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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수필 <이장移葬>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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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수필 분석 - 2004년 부일신춘 당선작 <이장移葬>을 중심으로 -
권대근 (문학평론가, 신라대 사회교육원 문예창작 전임교수) I. 들어가며 -왜 신춘문예 수필이 중요한가?
부산일보가 신춘문예 응모 장르에 수필을 추가함으로써 수필의 위상이 더한층 높아졌다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전임 부산문인협회 회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우리 수필가들의 성원으로 수필을 신춘문예 장르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부산일보는 올해로 두 번째 역량 있고 참신한 신인을 탄생시켰다. 작년의 신춘문예는 1회가 갖는 의미가 중요한 만큼 엄정한 심사를 거쳤으나, 약간의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선 작품의 수준에 문제가 있다거나, 심사위원 선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훌륭한 부산 출신의 심사위원에 의해서 훌륭한 부산 지역의 수필가가 당선되었던 것이다. 이런 결과는 우리 부산 수필의 자존심을 드높이고, 부산 수필이 향후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을 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번 2회 신춘문예 심사는 철저하게 부산수필가들이 배제된 가운데, 경남의 심사위원에 의해 행해졌다. 지역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수필의 심사를 맡느냐는 대단히 중요하다. 지금은 수필의 틀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하고, 일반 대중과 수필가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수필과 수필비평가들이 좋다고 하는 수필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수필은 과도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수필을 보면서 독자들은 수필의 제대로 된 틀을 모르기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다. 현 단계에서 한국 수필이 당면한 과제는 무엇보다도 수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신춘 문예 수필이 중요한 건 위와 같은 수필의 질적 향상과 좋은 수필의 기준점을 세우는 데 신춘문예 작품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필자는 신춘문예 수필을 통해서 새로운 수필의 틀이 자리를 잡아나가야 우리 수필의 문학적 위상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부산일보는 이런 우리 수필 문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가 수필이 당면한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조차 없었겠지만, 수필의 새로운 틀을 제시해서 수필의 문학성을 바로 세우고자 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심사위원의 선정 문제는 우리 수필의 위상과 관계 속에서 신중하게 접근되어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은 "이것이 수필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완벽한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문학수필의 가치 척도를 확실히 알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 수필의 전형으로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 출신의 심사위원에 의해 부산 지역 수필가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심사위원을 외부에서 위촉할 것이 아니라 지역을 떠나 수필을 제대로 아는 분을 심사위원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제대로 수필을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 먼저 수필을 써온 중진 작가로서 그 작품성을 모든 수필가들에게 인정받고 있되, 현재 탁월하고도 예리한 비평이론으로 우리 수필의 바람직한 방향을 비평을 통해 선도하고 있는 수필가로서 비평가를 겸하고 있는 분이거나 수필이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수필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있는 그런 분으로서 문학적 수필에 대한 안목이 있다고 인정된 수필에 조예가 깊은 학자 출신의 수필가가 맡는 게 온당하리라 본다. 그런 분이라면 부산 지역이면 어떻고 서울이면 어떻겠는가. 어쨌거나 현실적으로 신춘문예 작품은 그 자체로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음으로, 당선작을 정선함으로써 독자들이 그것을 본격수필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국민의 가정으로 배달되는 신문에 실린 수필이 제대로 된 수필이 아닐 때, 그것이 미칠 수필에 대한 부정적 여파를 무시할 수 없다. 수필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참다운 수필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신춘 수필의 역할 또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II.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의 당선 가치와 의의 - 긍정적 측면에 대하여 수필이란 결국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의 이야기이요, 그 역사를 만들어 가는 씨알의 절규인 동시에, 그러한 삶의 역정을 들여다보는 관점이다. 부일 신춘문예 당선작은 한 세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겪게 되는 역사적 변혁 속에서, 유교적 가부장제 문화로 인해 여성적 삶이 어떻게 억압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수필은 여성문제 수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연히 인식이 녹아 있는 수필이 된다. 문학은 한마디로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고 정의된다. 페미니즘의 잣대로 작품을 재단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을 쓴 작가의 의식 속에는 사회 비판적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겠다. 이 수필은 "수필의 묘미는 개인적 체험의 사회적 확대에 있다. 개인사적인 기록 차원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에 대한 발견과 의미 부여,가치 창출이 필요하다."는 측면을 충족시켰다는 이유로 당선작에 뽑혔다. 문제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제재를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켜 내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필의 성공을 가늠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다. 문학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언어가 사회적 의식을 반영하는 고리라면 그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된 수필 역시 사회의식을 반영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역사, 개인사는 사회 변동의 고리가 된다. 즉 개인들 삶의 의지가 총체적으로 흘러 들어온 방향이나 그 지점, 그 역사의 현장에서 개인은 승리하기도 희생되기도 한다. 역사의 주역이냐 피해자냐의 관점에서 볼 때, 작가의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이 이 글을 쓴 작가 역시 가부장제 전통문화의 피해자다. 버림받은 어머니와 여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같이 버림받았다는 데서 동류의식을 느끼는 딸은 어머니의 죽음이 서러울 수밖에 없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이 생생한 작가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굴욕적 삶은 개인적 체험을 사회적으로 확대 생산할 수 있는 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아버지의 배신과 어머니의 한스런 삶의 인고를 안 시점이 철없던 어린 시절이니 만큼 작가는 어린 날의 한을 더욱 아프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비교나 대조는 인식의 어머니다. 작중 인물들의 삶과 위상을 대조적 구도로 설정한 것은 구성적 전략으로 매우 적절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은 극과 극이다. 아버지는 가해자고, 어머니는 피해자다. 이러한 배경 설정이 작가의 복수 의지를 일으키고, 결국에는 용서 화해의 구도로 몰아가기 쉽도록 되어 있다. 작품 속 아버지는 딸에 의해 처자식을 버린 형편없는 가장으로 그려지고 있고, 그 대신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로 인해 반평생을 가슴앓이로 살아오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슬픈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갖는 주제의식 즉 용서와 화해의 미학에서 작품성과 주제 지향적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수필은 정의 문학이고, 수필의 주제 지향성이 인간성의 모습과 인간애의 정신을 밝혀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데 있다면, 이 작품은 그러한 수필이 보여주는 주제 지향성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여 경험을 재구성한 체험적 수필이 아니라 문학적 장치라는 법칙을 활용해서 사건의 전후 맥락을 플롯 차원으로 끌어 올려 서사적 구성미를 보여주었다는 데에도 작품성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서사적 사건이 중심이 되는 수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인과 관계를 제대로 구축해서 플롯을 짜는 게 중요한 일이다. 그 사건의 행위가 갖는 의미를 포착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성공하고 있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이기 때문에 천륜에 의해 자식은 무조건 아버지를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작품 구성이 제대로 짜이려면 용서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작중 인물들 또한 작가의 행동에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작가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측면에서 보면, 그 근거가 되는 두 가지 요인이 이 작품 속에는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 근거와 용서 /화해라는 결과를 바로 연결시키지 않고 이 작품을 이해해서는 제대로 수필의 맛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는 아버지가 가정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고, 부부라는 관계 속에서도 아내인 작가의 어머니에게 남편으로서의 그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작가는 아버지에게 낙제점을 주었지만, 대사회적 존재로서의 아버지는 고향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근본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작가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써, 또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도록 장치했다는 점이다. 이는 또 작가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이장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아버지를 새롭게 태어난 사람으로 믿고 인식하는 단서로 작용하고 있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포인트는 한국적인 '용서의 미학과 본질'을 읽어내는 데 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천륜의 정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한국적 정서와 사고의 일면을 잘 보여주었다는 데서 '화해의 미학'이 빛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용서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용서하기"다. 어머니의 삶을 구겨놓았고, 마침내는 교통사고로 돌아가게 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딸이 '이장'이라는 것을 계기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거두게 되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 보여주는 묘미다. 상여 뒤를 따르면서 "아버지가 미워요. 아버지가 미워요"하며 절규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얼마나 컸는가를 독자들에게 잘 전해주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워요, 미워요"라는 회화문이 가지는 질량감이다. 용서하지 못할 아버지를 두고 내뱉는 딸의 분노치고는 그 정도가 너무 약하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리 아버지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독한 마음을 먹지만, '밉다'고 밖에 표출할 수 없는 작가 역시 인정에 약한 한국인의 피를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다. 직설적인 이 인용문 하나가 수필문장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의 인간적인 모습, 약하고 여린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작가는 한 개인의 존재가 아니라 한국 여인이라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이해를 구축한다고 하겠다. 수필이 문학수필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긴장미도 있어야 되지만 무엇보다도 주제를 전략화해서 의미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주제를 전략화해서 의미화했는가? 뒤에 가서 문장론적인 측면에서 지적할 부분이 많겠지만 주제와 제재의 상관적 관계에서 '이장'을 생각하면, 이 글의 전반에서 '용서'라는 주제의식을 건져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발단 부분에서 주제를 문학적으로 함축하고, 비유를 써서 암시하려고 한 시도는 좋지만, "용서는 이렇게 해야 하리"하는 표현처럼 너무 작품의 주제를 주제의식의 구체화가 이루어지는 전개부에 앞서 직접적으로 드러내 버린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수필의 서두는 선명성과 암시성이라는 두 덕목을 기본적 속성으로 하는데, 이를 위해서 작가가 신경 써야 할 것이 주제의식을 서두에서 상상화하는 전략이다. 작가가 발단의 첫 단락을 비유적으로 처리한 점은 좋았으나, 접근 단계의 주제의식을 예고하는 부분에서 암시되어야 할 중심사상을 너무 직선적으로 처리한 것은 아쉬웠다. 이 작품이 단순구성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주는 이유는 증오를 화해의 구도로 풀어 가는 과정에서 작가가 보이는 감정 처리 방법의 세련됨에서 찾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충격적 소재의 도입으로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던 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장'이라는 제재 자체는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과 죽음이라는 관계를 평행선으로 관련시키면서 '용서'를 끌어오는 단서가 되고, 화자의 구체적 행동과 결과를 인과적으로 연결시켜 주기 때문에 문학적인 감동을 유발하는 것이다.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죽음과 사랑이라는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문제를 사랑과 배신이라는 구도 속에 우리가 풀어내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에 밀착시켜 죽음이 주는 상실감을 보다 리얼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노련한 수법 즉, 화자의 남다른 감성적 처방이 남달랐다는 데서 이 수필은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고 보겠다. 독자들에게 서정적 공감과 설득을 얻기 위해서는, 작가의 일관된 정서적 매질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또한 사건의 도화선이 되면서 흡인력이 되고 부력이 된다. 특유의 절제된 문장력과 비유는 흡인력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살아서 '어머니가 담낭거미였다'는 표현과 죽어서도 '어머니는 너무 쓸쓸했다'는 것에서 독자들은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충격적 소재인 이장 장면의 정서적 이격 거리를 좁혀주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위와 같이 한편으로는 직설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완곡하게 전개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작가의 정신적 반응에서 시적인 감흥과 소설적인 재미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 상징되어 있는 제목과 소재, 그 구성과 사건, 그것에 대한 정서적 표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소화하는 데 있어서 연상과 상상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수필의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은 사건 전개에서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묘사를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돋보였다. 이 수필은 현재의 시점으로 '이장'의 현장을 조명하면서 주제를 암시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상여가 나가던 날의 정서를 재현하여, 결말부에 가서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방법을 씀으로써 수미상관이 조화를 이루게 한 작품이다. 충격적인 소재와 치밀하게 계산된 의도로 이장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차분한 어조로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증오와 비련의 가족사를 아프게 그려낸 휴머니즘적 충격요법으로 이 작품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충격적인 소재와 이와 연관한 죽은 자의 주검을 거두는 장면을 현미경을 들이대듯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주제의식과 얼마나 연관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리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소재 자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제의식의 구체화와 관련하여 어떻게 다루었느냐가 관건이라 하겠다. III. 작품에 대한 부정적 측면의 고찰 - 문장비평을 중심으로 지금까지는 이 작품이 갖는 문학적 가치에 근거해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긍정적 측면에서 조명하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마냥 잘 되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문장론적 측면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으나 잠재력과 가능성이 보여 선정 과정에서 작가가 가지는 치명적 결점이 묻혀졌다는 점이 인정된다. 신춘문예 작품은 단순히 신인의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기준으로 뽑아서는 안 된다. 문학작품은 내용과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완벽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수필의 주제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덕목을 가치화하고 그 의미를 고양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학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문장이 문학의 기본적인 질서에 어느 정도는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결정적인 결점은 문장론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문장비평의 관점에서 지적할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사위원들이 이 수필을 주제 지향성 측면에서만 평가했다는 점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수필가가 되기 이전에 문장가가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필자가 심사를 했다면, 이 작품이 과연 뽑혔을까. 아마 필자라면, 아무리 작품의 내용적 가치가 인정되더라도 글을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안 된 사람의 이 글을 당선작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신춘문예에 도전하려는 작가라면 문단 구성 원리나 전개 요령은 필수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려는 사람은 수필가가 되기보다 먼저 문장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래 신춘문예 당선작은 온통 이상한 한국어로 차 있다. <신춘문예>의 신뢰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법에 맞지 않은 문장, 어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쓴 문장, 문맥이 서지 않은 문장,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문장 등이 여기저기 나타나 있다. 이런 문장은 작품 속에 녹아 있는 고귀하고 아름답고 중요한 의미를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독자들을 짜증나게 한다는 것이다. 어문 규정을 몰라서 틀린 문장은 거의 독자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지만, 깊은 생각 없이 어휘를 나열하는데 급급하거나 말하는 습관대로 쓰면 수많은 비문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문장을 음미하면서 필자는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모래를 씹는 기분이 들었다. 온통 상처투성이인 이 글 속으로 현미경을 들고 들어가 보자. (1) 우산 위에 이슬비가 맺힌다. 흘러내리지 못하는 끈적끈적한 마음들. 빗방울들이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미움 같다. 주름진 골 사이마다 숨어 있던 증오들이 비가 오면 되살아나 집착처럼 들러붙는 걸까? 우산을 턴다. 일시에 확 뿌리면 들러붙은 미움들이 한순간 사라진다. (2) 용서는 이렇게 해야 하리. 한 톨의 찌꺼기 남김없이, 천천히 등을 기대어 눈물로 젖었던 마음을 말리며 그렇게. '이것 쪼끔 살라고 그 고생을….'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아버지가 뱉은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치 아버지가 자신의 잘못을 다 고백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3)죽음 앞에선 대체로 사람들은 진실해지고 진지하게 마련이다. (4)그러나 나는 의심이 갔다. 아니 용서가 안 됐다. 위의 글을 보면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마음들'은 뒤에 서술격 조사가 생략되었다. 전통적인 문법 이론에 따르면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술어가 없기 때문이다. 주어가 생략된 문장은 있을 수 있지만 술어가 생략된 문장은 있을 수 없다. 이런 문장 아닌 불구 문장은 작품의 곳곳에 너무 많다. 물론 서술격 조사 '이다'가 없더라도 그것이 생략된 문장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장을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다만 이런 표현은 단순히 불구 문장이라는 오명 외에도 읽어 내려가는 과정에서 문장이 마무리되지 않기 때문에 읽는 흐름이 끊기는 약점이 있다. 문맥의 리듬을 끊어 놓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결코 좋지 않다. 정확하고 완전한 문장으로 수필을 쓰는 것이 옳은 일이다. '주름진 골 사이마다'라는 표현은 '주름진 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다.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문학 작품의 문장 특성이다. '들러붙는'은 뒤에 다시 '들러붙은'이 나오는 관계로 고급 문장이 아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다른 어구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2)는 접근 단계 부분인데, 주제의식이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되었고, (1)의 문장과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논리적인 연결에도 문제가 발견된다. 앞부분에 진술된 용서하기와 관련해서 (2)의 '천천히'는 모순적이다. 앞에서는 '일시에' 용서를 해야 한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시간을 두고'한다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어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었다'는 앞에 위치한 '마치'로 말미암아 '믿는 것 같았다'는 추측을 의미하는 서술어로 호응시키는 것이 좋겠다. '진지하게'는 '진지해지기'로 고쳐야 옳다. (4)는 문맥적으로 보면 (3) 앞에 바로 위치해야 연결이 제대로 된다. (5)어머니는 담낭거미였다. 풀잎 뒤에 고치를 짓고 그 안에 알을 낳은 후,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미들에게 몸을 뜯어 먹히는 어미의 몸.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돌아다니기만 했던 아버지 대신 닥치는 대로 행상을 하며 칠남매를 키웠던 어머니. (6)우리 칠남매는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뺏고 기생하며 자랐다. (7)당신 때문에 반평생 가까이 가슴앓이하다가 결국 버림받은 어머니. 내가 겪은 설움은 둘째로 치더라도 장삿길에서 죽음을 당하게 한 장본인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내가 그러지 않아야 어머니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특히 아버지를 잘 따르는 고향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희생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머니가 고향에 장사하러 갔을 때 몇 사람 빼놓고는 따뜻한 밥 한 번 대접해준 적이 없었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처자식이 혼합곡 한 되로 하루를 살아가고 납부금을 못내 진급이 어려워도, 아버지는 큰 소리를 치며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외상으로 대접하며 인심을 얻었던 거다. '어미의 몸' '어머니' 등의 말 뒤에 서술격조사를 쓰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단순한 어구의 나열로 보면 그만이지만 위 글에서 두 개의 어구는 그렇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심쩍다. 바로 앞에 문장이 있고, 그 뒤에 문장이 있으며 글은 한 곳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중간에 끼인 '어미의 몸'과 '어머니'는 단순한 어구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추측하건데 작가는 단순한 "주어 + 서술어"구조에서 벗어나 보고자 한 것 같다. '칠남매'를 연속 두 번이나 쓴 것도 문장을 차분하게 쓰지 않고 머리 속에서 나오는 대로 감각적으로 썼다는 증거다. '뺏고'의 의미상 주어는 있으나 '기생하며 자랐다'는 서술어의 의미상 주어는 없다. 이 문장도 비문이다. (7)의 '당신은'은 문단의 첫 문장이기 때문에 '아버지'로 바꿔야 된다. '내가~'부터 '앞섰다'까지의 문장은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의미가 혼란스럽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부정적 어미에 이어지는 부정적 어구 '그러지 않아야'와 마지막의 부정적 의미의 '느끼지 않을 거라는' 말이 한 문장 안에서 같이 병렬로 나열되어 쓰이다 보니,전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고 어구간의 논리적 호응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죽음을 당하게 한'의 주체가 되는 말이 없는 것도 문제되는 부분이다. '장삿길' 앞에는 '어머니를'을 넣어야 제대로 된 문장이 될 수 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논리적 호응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일정한 흐름과 배치되는 경우에 논리적인 호응이 안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라는 부사는 문맥상 적절하지 않다. '또한'이 훨씬 잘 어울린다. 어머니가 고향에 장사하러 갔을 때 동네 사람들 중 몇 사람만 밥을 대접한 사실을 두고 작가는 동네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밥을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 여기서는 차라리 '따뜻한 밥'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얻었던 거다'보다 '얻었다'고 하면 언어가 더 경제적이고, 간결해진다. (8)상여가 나가던 날은 단오 지난 하루였다. 어머니의 살 썩는 냄새가 났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보낸 고통스러운 세월과 한의 냄새 같았다. (9)'아버지가 미워요, 아버지가 미워요!' (10)거기 구경 나온 사람들은 '마르메 아제' 막내딸이 왜 그렇게 절규했는지 한 번쯤은 생각했을 게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속으로 운다는 걸 처음 알았다. 떼놓고 가려는 상여를 따라가는 동안 눈물이 말랐다. (11)똑똑히 보았다. 염을 하기 전 퉁퉁 붓고 일그러진, 시커먼 어머니의 얼굴, 관 위에 한 삽 한 삽 흙이 덮여지는 것을. 관 뚜껑을 덮기 전 금방이라도 반쯤 벌린 입에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내 이름을 부를 것만 같았는데…. 이승의 고통을 덮어주는 안식의 이불, 흙은 이승의 오물과 흉한 육체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여 순결하게 만들 것 같았다. 어쩌면 어머니는 진작에 이 흙냄새가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자식들이 등짐처럼 무거웠을 때가 한두 번이었을까. '단오 지난 하루였다'는 말은 문법에 맞지 않는다. '단오가 하루 지난 후였다'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어머니의 살 썩는 냄새가 났다'는 표현은 문장의 동기가 너무 전달에 치중한 것 같아 독자들의 거부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표현을 세련되게 했어야 옳았다고 본다. '고통스런 세월과 한'은 문맥적으로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 '세월'은 앞의 '보낸'을 받을 수 있지만 '한'은 '보낸'이란 말을 받기가 어색하다. 인용문이라고 해서 모두 줄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니다. 딸림 문장이 있으면 회화문을 독립시키지 말고 뒤 문장으로 이어주는 게 더 수필적인 분위기를 낸다. (9)를 인용문으로 처리하면 수필문의 품격이 오히려 떨어진다는 말이다. '생각했을 게다'는 구어체적이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절규'와 그 다음 문장의 '속으로 운다'는 말은 서로 논리에 맞지 않다. '떼놓고 가려는'은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모호하게 쓴 문장이다. '입에서는'은 '입으로 어머니는'으로 고치고, '흙 냄새가 그리웠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흙 냄새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로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같았는데...'로 끝난 앞 문장 다음에 또 '같았다'라는 문장이 이어지게 한 것은 세련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을 가정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남아있는'도 사실상 불필요한 말이다. 그것은 죽어서 하는 말일 때만 어울린다.
(12)어머니는 죽어서도 너무 쓸쓸했다. 갑자기 마련한 밤밭 아래 무덤자리는 북풍이 불었고 햇볕이 늘 들지 않아 추웠다. 떼는 얼마 되지 않아 씻겨가고 잔디들이 잘 자라지 않아 마음에 걸렸다. 봄이면 진달래꽃들이 피어 핏빛 한을 달래고 여름이면 살모사들이 드나들고 가을이면 투두둑 쥐밤 떨어지는 소리를 벗삼아 지내기를 십년. (13)제사를 앞두고 드디어 이장을 하던 날. (14)포클레인으로 봉분을 없애고 삽으로 관을 찾기 시작했다. 아직 많이 썩지 않았다. 작은아버지가 천을 찢고 작은 돌멩이 같은 왼쪽 발가락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순서가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것. (15)인조 마포에 싸인 시신은 박테리아가 쳐놓은 실로 거뭇거뭇했다. 그것들을 걷어내자 파마머리와 뼈만 남았다.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의치였다. 까만 두개골 사이에서 유난히 벌건 잇몸을 드러내고 있어 어머니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들과 동생이 달려들어 솔잎붓으로 뼈들을 털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난 펑펑 울음이 쏟아지지 않았다. 그냥 똑똑히 지켜보았다. 십년 전 마른 울음과 함께 어머니를 가슴 깊이 묻었던 그때처럼. '어머니는 죽어서도 너무 쓸쓸했다'는 표현도 비문이다. '어머니는'은 '어머니의 무덤가는' 또는 '어머니의 무덤은' 등으로 바꾸면 좋겠다. '마음에 걸렸다'는 말은 그 말을 받는 주어가 없다. 이 문장도 비문이다. 문학의 언어는 미적 경로를 거쳐야 한다. '살모사들이 드나들고'라는 어구는 아무리 수필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문학이지만 지나치게 사실적인 표현이다. 무덤 자리가 안 좋다는 것을 의미하려 했다고 보지만 시신에 인격을 부여하는 한국적 정서로 볼 때, 이는 너무 몰인정스럽고 정제되지 못한 어구라 하겠다.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다고 해서 문학적 진실이 전해지는 건 아니다. 문학적인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은 실감과 유리되고 보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내기를 십 년'이라고 해서 문장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지낸 지 십 년이나 흘렀다'로 해야만 된다. (13)은 아마도 작가가 강조하기 위해 문장도 아닌 어구 하나를 한 문단으로 처리했는데, 이는 대단한 잘못이다. 서술격 조사 '-이다'를 붙이고 (14) 문장이 이어지도록 했어야 옳았다. 그리고 (14)의 첫 번째, 두 번째 문장은 주어가 없다. 두 번째 문장의 주어와 첫 번째 문장의 주어가 다른데도 무차별적으로 주어를 생략했다. 문단의 첫 문장은 가능하면 주어를 생략하지 않는 게 좋다. '시작했다'는 어휘가 연속적으로 두 번 나오게 처리한 것도 그렇고, '아직 많이 썩지 않았다'는 문장에도 주어가 없다. '작은아버지가' 뒤에는 '관을 열어'라는 말이 삽입되어야 문장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진다.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인 '순서가 허트러지면 안 된다는 것'이란 표현은 문장도 아닐뿐더러 문맥의 흐름을 끊어놓아 딱딱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단락의 완결성에도 문제가 있는 문단이다. '실로'는 '실로 인해서'라고 해야 표현의도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걷어내자' 뒤에 걸리는 서술어는 '남았다'라는 말보다는 '드러났다'가 더 어울린다. '무엇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가 더 적확한 표현이다. '두개골 사이에서'에서 '사이'라는 말은 불필요하다. 아마도 작가는 두개골을 '두 개의 골'로 착각한 모양이다. '까만~'으로 시작되는 문장은 '까만 두개골에서 모습을 드러낸 벌건 잇몸은 어머니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로 고치면 더 좋은 표현이 된다. '울음이 펑펑 쏟아지지 않았다'는 표현에서 '펑펑'은 불필요한 말이다. 오히려 논리적 모순을 가져온다. 생략되어야 뒤에 나오는 문장의 표현 의도와 매치가 제대로 된다. '펑펑'이 있으면 '전혀 울지 않았다'는 뒷문장의 진술 의도가 희미해진다. (16)뼈를 모두 꺼내어 어머니의 모습으로 복원하니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만 관에 누워 있었다. 부러진 왼쪽 다리뼈와 13대가 된 왼쪽 갈비뼈가 돌아가실 때의 교통사고를 짐작케 했다. 외부출혈은 하나도 없었는데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17)그날 제일 바쁜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처음에 지켜만 보다가 어머니의 뼈를 들어내어 털고 난 후 가지런히 맞추었다. 시종일관 앞에 나서서 일을 지시하고 잔디를 밟아주었다. (18)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손길이 닿은 것은 실로 몇 년 만일까. 흐뭇했다. 아버지는 조강지처와 자식을 버린 십자가를 벗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조금이나마 인정받고 싶어서 한 위선이라 할지라도 나는 마음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아버지도 정말 눈물 흘리며 백배 사죄하고 싶었을 거라 믿고 싶었다. '누워 있었다'는 서술어보다는 '남아 있었다'는 표현이 더 낫겠다. 왜냐하면 다음 단락의 첫 문장의 서술어도 '누웠다'이기 때문이다. (16)의 밑줄 친 '어머니의 모습으로'는 불필요한 어구다. 굳이 다른 어구로 대체한다면, '원래 모습대로'가 좋겠다. '13대'라는 말은 '열 석 대'로 교체하는 게 좋을 듯싶다. 불필요한 숫자는 수필언어로 적합하지 않고 시각적으로도 거슬린 다. '교통사고를 짐작케 했다'는 말은 너무 생략이 심하다. '교통사고가 얼마나 끔찍했는가를'로 고쳐야 제대로 의미가 전달 될 것이다. '외부출혈은......' 문장도 너무 생략이 심해 독자들을 짜증나게 하는 문장이다. 생략할 수 있다는 것과 생략하는 것이 좋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다. 이 글의 작가는 독자와 작가가 기존 정보를 서로 공유할 때에 자연스럽게 생략이 일어나게 해야 하는데 아직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생략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게 상황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뒷받침 문장으로 보충했어야 했다. 그래야 문단의 완결성 원리에도 맞게 된다. (17)번 문단은 소주제문을 뒷받침하는 문장들이 충분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처음에는'으로 고치는 게 좋을 듯싶고, 그 뒤에다가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을'이란 어구를 '지켜만 보다가' 앞에 넣는 게 좋겠다. '어머니의 뼈를'이란 어구 바로 앞에 '관 뚜껑이 열릴 때부터'라는 어구를 삽입해야 문맥이 원활해진다. 이 문단에서 '시종일관'이란 어구는 전후 문맥상 논리적으로 어폐가 있는 말이다. 단어의 의미에 따라서 다른 어휘나 표현이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시종일관'은 한자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고 사용하여 의미적으로 모순된 결과를 가져온 예이다. '일을 지시하고 잔디를 밟아주었다'는 말에서 '-고'는 두 동작의 동시성을 나타내지 못한다. 따라서 한 주체가 동시에 두 동작을 하는 경우에는 '-고'를 쓰지 않고 '-며'를 써야 한다. '조강지처와 자식을 버린 십자가를 벗고'는 '십자가' 앞에 '죄의 대가로 젊어진'이란 수식어가 와야 문맥이 바르게 된다. 그리고 '십자가'는 어깨에 짊어지는 것이므로 이와 친한 동사를 써야 한다. '벗다'라는 말보다 '벗어 던지다'라는 말로 고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겠다. '응원을 보냈다'의 '응원'은 적절한 용어라고 볼 수 없다. '이번만은 진심으로 받아주고 싶었다' 정도로 표현했어야 옳았다. '싶었을 거라'는 '싶어하리라' 또는 '싶어한다고'로 고치는 게 더 적절하다고 하겠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믿고 싶었다'의 주어가 '아버지도'가 되어버려서 비문이 되었다. (19)어머니는 이제 양지녘 새 보금자리에 누웠다. 겨울이면 햇살마저 등 돌리고 허연 서릿발이 손톱 세운 듯 붉은 무덤가를 지켰는데 이젠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잔뜩 품었던 미움이 녹을 거다. 사실은 아버지에게 품고 있던 내 증오가 녹아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양달에서 내내 평안할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식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따스한 사랑을 누리는 것과 같다. (20)날 선 미움도 세월이 흐르면 녹이 슬고 끝이 무디어져 제 기능을 잃어버리는 걸까? 용서하지 않으려고 미움의 칼끝을 갈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사실은 나 역시 아버지에게 죄를 물을 수 없는 불효자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머니를 위해서 아버지가 용서가 안 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사춘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억울함, 그로 인해 겪었던 가난의 고통과 열등감을 어느 것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어 용서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애를 쓴 건지도 모른다. (19)의 '이제'와 '누웠다'는 호응이 제대로 안 된다. 행위동사보다는 정태동사를 써서 '누워계신다'로 해야 적당할 것이다. '손톱 세운 듯'이란 어구는 '허연 서릿발' 앞에 와야 맞고, '이젠'은 구태여 필요 없으므로 삭제해야 한다. 불필요한 부사다. 그 뒤에 나오는 주어 '어머니도'와 서술어 '녹을 거다'는 서로 호응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장에는 서술어 '녹을 거다'에 호응하는 주제어가 없다. '사실은'이란 부사는 여기서 '아니'로 대체해야 문맥이 제대로 통한다고 하겠다. '모습은'이란 어구는 '누리는 것 같다'와 호응이 잘 되지 않는다. '모습은'은 '누리는 사랑과 같으리라'로 해야 문맥이 통한다고 하겠다. '미움'이 '제 기능을 잃어버린다'는 표현도 어딘가 어색하다. 칼도 아닌 관념어인 '미움'이 무슨 기능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칼끝을 갈았던 것이'라는 어구는 '엊그제'라는 낱말과 호응이 되지 않는다. '것'을 '때'로 고쳐야 할 것이다. (20) 문단에서도 같은 단어인 '사실은'이 계속 반복된다. '죄를 물을 수 없는 불효자'라고 했는데, 구체적 정황이 없어 독자들은 이 문구를 이해하는 데 혼란을 겪는다. '아버지가 용서가 안 되는'은 구어적 표현이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는'으로 고쳐야 하겠다. '억울함, 그로 인해 겪었던 가난의 고통' 운운은 논리적 연결이 되지 않는다. '가난의 고통'이 '억울함' 때문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애를 쓴 건지도'보다는 '애를 썼는지도'가 더 적절한 말이다. (21)때 이르게 누렇게 물들어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 아버지를 향한 미움과 원망들이 비로소 빨리 물들어져야 할 때가 된 게 아닐까.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초조하다. 명절이나 생신 때조차 안부전화 한 통 하지 않는 야속한 막내딸이 문득 전화하고 싶어진다. 생신날 결혼 후 처음으로 사 보낸 옷을 받고 고맙다고 온 전화를 아주 어색하게 안부나 묻고 끊어버렸던 예전, 그래도 아버지는 기뻐하실 것 같다. (22)벌레 먹은 잎, 꼬부라진 잎, 구멍 뚫린 잎…. 내 속에 들어앉은 미움의 모습들. 엄마의 무덤을 옮기는 것처럼 내 안의 미움들을 도려내어 허공에 흩뿌린다. (23)물든 나뭇잎들이 못 참겠다는 듯이 팔랑거린다. 내 몸 깊숙이 우수수 나뭇잎이 진다. (21)문단에서 '초조하다'를 받는 주어가 없어 세 번째 문장은 비문이 되었다. 밑줄 친 '생신날'로 시작되는 문장은 대표적인 구어체 문장이다.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는 문맥상 '오늘만큼은'으로 해야 더 어울리는 말이다. (22)와 (23) 문단은 같이 결합되어 한 문단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23)의 문단이 (22)의 문단에 이어질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22)의 문단이 제대로 된 문단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뒷부분이 산만해지는 느낌을 준다. '미움'이란 단어가 앞에 나왔으면 다음에는 '미움'이란 단어보다 '증오'라는 동의어로 대체해야 고급 문장이 된다. '못 참겠다는 듯이'는 표현이 모호한 느낌을 준다. '깊숙이'는 '깊숙한 곳에서'로 대체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움을 도려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움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 쌓이게 된다는 의미로 바뀐다. '우수수 지는 나뭇잎'이 미움을 상징하고 있는 단어라면, '깊숙히'는 미움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되어 용서나 화해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증오를 묻어두겠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생략 대상은 광범위하고 그 방법도 독특하다. 생략해서 오해할 소지가 있을 경우에는 가능하면 필요한 부분을 모두 이야기해서 인식의 차이를 좁혀 놓아야 낭패를 면할 수 있다. 우리는 언어 생활에서 중요한 것들을 상대가 이미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믿고 생략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 습관은 곧바로 문장의 요소를 생략하는 데까지 미쳐 문장에서 상대가 알고 있는 것으로 믿는 성분까지 미련 없이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마냥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생략을 즐기다 보면 뜻밖에도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이제는 생략이 글을 쓰는 사람 위주에서 글을 읽는 사람 위주로 이루어져야 한다. 글을 읽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우려가 있으면 생략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언어의 본질인 '언어의 사회성'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생략과 압축, 즉 언어의 절제를 통해 간결미를 추구하려고 하였지만 너무 과감하게 필요한 어구를 생략해 버리는 바람에 이 작품은 뻐드렁이처럼 교정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문장의 뜻을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비일비재해서 중요한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IV. 나오며 -신춘문예 당선 수필의 허와 실 다른 백일장이나 문예지 신인상보다 신춘문예 수필은 심사의 엄격성이 요구된다. 2회 정도를 가지고 속단할 수 없지만 우려할만한 점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심사위원의 출신에 따라 신춘문예 당선자의 지역이 바뀌는 것은 심사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선된 작품에 큰 하자가 없으면 문제 제기도 필요 없고,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시는 우연의 일치라고는 하나 의혹의 눈길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정실의 문제가 개입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나누어 먹는다는 오명을 쓰고 있는 문학상도 아닌 신춘문예는 정실이나 이해 관계가 절대로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적어도 선량한 독자는 신춘문예의 권위와 순결성을 인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일부 예리한 비평가는 신춘문예 자체의 불공정성과 작품성을 문제 삼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문학가들이나 일반 독자들은 신춘문예 제도 자체에 상당한 신뢰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전국의 5대 일간지라는 부산일보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일개 변두리 지방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작품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면, 심사자와 당선자의 관계에서 보이는 묘한 인연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무리 사회가 어지럽고 공정한 잣대가 인연에 따라 춤을 출지라도 우리 지방의 유일한 부일 신춘문예의 명예만은 지켜질 수 있도록 심사위원들의 준엄한 양심에 따른 판단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다시 작품의 허와 실을 따져 보자. 작품 속에서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한의 뿌리를 어머니의 끈질긴 집요성에 기대어 증폭시켜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우선 모성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수필 속의 어머니는 그대로 전통적인 한국인의 어머니상이다. 희생과 헌신을 미덕으로 인고의 삶을 침묵으로 산 사람이라는 것이다. 풀잎 뒤에 고치를 짓고 그 안에 알을 낳은 후,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미들에게 몸을 뜯어 먹히는 거미 어미와 같은 존재인 작품 속의 어머니는 칠 남매를 위해 닥치는 대로 행상을 하며 자신의 몸을 던진 분이다. 자식들을 향하는 어머니의 그 집요성은 참으로 눈물겹게 읽힌다. 그저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자식들을 위한 일념으로 한 발 한 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며 쉬지 않는다. 모성애가 이처럼 극진하니 그 반대급부로서 딸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를 위한답시고 아버지를 더욱 증오하여왔음을 독자들에게 어필하려고 하였다. 작가는 증오를 화해의 구도로 풀어내는 과정에 있어서 남다른 감정의 절제와 형상력으로 제재와 주제의 상관성은 물론 의미화까지 소화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이 갖는 문학적 가치는 대상에 닿아 발생하는 자신의 정신적인 반응을 비유적 기법을 통해 구체화하고 감각화하면서 심상을 확대하고, 상징의 확장을 통해 관념으로 된 정서를 원형 이미지의 영상으로 나아가게 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문장론적 측면에서 보면 한마디로 상처투성이다. 이 수필이 갖는 가장 큰 문학적 가치가 이렇게 큰데 비해 기본이 안 된 문장력이나 서투른 문단 전개 요령은 이 작품이 가지는 한계요, 옥에 티다. 필자는 어떤 문장도 그것이 문장인 한 문장론에 따라서 비판받고 또 그에 맞게 적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문장은 문장 아닌 문장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 수필을 감상하고 나서 느낀 소감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떻게 이런 작품이 신춘문예 당선작이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장의 기본을 아는 작가가 이만한 소재를 만났다면 더 신선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수필의 언어는 일상 생활에 쓰일 때에는 지니지 않던 긴장된 질서를 갖추고 있어서 그 때문에 관심을 끌어야 한다. 문장은 수필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요소의 하나로 수필의 세 가지 맛 중에 하나인 손맛을 내는 결정적인 요체다. 맛을 내지 않고 쓴 글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아내가 양념을 하지 않은 반찬을 남편에게 내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은 대체적으로 중요한 체험적 사실 두 개, 즉 '상여 나가는 날'과 '이장하는 날'을 교차시키면서 전개해서 자신이 내건 주제의식을 전략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고급수필의 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서두에서 주제의식을 상상화해서 주제를 내면화하는 데 서투른 솜씨를 노출시켜 옥에 티를 남겼다.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문장이 통사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간접화법보다는 직접화법을 많이 활용해서 수필 문장의 격을 약간 떨어뜨린 것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고, 체언 종지형의의 문장 아닌 문장인 많이 써서 문맥의 흐름을 끊어 글의 중요한 문학적 속성인 탄력성을 저해한 것도 지적될 부분이다. 술어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문장을 불구로 만들어 놓은 것을 어찌 가볍게 봐주고 넘어가겠는가. 작가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독자에게는 완전하고 좋은 문장을 읽을 권리가 있다. 좋은 표현을 위해서는 문법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알맞은 어휘와 자기만의 기법을 동원할 일이지 만인이 지키게 되어 있는 문법을 지나치게 벗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겠다. |
첫댓글 수필 한 작품을 전신 해부하듯 낱낱이 파헤친 이 비평을 읽으면 무서워 글 못쓰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성과 문장력을 다 갖추면 금상첨화지만 흔히 보면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문장력이 부족하고, 문장력(어법)이 완벽한 사람은 감성이 부족해서 무미건조한 글을 쓰기 쉽죠. 어쨌든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되는 글입니다.
'흙 냄새가 그리웠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흙 냄새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로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말은 주어+술어도 물론 문장이 되지만 토픽+술어도 훌륭한 문장이 됩니다. 이 부분은 교수님이 잘못 지적하신 대목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 같은 소설은 인간 내면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내용이 전개되는데 이 글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또 문학의 첨병이랄 수 있는 시문학의 영향도 지나치게 받은 것 같고. 탄탄한 문장 위에 정서와 생각이 담겨야 한다는 지적은 당연하겠지요. 이 글은 글쓰는 이에게는 좋은 타산지석. 흘강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