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고재 시판慕古齋 詩板
경북 영덕군 달산면 용평리 70번지
題慕古齋 모고재
手把寒溪護一堂 손으로 떠먹는 깨끗한 냇물이 집을 보호하고
分來幽抱本無量 분명히 내려오는 깊은 포부 본래 한량없네.
主人勝事任風月 주인의 좋은 일은 풍월에 맡기며
自在園林自在床 스스로 임원이 스스로의 책상이 되네.
[原詩 : 詩板 寫]
위 시는 퇴계선생문집에 수록되어있지 않다. 일시逸詩일 가능성이 있다. 선생께서 모고재慕古齋의 시를 차운하신 시라고 한다. 시판은 모고재를 중수하면서 제작하여 게시한 것으로 보이며 퇴계선생 시판 외에도 모고재공의 원운시와 월천月川(趙穆)공이 차운한 시와 모고재공 후손들의 시를 새긴 시판이 여럿 걸려있다.
모고재는 920번 국도로 영덕으로 가다가 지품면 소재지를 지나 옥계계곡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여 5km정도 달산면 사무소 소재지인 대지리를 지나면 도로변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 루 마루로서 전면과 우측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팔각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따라 형성된 넓은 들판과 병풍처럼 펼쳐진 산들을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있고 좌측은 바라지문이 설치되어 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마루의 가운데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본래 방문을 들어 올려 마루와 트이도록 되어 있었으나 중수를 하면서 그냥 여닫는 문으로 고쳤다고 후손들이 설명하고 있다. 필자가 답사한 루정 가운데 방을 마루 가운데 배치 곳은 전라도지방의 면앙정, 광풍각 등이었다. 본래 가질마을(달산면 대지리)의 영천이씨 입향조 李鶴이 曾王考 李明發이 은거하던 모고산 암벽위에 1520년에 창건하고 자호로 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1669년에 현손 8종반이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모고재 손자 이화춘李華春(初名 宗仁)은 퇴계선생 문인임에도 초명初名의 성명과 제문의 기록이 있고, 전주인全州人으로 진주성을 고수하였고 진주창열사晉州彰烈祠에 제향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이종인李宗仁(?)이 백운동서원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라고도 기록되어 누구인지 상세히 알 수 없었다. 그의 유고집遺稿集인 국역 천재일고國譯 川齋逸稿(1998年 刊行)에 16세에 퇴계선생께 입문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퇴계선생의 시 3편과 간찰 1편과 본인이 선생을 경모하는 시 여러 편과 제문 2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선생 시와 간찰은 문집에 수록되지 않았고, 만제록輓祭錄에도 제문 1편만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권오봉교수權五鳳敎授(作故, 當時 浦項工大)가 모든 기록을 검증하여 퇴계선생문인退溪先生門人임을 확인하고 관련문적에 누락되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추후 중간重刊 때에는 보집補輯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이번 영덕지역(大峯精舍. 慕古齋. 處湖亭. 雲山書堂) 답사는 모고재공의 12대손이신 기석基釋(79歲, 嘉芝里出身 大邱居住)님께서 정보를 주시고 관련 문중과 연락하여 답사에 어려움이 없도록 주선하셨으며 고령이심에도 고르지 못한 날씨에 같이 다니시며 융숭한 환대를 받게 하여주셔서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