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극 이론 또는 파괴-재창조 이론 |
||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 1:1) |
→ 창세기 첫째 장의 1절과 2절 사이의 막연한 시간 길이 |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창 1:2) |
하나님께서 창세기 1:3 말씀과 함께 재창조 과정을 시작하셨을 때, 창조의 모든 요소들은 문자 그대로이다. 그렇게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비유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각각의 24시간의 길이(“저녁과 아침”)는 정확하게 실제로 24시간 길이이다. 전체의 재창조도 역시 6일 동안 걸렸고, 하나님께서는 7일째 되는 날 문자 그대로 쉬셨다. |
만약 베드로후서 3:5-7 말씀이 노아의 홍수에 관해 언급한 참조 구절이 정말 아니라면, 이 구절은 틀림없이 창세기 1:2에 관한 참조구절이 될 것이다(왜냐하면 여기에는 단순한 논리로 볼 때 다른 대안이 없다). 또한 만약 베드로후서 3:5-7절 말씀이 창세기 1:2에 관한 참조구절을 의미한다면, 분명 성령님은 ‘젊은 지구(Young Earth)'를 주장하는 수많은 창조론자들에 의해 맹목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어떤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상기시키고 계신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은 아주 먼 과거에 창조했던 창세기 1:1에 언급한 영광스러운 옛 세상을 완전히 파괴하여 깊은 어둠 가운데로 던지셨고, 창세기 1:2이 말씀하는 시기에 전 우주적인 규모로 거대한 물들을 일으키셔서 맹렬한 홍수로 넘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절부터는 7일간에 걸쳐 다시금 하늘들과 땅을 회복시키시고, 오늘날처럼 인간을 포함해 살아 있는 창조물들을 이 세상에 다시 거주시키신 하나님의 방법을 연대기적인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첫 두 구절 사이에는 “시간 간극(time gap)”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간극은 다소 모호하게 선언된 면모가 없지 않으나, 단지 창세기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제1의 신비(mystery)이다.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시간 간극이 있다는 것과 그러한 시간 간격이 왜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은 실제로 창조에 관한 구절들이 말씀하는 바를 더 완벽하게 이해시킬 것이며, 지금까지 창조/과학 논쟁에서 서로 맞지 않았던 이론과 해석상의 혼란에 있어 더 분명한 길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베드로후서 3:5-7절 말씀이 노아의 홍수에 관한 참조구절이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성경적 단서들을 제시하겠다.
첫째 단서:
먼저 첫째 단서로 7절에 있는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과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고”란 두 문구를 서로 비교해 보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독자 스스로 이 질문을 해 보길 바란다.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을 때, 위의 있는 하늘들은 무엇이 변했는가? 땅 위의 홍수가 해와 달과 별들에 어떤 영향을 끼쳤던가?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아니요’이다. 노아의 날들에 있었던 하늘들은 아담의 날에도 있었던 같은 하늘들이었다. 즉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별들이었다.
사실: 노아의 홍수는 위에 있는 하늘들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노아의 홍수가 끼쳤던 모든 영향들은 단지 이 지구 위의 지표면과 대기에만 국한되었다. 비록 성경이 홍수 물을 쏟아붓기 위해 열렸던 “하늘의 창들”(창7:11)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구절의 전후 문맥을 살펴본다면 이는 분명 지구의 대기인 첫째 하늘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이 바로 비가 내렸던 곳이다. (여기서 명심해 두어야 할 점은 성경이 세 부분의 하늘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린도후서 12:2절을 찾아보라). 이에 대한 부분은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고”란 문구와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이란 두 문구 사이에서 대조되는 비교사항을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만약 노아의 홍수가 위에 있는 하늘들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만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이 구절은 분명 노아의 홍수가 아닌 다른 어떤 사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1:2절 말씀은 이에 대해 우리가 유일하게 찾은 다른 성경적 참조구절이라는 것이다.
둘째 단서 :
두 번째 단서로 땅이 물에서 나와(out) 물 가운데(in) "서 있는 것(standing)"이라 되어 있는 구절을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영어로 볼 때, 이러한 용어들이 문맥에서 언급된 특별한 물들이 지구 표면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제시한다. 성경은 지구의 일부가 이러한 물들 가운데에서 나와 있었으며(즉, 지구의 구면체가 부분적으로 물로 넘쳤었다) 그리고 물들이 있었던 대부분 위치는 지구 그 자체의 외부에 있었다. 성경은 지구가 이러한 특별한 홍수(흘러넘치는 물줄기 속에서 흔들거리는 공 모양의 고기잡이용 부표라 생각된다) 물 가운데에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구의 일부분이 물들에서 불쑥 나오고 있다는 것이지 단순히 지표면 위의 물들로 덮여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문자적 영어표현부터가 이미 지표면에 국한된 홍수 사건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태양계를 넘어서거나 그 이상으로 일으켜진 대홍수이다. (우리가 속해 있는 태양계와 대기권 밖의 우주공간은 세 개의 하늘들에서 두 번째 하늘에 속한다.)
마음속으로 이런 그림을 한번 그려 보길 바란다. 하나의 크고 어지러운 은하계가 엎질러져 있는 것처럼 그것을 통해 표면을 온통 뒤덮고 있는 물로 인해 어둡게 되고 파괴된 태양계를 생각해보라. 그것이 바로 창세기 1:2절에서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끄럽게 굽이치며 형태 없이 혼란 가운데 표류하고 있는 행성 지구를 상상해 보라. 어디서 이런 물들이 생겨났을까? 확증된 과학적 관찰에 의하면 죽은 별들이 많은 물을 일으켜 방출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우리는 다른 많은 참고자료를 통해 이에 대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옛적부터” 있던 하늘들에는 대단히 많은 별들이 있었음에 틀림없으며, 우주가 어둡게 되고 별들이 죽어가면서, 그때 우주 공간 어디에나 넘치는 물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 경우가 사실이었다면, 소멸했던 모든 별들은 현재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시 점화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정확히 말해서 넷째 날에 발생했다.
그러나 하늘들과 땅의 재건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은 우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물들을 대상으로 무언가를 하셔야만 했다(창 1:2). 그것이 바로 물들이 나뉘었다고 성경이 말씀하는 이유이다(창 1:6~7). 그리고 주 하나님은 그 혼란을 정리하시는 첫째 명령으로 빛을 비추는 사역을 시작하셨다(창 1:3).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들과 궁창 위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7)
창세기 이야기 구조의 밑바탕이 되는 해석이 바로 이것이다. 창세기에서 언급한 7일은 문자 그대로 24시간을 의미하는 7일이었다. 하지만, 그 7일은 세상 모든 것들의 최초 창조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창 1:1). 오히려 그 7일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상 이전에 있었던 신성하고 특별한 우주의 재생을 언급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창세기에는 두 가지 창조 사건이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창세기 1:1절의 단 한 문장에서 묘사된 사건이며, 나머지 둘째는 창세기 1:3절 부터 시작해서 7일간에 걸쳐 아주 상세하게 다루어졌던 사건이다. 창세기 2:4절 말씀은 그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창조하신 때 곧 이것들을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generations, 복수적 표현 주목)이 이러하니라.”(창 2:4)
다시 말해서, 성경은 단 두 번의 창조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오로지 후자의 사건, 즉 7일간의 창조 사건에 대해서만 아주 상세히 그 윤곽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첫 번째 창조사건은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보다 면밀한 연구와 탐구가 요구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오성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믿음을 요구한다.
창세기에 이런 (“간극이론”으로 더 잘 알려진) 파괴-재창조 해석은 20세기 초 근본주의 운동의 믿음의 근간을 이루는 창조 교리였다. 이 해석은 19세기 초 부터 주로 말씀을 전했던 스코틀랜드 신학자 토마스 찰머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찰머스보다 오래 전부터 이러한 견해를 붙들었던 신학자들이 있었다는 문서 증거가 있다.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창조론자들의 주장들과 반대로, 찰머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타협으로 과학과 조화시키기 위해 이와 같은 간극이론을 고안하지 않았다. 그런 간극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한 날부터 항상 성경 안에 존재해 왔다. 그러나 오직 신약 시대와 지구의 자연 역사에 관한 인간의 지식이 크게 증가된 이후부터 성령님이 인간의 눈을 여서서 말씀에 존재하는 그 간극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어 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한 지식을 얻게 됨을 통해 독자는 그 교리적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시작할 수 있다.
사도시대부터 중세 암흑시대를 거쳐 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하늘들과 땅의 나이가 6,000년에 불과하다는 교리가 교회와 학계 모두에서 인정된 정설이었음을 명심하라. 그때까지 땅(지구)의 실제 나이는 뜨거운 이슈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경이 대량으로 발간되고 지구가 오래 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늘어나면서부터 교회와 과학 사이의 포미(砲尾)가 되었던 것이다.
토마스 찰머스는 자기 이름을 걸고 그 당시 늘어나는 지질학적 진리로 인해 성경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는 거룩한 성경의 정확성에 대해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변론에 적합한 지질학적 사실들도 역시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알려진 관찰들의 진리를 깨닫기에 충분히 정직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로서, 꾸준하고 신실하게 성경을 수호하면서도 찰머스(와 다른 이들)는 창조 이야기 속 창세기 1:1과 1:2 말씀 사이의 시간 “간극”에 대해 관찰했다. 그리고 그는 다윈이 진화론이란 책을 발간하기 전 수년 전부터 그렇게 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었다는 이와 같은 사실은 진화론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받아들여졌던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지구에 대한 수용이 진화론에 대한 타협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역사적으로도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처럼 토마스 찰머스 및 종교개혁 이후 시대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사실은 이것이 거룩한 성경 구절을 통해 나온 향상된 계시를 보여주는 한 예라는 것이다. 즉 적합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의 과학 수준과 성경에 대한 이해 수준에 맞춰 시의 적절하게 다시 한번 성경 구절을 스스로 증명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시의 적절하게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믿음에 도전이 될 만한 과학적 발견에 대해서 신실하며 진실한 해답을 주실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제는 사람들이 거룩한 성경말씀의 무오성에 대해서 그 믿음을 포기해 왔다는 데에 있다.
전세계가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든 약 20세기 중반부터 찰머스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 진영이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는 지식으로 데려 오는 데 오랜 세월 기여해 온 보편적인 킹제임스성경보다 더 낫고 전 보다 더 진보된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영어 성경 번역본들이 많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현상을 깊이 연구해 보면 비록 본 연구의 범위를 넘어선다 할지라도, 오래된 권위역성경의 본문으로부터 이렇게 떠나는 현상이 근본주의 교회의 영성에 의미심장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때 이후로부터 창세기에 대한 이러한 파괴-재창조(간극 이론) 해석은 “근본주의 진영의 개집” 위치로 추방당하게 되었고, 신-창조주의자인 젊은 지구론자들이 주장한 창조 해석이 중심 무대를 대체해 온 것이다.
역사적인 회고를 통해 근본주의 교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진화론이란 거대한 파괴력이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학계를 성장시키는 대들보가 된 이후부터 근본주의 교회는 꾸준히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자기 보존이란 껍데기 상태로 후퇴했음이 관측되었다. 성경적 권위에 있어 그들의 가장 최고 원천이자 방어물이었던 킹제임스성경을 버리고, 지질학적 논쟁을 다루는 데에도 충분히 과학적으로 교육을 받았던 지적으로 정직한 사람들의 수가 함께 감소하였다. 결과적으로 근본주의 교회는 진정한 성경적 인식에서 있어 옛 지구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들을 효과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창세기의 정확성에 관한 논쟁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근본주의 교회는 교육을 받고 자라온 일반 대중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 또한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실은 근본주의 기독교계 내에서 오늘날에 보이는 것처럼 신-창조주의자들의 세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창조 과학”이란 향상된 새로운 이론으로 포장해서 낡은 전통주의에 감정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을 미혹시켜 왔던 호빈드, 브라운, 함, 기스 등과 같은 호전적인 젊은 지구 “창조과학자들”을 말한다. 신실한 자들은 이러한 “사악한 진화론자”와 “과학적 음모자”에 대항해 자신들의 믿음을 수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젊은 지구 창조론과 같은 금지된 파벌주의에서 이성을 제쳐놓고 확고하게 서 있을 것을 권고받고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동기와 의도가 그들 마음속에서 존경 받고 가치 있는 것일지 모르나, 반면에 그들은 자랑과 오만으로 가득 차서 지구(땅)의 오래된 나이(심지어 성경조차도)에 대한 어떤 합리성에는 자신들의 귀를 막은 채 성경의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랑스럽게 성경의 수호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 올바르게 구분된 성경 구절을 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한 독단적인 지배적 이론과 모순되는 오래 된 킹제임스성경이나 그러한 문제에 대한 어떤 성경 구절의 상이성을 비난하는 데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불행한 일 같지만, 이는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종파적인 신념과는 상관없이 창세기의 첫 구절이 진술한 바를 동의할 수 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
이 첫 구절에 관련하여 조차도 킹제임스성경이 하늘(heaven)이란 단어에서 복수를 뜻하는 “들(s)"이 생략되어 있다며 이 구절을 부정확하게 번역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킹제임스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비판은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간극 이론자들 중에서 일부 또한 창세기의 둘째 구절이 킹제임스성경에서 잘못 번역되었다고 주장한다.
“땅은 형태가 없고(되었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킹제임스성경에서 “없고(was)"라 번역된 이 단어는 “되었고(had become)”로 번역됐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자들이 있다. 물론 이 두 경우 모두 취지는 각각의 지지자로부터 킹제임스성경 본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들의 해석상 이론적 틀을 수호하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이 두 경우 모두 현명치 못하다. 우리는 킹제임스성경이 언제나 특정 선호하는 교리를 증명하려 노력하는 자들로부터 항상 도전받아 왔던 성경임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진화론과 조화시키려는 시도에서 창세기의 문자 그대로의 어법을 염두하지 않는 것도 현명치 않은 처사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로 알려진 어떤 창조론자를 양성하는 학교는 지구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생명은 창조주에 의해서 행동하도록 지적으로 설계되도록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창세기의 7일 해석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보면 그 ‘날’은 이론상 지구의 진화적 발전 진보에 어울리는 지질학적 시간을 나타내는 천 년 이상의 불확실한 기간이란 것이다. 하지만 킹제임스성경 어법의 문자적인 해석은 이러한 개념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발생하는 핵심적인 난제들은 아래와 같이 눈에 보이는 모순들의 조화를 요구한다.
① 지질학적인 증거나 화석 기록을 보면 지구의 나이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성경 연대에 의거해서) 어떻게 지구의 나이가 단지 6,000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일까?
② 지질상의 연대들로 판단해 볼 때 사망이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됨에도 불구하고(성경에 의거해서) 어떻게 사망이 약 6,000년 전에 오직 인간의 타락과 함께 시작했다는 것일까?
③ 수억 년 동안 인간과 유사해 보이는 피조물이 지구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성경에 의거해서) 어떻게 인간이 오로지 약 6,000년 동안만 지구에 있어 왔다는 것일까?
이러한 세 가지의 핵심적인 사실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창세기 이야기라면 그 어떤 해석도 충분치 않은 해석이다. 우리는 정말로 성령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에 귀를 기울고 있는가? 만약 여러분이 킹제임스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을 잃은 적이 없다면...
토마스 찰머스가 살던 시절 이후로 자연의 역사와 함께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었음을 보여주는 과학적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어 왔다. 반면에 킹제임스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믿음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해 왔다는 것도 동일하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새로운 성경 역본들의 출간도 폭발적으로 증가해왔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본서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창세기의 간극이론을 넘어서”란 제목의 본 연구를 통해 우리는 토마스 찰머스(와 그가 살던 시절이나 심지어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가 창세기의 간극에 관해 내놓은 초기 해석이 옳았음을 보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자연과학이나 지질학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믿음에 관한 많은 교리적 이슈들에서 발견되는 지질학적 증거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여러분이 여전히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무오성에 여러분의 믿음을 분명하게 둘 수 있다면, 여러분은 육신적인 이성을 소유한 우리를 계속 유혹케 만드는 난처한 질문들에 대해서 여전히 이 성경이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창세기 말씀 속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 중인 구절에 대해 사려깊고 논리적이며 비판적인 조사를 통해 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마치 성경에 없었던 것처럼 그럴 듯하게 얼버무리며 넘어간다. 길에서 무작위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해 보라. “하나님께서 첫째로 창조하신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러면 그때 90% 이상은 “빛”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빛을 어둠에서 나누사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니라.”(창 1:3-5)
성경에 의하면 “빛”이라고 그렇게 대답했던 90%의 사람들이 틀렸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 문법이나 상식, 또는 기초 과학을 한번 적용해 보자. 창세기 1:2로 돌아가서 이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길 바란다. 창조주간 첫째 날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거기에는 몇 가지 것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그것들은 대부분 아주 분명한데, 1) 땅(지구), 2) 물들, 3) 깊음, 4) 어둠 등 총 네 가지 이다.
이 넷은 이미 첫째 날에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빛은 하나님이 창조한 첫째 창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첫째 창조물은 바로 “하늘과 땅”이었다(창 1:1). 창세기 1:2 말씀은 “하늘과 땅”이 제일 먼저 창조되고 난 다음 어느 시점의 땅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1:3 말씀은 7일간 회복 과정의 시작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늘들과 땅”의 새로운 세대를 만드는 신성한 일이었다.
“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창조하신 때 곧 이것들을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이 이러하니라.”(창 2:4)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3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신 그 말씀은 빛의 초기 창조를 암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없으며, 빛을 켜거나 비추기 위해 단지 빛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할 뿐이다. 사실 빛을 위한 물리적 현상은 이미 창세기 1:2 말씀의 후반절에 있었다. 왜냐하면 시간, 물질, 공간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고, 빛은 공간과 시간상의 구조에서 통합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창조론자들은 그 당시 하나님은 첫째 날에서 제일 초기에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지구를 창조했다고 주장할 것이다.(또한 우리는 깊음이라고 불리는 물들과 공간, 그리고 시간의 개념에 대해서도 추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러한 주장에 대항할 만한 반론을 갖고 계신다. 아래의 두 구절들과 거기에 기록된 히브리어 단어가 갖고 있는 사전적 정의를 비교해 보라.
“이는 하늘들을 창조하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친히 땅을 조성하고 만들고 견고하게 하였으며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거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사 45:18)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위의 이사야 45:18 말씀에서 주 하나님은 원래부터 땅을 그렇게 황폐한 상태로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사야 45:18에서 “비어 있는(vain)”이란 단어와 창세기 1:2절의 “형태 없이(without form)"란 단어는 서로 같은 히브리어 단어(토우)에서 왔다. 단어 자체만으로도 이 두 구절을 올바로 구분해 볼 때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창조론자의 핵심 전제는 무너진다. 이사야 45:18절과 비교해서 창세기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처음에 형태가 없는 진흙 공과 같은 지구를 만들었다가 다음에 빛들을 밝히시고 장식했다는 견해는 부정된다.
이 구절은 분명하게 땅(지구)이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비록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채로” 지구 표면이 물들로 뒤덮여 있었다 할지라도, 가장 확실한 사실은 지구가 온전한 행성으로서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땅은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 이름은 지구였다. 액체 형태였는지 얼음 형태였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물의 존재는 이 행성에 대기와 같은 어떤 형태가 이미 갖추어졌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창세기 어디에서도 성령님은 지구의 지질학적 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지구가 지표면(지각), 맨틀(지각과 중심핵 사이의 층), 핵 구조로 완전히 나뉘어 있다고 가정해 보기로 한다. 먼저 지질 구조의 변화와 화산 활동 작용을 위해 열을 생산하는 맨틀 내 핵의 감소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지구의 핵 내에 있는 발전기는 이미 우주 공간으로부터 들어오는 치사율 높은 복사 에너지로부터 지표면을 보호하기 위한 자기장을 생성하고 있다. 그리고 우주 공간도 이미 거기에 있었다. 왜냐하면 지구가 24시간에 한 번씩(저녁과 아침) 지구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위해 어떤 공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모든 것들이 이미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현실적으로 지구가 젊다는 창조론자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이 “훅” 하고 세게 숨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지구와 우주공간, 그리고 시간과 많은 물과 같은 복잡한 것들을 단 한 문장의 언급도 없이 첫째 날에 모조리 만드셨다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가? 특히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한 것 때문에 그것을 하루라고 불러도 될까? 하나님은 완전하게 기록된 성경과 함께 그 모든 작업을 단지 나중에 또 다른 5일을 일하시면서 보내셨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다소 이치에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모세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강의 일부 동안 잠을 잤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이것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유일한 상식이자 논리이며, 진실한 성경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에서 7일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파괴된 어떤 것을 재건한 기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들의 새로운 “세대”였고, 그 세상은 이미 파괴된 지구의 어떤 상태에 관해 증언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을 재생시키셨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단순한 진리이다. 인간은 그분의 말씀으로써 하나님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창세기에 내포된 어떤 의미를 자신의 이해력으로 읽어 해석하는 범죄를 저질러 왔다.
땅(지구)에 남겨진 지질학적 역사(여담이지만, 이 역사 또한 하나님이 창시하셨다.)는 우리에게 이 행성의 나이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관찰이 옳음을 증명하고, 이러한 일들이 왜 그런지 성경적인 이유를 제공하는 성경적 해설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 파괴-재창조 해석이 정확히 그렇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처음에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고 말할 때(창 1:1) 특정한 시각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땅(지구)은 황폐한 상태로 발견되고 있고, 문자적으로 24시간이 하루인 7일의 시작을 위한 시간만을 주고 계신다. 정말로 그 시간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최근이다. 이러한 견지에서만큼은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의 주장이 아주 옳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파괴-재창조 교리에 근간이 되는 “간극”에 대한 경위이다. 정확하게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한 시간 간격이 길었는지는 어느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그 기간은 대부분 확실히 수십억 년 또는 그 보다 조금 짧은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간극은 거의 확실히 거기에 존재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완고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제시되어 있는 성경적 사실들을 여전히 거절한 채, 이러한 간극 교리가 진화론에서 요구해온 오랜 시간을 받아들이려는 성경 구절과의 타협일 뿐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제쳐 놓는다. 이것이 지구의 오래된 나이를 참작케 하는 어떤 성경적 사실이나 과학적 증거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다. 이것이 정당한 논쟁인가? 필자는 정말로 아니라 본다!
창세기 1:2에서 땅(지구)은 “형태가 없고 빈” 어둠 속에 있었다. 그때 땅의 표면 위에 살아 있는 어떤 존재가 있었다는 암시가 없다. 또한 그때는 대략적으로 약 6,000년 전이었다. 지금 여러분의 상식과 이성으로 판단해 볼 때, 만약 시간상 그 시점에 살아 있는 어떤 존재가 없었다면, 당시 이 세상의 생명 형태들로 진화될 수 있는 그 이전 옛 세상에서 살아남았던 것은 아무 것(인간이나 짐승, 물고기나 새, 나무나 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창세기 1:2이 갖는 문자적 그대로의 의미는 오늘날 살아있는 그 어떤 것(또는 어떤 사람)도 창조주간 7일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진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창세기의 창조주간의 날들 동안 만들어지고/창조되었다. 이것은 왜 “그의 종류대로” 또는 “그것들의 종류대로”란 특별한 문구를 사용하셔서 주님의 재생하신 작업을 묘사했는지 그 이유를 보여 준다. 이것은 오늘날 지구상에 살아있는 창조물이 현 세상 이전에 살아 있던 생물과 동일한 형태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암시한다. 혈통상 유전적 라인으로 볼 때 하나의 분명한 단절이 있었고, 고대 시기에 중단되지 않은 유전적 라인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전 세상에서 현 세상으로의 진화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19세기 초 토마스 찰머스가 창세기에서 간극에 관해 설교를 시작했을 당시는 찰스 다윈이 책을 출간하기 전이었음을 기억해라. 따라서 찰머스의 동기는 당시에 있지도 않았던 진화론에 대응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나는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왜 언급하지 않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하지만 위와 같은 대답은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충분히 전해진 적이 없다. 우리의 친구이자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이 부당하게 주장한 것처럼, 이 “간극 이론”은 진화론에 대한 타협이 아니라면, 지구의 오래된 나이와 창조주간 7일 이전에 옛 세상의 질서를 말씀하고 있는 성경적인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진리는 우리에게 그것이 모든 것들의 “시작”(창 1:1)이며, 이후 곧바로 지구의 고대 역사에서 발생했던 일을 이해시킬 수 있는 길을 가리키고 있고, 인류의 운명적인 대적인 사탄에 관한 기원과 배경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대재난과 대량 소멸에 관한 지구의 지질학과 화석 기록은 아주 먼 과거에 그가 최초로 타락했음을 보여주는 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지식은 우리가 진짜로 누구이며, 우리가 그 후에 왜 이곳에 놓이게 되었고, 우리가 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지를 이해하게 만드는 핵심진리로 직접 이끌게 된다. 이것이말로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이 감추기 위해 열심히 싸워왔던 성경적 정보의 진정한 몸체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빛이며 그분 안에 어둠이 없다(요일 1:5)고 말씀할 때, 여러분은 왜 창세기 1:2절에 어둠이 존재했는지 의아하게 여긴 적이 있는가? 사탄은 어디서 왔고, 언제 하나님께 대항했을까? 그는 에덴 동산에 있었고, 아담과 이브의 범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적이었다. 그런데 왜 창세기 말씀에는 그 피조물의 창조나 타락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도 없을까?(실제 그와 같은 언급은 이사야서와 에스겔서에서 발견되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상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천사들은 언제 창조되었을까? 만약 사람이 “천사들 보다 조금 낮게”(시 8:5절 참조) 만들어 졌다면, 그때 천사들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복음서에 등장하는 마귀들은 무엇이며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창세기의 이러한 “간극 이론(Gap Theory)” 해석은 성경에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진 않았던 나머지 부분과 지질학적 기록 내에 존재하는 많은 증거들을 기도를 통해 사려깊게 관찰하여 열어놓은 신비들이다. 이에 관련된 연구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모든 것을 밝힐 예정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끊임없이 바뀌고 있는 첨단 과학지식으로 인해 성경에서 비롯된 정보가 완전히 경시되고 있음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과학 이론이 모든 진정한 지식의 끝이라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그 반대로 사악한 진화론자들에 대항해 “믿음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건전한 과학적 증거를 멀리하고 거부하는 것도 동일하게 현명치 못하거나 어리석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즉 이처럼 그것이 모든 진리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에 대한 불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구하고 수호하기 위해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현재 과학적으로 이해하거나 전통적으로 내려온 믿음 체계 속으로 성경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먼저 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 그 자체가 문자 그대로 정의한 성경 본문이 실제로 말씀하는 바를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과 지구상의 지질학적 기록을 모두 기록한 거룩한 저자이시다. 둘 다 그분의 손에서 나온다. 이 둘은 모두 역사적이며 영적인 진리를 증거한다. 그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보존하신 것들에 대한 해답들을 알 수 있는 원리들과 물리학을 세우신 분이다. 또한 그분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한 권위의 원천이 되며, 그러한 대답이 정당성을 입증받도록 신실하게 인도하신다. 따라서 지질학과 창세기 사이에는 믿음에 있어 모순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믿음이다. 다만 모순은 그것이 과학적이든 성경적이든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 영역 내에서만 일어날 뿐이다.
자, 이제 한번 정직하게 생각해 보자. 공정하고 동일한 입장에서 볼 때 세상의 기원에 관해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받아들인 것을 찾는 것이 창조론이 결코 아닐 것이다. 성경상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에 반해 이 세상은 진화론과 세속적인 추론에 믿음을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한 주권의 초자연적 개입이나 실행은 오늘날 과학이 보여주는 방법으로 증명되거나 밝혀질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내 많은 교회들은 땅(지구) 속에 있는 역사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때로는 거룩한 성경에 기록된 간결한 용어조차도 거부하는 창세기 해석에 그 믿음을 두어 왔다. 진실로 문자적인 성경적 문맥이란 견지에서 지질학적 증거가 조사된다면, 올바로 나누어진 창세기 해석은 충분히 진리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원어로 된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성경 본문 없이도(원본은 더 이상 없고 오로지 다양한 사본들만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현대 학자들의 의견이나 모든 문제들에 있어 최종 권위로 신뢰할 만한 성경 번역본에 자신의 믿음을 두어야만 한다. 우리는 변명의 여지 없이 지금까지 영어 킹제임스성경이 믿을 만한 성경적 최종 권위라는 입장을 취해 왔다. 이 번역본은(그리고 하나의 번역본으로서) 한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 내에서 폭넓은 존경을 받아 왔었다. 또한 신실한 신자들의 회중 사이에서 이 성경은 여전히 신뢰받고 있다.
킹제임스성경 번역가들은 번역 과정에서 창세기 1:1과 1:2절 사이에 시간 간극이 존재한다는 이 교리에 대해 독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1611년 번역본에 두 가지의 난해한 원문 표시를 남겨두었고, 이는 다윈이나 현대 지질 과학의 토대가 존재하기 훨씬 오래 전인 거의 400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표시들이 더욱 최근에 발간된 영어 번역본들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당대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그 구절들이 히브리어 단어에서 “잘못 번역된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들의 주장처럼 그 구절들은 잘못 번역되었을까?
이처럼 잘못 번역되었다고 주장되는 두가지 “오역” 중 그 첫째가 아래의 두 구절과 관련이 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늘들과 땅과 이것들에 속한 모든 무리가 이같이 완성되니라.”(창 2:1)
창세기 1:1의 (단수의) “하늘”이란 단어와 창세기 2:1절의 (복수의) “하늘들”이란 단어는 둘 다 같은 히브리어 단어인 “샤마임(shamayim)”에서 유래한다. 현대 학자들은 창세기 1:1절의 “하늘”이란 이 단어가 복수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에 따라 새로운 모든 성경 번역본들은 창세기 1:1이 “하늘들”이라고 번역되었다. 기술적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옳지 않은 번역이다. 히브리어 동사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서 마치 복수로 되었을 때 “임(im)"으로 끝나는 히브리어 단어처럼 복수적 의미로 혼동되기가 쉽다. 그러나 ”아임(ayim)"으로 끝나는 이 단어는 “이중적”이라 불리는 매우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이는 항상(엄격하게 말해 복수라는 의미와는 달리) 정확히 두 개임을 묘사하지만, 그 두 개는 한 개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경우를 영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 벌의 바지”나 “하나의 안경”이라고 말할 때, 명사 끝에 “s"가 붙음에도 불구하고(정상적으로 하나의 복수 표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이러한 물건을 한 개 이상으로 결코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611년 권위역 성경의 번역자들은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 사이트 내에 있는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시면서 여러분들도 영어로 번역하게 된 그분들의 선택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간극 이론이라는 교리적 관점에서 볼 때, 그와 같은 표시는 7일간의 재창조 후 하나님이 새로운 세상 안에 설정하신 세 하늘들과 비교해 보면(하늘과 땅이 최초로 창조되었을 때였던) 옛 세상의 “하늘들”과는 하나의 구조적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사항은 이 사이트 내의 다른 글에서 더 상세히 밝히고 있으며, 최종 심판 후 요한계시록 21:1에서 발견되는 “더 이상 바다가 있지 않는”이란 모호한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 깊은 통찰력을 줄 것이다.
나머지 둘째 “오역”은 다음의 두 구절과 관계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창 8:1)
이 두 구절에서 킹제임스성경 번역가들이 선택한 영어 단어와 관련하여 정말로 대소동이 일어나는데, 특히 창조에 대해 설명하는 창세기 1:28절을 두고는 더욱 그렇다. 현대 학자들(그리고 대부분 지구가 젊다고 주장하는 창조론자들)은 히브리어 단어 “마레(male)”가 특히 히브리어 단어의 한 의미인 “채우다(fill)”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새로운 성경 역본들에서도 “채우다”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이 홍수로 파멸된 땅에 다시 거주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창세기 9:1절을 보면, 영어 킹제임스성경에 번역된 이 “replenish"라는 단어가 ”채우다“라는 뜻보다 더 정확한 영어 의미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킹제임스성경 번역가들은 창세기 9:1과 1:28 모두에서 “replenish” 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인데, 외견상 이는 번역가들이 각자의 신성한 임무에 있어 아담과 노아 사이의 상황적 유사성을 가리킨 것처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replenish” 라는 단어가 창세기 1:28절에 있었다면, 그때 아담과 노아 모두 거대한 파멸적인 사건 특히 홍수사건 이후에 황폐해진 땅을 ‘다시 채우라’는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주목할 점: 창세기 1:2에서 땅은 창세기의 7일 이전에도 홍수를 당했음을 기억하라)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노아 시대 홍수가 당시 세상에 내려진 심판이었으므로, 아담의 창조 이전 시대에 있었던 역시 홍수도 7일간의 창조 이전에 옛 세상의 질서 위에 내려진 심판에 대한 암시일 것이다.
“fill”이란 단어가 가장 적합한 표현이란 주장은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이 두 구절에서 히브리어 단어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닷물들을 채우고 날짐승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
이와 같은 사실은 대부분의 번역가들이 확실히 히브리어 단어인 ‘마레’의 의미 속에 내포된 미묘한 차이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시 창세기 1:28절과 9:1절의 모두 사용된 영어 단어인 “replenish"에 대한 설명을 위한 표시들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지금 만약 위와 같은 내용이 “간극 이론” 해석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상의 유일한 용례였다면, 건전한 교리적 근거로 볼 때 이는 정말로 매우 불충분한 증거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대로, 위와 유사하게 해석상의 문제들을 일으킬 만한 거룩한 성경 내 다른 문자상의 용어적 고려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예들 들자면, 성경적 단어인 “generations(세대들)”에 관한 문제가 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은 땅(지구)과 하늘들 또한 그것들 나름대로 “세대들”을 갖고 있다고 말씀한다.
“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창조하신 때 곧 이것들을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이 이러하니라.”(창 2:4)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시되”(창 5:1)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자기 세대에서 완전한 자더니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 6:9)
위의 세 구절 모두에서 “세대(generation)”라 번역된 ‘토레다’ 라는 히브리어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가족의 역사, 후손의 계열로 정의된다. ‘세대’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언제나 복수의 의미를 갖는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만약 하나님께서 딱 한 번 하늘들과 땅을 만드셨다면, 그때 세대들이란 용어는 당연히 단수여야만 한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본이나 킹제임스영어 번역본을 보면 모두 단수로 쓰여있지 않다.
성경 말씀은 창세기 1:2절에서 발견되는 파멸사건 다음 인간 세상을 위한 7일간의 창조 작업이 하늘들과 땅의 새로운 한 세대였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또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미래에도 행해질 것이며,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하늘들과 땅의 또 다른 세대가 있게 될 것이라 성경은 평이하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물을 새롭게 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벧후 3:13)
“보라, 내가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하니라. 그리고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아니할 것이며 또한…”(사 65:17)
지질학과 화석 기록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지구의 나이가 매우 오래되었으며, 창세기 1장에 기록된 7일 이전 보다 휠씬 오래 되었다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보존해 오신 증거이다. 또한 암석에 기록되어 있는 그러한 기록들은 옛 지구상에도 사망이 오랫동안 지배했었고, 전우주적인 파멸 사건으로 인해 옛 세상 질서가 종말을 맞이했음을 증언한다.
현대 지질학에서 남아 있는 가장 큰 신비들 중 하나는 인간 시대인 충적세(世) 바로 이전인 플레이스토세(世)라 불리는 최근 지질 시대에 발생했던 대규모의 파괴와 소멸에 관한 에피소드에 있다. 이러한 소멸 사건은 빙하 시대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전지구적인 대격변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는 부분적으로 단지 수천 년 전지구 전역에 생명의 대격변이나 갑작스러운 파멸 사건을 드러내는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된 거대한 “동물 공동묘지”가 있다. 이러한 증거는 19세기의 많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 선도하는 과학자들에 의해 대부분 무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 지배하고 있는 진화론적 패러다임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노아의 홍수에 관한 자신들의 증거로써 오히려 이러한 보고서들에 집착해 왔다. 그 반면 우리는 이러한 증거가 사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발생했던 전세계적인 소멸 사건인 홍수에 대한 증거이며, 정말로 창세기 1:2 이전과 창세기의 7일 이전에 지표면상의 모든 생명의 멸종을 가져온 전우주적인 대격변의 구성이라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본서의 여러 글들을 통해 이러한 증거를 제시하고자 하며, 성경적 시간표상에서 그 관련성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시간표는 이어지는 다음 주제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분명한 건, 만약 우리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창세기에 기록된 7일간의 우주적인 창조사건은 문자적으로 약 6,000년 전에 정말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문자적 어법과 지구의 지질학을 좀 더 살펴보면 그와 같은 이야기에 뭔가를 암시하는 사건이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 즉 창세기의 7일 창조가 이 세상 모든 것의 최초(기원적) 창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에 기록된 시간 간극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방대한 지식의 간극을 열게 만들 것이다. 여러분은 단지 이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이 갖고 있는 이해력이나 인간의 전통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그저 단 한 권의 책인 이 성경책만 신뢰하면 된다.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의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사 55:8-9)
본서 이전에 우리는 문자 그대로 기록된 성경 본문에서 실제로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성경은 스스로 성경적으로 정의된 용어들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이어지는 다음 글을 통해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써 성경적으로 정의되는 용어와 그 용어가 전달해 주는 개념상의 의미 차이를 다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학도라면 전통적인 가정들로부터 진리를 분별하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과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땅(지구)”과 “세상” 이며, 이 용어들은 서로 같은 의미가 아니다.
권위역 킹제임스성경은 특별한 의미와 문맥 속에서 자체적으로 해석하는 내장된 단어들과 사전적 정의들을 갖고 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사본들로부터 번역된 영어로 된 킹제임스성경 번역본은 66권 전체를 통합한 단일 성경이다.
영어 단어로 세상(world)과 지구(earth) 라는 두 단어는 성경과 영어상에서 서로 다른 단어들이며 명확하게 구분되는 개념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의미들은 성경의 문맥에 의해 정의된다. 그 차이를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어 보는 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창세기 1장의 창조에 관한 설명과 고대 지구를 보여주는 지질학적 증거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수의) 세상들(worlds)을 만드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이 아들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worlds)을 만드셨느니라.”(히 1:2)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worlds)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히 11:2)
이 두 구절에서 세상(worlds)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의미는 한 시대나 지구 표면상 시간 속에서 특정한 지배 조건의 영속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란 단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교리적 정의로 볼 때 외부 공간 속에 있는 다른 행성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시기 동안의 지배 조건들과 정의된 시대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지구”는 하나의 행성이다. 지구는 시간과 공간에서 구면 형태의 질량이다. “세상”은 성경적 시간에서 특별한 지점에 행성 지구의 표면상에 지배하는 특별한 일련의 여건들이다. 지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세상, 과거 세상들, 그리고 다가올 미래 세상(마 12:32, 막 10:30, 히 2:5절 참조)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지구는 그 자체로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은 하늘 안에 별들과 대지의 나무들, 사람들, 각 나라의 도시들, 그리고 지구 표면 위에 현존하는 사악한 세상 시스템 등으로 구성된다.
“칠십 년이 끝난 뒤에 주께서 두로를 돌아보시리니 두로가 자기의 몸값을 받는 일로 되돌아와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왕국과 음행을 벌일 것이로되”(사 23:17)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셨으니”(갈 1:4)
지구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나, 저주를 받았다(창 3:17~19 참조). 아담이 범죄했을 때, 6일 동안 이제 막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세상 즉 새로운 세상에 재생된 땅의 표면 위에 하나님에 의해 놓여진 아담의 “세상”에 사망이 들어왔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 5:12)
아담 시대에 새롭게 창조된 “세상”은 표면상으로 원래 그대로였다. 그러나 아담의 발 아래에는 지구의 퇴적된 암석들 속에 매장되고 감춰진 화석 기록이 있었다. 즉 이것은 지구 표면 위에 이전 세상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과 아담의 새 세상이 들어서기 전 과거 오래된 시대들을 거쳐 사망의 오랜 통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리적인 증거이다. 지난 2~3세기 이상 동안 사람들에 의해 오로지 과학적으로만 조사되고 이해되어 온 이러한 물질적인 증거가 지금은 이전에 창조된 세상(창 1:1)의 존재에 관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죽음 하에 놓였던 이러한 증거는 그런 이전 세상은 사망에 종속하에 있어 결국은 파괴되었고(창 1:2), 그 다음에 신성하게 현재의 세상으로 대치되었다(창 1:3-2:1). 훨씬 더 원시 초기에 그러한 고대의 세상은 루시퍼라는 덮는 그룹의 청지기직 아래에 놓여 있었다. 하나님께 대적한 루시퍼의 반란죄로 인해 루시퍼의 청지기적 지배하에 있었던 옛 세상은 처음부터 사망에 놓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죽게 되었다. 그 마지막 때에 지구의 태양을 포함한 옛 우주의 별들이 멸망했을 때, 물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어두움으로써 물들로 산화된 그 별들에 남아 있던 수소가 고대 창조 위에 마지막 희생자를 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이는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그들이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이로 말미암아 그 때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하여 예비해 두신 것이라.”(벧후 3:5~7)
옛 세상은 하늘들과 땅의 “첫 세대(generation)” 였다(창 1:1). 그 세상은 물들의 홍수로 인해 멸망당했다. 베드로후서 3:5~7절 말씀은 노아의 홍수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오늘날 노아의 홍수를 일부러 알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전의 홍수는 많은 사람이 일부러 알려 하지 않지만 창세기의 6일간 사건 이전에 발생했던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하늘들과 땅의 “둘째 세대”로 그것들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 1:3)고 말씀하셨을 때에 시작해서 문자 그대로 24시간이 하루인 6일 동안에 완성되게 되었다. 우리의 현재 땅(지구)과 하늘들은 옛 세상의 물리적 잔존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다시 일으켜졌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창조하신 때 곧 이것들을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이 이러하니라.”(창 2:4)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 전 우주는 하나님의 최초 창조의 재생산물이다. 그것이 지질학적 증거에 어울리는 영적인 현실이나, 지구가 젊다는 교리를 주장하는 창조론자들의 일시적인 운동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지구가 젊다고 주장하는 창조론은 우주 만물이 단 6,000년 만에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아담과 이브가 범죄할 때까지 지구 위에는 사망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로마서 5:12절과 출애굽기 20:11절 말씀들은 그 믿음을 수호하는 교리들로서 인용되는 “근거 구절들”이다. 그렇게 두 구절을 그들이 단순하게 해석함으로써 그들은 아담 이전에 사망이 있었다는 영적인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아담 이전 세상이 존재하지 않으니, 화석 기록과 빙하 시대의 모든 것은 노아의 홍수로 인한 결과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창조 과학”이라는 새롭게 향상된 포장 속에서 제시된 고전적인 낡은 창조론에 불과하며, 성경을 문자 그대로 엄격한 적용해야 한다는 요구를 흔든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벌써 본서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러한 요구는 정확하게 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 영적인 원리들은 66권 모두에 걸쳐 예외 없이 들어맞는다. 로마서 5:12절과 출애굽기 20:11절은 절대적으로 사실이지만, 오로지 하나의 교리적인 통일성으로 성경구절에 안에서와 성경 구절에 의해 정의될 때만이 완전한 진리의 문맥 가운데 사실이 되는 것이다.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분리된 어떤 것으로 이 구절에서는 “바다”가 땅(지구)으로부터 달리 언급되어 있다. 그 구절이 전후 문맥상에서 한정하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바다”는 창세기 1:6~8의 때에 놓여 있었던 궁창 위의 물들(또는 바다)로 마지막 심판 이후에는 더 이상 거기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음이라.”(계 21:1)
이와 같이 출애굽기 20:11절 말씀도 절대적으로 사실이다. - 이러한 현재의 하늘과 땅 그리고 궁창 위의 그러한 바다는 창세기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정말로 6일 안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출애굽기 20:11절은 모든 것들의 첫째 창조를 의미하는 언급이 아니다. 창세기 1:1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지 않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를 창조하셨느니라.”
로마서 5:12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니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창조론자들은 로마서 5:12절이 아담 이전에 그 어떤 사망도 그 이전의 어떤 “세상”도 없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증명한다고 완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에 언급했던 베드로후서의 말씀인 “그때 있었던 세상”이란 용어는 애써 무시하고 있다.
“이는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그들이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이로 말미암아 그 때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하여 예비해 두신 것이라.”(벧후 3:5~7)
로마서 5:12절과 베드로후서 3:5~7절 모두에서 “세상(world)”이란 용어는 그리스어 “코스모스(kosmos)"에서 유래하며, 그것이 로마서 5:12절을 적절한 문맥의 해석 내로 넣는 성경적 지혜의 샘이다. 우주란 코스모스(kosmos)는 노아의 홍수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다.(땅(지구)만 홍수로 범람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후서 말씀은 노아의 홍수에 대한 언급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세상” 이나 모든 만물 즉 우주의 질서의 파괴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그런 이전 세상에서 살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살았다.(그리고 범죄했다.)
아담의 죄는 그의(우리의) 세상 속으로 사망을 가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땅(지구)의 지질학이 아담 이전 오랫동안 이 행성 위에 오랜 고대의 사망 흔적 기록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로마서 5:12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망이 죄로 말미암는다는 성경적 원리를 이용해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아담 이전에 죄인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줄 것이다. 루시퍼, 사탄, 짐승, 사망은 이 현 세상 이전 보다 훨씬 오래 전에 그가 떨어졌을 때 고대 세상 위에 임했고 그땅 위의 화석 기록은 우리 행성의 고대 바위들 속에서(진리에 대한 물리적인 증거로써) 하나님에 의해 보전된 이러한 진리의 증거이다.
우리는 이어지는 지면에서 이러한 해석이 이단이 아니며 성경과 지질학적 증거 모두에 의해 지지받는 성경적 사실임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노아의 홍수가 실제였고 전지구적인 사건이었음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가 오늘날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퇴적암과 화석 기록을 위한 원천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주게 될 것이다. 홍수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과 창세기의 파괴-재창조 해석을 지지하는 지질학과 고고학적 기록들에 있는 간접적인 과학 증거의 토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 오랜 만에 보는 좋은 자료네요..
성경의 "replenish" 라는 "다시 채우라"는 단어를 억지로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여 마치 진짜 사실조차도 믿음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지구의 역사를 6천년으로 믿는다고 주장하는 분들을 보면...도대체 믿음이란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인가라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진실된 과학적 사실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성경과 일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성경이 중심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결코 위와 같은 내용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