를 짓기도 했으며, 여러 산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학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는 공산주의의 사상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결국 한번 가면 오지 못한다는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보내졌고, 평생 농장에서 일하며 1996년 2월 16일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여러 사람에게 보냈기 때문에 과연 이 나타샤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통영의 란(박경련, 친구 신현중의 아내), 시인 노천명, 기생 자야(김영한(진향)), 문학잡지 편집인 최정희 등. 노천명은 그 유명한 ‘사슴’을 쓴 시인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사슴 시가 나오기 전에 먼저 백석이 시집 <사슴>을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천명이 읊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백석인 것이지요. 자야는 평양의 기생이었는데, 술자리에서 백석에게 “내 마누라”라는 얘기를 듣고 서로 사랑에 빠집니다. 자야는 나중에 월남하여 서울에서 최고급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며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후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동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 천억원 정도를 성철 스님에게 기부하였고, 성철 스님은 그 돈으로 대원각이 있던 자리 성북동에 길상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런 러브스토리는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충분할 것 같아요.
분단이 되고 난 후 백석은 북한이 고향이라 북한에 남게 되는데, 시 쓰는 건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백석은 이를 테면 ‘순수문학’ 곧 문학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를 쓰기를 원했지만 북한에서는 시적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사고인 것이고, 사회주의 사상과 김일성 수령을 찬양하는 시를 써야 했습니다. 백석은 결국 사상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평양에서 삼수갑산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백석은 평생을 거기서 지내다가 1980년대 어느 날 남한의 후배 고정훈의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고정훈의 아들이 몰래 북한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고정훈은 6.25전쟁 당시 UN군으로 참전하여 평양에 있는 백석을 만나서 남한으로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백석은 가족과 고향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북한에 남게 되었습니다. 아마 고정훈은 평생 그때 백석을 데려오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랬기 때문에 아들을 통해서라도 백석을 남한으로 데려오게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백석은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고 북한에 남습니다. 그때 고정훈의 아들이 찍은 사진이 아래 것입니다. 이게 연극 마지막 장면이었는데 이때 가슴이 뭉클했어요. 그 혹독한 상황에서 시성(詩性)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는 모습이었어요. 백석은 자신이 죽으면 자신이 썼던 모든 글들을 다 태워버리라고 아내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참 궁금합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았던 그의 삶과 글이.
“얘들아 연극 어땠어?”
“생각보다는 재밌었어요.”
“ㅎㅎㅎ”
"시인은 진실로 슬프고 근심스럽고, 괴로운 탓에 이 가운데서 즐거움이 그 마음을 왕래하는 것입니다."-백석
첫댓글 지난 것이지만 백석을 생각하며 올립니다^^
이윤택이 나옴~ㅋㅋ
우리는 얼마나 속고 살았는가? ㅋ 속으면 어때~! ㅋ
삼수갑산
함경남도에 있는 삼수와 갑산 지방. 오지에 있는 산골로, 조선 시대 귀양지의 하나였다.
어법접기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각각 함경남도 북서쪽과 동북쪽에 있는 오지(奧地)의 지역명이다. 이 두 지역은 특히 날씨가 춥고 산세가 험하여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귀양지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삼수갑산(三水甲山)’은 ‘춥고 험한 지역’이나 ‘유배지’ 등과 같은 일반적 의미를 띠게 되었고 동사 ‘가다’와 어울려 관용구를 이루어 ‘멀고 험한 곳으로 가다’,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르다’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 이 말은 어원 의식을 잃고 ‘산수갑산(山水甲山)’으로 잘못 쓰는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