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이름은 역설적이다.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이름에는 내가 자라면서 되거나 이루었으면 하는 삶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지만 그것은 내가 직접 만들거나 동의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나 조부모의 것이다. 커서 덧붙여지는 두 번째 이름으로 자(字)도 있지만 이 또한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하여 집안 어른 같은 윗사람이 지어주는 것이어서 온전한 내 것이 아니라는 데는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을 즐겨 지었다. 바로 호(號)이다. 특히 스스로 지은 호, 즉 자호(自號)는 자신의 삶의 지향이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많이 선호되었다. 200여 개나 되었다는 추사(秋史)의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지만, 이른바 ‘서책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가 조금이라도 배어있는 사람이면 호 한두 개쯤 가지고 있는 게 일반이었다. 멋진 집 이름들, 탁청정, 후조당, 여유당 등 그런데 이 자호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다. 집 이름인 당호(堂號)를 자신의 호로 삼은 경우가 꽤 있다는 점이다. 안동 시내에서 도산서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천 군자리라는 전통한옥 밀집단지가 있다. 70년대 중반 안동댐 건설로 집들이 수몰되자 아쉬운 마음에 집안 사랑채나 별채를 하나씩 옮겨 조성한 광산김씨 예안파 문중의 근거지이다. 대부분의 한옥이 그렇듯이 이들 건물에도 당호 편액이 하나씩 걸려있는데, 하나같이 집을 처음 지은 주인들의 자호이기도 하다.
단지 내에서 가장 멋진 정자인 탁청정(濯淸亭)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민간 조리서 『수운잡방』을 지은 김유(金綏: 1491~1555)의 호이고, 대종택에 해당하는 후조당(後彫堂)은 김유의 큰집 조카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의 호이며, 옆에 나란히 있는 읍청정(挹淸亭)은 김부필의 동생 김부의(金富儀: 1525~1582)의 호인 식이다. ‘탁청정’은 ‘맑은 물에 씻는다’는 뜻으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시인 굴원의 시구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에서 따온 것이고, ‘후조당’은 ‘뒤에 시든다’는 의미로 “날씨가 추워진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안다”고 한 『논어』의 문구에서 차용한 것이다. ‘읍청정’ 또한 말 그대로 ‘청량한 자연을 움켜쥔다’는 뜻이니,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주인의 지향과 취향이 그대로 묻어나는 당호이자 자호들인 셈이다.
몸이 정신이 깃들어 사는 곳이라면, 집은 그 몸이 의탁하여 사는 곳이다. 따라서 집은 곧 제2의 몸이자 자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집을 어떤 구조로 어떤 기능에 비중을 두고 지었는지 또 어떻게 꾸미고 사는지 하는 것은 곧 거기 사는 이의 사람됨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집에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내가 사는 집이 마치 수인번호처럼 301호, 1207호 등으로 호명되는 것을 오히려 더 무람해 할 일이 아닐까? 내 병은 내가 안다. 과감하지만 생각이 없고 선을 좋아하되 가릴 줄 모르며, 마음 내키는 대로 이내 행하여 의심할 줄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다. 그만두어야 할 일도 마음에 들면 그만두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마음에 무언가 맺혀 걸린 게 있으면 결단코 그만두지 않는다. …… 이런 까닭에 선을 한없이 좋아하면서도 헐뜯음은 홀로 당하니, 이 또한 운명일런가? 내 타고난 성격 때문이니, 어찌 또 감히 운명을 말하랴! 『노자(老子)』를 보니, “신중하라[與兮]!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듯, 두려워하라[猶兮]! 사방 이웃이 나를 지켜보는 듯”이라는 말이 있다. 오호라! 이 두 마디야말로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니겠는가?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맵기를 뼈를 에이듯 할 것이니 피치 못할 일이 아니면 건너지 않을 것이고,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들의 살피는 눈길이 제 몸에 미칠까 저어하여 비록 아주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정약용, 「여유당기(與猶堂記)」)
남양주 마재에 있는 생가의 당호이자 자신의 자호 가운데 하나인 ‘여유당(與猶堂)’의 유래에 대해 다산 선생이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시대에 대한 사명감과 개혁에 대한 의지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살아오면서 또 그만큼의 오욕과 함께 했던 생을 되돌아보며 지은 집 이름일 터이다. 다산이 인용하고 있는 문구는 『노자』15장에 나오는 것으로, 요즘 보는 『노자』에는 대부분 ‘여(與)’가 ‘예(豫)’로 되어 있다. 옛날에는 두 글자가 서로 통용되었던 까닭인데, 옛 판본일수록 ‘여’로 되어 있는 것이 꽤 있다. ‘예(豫)’와 ‘유(猶)’의 뜻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고대로 올라갈수록 움직임에 머뭇거림이 많은 코끼리와 원숭이의 일종이라고 풀이하는 주석이 많다. 일을 미루거나 유보한다는 뜻을 지닌 ‘유예하다’는 말의 어원이다. 그러니까 다산은 이 당호를 통해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여유를 가지고 숨결을 고르는 삶을 지향하고자 한 것이다. 삶의 여유와 당당함을 위하여 당호는 집에만 붙는 것이 아니다. 요즘 개념으로 방에도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안동 하회마을에 북촌댁이라는 고택이 있다. 마을을 관통하는 중심로 북편에 위치해 붙은 이름이다. 이 북촌댁에는 세 개의 당호 편액이 걸려 있다. 안채로 통하는 입구를 사이에 두고 큰사랑과 떨어져 있는 작은사랑은 수신와(須愼窩), 큰사랑은 이 집의 공식 당호이기도 한 화경당(和敬堂), 곁마당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 본채와 떨어져 있는 건물 이름은 북촌유거(北村幽居)이다. 3대 동거세대에 비유하자면, 각각 아들과 주인과 주인의 아버지가 기거하는 곳이다.
명문가이므로 가문의 품격을 유지해나가기 위해서 안에서 밖에서나 주인은 온화한 도량과 공경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이끌어야 한다. 기거하는 방 이름이 ‘화경당’인 이유이다. 반면에 아들은 설익게 집안일에 나서기보다 아버지 뒤에서 묵묵히 다음 대 집주인으로서 자질을 갖추는 데 힘써야 한다. ‘수신와’ 즉 ‘모름지기 삼감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작은 움집’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주인의 아버지는 요즘으로 하면 현역에서 은퇴한 신분이다. 그러므로 집안의 대소사는 아들에게 맡기고 ‘그윽하고 조용한’ 곳에서 여생을 즐기는 것이 옳다. 바로 ‘유거’의 의미이다. 아이들 방문에 〈공부중〉이나 〈Be queit!〉라는 협박조(?)의 보드판만 달랑거리는 우리의 현실과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쌍무재(雙無齋)라는 당호를 쓴 적이 있다. 인수봉이 올려다보이는 서울 쌍문동 아파트에 살 때이다. 『논어』의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라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된다/안 된다’, ‘한다/ 안 한다’는 식으로 어느 한쪽을 고집하지 않고 중용을 취하며 살겠다고 한 공자의 발언 속에 들어있다. 전공으로 선택했던 장자철학의 분위기와도 상통하고 ‘쌍문(雙門)’이라는 동네이름과도 발음이 비슷한 점도 한몫했다. 하지만 시쳇말로 깜도 안 되면서 욕심만 과한 당호라 여겨져 이후 밀쳐놓았다.
당호가 꼭 거창하거나 유식이 넘쳐나야 하는 건 아니다. 이름인 이상 듣는 이에게 뜻이 어느 정도 전달만 되면 무방하므로 쉬운 한자말이나 아예 우리말로 지어도 좋을 것이다. 1년 전인가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다큐로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든 당호를 본 적이 있다. 원주에 사는 고진화라는 시인이 허름한 널빤지에 붓으로 당호를 적어 집에 거는 모습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불편당(不便堂)’이라고 적혀 있었다. ‘얼마간의 불편은 기꺼이 감수하고 즐기며 살 용의가 있는 사람이 사는 집!’ 얼마나 멋지고 당당한가? 상대적으로 일반사람들보다 당호를 접할 기회가 많은 직업을 가졌지만, 단언컨대 이보다 눈에 들어오는 당호는 여태 보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 통성명을 할 때 우리 모두 약간의 계면쩍음과 뿌듯함 속에, 무슨 직함만 수두룩이 적힌 한쪽에 ‘○○당(堂) 또는 ○○재(齋) 주인’이라고 큼지막이 쓰인 명함을 흔쾌히 내밀 수 있다면 삶이 덜 팍팍하지 않을까? 이웃에 심부름 갈 때마다 ‘608호’에 갔다 오라는 대신 ‘불편당’에 다녀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의 삶이 나중에 좀 더 풍요롭지 않을까? 언필칭 결실의 계절로 접어드는 이때, 눈을 내면으로 돌려 한 번쯤 자문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집 이름 있으세요?”
* 당호를 비롯한 우리의 편액 문화가 지니고 있는 이런 보편적 가치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편액 550점이 올해 5월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