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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34권
7. 변현성품⑥
7.8. 도(道)에 관한 여러 이론[3]
4) 4증정(證淨)
각분(覺分)을 닦을 때 반드시 증정(證淨)을 획득하게 되는데,38)
여기에는 몇 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어떠한 단계에 근거하여 획득되는 것인가?
또한 그것의 실제적 본질[實體]은 어떠한 법인가? 유루인가, 무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증정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불ㆍ법ㆍ승과 계(戒)로서
세 가지 제(諦)를 관찰할 때 ‘법’과 ‘계’를 획득하며
도제를 관찰할 때 아울러 ‘불’과 ‘승’을 획득한다.
법이란 세 가지 제(諦) 전부와
보살과 독각의 도를 말한다.
신(信)과 계(戒) 두 가지를 본질로 하니
네 증정은 모두 다 오로지 무루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는 증정(證淨)에 모두 네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39)
첫째는 불(佛)에 대한 증정이며,
둘째는 법(法)에 대한 증정이며,
셋째는 승(僧)에 대한 증정이며,
넷째는 성계(聖戒)에 대한 증정이다.
바야흐로 견도위에서 세 가지 제(諦, 고ㆍ집ㆍ멸제)를 관찰할 때, 각각의 단계에서 오로지 ‘법’과 ‘계’의 증정을 획득하며,
도제를 관찰하는 단계에서는 이와 아울러 ‘불’과 ‘승’의 증정을 획득한다.40)
이를테면 고제를 관찰할 때 성자에 의해 애호[聖愛]되는 계(戒)와 법의 증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법에 대해, 어떻게 법의 증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오로지 고제(현실의 유위 苦果)에 대해 오직 법(法)만이 존재할 뿐 실체[實]로서의 유정(즉 자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통]달할 때, [苦法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을 낳게 된다.41)
이와 같은 순서로 집제를 관찰할 때에도 역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두 가지 증정을 획득하니, 오직 집법(集法)만이 능히 괴로움의 원인이 되며, [거기에 괴로움을 일으키는] 내적인 사부(士夫, puruṣa)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통]달할 때 [집법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을 낳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로부터 무간에 멸제를 관찰할 때에도 역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두 가지의 증정을 획득하니, 오직 멸법(滅法)만이 바로 진실의 열반임을 [통]달하여 성실히 좇아 추구[遵求]할 때 [멸법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후 도제를 관찰할 때에는 아울러 불(佛)과 승(僧)에 대한 두 가지 증정을 획득하니, ‘부처[佛]’가 상속하는 온갖 무학법에 대해 불증정(佛證淨)을 획득하고, ‘승가[僧]’가 상속하는 유학과 무학법에 대해 승증정(僧證淨)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울러’라고 말한 것은 도제를 관찰할 때에도 역시 성계(聖戒)와 법(法)의 증정을 획득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오로지 도법(道法)만이 멸법을 증득하는 원인임을 [통]달하여 성실히 쫓아 추구할 때 [도법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의 대상이 되는 법[所信法]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개별적인 것[別]이고,
둘째는 총체적인 것[總]이다.
총체적인 것은 4제와 통하고,
개별적인 것은 오로지 세 가지 제(諦) 전부와 보살과 독각의 도인데, 보살의 도는 오로지 유학의 법이며, 독각의 도는 유학과 무학의 법 모두와 통한다.42)
그리고 만약 무루의 믿음이 개별적인 법을 반연하여 생겨났으면 [그것을] 부잡연(不雜緣)이라 이름하며,
법에 대한 증정이 만약 [‘법’과] 아울러 ‘불’과 ‘승’을 반연하여 생겨난 무루의 믿음이라면, 이를 일컬어 잡연(雜緣)이라고 하는데,
[유학과 무학]법에 대한 증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가지 제(諦)를 관찰할 때에는 오로지 두 종류의 증정(法과 聖戒)만을 획득하지만, 도제를 관찰할 때에는 네 증정(앞의 두 증정과 아울러 佛과 僧증정)을 모두 획득하는 것이다.
도제를 관찰하는 단계에서는 불ㆍ법ㆍ승의 세 증정을 현전(現前)에서 바로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것들은 모두 현전에서 바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니, 도제를 관찰할 때 현행하는 것은 온갖 도제를 총체적으로 반연[總緣]하는 [증정]이기 때문으로, [도제를 관찰할 때] 바로 존재[現在]하는 것은 오로지 잡연(雜緣)인 법증정 한 가지뿐임을 알아야 한다.
[나머지 증정은] 이 같은 [법증정의] 세력에 편승하여 미래 여러 찰나에 걸쳐 [이에 대한] 믿음을 닦아 획득[修得]한다.
이 중에는 불ㆍ법ㆍ승을 개별적으로 반연하는 것도 있으며,
혹은 2보(寶)나 3보를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것도 있는데,
개별적으로 반연하는 온갖 증정은 세 가지 증정으로 일컬어지며,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온갖 증정은 법증정에 포섭된다.
그리고 도류지(道類智)의 찰나에는 여덟 지(智)를 닦았기 때문에 3제(諦)에 [따른] 법(法)과 계(戒)의 두 종류의 증정도 역시 획득하지만,
도법지인(道法智忍) 등의 세 찰나(도법지인ㆍ도법지와 도류지인) 중에서는 오로지 미래의 도제에 [따른] 네 종류의 [증정을] 닦을 뿐이다.
나아가 믿음의 대상[所信]이 다르기 때문에 그 명칭에 네 가지가 있는 것이지만, 실제적 본질[實事]은 오로지 두 종류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불(佛) 등의 세 증정은 신(信)을 본질로 하며, 성계(聖戒)의 증정은 계(戒)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오로지 두 종류뿐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일곱 갈래[支]의 계(戒)는 실로 [그 본질이] 오로지 한 가지라고 한다면, 어떻게 각분 중에서 [그것의] 실제적 본질을 열한 가지라고 한 것인가?
오로지 열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거나, 혹은 열여섯 가지, 혹은 그보다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43)
각분 중의 [계는] 신(身)ㆍ어(語)의 두 가지 업으로 차별되며,44) 아울러 그 상(相)에 차이(즉 신업의 세 가지와 어업의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정명(正命)의 한 가지 종류를 별도로 설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45) 신ㆍ어업을 떠나 별도의 체상(體相)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계에는 신(身)ㆍ어(語)의] 차별 상(相)이 있기 때문에 앞서 각분(覺分, 보리분법) 중에서 그것의 실제적 본질에는 열한 가지 종류가 있다고 논설하였던 것이다.46)
그리고 비록 신ㆍ어업 중에도 각기 다수의 업이 존재할지라도 그 종류(種類)가 동일하기 때문에 각기 한 가지로 설정한 것이니, 이는 4념주의 경우와 같다.47)
또한 앞의 세 증정(불ㆍ법ㆍ승)도 이를테면 혜(慧)와 신(信)으로 [차별될 뿐더러], 만약 그것이 부잡연이라면 소연의 차별에 따라 비록 다수의 종류가 존재할지라도48)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각기 한 가지로 설정하였으니,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논의하는] 증정 중에서도 신ㆍ어업의 성계(聖戒)의 상이 동등함에 따라, 아울러 계경 중에서 [그것들은] 다 같이 결여됨이 없고[不缺], 구멍이 뚫리지 않은 것[不穿]으로서 동등하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총괄하여 한 가지(즉 戒)로 설정하였다.
즉 [앞서 각분 중에서는] 신(身)ㆍ어(語)에 따라 업의 종류가 달라 둘로 나누었던 것이지만, [여기서는] 성계(聖戒)로서의 상이 동일하여 총괄하여 한 가지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각분에서의 계를] 두 가지라고 하든지 한 가지라고 하든지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증정’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인가?
참답게 4성제의 이치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증(證)’이라고 하였으며,
삼보(三寶)와 미묘한 시라(尸羅)를 올바로 믿는 것을 다 같이 ‘정[淨, 청정함]’이라고 말하였다.
즉 청정함을 증득함으로 말미암아 ‘증정’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으로,
‘올바로 믿는 것[正信]’은 바로 마음의 청정한 상에 포섭되기 때문에 ‘정(淨)’ 즉 ‘청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시라 [자체]는 청정한 상에 포섭되지 않는 것인데, 어찌 ‘청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네 가지 증정은 모두 다 청정한 상에 포섭되니, 불신(不信)의 더러움[垢]과 파계(破戒)의 더러움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네 종류의 증정은 오로지 무루이기 때문에 더러움을 떠난 것으로, 무루이기 때문에 ‘청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증정은 어떠한 연유에서 그 순서가 이와 같은 것인가?
나머지 세 가지(즉 法ㆍ僧ㆍ聖戒證淨)는 부처님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부처님에게는 올바로 설[正說]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증정을 제일 먼저 설정하였다.
올바로 설하는 공능은 법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증정을 두 번째로 설정하였다.
또한 법장(法藏)을 현관(現觀)하는 것은 오로지 성승(聖僧, 거룩한 스님)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증정을 세 번째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법장을 관찰하는 것은 능히 성계(聖戒)에 근거해야 하기 때문에 성계의 증정을 최후로 설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부처님은 바로 올바로 설하는 법사(法師)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먼저 불증정을 설정하였다.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어떠한 것도 애(愛)가 다한 열반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증정을 두 번째로 설정하였다.
누구를 위해 법을 설하였는가 하면 [4]향(向)ㆍ[4]과(果)의 승(僧)을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승증정을 세 번째로 설정하였다.
‘승’은 성계(聖戒)에 근거하여 비로소 설정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증정을 네 번째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 네 가지는 마치 길을 인도하는 이[導師]와 도로와 상인과 탈 것과도 같으니, 그래서 이러한 네 가지를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하였다.49)
5) 정해탈(正解脫)과 정지(正智)
① 무학의 정해탈과 정지
경에서 말하기를,
“유학위에서는 8지(支)를 성취하고, 무학위 중에서는 10지를 모두 성취한다”고 하였다.50)
유학위에서도 역시 정해탈(正解脫)과 정지(正智)를 성취하는데,
어떠한 연유에서 그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갈래[支]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나아가 정해탈과 정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학에는 계박이 남아있기 때문에
정해탈과 정지의 갈래가 없는 것으로
해탈에는 유위와 무위가 있으니
말하자면 승해와 번뇌의 멸이 바로 그것이다.
유위 중 무학해탈의 갈래는
바로 두 가지의 해탈온이며
정지는 각분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진지와 무생지가 바로 그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학위 중에는 여전히 계박이 남아 있어 아직 해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해탈(正解脫)의 갈래[支]가 없는 것으로, 약간의 계박을 떠났다고 해서 해탈자(解脫者)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해탈의 체성[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지(解脫智, 즉 正智)도 설정할 수 없다.
그래서 유학위에는 두 가지의 갈래를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각(覺, 즉 보리)이 생겨나는 것을] 돕는 수승한 작용[勝助用]에 근거하여 [정해탈과 정지라는] 갈래[支]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유학위에 있을 때에는 이미 계박이 남아있다고 하였으니, 비록 [번뇌로부터] 해탈한 일이 있을지라도 [‘각’이 생겨나는 것을] 돕는 수승한 작용은 존재하지 않으며, 수승한 해탈(즉 正解脫)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51) 그것의 수승한 지(智, 즉 正智)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갈래는 유학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무학은 이미 일체의 계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내적인 해탈에 근거하여 두 가지의 지(智)가 생겨났기 때문에,52) [‘각’이 생겨나는 것을] 돕는 수승한 작용이 존재할 뿐더러 이치상으로도 두 가지의 갈래(정지와 정해탈)를 설정할 수 있지만,
유학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여덟 가지 갈래(즉 8聖道支)만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를테면 유위와 무위가 그것이다.53)
유위해탈은 승해(勝解)를 본질로 하며, 무위해탈은 혹(惑, 즉 번뇌)의 멸(滅)을 본질로 한다.
전자(유위해탈)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는데, 이를테면 유학과 무학이 바로 그것이다.
즉 7성신(聖身, 예류향 내지 아라한향)에 근거한 것을 유학의 [유위해탈]이라고 이름하며,
여덟 번째 성신(즉 아라한과)에 근거한 것을 무학의 [유위해탈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는데,
오로지 유위[해탈] 가운데 무학의 [유위]해탈에만 해탈의 갈래(즉 正解脫)를 건립할 수 있으니,
혹(惑)이 멸한 무위해탈(즉 택멸)에는 더 이상 갈래[支]의 작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학의 유위해탈의] 갈래에 포섭되는 해탈에는 다시 두 종류가 있는데,
이를테면 시해탈(時解脫)과 불시해탈(不時解脫)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였다.54)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의 [해탈이] 바로 해탈온(蘊)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정해탈의 본질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정지(正智)의 본질은 말하자면 정견(正見)을 드러내는 것으로,55) 앞의 각[분](覺分)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바로 그것인데, 앞에서는 보리(菩提)라고 말하였지만, 지금 여기서는 [그것을] ‘정지’라고 이름한 것일 뿐이다.
② 무학이 정해탈하는 때
앞에서 말한 무학의 심해탈은 마음이 어떠한 상태[位]에 있을 때 바로[正] 해탈하게 되는 것인가?
미래라고 해야 할 것인가, 현재ㆍ과거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학의 마음이 생겨날 때
바로 장애로부터 해탈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
“최초의 무학의 마음이 미래에 생겨날 때 장애로부터 해탈한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56)
여기서 먼저 본론의 이 같은 문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미래’라고 하는 말을 설할 경우 마땅히 번거로운 중복[煩重]을 성취한다고 해야 하니, ‘생겨날 때[生時]’라고 하는 말만 설하여도 그 뜻이 이미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문답(問答)에 따랐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문자(問者)는
“무학의 마음은 어떠한 세(世)에 있을 때 바로 해탈을 획득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미래에’라고 답하여 말한 것이지만, 그것이 미래의 일체[세]와 통하는 것이라고 여길까 염려되어 다시 분별하여 ‘생겨날 때’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혹은 다만 마땅히 “생겨날 때 해탈한다”고만 말하였다면,
혹 어떤 이는 “‘생겨날 때’란 바로 현재이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미래에 생겨날 때’라고 말한 것이니,
현재는 바로 ‘이미 생겨난 때[已生]’로서 ‘생겨날 때[生時]’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무학의 마음이] 상속하는 것에 근거하여 ‘해탈’이라는 말을 설정하였다면,
일체의 미래[세]에 대해서도 다 ‘바로 해탈[正解脫]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최초로] 현행하는 때[行世]에 근거하여 ‘해탈’이라는 말을 설정한 것이라면, 오로지 ‘생겨날 때’만 ‘바로 해탈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
[본론(本論)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뜻을 별도로 나타내기 위해 ‘미래에 생겨날 때’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온갖 번거로운 중복의 말은 필시 별도의 뜻을 나타내기에 마땅히 그 이치를 유추하여 궁구[推究]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같은 뜻에 따라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글[文]의 뜻이 이미 충족되었음에도
다시 다른 말을 설하였을 경우에는
아무런 뜻도 없이 글만 있는 것이 아니니
별도의 뜻에 대해 생각하여 추구해 보아야 한다.
비록 이러한 상태(무학의 마음이 미래에 생겨날 때)에 존재하는 온갖 온(蘊)도 다 해탈을 획득할지라도 다만 “마음이 해탈한다”고만 설한 것은,
―그렇지만 [이러한 상태에서도 마음 이외 다른 온이] 결여되었다거나 감소ㆍ상실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심소 등은 마음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며,
마음은 잡염법이나 청정법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며,
비록 자아[我]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일시 ‘속박된 자’, ‘해탈한 자’ 등으로 가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이미 승의(勝義, 즉 마음의 해탈)를 설하였으니, 그 밖의 다른 것(심 이외의 4온)[의 해탈]도 이미 설한 셈이다.
혹은 이에 대해 비유의 법을 언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일법(一法)을 언급함으로써 그 밖의 다른 법을 유추하여 생각해 보게 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온갖 유학의 마음 역시 그것이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生位, 즉 生相位]에 [이를 때] 장애로부터 해탈할지라도,57)
본론(本論)에서 다만
“최초의 무학의 마음이 생겨날 때 [장애로부터] 해탈한다”고 설한 것은,
[번뇌를] 남김없이 끊고서 해탈을 증득한 것[無餘斷證解脫]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여기서는 오로지 순전한[純] 해탈에 대해서만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의 [유학의] 마음은 바로 자성해탈(自性解脫)로서 상속해탈(相續解脫)이 아닌 경우이다.
[이에 대해서도]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유학의 무루심과 무학의 세속심과 무학의 무루심과 그 밖의 세속심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순서대로 마땅히 4구의 차별임을 알아야 한다.58)
또한 여기서는 비록 [무학의 마음이] 막 생겨나려고 하는 찰나[正生刹那]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을지라도, 실제로는 미래에 [모든 찰나에] 다 해탈을 획득하니, ‘막 생겨나려고 하는 것’과 ‘생겨난 것’은 장애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세력에 의해 닦게 될 미래의 세속 선근도 역시 해탈을 획득하니, 청정한 상속에 근거하여 그것의 득(得)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론에서는]
“최초의 무학의 마음이 미래에 생겨날 때 장애로부터 해탈한다”고 하여 [‘생겨날 때’와 ‘미래’를] 중복하여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본론(本論)에서는 다시
“무간도(無間道)가 지금 바로 이미 멸한 상태[已滅]로 나아가려 하고, 아울러 해탈도(解脫道)가 지금 바로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로 나아가려고 하는 그때를 무학의 마음이 장애로부터 해탈한 때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59)
여기서 ‘무간도’라고 함은 금강유정(金剛喩定)과 [금강유]정의 권속을 말하는 것으로, 과거의 상태[過去位]에 임(臨)하여 ‘지금 바로’라는 말을 설정하였으니,
다음의 후 [찰나]를 ‘과거’라는 말(즉 ‘이미 멸한 상태’)로 시설하였기 때문이며,
‘이미 멸한 상태로 나아가려고 하는 때[趣已滅]’라고 함은 막 소멸하려고 하는 상태[正滅, 즉 현재]를 나타내니, 인접하는 다음 [찰나]에 반드시 ‘이미 소멸한 상태[已滅位, 즉 과거]’에 들기 때문이다.
‘해탈도’라고 함은 최초의 진지(盡智)와 [진]지의 권속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상태[現在位]에 임하여 ‘지금 바로’라는 말을 설정하였으니, 다음의 후 [찰나]를 ‘현재’라는 말(즉 ‘이미 생겨난 상태’)로 시설하였기 때문이며,
‘이미 생겨난 상태로 나아가려고 하는 때[趣已生]’라고 함은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正生, 즉 미래]를 나타내니, 인접하는 다음 [찰나]에 반드시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位, 즉 현재]’에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라고 하는 말은 [무간도가] 막 소멸하려고 하고 [해탈도가] 막 생겨나려고 하는 때[正滅生時]를 말하며,
‘무학의 마음’이란 최초로 진지(盡智)와 구기하는 마음을 말하며,
‘장애로부터 해탈한다’고 함은 오로지 번뇌의 장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색ㆍ무색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초래하는 업도 역시 그때 해탈의 장애[脫障]가 되기 때문으로, 이러한 업도 역시 아라한과의 획득을 장애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옛날의 여러 대 논사들은 모두
“업은 인(忍)과 불환(不還)과 응과(應果)를 획득하는데 지극한 장애가 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해석이 본론(本論)에서 말한 바로서, 경에서 [설한] 심해탈의 뜻에 대해 이미 해석한 셈이다.
③ 무학도가 장애를 끊는 때
[그렇다면] 도(道)는 어떠한 상태에서 장애를 끊게 되는 것인가?60)
게송으로 말하겠다.
도는 오로지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에서
능히 그러한 [무학심의] 장애를 끊게 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오로지’라고 말한 것은, [장애를 끊게 되는 것은] 도가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正滅位]에서이지 그 밖의 다른 상태에서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예컨대 생겨난 도[生道]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도[未生道]가 다 같이 해탈[의 도]이듯이,
[아직] 멸하지 않은 도나 이미 멸한 도도 다 같이 장애를 끊어지게 하는 도일 것인데,
어떻게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에서만 능히 장애를 끊을 수 있고, 그 밖의 상태(이미 멸하였거나 아직 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인가?
[경에서]
“도가 막 생겨나려고 할 때 바로[正] 장애로부터 해탈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도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직 해탈을 획득하지 못하며, 도가 이미 생겨난 상태에서는 이미 해탈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다 같이 정해탈(正解脫) 즉 ‘바로 해탈한다’는 말을 설정할 수 없다.
만약 도가 막 멸하려고 할 때[正滅時] 능히 장애를 끊지 못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후 찰나의] 도가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에 대해 ‘정해탈(바로 해탈한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막 멸하려고 할 때의 도가 능히 장애를 끊는 것으로, 전후의 상태(즉 이미 멸하였거나 아직 멸하지 않은 상태)에는 [장애를] 끊는 작용이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도도 역시 해탈[의 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막 생겨나려고 하는[正生] 도’와 ‘생겨난[生] 도’는 장애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간을 현견하건대, 수로(水路)를 열 때 [그것과] 가까이 있는 물도 멀리 있는 물도 다 같이 장애를 떠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능히 혹(惑)을 끊는 도가 소의신 중에 이미 생겨났으면, 역시 마땅히 가까이 있는 마음도 멀리 있는 마음(즉 아직 생겨나지 않은 마음)도 다 같이 해탈을 획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예컨대 최초의 무학의 마음을 바로 일으키고자 하여[正起] 그것의 정생(正生)을 획득할 때(다시 말해 최초의 무악의 마음이 막 생겨나려고 할 때)를 정해탈(正解脫)이라고 말하듯이,61)
이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무학심의] 종류로서 미래에 닦게 될 무루심 등도 생기를 획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으로, 결정코 생겨나지 않은 법[不生法]도 ‘바로 해탈을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하물며 당래에 생겨날 것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여기서 설한 ‘바로 해탈한다[正解脫]’는 말은 이미 해탈[已解脫]한 마음이 지금 바로[正] 해탈을 획득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설을 어찌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미[已] 해탈하였다’는 말은 자성해탈(즉 각각의 택멸)에 근거한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의 ‘[정]해탈’이라는 말은 ‘장애로부터의 해탈’에 근거한 것으로서, 관점[所望]이 각기 다른데 어떠한 뜻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인가?
혹은 ‘이미 해탈하였다’고 하는 말은 본유(本有)의 해탈에 근거한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의 ‘[정]해탈’이라는 말은 소의신 중에 현행하는 순간[行世]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앞서] 말한 바에는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다.
[그렇다면] 현행하는 순간[行世]의 모든 이는 다 [바로] 해탈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요컨대 부지런히 노력하여 장애가 생겨나는 것을 파(破)한 자만이 [바로 해탈한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바로 해탈하는 때에도 역시 ‘마음이 이미 해탈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니, [정해탈의] 자성은 ‘이미 번뇌의 장애를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치상으로도 필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니, 해탈도(解脫道)는 [더 이상]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 상속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이미 장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마음이] 이미 해탈하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막] 현행하는 순간(최초로 일어난 순간)이기 때문에 ‘지금[今] [바로] 해탈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앞에서] 설한 바는 서로 상위하지 않는 것이다.
④ 정해탈 할 때의 마음62)
경에서는
“마음이 탐으로부터 지금[今] [바로] 해탈을 획득한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말한 해탈의 뜻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마음으로 하여금 탐과 상리(相離)하게 한다(다시 말해 상응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탐의 자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마음을 반연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즉 마음을 ‘유탐(有貪)’이라고 말한 것은, [마음이 탐과] 상응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탐의] 연이 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탐의] ‘득’에 따르는 것[得隨]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탐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탐’이라고] 하였다면, 오로지 염오심만이 해탈을 획득한다고 말해야 하지만, 이는 곧 자신(즉 유부)들의 종의에 위배되니,
“이탐(離貪)의 마음이 해탈을 획득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이러한 법(예컨대 마음)이 그것(예컨대 ‘탐’)과 상응하는 것이라면, 필시 이것으로 하여금 그것을 떠나게 할 수도 없어 마음은 필경 탐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약 [탐의] 연이 되기 때문에 [‘유탐’이라고] 하였다면, 마땅히 염오심도 역시 해탈을 획득한다고 해야 하지만, 이치상
“탐과 상응하는 마음을 일컬어 [심]해탈이라 한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탐의 자성이 만약 이러한 마음을 반연하는 것이라면, 잠시라도 반연하지 않거나 [마음 이외] 다른 것을 반연하는 일도 없을 것인데, 어떻게 [경에서] 마음이 그러한 탐으로부터 해탈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탐의] ‘득’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유탐’이라고] 하였다면, 마땅히 유학의 마음도 역시 유탐(有貪)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탐의 ‘득’에 따른 상속에 의지하여 현기(現起)한 것이기 때문이다.(이상 해탈할 때의 마음에 대한 난문)
이에 대해 정리론자(正理論者)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오로지 이탐(離貪)의 마음만이 지금 [바로] 해탈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유탐(有貪)과 이탐(離貪)의 두 종류 마음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마음으로서 만약 탐과 상응하는 것이라면 ‘유탐의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만약 상응하지도 않을 뿐더러 역시 또한 탐의 동류인도 되지 않는 것이라면 ‘이탐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유치(有癡)의 마음과 이치(離癡)의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이탐의 마음이 해탈을 획득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즉 해탈은 오로지 불염오심에만 설정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염오심에는 모두 네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루의 [불염오심은] 선과 무기로 나누어지고,
무루의 [불염오심은] 유학과 무학으로 나누어진다.
[이에 따라]
“이탐의 마음이 지금 [바로] 해탈을 [획득한다]”고 말한 것에서,
‘지금 [바로] 해탈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행세(行世, 현행하는 순간의 해탈)와 상속(相續)이 바로 그것이다.
즉 [해탈을 획득할 때의 마음이] 온갖 유루심(즉 선과 무기)인 경우, 일체의 [해탈은] 모두 다 상속해탈(相續解脫)로서 존재하며,
가행에 의해 획득된 것[加行得]이라면 이와 아울러 역시 행세해탈(行世解脫)로서 존재한다고도 인정한다.
그리고 [해탈할 때의 마음이] 온갖 무루심인 경우, 일체의 [해탈은] 모두 다 행세해탈로서 존재하며,
무학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이와 아울러 역시 상속해탈로서 존재한다고도 인정한다.63)
⑤ 단(斷)ㆍ이(離)ㆍ멸계(滅界)와 무위해탈
예컨대 계경에서는
“3계(界)가 있으니, 이를테면 단(斷)ㆍ이(離)ㆍ멸계(滅界)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설하였다.64)
이것은 앞에서 설한 두 가지 해탈(유위ㆍ무위해탈) 중 무엇을 본질로 하며, 이와 같은 3계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위해탈을 3계로 설하였으니
이계(離界)는 오로지 탐을 떠난 것이며
단계(斷界)는 그 밖의 결을 끊은 것이며
멸계(滅界)는 그것의 계박을 멸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단(斷)’ 등의 3계는 바로 앞에서 논설한 무위해탈을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그것을 그 자체의 본질로 삼는다. 즉
3계 자체는 가[설](假說)에 근거할 경우 차이가 있지만,
만약 실제적인 실체[實事]에 근거한다면 어떠한 차별도 없다.65)
무엇을 일컬어 “가설에 근거할 경우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탐결(貪結)을 떠난 것을 일컬어 ‘이계(離界)’라 하였으며,
그 밖의 8결을 끊은 것을 일컬어 ‘단계(斷界)’라고 하였으며,
그밖에 ‘탐 등의 온갖 결(즉 9결)에 의해 계박된 일체의 법[所繫事]’을 멸한 것을 일컬어 ‘멸계(滅界)’라고 하였다.66)
어떠한 연유에서 3계가 이와 같이 차별된 것인가?
이를테면 유루법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세 가지가 되니,
첫째는 능히 계박하는 것[能繫]이면서도 능히 더럽히지 않는 것[非能染]이며,
둘째는 능히 계박하는 것이면서 역시 또한 능히 더럽히는 것이며,
셋째는 두 가지가 아니지만 계박하고 더럽히는 법에 능히 수순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의 법을 끊고서 증득하게 된 무위[해탈]을 순서대로 ‘단’ 등의 3계로 일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오로지 능히 계박하는 것을 끊을 때에만 별도의 무위[해탈]이 존재하며, 그 밖의 것을 끊을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즉 그는, 능히 계박하는 것 중의 어떤 것은 여덟 가지 결(結)을 반연하고, 어떤 것은 애결(愛結)을 반연하며, 어떤 것은 그 밖의 것을 반연하는데, 이러한 세 종류를 끊고서 증득하게 된 무위[해탈]을 순서대로 ‘단’ 등의 3계로 이름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유여사는 설하기를,
“오로지 능히 더럽히는 것을 끊을 때에만 별도의 무위[해탈]이 존재하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을 끊을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즉 그 논사는, 능히 더럽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은 여덟 가지 결을 반연하고,67) 어떤 것은 애결을 반연하며, 어떤 것은 그 밖의 것을 반연하는데, 이러한 세 종류를 끊고서 증득하게 된 무위[해탈]을 순서대로 ‘단’ 등의 3계로 이름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탐 등에 의해] 계박된 법[所繫事]을 멸함에 따라서도 별도의 택멸을 획득하기 때문에 위의 세 가지 설 중에서 첫 번째 설이 선설(善說)이라 할 수 있다.
⑤-1 방론: 단(斷)ㆍ이(離)ㆍ멸상(滅想)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온갖 계경 중에서 설하고 있는 단상(斷想)ㆍ이상(離想)ㆍ멸상(滅想)의 세 가지 상(相)의 차별에 대해서도 이미 해석한 셈이다.68)
혹은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初業地]에서 ‘나는 당래 끊을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컬어 ‘단상’이라고 하였으며,
염오를 떠나는 단계[離染地]에서 ‘나는 바로 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컬어 ‘이상’이라고 하였으며,
이미 [성도를] 갖춘 단계[已辦地]에서 ‘나는 이미 끊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컬어 ‘멸상’이라고 하였다.
혹은 이미 수온(受蘊)의 무거운 짐[重擔]에 대해 그것을 버리지 않은 허물을 관찰하고서 버리려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단상’이라고 하였으니, ‘버리는 것[捨]’과 ‘끊는 것[斷]’은 명칭 상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밖의 다른 온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것에 대해 뛰어난 공덕을 관찰하고, 그것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멸상’이라고 하였으니, ‘생겨나지 않는 것[不生]’과 ‘멸(滅)’은 명칭 상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이염(離染)과 청정(淸淨)의 상속을 획득하고서 제온의 법에 대해 뒤돌아보거나 연모하는 일이 없으며, 반열반을 고요함[靜]과 미묘함[妙]으로 관찰하는 것을 일컬어 ‘이상’이라고 하였으니,69) ‘연모함이 없는 것[無戀]’과 ‘떠나는 것[離]’은 명칭 상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6) 싫어함[厭]과 떠남[離]의 관계
만약 [어떤] 법[事]이 능히 ‘싫어하는 것[厭]’이라면, 반드시 능히 ‘떠나는 것[離]’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싫어하는 것’은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혜’이고
‘떠나는 것’은 4제를 반연하여 능히 끊는 것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광협의 뜻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4구(句)로 성취해야 보아야 할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고제와 집제를 반연하여 일어난 인(忍, 즉 苦法智忍과 集法智忍, 苦類智忍과 集類智忍)과 지(智, 즉 苦法智와 集法智, 苦類智와 集類智)를 일컬어 ‘싫어하는 것[厭, nirveda]’이라고 하지만, 그 밖의 [‘인’과 ‘지’는] 그렇지 않다.
즉 4제의 경계에 대해 일어나는 ‘인’과 ‘지’로서 능히 혹(惑)을 끊는 것은 모두 ‘떠나는 것[離, vitārāga]’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광협(廣狹)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4구(句)로 성취해 보아야 한다.
싫어하는 것이면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인’과 ‘지’로서 혹(惑)을 끊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싫어하는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염오를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제1구)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중(고ㆍ집제를 반연하는 忍ㆍ智)에서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염오를 떠난 후 [성]제(聖諦)를 관찰하는 자의 고법지인ㆍ집법지인과 견도위 중의 고지(苦智)ㆍ집지(集智)를 다만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싫어하는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무간도인] 인(忍)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혹(惑)이 일찍이 끊어졌기 때문이며,
[해탈도인] 지(智)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단대치(斷對治)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수도위 중의 가행도ㆍ해탈도ㆍ승진도에 포섭되는 고지와 집지도 다만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싫어하는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단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떠나는 것이면서 싫어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멸ㆍ도제를 반연하는 ‘인’과 ‘지’로서 능히 혹을 끊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능히 염오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며, 좋아하는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제2구)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중(멸ㆍ도제를 반연하는 忍ㆍ智)에서 욕계의 염오를 떠나지 않고서, [성]제의 관찰에 든 자의 멸법지인ㆍ도법지인과 존재하는 온갖 멸류지인ㆍ도류지인, 그리고 수도위 중의 무간도에 포섭되는 멸지와 도지를 다만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단대치이기 때문이며,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좋아하는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것이면서 역시 떠나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인’과 ‘지’로서 능히 혹을 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제3구)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중에서 욕계의 염오를 떠나지 않고서 [성]제의 관찰에 든 자의 고법지인ㆍ집법지인과 존재하는 온갖 고류지인ㆍ집류지인, 그리고 수도위 중의 무간도에 포섭되는 고지와 법지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싫어하지도 떠나지도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멸ㆍ도제를 반연한 ‘인’과 ‘지’로서 혹을 끊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제4구)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중에서 일찍이 욕계의 염오를 떠난 후 [성]제를 관찰하는 자의 멸법지인ㆍ도법지인과 견도위 중의 멸지와 도지, 그리고 수도위 중의 가행도ㆍ해탈도ㆍ승진도에 포섭되는 멸지와 도지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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