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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문화
- 제주 의생활의 특성
지형적으로 고립된 여건과 박한 풍토라는 자연환경적 원인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수탈로 경제적인 빈곤뿐
아니라 문화교류의 단절과 문화의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특히 조선시대 이조와 순조까지
약2세기(1629~1830)에 '도민출육금지령(島民出陸禁止令)'은 인적교류와 문화의 단절을 초래할 뿐더러
페쇠된 고유성을 더욱 굳히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여건들에 의해 제주 고유의 의복형태들이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는 다른지역과는 독특한 노동복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노동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환경적 특성 속에서 살아가야 햇던 생활상은 물질문화라든가, 정신문화 특히,
문학이나 속담.노동요 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도민들은 박한 상황 속에서 생존의 방법과 의미를 터득했으며,
의식속에는 불우한 생활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극기심과 자립심을 생활신조로 세우게 되었다. 제주인
생계관(生計觀)은 천재지화인 삼재(風.水.旱)와 정치적 현실의 냉대 속에서 배고픔을 참아 내면서
삼무(無大門, 無盜賊 無乞人)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니,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면서 절약하고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을 스스로 키우면서 살아온 삶의 보상이었던 것이다.
1. 일상복
조선시대 1400말에도 "가죽띠와 미투리에 칡베옷을 입었다."고 1600초 에도 "가난한 자들이 추운 겨울철에
도롱이나 망석을 입고도 동사를 면했다."고 했다. 또,"무명 및 삼과 모시가 생산되지 않아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모자라므로 오직 해산물을 캐어서 생업하였으며, 부인은 치마가 없고 다만 삼새끼로 허리를 동이고
두어자 베로 새끼 앞뒤에 기워서 그 음부를 덮을 뿐"라 했다. '소중이' : 경제적이고 실용적이나,
양촌(농업위주인 촌락)에서는 "잠수들이 물질할 때 입는 옷"이라 하여 내놓고 입기를 꺼러했다.그러나
1900년 초부터는 차츰 소중이가 보편화하여 결혼할 때 장만하여 가기도 햇다. 치마여밈에 있어서도
"외쪽으로 여며야 양반"이라 했다.제주에서는 오른쪽("오른깍")으로 입었다. 그러나 이 논리는 당쟁의 소산으로
부녀자의 옷 입기에까지 파급되었던 한 가지 예였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1) 경상도의 일부지역과 제주도와
북한등을 제외한 전국에서는 '왼쪽여밈형'이다. '외쪽 양반론'은 노론이 지배했던 노론권 지역에서는
특히 강하고 남인권 지역에서는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1)
高富子 : <우리나라 婚禮服의 民俗學的 硏究> PP. 83 120,1989.
2. 노동복
(갈옷.잠수복.목자복)
1) 갈옷 (사진은 신혼부부가 기념으로 입고 찍은 사진)
갈옷의 형태는 여름용 한복인 적삼.고의.단속곳.몸빼에 감물을 들인 것으로, 이 옷들은 각기 '갈적삼',
'갈중이', '갈굴중이', '갈몸빼'라고 불렀다. 갈옷은 무명천에 감물을 입힌 옷이다. 7∼8월 사이에 풋감이
여물어가는 시기에 떫은 물을 짜내어 염색한다. 감즙이 고르게 다 들면 찌꺼기는 떨어내고 일단 초가지붕위에
얹어 하룻밤 이슬을 맞힌 후 옷 모양을 반 듯하게펴서 넌다. 말릴 때는 멍석이나 지붕. 잔디 위 편편한 굿에
너는데, 햇볕이 잘 들고 고이가 잘 통해야 한다. 열흘간 마르는 대로 계속 물을 적시면서 말린다.
(이 과정을 '바랜다'라고한다.) 바래기를 잘해야 붉은 황토 빛깔이 나고, 빳빳하여 풀을 먹인 옷처럼 된다.
햇볕을 잘못 쪼이거나, 장마로 인해 제대로 말리지 못하면 풀기가 죽어 후줄근하고, 빛깔도 거무튀튀한
흑갈색으로 되며, 견고성도 떨어지게 된다.
- 갈옷의 특징:
새옷일 때는 뻣뻣하고 색도 빨갛다. 이슬맺힌 풀밭에서 일을 해도 이슬이 스며들어 적셔지지 않고 물방울이
떨어진다. 좀 입다보면 부드러워지고 갈색으로 변한다. 낡은 것은 아기들의 포대기나 기저귀로 이용되고
더 낡으면 걸레로도 썼으며, 또 질기고 더러움이 덜 타므로 헌 바구니나 멍석. 푸대.가마니 등 떨어진 곳을
깁는 데도 이용되었다. (더러움이 덜 타고 늘 새옷 입는 느낌이어서 자주 빨래를 할 필요가 없다. 한벌이면
2년 정도 입을 수 있으며 일할 때는 몸에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시원하다. 거친 가시덤불이나 풀밭에서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먼지 흡착도 다른 섬유에 비해 덜하다. 제주 가옥마다 예전에는 감나무가 쉽게 눈에
띄었는데, 육지의 감과는 달리 직경 3∼4㎝ 정도로 작고 씨가 많기 때문에 식용보다는 주로 감물을 들일 때
사용하였다. 갈옷의 기원은 어부들이 낚시줄이나 그물테가 질겨지도록 염색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 잠수(潛女,潛嫂)복 물소중이
잠수(潛嫂)란 바닷물 속에서 미역.소라.점복등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말하며, '잠수복'은 이들이
수중작업('물질') 할 때에 입는 옷들을 말한다. '잠수복', '해녀옷', '좀녀옷'.'물소중이'.'소중이'로 부르고
있으나 불소중이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통칭되었다.재료는 무명이나 광목으로 하고 주로 흰색옷을 입었는데,
검정 물감이 흔해지자 19부터 검정물을 들여 입었다. 물적삼(상의)
3) 목자복(牧者服)
목자복은 추운 고지대의 기후 적응에 알맞은 짐승의 털까죽으로 만든 모자와 옷, 신발이용, 털은 밖으로
노출시키고 있다.모자는 '가죽감티'.'털벙것'.'정당벌립'.'대패랭이'등이있다. 몸에 입는 옷으로 겉에는
가죽두루마기와 '도롱이(雨依)가 있으며, 겨울에는 솜을 넣은 솜옷이나 누빈 바지 저고리를 입었다.
허벅지부터 다리에 '가죽발레'를 꿰었다.
- 일생 의례복
1. 출생의례복
1) 초생아 옷(출생~7일)
초생아 옷은 '봇뒤창옷'.'봇뒤적삼'.'베옷'.'삼칠일옷'.'베창옷'이라 했는데, 대부분 봇뒤창옷으로
통칭되었다. '봇'은 자궁이며, '창옷'은 홑옷이라는 뜻이다.
2) 백일.돌옷
생활이 여의치 못한 점도 있지만, 어른들에 대한 눈치와 "백일이나 돌 때에 상(床)을 차리거나 좋은 옷을 입혀서
호사시키면 질병에 걸리거나 단명(短命)한다"는 속설 등으로 하여 생략되었다.
3) 평상복
'물애기'(젖먹이)일 때는 아래에 입히는 옷은 없었다. 아기옷이나 '지성귀'(기저귀)는 어른들 헌옷이나 갈옷
헌 것으로 만드는 정도였고, 여름엔 발까벗겨 키우고 옷 한벌을 만들면 다 떨어질 때까지 입혔다. 그와
'지성치매'(두렁치마:배두렁이)였으며, 조금자라면 '강알터진 바지'(십자바지)를 입히고 '풍채바지'를 입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2. 혼례복
1) 새서방(신랑) 치레
혼례날은 일반인도 평생에 한 번 관복을 입고 관원으로 우대를 받을 수 있었다.
머리에는 사모(紗帽)를 썼는데, 겨울에는 방한용으로 목건()이나 '풍뎅이'(남바위)를 사모 속에 쓰기도 했다.
2)새각씨(신부)치레
새각씨는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괴팡'(고팡: 광)에서 단장했다. 새각씨를 단장해 주는 사람은 첫아들을 낳고,
부녀해로하고, 건강하여, 복덕과 수덕()을 갖춘 부녀자가 했다. 장옷을 입고 고부랑건지머리' 짚신이나
감악창신, 고무신을 신고 원삼과 족두리에 용비녀를 꼿았다.
3. 호상옷(사후의례복,저승옷)
"호상에는 명주가 최고"라고하며 명주와 삼베 외에 다른 직물은 철저히 금기 했다. 무명은 시신이 썩을 때
새까맣게 되고, 모시를 쓰면 자손들의 머리에 새치가 생기며, 화학섬유는 잡물질이 섞여 있어서 시신이
썩지 않기 때문이다. 호상옷은 윤년이나 윤달 또는 환갑을 기해서 자손들이 만들기도 했다. 갑자기 준비없이
상을 당했을 때는 손이 막히지 않는 날을 택해서 했다. 바느질 할 때는 매듭을 맺거나 상침질 뒷바느질은
절대로 삼가했다.
4. 상복(喪服)
상복을 '복옷'이라고 한다.
상을 당하면 "복입었다" 고 하는데 남자는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여자는 '대수장군'(大袖長裙)을 갖춘다.
이상은 <제주 민속학적연구>의 제 1장 의생활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제주도 주거문화
제주도 가옥은 육지의 그것과 는 사뭇 다르다. 마당을 중심으로 한 구심적 대칭형과 별동 배치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배경에는 무속신앙과 풍수지리, 기후에 대처한 요구, 이섬에만 있는 특이한 가족제도 등
여러 가지 문화적, 지리적 요인에 기인한다. 제주도 주택은 '-'자형 겹집을 기본으로 하여 분할식으로 평면구성을
하기 때문에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 안거리, 밖거리, 목러리등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로 구성해 나간다.안거리 한채와 부속채로만 이루어진 집을 외거리집이라 하고, 안.밖거리를
갖춘 두채의 집을 두거리집이라한다. 이 때 안거리와 밖거리는 마당을 중심으로 '='자로 마주보기도하고,
때로는 'ㄱ'자로 배치되기도 한다. 주택이 규모를 갖추게 되면 안거리와 밖거리 및 부속채의 목거리를 포함하여
3채 혹은 4채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밖거리 또는 목거리는 이문간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 특이한 가족제도
제주도는 육지와는 구별되는 가족제로로 아들이 결혼하면 안거리는 부모세대가, 밖거리는 아들세대가 산다.
또 일정기간이 되면 부모세대가 밖거리로, 자식세대가 안거리로 들어간다. 두 세대에는 정지, 장독대 등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침식과 생산경영을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주거단위를 보면 한 가족이나,
경제적 단위로는 두가족인 셈이다
- 구조
3간으로 한쪽은 구들(침실, 온돌 때는 방)과 고팡을, 가운데 칸은 마루방을, 다른 한쪽은 부엌으로 했으며,
여유 있는 집안에서는 주채를 4간으로 하고, 모커리(모에 있는 집)라 하여 3간집을 지어 사랑채로 이용하기도
했다. 빈곤한 집안에서는 2간 집을 지어 한 쪽은 구들과 고팡을, 한쪽은 부엌으로 사용했다. 대부분 밧집 (헛간)을
지어 중간에 나무를 이용한 칸막이를 하여 우막과 방앗 간으로 이용했다.
- 제주초가집의 특징
초가집 제주도의 초가는 과거 제주도 민간주택의 일반적 형태로서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가족구조및 그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건축물이다. 외부는 석축으로 쌓고 내부의 가름멱은 나무와 대를 이용하여 벽을 만들어
흙을 발랐는데,그 기본구조는 기둥, 귀틀, 보, 보짓, 내도리, 중보, 중마루, 상마루 등 뼈대를 나무로 만든 후
주위 벽을 굵은 돌로 쌓아 두루고 제주도 전역에서 자생하는 연한 갈대처럼 생긴 띠풀(또는 "새" 라고도 함)로
지붕을 덮은 것이다. 벽은 흙을 발라 붙여 돌담을 단단히 하고 지붕은 띠로 덮은후 직경 5cm의 굵은 밧줄로
바둑판 처럼 얽어 놓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태풍과 바람이 많은 제주의 기후조건에서 그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지혜로운 건축기술이라 할 수 있다. 지붕은 1년 또는 2년에 한번씩 덮은위에 다시 덮어 가므로 상마루선이
완만하고 부드러운 선을 이루게 된다. * 방에는 벽장이 있어서, 이불등 큰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다.
창문 - 창호지 문은 잘 뜯어지므로 그위에 무명천(?)같은 것을 한번 더 입혀 튼튼하게 사용. 대부분의 창문에는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적당한 부분에 창호지를 도려내서 유리를 붙여 사용했다.
- 제주도 시장
오일시장 :
제주도민들의 생생한 삶의 생기가 묻어나는 곳. 제주의 전통적인 시장형태의 하나인데 지역별(시,읍,면 단위)로
돌아가며 5일마다 한번씩(1일) 개장된다. 제주도에 오일장이 서는 곳은 열한군데이다.
오일장 날이면 상인들은 그날 팔 무우, 배추 등 채소류, 생선류, 한약재, 곡류, 신, 옷가지, 죽제품 등을 펼쳐놓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요즘도 오일장다운 맛을 풍기는 곳으로는 제주시장, 중문장, 서귀포장, 대정장,
고산장으로 볼 만하다. 제주시 오일장터는 공항남서쪽, 서중 근처로 장날때마다 이 일대가 사람, 차들로 붐빈다.
장서는 날 |
장 터 |
1,6일 |
대정, 성산,함덕 |
2,7일 |
제주, 표선 |
3,8일 |
중문 |
4,9일 |
서귀표,고성,한림 |
5,10일 |
세화,고산 |
제주의 미풍양속
제주의 집세 지불방법은 타 지역과는 사뭇 다르다. 타지의 사글세 와 비슷한 "죽어지는 세"이다.
삭월세는 매월 주인에게 집세를 지불하는 반면에 "죽어지는 세"는 일년 분을 미리 주인에게 지불하는 방법이다.
한꺼번에 많은 돈을 준비하느라 서민들은 허리를 졸라 매야 했고, 때문에 계를 이용하는 경향이 많았다.
- 신구간
이사나 집수리 등을 할 수 있는 기간으로, 보통 대한(大寒) 5일 후에서 입춘(立春) 3일 전까지의 일주일을
말한다. 신구간이란 옥황상제의 임명을 받고 내려왔던 여러 신들의 교대기간을 말한다. 즉, 신들이 승천한
틈을 타서, 인간이 이사나 집수리 등의 일들을 손보아도 아무런 탈이 없다고 믿는 기간이다.
- 영등굿
영등굿은 음력 2월달에 영등신에게 올리는제주 고유의 무속제이다. 영등신은 흔히 "영등할망"이라 부르는
신으로서 음력 2월 1일 제주를 찾아와서 같은달 15일에 떠나간다고 하며 특히 어촌에서 어민들의 해상안전과
해녀채취물의 풍요를 빌기 위하여 행하는 이 굿은 2월 1일에 영등신 환영제를 하고 2월 13일에서 15일 사이에
영등 송별제를 올린다. 이 기간동안에는 바다에 나가서도 안되며 지붕을 이거나 밭에 나가 김을 매어서도 안되는
여러가지 금기를 지켜며 생활의 풍요를 내려받기 위하여 영등신을 정성꼇 모셔진다.
이처럼 영등굿은 제주 특유의 신앙과 생활민속이 담겨 있으며 제주의 민속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제주도 지방무형문화제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참고문헌 : 濟州道廳 發行 " 濟州道의 文化財 ">
- 넋들라
아기가 경기가 있거나, 놀랬을 때, 혹은 이유없이 칭얼대거나 하면 "넋나다(넋나갔다)"라고 하며, 이럴 때는
보살을 찾아가서 그 넋(?)을 달랜는데 그것을 "넋드리러간다"고 한다.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않고, 위로의 소리를
하기도 하며, 침 놓는데, 신기하게도 넋을 드린후에는 아이가 순해(?)지며, 경끼도 사라진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