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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19권
29.6. 사명연(捨命緣)
생각해 보건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독 그릇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여섯 도적[六賊 : 六根]의 미친 주인이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모두 집착하고 있으므로 다시는 거슬러 흐를 기약이 없고, 오직 순환(循環)하는 세력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한 개의 털을 뽑으면 천하가 다 이롭게 된다고 했는데도 그것을 아껴서 뽑지 않았고 한 술의 밥을 거두어서 다른 사람의 양식을 이어주자는 말에도 아끼고 주지 않았다.
나고 죽음[生死]에 빠지고 막혀 작용이 있는 것을 굳게 집착하고 있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염려하여 눈쌀을 찌푸리셨고 보살들은 이에 대하여 울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가만히 살펴 보건대 세속의 무리들로서 귀하고 권세 있는 이들은 부모의 상을 당하면 대부분 훌륭하게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산 생명을 많이 잡고 친족(親族)들을 모아 들이며, 찾아오는 손님들을 공양하여 대접한다.
그들은 구차스럽게 현재의 훌륭한 것을 구하려고 업인(業因)을 피하지 않고 혹은 밖에서 나무라는 것을 두려워하여 안으로 법을 닦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가 죽으면 여기에 고통을 겹치게 하고 어머니가 죽으면 끓는 물과 숯을 더욱 증가시킨다.
이리하여 삼계(三界)를 완연하게 돌면서 끊임없이 여섯 갈래 세계를 다니나니, 사취(四趣)는 돌아가기는 쉬우나 만 겁이 지나도 인도하기 어렵다.
자모(慈母)의 혼령에 통곡하고 역자(逆子)의 수독(酬毒)을 가엾게 여길 뿐이다.
다만 심한 가뭄이 오래 가면 꼭 단비의 은택을 생각하고 만약 질환의 재앙이 많으면 지극히 훌륭한 의사를 기대할 뿐이다.
생각하건대 이 고비(考妣 : 父母)도 이미 범부이기 때문에 악한 엽이 없다 해도 죄의 원인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니 그 업보는 물리치기 어렵다.
그러니 만약 여러 가지 훌륭한 복을 의지하지 않으면 어찌 즐거운 과보를 증득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그들로 하여금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는 시타(屍陀)에 들게 하고 장례 도구와 자재(資財)로 아울러 공덕을 닦아 날아다니는 새와 기어다니는 짐승들의 굶주림을 구제하게 하여 장차 다가오는 세상에 부채를 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십이품생사경(十二品生死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죽음에는 열두 가지 품류가 있다.
어떤 것이 그 열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한이 없는 죽음이니 이른바 아라한으로서 집착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죽음을 건너는 사람이니 이른바 아나함(阿那含)으로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남음이 있는 죽음이니 이른바 사다함(斯陀含)으로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요,
넷째는 죽음을 건너는 것을 배우는 사람이니 이른바 수다원 (須陀洹)으로서 도의 자취를 보는 것이며,
다섯째는 속음이 없는 죽음이니 이른바 여덟 가지가 평등한 사람이요,
여섯째는 환희하며 죽는 것이니 이른바 일심(一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일곱째는 자주자주 죽는 사람이나 이른바 나쁜 계율을 행하는 사람이요,
여덟째는 죽음을 후회하는 사람이니 이른바 범부이며,
아홉째는 횡사(橫死)하는 것이니 이른바 고독하고 고통받는 사람이요,
열째는 죽음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이니 이른바 축생(畜生)을 말하며,
열한째는 타거나 데어서 죽는 것이니 이른바 지옥을 말하고,
열두째는 배고프고 목마르고 죽는 것이니 이른바 아귀(餓鬼)이다.
비구들은 마땅히 분명하게 알아야 하나니, 즉 방일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또 『정토삼매경(淨土三味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선업이나 악업을 지으면 천상에 태어나거나 지옥에 떨어지는데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엔 저마다 영접하는 사람이 있다. 병이 들어 죽으려고 할 때에 그의 눈으로 와서 영접하는 사람을 직접 보게 되는데, 장차 천상에 가서 태어날 사람이면 하늘 사람이 옷을 가지고 기악을 연주하면서 와서 영접하고, 마땅히 다른 지방에 태어날 사람이면 그의 눈으로 존귀한 사람이 그를 위해 미묘한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만일 악한 짓을 하여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면 눈으로 병사(兵士)가 칼과 방패ㆍ큰 창ㆍ작은 창을 가지고 그를 찾아 빙 둘러서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그가 보는 것이 일정하지가 않아 입으로 이루 다 말할 수는 없나니, 제각기 제가 지은 업에 따라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늘은 억울하게 함부로 함이 없고 공평하고 정직하여 두 마음이 없으며, 오직 그가 지은 바를 따라서 하늘의 그물로 그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또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엔 중음(中陰)의 모양을 보게 된다.
만약 악한 업을 지은 사람이면 세 갈래 악한 세계에서 고통받는 것을 보게 되고 혹
은 염라왕(閻羅王)이 여러 가지 무기를 가지고 와서 붙잡아 가두어 가지고 데리고 가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고통받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만약 착한 일을 실천한 사람이라면 여러 천상의 궁전에서 기녀(妓女)들이 장엄하게 꾸민 모습으로 재미있게 놀면서 쾌락을 누리는 이와 같은 좋은 일을 보게 된다.
또 『법구유경(法句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기환정사(祈桓精舍)에 계셨을 때였다. 부처님께서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셨다.
그 때 어떤 장자가 길 가에 살고 있었는데 재물이 넉넉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에게는 오직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나이 스무 살이 되자 처음으로 장가를 들어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다. 장가든 지 채 이레가 되지도 않았을 때 부부는 서로 공경하면서 후원(後園)에 이르렀었다.
때는 마침 상춘(上春) 삼 월이었다. 동산에 나가 구경하고 노는 가운데 그 동산에 한 그루 벗나무가 있었는데 키가 높고 큰 데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신부는 그 꽃을 가지고 싶었으나 아무도 꺾어다 줄 사람이 없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나무에 올라갔는데 마침내 가느다란 가지에 미치자 가지가 부러지면서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온 집안 대소(大小)사람들이 그 아이가 죽은 곳으로 황급히 달려와서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다가 기절하고,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곤 했으니, 그 말을 들은 사람치고 상심(傷心)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염(險)하여 관(棺)에 넣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집에 돌아와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세존께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가없게 여기시어 그곳에 가셔서 문안하셨다.
장자와 집안 대소 사람들은 부처님을 뵙고 비감(悲感)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극심한 고통을 자세히 진술하였다.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울음을 그치고 법을 들어라. 온갖 물질은 덧없는 것이어서 오래도록 보존할 수 없느니라. 태어나면 죽음이 있고 죄와 복이 서로를 쫓는 법이니라.
이 아이는 세 곳에서 그를 위해 통곡하고 울며 괴로워하다 기절하였고, 또 견디지 못해 하였으나 마침내 그는 누구의 아들이며, 누가 또 그의 어버이인가?’
그리고는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목숨은 마치 꽃과 과일 같아서 성숙하게 되면
언제나 떨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면 모두가 고통인 것을
어느 누군들 죽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처음부터 애욕(愛欲)을 좋아하여
포태(胞胎) 안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나
몸을 받고 나면 그 목숨은 번개처럼 빨라
밤낮없이 흘러 멈추기 어렵다네.
이 몸뚱이는 죽음을 위한 물건이고
정신 또한 형상이 없는 법이라서
목숨을 마쳐 죽고 나면 다시 또 태어나지만
죄와 복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느니라.
마치고 다시 시작한 것이 한 세상만이 아니거늘
어리석기 때문에 장구(長久)하기를 바라네.
스스로 지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나니
몸은 죽지만 정신은 없어지지 않는다.
장자는 그 게송을 듣고 마음이 놓이고 걱정이 사라져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아이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한창 좋은 나이에 갑자기 요절하였습니까?
오직 바라옵건대 본래 지였던 죄를 말씀해 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과거 어느 때에 한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아름다운 나무 숲속에 들어가 놀고 있었다. 그 곁에 어떤 사람 세 명이 그 안에서 구경하며 놀고 있었다.
마침 나무 위에 참새가 앉아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그 새를 쏘려고 하자
세 사람이 권유하며 말하였다.
〈만약 참새를 맞출 수 있다면 세상에 가장 씩씩한 아이가 될 것이다.〉
어린아이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 활을 당겨 쏘았다. 참새가 화살에 맞아 즉사하자 세 사람이 함께 웃었고. 그를 도와 환희하면서 제각기 떠나갔다.
그 후 나고 죽으면서 여러 겁을 지나는 동안 서로 만나면서 그 죄를 받았다.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복이 있어서 지금 천상에 살고 있고 한 사람은 바닷속에 태어나 용왕으로 화생(化生)하였으며, 한 사람은 바로 오늘날 장자의 몸이니라.
이 어린아이는 앞에는 천상(天上)에 태어나서 그 하늘의 아들이 되었다가 목숨을 마치고 장자의 아들이 되어가지고는 지금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는 곧 바닷속으로 가서 용왕의 아들이 되었겠지만, 그가 태어나는 바로 그 날에 금시조(金翅鳥)왕이 즉시 그를 잡아 먹을 것이다. 그들은 현재까지도 세 곳에서 괴로워하며 슬프게 울고 있으리니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느냐?
전생에 그 어린아이를 도와 기뻐하였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은 이와 같은 과보를 받는 것이니라.’
그리고 나서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의 정신은 삼계의
좋고 좋지 못한 세 곳으로 나아가
남몰래 다니면서 잠자코 이르거니와
태어나는 곳마다 메아리의 호응이 있는 것과 같다네.
색계와 욕계와 무색계의
일체는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니
그것은 마치 종자가 본래의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저절로 그 과보가 그림자처럼 따른다네.
부처님께서 게송을 설하여 마치시자 장자는 마음이 놓였고 크고 작은 가족들이 모두 환희하였으며, 이들 모두는 수다원도(須陀洹道)를 증득하였다.”
또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 중생들에게 이익이 되게 하기 위하여 왕이 목숨을 마치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일체 것은 반드시 다함으로 돌아가나니
높은 곳에 있는 이는 꼭 장차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태어난 사람치고 죽지 않는 이는 없나니
목숨이 있는 것은 다 무상한 것이니라.
중생들은 작용이 있는 곳에 떨어지나니
일체는 다 작용이 있어서
모든 세간에는
늙고 죽지 않는 이가 아무도 없느니라.
중생이란 바로 평범한 법이어서
어느 생(生)이나 할 것 없이 다 결국엔 죽고 말지만
그 지은 업을 따라서
죄와 복의 과보가 있게 마련이다.
악한 업을 지으면 지옥에 떨어지고
착한 업을 지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고상한 행업 때문에 좋은 세상에 태어나면
무루(無漏)의 열반(涅槃)을 증득하리라.
29.7. 견송연(遣送緣)
[自述] 나고 죽음이 고리처럼 연이어져 세속의 진리를 여의지 못한다. 비록 또한 출가하여 수승한 도 구하기에 뜻을 둔다고 하더라도 분단(分段)을 버리기 어렵고 변역(變易)을 제거하지도 못하며, 잇따라 삼계를 의지하고 세속을 따라 옮겨 흘러가고 있다.
그리하여 나고 죽음에 대하여 모두 안과 밖을 의지하고 있으니, 목숨을 마치려고 하는 날에 안치(安置)하기에 마땅한 곳을 구하는 것과 장례하여 보낼 때의 위의(威儀)에 대해 다음에 자세히 갖추어 말하겠다.
우선 죽은 시체에 대하여 논하면 남쪽과 북쪽에 안치하는 것은 혼백(魂魄)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이제 이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술하겠다.
『예기(禮記)』의「예운(禮運)」편에서 말하였다.
“체백(體魄)은 내려가고 지기(知氣)는 위에 있으므로 죽은 사람은 머리를 북쪽으로 두게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은 머리를 남쪽으로 눕게 하였다.”
「교특생(郊特生)」편에서 말하였다.
“혼(塊)의 기운은 하늘로 돌아가고 형체의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낼 때에는 모든 음양(陰陽)의 이치를 구해야 한다.”
「제의(祭儀)」편에 말하였다.
“기운이라는 것은 신(神)의 성대함이요, 혼이라는 것은 귀신의 성대함이다.”
『좌전(左傳)』소공(昭公) 이년(二年)에 말하였다.
“자산(子産) 조경자(趙景子)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사람이 났다가 죽어 변화[人生死化] 하는 것을 넋[魄]이라고 합니다.
이미 넋이 생기고 난 뒤에 양기가 그 몸에 붙는 것을 혼(塊)이라고 합니다.
물건을 씀에 있어서 정기가 많으면 넋과 혼도 강성해집니다.
그런 까닭에 정(精)이 쌓이고 상(爽)이 쌓여서 신명(神明)에 이르나니, 평범한 남녀[匹夫匹婦]가 비명에 죽음을 당하면 그 혼과 넋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 의지하여 음려(淫厲 : 寃鬼)가 되거늘 더구나 어질고 어진 하늘이겠습니까?”
『회남자(淮南子)』에서 말하였다.
“하늘의 기운[天氣]은 혼이 되고 땅의 기운[地氣]은 넋이 된다.
넋이 혼에게 물었다.
‘도(道)에서는 무엇으로써 그 바탕[體]을 삼는가?’
혼이 대답하였다.
‘아마도 형상이 없는 것으로써 바탕을 삼을 것이다.’
넋이 말하였다.
‘형상은 있을 것이다. 만약 형상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묻겠는가?’
혼이 말하였다.
‘나는 다만 만나는 바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보아도 형상이 없고 들어 보아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유명(幽冥)이라고 말하나니, 유명이라는 것은 그런 까닭에 도에 비유하지만 그것은 도가 아니다.’
또 물었다.
‘이미 혼과 넋이 별개의 것임을 알았다. 오늘날 세속에서 사람이 죽으면 무엇 때문에 옷을 들고 혼만 부르고 넋은 부르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혼은 곧 영(靈)이요 넋은 곧 시체이다.
그러므로 예(禮)에서는 처음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을 가지고 시백(屍魄)의 위에 옮겨 놓고,
혼은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옷을 가지고 가서 혼을 부르면 그 혼은 자기의 옷임을 알고 옷을 찾아 넋에게로 돌아간다.
만약 혼이 넋에게 돌아가면 시체의 입을 막은 솜이 움직이고
만약 혼이 넋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입을 막은 솜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치로써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혼을 부른다고 말하지 넋을 부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소상복요기(蕭喪服要記)』에서 말하였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그 아비의 장례를 치르자 공자(孔子)가 물었다.
‘어떻게 혼의(魂衣)를 시설하셨습니까?’
애공이 말하였다.
‘혼의(魂衣)는 백도(伯桃) 때에 생겨난 것입니다. 백도가 형산(荊山) 아래를 지나가다가 길에서 친구 양각(羊角)의 얼어 죽은 시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슬퍼하며 가서 그 시체를 맞이하였는데 혼신(魂神)이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을 불쌍히 여긴 끝에 일부러 혼의를 다시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생전에 수놓은 비단옷을 입으셨었고 죽어서도 옷을 입고 계셨는데, 무엇 때문에 옷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물었다.
“어째서 반드시 번기[幡]위에 그의 성명(姓名)을 써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번기의 혼을 불러서 그 마른 땅에 안치하는 것이다.
혼은 제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제 이름을 찾아서 깜깜한 방으로 들어가고 넋에게 의탁하기도 한다.
혹은 죵실(重直龍反室)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죵(重)이란 겹친다는 뜻이다.
중첩되게 안에다 제사 음식을 갖추어 두나니, 이는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가 각각 다르고 밝고 어두운 것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은 어두운 곳에서 음식을 먹고 살아 있는 사람은 밝은 데에서 음식을 먹는다. 그래서 겹으로 만든 거제(籧蒢)로써 그 음식거리를 싸서 골방 안에 두는 것이니, 이는 신지(神地)에 안치하기 위함이다.
서역의 장례법에 의하면 장례를 치르는 법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에 떠내려 보내는 것이요,
둘째는 불에 태우는 것이며,
셋째는 땅 속에 묻는 것이요,
넷째는 숲 속에 버리는 것이다.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만약 불에 태울 때에는 돌 위에 시체를 올려놓아야 하고 풀이나 흙 위에서 태워서는 안 된다. 그 까닭은 벌레가 상하게 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사분율 (四分律)』에서 말하였다.
“여래 (如來)와 전륜성왕(轉輪聖王) 두 사람만은 모두 화장(火葬)을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앞에 네 가지 장례법을 통상적으로 따르면 된다.
『오분율』에서 말하였다.
“시체는 마땅히 땅에 묻어야 한다.”
[이것은 왕법(王法)에 몸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여름에 시체를 태우면 벌레들을 상하게 될까 염려되기 때문에 시체를 땅에 묻게 한 것이다.
그 밖에 물이나 숲 속에 버리는 것은 논란하지 않았다.]
『사분율』과『오백문사(五白問事)』에서 말하였다.
“만약 여래의 탑묘(塔廟)를 보거나 다섯 가지 대중으로서 출가한 사람의 무덤이나 탑을 보았을 때에는 자기보다 위이면 다 살았을 때의 나이와 법랍(法臘)의 선후에 따라 예를 베풀면 된다.
만약 모든 속인들이 출가한 사람의 무덤이나 탑을 보았을 적에는 크고 작은 이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꼭 공경하고 예배해야 한다.
[自述] 이미 이러한 것들을 알았다. 모든 도인(道人)이나 속인들로서 만약 사승(師僧)이나 부모가 죽은 관을 알현하기 위해 외부에서 조문하러 온 사람이 죽은 사람보다 아래이면 그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가서 평상법대로 예를 올린 뒤에 먼저 상주[孝子]가 있는 곳에 이르러 묵묵히 위로하고 조문한 다음에 대덕(大德)의 처소에 이르러 애통한 심정을 갖추어 말하고 조문하며 절하면 된다.
또한 어리석은 속인이 함부로 법교(法敎)를 행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까지도 가르치며 부모ㆍ작은아버지ㆍ큰아버지ㆍ존친(尊親)의 망령에게 예를 올리지 않고 입으로 말하기를
“나는 이미 계율을 받았고 그들은 귀신이 되었으니, 예를 올리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계율을 깨뜨릴까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일은 성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무지(無知)한 죄만을 초래하는 것이다.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사승(師僧) 등은 나의 법신(法身)을 길러 주셨고 부모와 작은아버지ㆍ큰아버지 등은 나의 생신 (生身 : 肉身)을 길러주셨으니, 이 분들에 의지하여 젖을 먹고 장대해지고 성인이 되었다.
이런 은덕(恩德)을 생각하면 하늘처럼 끝이 없어 보답하기란 어렵고 몇 겁(劫)을 지내도록 그 은혜를 갚아야 하겠거늘 어찌 일생만으로 사례할 수 있겠는가?
은혜를 공경하여 간직하지 않고 도리어 업신여기는 마음을 낸다면 뒤를 따르는 비루한 범부라 하겠거늘 어찌 효자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지극하신 성인이건만 그래도 몸소 돌아가신 부왕(父王)의 시체를 부축하여 보내셨거늘 하물며 하천하고 어리석은 범부로서 태만(怠慢)한 마음을 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은혜를 아는 것은 대비(大悲)의 근본이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축생보다 더 심하다.”
또 『정반왕니원경(淨飯王泥洹經)』에서 말하였다.
“백정왕(白淨王)이 사이국(舍夷國 : 舍衛國)에 있으면서 병이 위독하여 죽으려고 할 때 세존과 난타(難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계셨으므로 여기서부터 거리가 오십 유순(由旬)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세존께서 영취산(靈鷲山)에 계실 때에 천이(天耳)로써 부왕이 생각하는 소리를 멀리에서 들으시고 곧 아난 등과 함께 허공을 타고 부왕에게 이르러 손으로 왕의 이마를 만지시면서 왕을 위로하고 나서 왕을 위하여『마하바라본생경(摩訶波羅本生經)』을 설하셨다. 왕은 그 경을 듣고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하였으며, 왕은 부처님의 손을 잡아당겨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부처님께서 또 법을 설하시자, 부왕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였다. 그러다가 무상(無常)이 닥쳐와서 목숨이 다하고 기운이 끊어져서 갑자기 후세(後世)로 나아갔다.
그래서 사유(闍維 : 茶毘)하려고 할 적에 부처님께서는 난타 동과 함께 시체의 머리 앞에 엄숙하고 공손한 모습으로 서 계셨고 아난(阿難)과 나운(羅雲)은 죽은 이의 발 뒤에 서 있었다.
아난타가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오직 바라옵나니 저로 하여금 백부(伯父)의 관(棺)을 메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나운도 또 아뢰었다.
‘바리옵나니 부디 저로 하여금 조왕(祖王)의 관을 메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세존께서 그들을 위로하며 말씀하셨다.
‘미래 세계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흉악하고 포악하여 부모가 길러주신 은혜를 갚지 않을 것이다.
이 불효(不孝)한 중생들을 위하여 교화하는 법을 시설하기 위해서라도 여래가 몸소 부왕의 관을 메려고 하느니라.’
그러자 즉시 삼천대천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고 일체의 숱한 산들은 짧은 시간에 솟아올랐다가 잠겼다 하기를 마치 물 위의 배가 출렁이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 때 모든 하늘과 용신(龍神)들이 다 와서 장례에 참예하였고 소리 높여 슬피 울었다. 사천왕(四天王)도 귀신 억백천 무리를 데리고 와서 다 함께 상여를 들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미래세계에 부모에게 불효하려는 이들을 위하여 큰 자비로써 몸소 부왕의 관을 메시겠다고 하신 것입니까?’
사왕천도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우리들은 바로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수다원(須陀洹)을 증득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이 마땅히 부왕의 관을 메어야만 합니다.’
부처님께서 사천왕에게 부왕의 관을 메도록 허락하시자 곧 변하여 사람이 되었다. 일체 인민들치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세존께서는 몸소 자신의 손으로 향로를 들고 앞에 서서 묘소로 나아 가셨다.
그리고 천 명의 아라한으로 하여금 큰 바닷가 늪지대로 가서 우두전단향(午頭旃檀香)과 갖가지 향나무를 가져오게 하여 그것으로 불을 피우게 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괴롭고 공(空)하고 무상하기가 마치 허깨비와 같고 물 속에 달과 같으며 거울 속에 비치는 영상과 같느니라.’
시신이 타서 이미 다하자 그 때 모든 왕들은 각각 오백 개의 병에 우유를 담아가지고 그것으로써 불을 껐다.
불이 꺼진 뒤에는 다투어 함께 뼈를 거두어 금강함(金剛函)에 넣고 곧 그 위에 탑을 세우고서 비단 번기와 일산을 담고 그 탑묘에 공양하였다.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왕이신 정반왕께서는 청정한 사람이라서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셨다.’”
또 『불모니원경(佛母泥洹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의 이모님이신 대애도(大愛道)비구니는 부처님께서 후에 마땅히 멸도 하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먼저 멸도하시려고 제근녀(除饉女) 오백 명과 함께 손으로 부처님의 발을 어루만지고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는 예배하고 떠나갔다.
[제근녀는 곧 비구니를 말한다.
강승회(康僧會)가『법경경(法鏡經)』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범부는 육진(六塵)을 탐하여 물든다. 그것이 마치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탐 하여 싫어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성인은 탐욕을 끊고 육진의 기근(飢饉)을 끊기 때문에 출가한 비구니를 제근이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신족(神足)의 덕을 나타내어 저절로 자리에서 사라져 동쪽으로부터 와서 허공 중에 있으면서 열여덟 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냈다. 팔방(八方)과 상하에서도 또한 그와 같이 하면서 큰 광명을 놓아 모든 깜깜한 곳을 비추고 위로는 모든 하늘까지 밝게 비추었다. 그리고 오백 명의 제근녀들은 변화로 다 함께 불에 타 한꺼번에 먼저 니원(泥洹 : 涅槃)에 들었다.
부처님께서는 이가(理家)들에게 권유하여 오백 개의 상여를 만들게 하고 참깨 기름과 향ㆍ꽃과 갖가지 재목으로 오백 명의 제근녀를 장사 지내고 참다운 기악과 바른 음악으로 공양하였다.
일체의 범부와 성인들은 그것을 보고 슬피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사유를 마치자 사리(舍利)를 받쳐 들고 부처님의 처소로 나아갔다.
그 때 사방에서 각각 이백오십 명의 응진(應眞 : 阿羅漢)이 신족(神足)으로 날아 와서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사리가 있는 곳에 이르러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자리에 나아갔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를 가져다가 발우에 담아 내 손 위에 올려 놓아라.’
아난이 명하신 대로 하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리는 본래 더러운 몸으로서 흉악하고 어리석으며 사악하고 포악하며 질투와 음모로써 도를 부수고 덕을 깨뜨렸었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는 구제되어 장부의 행위를 일으켜 응진도(應眞道 : 阿羅漢道)를 획득하시고서 영(靈)을 옮겨 갑자기 없어졌으니 어찌 장하지 아니하냐?’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칙명을 내려 탑묘(塔廟)를 세우고 공양하라 하셨다.”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타와 나운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대애도의 몸을 모시고 오너라. 내가 마땅히 몸소 공양해야 하겠다.’
그 때 석제환인(釋提桓因)과 사천왕 등이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부디 원하옵건대 스스로 정신을 피로하게 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마땅히 공양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왜냐 하면 부모는 자식을 낳고 많은 이익을 주셨기 때문이다.
길러 주신 은혜가 막중하고 젖을 먹이고 품에 안으셨으니 꼭 그 은혜를 갚아야 하며, 갚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과거와 미래 모든 부처님의 어머님들께서도 먼저 멸도를 취하셨으며, 모든 부처님께서도 다 몸소 사유한 사리를 공양하셨느니라.’
그 때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 모든 귀신들을 시켜 전단림(旃檀林)으로 가서 전단나무를 가져오게 하여 넓은 들판 사이에 이르러 부처님께서 몸소 상여의 한쪽 다리를 들고 난타가 다른 한쪽 다리를 들고 또 나운이 다른 한쪽 다리를 들고 아난이 마지막 한쪽 다리를 듣고서 허공을 날아 무덤 사이에 이르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 스스로 전단나무를 가져다가 대애도의 폼 위에 올려 놓으신 다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탑을 세우고 공양해야 할 네 사람이 있으니,
그 첫째는 부처님이요, 둘째는 벽지불(辟支佛)이며, 셋째는 누(漏)가 다한 아라한이요, 넷째는 전륜성왕이다.
이들은 모두 열 가지 선행으로써 중생을 교화했느니라.’
그 때 인민들은 곧 사리를 가져다가 각각 탑을 세우고 공양하였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 의하면 이러하다.
“애도(愛道)는 부처님의 이모로서 곧 난타(難陀)의 친어머님이시다.”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사부(四部) 제자들 중에서 도를 증득한 맨 앞사람과 맨 뒷사람을 간략하게 말하면 우선 여덟 사람을 열거할 수 있다.
비구 중에서 맨 처음 득도한 사람은 구린(拘隣)비구이니 능히 교화를 잘 하였고 위의(威儀)를 잃지 않았다. 맨 마지막에 득도한 사람은 수발타라(須跋陀羅)이니, 그는 득도하던 날 바로 반열반(般涅槃)에 들었다.
비구니 중에서 맨 처음 득도한 이는 대애도(大愛道)비구니이고, 맨 마지막에 득도한 사람은 다라구이국(陀羅俱夷國)비구니이다.
우바새(優婆塞) 중에 맨 먼저 득도한 이는 상객남(商客男)이요, 맨 마지막에 득도한 이는 구이나마라(俱夷那摩羅)이다.
우바이(優婆夷) 중에서 맨 먼저 득도한 이는 난파녀(難婆女)이고 맨 마지막으로 득도한 이는 남(藍)우바이이다.”
29.8. 수생연(受生緣)
대체로 태어나면 여덟 가지 인식작용이 부지(扶持)하고 죽으면 사대(四大)가 흩어진다. 빠르기도 하다.
백 년이란 세월이 훌쩍 가버려 끝내는 마멸(摩滅)로 돌아가고 삼계(三界)를 순환(循環)하면서 벙벙 돌아 멈추지 않는구나.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마침이 있나니, 이미 생겨났으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말한 성인의 가르침은 헛되지 않으니, 눈으로 보고 예의를 올려야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緣)에서는 대략 여섯 가지 문(門)을 들어 기술하겠다.
그 첫 번째 문은 목숨을 마칠 때에 임하는 태도이다.
몸이 차가운지 따뜻한지를 검사하여 그 선과 악을 증험해 보면 미래의 과보를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유가론(瑜伽論)』에서 말하였다.
“이 유정(有情)은 물질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다.
임시로 목숨을 지니게 된 것은 크건 작건 간에 다 똑같고 죽을 때는 통상 단번에 죽거나 점차로 죽는다고 모든 스승들이 서로 전하고 있다.
착한 짓을 한 사람은 아래로부터 찬 기운이 닿기 시작하여 배꼽에까지 이르고, 그 이상은 따뜻한 기운이 있다가 나중에 다 없어지게 된다.
그런 사람은 곧 인간 세계에 태어나며,
만약 얼굴[頭面]에 따뜻한 기운이 있다가 나중에 그 기운이 다하면 곧 천도(天道)에 태어난다.
만약 악한 짓을 한 사람이면 이와 서로 반대이니,
위에서부터 허리까지 따뜻한 기운이 있다가 나중에 사라지는 이는 귀신의 세계에 태어나며,
허리에서부터 무릎까지 따뜻한 기운이 있다가 나중에 사라지게 되면 축생(畜生)의 세계에 태어나고,
무릎 이하 다리 끝까지 다 사라진 이는 지옥의 세계에 태어난다.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 열반에 들면 혹은 심장 부위에 따뜻한 기운이 있기도 하고 더러는 정수리에 따뜻한 기운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유가론』에서 말하였다.
“갈라람(羯羅藍)의 뜻은 맨처음에 의탁하는 곳이어서 곧 육심(肉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의식이 이곳에 가장 먼저 의탁하여 생겨나나니, 그래서 이곳을 가장 나중에 버리게 된다.”
이를 해석하여 말한다.
『유가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착한 업을 지으면 위에 태어나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점점 버리기 시작하여 육심에 이르고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위에까지 다 버리게 되며,
악한 업을 지은 사람은 아래에 태어나기 때문에 먼저 위에서부터 버리기 시작하여 육심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아래까지 다 버린다는 뜻이다.”
『구사론(俱舍論)』에 의거하여 말한다.
“만약 사람이 금방 죽었으면 몸 어느 부분에서 의식이 단멸(斷滅)하는가?
만약 일시(一時)에 몸이 죽으면 감각기관과 함께 의식도 일시에 다 사라지지만,
만약 사람이 차례로 죽게 되면
다음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차례로 죽는 것은 다리에서 배꼽으로
그리고 심장에서 의식이 끊어지는데
하인(下人)은 하늘에 나지 못한다.
이 논 중에서 해석하여 말하였다.
‘만약 사람으로서 틀림없이 악한 세상에 태어날 사람이거나 인간 세계에 태어날 이와 같은 사람은 차례로 죽으며, 아라한 같은 사람은 심장에서부터 의식이 단절된다.
어떤 다른 부파에서는 머리에서부터 끊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 하면 몸의 감관이 이곳에서 의식과 함께 소멸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금방 죽으면 이 몸의 감각기관은 뜨거운 돌과 물이 점점 식어가듯이 다리 언저리에서부터 차례로 식어간다.’
해석하여 말한다.
“『구사론(俱舍論)』은 소승(小乘)의 이치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몸은 이들 처소에서부터 의식과 함께 소멸한다’고 하였으나
만약 대승(大乘)에 의거하면
‘몸의 감각기관은 이들 곳에서부터 본식(本識)과 함께 소멸한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생(生)을 받는 방법이다.
『구사론』에 의하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서 이르는 곳이 바로 마땅히 태어나게 될 세계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생긴 중음(中陰)인 중생이 전생 업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안근(眼根)은 비록 가장 먼 곳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장차 태어나야 할 곳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부모가 될 사람이 그 가운데에서 변이(變異 : 性交)의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만약 변화하여 남자가 될 사람이면 그 어머니에 대하여 곧 남자의 자격으로서 음심(淫心)을 일으키고, 만약 변화하여 여자가 될 사람이면 그 아버지에 대하여 곧 여인의 자격으로서 음욕의 마음을 일으킨다.
뒤바뀐 이러한 마음으로 성을 내면 이 가운데 있던 중생은 두 가지 뒤바뀐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가 애욕의 장난치는 곳을 찾는다.
그는 애욕으로 즐기는 곳을 찾아 자신이 태어날 곳으로 가서 아버지의 정액이 흘러 들어가면 이것은 곧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즐거워하나니, 이 때에 부정(不淨 : 淨液)이 이미 태(胎)의 처소에 이르러 환희하면서 그대로 거기에 의탁하여 생겨난다.
이 찰나(刹那)로부터 이 중생은 오음(五陰)이 화합하여 견실(堅實)해지고 중유(中有)의 오음은 즉시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이 되어야 비로소 생(生)을 받았다고 말한다.
만약 태 안의 것이 사내아이라면 어머니의 왼쪽 옆구리에 의지하여 얼굴은 어머니를 향하여 밖을 둥지고 걸터 앉고
만약 태 안의 것이 여자 아이라면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 의지하여 얼굴을 어머니의 옆구리를 향하여 등지고 머무르며,
만약 사내도 아니고 여아도 아닐 경우에는 어머니의 태 안에서 되고 싶은 한 종류를 따라 의탁하여 생겨난다. 머무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중유(中有)는 남자나 여자와는 달라서 모두 감각기관을 구족함이 없기 때문에 혹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간에 어머니의 태에 생을 의탁하여 머무르고 있다가 나중에 태 안에 있으면서 점점 자라나서는 혹 황문(黃門)이 되기도 한다.
가령 태생(胎生)과 난생(卵生)이 두 생으로 생(生)을 의탁하는 도리는 이와 같다.
만약 중생이 습기를 받아 태어나고자 하면 그는 향기를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태어날 곳에 이르게 된다.
이 향기는 혹은 깨끗하기도 하고 혹은 깨끗하지 않기도 하니, 그것은 전생의 업을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화생(化生)이면 처소를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태어날 곳에 이르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이 그러하다면 지옥으로 가는 중생은 어찌 그곳을 좋아해서 태어나는가?
그것은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중생은 찬 바람과 찬 비를 맞이하게 되어 그것이 몸에 닿으면 괴로워하다가 지옥의 불이 맹렬하게 타올라 치성한 모습을 보고는 그것을 사랑하게 되어 따뜻한 감촉을 얻고자 일부러 그곳으로 가서 들어가게 된다.
또 몸에 따뜻한 바람을 받아 빛과 불꽃 동에 구워지면서 너무 아파 참기 어려워하다가 한랭(寒冷)지옥의 서늘한 기운을 보고는 차가운 것이 몸에 닿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어 일부러 그곳으로 가서 들어간다.
태생 (胎生)과 난생(卵生), 이 두 생은 부모가 변이(變異)하는 일에 대하여 자신이 태어날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습생(濕生)과 화생(化生), 이 두 생은 그렇지 않고 적백(赤白)에 의탁하여 몸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변화는 없다.
습생은 다만 향기만을 사랑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제가 태어날 곳에 이르는데 전생 업의 선하고 악함을 따라 좋아하는 향기에 저절로 깨끗하고 더러움이 있을 뿐이다.
화생(化生)은 다만 의지할 처소만을 좋아할 뿐이다. 지옥이 비록 고통을 받는 처소이기는 하나 그러나 죄인은 좋아하고 또한 사랑하는 곳을 얻게 되어 그 가운데에서 생을 받는 것이다.
왜냐 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생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지나간 옛날에 지었던 것이 있으면 이와 같은 것을 느껴 태어나게 되나니, 자신의 이와 같은 자리[位]를 보면 즐겁게 여기는 것이다.
저 중생들도 또한 그러할 것으로 보는데 그런 까닭에 그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 모든 스승들도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만약 어떤 중생이 나이 서른 살이었을 때에 살생의 업을 행하였는데, 중생들을 그물로 잡았다고 하자. 그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동반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업으로 지옥의 생(生)을 감당해야 하지만, 훗날 중음신으로 있을 동안에도 제 자신이 옛날 나이 서른 살이었을 적에 그물로 산 목숨을 잡았을 때와 똑같은 언행과 지위를 보게 되고, 또 옛날의 친구들도 옛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지옥을 볼 때에도 옛날 강호(江湖)에서 본 여러 벗들과 같은 이들이기에 서로 끌어당기면서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를 인연하여 변화를 일으켜 곧 그 안에서 생을 받게 된다.
그러다 나중에서야 옛날에 지었던 업이 비록 많기는 했어도 기필코 이 한 가지 업으로 인해 이끌리어 지옥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혹은 나이 스무 살 때에 이런 업을 지었거나 혹은 서른 살 때에 이런 업을 지었거나 간에 뒷날 중음신으로 있을 동안에는 자신의 붐이 옛날에 업을 지었을 당시 젊고 늙음과 같이
지옥의 중생을 볼 적에도 모두 자기의 나이와 같아서 그 나이가 서로 비슷함을 보게 되므로 이 중생들에 대하여 변화했다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곧 그곳으로 나아가게 되며, 그런 뒤에 이 애욕 때문에 생을 받는 것이다.”
경부(經部)의 논사(論師)들이 이러한 해석을 한 것이다.
또 『유가론(瑜伽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생활에 있어 복이 잃은 사람은 장차 하천한 집안에 태어나게 된다. 그는 죽을 때에나 태 안에 들어갈 때 곧 갖가지 어지럽고 혼란한 소리를 듣게 되고, 또 자신의 망견(妄見)으로 총림 (叢林)ㆍ대나무ㆍ갈대ㆍ노적 (蘆荻) 따위의 속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만약 복이 많은 사람은 장차 존귀한 집안에 태어난다. 그는 그 때 곧 스스로 적정(寂靜)하고 미묘(美妙)하여 마음에 맞는 음성을 듣게 되고, 또 자신의 망견으로 궁전에 오르는 등 마음에 흡족한 모습을 보게 된다.
또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사람이 죽으려 할 때에 삿된 견해의 마음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과거의 착하지 못한 일이 원인이 되고 삿된 견해가 연(緣)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어떤 논사가 말하였다.
‘일체의 착하지 못한 일은 모두가 다 지옥으로 가는 원인이 되지만, 이 착하지 않은 것 외의 일로써 축생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아귀의 세계에 태어나기도 한다.’”
또 전생의 업이 왕성하기 때문에 중생의 세계에 떨어지는데,
그것은 마치 음욕이 왕성한 까닭에 비둘기ㆍ참새ㆍ원앙 따위로 태어나고
성을 내는 것이 왕성하기 때문에 도마뱀ㆍ독사ㆍ전갈 따위로 태어나며,
어리석음이 왕성하기 때문에 돼지ㆍ양ㆍ조개 따위로 태어나고
교만함이 왕성하기 때문에 사자ㆍ호랑이ㆍ이리 따위로 태어나며,
들뜸과 장난이 왕성하기 때문에 원숭이 중에 태어나고
간탐과 질투가 왕성하기 때문에 굶주린 개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만약 그 중에서도 조그마한 선행을 하였거나 다른 복이 있으면 비록 축생 세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미미한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몸과 입의 두 가지 업이 비록 마음이 주(主)가 되기는 하나
저 입으로 지은 업 때문에 과보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남에게 욕설을 하고 경솔하게 행동하되 마치 원숭이처럼 하였으면 곧 원숭이의 세계에 태어나고,
만약 “탐내고 사납기가 마치 까마귀와 같다”고 말했거나
“말하는 것이 마치 개짖는 소리와 같다”고 하거나
“미련하기가 마치 돼지나 양 같다”고 하거나
“소리가 마치 나귀 우는 소리와 같다”고 하거나
“다니는 모습이 마치 낙타와 같다”고 하거나
“스스로 뽐내는 것이 마치 코끼리와 같다”고 하거나
“악하기가 마치 미쳐 날뛰는 소와 같다”고 하거나
“음탕하기가 마치 참새와 같다”고 하거나
“겁 많은 것이 마치 고양이나 살쾡이 같다”고 하거나
“아첨하는 모습이 마치 여우와 같다”고 하면,
이와 같은 모든 악은 구업 (口業)을 따라 과보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삼독(三毒)이 근본이 되기 때문이니, 삼독 중에 애욕을 탐하는 것이 가장 중하다. 그것은 마치 삼베의 한쪽 끝을 잡아당기면 나머지가 다 딸려 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애욕을 끊지 않고 사랑하면 함께 생한다.”
그런 까닭에 네 종류의 중생[四生 : 胎ㆍ卵ㆍ濕ㆍ化)은 다 애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니,
“마치 음욕이 많으면 참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고, 맛을 많이 탐하면 측간 가운데 생을 받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또 애욕 때문에 난생과 태생이 되고 향기와 맛을 탐하기 때문에 습생을 받는 것이니, 그 사랑하는 바를 따르기 때문이다.
또 은중(殷重)한 업을 일으키면 화생(化生)을 받지만 만약 은중한 마음으로 죄업(罪業) 행하기를 좋아하면 죽을 때에 망령되이 지옥을 보고 그 곳에서 화생의 몸을 받으며, 만약 은중하게 복을 받으면 천상 세계에 가서 화생한다.
그러므로『성론(成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나무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그 나무는 오히려 소생하듯이, 탐욕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괴로움의 나무는 늘 존재하게 된다.”
또 『유가론(瑜伽論))』에서 말하였다.
“어떻게 하여 내가 생기는가? 애욕이 간단없이 생기기 때문이다.”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쓸모 없는 논리에 집착한 것이 그 원인이 되어 이미 훈습(薰習)되었기 때문이요, 깨끗하고 깨끗하지 못한 업이 원인이 되어 이미 훈습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지할 본체는 이 두 가지 원인의 우세한 세력 때문에 종자를 따르나니, 곧 이 종자 가운데 이숙(異熟)이 있어서 간단없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죽을 때에는 마치 저울의 두 끝이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결국에는 똑같아지는 것처럼 이 가운데에서 반드시 모든 감각기관을 원만하게 갖추게 된다.
악한 업을 지은 이가 얻게 되는 중유(中有)는 검은 양의 빛깔과 같고 혹은 깜깜한 밤의 빛깔과 같으며,
선한 업을 지은 이는 흰 옷의 빛깔과 같고 맑게 개인 밤의 빛깔과 같다.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였다.
“이 중유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구족하고 있는데, 그것은 금강(金剛) 등도 장애하지 못한다. 수미산(須彌山) 아래의 금강 가운데에 두꺼비[蝦蟆]가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생을 받는 중유는 아주 미세한 물질이라서 금강도 장애하지 못한다.
천안(天眼)을 지닌 사람만이 이 일을 볼 수 있다.”
다시 들었던 일을 들어 증명하면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들었던 말인데, 쇠를 달구어서 뜨겁게 한 뒤에 그것을 깨뜨려 보았더니 거기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수명의 길고 짧은 일이다.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생이 결정되지 않고 다른 곳에 살고 있을 적에는 이 세계 가운데에서 모두 생을 받을 수 있다.
비유하면 마치 소는 여름철에 애욕의 일을 많이 하고 개는 가을철에 많이 하며,
곰은 겨울철에 많이 하고 말은 봄철에 많이 하며,
야간(野干) 등은 어느 때나 애욕의 일[欲事 : 交尾]을 많이 하는 것과 같다.
이 때에 이 중생들은 마땅히 소에게로 가서 태어나야 할 것이나 만약 여름철이 아니면 야간에게로 가서 태어나며,
만약 개의 세계에 태어나야 할 터이나 제 철이 아니면 야간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또 구사론(俱舍)의 소승(小乘) 대사들에게 네 가지 해석이 있는데, 동일하지가 않다.
첫 번째 설(說)에서는 지극히 짧은 시간에 죽고 나면 곧 오음을 받아 태어난다고 한다.
두 번째 설에서는 칠 일 동안만 머무를 수 있고, 이레가 꽉 차고 나면 중유로 있으면서 시절에 아무 제한이 없다고 한다.
세 번째 설에서는 사십구 일 동안 머무를 수 있고 태어날 연(緣)이 미처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죽은 뒤에 다시 받되 또한 시절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네 번째 설에서는 생을 받을 인연을 따르되 나아가 겁(劫)이 지나도록 머물러 있으면서 목숨을 마치지 않는다고 한다.
다섯 번째 설에서는『유가론(瑜伽論)』에 의거하여 말했다.
“만약 아직 태어날 인연을 얻지 못하면 이레가 다하도록 머무르다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되 나아가 칠칠일(七七日 : 四十九日)이 되도록 죽고 남[死生]을 받으며 그 이후는 결정코 태어날 인연을 얻는다.”
이것은 앞의 네 가지 경우와는 다 같지 않다.
네 번째는 신통력의 더디고 빠름에 대해서이다.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였다.
“이 중음(中陰)이 허공을 떠돌아 다니면서 떠나가는 것이 마치 사람이 목숨을 버리는 것처럼 마땅히 한량없는 세계 밖에 이르러서 생을 받아야 할 경우 잠깐 사이에 곧 그곳에 이르게 된다.
이승(二乘)의 신통력으로는 미처 하나의 세계도 벗어나지 못할 시간인데도 중음신은 벌써 한량없이 많은 세계 밖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아무리 부처님의 신통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차단하여 그로 하여금 가서 태어나지 못하게 할 수 없나니,
이렇게 다른 세계에 가서 머물 수 있는 것은 그가 지은 업력(業力) 때문에 이미 가서 태어날 곳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통의 수승함을 논하자면 뛰어난 범부는 이승의 신통조차도 억누를 수 있다.
『바사론(婆沙論)』에서 말하였다.
“신통의 우세하기는 부의 신속한 신통도 억누를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서로 보는 견해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구사론』에 의거하면 이러하다.
“만약 같은 세계에 태어날 중음이면 반드시 서로가 본다고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천안(天眼)을 지니고 있고 가장 청정(淸淨)하다면, 이 사람은 제일가는 세계의 지혜로운 중생이어서 이 사람도 또한 그가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만약 과보로 천안을 얻었다면 볼 수 없나니, 그것은 가장 미세하기 때문이다.”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 말하였다.
“만약 똑같이 인간 세계 가운데에서 생을 받을 사람은 인간 세계의 중음(中陰)과 똑같으므로 서로가 볼 수 있으나, 이런 이치는 결정된 것이어서 그 밖의 다른 세계의 중음은 볼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수행하여 천안통(天眼通)을 증득했으면 이 천안통은 곧 도류(道類)로서 중음의 빛깔을 볼 수 있지만
만약 과보로 증득한 천안통이면 중음의 빛깔을 볼 수 없나니, 그 중음의 빛깔이 다른 빛깔보다 미세하기 때문이다.”
정량부(正量部)에 의하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 세계의 중음은 다섯 갈래 세계에 있는 중음의 빛깔을 다 볼 수 있지만
인간 세계의 중음은 네 세계는 볼 수 있으나 하늘 세계의 중음만은 볼 수 없나니, 그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례로 바로 앞의 세계까지는 볼 수 없으며, 나아가 지옥 세계의 중음에 이르면 앞의 네 갈래 세계의 중음은 볼 수 있는 대상에서 제외되나니, 그것은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지옥의 중음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여섯 번째는 몸의 양(量)이 크고 작음이다.
『구사론』에서 말하였다.
“몸의 크기가 예닐곱 살 되는 어린아이만 하고 아는 지식이나 총명하고 영리하기도 그 정도이다. 보살이 중음신으로 있으면 조금 병든 사람에게 크고 작은 모습이 모두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비록 중음신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막 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서 일만 구지(俱胝) 염부주(剡浮洲)를 두루 비출 수 있다.”