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밖의 관광 명소(名所)들<2>
영월 향교(寧越 鄕校)
영월 향교(鄕校) / 어라연 단종 어소(御所) / 봉래산 별마로 천문대(天文臺)
영월읍내 영흥리에 있는 영월 향교는 조선 태조(太祖) 7년에 창건된 향교로 수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였던 곳이었는데 한국전쟁(6.25) 때 소실되어 다시 복원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본 건물인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그리고 향교로 들어가는 현관 건물인 풍화루(風化樓)가 우뚝 솟아있다.
그 밖에도 영월에는 수많은 관광지가 있지만 영월읍내의 북녘에 솟아있는 봉래산(蓬萊山) 정상에 있는 별마로 천문대(天文臺)는 어린이들의 천체관측 학습장으로도 좋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열월읍내와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흡사 전망대(展望臺)와 같은 곳이다.
단종(端宗)의 죽음에 대한 야사(野史)
정사(正史)로는 세조실록(世祖實錄)에 ‘노산군(魯山君: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고, 예절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훗날 기록된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사약(賜藥)을 가지고 온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차마 단종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자 하급 관원이 활 끈으로 목을 졸라 세상을 떠나보냈고 시신은 강에 버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는 야사(野史)는 사뭇 다르다.
사약이 내려오기 전 유배지 청령포에서 기거하던 단종은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고 관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외부 사람들도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월 호족(豪族)의 수장이며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는 강가에 나와 강의 흐름을 살폈는데 나뭇조각을 띄워보니 소용돌이에 휘말려 떠돌다가 얼마 후에 청령포 강안에 나뭇조각이 가서 닿아 멈추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시녀 한명이 나와서 강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 나뭇조각을 줍는 것이 아닌가? 엄흥도는 그날 저녁 어스름 녘에 작은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고기와 떡을 실어 보냈더니 시녀가 와서 냉큼 집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이따금 음식들을 실어 보내곤 했다.
그러다 사약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안타까워 밤에 몰래 배를 타고 건너가서 담장 구멍을 엿보다가 마침 시녀를 만났는데 단종께서 보신탕(補身湯)을 드시고 싶어 하시는데 마침 잘 오셨다고 한다. 구멍 속에서 단종을 말소리가 들렸다.
‘개가 있는데 잡을 수가 없으니 개목에 줄을 걸어 구멍 밖으로 내보낼 터이니 힘껏 당겨라.’
잠시 후 활 줄 두 가닥이 구멍 밖으로 나온다. 엄흥도는 줄을 잡고 힘껏 당겼는데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 담장에 발을 버티고 힘주어 당겼더니 마침내 담장 밖으로 나왔는데 바로 목이 졸려 숨이 끊어진 단종(端宗)의 시신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또 한 가지 이야기는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한밤중에 몰래 거두어 산속으로 암장(暗葬)하러 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눈 속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사람을 보자 사슴이 달아났다.
마침 사슴이 앉았던 그 자리는 눈이 없어서 그 곳을 파고 단종의 시신을 묻었는데 이곳이 바로 영흥리 동을지(冬乙旨) 산기슭에 자리한 현 단종의 능이 있는 ‘장릉(莊陵)’으로 천하의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산속에 암장되어 있던 단종을 꿈속에서 만나 암장되어 있는 장소를 알고 찾아낸 이가 바로 조선 중종36년(1541) 영월 군수를 지냈던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이다.
영월군수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단종이 서거한 후 영월군수로 부임한 군수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영월부 읍지(寧越府 邑誌)에 보면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에 부임한 박세호(朴世豪), 신축년(辛丑年, 1541, 中宗 36) 5월에 부임한 권수중(權守中), 같은 해 5월에 새로 부임한 연현령(延玄㱓) 등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다음으로 군수직을 제수(除授) 받은 김희성은 아예 부임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영월군수직은 비어있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관아 건물은 퇴락(頹落)하고 지방 관족(官族)들과 토호(土豪)세력들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도둑떼들까지 들끓어 백성들의 생활이 걷잡을 수 없이 어려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승문원교검(承文院校劍)으로 있던 박충원(朴忠元)이 영월군수직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승문원(承文院)-조선시대 문서를 관리하던 관청으로 교검(校檢)은 정6품
박충원(朴忠元)은 신축년(辛丑年, 1541, 中宗 36) 9월 초에 부임하게 되는데 병오년(丙午年, 1546, 明宗 1) 정월에 후임 민종건(閔宗騫)이 부임 할 때까지 약 5년 간 재임하였다.
박충원은 부임 첫날밤,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동헌에 불을 밝히고 앉아있는데 과연 혼령이 나타났다고 한다. 박충원은 혼령이 단종임을 알아보고 “전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이시나이까?” 하고 물으니 단종은 자신의 묘에 제사를 지내주면 큰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박충원은 관속(官屬)들을 풀어 엄흥도의 친척을 찾아내어 단종 시신이 묻힌 곳을 찾아 나섰는데 동을지산(冬乙支山)에서 가시넝쿨에 쌓인 단종의 묘를 찾아내어 봉축(封築)하고 제를 지냈다.
제문은 “왕실의 맏이요, 어리신 임금이시여, 비색(否塞)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 청산에 만고의 고혼(孤魂)으로 누워계시나이다. 바라건대 강림(降臨)하시어 제수(祭需)를 흠향(歆饗)하소서.”였다는 기록이 있다.
숙종 17년(1681)에 이르러 노산군은 노산대군으로 추봉(推捧)됐고, 숙종 24년(169)에 노산대군을 단종(端宗)으로 추상(追上)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